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순수법학

켈젠 순수법학 강독[5] - 법과 과학 下

斧針 2025. 11. 16. 16:11

한스 켈젠(변종필/최희수 역), 《순수법학》, 길안사, 1999 
Hans Kelsen, Reine Rechtslehre (1963)

<차 례>

[01] - 법과 자연 上

[02] - 법과 자연 下(사회질서, 법질서)

[03] - 법과 도덕

[04] - 법과 과학 上

[05] - 법과 과학 下

[06] - 법정태학 上(제재, 의무, 책임, 권리)

[07] - 법정태학 中(행위능력과 권리능력)

[08] - 법정태학 下(법률관계, 권리주체)

[09] - 법동태학 上 (근본규범)

[10] - 법동태학 中(법질서의 단계구조 1: 위계질서)

[11] - 법동태학 下(법질서의 단계구조 2: 규범충돌)

[12] - 법과 국가 上(공법-사법 이원론 비판)

[13] - 법과 국가 下(국가-법 이원론 비판)

[14] - 국가와 국제법

[15] - 해석

[16] - 부록 1(정의의 규범들)

[17] - 부록 2(자연법론)


 

23. 의사자유의 문제

◎ 규범질서의 작동조건

흔히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책임을 진다는 표현을 쓴다. 여기서의 자유는 대개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내적 자율성이나 의지의 비결정성을 가리킨다. 하지만 켈젠은 이런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규범(, 도덕)은 사람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의지가 아무런 인과적 영향도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상태에 있다면, 규범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가 생기지 않는다. 규범이 실제로 사람의 행동을 움직이는 동기’, 즉 행동의 원인(cause) 중 하나가 될 수 있어야(, 규범이 자연적 인과과정에 편입되어야) 비로소 규범질서가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규범질서가 실제로 기능하려면 인간의 의사가 인과적으로 규정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인과법칙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 만이 책임, 즉 귀속을 가능하게 한다는 가정은 사회생활의 사실들과 명백히 모순된다.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규범질서의 수립은 곧 자신의 행위를 규율받는 인간의 의사가 인과적으로 규정될 수 있 … 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질서가 갖는 명백한 기능이란 인간들로 하여금 그 질서에 의해 명령된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고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는 규범들을 가능하게 하며, 규범에 합치되는 행위를 하도록 인간의 의사를 규정짓는 동기를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는 규범에 대한 관념이 그 규범에 합치되는 행위의 원인이 됨을 의미한다. 규범질서가 자신의 행위가 규율대상이 되는 인간들의 관념내용으로서 원인과 결과의 흐름인 인과적 과정 속으로 편입될 경우에만 그 규범질서는 그 사회적 기능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복종하는 인간들의 의사와 관련된 인과성을 전제로 하는 그러한 규범질서에 기초해서만 귀속이 행해질 수 있다.」(163-164쪽)

그렇다면 의지가 인과적으로 규정되지 않아야만 책임이 가능하다는 통념은 옳지 않은 것이 된다. ‘모든 사태가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거기에 당위(~해야 한다)를 끼워 넣을 자리가 있는가?’ 하는 의문은 온당하지 않다규범과 인과는 서로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미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을 다시 당위로 명령하는규범이 있다면, 그런 규범은 무의미할 것이다. 가령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진실을 말하는 존재라면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규범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때로 진실을 말하고 때로 거짓을 말하며, 그 선택은 다양한 욕구를 설명하는 자연법칙에 의해 인과적으로 규정된다. 이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규범은, 이 인과적 구조 안에서 하나의 동기, 하나의 원인이 되어 규범합치적 행위를 유도한다. 결국 규범은 자연적 의미에서 인간이 자유롭지 않다는 전제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규범은 무의미하지 않다. …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규범에의 관념은―그러한 자연법칙에 맞춰―규범합치적 행위로 이끄는 효과적인 동기가 될 수 있다.」(164-165쪽)

이러한 관점에서는 칸트의 의사의 자유는 실천이성의 의제라는 테제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게 된다. 이는 인간 의지는 실제로는 인과적으로 규정되지만, 도덕적 귀속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마치 자유로운 것처럼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인바, 만약 귀속을 인과성과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본다면 이러한 의제가 꼭 필요하겠지만, 귀속을 인과성과 모순되지 않는 독자적 결합방식으로 이해하면 그런 의제는 불필요해진다.

「우리가 귀속을, 인과성과는 다르지만 인과성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 (요건들의) 결합으로 인식할 경우에만, 그러한 의제가 필요없게 된다. 즉 그럴 경우에만 그러한 의제는 완전히 불필요한 것으로 입증된다.」(165-166쪽)

켈젠은 또 인간이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에 책임이 가능하다는 심리학적 설명도 비판한다. 후회나 양심의 가책은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는 현상도 아니고, 각자 어떤 행위를 불법으로 보는지조차 도덕·법질서에 따라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책임을 자유의 주관적 느낌에 근거지우는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저질러진 불법에 대한 정신적 결과로서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모든 인간이 느끼는 것은 아니다. … 귀속은 사실도, 인과적 비규정성으로서의 자유라는 의제도,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여기는 인간의 주관적 착오도 전제하지 않는다.」(166-167쪽)

◎ 자연적 자유와 규범적 자유

그렇다고 해서 켈젠이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켈젠은 인간이 참으로 자유롭다고 한다. 정확히는, ‘인간은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한다. 이 문장은 언뜻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데, 그 이유는 여기서 그가 자유 개념을 두 개의 층위로 분리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인간은 자연적으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규범적으로 자유롭다는 뜻이다.

i) 규범은 일정한 행위가 발생했을 때 그 행위의 효과처벌이나 상훈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지를 정한다. 즉 규범질서는 특정한 인간행위를 하나의 조건으로 삼아 어떤 효과를 연결시키는 귀속의 구조를 띤다. 그런데 전술했듯 이러한 귀속이 성립하려면 인간의 행위가 인과적 과정의 일부여야 한다. 규범은 인간의 의사를 동기화하여 어떤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바, 이러한 기능이 작동하려면 인간의 의사 역시 자연적 인과과정에 따라 일정하게 결정되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규범에 대한 관념이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주어 규범합치적 행동을 실질적으로 유발할 수 있어야 규범질서가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인간은 자연적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다.

ii) 그런데, 이러한 귀속의 구조 속에는 한 가지 숨은 전제가 있다. 어떠한 행위를 조건으로 삼아 어떤 효과를 그 주체에게 결부시키는 것은 곧, 그 주체 귀속의 종국점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지위를 갖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 ‘너는 A라는 행위를 해야 하며, 위반하면 너에게 B라는 효과가 귀속된다라는 언명은, ‘너는 A라는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갖춘 존재다라는 언명을 전제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법적도덕적 의미에서의 자유가 연유한다. , 규범적 층위에서 자유, 인과적 비결정성을 전제하는 심리적형이상학적 자유(자연적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가 귀속의 종국점이 되는 지위(규범적 의미의 자유)인 것이다.

다시 말해 도덕적 또는 법적 인격으로서 자유롭다는 관념에서의 자유란 책임의 전제가 아니라, 책임(귀속)의 구조가 만들어내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적 의미에서는 인과적으로 규정된 존재로서 자유롭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법적도덕적 의미에서는 귀속의 종단이 되고, 규범은 그처럼 귀속의 종국점이 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자유롭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도덕질서 또는 법질서의 주체로서의 인간, 즉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 도덕적 또는 법적 인격으로서 ‘자유롭다’는 관념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도덕질서 또는 법질서에 복종하는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그가 그러한 규범질서에 기초해서만 가능한 귀속의 종국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163쪽)

이처럼 자연질서의 인과성(자유 없음)과 도덕·법질서의 자유를 서로 다른 차원의 언명으로 파악하는 태도는 사실 앞서 이미 암시되었던 것이다. 첫 장에서 켈젠은 존재와 존재 사이, 혹은 당위와 당위 사이에서만 모순이 발생할 수 있지, 존재와 당위 사이에서는 논리적 모순이 발생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인과법칙이 지배하는 자연질서는 존재질서이고, 귀속법칙이 지배하는 규범질서는 당위질서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질서 속에서 인과적으로 규정된 존재라고 하는 것과 규범질서 안에서 귀속의 종국점이 되는 당위적 주체라고 하는 것 간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

「전술한 설명을 통해, 귀속을 가능케 하는 것은 자유, 즉 의사의 인과적 비규정성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의사의 인과적 규정가능성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귀속과 자유는 사실상 본질적으로 상호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인과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또한 사실상 인과성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인간이 도덕적 또는 법적인격으로서 자유롭다는 주장이 어느 정도 가능한 의미를 지녀야 한다면, 이러한 도덕적 또는 법적 자유가 그 행위의 인과법칙적 규정성과 조화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자유로운 것은 효과로서의 상훈이나 벌 또는 형벌이 그 조건이 되는 일정한 인간행위에 귀속되기 때문이며, 그러한 한에서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의 행위가 인과적으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인과적으로 규정됨에도 불구하고, 아니 참으로 인간의 행위가 인과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그러한 자신의 행위가 귀속의 종국점이기 때문에 자유롭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는 비록 인과적으로 규정되더라도 귀속의 종국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질서의 인과성과 법질서 또는 도덕질서 아래에서의 자유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일면 자연질서와 타면 도덕질서 또는 법질서 사이에도 모순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자는 존재질서이고 후자는 당위질서이기 때문이다.」(170-171쪽)

 

 

24. 인간의 행위와는 다른 사실들: 사회규범의 내용

켈젠이 처음 규정한 좁은 의미의 귀속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사이의 결합이다. 예를 들어 도덕에서는 공적과 상훈이, 형법에서는 범죄와 형벌이 서로 결합한다. 이때 조건도 행위, 결과도 행위이다. 한 사람의 행위에 다른 사람의 행위가 대응하는 경우도 있고, 한 사람의 행위에 그 사람 자신의 다른 행위가 대응하는 경우도 있다.

「귀속원칙은 그 본래적 의미에서 인간의 두 가지 행위가 서로 결합해 있다.… 이 모든 경우에 어떤 규범이 규정하고 있는 인간의 행위는 다른 인간행위에 의해 제약받는다. 조건 및 결과는 인간의 행위이다.」(174쪽)

그런데 실제 사회규범을 보면, 조건이 항상 인간의 행위일 필요는 없다. 규범은 특정한 인간 행위를 요구하거나 금지하면서도, 그 행위를 촉발하는 조건으로 자연적·사회적 사실을 전제할 수 있다. 이웃사랑의 규범은 고통받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조건으로 그를 도우려는 행위를 요구하고, 정신병자 격리 규범은 사회에 위험한 정신병자라는 상태를 조건으로 강제격리행위를 요구한다. 또 타인의 불법에 대해 책임을 묻는 집단책임 규범처럼, 특정 개인의 행위와 무관하게 그 개인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경우도 있다.

「사회질서규범들은 인간의 행위뿐만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사실들에도 관련될 수 있다. … 예컨대 고통받는 이웃이 있거든 그를 그 고통에서 해방시키려고 노력하라는 이웃사랑의 도덕규범이나 정신병으로 인해 사회에 위험스런 자는 강제로 격리시켜야 한다는 법규범이 그러하다.(174-175쪽)」

이런 경우 귀속의 구조는 조금 넓어진다. 이제 조건에는 인간행위뿐 아니라 외적 사실이나 상태도 포함될 수 있다. 조건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거나, 인간의 행위와 다른 사실이 함께 조건이 되더라도, 그 조건 아래에서 일정한 인간 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합방식이 유지된다면 그것도 귀속이라 부를 수 있다. 이때 귀속이라는 말은 본래 의미보다 확장되어 쓰이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결과로서 귀속되는 대상, 귀속이 향하는 표적은 여전히 인간의 행위이다. 상벌·형벌·제재로 표현되는 효과는 결국 어떤 행위에 결부되고, 그 행위가 인격에 붙어 있다는 점에서 비로소 인격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일정한 인간의 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판단에서 그 조건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거나 또는 오로지 인간의 행위만이 아닌 것이라면 … 귀속이라는 개념은 그 원래 의미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 그러나 귀속의 대상은 언제나 인간의 행위뿐이다.」(175쪽)

 

 

25. 정언규범

켈젠은 다음으로 정언규범의 문제를 다룬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건 없이 무조건적인 의무를 부과하는 것처럼 보이는 규범이 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와 같은 부작위명령이 그 예다. 이런 규범은 표면상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무조건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규범은 조건·결과 구조를 전제로 하는 귀속 원칙의 틀로는 해석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무조건적으로 또는 모든 상황에 대해 일정한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는, 이런 의미에서 가언규범과는 달리 정언규범인 사회규범들이 존재하는 듯하다. 이것들은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일정한 부작위규범들이다.」(175-176쪽)

켈젠의 답은, 이런 규범들을 사실상 정언규범으로 보는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작위가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하듯, 부작위도 마찬가지다. 살인, 도둑질, 거짓말 자체가 특정한 사정이 갖추어져야만 가능한 행위이므로, 그 부작위 또한 그 사정이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만약 정말로 무조건적 정언이라면, 잠자는 동안에도 살인·도둑질·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으로 이상적인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람은 모든 상황에서 살인, 도둑질 및 거짓말을 할 수는 없고 다만 전적으로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만 살인, 도둑질 및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역시 이러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살인, 도둑질 및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부작위를 규정하는 도덕규범들이 무조건적인, 즉 언제 어디서든 이행해야 할 정언적 의무를 부과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의무를 잠결에서도 이행하게 될 것이고, 잠결은 도덕적으로 이상 상태일 것이다.」(176쪽)

또한 경험적 사회질서에서는 예외 없는 전면적 금지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 살인·재산탈취·거짓말조차도 전쟁·정당방위·특수한 예외규정 아래에서는 허용되거나 정당화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모든 일반적 규범이 결국 일정한 조건이 충족될 때, 일정한 행위를 해야 한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두 요소의 관계로 서술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표면상 정언처럼 보이는 규범도 실질적으로는 가언적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살인하지 말라, 타인의 재화를 그의 승인없이 또는 그가 알지 못하게 빼앗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등의 가장 기본적인 금지마저도 단지 일정한 제약 아래에서만 유효하다. … 이 점 역시 경험적 사회질서의 모든 일반적 규범들 … 이 일정한 행위를 단지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만 규정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따라서 모든 일반적 규범은 두 가지 구성요소 사이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176-177쪽)

이렇게 보면, 도덕·법의 일반 규범들은 모두 조건결과구조를 가지며, ‘조건이 성립하면 그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귀속의 언어형식이다. 켈젠은 이를 통해, 자연법칙과 규범적 법칙이 모두 요건들의 결합을 서술하는 법칙이라는 점에서만 유비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개별적·개인적 규범은 예외적으로 정언적일 수 있다. 법원이 피고인을 징역 1년에 처한다는 규범을 정립하는 경우, 그 결정은 특정 개인 및 행위에 대해 바로 이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별 규범도 때로는 조건부(집행유예 등)로 정립될 수 있기 때문에, 정언·가언의 구별은 주로 개별규범의 수준에서만 상대적인 의미를 가진다.

「개별적 규범들만이 정언적일 수 있으며, 그것은 일정한 조건과 연계시키지 않고 일정한 개인의 일정한 행위를 규정하고 수권하며 적극적으로 허용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 그러나 개별적 규범들 역시 가언적일 수 있다.」(177쪽)

 

 

26. 당위의 거부: 이데올로기로서의 법

마지막으로 켈젠은 당위개념을 무의미하거나 이데올로기로 보는 비판에 반론을 제기한다. 가령 마르크스주의적 법이론은, 법을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강제장치로 보고, 규범으로서의 법은 현실을 왜곡하는 이데올로기적 허구라고 보는데, 이에 따르면,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은 법규범이 아니라, 경제적·정치적 힘 관계와 국가 강제장치이다(178쪽 주 26). 그런데 이 논리를 따라서 당위를 전면 부정하면 남는 것은 법사회학뿐이다. 왜 이런 규범을 제정했는가?’, ‘그 규범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발생시키는가?’라는 인과적 질문만 남고, 규범 자체의 의미·내용은 과학의 대상에서 빠져 버린다. 입법자의 명령은 단지 어떤 인간행위를 유발하는 수단, 즉 원인으로만 이해되고,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규범은 사람들이 대체로 도둑질을 하지 않는 사실이나 도둑질하면 처벌할 것이라는 위협이 작용한다는 사실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당위의 개념을 의미없는 것으로 부정하면, 우리는 법정립행위를, 오로지 그 정립행위가 지향하는 대상인 인간의 일정한 행위를 야기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따라서 일정한 결과의 원인으로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절도범은 처벌해야 한다거나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법률적 판단은… 인간은 원칙상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예외적으로 도둑질을 범하면 절도범을 처벌한다는 사실의 확정으로 돌아간다.」(179쪽)

켈젠은 이런 환원을 법의 의미를 삭제하고 인과적 사실만 남기는 것이라고 본다. 순수법학이 하려는 것은 그와 정확히 정반대다. 순수법학은 법정립행위나 법집행행위라는 사실 자체보다, 그 행위가 갖는 의미, 곧 규범적 내용에 주목한다. ‘절도범은 처벌해야 한다’, ‘AB에게 1,000마르크를 변제해야 한다같은 판단은, 단지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개연성에 관한 예측이 아니라, 특정한 귀속 구조를 표현하는 규범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규범적 의미가 바로 당위이다.

「법적 판단은 현재나 장래의 존재사실에 관한 언급으로 바뀔 수 없다. 왜냐하면 법적 판단은 결코 그러한 사실과 관련이 없고… 그러한 의사행위의 존재사실이 갖는 특별한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당위, 즉 규범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며, 이것은 의사사실의 존재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182쪽)

켈젠은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나눈다. 먼저, i) 자연적 현실이나 그에 관한 서술이 아닌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법은 당연히 자연과 다른 질서, 즉 규범적 의미로 이루어진 다른 종류의 현실이므로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이데올로기란 단지 자연과는 다른 체계 연관성을 가진 의미질서 전체를 가리키는 중립적 표현에 가깝다.

「규범으로서의 법, 즉 인과적으로 규정된 존재행위와는 다른 (그 존재행위의) 의미로서의 법은 이데올로기이다. … 그렇다면 순수법학은 그런 관점에로 이르는 길을 열었고, 그 관점에서 본다면 법이란 이런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로―즉 자연과는 다른 체계연관성으로―이해될 수 있다.」(182쪽)
「법학을 법사회학으로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법사회학은 법학과는 전혀 다른 문제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존재하는 한 결코 종교심리학이나 종교사회학으로 대체할 수 없는 도그마틱적 신학이 존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법이 존재하는 한 규범적 법학이 존재할 것이다. 전체 학문체계에서 법학이 어떤 지위를 차지하느나는 별개의 부차적인 문제이다. 필요한 것은 당위 또는 규범이라는 범주와 동시에 이러한 법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법학을 그 대상에 국한시켜 그 방법을 비판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다.」(183쪽)

다음으로, ii) 주관적 가치판단과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대상을 왜곡·변용하는 비객관적 설명을 이데올로기라 칭할 수 있다. 이 의미에서라면, 순수법학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이다. 순수법학은 실정법을 자연법·정의·이상적 법과 결부시켜 평가하거나 정당화하거나 폐기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실정법, 즉 효력 있는 규범질서를 기술하고 그 구조를 분석하는 데만 머물기 때문이다.

「실정법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또는 실정법의 법으로서의 성격을 박탈할 목적에서 실정법을 자연법이나 정의와 결부시키는 실정법이론은 이데올로기적인(이 말의 두번째 의미에서) 것으로서 거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순수법학은 반이데올로기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 … 그것은 있어야 할 상태대로의 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법을 서술하려고 한다.」(183-184쪽)

이 점에서 순수법학은 전통법학과 갈라선다. 전통법학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연법·정의·정치적 이해관계를 끌어들여 실정법에 추가적인 가치를 덧씌우거나, 반대로 실정법을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낙인찍는 경향을 가진다. 순수법학은 이런 역할을 법학이 떠맡는 것을 거부한다. 과학으로서 법학의 임무는, 법을 유지·파괴하려는 의욕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구조와 의미를 인식하고 드러내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법학은 법학의 이름으로 실정법에 대해 그것이 이상적 법, 정당한 법과 일치한다는 이유로 … 더 높은 가치를 덧붙이려는 시도나 … 모순된다는 이유로 모든 가치 및 그 효력 일반을 박탈하려는 시도를 저지한다. … 바로 이러한 반이데올로기적인 경향 때문에 순수법학은 참된 법학임이 입증된다.」(184쪽)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