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순수법학

켈젠 순수법학 강독[10] - 법동태학 中(법질서의 단계구조 1: 위계질서)

斧針 2025. 12. 3. 14:16

한스 켈젠(변종필/최희수 역), 《순수법학》, 길안사, 1999 
Hans Kelsen, Reine Rechtslehre (1963)

<차 례>

[01] - 법과 자연 上

[02] - 법과 자연 下(사회질서, 법질서)

[03] - 법과 도덕

[04] - 법과 과학 上

[05] - 법과 과학 下

[06] - 법정태학 上(제재, 의무, 책임, 권리)

[07] - 법정태학 中(행위능력과 권리능력)

[08] - 법정태학 下(법률관계, 권리주체)

[09] - 법동태학 上 (근본규범)

[10] - 법동태학 中(법질서의 단계구조 1: 위계질서)

[11] - 법동태학 下(법질서의 단계구조 2: 규범충돌)

[12] - 법과 국가 上(공법-사법 이원론 비판)

[13] - 법과 국가 下(국가-법 이원론 비판)

[14] - 국가와 국제법

[15] - 해석

[16] - 부록 1(정의의 규범들)

[17] - 부록 2(자연법론)


 

35. 법질서의 단계구조

◎ 법창조와 법적용

법질서는 단지 규범들의 집합이 아니라, 각 규범의 창조가 또 다른 상위규범에 의해 규정되는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 구조이다. 어떤 규범이 법질서에 속한다는 것은 그 규범이 상위규범이 정한 방식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의미이며, 이 환원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더 이상 상위규범에 의해 정립될 수 없는 근본규범에 도달한다. 근본규범은 전제될 뿐 정립되지 않는 규범이므로, 그 자체는 실정법규범이 아니지만 전체 법질서의 통일성을 뒷받침하는 최종적 효력근거로 기능한다.

흔히 어떤 규범이 특정 공동체의 기관에 의해, 따라서 그 공동체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그 규범은 그 법질서에 속한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어떤 개인이 공동체의 기관으로 간주되는 것은 그 개인의 기능이 이미 법질서의 규범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법공동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법이 그 공동체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질서가 먼저 존재하고 그 안에서 특정한 개인의 행위가 공동체의 행위로 귀착된다. 결국 국가가 법을 창조한다는 통설도, 분석해 보면 국가라는 공동체가 법질서에 앞서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법질서가 일정한 기능을 국가라는 단위에 귀착시키는 방식을 은유한 표현에 불과하다.

「법질서는 일반적 규범과 개별적 규범의 체계이며, 이들 규범은 이 체계에 속하는 모든 규범의 창조가 이 체계에 속해 있는 또 다른 규범에 의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근본규범에 의해 규정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다.」(360쪽)
「어떤 법규범은 그것이 법공동체의 기관에 의해, 이로써 그 법공동체에 의해 창조되었을 경우에 일정한 법질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규범을 창조하는 개인은 그의 기능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법질서의 규범을 통해 규정되어 있고 이로써 공동체에 귀속될 수 있기 때문에 또 그런 한에서 법공동체의 기관이다. … 규범은 그것이 법질서의 규범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법질서의 근본규범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법질서에 속한다라는 명제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360쪽)

전통법학은 법창조와 법적용을 엄격히 구분하고, 입법은 법창조, 재판(특히, 입법이나 관습에 의해 미리 정립된 일반적 법규범을 개별 분쟁에 적용하여 권리관계를 확정하거나 형벌을 부과하는 재판)과 행정은 법적용이라고 이해해 왔다. 그러나 동태적 법관념에 비추어 이는 지나치게 협소한 생각이다. 법은 헌법의 창설에서부터 입법과 관습을 거쳐 재판과 제재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며, 이 과정은 추상적·일반적 규정에서 점점 더 개별적·구체적 규정으로 나아가는 연속적인 구체화의 운동으로 파악된다. 입법과 관습에 의한 일반규범의 창조는 헌법이라는 상위규범의 적용이며, 재판은 일반규범의 적용이자 그에 기초해 개별규범을 창조하는 기능을 한다.

「전통적 법학은 무엇보다 … 일반적 법규범을 적용하는 민사법원이나 형사법원의 결정을 법적용으로 본다. 하지만 입법과 관습에 의한 일반적 법규범의 창조, 행정기관의 처분 및 법률행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법적용이 존재한다. 그리고 법원은 일반적 법규범을 통해 그 내용이 규정되어 있는 개별적 규범을 정립하는 방식으로 일반적 법규범을 적용하며, 이때 개별적 규범을 통해 구체적 제재인 민사상의 강제집행이나 형벌이 확정된다. 법의 동태성을 지향하는 고찰관점에 의한다면, 법원에 의한 개별적 규범의 정립은 헌법의 창설로부터 시작하여 입법과 관습을 거쳐 법관의 결정과 이를 통한 제재의 집행에로 이르는 일련의 진행과정상의 한 단계이다.」(363-364쪽)

그러한 연쇄의 마지막 단계에서 개별규범이 정한 강제행위의 집행만이, 예외적으로 법적용이지만 법창조는 아닌행위로 남을 뿐이다.

「또 다른 규범의 창조를 규정하는 규범은 그 규범이 규정하고 있는, 바로 그 또 다른 규범의 창조를 통해 적용된다. 법적용은 동시에 법창조인 것이다. 법적용과 법창조라는 개념은 전통적 이론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절대적인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361쪽)
「모든 법적 행위는 상위규범의 적용이면서 동시에 하위규범의 창조이다. … 입법과 관습에 의한 일반적 법규범의 창조는 헌법을 적용한 결과이다. 그리고 법관의 재판이나 행정처분에 의한 개별적 규범의 창조는 이러한 일반적 규범을 적용한 결과이다. 다만 이러한 개별적 규범에 의해 확정된 강제행위의 집행은 이 강제행위를 규정하는 개별적 규범을 적용한 결과일 뿐이지, 그 자체 규범의 창조는 아니다.」(361쪽)

문제는 상위규범이 하위규범의 창조를 어느 정도까지 규정하는가 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상위규범은 하위규범을 창조할 기관만을 정할 수도 있고, 기관과 절차까지 정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하위규범의 내용을 상당한 부분까지 정할 수도 있다. 형사법에서처럼 상위규범이 기관·절차·내용을 세밀히 규정할수록 법관의 재량은 좁아지고, 행정법에서처럼 내용 규율을 느슨하게 하면 재량의 폭이 넓어진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상위규범이 전혀 아무런 규정을 두지 않았다면, 그에 따라 창조되는 규범은 더 이상 그 법질서의 일부로 인정될 수 없다. 또한 어떤 개인이 법공동체의 기관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상위규범이 그 개인에게 일정한 기능 수행 권한을 부여하고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 행위는 공동체의 행위로 귀속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법창조행위가 법공동체의 행위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언제나 상위규범의 적용이라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상위규범에 의한 하위규범의 창조는 두 가지 방향에서 규정될 수 있다. 상위규범은 하위규범을 창조하는 기관과 절차를 규정할 수 있지만, 하위규범의 내용을 규정할 수도 있다.」(361쪽)
「어떤 규범의 창조에 관하여 상위규범이 전혀 어떠한 규정도 두고 있지 않는 경우 그 규범은 법질서 내에서 정립된 규범으로서의 효력을 갖지 못하며, 따라서 법질서에 소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개인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법질서의 규범에 의해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경우 … 그 개인은 법공동체의 기관으로 간주될 수 없고 그의 기능은 공동체에 귀속될 수 없다. 모든 법창조행위는 법적용행위일 수밖에 없다.」(362쪽)

◎ 헌 법

법질서는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규범들로 이루어져 있다. 규범은 단순히 고정되어 있는 명령이 아니라, 상위규범이 하위규범의 창조절차와 효력의 근거를 정함으로써 특정한 단계적 구조를 형성한다. 따라서 법질서는 수평적으로 병렬된 규범들의 집합이 아니라 위계적 관계를 지닌 체계라 할 수 있다. 상위규범은 하위규범의 효력을 승인하고, 하위규범은 다시 더 아래 단계 규범의 창조를 가능케 하며, 전체 법질서는 궁극적으로 근본규범으로 수렴하는 연쇄적 정당성을 가진다. 켈젠은 이러한 위계성과 동태성을 통해 법질서의 통일성이 설명된다고 본다.

「법이 그 스스로의 창조를 규율하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거듭하여 지적했다. … 법질서는 동등한 서열에 속하는 병존적 법규범들의 체계가 아니라 상이한 위상을 지닌 법규범들의 단계구조이다. 법질서의 통일성은 타방의 규범에 따라서 창조된 일방 규범의 효력이 그 타방 규범…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상호적 연관성을 통해 형성된다.」(344-345쪽)

국가법질서에서 헌법은 최상위단계의 실정법적 규범이다. 여기서 헌법은 형식적 의미의 헌법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법규범의 창조를 규율하는 실질적 의미의 규범 전체를 가리킨다. 헌법은 관습에 의해 창조될 수도 있고, 특정 개인·기관·다수에 의한 의식적 입법행위로 성립할 수도 있다(성문헌법). 성문규범과 불문규범이 혼합된 구조를 띨 수도 있고, 관습에 의해 성립한 불문규범이 법전화되어 성문헌법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헌법이란 실질적 의미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일반적 법규범의 창조를 규율하는 실정규범 또는 실정규범들로 이해된다. … 실질적 헌법은 또한 부분적으로는 성문법규범, 부분적으로는 관습에 의해 창조된 불문법규범으로 구성될 수 있다.」(345쪽)

형식적 의미의 헌법, 즉 특정한 문서로서의 헌법(), 일반 입법규범을 창조하는 규정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항이나 헌법개정절차와 같은 특수한 규정을 담을 수도 있다. 이러한 형식적 헌법은 실질적 헌법의 내용을 안정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무엇보다 통상의 법률과는 다른 강화된 조건(가중된 의결요건, 특별절차 등) 하에서만 개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규범형식을 이룬다. 이 형식적 헌법은 실질적 헌법의 법적 토대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실질적 의미의 헌법은 형식적 의미의 헌법, 즉 ‘헌법’이라 불리는 문서와는 구별되어야 하며… 실정헌법이라는 문서에 포함되어 있는 규범들을 일반법률의 경우와는 달리 가중적 조건하에서 특별한 절차를 통해서만 폐지 또는 개정될 수 있도록 하는 규정들을 담을 수 있다.」(346쪽)

헌법이 일반적 법규범의 창조를 규율하는 과정에는 입법기관의 권한 배분도 포함된다. 법률이나 명령을 제정할 기관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기관이 관습법까지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는 모두 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

◎ 입법과 관습

입법과 관습은 헌법에 이어 법질서를 구성하는 다음 단계의 규범창조 방식으로서, 근대국가에서 일반적 법규범이 성립하는 두 가지 근본적 경로를 보여준다. 입법은 헌법이 부여한 권한에 따라 특별한 국가기관이 의식적으로 규범을 정립하는 절차이며, 관습은 구성원들의 반복적 행위와 그에 수반되는 당위의식이 축적됨으로써 법적 규범성을 획득하는 절차이다. 켈젠은 이 두 방식 모두가 헌법에 의해 법창조적 요건사실로 도입될 때에만 객관적 법규범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본다.

관습이 규범창조적 요건사실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법공동체 구성원들이 동일한 조건에서 반복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하고, 그 행위가 오랜 시간 유지되어 그러한 행위양식에 따라야 한다는 집단적 의지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습의 주관적 의미 역시 당위인바, 이는 헌법이 관습을 법창조의 요건사실로 도입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객관적 규범으로 될 수 있다. , 실정법으로서 관습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헌법이 국민의 지속적 관행을 법창조요건으로 승인하고 있어야 한다.

「법률법(Gestzesrecht)과 마찬가지로 관습법이 실정법, 즉 정립된 법이라면, 그 주관적 의미가 객관적으로 효력 있는 규범(즉 관습법)으로 해석되는 당위를 뜻하는 개인적 또는 집단적 의사행위가 존재해야 한다.」(350쪽)
「헌법은 일정한 자격을 갖춘 관습이라는 요건사실을 법창조적 요건사실로 도입할 수도 있다.」(349쪽)

다만, 성문헌법이 관습법 적용에 대한 명시적 수권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법원이 관습을 근거로 법규범을 적용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존재할 수 있다. 바로 근본규범이 직접 관습을 법창조적 요건사실로 도입하고 있는 경우이다.

「법원이 관습법도 적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 헌법이 국가법질서에 복종하는 개인들 … 의 습관적 행위를 통해 형성된 관습을 법창조요건으로 도입하고 있어야 한다. 성문헌법이 어떤 수권규정도 포함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에 의한 관습법적용을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 … 이러한 수권은 관습에 의해 성립된 불문헌법규범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제되어 있는 것이어야 하며 … 근본규범은… 합헌적으로 창조된 법질서에 복종하는 수범자의 행위를 통해 형성된 관습까지도 법창조요건으로 도입하고 있다.」(346-347쪽)
「자격 있는 관습이 실정법적 의미의 헌법에 의해 법창조적 요건사실로 인정되고 있지 않은 경우, 관습법, 특히 법률법을 폐지하는 관습법의 적용이 적법한 것으로 간주되려면 법논리적 의미에서의 헌법인 근본규범이 관습법을 법창조적 요건사실로서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헌법제정이라는 요건사실뿐만 아니라 자격 있는 관습도 법창조적 요건사실로 인정하고 있는 근본규범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350쪽)
「법공동체의 헌법이 정립의 형식이 아니라 관습의 형식으로 성립되고 법적용 기관이 관습법을 적용할 권한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에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관습에 의해 창조된 실정법적 헌법에 의해 관습이 법창조적 요건사실로 인정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해석한다면 순환논법(petitio principii)에 빠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 규범의 창조를 규율하는 규범인 실정법적 헌법이 관습의 형식으로 창조될 수 있다고 한다면 관습이 법창조적 요건사실이라는 것이 이미 전제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350-351쪽)

입법과 관습은 신법우선의 원칙에 따라 서로를 폐지할 수 있으나, 형식적 의미의 헌법은 일반법률에 의해 폐지될 수 없고 동일한 형식적 헌법만이 폐지 또는 개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구조적 차이가 있다. 반면 관습법은 형식적 헌법에 대해서조차 폐지 효력을 가질 수 있는데, 이는 관습이 법창조적 요건사실로 인정될 경우 법률 이상의 효력을 가질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법률법과 관습법은 신법우선의 원칙에 따라 서로를 폐지할 수 있다. 그러나 형식적 의미의 실정헌법이 일반법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시금 실정헌법에 의해서만 폐지 또는 개정될 수 있는 반면, 관습법은 형식적인 실정헌법에 대해서도 폐지적 효력을 가지며 이 점은 관습법의 적용을 명시적으로 배제하는 실정헌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351쪽).

관습이 법창조적 요건사실인지 여부는 궁극적으로 법적용기관이 판단한다. 이러한 판단과정에서 법원은 관습법규범이 실재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요건사실로서 충족되었는지 여부를 확정한다. 이 과정은 법률법의 경우보다 더 어렵지만 구조는 동일하다. 법원의 확정행위는 창설적 성격을 갖지만 소급하여 효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규범은 확정 이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간주된다. 나아가 관습법의 적용은 결국 이미 정립된 개별 규범의 적용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관습도 법적용기관을 거쳐야 구체적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법을 창조하는 관습이라는 요건사실이 존재하는지 여부의 문제는 법적용기관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352쪽)
「법적용기관이 요건사실을 확정하는 행위는 물론 창설적인 것이지만, 이러한 창설적 확정은 소급효를 갖는다.」(353쪽)
「관습에 의해 창조된 일반적 규범의 구체적 사례에의 적용이 단지 정립된 법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한에서, 특히 이미 법원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개별적 규범을 의미하는 법관의 재판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한에서 그러하다.」(353쪽)

입법과 관습의 정치적 차이는, 입법이 고도의 집중화된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는 반면 관습은 탈집중화된 방식으로 형성된다는 점에 있다. 법률은 전담기관이 정립하는 규범이며, 관습법은 구성원들의 반복적 행위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관습형성에 사회 구성원 전체가 참여할 필요는 없고, 관계의 규율 대상이 되는 다수 구성원이 참여했다면 그 효력은 전체에 미칠 수 있다. 오랜 기간 지속된 관습법의 경우, 그러한 규범에 기여하지 않은 개인도 구속될 수 있으므로 관습법을 묵시적 계약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부적절하다

「법률법과 관습법 사이에 존재하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차이는 전자가 상대적으로 집중화된 절차에 따라 창조되고 후자는 상대적으로 탈집중화된 절차를 통해 창조된다는 점에 있다.」(353쪽)
「규율되어야 할 관계의 고려대상이 되는 절대다수의 개인이 관습의 형성에 참여한 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관습에 의한 규범의 창조에 협력하지 아니한 개인도 그 규범에 구속될 수 있다. 특히 이미 오래전부터 효력을 지니고 있는 관습법규범이 문제되는 경우에 이러한 상황이 고려대상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볼 때 관습법을 묵시적 계약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354쪽)

한편, 근대국가의 헌법은 행정기관에도 일정한 범위의 일반규범 제정권을 부여하곤 한다. 이때 행정기관이 제정하는 일반규범은 법률을 집행하기 위한 시행명령일 수도 있고, 예외적 상황에서 법률을 대체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명령일 수 있다.

「헌법에 의해 규율되는 일반적 법창조의 단계는 개별국가의 질서를 정치적으로 형성함에 있어 대부분 다시금 둘 또는 그 이상의 단계로 나뉜다. 여기서는 법률과 명령의 구별만을 강조하고자 하는바, 이것은 헌법이 일반적 법규범의 창조를 원칙적으로 국민에 의해 선출된 의회에 위임하지만 일정한 행정기관에 의해 제정되는 일반적 법규범을 통해 법률의 시행세칙을 제정할 수 있도록 하거나, 또는 일정한 예외적 상황에서 의회를 대신하여 정부에 대해 긴급한 모든 규범이나 일정한 일반적 규범을 제정할 권한을 부여하는 경우에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의회가 아닌 행정기관에 기원하는 일반적 규범을 명령이라 부르는바, 이들은 법률시행적 명령이거나 법률대체적 명령이다. 후자의 명령은 또한 법률적 효력을 가진 명령이라 불린다. 따라서 특수한 법률형식이 존재한다. 형식적 의미의 법률은 실질적 의미의 법률과 구별된다(354쪽).

법률이나 명령, 또는 관습에 의해 창조된 일반규범은 법원이나 행정기관과 같은 법적용기관에 의해 구체적 사건에 적용된다. 법적용은 규범이 정한 추상적 구성요건이 구체적 사안에서 충족되었는지 확정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구체적 강제행위를 명령하고 집행하는 과정으로서 본질적으로 개별규범의 창조라는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법은, i) 추상적으로 구성요건과 효과를 규정하는 외에, ii) 누가 법원·행정기관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절차에 따라 일반규범을 개별사건에 연결할 수 있는지 또한 아울러 규정해야 한다. i)을 실체법, ii)를 절차법이라 한다.

「법정립의 방식으로(법률이나 명령으로서) 또는 관습의 방식으로 창조된 일반적 법규범은 이를 적용할 권한이 있는 기관인 법원이나 행정기관에 의해 적용될 수 있다. 이들 법적용기관은 법질서에 의해 규정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조건 아래에서 일정한 개인이 법원 또는 행정기관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가 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 규범의 적용이라는 그러한 기능을 행사할 수 있는 절차 역시 규정되어야 한다. 추상적으로 규정된 구성요건에 마찬가지로 추상적으로 규정된 효과를 결부시키는 일반적 규범이 적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개별화를 필요로 한다.」(355쪽)
「일반적 규범의 구체적 사안에의 적용은 개별적 규범의 창조, 즉 일반적 규범의 개별화(또는 구체화)를 그 본질로 한다. 따라서 적용대상이 되는 일반적 규범의 기능은 또한 사법행위나 행정행위인 법관의 재판이나 행정처분에 의해 창조되는 개별적 규범의 내용을 규정하는 것도 그 본질로 삼는다.」(356쪽)

민사소송법·형사소송법·행정소송법 등은 법원과 행정기관의 조직과 절차를 규율하는 규범으로서 절차법이라 불리고, 민법·형법·행정법은 법관이나 행정기관이 구체적 사건에서 어떤 내용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실체법으로 이해된다. 실제 법적용에서는 실체법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절차법이 함께 적용되지 않으면 실체법의 규범내용도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다. 이 실체법과 절차법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완전한 법질서를 형성한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절차적 법규범과 실체적 법규범으로 구별하곤 하는 법규범의 두 가지 범주는 바로 이상과 같은 두 가지 기능에 상응하는 것이다. 사법기관과 행정기관의 구성과 절차를 규율하는 일반적 규범인 이른바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및 행정소송법은 절차법(formelles Recht)이라 지칭된다. 실체법(materielles Recht)이란, 비록 법원이나 행정기관의 절차를 규율하는 규범들이 적잖이 민법이나 형법 또는 행정법에 담겨 있긴 하지만, 사법행위와 행정행위의 내용을 규정하면서 곧 민법, 형법 및 행정법이라 불리고 있는 일반적 규범을 말한다.」(356쪽).
「실체법과 절차법은 서로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오로지 그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서만 양자는 그 자신의 창조와 적용을 규율하는 법을 형성한다.」(356쪽)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형법명제는 단순히 어떤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어떤 제재를 부과한다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동시에 어느 기관이, 어떤 절차에 따라, 그 제재를 명해야 하는지까지 포함하는 하나의 통합된 법명제로 기술되어야 한다켈젠은 그 예로특정 요건사실이 존재할 때 일반규범에 의해 규정된 기관이 일반규범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일반규범에 규정된 제재를 명해야 한다는 구조를 제시한다. 더 나아가 실제로는 요건사실의 존재를 확정하는 기관과 제재를 명하는 기관의 기능을 구분하는 더 복잡한 공식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절차법과 실체법 사이의 체계적 연관성이 법기술의 본질적 요소임을 강조한다.

「가령―극히 단순화된―형법명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 즉 ‘어떤 개인이 일반적 법규범에 규정된 범죄를 저질렀다면, 일반적 법규범에 규정된 기관(법원)은 일반적 법규범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위 전단부에서 언급한 일반적 법규범에 규정된 제재를 명하여야 한다’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추후 우리는 더 복잡한 공식이 필요하다는 점 … 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표현된 형법명제는 이른바 절차법과 실체법, 즉 일면 범죄와 제재에 관한 규정과 타면 법적용기관과 그 절차에 관한 규정 사이에 존재하는 체계적 연관성을 보여 주며, 바로 이 점에 법을 기술하는 법명제의 본질적 기능이 놓여 있다.」(357쪽)

켈젠은 일반적 법규범과 개별적 법규범의 관계를, 헌법과 그에 따라 창조되는 일반규범의 관계와 병치한다. 헌법이 상위규범으로서 입법행위의 형식과 일정 부분 내용을 규정하듯이, 일반규범 역시 상위규범으로서 개별규범의 형식과 내용을 규정한다. 다만 두 경우에 형식적 요소와 실질적 요소의 배분은 달리 나타난다고 한다. 실질적 의미의 헌법은 대체로 입법기관과 절차를 규율하는 형식적 규범에 머무르고, 법률의 내용은 입법기관에 위임하는 경우가 많다. 헌법이 법률의 내용을 직접 규정하는 것은 주로 일정한 내용을 배제하는 방식, 즉 기본권 보장과 같이 어떤 종류의 법률을 만들 수 없도록 하는 소극적 규율에 한정된다. 관습을 통한 법창조가 문제되는 경우, 헌법은 관습의 절차적 특성만을 위임할 수 있을 뿐 내용까지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습에 의해 창조된 헌법규범은 다시 관습에 의해 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립행위나 관습을 통해 창조된 일반적 법규범과 법원이나 행정기관에 의한 이들 규범의 적용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헌법과 헌법에 의해 규정되는 일반적 법규범의 창조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일반적 법규범의 창조가 헌법의 적용인 것과 마찬가지로 법원이나 행정기관에 의한 일반적 법규범의 적용은 개별적 법규범의 창조인 것이다.」(357쪽)
「하지만 형식적 요소와 실질적 요소간의 관계는 두 경우 서로 다르다. (실질적 의미의) 헌법은 대체로 입법기관과 절차만을 규정하고 법률의 내용에 관한 규정은 입법기관에 위임한다. 헌법은 제정되어야 할 법률의 내용을, 일정한 내용을 배제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예외적으로만 그리고 단지 소극적 의미에서만 규정할 따름이다. 관습에 의한 법창조를 고려의 대상으로 하는 한, 헌법은 관습으로서의 특성을 갖는 절차만을 위임할 수 있다.」(357-358쪽)

반면, 헌법의 하위 단계에서 창조되는 일반적 법규범은 형식과 내용을 동시에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형법에서는 입법자가 법관의 재판내용, 즉 범죄유형과 제재범위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정해두기 때문에 개별사건에서 형사법원의 재량은 상대적으로 좁다. 행정법에서는 행정기관의 재량이 넓게 인정되는 경우가 많아, 일반규범이 절차와 기관을 규정하면서도 개별결정의 내용에 상당한 여지를 남겨두기도 한다. 켈젠은 이 점을 들어, 헌법은 극도로 형식적인 법인데 반해, 그 하위 단계의 법창조는 형식법이면서 동시에 실체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합헌적으로 창조된 일반적 법규범은 대개 이를 적용할 수 있는 기관과 절차뿐만 아니라 법관의 재판이나 행정처분을 의미하는 개별적 규범의 내용도 규정한다. 형법의 영역에서는 법관의 재판의 내용을 사전에 미리 광범위하게 규정하고 있기에, 개별적 법규범(법원의 재판)을 창조함에 있어 형사법원의 자유재량은 비교적 좁게 인정될 뿐이다. 행정법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재량영역이 대개 상당히 넓은 편이다. 다시 말해 헌법은 지극히 형식적인(절차적인) 법인 데 반해, 직접적으로 헌법의 하위에 있는 법창조단계는 절차적인(형식적인)법인 동시에 실체적인 법이다.」(353쪽)

◎ 재 판

법원이 개별사건에 관해 결정을 내리려면 우선 일반규범이 추상적으로 전제한 구성요건이 구체적으로 충족되었는지를 확정해야 한다. 이때 사실문제와 법률문제가 동시에 다루어진다. 전자는 구성요건사실이 실제로 발생했는지의 문제이고, 후자는 어떤 일반규범이 적용될 규범인지, 그리고 그 규범이 유효한지 여부의 문제다.

먼저 법률문제에 대한 판단, 특히 일반규범의 존재와 내용을 확정하는 행위는 규범창조의 성격을 띤다. 일반규범의 유효성을 평가할 때 법원은 그 일반규범이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또는 헌법이 위임한 관습에 따라 합헌적으로 창조되었는지를 검토해야 하며, 이러한 판단은 법질서가 제재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사실의 일부를 구성한다. 특정 개인에게 특정 제재를 부과해야 한다는 개별규범은 법관의 결정 이전에는 구체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판을 통해 비로소 법질서 내에서 효력을 갖는 규범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법원의 법발견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유효한 규범이 무엇인지를 법질서 내부에서 최종적으로 정립하는 창설적 행위인 것이다.

「자신에 의해 적용되는 일반적 규범을 개별화하기 위하여, 법원은 먼저 자신에게 계류중인 사안에서 일반적 법규범에 추상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불법효과의 조건들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확정해야 한다. 이와 같이 불법효과의 조건이 되는 요건사실을 확정하는 것은 적용되어야 할 일반적 법규범을 확정하는 것, 즉 요건사실이 존재할 경우 그에 대해 제재를 결부시키는 일반적 법규범이 효력이 있는가를 확정하는 것도 포함한다. 법원은 사실문제뿐 아니라 법률문제도 답해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확정된 다음에 비로소 법원은 일반적 법규범에 추상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제재를 구체적으로 명하여야 한다. 이러한 확정과 명령은 법관의 결정이 갖는 본질적 기능이다.」(364쪽)
「법원의 결정은, 때때로 주장되고 있는 바와 같이, 단순히 선언적 성격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법원은 단지 이미 사전에 확정적・완결적으로 창조되고 그 창조가 마무리된 법만을 발견하고 선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법발견은 단지 구체적 사안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 법규범을 확정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확정 역시 단순히 선언적 성격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창설적 성격을 갖는다. 법질서의 효력있는 일반적 규범을 구체적 사안에 적용해야 하는 법원은 자신에 의해 적용될 규범이 합헌적으로 창조된 것인가 … 하는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365쪽).

다음으로 사실문제에 대한 판단, 이를테면 형사사건에서 범죄사실을 확정하는 행위 역시 창설적 성격을 띤다. 법질서가 일정한 효과를 어떤 사실에 연계시키고자 한다면, 그 사실의 존재를 누가, 어떤 절차로 확정할지 또한 법질서가 규정해야 한다. 이 기관과 절차에 의해 확정된 사실만이 법적 요건사실로 인정되며, 그 이전의 자연적 사실은 아직 법질서의 영역 바깥에 머물러 있다. 법원은 우선 어떤 기관이 사실을 확정할 권한을 갖는지, 그리고 어떤 절차가 요구되는지를 판단한 다음, 그 절차에 따라 요건사실의 존재를 확정한다. 이 확정을 통해 비로소 자연적 사실은 법적 사실이 된다.

「법질서가 조건이 되는 일정한 사실에 일정한 효과를 결부시키고 있는 경우, 그 법질서는 구체적 사안에서 조건이 되는 사실의 존재를 확정해야 하는 기관과 절차도 규정해야 한다.」(366쪽)
「이러한 확정을 통해 비로소 요건사실은 법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며, 이러한 확정을 통해 비로소 요건사실은 자연적 요건사실에서 법적 요건사실로 되며, 무엇보다 그 자체 법적으로 창조된다.」(367쪽)

즉 요건사실은 자연적 사실과 결코 같지 않다. 법관의 사실인정은 선언이 아니라 창조이며, 제재의 조건이 되는 것은 가령 어떤 사람이 살인을 했다는 자연적 서술 그 자체가 아니라 권한 있는 법원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그 사람이 살인을 했다고 확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법원이 조건이 되는 요건사실을 확정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건 창설적인 것이다. 일반적 법규범이 살인죄에 대해 일정한 형벌을 연계시키고 있는 경우, 어떤 사람이 살인을 했다는 사실이 곧 제재의 조건이 된다고 설명한다면, 이는 사태를 정확히 기술하지 못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살인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법질서에 따라 권한있는 기관이 법질서가 규정한 절차에 따라 어떤 사람이 살인을 했음을 확정했다는 사실이 곧 법질서가 확정하고 있는 조건이다.」(367쪽)

물론 법원의 결정이 언제나 정당하다고 전제되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는 사실인정이나 절차, 관할의 적법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재판절차는 또 다른 재판절차의 대상이 된다. 상소제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한다. 상급심은 하급심이 확정한 사실과 절차의 적법성을 다시 평가하고, 경우에 따라 새로운 사실 확정이나 재판절차의 개시를 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소의 연쇄도 실정법질서가 정한 한계 내에서만 허용된다. 상소의 가능한 단계가 모두 소진되고, 최종심의 결정에 더 이상 불복할 수 없는 시점이 되면, 그 결정이 확정한 사실관계는 법적으로 최종적인 것으로 인정된다. 이후에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모든 다른 견해들이 법적으로 배제되며, 최종심의 결정이 법질서 내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사실인식으로 자리 잡는다.

「이 모든 경우에 재판절차는 또 다른 재판절차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의 재판절차에서 또 다른 재판절차에 이르는 상소절차가 실정법질서에 의해 제한된다면, 더 이상 또 다른 재판절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재판절차가 존재하게 되고, 절차에 따라 확정된 당해 절차라는 사실이 전심절차라는 사실을 더 이상 대신할 수 없게 되며, 최종적 재판절차라는 한계사례는 그 자체 사실로 인정될 수밖에 없다. 최종심급의 법원의 결정이 확정력을 갖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것은 최종심급의 결정행위가 갖는 주관적 의미가 이제 그 객관적 의미로 승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369-370쪽)

법질서는 어떤 행위를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방식으로만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지 않음으로써 곧 허용하는 방식으로도 규율한다.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은 행위는 법적으로 허용된 행위이고, 소송이 기각되거나 피고인이 무죄를 선고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허용상태가 확인되었다는 뜻이다. 이때 법원은 아무 규범도 적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금지하지 않고 허용하는 법질서를 적용함으로써, 그 행위에 대한 제재 요청이 법적 근거를 상실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죄판결과 청구기각 역시 엄연히 법적용이다.

「법원이 소송을 기각하거나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피고에게 그러한 행위를 허용하는 법질서를 적용하는 것이며, 그러한 행위에 대해 제기된 소송은 법질서에 근거를 두지 않은 것이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은, 이런 의미에서 허용되어 있는 개인의 행위를 보장하는 방법은 법질서가 타인에 대해 그러한 행위를 수인하도록 함으로써 이를 방해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침해하지 않도록 하는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다.」(372쪽)

물론, 허용된 행위들 사이에서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어떤 개인의 허용된 행위가, 역시 허용된 다른 개인의 행위와 충돌하는 경우, 즉 서로의 이익이 대립하는 경우가 생긴다. 켈젠은 어떤 법질서도 가능한 모든 이익을 보호할 수 없으며, 침해금지규범을 통해 항상 일정한 이익만을 선택적으로 보호할 뿐이라고 본다. 그 결과, 허용된 행위 A와 허용된 행위 B 사이의 충돌 상황에서, 현행법이 어느 쪽 이익도 특별히 보호하지 않는다면, 재판은 소송을 기각하거나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 이는 보호할 만한 이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법질서의 일반규범에 의해 보호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만족스럽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불만족은 법질서 구조의 필연적 결과이며, 그 자체를 이유로 법원의 결정을 비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금지되어 있지 않은, 이런 의미에서 허용되어 있는 일방 개인의 행위가, 물리적 폭력의 행사가 아닌 타인의 행위, 즉 마찬가지로 금지되어 있지 않은, 이런 의미에서 허용되어 있는 타인의 행위와 대립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이런 경우에는 이해관계의 충돌이 있게 되며, 법질서는 이러한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법질서도 있을 수 있는 이익충돌을 모두 피할 수는 없다(372쪽).
만약 피고의 행위가 금지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이로써 피고의 행위에 의해 침해된 이익이 규범위반행위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법질서의 일반적 규범을 통해 보호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소송이 기각되거나 피고인에 대해 무죄가 선고된다면, 일방의 허용된 행위와 타방의 허용된 행위 사이의 이익충돌은 불가피한 것으로서 언제나 존재하게 된다.」(373쪽)

따라서 피고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규율하는 일반규범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법의 흠결이라고 부르는 전통법학의 관점은 적절하다고 할 수 없다. 법규범이 명령이나 금지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법질서가 그 행위를 전혀 규율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허용규범을 통해 소극적으로 규율하고 있다는 점이 간과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법원은 구체적 사안에 대해 언제나 법질서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것은 법원이 법질서가 어떠한 일반적 규범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즉 피고에게 일정한 행위를 하도록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원고나 검사로 하여금 피고가 그와 반대되는 행위를 행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해 주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피고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규율하는 어떠한 일반적 규범도 법질서가 포함하고 있지 아니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 피고의 행위는 법질서에 의해 소극적으로 규율되기 때문이다. 즉 피고의 행위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허용되어 있다고 하는 방식으로 규율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법학은 일정한 경우에 이러한 사례를 법질서의 ‘흠결’로 해석한다.」(375쪽)

흠결이론은, 어떤 구체적 사건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규범이 존재하지 않으면 현행법의 적용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해진다고 전제한다. 법원으로서는 기존 법을 적용할 수 없는 이상, 새로운 규범을 창조하여 그 공백을 메워야 한다는 것이다. 켈젠은 이러한 논리 자체가 잘못된 전제에 서 있다고 본다. 일반규범이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그 행위가 허용된다는 규범적 상태를 의미하며, 그 자체가 현행법의 적용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법적용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단지 특정한 방향(의무부과·제재부과)의 법적용이 불가능할 뿐이다. 결국 흠결이라는 말은, 법정책적·형평의 관점에서 불만족스럽다고 느끼는 상황에 붙이는 가치판단에 불과하며, 법논리적 의미에서의 적용 불가능과는 전혀 다른 층위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흠결이론에 따른다면, 구체적 사안에 관련되는 일반적 법규범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현행법은 그 사안에 적용될 수 없다. 따라서 당해 사안을 결정해야 하는 법원은 상응하는 법규범을 창조함으로써 이러한 흠결을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논증의 본질은 법적용의 경우에 불가피한 전제인 일반적 규범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보편성으로부터 특수성을 추론한다는 의미에서의 현행법적용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흠결이론은 법질서가 일정한 행위를 해야 할 개인의 의무를 확정하고 있지 않은 경우 법질서는 그 행위를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전통적 이론이 흠결이라고 생각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현행법질서를 적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376쪽)

켈젠은 이른바 흠결로 불리는 상황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실은 단지 법정책적 불만족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컨대 새로운 기술인 전기절도에 대해 형벌을 부과하는 명문규정이 없는 경우를 흠결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형평에 어긋나거나 부당하게 느껴지는 사례는 이와 정반대의 경우에도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강도살인과 극히 다른 성격을 지닌 촉탁살해를 동일하게 처벌하는 규범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이것을 부당하다고 느낄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형평에 어긋난다는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전자만 흠결로 규정하고 후자는 흠결로 보지 않는 것은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않다. 결국 어떤 내용을 가진 규범의 부재 또는 존재를 부당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상대적 가치판단이며, 이 판단 자체로는 법질서의 논리적 구조에 대한 진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질서가 전기절도에 대해 형벌을 부과하는 법규범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법질서가 강도살인의 경우를 아들이 불치의 고통에 시달리는 아버지의 촉탁에 따라 그를 살해한 경우와 동일하게 처벌할 수 있는 법규범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형평에 어긋나거나 부당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물론 후자의 경우에도 현행법의 논리적 적용불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의 흠결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자의 경우에만 흠결을 인정하고 후자의 경우에 흠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적어도 일관되지 못하다. 따라서 일정한 내용을 가진 법규범의 결여를 형평에 어긋난다거나 부당하다고 하는 판단은 극히 상대적인 가치판단이며 그와 상반되는 가치판단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376-377쪽)

이론적으로는 취약하지만, 흠결 개념은 근대 입법기술에서는 실질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가령 민법전은 법률에 규정이 없는 경우 법관이 관습법에 따라, 관습법도 없으면 자신이 입법자라면 제정했을 조리에 따라 재판하도록 규정한다. 법질서는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적용 가능하며, 설령 피고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규범이 없어서 청구를 기각해야 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허용규범이 적용되고 있다. 따라서 법에 규정이 없는 경우라는 전제는 실질적 진술이라기보다 하나의 의제(fiction)에 불과하다. 이 의제는, 특정한 법정책적 이유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규정의 부재를 곧 법의 논리적 공백으로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법관이 예외적으로 새로운 규범을 창조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 법률은 문언이나 해석상이 법률이 규정을 두고 있는 모든 법적 문제에 적용된다. 이 법률에 규정이 없는 경우 법관은 관습법에 따라, 관습법마저 없는 경우에는 그가 입법자라면 제정하였을 조리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스위스 민법전이 그 대표적 예이다.」(377쪽)
「위에서 인용한 규정이 기초하고 있는 전제는 의제에 불과하다. 이러한 의제의 본질은 법질서 내의 일정한 법규범의 흠결―이것은 주관적이며 도덕적・정치적인 가치판단에 기인한다―을 곧 법질서의 논리적 적용불가능성으로 본다는 데 있다.」(378쪽)

입법자가 굳이 이런 의제를 사용하는 것은, 입법 당시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나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기존 일반규범을 그대로 적용하면 매우 불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현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때 입법자는 법원에게, 그런 특수한 경우에는 기존 일반규범을 그대로 적용하는 대신, 개별사안에 맞는 개별규범을 창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권한을 이론적으로 정직하게표현하면, 곧 법관이 자신이 도덕적·정치적으로 불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경우마다 재량으로 사건을 결정할 수 있다는 폭넓은 재량으로 이어진다. 이는 사실상 입법자의 역할을 법관에게 넘겨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입법자는 법관의 재량을 제한하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예외적 사건을 처리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기 위해, ‘법의 흠결이 있는 경우에만 법관이 입법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의제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만약 입법자가 이러한 권한을 이론적으로 정당한 방식으로, 즉 어떤 의제도 활용하지 않고 표현하고자 한다면, 입법자는 다음과 같이, 즉 ‘법원의 도덕적・정치적 견해에 의할 경우 현행법을 계류중인 사안에 적용하는 것이 불만족스럽다면 법원은 자신의 재량에 따라 사안을 결정할 수 있다’는 식으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법원에게 지나치게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378쪽)
「따라서 입법자는, 그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법원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현행 법질서가 일정한 경우에는―주관적이며 도덕적・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이유 때문에 적용될 수 없는 경우가 있고, 법관은 법의 흠결이 있는 경우에만 입법자로 기능할 수 있다는 의제를 사용한다.」(379쪽)

켈젠은 그러나 이 의제가 이론적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관점에서 현행법은 언제나 논리적으로 적용가능하며, 엄밀한 의미에서의 흠결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이 의제를 진실한 전제로 받아들인다면, 실제 효과는 오히려 입법자의 의도와 달리 나타날 수 있다. 다만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법관이 새로운 법창조의 책임을 쉽게 떠맡으려 하지 않고, 특히 상급심의 통제를 받는 직업법관일수록 가능한 한 흠결 인정 범위를 좁게 설정한다. 이로 인해 법원의 입법적 재량은 실무상 매우 제한적으로 행사된다. 켈젠은 여기에서 법의 흠결이라는 개념이 이론적으로는 허구이지만, 법관의 심리와 관행에 작용함으로써 일정한 자기억제 효과를 발생시키는 통제장치로 기능한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현행법은 논리적으로 언제나 적용가능하며 이런 의미에서 결코 ‘흠결’이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법의 흠결이라는 공식이 갖는 의제적 성격을 간파한다면, 그 공식은 법원에게 부여된 권한의 제한이라는 애초의 의도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제한을 스스로 폐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하지만 법의 흠결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법원 역시 인정한다면, 이론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이러한 의제는 애당초 의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법창조에 대한 책임을 쉽게 감수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 법관은 극히 예외적으로만 흠결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고, 따라서 그에게 부여된 권한 즉 입법자를 대신할 수 있는 권한을 아주 드물게만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379쪽)

실증주의자들 중 상당수는 순수한 흠결’, 즉 법과 바람직한 법 사이의 간극으로서의 흠결은 부정하면서도, 입법자가 규범화했어야 할 사항을 사실상 누락한 경우를 기술적 흠결로 인정하려고 한다. 켈젠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기술적 흠결도 결국 두 가지 현상으로 환원된다. 하나는 i) 실정법과 바람직한 법 사이의 차이, 다른 하나는 ii) 상위규범이 테두리만 설정하고 세부사항을 하위규범이나 기관의 재량에 위임한 결과로 생기는 불명확성이다. 예컨대 매매계약에서 위험부담의 귀속에 관한 명문규정이 없는 경우, 흠결론자들은 입법자가 아무 규정도 두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켈젠은 오히려 그 법률이 예외규정을 두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매도인이 위험을 부담한다는 규범을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선거절차에 관한 규정이 없을 경우, 이는 모든 선거방식이 허용된다는 의미이며, 절차는 하위규범이나 권한 있는 기관의 재량에 맡겨져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들을 흠결로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법이 무의미하거나 미숙하게 규정되어 있다는 가치판단을 표현하는 것이지, 법질서가 논리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고유한 흠결, 즉 이른바 순수한 흠결 이외에 우리는 때때로 기술적 흠결(technische Lücke)을 구별하기도 하는데,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순수한 흠결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조차 이러한 기술적 흠결이 가능한 것으로 본다. 법률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히 기술적으로 가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입법자가 규범화했어야 할 사항을 규범화하지 않고 이를 해태한 경우에는 이러한 기술적 흠결이 존재하게 된다. 다만 우리가 기술적 흠결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본래적 의미에서의 흠결, 즉 실정법과 바람직한 법간의 차이를 의미하거나 아니면 규범의 테두리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불명확성을 의미할 따름이다. … 이것은 임의의 모든 선거방법, 즉 비례제든 다수결이든, 공개투표에 의하든 비밀투표에 의하든 어느 것이나 합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380쪽)
「이런 경우에도 ‘흠결’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381쪽)

◎ 법률행위

계약에서 쌍방 당사자는 일정한 행위의무를 하기로 약속함으로써 당위를 설정하지만(주관적 의미), 거기에 법질서가 법창조적 요건사실이라는 지위를 부여해 주어야 비로소 법규범이 된다(객관적 의미). 즉 법률행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규범을 만들지만, 그것은 제재를 직접 규정하는 독립규범이 아니라, 상위의 일반적 법규범과 결합될 때에만 제재를 매개하는 법규범으로 기능할 수 있다.

「법률행위를 뜻하는 행위의 주관적 의미는 규범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법률행위는 규범창조적 요건사실이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법률행위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가능하다. 전통적 법률용어에 따를 경우 ‘법률행위’(Rechtsgeschäft)라는 말은 규범창조적 행위와 그 행위에 의해 창조된 규범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대표적 법률행위로는 계약을 들 수 있다. 계약을 통해 체약당사자는 서로에 대해 일정한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sollen)고 약정한다. 이러한 당위가 곧 법률행위의 주관적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은 법률행위의 객관적 의미이기도 하다. 즉 이러한 행위는 법질서가 그러한 요건사실에 대해 법규범창조적 성격을 부여하는 경우에 또 그런 한에서 법규범창조적 요건사실이다.」(390쪽)

입법이나 관습으로 미리 정해진 일반적 규범은 어떤 종류의 법률행위가, 어떤 위반과 결합할 때, 어떤 제재를 부과하는가를 미리 틀로 제공한다. 법질서는 법률행위를 법창조적 요건사실로 승인함으로써, 수범자에게 자기들 상호관계를 일정 범위 안에서 자율적으로 규율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 계약은 단지 심리적 의사의 일치가 아니라, 법질서가 승인하는 외부적·객관적 행위이다. 때문에 계약은 법적 효력을 발생시키기 위해 반드시 외부화된 표시를 필요로 하며, 내심의 의사만으로는 규범창조적 효과를 갖지 못한다. 그런데 외부적 표시는 언제나 내심의 의사와 불일치할 가능성을 갖는바, 이 불일치가 계약의 효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법정책적 선택의 문제라고 켈젠은 본다. 거래안전을 우선하는 법질서는 표시된 의사를 우선하고, 개인적 자유를 중시하는 법질서는 내심의 의사에 더 비중을 둘 수 있다는 것이다(393쪽). 그리고 청약이 승낙 이전에 철회될 수 있는지, 청약자는 얼마 동안 구속되는지 등도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오로지 실정법이 결정하는 문제라고 한다(393쪽).
그리고 계약은 원칙적으로 당사자만을 구속하지만, 예외적으로 제3자에게 권리나 의무를 부과하는 계약도 있을 수 있다. 켈젠은 이 또한 자연적 권리가 아니라 법질서가 허용할 때만 가능하다고 한다(395쪽). 계약의 상대적 효력 원칙도 결국 실정법의 승인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결국 사적자치조차 자연권이 아니라 ‘법질서가 허용한 범위 내부의 규범창조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율성은 제재규정을 담고 있는 일반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때 행위로서의 계약은 규범을 창조하는 요건사실일 뿐이고, 실제로 당사자를 구속하는 것은 계약에 의해 창조된 규범이다.

「법질서는 법률행위를 법창조적 요건사실로 인정함으로써 입법이나 관습에 의해 창조된 일반적 법규범의 범위 내에서, 법률행위에 의해 창조된 규범을 통해 그들 상호간의 관계를 규율할 수 있는 권한을 수범자에게 부여한다. 이와 같이 법률행위에 의해 창조된 규범은 제재가 아니라 일정한 행위를 확정하는 것이며, 그 행위에 반대되는 행위가 일반적 법규범이 확정하고 있는 제재의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독립적 법규범이 아니다. 그것은 제재를 확정하고 있는 일반적 법규범과 결합할 경우에만 법규범이 된다. 법률행위로부터 생긴 분쟁사례를 결정하는 민사법원은 법률행위의 기초가 된 일반적 법규범의 효력을 확인해야 할 뿐만 아니라 법률행위가 있었고 법률행위에 위배되는 행위가 존재하며, 나아가 그로 인해 야기된 손해에 대한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확인에 기초하여 개별적 법규범, 즉 ‘법원에 의해 확정된 손해를 일정한 기한 내에 배상하지 않을 경우 법원에 의해 적용되어야 할 일반적 법규범이 확정하고 있는 제재가 집행되어야 한다’는 개별적 규범을 정립해야 한다.」(390-391쪽)
「법규범창조적 요건사실로서의 계약과 이러한 요건사실에 의해 창조된 규범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계약의 효력이라고 말할 때에는 이러한 요건사실에 따라 창조된 규범을 연상한다.」(394쪽)

일반적으로 계약은 개별적 규범을 창조한다. 예컨대 매매와 같이 특정한 물건·대금이라는 일회적 급부를 정하는 규범이다. 하지만 보험계약, 가입조항 있는 조약, 단체·국제기구의 헌장 등은 일반적 규범을 창조한다. 즉 계약은 일정한 경우 헌장·정관과 같은 일반규범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

「국내법상의 단체의 정관 또는 국제법상의 국제연맹이나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의 헌장을 성립시키는 계약은 일반적 법규범을 창조하는 특별한 유형의 계약이다.」(396쪽)

◎ 행 정

켈젠은 사법 대 행정이라는 전통적 구분은 기능 내용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두 기관(법원과 정부)을 기준으로 한 구분일 뿐이며, 법체계적 관점에서는 i) 법창조법적용기능과, ii) 법준수기능을 분리해 고찰함이 적확하다고 본다.

「법의 구조분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국가행정이란 표현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기능을 지칭한다는 점, 그리고 이들 기능을 서로 구분함으로써 전통적 이론에 의해 재판이나 사법이라는 국가기능과 분리하여 국가행정이라고 불리고 있는 영역이 둘로 나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전통적 구분방법은 기능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사법과 행정이라 불리는 두 기관의 구분이며, 근대국가에서의 그러한 구분은 역사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을 뿐, 법체계적 관점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다.」(402쪽)

먼저 행정은 i) 사실상 입법·사법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는 법창조·법적용 기능을 수행한다. 정부는 헌법의 위임 하에 입법에 참여하고, 조약을 체결하고, 법규명령과 행정명령을 제정하는바, 이는 일반적 규범과 개별적 규범을 창조·적용하는 법기관으로서의 작용이다.

「최고행정기관인 정부의 기능은 헌법의 위임에 따른 입법에의 참여, 헌법에 의해 부여된 조약체결권의 행사, 정부에 종속된 행정기관이나 국민을 대상으로 한 합헌적 법규명령이나 행정명령의 제정 등 일반적 규범과 개별적 규범의 창조와 적용을 그 본질로 한다.」(398쪽)

그리고 행정기관이 제재를 확정하고 집행하는 방식은 법원의 재판과 법기술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조세·위생·교통규정 위반에 제재를 부과하는 행정법과, 절도·명예훼손을 처벌하는 형법은 법적 구조상 거의 동일하다. 차이는 기능 내용이 아니라, 담당기관이 상급기관의 지시에 구속되는지(행정) 아니면 독립하여 법에만 구속되는지(사법)에 있을 뿐이다.

「사법기관의 독립성이라는 측면을 도외시한다면, 절도죄에 대해 자유형을 부과하거나 명예훼손죄에 대해 벌금형을 부과하는 법원의 기능과 조세나 위생 또는 교통관련규정을 침해한 경우에 유사한 제재의 집행을 명하는 행정기관의 기능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그 밖에 제재의 집행은―비록 그것이 법원에 의해 명령되더라도―행정행위에 해당하며, 그 집행기관은 법원이 아니라 행정기관이다.」(399쪽)

다만 제재 아닌 영역에서는 재판기능과 행정기능 사이의 기능적 차이가 드러난다. 행정에서는 규범위반에 대한 제재뿐만 아니라 공익실현의 목적을 위해 개인에게 일정한 상태를 강제하는 경우가 있다. 강제입원, 재산의 수용·파괴 등은 개인의 위법행위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독자적 강제조치로서 정당화되는 영역이다.

「재판기능과 행정기능 간의 기능적 차이는 강제행위가 제재로서의 성격을 갖지 않는 경우에, 즉 환자의 강제수용 또는 재산권의 강제수용이나 파괴, 기타 이와 유사한 강제행위를 확정하고 있는 법규범의 적용이 문제되는 경우에 나타난다.」(399쪽)

다음으로 행정은, ii)는 공무원 직무의무의 이행을 본질로 하는 법준수기능으로 수행되기도 한다. 철도 건설·운영, 학교·양로원 설립, 교육·의료 제공과 같은 활동이 대표적이다. 내용만 놓고 보면 이들은 사인의 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행위를 수행하는 개인들이 법적으로 국가공무원이라는 특수한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그 활동이 국가의 것으로 귀착된다는 특성이 있을 뿐이다. 이 경우 행정은 규범창조·적용이 아니라, 직무의무로 규정된 규범의 준수로서 비로소 국가기능이 된다. 징계벌은 바로 이러한 직무의무 불이행에 대한 특수한 제재로 이해된다.

「법규범의 창조나 적용을 그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자격을 부여받은 개인, 즉 ‘국가공무원’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개인에 의한 법규범의 준수를 그 본질로 하는 행위는 지금까지 위에서 언급했던 두 가지 유형의 행정행위, 즉 협의의 의미에서의 법기능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국가행정이라 불리는 이러한 활동은 사인이 행하는 경제활동이나 문화활동과 유사한 성질을 띠고 있다. 즉 사인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철도를 건설・운영하고 학교와 양로원을 세우며 교육을 행하고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 국가행정으로서의 이러한 활동은 사인이 행하는 동종의 활동과 그 내용에 있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활동을 행하는 개인들이 법적으로 국가공무원으로서의 자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다시 말해 이러한 기능은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즉 그 기능이 일정한 자격을 가진 개인에 의해 수행되는 경우에, 이를 수행하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 귀착된다.」(399-400쪽)
「국가행정으로 해석되는 이러한 활동이 특수한 직무의무의 내용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하겠다. 이러한 직무의무는 법규범에 의해 형성되며, 법규범은 직무행위의 불행사나 남용에 대해 특수한 벌칙인 이른바 징계벌을 연계시키고 있다.」(400쪽)

* 켈젠은 공무원에게 부여된 특수한 직무의무와 권한을 규율하는 규범들을 전체 법질서 안의 ‘부분법질서’로 파악한다. 이 부분법질서는 정부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적 공무원기구를 구성하고, 이를 의인화해 인격을 부여한 것이 ‘협의의 국가’다. 반면 국가영역 내 모든 개인의 행위를 규율하는 전체 법질서에 인격을 부여한 것이 ‘광의의 국가’다. 협의의 국가란 공무원 조직의 법질서를, 광의의 국가란 그 부분질서를 포함한 전체 법질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행정으로 이해되는 공무원 기능은, 부분법질서의 통일성에 관계된다는 점에서 협의의 국가에 귀착되며, 동시에 그 부분법질서가 포함되는 전체법질서의 통일성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광의의 국가에도 귀착된다.
「개인에게 특수한 직무의무를 부과하고 특수한 직무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그 개인의 행위를 규율하는 규범은, 그 영토적 적용범위에서 살고 있는 모든 개인의 행위를 규율하는 전체법질서 내에서, 단지 국가공무원의 자격을 지닌 개인들만을 포괄하는 부분공동체를 구성하는 부분법질서를 이루고 있다.」(401쪽)
「좁은 의미에서의 국가에의 귀속은 넓은 의미에서의 국가에의 귀속을 포함하고 있다.」(401쪽)

국가목적(의무 이행, 권리 행사, 허용된 행위의 가능화)이 오로지 강제행위의 확정·집행을 통해서만 실현된다면, 국가기능은 간접적 국가행정, 곧 법창조·법적용 기능으로 한정된다. 반대로 공무기관의 활동 자체가 교육·복지·서비스 제공 등의 형태로 직접 국가목적을 실현하는 경우, 그것은 법준수 기능으로서의 직접적 국가행정이다. 법질서는 법준수기능이 동시에 법창조기능을 겸하도록 할 수 있다. 가령 공무기관이 계약 등 법률행위를 통해 규범을 창조하는 경우, 그 행위는 1차적으로 직무의무 이행(법준수)이며, 2차적으로 규범창조(법기능)로 이해된다.

「그 기능에 있어 사법과 구별되지 않고―사법과 마찬가지로―법창조기능과 법적용기능에 속하는 간접적 국가행정을, 법준수기능이라는 점에서 재판기능과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직접적 국가행정과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법준수기능이 또한 법창조기능이라면, 사법으로서의 성격이 아니라 법률행위로서의 성격을 갖는 한에서 그러하다.」(402쪽)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