법/순수법학

켈젠 순수법학 강독[17(完)] - 부록 2(자연법론)

斧針 2025. 12. 19. 19:54

한스 켈젠(변종필/최희수 역), 《순수법학》, 길안사, 1999 
Hans Kelsen, Reine Rechtslehre (1963)

<차 례>

[01] - 법과 자연 上

[02] - 법과 자연 下(사회질서, 법질서)

[03] - 법과 도덕

[04] - 법과 과학 上

[05] - 법과 과학 下

[06] - 법정태학 上(제재, 의무, 책임, 권리)

[07] - 법정태학 中(행위능력과 권리능력)

[08] - 법정태학 下(법률관계, 권리주체)

[09] - 법동태학 上 (근본규범)

[10] - 법동태학 中(법질서의 단계구조 1: 위계질서)

[11] - 법동태학 下(법질서의 단계구조 2: 규범충돌)

[12] - 법과 국가 上(공법-사법 이원론 비판)

[13] - 법과 국가 下(국가-법 이원론 비판)

[14] - 국가와 국제법

[15] - 해석

[16] - 부록 1(정의의 규범들)

[17] - 부록 2(자연법론)


1. 관념주의적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

정의는 인간행위를 평가하고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규범인 반면, 법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실제로 정립된 규범질서다. 정의가치는 정의규범이라는 척도를 통해 어떤 행위가 정당한지 부당한지를 평가하면서 생기는 반면, 법가치는 실정법질서 내부에서 규범이 효력을 가짐으로써 형성된다. 정의와 법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가능한바, 하나는 i) 정의규범에 합치하는 경우에만 실정법이 효력을 가진다는 관념주의적 법이론, 곧 자연법론이고, 다른 하나는 ii) 실정법의 효력은 정의규범과 무관하다는 법실증주의이다.

「일방의 견해에 의하면, 실정법은 그 정립이 정의의 요청에 합치되는 경우에만 또 그런 한에서만 효력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효력 있는 법은 정의로운 법이다. … 타방의 견해에 의하면, 실정법의 효력은 정의규범의 효력과는 무관하다. 실정법은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에 … 효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부정의한 경우에도 효력을 가지며, 그 효력은 정의규범의 효력과는 무관하다. 이것은 법실증주의의 견해이며, 관념주의적 법이론과 대립되는 실증주의적 또는 현실주의적 법이론의 귀결이다.」(588쪽)

자연법에 합치되는 실정법만이 효력 있는 법으로 인정된다는 말은 곧, 실제로 효력을 갖는 것은 실정법이 아니라 자연법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말해 자연법론은 실정법을 정의규범으로 재판하여 실정법의 효력을 자연법의 효력에 흡수시키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절대적 정의가치를 형성하는 자연법에 합치되는 실정법만을 효력 있는 것으로 보는 자연법론의 관점에서 실정법을 정당하거나 부당한 것으로 보는 판단이 행해진다. 우리가 이 점을 인정하면, 자연법에 반하는 실정법규범은 효력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고, 자연법에 합치되는 실정법규범만이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실정법규범이 자연법에 합치되는 경우에만 효력을 갖는다면, 실정법규범 내에서 효력을 갖는 것은 자연법뿐이다. 이것은 사실상 실정법 외에, 아니 실정법을 넘어 자연법의 효력을 주장하고 실정법의 효력근거를 자연법에서 찾는 자연법론의 결론이다. 하지만 이 이론에 따르면 사실상 자연법만이 효력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고, 실정법 그 자체는 효력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530쪽)

반대로 법실증주의에서는, 어떤 규범이 정의롭게 정립되었는지와 무관하게 그 규범은 실정법 체계 안에서 효력을 가질 수 있고 법가치를 형성할 수 있다. 법규범이 어떠한 정의규범에 반하는 정립행위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폐지가능성을 논할 사유는 될 수 있어도 곧바로 그 법규범의 효력을 문제삼을 사유는 될 수 없다. 반대로 정의규범과의 합치가 확인되더라도, 그 합치가 실정법규범의 효력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정법의 효력이 정의규범과의 관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데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530쪽)

그리하여 법실증주의에서는, 일상적으로 흔히 쓰는 정당한 법’, ‘부당한 법이라는 말이 실제로 겨냥하는 대상은 규범 자체가 아니라 그 규범을 정립한 행위라고 분석한다. 이들은 입법행위판결행위에 대한 평가적 언어라고 보는 것이다. 정의규범은 어떤 내용의 규범을 정립해야 한다는 요구를 담고 있으며, 그 요구에 부합하는 정립행위는 정당하다고 평가된다. 반대로 그 요구에 반하는 정립행위는 부당하다고 평가된다. 여기서 평가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정립행위의 정의가치이며, 그 행위의 의미로서 성립한 실정법규범의 법적 효력은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정의규범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일정한 행위를 규정한다. 그 행위는 규범정립을 그 본질로 할 수 있다. … 정의규범이 규정하는 행위, 즉 정의규범의 대상은 규범정립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는 정의규범에 합치되거나 모순될 수 있다. … 정의 또는 부정의의 본질은 정립행위(Setzungsakt)가 갖는 합치성이거나 모순성이기 때문에, 실정법규범을 정립하는 이러한 행위는 실정법규범을 정립하는 인간의 행위이며, 따라서 정의규범의 판단대상이 되며 정의규범의 척도에 따라 정당한 또는 부당한 것으로 평가됨으로써 적극적 또는 소극적 정의가치를 갖는 존재사실이다. 하지만 규범정립행위의 이러한 정의가치는 실정법규범이 형성하는 법가치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법실증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러한 규범이 적극적인 법가치를 형성하는 것은 그것이 적극적인 정의가치를 갖는 행위에 의해 정립되었기 때문이 아니며, 그것이 소극적인 정의가치를 갖는 행위에 의해 정립된 경우에도 적극적 법가치를 형성한다. 실정법규범의 정립이 정의규범에 합치된다면, 실정법규범에 의해 형성된 법가치는 정의규범에 의해 형성된 법가치와 일치한다. 이 경우에 우리는 실정법규범이 정당하다고 말한다. 실정법규범의 정립이 정의규범과 모순된다면, 정의가치와 법가치는 분리된다. 이 경우에 우리는 실정법규범이 부당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정법규범―이것의 효력은 그것의 정의 또는 부정의와는 무관하다―의 속성으로 언급되는 정의와 부정의는 그 규범의 속성이 아니라 그 규범을 정립하는 행위의 속성이다.」(531쪽)

 

 

2. 존재-당위 이원론에 기초한 자연법론 비판

자연법론은 실정법 외에 자연이나 인간의 본성에서 연역되는 불가변적 규범을 인정한다. 그러나 자연은 인과법칙이 지배하는 사실의 세계이며, 자연으로부터 규범을 도출하려는 시도는 존재로부터 당위를 끌어내려는 논리적 오류에 불과하다. 자연에 가치가 내재해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을 일반적으로 사실적 생기라는 경험적 현실 또는 개별적 본성으로 이해하면, 자연에서 규범을 연역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은 근본적인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연은 인과법칙에 따라 서로 원인과 결과로서 결합되어 있는 ‘사실’들의 총체, 즉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재로부터는 당위가, 사실로부터는 규범이 나올 수 없다. 존재에 당위가, 사실에 규범이, 경험적 현실에 가치가 내재되어 있을 수는 없다.」(591-592쪽)

◎ 본성이론

그 환상은 특히 인간의 본성에 기초해 자연법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본성은 성향, 충동, 이성, 감정 등으로 설명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리적·사실적 속성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적 속성으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지를 도출함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연법론이 이른바 자연으로부터 연역된 정당한 행위규범들을 사실상 전제한 뒤 이러한 규범들을 자연에 투영한다는 점은 인간의 본성에 터잡아 자연법을 근거지우려는 시도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597쪽)
「정당한 행위규범을 인간의 본성에서 연역해내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먼저 자연법론 일반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주된 반론, 즉 존재로부터는 당위가, 사실로부터는 규범이 나올 수 없다는 반론이 그대로 제기된다.」(598쪽)

가령 충동이 인간의 본성, 즉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충동에 따라 행위하라는 규범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인간 자체가 이미 사실상 충동적으로 행위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규범은 일단 쓸모가 없을뿐더러, 여러 충동들이 충돌하는 경우(여러 사람들의 각 충동이 서로 대립하거나, 개인 내부에서 서로 다른 충동들이 갈등하는 경우)에 대해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작 정의의 과제는 그처럼 다양한 충동들 간의 충돌을 해결하는 규범을 모색하는 데 있다.

「인간에게서 관찰된 충동이 인간의 ‘본성’ 즉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정하고 그러한 충동의 존재로부터 인간이 그러한 충동에 의해 규정되어 행위하는 방식대로 행위해야 한다는 규범을 추론한다면, 그러한 규범은 무엇보다 완전히 쓸모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실상 자신의 충동에 의해 규정되는 대로 행위하기 때문이다. … 유념해야 할 것은 인간의 충동은 서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사실 개별적 인간 자체 내에서는 물론 인간간의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개별 인간의 행위는 매우 빈번하게 서로 모순되는 충동들 중 보다 더 강력한 충동의 산물로 나타나며, 인간 사이에서도 일방 인간의 충동의 만족은 타방 인간의 충동의 만족과 조화되기 어렵다.」(599쪽)
「정의의 문제는 그러한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충동으로부터는, 비록 어떤 규범이 도출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충돌의 해결을 규정하는 규범은 도출될 수 없다.」(600쪽)

가령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기보존충동을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하고, 그로부터 생명보존의 의무를 도출했다. 그러나 인간이 언제나 생명을 보존하려는 충동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자살자들의 사례가 보여주듯 자기파괴충동 역시 경험적 현실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자기보존충동은 타인의 생명 보존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타인의 생명과 충돌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처럼 상반된 충동이 모두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한, 어느 하나만을 근거로 규범을 도출하는 것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사실상 모든 상황에서 언제나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충동을 가지는 것은 아니며 일정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마감하려는 충동도 갖고 있다. … 이것은 우리가 ‘자연적인’ 자기보존충동이라는 사실로부터는―마찬가지로 현존하는 ‘자연적인’ 자기파괴충동으로 인해―그 자신의 생명에 대한 인간의 행위와 관련하여 결코 일의적인 자연법규범을 도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599-600쪽)

이타적 충동에 기초한 자연법론 역시 동일한 난점에 직면한다. 이웃사랑이나 평화의 충동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공격충동 역시 인간의 본성적 요소로 존재한다. 만약 사실적 존재를 근거로 규범을 도출한다면, 이웃사랑의 명령뿐 아니라 공격의 명령도 동시에 도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반된 규범이 동시에 효력을 가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타적 충동에 기초한 자연법론은, 이미 선한 충동과 악한 충동을 구분하는 별도의 규범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이웃사랑의 충동으로부터 이웃사랑의 명령을 … 도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본능적인 공격충동으로부터 이러한 충동에 합치되게 행위하라는 명령이 도출됨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추론을 이끌어 내려는 자연법론이 있는가?」(601쪽)
「자연법(즉 정당한 법)을 인간의 본성에서 연역하려는 이론은 이러한 ‘본성’을 모든 가능한 인간의 충동 속에서가 아니라 단지 일정한 충동 속에서만 통찰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그 이론은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충동들을 본질적으로 구분해야 하고 또 사실상 구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그 이론은 규범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충동―이 경우 규범은 그러한 충동에 합치되는 행위를 명한다―과 규범의 근거가 될 수 없는 충동, 다시 말해 우리가 따라야 할 충동과 따르지 말아야 할 충동, 즉 선한 충동과 악한 충동을 사실상 구분한다.」(601쪽)
「선한 충동과 악한 충동의 구분, 존재가 자신의 충동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과 실현해야 하는 목적의 구분은 충동 자체에서 발견될 수 없고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 즉 일정한 충동에는 합치해야 하고 다른 충동에는 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하는 규범들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은 단지 어느 정도의 비판적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602쪽)

이를테면 자기보존충동은 자연적 충동으로, 자기파괴본능은 비자연적 충동으로 구분하고, 자연적 충동만을 규범의 근거로 삼는 태도는, 이미 일정한 이상적 규범을 전제하고 있다. 현실적 본성을 이상적 본성으로 대체함은, 자연으로부터 법을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전제된 법으로부터 이상화된 자연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자연법론은 과학적 법이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구성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법론이 자연으로부터 이상적 법규범인 이른바 자연법규범을 연역해내고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자연법론은 그에 의해 전제된 법 … 으로부터 이상적 자연을 연역해내고 있는 것이다.」(603쪽)

자연법론은 이러한 비판을 회피하기 위해 정상적 인간행위라는 개념을 고안해낸다. 인간의 본성이란 정상적 인간의 본성을 뜻하며, ‘자연적행위란 정상적인행위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행위의 정상성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관습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적 평균으로부터 규범을 도출하려면, ‘다수가 행하는 대로 행위해야 한다는 규범을 다시 전제해야 한다. 앞서도 언급했듯 관습대로 행위하라는 수많은 상대적 정의규범 중 하나일 뿐 결코 자연법이 될 수 없다.

「인간행위의 그러한 규칙성 … 으로부터는 당위규칙인 규범이 도출될 수 없으며, 존재적 의미에서 ‘정상적’인 것이 당위적 의미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 존재적 의미에서 정상적인 것으로부터 당위적 의미에서 정상적인 것을 추론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일정한 집단 내에서 그 집단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규칙적으로 행위해 온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규범을 전제로 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앞에서 분석한 바 있는 수많은 상대적인 정의규범 중의 하나일 뿐이다.」(604쪽)

◎ 합리주의적 자연법론

한편, 인간의 이성에서 인간의 본성을 인식하고, 그 이성으로부터 정당한 법규범을 도출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이른바 합리주의적 자연법론이라 불리는 이러한 조류는, 정당한 규범은 이성에 내재하며 이성이 마치 입법자처럼 규범정립적 권위로 기능한다는 구상을 제시한다. 자연법은 곧 이성법이라는 것이다.

「자연법론 내에서 한 유명한 조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통상 ‘합리주의적 자연법론’이라 불리는 자연법론이다. 이 이론의 주장자들은 인간의 이성에서 인간의 본성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이성으로부터 정당한 법규범들을 이끌어내려고 시도한다. 이들은 정당한 법규범들이 이성에 내재되어 있다거나, 같은 말이지만, 이성이 규범정립적 권위인 입법자로서 정당한(정의로운) 행위를 규정한다고 본다. 이러한 자연법은 이성법(Vernunftrecht)으로 나타난다. 정당한 것은 자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605쪽)

그러나 이성의 기능을 인식으로 한정하는 경험심리학의 관점에서는, 이성에서 규범을 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규범정립은 인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은 주어진 대상에 대한 인식의 기능인 반면, 규범정립은 존재해야 할 것을 요구하는 행위로서 의욕의 기능이다.

「경험심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성의 특수한 기능은 그에게 주어져 있거나 부과되어 있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인식기능을 이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규범정립, 즉 입법은 인식기능이 아니다. 규범의 정립을 통해 이미 주어져 있는 대상이 존재하는 그대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며 존재해야 하는 무언가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규범정립은 의욕의 기능이지, 인식의 기능이 아니다.」(605쪽)

따라서 합리주의적 자연법론이 말하는 규범정립적 이성’, 즉 인식과 의욕이라는 전혀 다른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이성이란, 사실적으로 기능하는 인간의 경험적 이성이 아니라 실천이성’, 다시 말해 올바른 이성이자 존재해야 하는 이성’, ‘규범적으로 선별된 이성일 수밖에 없다. 이는 초월적 권위를 끌어들이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신학적 개념이다. 합리주의를 표방한다지만 실제로는 형이상학인 것이다.

「좀 더 자세히 통찰해 보면, 자연법의 연역토대가 되는 이성은 사실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인간의 경험적 이성이 아니라 특별한 이성, ‘올바른’ 이성이다. 즉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이성이 아니라 존재해야 하는 이성이다. 이미 키케로는 자연법을 ‘정당한 이성’(recta ratio)의 산물이라고 규정했다. 이 경우 그는 선을 지향하는 정당한 이성과 악을 지향하는 정당하지 못한 이성을 매우 분명하게 구분한다. ‘태어나면서 이성을 선물로 받은 피조물은 정당한 이성도 받았고, 이로써 법도 선물로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법을 ‘본성에 부합되는 정당한 이성’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그는 신을 이러한 영원하고 불가변적인 법의 창시자로 보기 때문에 그러한 본성을 신과 동일시한다. 사실상, 절대적으로 효력 있는 정의규범들은 신의 이성에만 내재할 수 있으며, 오직 신의 이성에 관해서만 우리는 이성이 인식기능임과 동시에 의사기능이라는 모순적인 언급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모순을 배제하는 논리원칙이 신의 속성과 관련된 언급에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이성만이 ‘실천’이성, 즉 입법적 인식이 될 수 있고, 오직 신에 대해서만 우리는 인식과 의욕이 동일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가령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변이성과 실천이성을 구분하면서, 전자의 기능을 개념설정·명제화·논증으로, 후자의 기능을 명령·입법·규범정립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성이 명령한다는 진술을 가능하게 만들려면 일단 의지의 요소를 이성 개념 속으로 밀어 넣는 조작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실천이성이 규칙과 기준을 스스로만들지 못하며, 신에 의해 이성에 주어진 원칙이 기준이라고 말함으로써(인간의 이성은 사물을 판단하는 고유한 기준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본성적으로 부여된 원리가 바로 그 기준이다. 즉 이것이 보편적인 것들을 규율하며 인간의 행위에 의해 실현될 모든 것을 평가하는 기준인 것이다.), 실천이성의 규범정립적 성격을 신적 근거에 의존시키려 한다. 그 결과 인간 이성의 입법은 독자적 합리주의가 아니라, 신의 입법이 인간에게 위임된 형태가 된다.

합리주의적 자연법론이 정말 합리주의이려면, 자연법에 대한 인식이 인간의 경험적 이성에 대한 자기인식이어야 한다. 아퀴나스처럼 합리성을 신의 존재와 신의 인식에 뿌리박게 할 경우에 나타나는 합리성은 경험적 이성의 관점에서는 비합리성이다. 실천이성은 철저히 세속적·과학적 개념이라기보다, 인간이 신의 능력을 공유한다는 신학적 상상력과 연결된다. 여기서는 인식이 곧 의욕이 되는 신적 이성이 모형이 되며, 인간 이성은 그 모형을 모방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자연법론이 그 정당한 규범들을 도출하는 데 토대가 된다고 믿고 있는 이성이 인간 속에 깃든 신의 이성이고 인간의 경험적 이성이 아니라면, 그러한 이론은 합리주의적이라 불릴 수 없다. 그 자연법론은 이러한―인간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지만 이성 속에 주어진―규범들을 인간의 이성을 분석함으로써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성이 인간의 경험적 이성이라면, 자연법에 대한 인식은 인간에 대한 자기인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만 그 이론은 합리주의적 성격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좇는 자연법론은, 물론 신에 의해 창조되지는 않았지만 신의 본체 속에 깃들어 있고 신의 이성에 내재해 있는 자연법이 그 이론에 의해 ‘신의 자기인식’―이로써 이 이론은 엄격한 형이상학적 입장을 취한다―이라 지칭되는 절차에 따라 인식된다고 주장할 경우에만 논리일관된다.」(609-610쪽)
「이것은―경험적 이성의 관점에서 본다면―극히 비합리적인 합리성이다.」(610쪽)

실천이성 개념이 집요하게 유지되는 것은 윤리적 사변이 지니는 객관성의 욕구때문이다. 도덕규범과 정의규범이 인간의 의지에서 나오지 않고, 이성에서 자연법칙처럼 발견되는 것이라면, 도덕법칙은 물리법칙·수학법칙과 유사한 필연성을 획득한다. 이로써 정의규범을 다툼의 여지가 없는 객관적 명제로 제시할 수 있다.

「윤리적 사변이 논리적으로 지지될 수 없는 실천이성개념을 그렇게 집요하게 붙잡고 있다는 사실은 종교적・신학적 관념이 그러한 사변에 미친 영향력에 기인해서만 해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천이성개념은 이러한 사변의 근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킨다. 도덕가치 및 특히 정의가치를 형성하는 규범들이 이성에서 비롯되고 그 이성과는 구분되는 인간능력인 인간의 의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면, … 물리법칙 또는 수학법칙과 도덕법칙 사이에 구분은 존재하지 않게 되며, 그렇다면 인간이 이성을 통해 발견한 것이라며 내세우는 정의규범에 대해서도, 정의규범이란 열은 금속을 팽창시킨다는 명제 또는 2×2=4라는 명제와 같이 다툼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610-611쪽)

그러나 이는 규범정립이 본질적으로 의지적 행위라는 사실을 은폐할 뿐이다. 객관성을 얻기 위해 자의성을 지워 버리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종교적·신학적 전제를 다시 유입시킬 수밖에 없다.

◎ 가변적 자연법론

자연법론이 보편적·불변적 자연법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오래된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한 것이 이른바 가변적 자연법론이다. 이는 사회가 변하면 인간의 행위양식도 변하고, 그에 따라 정당한 규범도 변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자연법론이 지금까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상황에서 효력을 갖는 보편적인 정당한 행위규범을 공식화하지 못했다는, 즉 불가변적인 자연법을 확정하지 못했다는 거부할 수 없는 반론은 가변적인 자연법론을 초래한 계기가 되었다. … 변화하는 정치적・경제적 상황 속에서 그러한 상황에 대한 반응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 역시 변할 수 있다는 의미로, 그리하여 불가변적인 인간본성은 없으며 아울러 그러한 본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불가변적인 자연법도 존재하지 않고 단지 상이한 시대, 상이한 장소, 상이한 사회 내에서 서로 다른 가변적인 자연법만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가변적 자연법론의 근본관점이다.」(625쪽)

그러나 불변의 사실에서 규범이 도출되지 않듯, 가변의 사실에서도 규범은 도출되지 않는다. 존재규칙이 아무리 정교하게 관찰되더라도, 그것이 곧 당위규칙으로 전환되는 논리적 도약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먼저 불가변적인 자연법론에 대해 제기되었던 것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즉 불가변적인 인간본성으로부터, 즉 사실로부터는 규범이 도출될 수 없듯이 가변적인 본성으로부터도 규범이 도출될 수 없다는 점, 인간의 사회적 행위의 가변적인 존재규칙은 불가변적인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당위규칙으로 바뀔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625쪽)

나아가 근본적으로, 가변성을 채택하는 순간 그것은 애초에 자연법론이라고 할 수조차 없다. 불변의 절대적 기준이 없다면 각기 다른 상대적 가치들이 경쟁하는 상태가 남게 되는데, 이것은 상대주의적 실증주의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불가변적인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본성으로부터는 어떤 불가변적인 정당한 행위규범도 도출될 수 없다면, 실정법형성을 위한 확고한 절대적인 평가기준으로 봉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자연법일 수는 없고 아마 서로 모순되는 상이한 자연법들, 즉 상대적 가치만을 형성하는 정의규범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상대주의적 실증주의(ralativistischer Positivismus)의 관점이다. 불가변적인 자연법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가변적인 자연법만이 존재한다는 이론은, 그 이론의 시도와는 달리, 이 상대주의적 실증주의와 대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절대적 정의의 이념을 포기함과 동시에 스스로 자연법론이기를 포기함으로써 그러한 상대주의의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625-626쪽)

가변적 자연법론의 변형태로서, 가변적 자연법을 불변의 자연법 아래에 배치하는 견해가 있다. 이는 인간본성에 불변적 측면과 가변적 측면이 있다고 나누고, 불변적 측면에서 일반적·보편적 자연법을, 가변적 측면에서 지금 여기서의 사물분석을 통해 나오는구체적 자연법을 도출하려는 이원론적 시도이다.

「우쯔(Artur F. Utz)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그의 해석에서 ‘일반적인 인간본성, 즉 인간의 특별한 본질’과 ‘구체적인’ 인간본성을 구분한다. 전자는 불가변적인 것으로서 이것에 바탕하여 ‘보편적 의미로 이해된 자연법’, 즉 자연법 ‘그 자체’인 불가변적인 자연법이 세워진다. 그리고 후자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즉 변화하는 정치적・경제적 상황과 더불어 변하는 것으로서 구체적 의미의 자연법의 바탕이 되는 인간본성이다. 구체적 의미의 자연법이란 ‘구체적인 사물상태’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법, ‘지금 여기서 사물분석을 통해 나오는’ 법이라고 한다.」(626-627쪽)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 또한 실천적으로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구체적 사태분석에서 나오는 결론은 개별적 결정이 될 가능성이 크고, 그것은 일반적 규범의 형태를 갖기 어렵다. 그런데 법적 결정의 정당화는 개별규범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개별규범은 언제나 일반적 규범을 전제하거나 그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만약 구체적 자연법이 실정법규범도 아니고 일반적 자연법규범도 아니라면, 그것은 결국 또 다른 일반적 정의규범의 이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자연법이 결국 구체적 사례들에 대한 결정에 적용될 수밖에 없는 한, 그러한 법은 불가피하게 일반적 규범의 형태로 형성되어야 하는 불가변적인 자연법과 전혀 조화될 수 없다. 구체적 사례는 개별적 규범과 함께 결정기관이 적용하는 일반적 규범을 그 사례에 끌어옴으로써만 정당하게 결정될 수 있다. 구체적 자연법은 실정법규범이어서는 안되며, 자유로운 법발견의 체계 안에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또 다른 종류의 일반적 규범, 즉 일반적 정의규범일 수밖에 없다.」

지금 여기서의 사물분석을 통해 나오는구체적 자연법이란 단지 자유재량적 결단을 정당화하는 수사로 전락할 뿐이다. 각 사례마다 다른 정의규범을 동원할 수 있다면, 자연법은 일반규범으로서의 통일성을 잃고 사례결정의 집합으로 분해된다. 그러나 자연법론이 일반적 규범을 지향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는 애초에 자연법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오로지 구체적 사태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비롯되는 법이란 있을 수 있는 모든 차등을 고려하도록 요구하며, 이로써 실정법의 영역에서 어떠한 일반적 실정법 규범에 의해서도 제한받지 않는 자유로운 법발견을 가져오는 정의규범에 합치되는 법일 것이다. 그러한 자연법은 사실상 가변적이다. 그것은 수시로 변하며, 구체적 사례들에 대한 결정을 통해 형성된 개별적 법규범의 형태로만 나타난다. 자연법이 결국 구체적 사례들에 대한 결정에 적용될 수밖에 없는 한, 그러한 법은 불가피하게 일반적 규범의 형태로 형성되어야 하는 불가변적인 자연법과 전혀 조화될 수 없다.」(627-628쪽)

그러한 결과를 피하려면 개별적/구체적 자연법이 불가변적 자연법에 뿌리박고 있다고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 이원론은 결국 불변적 규범이 시대에 따라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말과 하등의 차이가 없게 된다. 전통적인 불가번적 자연법론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 결  어

요컨대, 자연에서 정의규범을 발견하거나 연역해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러한 시도는 형이상학적신학적 방법론으로 기울거나, 자연법론자가 이미 선택해 둔 정의규범을 자연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자연법론자들이 제시해온 결론들이 제각각이었던 것은 애당초 서로 다른 규범을 전제한 채 출발했기 때문이다. 서로 양립불가능한 정의규범들이 다수 존재하는바, 이 중 무엇을 전제로 삼는지에 따라 자연적 질서도 달리 해석된다. 자연법론은 정의에 관한 과학적 증명이 아닌, 각기 다른 정의규범을 미리 받아들인 뒤 그 선택을 정당화하는 논법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자연법론은 당대의 거대한 정치·경제적 대립에 대해 실질적 판정력을 전혀 갖지 못했다. 민주주의와 전제주의 간, 자유경제와 계획경제 간에는 정의의 핵심내용이 무엇인지에 관한 정면충돌이 발생하는바, 그 사이에서 자연법론이 무언가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각각의 정의규범을 달리 전제하는 한 서로 반대의 체제도 자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정의의 핵심으로 전제하면 민주주의와 사유재산을 자연적인 것으로 옹호하는 결론이 나오고, 경제적 안정과 필요 충족을 정의의 핵심으로 전제하면 계획경제와 전제적 방법이 자연법으로서 정당화하는 결론이 나온다. 자연법론은 모든 것을 말하며, 이로써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정의규범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이하고 대립되는 매우 많은 정의규범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아가 정의규범 또는 정의규범들은 … 자연에 내재해 있거나 또는 그 속에서 발견되거나 연역되는 것이 아니고 자연법론자에 의해 전제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법론은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정의규범에 따라 매우 상이하고 서로 모순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연법론의 역사가 증명해 주는 사실이자 자연법론에 대해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던 사실이다. 따라서 자연법론이 우리 시대의 중요한 두 가지 정의문제, 즉 민주주의냐 아니면 전제주의냐 하는 물음과 자유경제(자본주의)냐 아니면 계획경제(사회주의)냐 하는 물음에 대해 무력할 수밖에 없음은 이해가 된다. (자기결정으로서의) 자유의 정의규범을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우리가 그렇게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믿는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와 개인의 재산을 보장하는 자유경제체제를 자연적인, 이로써 정당한 사회질서라고 설명할 것이다. 만인의 경제적 필요의 충족과 그들의 경제적 안정을 요구하는 정의규범을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우리가 그렇게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믿는다면, 비록 생산수단의 집단소유를 확정하는 계획경제의 방법에 의해서만 또 전제적인 방법으로만 그러한 상태가 달성된다 하더라도, 혹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는 사회질서만을 자연적인, 즉 정당한 것으로 옹호할 것이다. 실제로 로크는 민주주의를, 필머는 전제주의를, 컴버랜드는 사적 소유를, 모렐리는 집단소유를 이 자연에서 이끌어내었다. 자연법론의 방법을 통해 우리는 정의의 문제와 관련하여 모든 것을 입증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로써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했다.」(625쪽)

 

3. 자연법론의 참된 기능

가령 덴트리브(Alexander Passerin d'Entreves) 같은 사람들은 그럼에도 자연법론은 좋은 일을 했다라는 실용주의적 차원의 옹호론을 펼친 바 있다. 자연법론이 역사적으로 실정법을 개혁하는 데 기여했으니 이론으로서 틀려도 가치가 있다는 주장, 또는 원칙이 아니라 기능이 중요하다는 주장(자연법이 개선의 동력이었다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논리적으로 자연법론이 가장 경계하는 상대주의를 이미 전제하는 방법론이다. ‘개선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어떤 정의규범을 기준으로 더 낫다고 판정하는 가치판단을 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법론은 정의규범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며, 실제 역사적으로도 다수의 자연법이 제시돼왔다. 그렇다면 문제의 변화는 어떤 자연법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개선이 아니라 개악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자연법론 … 이 사실상으로 유익한―실정법형성에 개혁적인―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다시 말해 자연법론이 실정법의 개선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유로 그 이론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 ‘개선’의 본질은 자연법론의 영향 아래에서 개정된 법이 다소간 부정의한 법으로부터 다소간 정당한 법으로 바뀌었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에는, 어떠한 정의규범 즉 실정법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자연법론이 합치되기를 요청하는 정의규범을 전제하고 있는 가치판단이 들어 있다. 매우 다양하고 서로 모순되는 자연법론이 존재한다는 점,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가치판단은 극히 상대적인 성격만을 지닐 뿐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일정한 자연법론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진 실정법변경은 다른 자연법이론의 정의규범의 관점에서 볼 때 필연적으로 개선을 의미할 수는 없고 아마 개악을 의미할 수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630쪽)

물론 자연법론이 실정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의 문제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선/개악의 평가일 수는 없다. 과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오로지, 자연법담론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왔는가에 있다. ‘자연법론이 실정법을 바꿔 왔는지, 아니면 오히려 기존 질서를 정당화하며 유지해 왔는지가 바로 그것이다.

「다양한 자연법체계가 형성하는 정의가치의 상대성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자연법론’이나 ‘자연법’이 실정법형성에 미친 영향력의 ‘유익’ 또는 ‘불리’에 관해 말할 수 없고, 다만 모든 가치판단을 배제할 경우에만 상이한 자연법론의 사실적 기능이 현행 실정법을―어떠한 정의이상에 맞춰―개정하는 데 있는지 아니면 거꾸로 그 각각의 형태대로―어떠한 정의이상에 합치되는 것으로서―유지하는 데 있는지 여부, 즉 그 기능이 동적인, 즉 (가치중립적 의미에서) 개혁적인 혹은 혁명적인 성격을 갖는지 아니면 정적인, 보수적인 성격을 갖는지 여부를 탐구할 수 있다.」(630-631쪽)

그 답은 간단하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자연법론은 기존의 법질서와 정치·경제 제도를 비판하기보다는 정당화하는 역할, 즉 보수적인 기능을 수행해 왔다. 구체적인 단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i) 자연법론은 논리적으로는 실정법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거의 모든 자연법론자들이 오히려 실정법의 필요성을 강하게 강조해 왔다. 만약 자연법이 자연에 내재된, 이성으로 연역 가능한 정당한 행위질서라면,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드는 실정법은 원칙적으로 불필요하거나 위험한 것이어야 한다. 실정법은 자연법에서 벗어날 위험을 항상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실정법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러나 실제 자연법론자들은 이런 결론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실정법이 필수적이며 불가피하다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자연법을 강하게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인간 사회에는 강제와 형벌을 수반하는 실정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항상 이성적이고 선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과 훈계만으로는 악한 행위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강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연에 내재되어 있고 자연으로부터 연역가능한 인간의 정당한 행위질서로서의 자연법의 이념으로부터는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창조된 법인 실정법은 완전히 쓸모없다는 결론, 그리고 실정법에는 정당한 자연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험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법을 만들려는 그러한 시도는 단지 파멸을 초래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특징적인 것은 우리가 고찰대상으로 삼았던 자연법론자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고 오히려 그들 모두가 아주 강력하게 실정법의 무조건적인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631-632쪽)

다시 말해 자연법론자들은 자연법의 이름으로 실정법을 평가한다고 말하지만, 최소한 실정법의 존재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는다. 오히려 실정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자연법으로부터 다시 정당화한다. 여기서부터 벌써 자연법은 실정법을 위협하는 기준이 아니라, 실정법을 떠받치는 이념이 된다. 출발단계에서부터 이미 실정법의 권위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ii) 자연법론은 대개 자연법에 합치되지 않는 실정법은 무효이며, 따라서 그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 실정법의 효력은 자연법에 종속된다)’, 자못 급진적인 테제를 내세운다. 그러나 실제로 자연법론자들은 이 테제를 온전히 유지하기보다는, 그 급진성을 체계적으로 무력화해 왔다.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의 충돌이 사실상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거나, 설령 이론적으로 가능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다양한 논거를 동원한다. 즉 자연법에 반하는 실정법은 무효라는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상황이 실제로는 거의 없다고 주장하는 방식이다.

「실정법은 자연법과 일치되는 경우에만 효력을 가지며 또 그런 경우에만 그 준수를 요청할 수 있다는 이념으로부터, 자연법에 합치되지 않는 실정법은 무효이며, 이로써 그 실정법에는 어느 누구도 복종할 책임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테제는 물론 대부분의 자연법론자에 의해 원칙적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동시에 자연법과 실정법간의 충돌을 전혀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또는 매우 어렵게 만듦으로써 그러한 경우에도 실정법의 효력을 보장할 목적에서 여러 가지 논거들이 제시되고 있다.」(632쪽)

가장 대표적인 전략은 실정법을 자연법에 의해 위임된 질서로 설명하는 것이다. 실정법은 자연법과 대립하는 인위적 산물이 아니라, 자연법이 허용하거나 요구한 질서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되면 실정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규범 자체가 자연법으로부터 연역된다. 결과적으로 실정법은 자연법과 대체로 일치하며, 양자 간의 충돌은 원칙적으로 배제되거나 최소화된다. 여기서 자연법에 반하는 실정법은 무효라는 명제는 원론적으로나 남을 뿐, 실천적으로 모든 효력 있는 실정법은 자연법에 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자연법은 실정법에 저항하는 기준이 아니라, 실정법에 대한 복종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이념이 된다.

「우리가 실정법을 자연법에 의해 위임된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우리가 그때마다의 실정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규범을 자연으로부터 연역함으로써 달성된다. 실정법은 자연법과 다소간 일치되며, 이로써 양자간의 충돌은 배제되거나 최소한으로 축소된다.」(632-633쪽)

심지어는 홉스처럼 실정법에 대한 복종 자체가 자연법의 요청이라고까지 보기도 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자연법은 실정법을 매개로 구체화되므로, 애초에 자연법에 반하는 실정법은 무효라는 테제가 유지될 수조차 없다. 여기서는 실정법이 실제로 효력을 가지고 법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 법질서가 자연법에 합치된다는 증거로 간주되며, 실효성은 곧 정당성의 징표가 된다. 이는 자연법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보수적 형태로서, 자연법을 실정법에 대한 외부 기준이 아니라 실정법의 권위를 자연의 이름으로 확정해 주는, 즉 실정법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장치로 만든다.

「홉스에 … 의하면 실정법은 결코 이성 및 자연법과 모순에 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법과 실정법은 서로 상관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자연법은 실정법을 포함하고 실정법은 자연법의 일부이다. 실정법에 대한 복종은 자연법의 요청이다. … 실정법질서가 대체적으로 계속해서 실효성을 갖고 법공동체를 형성한다는 사실은 그러한 법질서가 자연법에 대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한 실효성이 실정법의 효력조건인 한, 이 논거 역시 결국 실정법과 자연법을 동일시하는 데로 나아간다. … 우리가 ‘각자에게 그의 것을’ 이라는 원칙을 자연법의 정의규범으로 주장한다면, 우리는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이 원칙은―앞에서 보았듯이―실정법을 전제로 해서만, 더욱이 모든 임의적인 실정법질서를 전제로 해서만 적용될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실정법은 이 원칙에 합치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636-637쪽)

iii) 자연법론이 실정법의 효력을 흔들지 못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어떤 법이 자연법에 합치되는지 여부를 누가 판단하는가의 문제에서 드러난다. 이 부분 서술은 앞선 지적들에 비해 비교적 짧기는 하나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자연법론에 따르면, 실정법 전체 또는 개별 규범이 자연법에 합치되는지 여부는 단순한 사실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다. 자연법과의 합치 여부는 실정법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석은 언제나 누군가의 권한 행사다. 이 권한을 누구에게 부여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만약 실정법에 복종하는 각 개인이 자연법에 비추어 실정법을 판단할 권한을 가진다면, 결과는 완전한 무정부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 각자가 자신만의 자연법 판단에 따라 복종 여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러한 해석권은 입법자나 법관에게 유보될 수밖에 없으며, 자연법론자들 또한 이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실정법 전체 또는 실정법상의 일정한 규범이 자연법에 합치되는지 또는 모순되는지의 문제는 실정법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따라서 실정법 또는 실정법상의 일정규범이 자연법과의 관계 때문에 효력 있거나 무효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한 결정권은 실정법에 대한 유권해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사람에게 있다. 실정법에 복종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것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해석은 실정법을 정립하는 권위에 유보되어 있을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완전한 무정부주의의 위험이 나타나게 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실정법이 자연법에 모순된다는 결정은 배제된 것과 마찬가지거나 또는 최소한으로 축소된다. 오늘날 자연법론자들은 자연법과 실정법의 관계와 관련하여 실정법의 해석을 실정법을 정립하는 권위에 유보하고자 하는 분명한 경향을 보여준다.」(637쪽)

문제는 이 경우 실정법이 자연법에 모순된다는 판단은 사실상 불가능해지거나 극도로 제한된다는 것이다. 실정법에 대한 복종의 거부가 위험이나 심각한 불이익을 수반하는 경우, ‘자연법에 반하는 법에는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는 요청은 순식간에 무력해지고 공허해지기 때문이다. 자연법이 실정법에 대한 적극적 저항의 근거로 기능할 수 있는 상황이란 대부분의 경우 존재하기 어렵다. 저항권에 대해 자연법론자들이 소극적 태도를 취하는 것 역시 이 점을 의식한 것이다.

「물론 때때로 자연법에 모순되는 법에는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이러한 요청은 복종거부가 분노나 위험과 결부되어 있을 경우에는 구속력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현저히 제한된다. 자연법론자들이 이른바 저항권에 대해 취하는 대체적인 거부적 태도도 이러한 노선에 서 있다.」(637-638쪽)

iv) 최후의 시도로서 자연법의 역할을 단지 비판적·규범적 이념으로 한정하는 입장도 있으나 이는 자포자기에 가깝다. 이 입장에서는 자연법이 실정법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일 수는 있지만, 실정법의 효력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연법은 윤리적 이상이나 담론의 언어로만 남고, 실정법의 구속력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자연법의 기능을 단순히 ‘비판적・규범적 이념’에 국한시킴으로써 실정법과 모순되는 자연법에 대해 실정법의 효력을 확보하려고 시도하는 원칙을 언급할 수 있다. 자연법에 비추어 실정법을 판단한다면 물론 자연법이 실정법의 정당성 여부를 재는 판단척도로 사용될 수는 있겠지만, 실정법의 효력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4. 충족될 수 없는 욕구와 도덕적 자율성

자연법론을 옹호하는 또 하나의 유력한 논거는, ‘절대적 정의의 문제는 실제로 존재하며, 상대주의적 법실증주의는 이에 답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물론,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절대적으로 선하고 정당한 것으로 정당화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욕구를 상대주의적 실증주의가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은 분명 사실이다실천이성 개념이 집요하게 유지되는 것이 윤리적 사변이 지니는 ‘객관성의 욕구 때문인 것처럼, 자연법론 또한 절대적 정의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끈질기게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절대적 정의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상대주의적 법실증주의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통해, 그러한 절대적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자연법론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절대적으로 선하고 절대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정당화해야 할 필요를 가지며 또 추측건대 언제나 그러한 필요를 가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정의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상대주의적 법실증주의가 그러한 정당화를 제공할 수 없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638-639쪽)

그러나 위와 같은 욕구를 자연에 무언가 규범이나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방법으로 해소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자연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초월적 권위를 상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처럼 신학적·형이상학적 전제에 의존하는 자연법 전통은 법의 객관적 인식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적 법이론은 정의로운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에 대한 믿음 없이는 그 자연에 내재된 정당한 법을 인정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만을 확정할 수 있을 뿐이다.」(597쪽)
「인간에 대한 일정한 취급을 규정하는 정의규범이 자신만이 효력 있는 규범이어야 한다는 요청을 띠고 나타나는 경우 … 그것은 절대적 가치를 형성한다. … 이 경우에는 특징적인 이원론이 나타난다. 즉 인간에 의해 정립되지 않은 것으로서 인간보다 상위에 있는 초월적인 질서와 인간에 의해 정립된 실정적인 현실적 질서의 이원론이 그것이다. … 이에 반해 현실주의적 법이론은 일원론적이다. … 인간에 의해 정립되지 않은, 초월적 권위에서 출발하는 관념적 법과 인간에 의해 정립된 현실적 법을 동시에 알지 못하고 오로지 하나의 법, 즉 인간에 의해 정립된 실정법만을 알기 때문이다.」(589쪽)

어떤 필요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그 필요가 합리적 인식의 방법으로 충족될 수 있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간이 절대적 정의를 원하고 또 그것이 실재한다고 해서, 과학적·이성적 인식이 그러한 절대적 정의를 발견하거나 제공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학은 정반대의 결론만 제시할 뿐이다.

과학은 단지 질문에 답하는 작업이 아니라, 어떤 질문이 의미 있는 질문인지 자체를 포착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절대적 정의의 문제는 인간적으로는 이해되지만 과학적으로는 해결불가능한 문제다. 절대적 정의가 있든 없든, 그것이 합리적 인식으로 발견될 수 없는 것인 이상, 과학적 인식의 대상에서는 제외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필요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는 그러한 필요가 합리적 인식의 방법으로 충족될 수 있다는 점, 그 문제가 그러한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이 나올 수 없다. 오히려 과학은, 합리적 인식을 보장하는 절대적 정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방법으로는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 인간의 인식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따라서 그러한 인식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문제가 취급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과학적 인식의 과제는 우리가 과학적 인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과학적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의미 있는 물음은 어떤 것인가를 우리 자신에게 가르치는 것이다.」(639쪽)

사실 법실증주의가 실정법을 평가할 기준을 도외시한다고 볼 수도 없다. 상대주의적 실증주의는 i) 법의 효력정당성을 엄격히 구분하고, ii) 정당성(가치·정의)은 객관적으로 주어질 수 없으며 오직 선택될 뿐이라고 주장하기에 앞서 언급한 각종 정의규범들과 양립할 수 있다. 단지 그 선택의 책임을 외부의 절대적 권위가 아닌 개인에게 지울 뿐이다. 상대주의가 문제를 방치한다는 말은 단지 이에 대한 불편함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불편해 보이겠지만 그것이야말로 도덕적 자율성의 진정한 의미다.

「이러한 상대주의가 우리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상대주의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정당하며 무엇이 부당한가 하는 물음에 대한 결정은―우리가 가치판단의 근거로 삼는 정의규범의 선택에 달려 있고 이로써 매우 상이하게 대답될 수 있기 때문에―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점, 그러한 선택은 우리 자신, 우리 각 개인만이 내릴 수 있고 다른 누구도, 즉 신도, 자연도, 객관적 권위로서의 이성도 우리를 대신해서 내릴 수 없다는 점을 의식하도록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도덕적 자율성의 진정한 의미이다.」(639쪽)

무엇이 정당하고 부당한지는 신, 자연, 객관적 이성이 대신 결정해 줄 수 없다다. 그 선택은 각 개인의 몫이다. 자연법론은 이 선택의 부담을 제거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수많은 자연법론이 서로 다른 정의규범을 제시하는 한 선택은 여전히 불가피하다. 자연법론은 그 선택이 마치 자연이나 이성에서 유래한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환각을 제공할 뿐이다. 사람들은 바로 그 환각을 좇아 자연법론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답을 스스로 내리지 않고 선택을 신이나 자연 또는 이성에게 밀치려는 모든 사람은 … 자연법론에 눈을 돌리지만 허사에 그칠 뿐이다. 선택을 하는 것이 문제된다면, 다양한 자연법론 역시 상대주의적 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수없이 다양한 대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자연법론은 개인에게 선택을 면하도록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각각의 자연법론은 개인에게 환상, 즉 그가 선택하는 정의규범은 자연이나 이성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효력을 가지며, 그와 모순되는 다른 정의규범의 효력가능성을 배제한다는 환상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지적 제물을 제시한다.」(640쪽)

 

5. 자연법과 근본규범

과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절대적 가치의 존재는 결코 전제될 수 없다. 과학은 인간의 가능한 경험을 넘어서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켈젠이 앞서 정의의 규범들에 관해 논할 때 형이상학적 정의규범이 아니라 합리적 유형의 정의규범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정의는 하나의 상대적 가치일 뿐이고, 서로 모순되는 여러 정의규범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므로, 특정 정의규범을 실정법의 효력근거로 삼기란 불가능하다.

「과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 단지 상대적 가치의 효력만을 승인한다면, … 실정법의 효력은 정의와의 관계에 의존할 수 없다.」(589쪽)
「모든 실정법질서는 단순히 상대적인 가치만을 형성하는 많은 정의규범 중의 어떤 것과 합치될 수 있으며, 이 경우 정의규범과의 합치가 실정법질서의 효력근거로 간주되지는 않는다.」(590쪽)

때문에 켈젠은 실정법의 효력근거를, 법질서와는 별개의 층위에 놓이는 정의규범이 아닌, 법질서 내에 존재하는 선험적사유적 법규범인 근본규범에서 찾는 것이다. 물론 이 근본규범도 자연법과 마찬가지로 실정법 외부의 규범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근본규범이 자연법의 성격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론은 실정법은 자연법에 합치되기 때문에 효력이 있거나, 자연법에 반하기 때문에 효력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실정법의 효력을 그 내용의 정당성과 결합시키는 반면, 순수법학은 먼저 실정법이 효력을 가진다고 가정한 다음 그 효력의 근거를 찾기 위해 근본규범을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근본규범은 실정법이 효력을 갖기 위한 논리적 전제조건일 뿐 실정법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전혀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실증주의법이론인 순수법학에 대해 그 자체 하나의 자연법론에 불과하다는 이의를 제기하였다. … 근본규범이 실정법규범, 즉 입법이나 관습에 의해 정립된 대체적으로 실효성 있는 강제질서가 아님은 맞다. … 하지만 … 근본규범은 실정법의 효력내용이 아니라 오직 효력근거만을 규정한다. 이 효력근거는 효력내용과는 전혀 무관하다.」(640-641쪽)

근본규범은 법질서의 내용과 무관하며, 오직 법창조절차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만을 규정한다. 실정법이 정당한지 부당한지는 순수법학의 관심사가 아니다. 근본규범은 실정법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또 하나의 법이자 정의규범이 아니라, 단지 실정법을 법으로 인식하기 위한 선험적 전제일 뿐이다. 따라서 실정법은 가치척도인 자연법과는 모순될 수 있어도, 단지 인식론적 조건인 근본규범과는 모순될 수 없다. 이를 전제로 삼아 실증주의 법이론은 법을 평가하지 않고 서술하는 학문을 추구하며, 정의에 대한 판단을 법학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나 도덕의 문제로 남겨둔다.

「실정법질서의 근본규범은 결코 정의규범이 아니다. 그러므로 실정법, 즉 입법이나 관습에 의해 정립된 대체적으로 실효성 있는 강제질서는 아마도 그 자체 정당한 법으로 표현되는 자연법과 모순에 빠질 수는 있겠지만 근본규범과 모순될 수는 없다. 따라서 순수법학의 근본규범은―자연법과 같이―실정법의 가치척도일 수 없고, 이로써 자연법이 실정법에 대해 수행해야 하는 그런 기능, 즉 윤리적・정치적인 정당화기능―이 때문에 자연법론은 실증주의적법이론과 대립해 있다―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실정법―더 정확히 말하면, 실정법의 정립―은 오직 규범이나 규범질서―실정법의 정립은 이에 합치될 수도 있고 모순될 수도 있다―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법론은 이원적 법이론이다. 왜냐하면 그 이론에 의하면 실정법 외에 자연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법학은 일원적 법이론이다. 그에 의하면 단지 하나의 법, 즉 실정법만이 존재한다. 순수법학에 의해 확정된 근본규범은 실정법과 다른 법이 아니며, 다만 실정법의 효력근거이자 실정법이 효력을 갖기 위한 선험논리적 조건일 뿐이다. 그리고 근본규범은 그 자체 윤리적・정치적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 성격을 갖는다.」(641-642쪽)
「실증주의 법이론은 … 실정법질서의 효력근거를 다양한 정의규범 중의 어떤 것에서 인식하지 않는다. … 그것은 가설적 근본규범, 즉 법적 사유에 전제되어 있는 근본규범에서 그 효력근거를 인식한다. 그런데 근본규범에 따르면 우리는 대체적으로 실효성 있는 역사상 최초의 헌법에 합치하는 방식으로 행위해야 하며 그런 방식으로 인간을 취급해야 한다. 이 경우 그 헌법에 따라 창설된 법질서가 그 어떤 정의규범에 합치되는지 여부는 고려하지 않는다. 실정법의 효력이 문제되는 한, 이러한 근본규범외의 어떤 규범, 특히 어떠한 정의규범도 고려대상이 아니다.」(5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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