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켈젠(변종필/최희수 역), 《순수법학》, 길안사, 1999
Hans Kelsen, Reine Rechtslehre (1963)
<차 례>
[10] - 법동태학 中(법질서의 단계구조 1: 위계질서)
[11] - 법동태학 下(법질서의 단계구조 2: 규범충돌)
A. 정의규범과 정의판단
정의는 인간의 성품이나 태도를 평가하는 개념으로서 기본적으로 도덕의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다. 그렇다고 모든 도덕규범이 곧바로 정의규범인 것은 아니다. 내면적 성향은 반드시 사회적 행위를 통해 외적으로 드러나는 만큼, 정의의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떠한 규범이 정의규범이 되려면 반드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를 규정하고 있어야 한다.
「정의(Gerechtigkeit)는 다양한 대상들에 대해서 언급되는 속성이다. 그것은 먼저 인간에 대해 언급된다. 우리는 인간, 특히 입법자나 법관을 정의롭다거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의란 인간의 미덕이다. 모든 미덕과 마찬가지로 정의의 미덕 역시 도덕적 성격을 띠며, 그런 한에서 정의는 도덕의 영역 내에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 말해진 정의의 특성이나 미덕은 그의 행위, 더욱이 다른 인간에 대한 그의 행위, 즉 그의 사회적 행위를 통해 표현된다. 인간의 사회적 행위가 그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에 합치되는 경우, 그것은 정당하다. 즉 그 경우에 당위적인 것으로 정립되며, 따라서 정의가치를 형성한다.」(527쪽)
가령 자살을 금지하는 규범은 도덕규범일 수는 있지만 정의규범은 아니다. 정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규범적 평가라는 점에서 특수한 도덕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도덕규범이 정의규범인 것은 아니며, 모든 도덕규범이 정의가치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일정한 취급, 특히 입법자나 법관에 의한 인간에 대한 취급을 규정하는 규범만을 정의규범으로 간주할 수 있다. 자살하지 말라는 규범은 그러한 행위가 공동체에 대해 갖는 악영향 때문에 그런 행위를 금지하는 도덕규범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규범은 정의규범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취급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527-528쪽)
정의규범에 기대어 일정한 행위를 평가하는 것을 정의판단이라 한다. 이는 사실판단이 아니라 가치판단이다. 단순 사실에 불과한 현실의 행위에 대한 정의가치(가치/판가치) 평가는 오직 정의규범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 점에서 정의는 사실의 성질이 아니라 평가의 결과이다.
「정의는 특별한 인간행위, 즉 다른 인간에 대한 취급을 그 본질로 삼는 행위의 속성이다. 그러한 행위가 정당하다거나 부당하다는 판단은 가치판단(Beurteilung), 즉 행위에 대한 평가이다. 판단이나 평가의 대상은 존재사실이다. 존재사실만이 규범과 대면해서 가치 있는 또는 반가치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 있고 적극적 또는 소극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해 평가되는 것, 가치 있거나 반가치적인 것, 적극적 또는 소극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현실이다.」(528쪽)
B. 정의론의 과제와 방법론
◎ 정의론의 과제
정의규범은 법규범과 마찬가지로 규범이다. 대전제인 일반적 정의규범으로부터 결론인 개별적 정의규범을 이끌어내려면, 소전제로서 사실에 관한 진술이 매개로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개별적 정의규범의 효력근거는 소전제인 사실판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전제인 일반적 정의규범에 있다. 결론은 이미 대전제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소전제는 단지 그 적용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사실판단에 불과한 소전제 그 자체에서는 어떠한 당위도 산출되지 않는다.
「일반적 규범으로부터 개별적 규범의 효력을 이끌어내는 경우에 시도되는 논리적 작용에는 물론 사실에 대한 주장인 존재판단도 나타난다. 따라서 개별적 규범의 효력을 언급하는 명제, 즉 나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명제는 일반적 규범의 효력을 언급하는 명제, 즉 모든 인간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명제로부터 단지 존재(즉 사실)를 주장하는 언명, 즉 나는 인간이다라는 언명을 매개로 해서만 도출될 수 있다. … 하지만 결론은 단지 대전제 속에 포함될 수 있지, 나는 인간이다라는 소전제 속에 포함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전제만이 결론과 마찬가지로 당위명제이며 진리언급에 관한 언명인 반면, 소전제는 존재명제이며 인간존재에 관한 언명이기 때문이다.」(535쪽)
따라서 정의규범의 효력을 의사행위, 특히 사실로서의 명령행위에서 찾을 수는 없다. 누군가가 어떤 행위를 명령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명령이 따라야 할 ‘규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명령의 주관적 의미가 객관적 의미, 즉 구속력 있는 규범으로 해석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규범적 전제가 필요하다. 정의규범의 효력은 명령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를 규범으로 승인해 주는 상위규범에 근거한다.
「규범의 효력은 존재사실에 바탕을 둘 수 없다는 논리적 원칙은 그 사실이 의사행위―일정한 방식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는 것이 이것의 주관적 의미이다―인 경우에도 적용된다. 널리 퍼져있는 논증, 즉 입법자나 신이 우리가 일정한 방식에 따라 행위해야 할 것을 의욕(즉 명령)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정한 방식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는 논증은 오류이다.」(536쪽)
그런데 법질서에서도 그렇지만 정의규범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효력근거의 제시는 무한히 연쇄될 수 없다. 모든 규범은 상위규범에 의해 정당화되지만, 이 연쇄는 언젠가는 반드시 끝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종국점이 바로 근본규범이다. 근본규범은 더 이상 다른 규범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으며, 규범체계 전체의 효력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이다. 정의론의 과제란 결국 여러 다양한 정의규범들의 공통분모이자 공통 효력근거, 즉 정의규범의 근본규범을 찾아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규범적 효력근거제시의 절차는 불가피하게 종국점, 즉 더 이상 근거지워질 수 없는 최고의 가장 일반적인 규범인 이른바 근본규범―이것의 객관적 효력은 그 어떤 행위의 주관적 의미인 당위가 그 객관적 의미로 정당화되는 경우에 전제되어 있다―에 이르게 된다. …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일정한 취급이 우리가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규범에 합치될 때 우리는 그러한 취급을 정당한 것으로 판단한다. 왜 우리가 그 규범을 효력 있는 것으로 간주하느냐는 물음은 결국 정의가치를 형성하는 규범으로서 우리에 의해 전제된 근본규범에 이르게 된다.」(537쪽)
◎ 방법론
이 과정을 수행하려면 일단 지금까지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정의롭다고 평가해왔는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켈젠은 말한다. 현실에서는 서로 상이하고 때로는 상충하는 수많은 정의규범들이 동시에 효력 있는 것으로 간주돼온바, 과학적 정의론이 일반적 정의개념에 도달하려면 우선 그러한 다양한 정의공식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공통요소를 추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서로 매우 상이하고 서로 부분적으로 대립되는 매우 많은 정의규범들이 효력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다. 정의문제에 관한 과학적 취급은 이러한 정의규범들로부터, 따라서 인간이 실제로 현재와 과거에 ‘정당한’ 것으로 명명하고 정의라 칭하는 바에 관해 갖고 있는 표상이나 개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의론의 과제는 인간들이 어떤 것을 ‘정당하다’고 평가하는 경우에 그들이 사실상 효력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다양한 규범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과학으로서의 정의론은 무엇이 정당한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즉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를 규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정당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서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체를 가치판단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정의론은 다양한 정의규범들 속에서 공통분모를 확인하고, 따라서 일반적인 정의개념에 도달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537쪽)
정의규범은 크게 형이상학적 유형과 합리적 유형으로 나뉜다. 그중 형이상학적 정의규범은 초월적 심급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며, 그 내용은 인간이성으로 파악될 수 없다고 전제된다. 특히 플라톤식 사유에서 정의는 절대적 선의 이데아와 동일시되고, 인간이 토론과 논증을 통해 공유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니라 소수에게만 허락된 관조의 대상이며, 언어로는 결코 전달될 수 없다.
「정의규범은 형이상학적 유형과 합리적 유형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유형의 정의규범은 그 본질상 모든 경험적인 인간인식을 넘어 존재하는 초월적인 심급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 따라서 본질적으로 그러한 초월적인 심급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538쪽)
「플라톤은 모든 감각적 표상으로부터 벗어난 추상적 사유의 특별한 방법, 즉 이른바 변증론을 거듭 제시한다. 하지만 그 스스로는 그 자신의 대화에서 이 방법을 적용하지 않거나 그러한 변증론의 성과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더욱이 그는 절대선의 이데아에 대해, 그것은 모든 합리적 인식(모든 사유)을 넘어서 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 절대선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정의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답도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이 플라톤의 최종결론이다.」(583-584쪽)
그러나 이는 사회적 현실에서 적용 가능한 규범이 아니라 초월적 신비에 불과하다. 절대적 정의는 인간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비합리적 이상이며, 그것이 약속하는 행복은 초현세적 환상에 불과하다. 물론, 다른 정의이상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형이상학적 정의에 인간이 강한 매력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정의에 대한 갈망은 사실상 행복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며, 현세의 실정법질서는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언제나 불충분하므로, 나약한 인간은 절대적 정의를 상정하고 그 실현을 내세로 이월하고 싶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세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상대적 정의, 즉 실정법질서가 제공하는 불완전한 평화와 안정뿐이다.
「정의에 대한 동경은 근본적으로 행복에 대한 파괴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세상이 열망하는 정의, 즉 탁월한 정의는 절대적 정의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합리적 이상이다. … 그러므로 정의의 근원―또한 정의의 실현―은 현세로부터 내세로 옮겨질 수밖에 없으며, 현세에서는 모든 실정법질서 및 그것에 의해 다소간 확보된 평화상태와 안정상태 속에서 엿볼 수 있는 단순히 상대적인 정의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상대적・현세적 정의로는 보장될 수 없는 현세적 행복―바로 이것 때문에 정의가 열렬히 요구된다―의 자리를, 신의 절대적 정의를 통해 신과 그 정의를 믿는 사람들에게 약속되는 초현세적 행복이 대신한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환상의 간지(奸智)이다.」(536-537쪽)
따라서 형이상학적 정의규범은 분석의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다. 오로지 경험세계의 인간행위에 근거하는 합리적 유형의 정의규범만이, 인간이성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을 지닌다. 이러한 정의규범은 상대적이며, 서로 양립불가능한 다수의 정의이상들이 공존할 수 있다. 켈젠은 과학적 정의론은 바로 이 합리적 유형의 정의규범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비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정의문제에 접근한다면, 그리고 일방이 타방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서로 모순되는 매우 많은 다양한 정의이상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정의이상들을 통해 형성된 정의가치에 단지 상대적 가치만을 부여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분석은 합리적 유형의 정의규범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539쪽)
C. 정의규범들에 대한 분석
◎ 각자에게 그의 것을
가장 흔히 사용되는 정의공식은 ‘각자에게 그의 것을’이다. 이 표어 자체는 직관적으로 정의로워 보이지만, 정작 결정적 질문인 ‘그의 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규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공식은 결국 ‘돌아가야 할 것이 돌아가야 한다’는 동어반복이 된다. 이 공식을 적용하려면, 각자의 권리·청구·귀속을 이미 정해주는 어떤 규범질서가 효력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정의공식으로는 잘 알려진 ‘각자에게 그의 것을’(suum cuique)이라는 공식, 즉 각자에게 그에게 귀속되는 것(그가 청구를 할 수 있는 것, 그가 권리를 갖는 것)이 분배되어야 한다는 규범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규범을 적용하는 데 결정적인 문제로 떠오르는 물음인 ‘그의 것’, 각자에게 귀속되는 것, 그의 권리가 무엇인지가 이 규범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각자에게 귀속되는 것은 그에게 분배되어야 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각자에게 그의 것을’이라는 공식은 각자에게 분배되어야 하는 것이 각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동어반복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정의규범의 적용은 각자에게 ‘그의 것’, 즉 그에게 귀속되는 것(그가 권리를 갖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규범질서의 효력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타인은 이러한 질서에 의해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갖기 때문이다.」(539-540쪽)
그 결과 이 공식은 실정법질서를 포함해 거의 모든 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승인해버리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내용이 비어 있는 정의공식은 실제로는 기존 질서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재확인하는 장치가 된다. ‘각자의 권리’가 무엇인지가 이미 실정법질서에 의해 정해져 있다면, 그 질서가 무엇이든지 ‘각자에게 그의 것을’이라는 공식에 합치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즉 정의공식은 질서를 ‘심판’하는 기준이 아니라, 질서를 전제로 ‘승인’하는 형식이 된다. 그 공식이 만들어내는 정의가치는 그것이 전제한 질서가 만들어내는 가치들과 일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일정한 의무와 권리를 확정하는 그러한 모든 질서, 특히 모든 실정법질서가 ‘각자에게 그의 것을’이라는 정의규범에 합치될 수 있고, 따라서 정당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규범의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보수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규범이 형성하는 정의가치는 그 규범을 적용함에 있어 전제되어 있는 질서(특히 법질서)의 규범들에 의해 형성되는 가치 또는 가치들과 일치한다.」(540쪽)
◎ 황금률
황금률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황금률은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방식으로 정당성을 정립하려 하지만, 이 문장은 사람들의 욕망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만약 ‘원함’이 기준이라면 범죄자 처벌은 불가능해지고, 비난과 훈육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심지어 거짓말과 아첨까지 의무가 되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황금률이 ‘주관적 기준’을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만들면 도덕질서와 법질서는 성립할 수 없게 된다.
「‘남이 네게 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이른바 황금률도 같은 종류의 것이다. 적극적으로 표현할 때 이것은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정의원칙이다. 우리가 이 공식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공식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명백하게 의도하지 아니한 결론에 이르게 됨을 알게 된다.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해야 한다면, 범죄자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불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떠한 범죄자도 처벌받기를 원치는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범죄자도 처벌받기를 원치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공식을 적용하면, 실정법의 본질적인 구성부분이 배제되고 만다. 누구도 비난받기를 원치 않는다. 비난의 가능성 없이는 교육은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이 아첨받기를 원하며, 대부분의 사람은 그들에게 불쾌한 진실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거짓을 듣고 싶어한다. 이로부터 그들이 타인에게 아첨을 하거나 타인을 속여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거나 또는 그러한 권한만을 갖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세상은 속이기를 원한다(Mundus decipi vult)’. 이로부터 ‘그러므로 속아 주어야 한다(ergo decipiatur)’는 명제를 도출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 아닌가?」(540쪽)
황금률이 약속하는 사회적 조화는 사실상 환상이다. 사람들이 ‘선한 대접’에 관해 동일한 판단을 갖지 않기 때문에, 내가 선하다고 믿는 대접이 타인에게는 나쁜 대접일 수 있다. 그러면 황금률은 충돌을 제거하기는커녕 오히려 충돌을 정당화하거나, 해결기준 제시에 실패한다. 결국 황금률이 사회질서의 근본규범으로 기능하려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원해야 하는 대로’라는 규범적 기준이 필요한데, 당연하게도 황금률은 그 기준의 내용을 제공하지 못한다.
「황금률이 그 의도하는 바대로 사회질서의 근본규범으로 봉사하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실상 스스로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대접받기를 원해야 하는 대로, 다시 말해 우리가 자신에게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 규범에 따라 대접받아야 하는 대로 타인을 대접하는 규범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대접받아야 하는가? 어떤 것이 이러한 일반적 규범의 내용인가? 이러한 중요한 물음에 대해 황금률은 대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는 ‘각자의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각자에게 그의 것을’이라는 공식이 대답을 제공하지 않는 것과 같다.」(542쪽)
◎ 정언명령
켈젠은 칸트의 정언명령, 즉 ‘네가 의욕할 수 있는 격률이 동시에 보편법칙이 되도록 행위하라.’는 공식도 실제로 개별적 도덕규범(자살금지, 약속 준수, 변제의무 등)을 산출해낼 수는 없다고 본다. 만약 정언명령을 통해 그러한 규범들을 도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숨은 전제에 의존하는 ‘기만적 추론’이다. ‘보편법칙이 되도록 의욕할 수 있는 격률’이라는 표현은 어떤 격률이 보편법칙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 기준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주어진 도덕률을 전제할 때에만 작동하는 공허한 형식인 것이다.
「정언명령은 일정한 행위를 요청한다. 그것은 윤리적으로 선하게 행위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대답은 이렇다. 네가 의욕할 수 있는 격률이 보편법칙이 되도록 행위할 때 너는 윤리적으로 선하게 행위하는 것이다. 여기서 ‘격률’(Maxime)이란 어떤 인간이 사실적으로 행위하고자 원하고 스스로 행위하고자 시도하는 기준이 되는 규칙을, “보편법칙” (allgemeines Gesetz)이란 인간행위의 당위적 기준인 일반적 규범을 말한다. … 현실적으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행위의 규칙으로 삼고 있는 것을 보편법칙이 되도록 의욕할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되는 경우, 정언명령이 필연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를 초래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실상 어떠한 일의적인 격률에 대해서도 그것이 보편법칙이 되도록 의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전제되어 있는 도덕의 관점에서 본다면 많은 경우에 있어 그것은 비난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543-544쪽)
칸트는 어떤 격률이 보편법칙이 되도록 ‘의욕할 수 없는’ 경우, 즉 어떤 격률을 보편법칙으로 고양시키려는 의지 또는 그 산물로서의 법칙이 그 자체 모순되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때 그 격률은 정언명령에 의해 배제된다고 본다. 그러나 켈젠은 여기서 ‘의욕할 수 없음’이 정말로 논리적 불가능인지, 아니면 도덕적으로 ‘의욕해서는 안 됨’인지가 구분되지 않은 채 섞여 있다고 본다. 실제로 인간은 어떤 극단적이거나 불편한 규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보편화되기를 ‘의욕’할 수는 있으며, 다만 그것을 의욕하는 것이 비난받을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의 ‘모순’은 정언명령의 형식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모순이 아니라, 칸트가 이미 옳다고 간주해 둔 개별 도덕률(예: 자살금지, 약속 준수)을 전제할 때에만 생기는 모순이다. 칸트 스스로는 자신이 정언명령으로부터 규범을 연역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켈젠이 보기에 그는 실제로는 전제된 도덕률을 다시 확인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가령 칸트는 자살의 격률이 보편법칙이 되면 자연에 모순된다고 하지만, 켈젠은 ‘참을 수 없는 삶을 스스로 마감할 수 있다’는 규칙이 보편화되는 것을 인간이 실제로 의욕할 수 있다고 본다. 그 경우 생명유지규칙은 제한되겠지만, 그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모순’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격률도, 그것이 보편화되면 약속이 사라질 수는 있지만, 나쁜 사람이 그런 세계를 의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 나타나는 충돌은 정언명령의 형식과 격률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도덕규범을 이미 옳다고 전제했을 때 그 도덕규범과 격률 사이에서 생기는 충돌에 불과하다. 정언명령의 형식만으로는 특정 격률을 배제할 수 없으며, 만약 특정 격률을 배제한다면 그 순간 이미 특정 도덕률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켈젠은 본다.
「진지하게 생각할 때, 참을 수 없는 삶을 스스로 마감할 수 있다는 격률을 인간이 사실상 보편법칙이 되도록 의욕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모순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모순은 그 격률과 칸트가 전제한 도덕률, 즉 어떤 경우에도 자살을 금지하는 도덕를 사이에만 존재할 뿐이다.」(544-545쪽)
애당초 보편법칙의 내용이 주어져 있지 않은 이상, ‘보편법칙에 합치되게 행위하라’는 정언명령으로부터는 그 어떠한 개별 규범도 도출될 수 없다. 정언명령은 개별 도덕규범을 산출하는 생산규칙이 아니라, 이미 효력 있는 것으로 전제된 도덕률과의 조화 여부를 확인하는 ‘형식적 검사’밖에는 될 수 없다. 어떤 임의적 규칙도 일반규범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는 한 정언명령과 조화될 수 있다. 정언명령으로부터 ‘거짓말하지 말라’ 같은 구체적 규범을 도출하려는 시도는, 실제로는 이미 그 규범을 옳다고 전제한 뒤 그 전제와 충돌하는 격률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결국 황금률이나 ‘각자에게 그의 것을’과 동일한 계열의 공허한 공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정언명령상의 ‘의욕할 수 있다’(wollen können)는 말은 ‘의욕해야 한다’(wollen sollen)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 그러나 어떤 격률에 대해서는 내가 그것이 보편법칙이 되도록 의욕해야 하며, 또 어떤 격률에 대해서는 그것이 보편법칙이 되도록 의욕해서는 안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정언명령은 어떠한 대답도 제공하지 않는다.」(547-548쪽)
「또한 그 내용이 주어져 있지 않은 보편법칙에 부합되도록 행위해야 한다는 명령으로부터는 일정한 행위를 규정하는 어떠한 도덕규범도 나올 수 없다. … 그와 같이 시도된 추론은, 앞서 본 바와 같이, 기만적인 추론에 근거하고 있다. 오로지 가능한 것은 효력 있는 것으로 전제된 도덕률이 정언명령과 조화될 수 있는지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임의적인 법칙도 정언명령과 조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언명령이 요구하는 것은 행위의 격률이 보편법칙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며, 도덕률이 언급하는 것은 그것이 일반적 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각자에게 그의 것을’이라는 원칙이나 황금률과 마찬가지로 정언명령 역시 우리가 선하게 또는 정당하게 행위하려면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기존질서에 의해 주어져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548-549쪽)
◎ 법의 제1원칙
토마스 아퀴나스의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명제도 정작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함으로써, 인간이 정당하다고 전제된 규범질서에 따라 대접받아야 한다는 점을 반복할 뿐이다. 신적 정의질서와 같은 절대적 기준을 전제하지 않는 한, 사실상 어떤 질서도 이 공식에 합치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규정하는, 즉 우리가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이미 존재하는 도덕질서 또는 법질서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은 칸트의 정언명령에서보다는 많은 도덕철학자,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용하고 있는 공식(“그러므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것이 법의 제1원칙이다. 이로부터 다른 모든 자연법원칙이 도출된다.”)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 인간을 선하게 대접한다는 것은 다만 인간이 정당한 것으로 전제된 규범에 따라 대접받아야 하는 대로 인간을 대접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인간이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인간을 대접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공식 역시 그 자체 완전히 공허한 것이며, 다만 주어진 또는 형성되는 규범질서 일반을 전제로 해서만 적용될 수 있다.」(550쪽)
◎ 관습대로 행위하라
비교적 원시적인 공동체에서는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관습적 행위 방식이 곧 정의로운 행위 방식으로 이해된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서로를 그렇게 대접해 왔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렇게 대접해야 한다고 여긴다.
「비교적 원시적인 공동체 내에서 특히 지배적인 관념에 따르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옛날부터 또는 오랜 시간 동안 서로간애 행위해 온 바대로, 즉 서로서로 대접해 온 바대로 타인에 대해 행위하는 것이 정당했고, 인간에 대한 대접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그것이 정의로운 방법이었다.」(550쪽)
그러나 여기서도 이미 중요한 전제가 숨어 있다. 구성원들이 그렇게 행위해 온 이유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그렇게 행위해야 한다는 규범적 이유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습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는 사고는 ‘관습대로 행위하라’는 규범을 이미 정의로운 것으로 승인하는 태도에 기초하고 있다. 이 정의규범으로써 관습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정의가치를 형성하는 기준이 되고 관습법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때 정의는 기존의 질서를 비판하거나 재구성하는 기준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정당화하는 역할만 수행할 따름이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해 관습적으로 대접하는 바대로 타인에게 행위해야 한다는 정의규범은 어떤 임의적 질서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 즉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종래의 관습적 행위와 상응하는 규범질서를 정의로운 것으로 전제한다. 그 정의규칙은 관습을 정의가치로 형성하며, 관습법을 정당화해 준다.」(551쪽)
◎ 중용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론도 그러하다. ‘정당한 행위는 과다와 과소 사이의 중용을 취하는 것’이라는 관념은 직관적으로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 과다이고 무엇이 과소인지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하느냐이다. 이 기준은 중용공식 자체에서 도출되지 않으며 언제나 자명한 것으로 전제된다.
「절제라는 일반적 도덕규정, 즉 정당한 행위는 지나치게 넣치지도 또 지나치게 부족하지도 않은 ‘황금의’ 중용을 취하는 데 있다는 관념 역시 인간에 대한 대접을 적용함에 있어 정의 규범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곤 하는 ‘선’(즉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의 과다는 무엇이며 또 과소는 무엇인가? 이것을 규정하는 규범은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지만, 결코 자명하지 않다.」(551쪽)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덕을 두 악덕의 중간으로 파악함으로써 윤리학을 과학적으로 정초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양극단이 이미 주어져 있다면 중간점도 이미 함께 주어져 있는 셈이다. 즉 무엇이 악덕인지를 안다는 것은 이미 무엇이 미덕인지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중용론은 선을 규정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이미 전제된 선악 구분을 다시 확인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악덕으로 전제한 것은 그의 시대의 전통적 도덕이며, 그의 윤리학은 그 전통적 질서를 효력 있는 것으로 승인한다.
「우리가 무엇이 악덕인지를 안다면, 우리는 또한 이미 무엇이 미덕인지를 안다. 왜냐하면 미덕은 악덕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는 자기시대의 전통적 도덕이 악덕으로 명명한 것을 악덕으로 전제하고 있다.」(552쪽)
불법을 행하는 것과 불법을 감수하는 것의 중간이 곧 정의라는 표현은 단지 수사적인 것에 불과하다. 불법을 행하는 것과 불법을 감수하는 것은 두 개의 상이한 악덕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불법행위의 두 측면일 뿐이다. 무엇이 불법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중용공식에서 나오지 않으며, 이미 실정도덕과 실정법에 의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중용론의 실제 기능은 정의의 본질을 밝히는 데 있지 않고, 기존의 사회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있다.
「무엇이 불법인가 하는 결정적인 물음은 중용공식으로는 대답될 수 없다. 그 대답은 전제되어 있다. … 중용론의 고유한 기능은 정의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정도덕과 실정법을 통해 형성된 기존의 사회질서의 효력을 확증하는 것이다.」(553쪽)
◎ 응보원칙
정의원칙들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은 응보원칙(Vergeltungsprinzip)일 것이다. 응보원칙은 죄나 불법에 대해 형벌을 요구하고, 심리적으로는 인간의 복수본능과 연결된다고 설명된다. 동시에 그것은 공적에 대한 상(보상)도 요구하는데, 이때 응보는 단지 처벌의 논리만이 아니라 감사의 도덕명령이 응용된 형태로도 나타난다. 그런데 ‘선한 자에게 선을, 악한 자에게 악을’이라는 공식 역시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규정하지 못하는 점에서 역시 공허하다. 만약 ‘각자에게 그의 것을’ 공식을 ‘각자가 받을 만한 것을’이라는 의미로 읽는다면 응보원칙은 그 안에 포함되는 내용일 뿐, 그 공식을 떠나 독자적인 내용기준을 제공하는 원칙은 아니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정의원칙은 응보원칙(Vergeltungsprinzip)일 것이다. 그것은 죄나 불법에 대해 형벌을 요구하며, 이런 점에서 심리적으로 인간의 복수본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 응보의 규범은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선을,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악을 부과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 공식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는 공식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것이며, 그 공식과 마찬가지로 무엇이 선과 악인지를 규정하는, 즉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해서는 안 되는지, 즉 우리가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규범질서를 전제로 한다.」(553쪽)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법칙은 행위와 반작용이 ‘같다’는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 행위와 반작용은 가치구조상 동일할 수 없다. 행위의 ‘악’은 금지규범에 대한 불합치로서 객관적 의미의 반가치인데, 형벌은 응보규범에 의해 당위적으로 정립되고 그 규범에 합치되게 집행되는 한 객관적으로는 가치가 된다. 그러므로 형벌은 객관적 의미에서 악이 아니라 오히려 선이며, 다만 당사자에게 불쾌감을 주는 한에서만 주관적 의미의 해악으로 지각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주관적 해악조차도 항상 성립하는 것이 아닌데, 회개한 행위자가 스스로 벌 받기를 간절히 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위와 반작용은 가치로서 본질적으로 차등적이다.
「그러나 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응보원칙에서는 행위와 반작용이 같지 않으며 같을 수도 없다는 점,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라는 공식에는 언어적 표현상의 평등은 있지만 실질적인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나타난다. … 형벌이라는 반작용은 응보규범에 의해 당위적인 것으로 정립되어 있고 … 따라서 반가치가 아니고 가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반작용은 행위가 악이라는 의미에서의 악이 아니라 선이다.」(555-556쪽)
그렇다고 행위와 반작용을 모두 ‘원치 않는 해악’의 관점에서만 볼 수도 없다. 촉탁살인처럼 당사자가 원한 행위도 윤리적·법적으로 금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실에서 살인에 항상 사형이 부과되는 것도 아니고, 절도에 자유형이 부과되는 경우처럼 서로 전혀 다른 종류의 해악들이 과해질 수 있다.
「우리가 행위와 반작용이 모두 주관적 해악이 되는 일반적 사례만을 고찰대상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응보원칙에 따르면, 반작용의 해악은 행위의 해악과 결코 동일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응보원칙인 탈리오원칙만이 행위의 반작용에 나타난 주관적 해악을 동일하게 규정하고 있다.」(556-557쪽)
공적과 상의 관계에서는 반작용이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적극적 가치로 나타난다는 점이 다르지만, 행위가 나타내는 가치와 상이 나타내는 가치가 동일하다고 보기는 여전히 어렵다. 가령 용기라는 가치에 대한 반작용은 주로 ‘존경’(메달 같은 상징을 통해 표현됨)이지만, 용기와 존경은 서로 성격이 다른 가치들이다.
「용기 있는 행위에 대한 상의 본질이 존경에 있는 경우가 그러하다. 용기와 존경은 매우 다른 두 가치이다. 동일한 공적에 대해서는 동일한 상이 호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응보원칙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에 아니라 동일한 죄에 대해서는 동일한 형벌이 부과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같이 응보규범의 일반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결론이다.」(557쪽)
따라서 응보원칙은 동일성(Gleichheit)이 아니라 비례성(Proportionalität)을 그 핵심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비례성은 ‘죄가 클수록 형벌도 더 무거워야 한다’ 식의 표현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비례성은 행위와 반작용이 각각 나타내는 가치(소극적/적극적)들 사이의 비례를 전제하는데, 그러려면 그 가치들이 등급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객관적 의미에서의 가치는 규범과의 합치/불합치 여부에 따라 이분법적으로 결정되므로 등급을 가질 수 없다. 어떤 행위가 규범에 ‘더 많이’ 합치하거나 ‘덜’ 합치한다는 식의 평가는 불가능하다. 합치하거나 합치하지 않거나, 모순되거나 모순되지 않을 뿐이다 ‘중범죄/경범죄’와 같은 등급화는 객관적 의미의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 욕구·거부감·손해 지각 같은 주관적 의미의 가치에서만 가능하다.
「어떤 행위가 선하다고 하는 적극적 가치를 갖는다는 판단이 그 행위가 그것을 명하「는 규범과 합치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어떤 행위가 악하다(나쁘다)고 하는 소극적 가치를 갖는다는 판단이 그 행위가 그것을 명하는 규범에 모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적극적 또는 소극적 가치의 본질이 이러한 합치 또는 모순에 있다면, 가치는 결코 등급을 가질 수 없다. 어떤 행위는 다소간 규범에 합치되거나 모순될 수 없다.」(557쪽)
「상이한 등급화는 객관적 의미에서의 가치와 관련될 수 없고, 주관적 의미에서의 가치에만 관련될 수 있을 뿐이다.」(558쪽)
따라서 응보원칙에서의 비례성은 엄밀한 수학적 비례가 되기 어렵다. 엄격한 비례성이 성립하려면 가치가 양적으로 측정 가능해야 하지만, 가치는 그렇게 측정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응보원칙이 말하는 비례성은 원리적으로 ‘정확한 비례’가 아니라 ‘근사적 비례’에 머문다. 그렇다면 응보원칙은 가치판단의 전제(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더 큰 손해인지)와 사회적 감정의 강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응보는 자연법적·절대적 척도가 아니라, 전제된 규범질서와 사회적 평가구조 속에서만 구성되는 상대적 원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비례성은 고찰대상인 가치들이 양적으로 측정가능한 것일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가치들은 양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응보원칙상의 행위와 반작용 사이의 비례성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비례성일 수는 없고 단지 근사적 의미에서의 비례성일 수밖에 없다.」(558-559쪽)
◎ 급부원칙
응보원칙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또 하나의 정의규범으로 ‘각자에게 그의 급부(Leistung)에 따라’라는 공식이 있다. 이 공식은 응보원칙처럼 행위와 반작용의 관계를 설정하지만, 그 적용 영역은 형벌이나 상이 아니라 노무와 보수, 물품과 대가의 관계이다. 누군가 노무를 제공했거나 물품을 인도했다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수나 가격을 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일상적으로 정의롭다고 받아들여진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정당한 보수’, ‘정당한 가격’이라는 표현에 그러한 사고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행위와 반작용의 관계를 제시하는 한에서 응보원칙과 유사한 정의규범은 ‘각자에게 그의 급부(Leistung)에 따라’라는 규범으로 간략하게 표현할 수 있다. … 급부인 행위는 객관적 의미에서의 가치가 아니고, 즉 그 (급부인) 행위를 명하는 규범에 합치되는 행위가 아니고, 따라서 (규범적 의미에서의) “선”에 대한 반작용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급부인 행위는 그러한 행위(즉 급부)를 명하는 규범과 관계없이 고려되고 있다는 점에서 구분된다.」(559쪽)
그러나 급부의 가치는 사실관계 분석을 통해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그 가치가 곧바로 보수나 대가를 결정한다고 볼 수도 없다. 실제 현실에서 노무나 물품의 경제적 가치는 그것이 실제로 교환되는 보수나 가격을 통해 비로소 ‘규정’된다. 자유시장체제에서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 계획경제체제에서는 권위적 규율에 의해 정해진다. 급부원칙은 그 자체 독자적인 정의기준을 제공할 수 없고 단지 이미 전제된 경제질서와 규율방식을 정당화하는 역할만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를 규정하는 것은 노무제공의 가치가 아니며, 대가를 규정하는 것은 물품의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노무제공의 가치나 물품의 가치는 노무제공이나 물품이 사실상 목표로 하고 있는 보수나 대가에 의해 규정된다. 여기서 고려되는 가치는 경제적 가치이다.」(559-560쪽)
◎ 각자가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그의 필요에 따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동일한 노무제공에 대해서는 동일한 보수’라는 급부원칙은, 노동능력의 차이를 무시하기 때문에 불평등한 법이라고 공격한다. ‘같아 보이는 노동’이 사실은 사람들의 능력 차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동일한 시간, 동일한 생산량이라는 외관적 동일성은 실질적 동일성이 아니며, 따라서 동일한 몫을 분배하는 것은 ‘같지 않은 것에 같은 것을’ 배분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이에 마르크스는 ‘참된 정의’는 미래의 공산주의에서 ‘각자가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라는 차등적 정의원칙으로만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질서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동일한 노무제공에 대해서는 동일한 보수를, 즉 노동생산에 대한 동일한 몫을 보장해야 한다는 요청을 자본주의 사회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정의원칙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이른바 ‘평등한 법’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노동능력과 관련하여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는 까닭에 불평등한 법이며, 따라서 정당한 법이 아니라 부당한 법이라고 한다.」(561-562쪽)
「그러므로 참된 평등과, 단지 외견상의 정의가 아닌 참된 정의는 미래의 공산주의경제에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거기서는 ‘각자가 그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그의 필요에 따라’라는 원칙이 적용된다고 한다.」(562쪽)
현실에서 완전히 동일한 객체란 존재할 수 없다. 두 대상 간 ‘동일성’을 인정하려면 일정한 차이는 지엽적인 것으로 취급해 무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결국 보수분배에서 노동량이라는 차이만을 고려하고 능력과 필요라는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바, 이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은 것을 같지 않게 취급하라’는 생각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두 객체가 완전하게(즉 모든 관계에 있어서)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에, 두 객체는 단지 일정한 관계에 있어서만 동일할 수 있다. … 마르크스가 공식화한 공산주의경제의 정의원칙 역시 모든 것을 동일하게 취급하라는 평등의 원칙에는 합치되지 않으며,―바로 그 반대로―같지 않은 것은 같지 않게 취급하라는 요청에 따르고 있다.」(562쪽)
그런데 ‘각자의 능력’이 무엇이며, 그 능력에 따라 어떤 급부가 부과되는지는 개인이 자기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공동체질서의 일반규범과, 그 규범을 집행할 기관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질서가 없다면 이 공식은 적용될 수 없다.
「‘각자가 그의 능력에 따라’라는 요청은 그러한 질서를 전제로 한다. 그러한 질서가 없다면 그 요청은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564쪽)
‘필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도 문제다. 필요를 객관적 기준에 따라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주관적 의미로 이해할 것인지가 문제된다. 전자에 의한다면 별도의 사회질서와 그에 의한 승인이 필요하다. 후자에 의하더라도 두 필요 간에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즉, 어떤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필요를 희생하는 선택이 불가피한 경우) 별도의 객관적 기준에 따른 선별과 질서화가 다시 요구된다.
그 결과 공산주의 정의원칙의 실제 의미는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각자는 사회질서에 의해 확정된 능력에 따라 노동을 제공해야 하며, 각자의 필요는 사회질서가 승인한 범위 내에서, 사회질서가 규정한 방식으로 충족되어야 한다.’ 결국 이 역시 특정한 사회질서를 전제로 하며, 그 질서 없이는 적용될 수 없는 정의원칙인 것이다.
「공산주의 정의원칙 역시 ‘각자에게 그의 것을’이라는 정의규범과 마찬가지로 사회질서를 전제로 하며, 이 사회질서가 없다면 그 원칙은 적용될 수 없다. 하지만 공산주의 정의원칙은 그 사회질서의 규정들의 내용에 관해서는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각자에게 그의 것을’이라는 공식이 각자에게 ‘그의 것’으로 귀속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는 것과 같다.」(566쪽)
◎ 자 유
자유의 근원적 이념은 순수하게 소극적 성격을 지닌다. 이는 인간은 어떤 규범질서에도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요청이고, 따라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 사회규범의 효력을 배제하는 규범으로서 기능한다. 이 의미의 자유는 애초에 사회적 질서의 가능조건(상호구속)을 부정하기에 반사회적 원칙이다.
따라서 자유를 사회적 원칙, 도덕원칙, 더 나아가 정의원칙으로 만들려면, 그것은 그대로일 수 없고 ‘사회적 자유’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규범질서로부터의 자유’를 ‘규범질서 하에서의 자유’로 바꿔야 한다. 이때 결정적 매개가 되는 것이 ‘동의(합의)’다. 인간을 구속하는 규범질서가 불가피하다면, 그 질서는 수범자들의 동의로 창설되어야 하고, 그때 자유는 비구속성이 아니라 자기구속/자기결정이 된다. 이로써 자유는 ‘구속 없음’에서 ‘내가 동의한 구속’으로 형태를 바꾸며 정의원칙으로 편입된다.
「자유의 근원적 이념은 … 인간은 타인에 대한 자신의 행위를 규제하는 … 어떤 규범질서에도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개인주의적 요청이다. … 이와 같이 그 근원적 형태로 볼 때 자유의 이념은 반사회적 원칙이다. 도덕원칙으로서, 즉 사회적 원칙으로서, 특히 정의원칙으로서 자유의 이념은 일정한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다. 규범질서로부터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를 사회적 자유로 만드는 규범질서하에서의 자유로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상호행위와 관련하여 인간을 구속하는 규범질서가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 질서에 예속되어 있는 사람들의 동의를 통해 창설된 질서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신의 의사에 의해서만 구속되어야 하거나 때때로 표현되듯이―자신의 의사에 의해서만 구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구속성의 자유는 자기구속 또는 자기결정의 자유가 된다.」(569-570쪽)
‘자기결정으로서의 자유’의 정치이론적 전형은 사회계약론이다. 사회계약론의 핵심은 수범자들의 동의로 창설된 질서만 정당하다는 것, 즉 정의가 질서의 ‘내용’이 아니라 질서의 창설 방식에 걸려 있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이는 ‘자기결정의 정의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문제는 이 원칙은 ‘최초의 사회질서 창설’ 같은 가설적 상황에서는 유지될 수 있지만, 기존 질서의 변경절차에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변경은 현실에서 전원합의를 전제할 수 없고, 다수가 원하는 변경에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모두의 동의로만 정당’이라는 원칙을 고집하면, 자기결정으로 만들어진 질서가 오히려 다수의 의사와 충돌하면서 ‘자기결정에 반한다’는 역설이 생긴다.
「개인주의적자연법이론인 사회계약론은 이러한 자유이념에 근거하고 있다. 수범자들의 동의를 통해, 다시 말해 계약이나 합치된 의결에 의해 실현되는 그러한 사회질서만이 정당하다. 자기 결정의 정의원칙은 사회질서의 내용이 아니라 그 창설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원칙은 최초의 사회질서의 창설이라는 가설적 경우에 대해서만 유지될 수 있고 그 질서의 변경절차에는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존사회질서의 변경이 오로지 수범자들의 계약이나 합치된 의결에 의해서만 허용된다 하더라도, 다수가 원하는 변경에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자기결정의 원칙에 따라 창설된 사회질서가 다수의 의사와 모순되며, 따라서 자기결정의 원칙과 모순된다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571쪽)
이 역설을 피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다수결이다. 켈젠은 이를 ‘자기결정의 정의가 민주주의의 정의로 바뀐다’고 표현한다. 다만 이 민주주의적 정의는 형식적이다. 즉 민주적 절차로 창설된 법질서의 내용을 규정하지 못하는 정의형식이다. 그래서 다수결은 ‘임의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자유영역을 침범할 수도 있고, 심지어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와도 양립할 수 있다. 절차가 민주적이라는 사실만으로 내용이 자유주의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기존 사회질서는 그에 예속된 모든 사람의 의사와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 다수의 의사와는 일치하되 가급적 소수의 의사와는 대립된다. 이 때문에 다수결원칙이 승인된다. 자기결정의 정의는 민주주의의 정의로 바뀐다. 이것은 민주적 방법으로 창설된 법질서의 내용은 결코 규정하지 않는 정의형식이다. 더욱이 이러한 정의형식은 임의적인 방식으로 수범자들의 자유영역에 개입할 수 있다. 다수의 자기결정이라는 원칙은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571쪽)
그럼에도 자유의 근원적 이념(규범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다수결로 약화된 자기결정 이념을 넘어, 국가권한의 최소화, 개인적 자유 제한의 최소화를 요구하는 힘으로 계속 작동한다. 이때의 자유는 19세기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작은 국가, 그리고 경제·신앙·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의이상으로 구체화된다.
「하지만 자유의 근원적 이념은―다수결원칙에 의해 약화된―자기결정이념에 의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그것은 자기결정원칙에 따라 창설되고 다수결원칙에 따라 변경가능한 사회질서 및 이를 통해 형성된 국가를 19세기 자유주의 정치이론 아래에서는 해악으로 간주할 수 있을 만큼 아직도 충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국가의 권한을 최소한으로 축소시켜야 한다는 요청, 다시 말해 그러한 질서에 예속된 사람들의 개인적 자유를 가급적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그런 방식으로 국가법질서를 형성하는 규범들의 내용을 형성해야 한다는 요청을 가져오는 것도 바로 그러한 근원적 자유이념, 즉 규범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라는 반사회적 이상이다. 그것은 경제의 자유, 신앙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의이상이다.」(571-572쪽)
요컨대, 순수한 자유인 ‘반사회적 자유’는 민주주의 절차에 의해 일단 제도화되지만, 그 절차가 언제든 자유를 침해할 수 있기에, 자유의 원래 충동은 다시 ‘국가권한 축소’라는 방향으로 정치적 요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평 등
자유가 ‘규범적 구속의 최소화’ 혹은 ‘자기결정’의 논리에서 움직인다면, 평등은 ‘차등의 배제’라는 논리에서 움직인다. 자유는 차등을 허용하거나 심지어 요청할 수 있지만, 평등은 그 차등을 지워버리려 한다.
「정치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유의 정의원칙과 흔히 결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며 때로는 그것과 모순되는 것이 평등의 정의원칙이다.」
평등원칙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사실명제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당연히 현실과 모순된다. 이 문장은 실제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의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사람들 간에 차등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그 차등을 취급의 근거로 삼지 말라’고 요청하는 것이 바로 평등원칙이다. ‘사실의 차등’은 인간을 취급하는 문제에서는 하등 중요하지 않으므로 ‘규범적 취급’에서 고려하지 말라는 요구인 것이다.
「이 규범은 결코 모든 인간이 동등함을 전제로 하지 않고, 그 반대로 차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인간을 다룸에 있어 어떠한 차등도 고려해서는 안 될 것을 요구한다. … 인간(과 또한 외부적 사정)은 인간 사이에 사실상으로 존재하는 차등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에만 평등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런 경우에만 평등한 인간들(또는 평등한 외부적 사정)이 존재한다. 결코 어떠한 차등도 고려될 수 없다면,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은 평등하다.」(572쪽)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취급하라’는 규범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i) ‘모든 차등을 배제하라’는 식의 절대적 명제이고, 다른 하나는 ii) ‘같은 것은 같게, 같지 않은 것은 같지 않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공식일 것이다.
우선 ii)의 명제는 앞서 보았던 다른 정의원칙들과 마찬가지로 단지 ‘형식’일 뿐, 그 자체로는 ‘취급’의 ‘내용’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 규범이 현실에 관철되려면 일단 그 적용영역을 정하는 추가 규범이 전제되어야 한다. 선거권이든 병역이든, 먼저 일정한 제도를 확정해야 평등원칙이 비로소 적용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정의규범은 그와 같은 평등한 취급의 내용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내용을 규정하는 규범이 전제되어야 한다. 헌법이 입법기관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경우에만, 평등의 정의규범을 적용함에 있어 모든 인간은 차별없이 선거권을 가져야 한다고 요청할 수 있다. 법질서가 병역의무를 확정하고 있는 경우에만, 평등의 정의규범을 적용함에 있어 이러한 의무가 차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부과될 것을 요청할 수 있다.」(573쪽)
다음으로 적용방식 또한 추가적 규범에 의해 정해져야 한다. 가령 어린이를 어른처럼, 정신병자를 정상인처럼, 폭력배를 평화애호가처럼 취급하라는 식의 규범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차등을 모든 종류의 취급에서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결국 문제는 ‘어떤 차등을 배제하고 어떤 차등을 고려할 것인가’로 귀착되는바, 이 역시 별도의 규범에 의해 정해져야 한다.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요청, 즉 사실상으로 존재하는 어떠한 차등도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요청이, 그 정의규범이 전제하고 있는 규범에 따른 취급이 어떤 내용이든 간에,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함은 자명하다. 어린이를 어른처럼, 남자를 여자처럼, 정신병자를 정상인처럼, 폭력배를 평화애호가처럼 취급하는 규범을 둔 도덕체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취급에 있어 모든 차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두는 것은 불가능하며, 일정한 차등은 고려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단지 어떠한 차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두어야 하는지, 따라서 어떤 개인들이 평등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이다.」(574쪽)
요컨대, 평등원칙이 적용되려면 그 영역과 방식에 관한 별도의 규범적 기준, 이른바 ‘분류기준’이 있어야 한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공식은 ‘분류기준이 같으면 같게, 다르면 다르게’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평등원칙의 완전한 형식은 이렇게 된다. 「어떤 특성들은 고려하고, 다른 특성들은 고려하지 않도록 기준을 정하라. 그리고 그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들만을 ‘동등한 개인’으로 간주하라.」 결국 어떤 기준을 택해 분류한 다음 그 분류에 맞춰 처리하라는 일반적 요청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이는 논리필연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애초에 정의원칙이라고 할 수조차 없다. 다시 말해 앞서 본 다른 정의규범들과 비교해 독립적 위상을 갖는다 볼 수 없다. 여타 정의규범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구조를 띠는바, 이는 그 자체로 ‘같은 조건하에서는 같게, 다른 조건하에서는 다르게’라는 논리구조를 자명하게 전제하고 있다. 가령 ‘죄에는 형벌을, 공적에는 상을 연계하라’는 응보규범에서는 ‘동일한 죄에는 동일한 형벌을, 동일한 공적에는 동일한 상을’이라는 결론이 당연히 도출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공식은 정의규범이 그 일반적 성격에 비추어 응당 띠게 되는 속성일 뿐이다. 따라서 평등을 여러 정의원칙들의 공통적 요소로 간주하는 태도는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우리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것은 같게, 같지 않은 것은 같지 않게 취급해야 한다는 원칙은 결코 정의의 요청이 아니라 논리의 요청이다. 왜냐하면 그 원칙은 일정한 개인들은 일정한 사정 아래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보다 더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일정한 효과가 발생해야 한다(특히 일정한 취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규정하는 모든 규범의 일반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논리적 결론일 뿐이기 때문이다.」(576쪽)
「모든 정의규범은 일반적 성격을 지니며 또 모든 정의규범은 인간은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기 때문에, 같은 것은 같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모든 정의규범의 일반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논리적 결론이다.」(578쪽)
「따라서 그 원칙은 논리의 요청이지 정의의 요청이 아니라면, 그 원칙은 평등의 정의원칙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평등은 모든 정의규범에 공통되는 요소로 간주될 수 없다.」(581쪽)
그리고 현실에서 위 공식이 거론되는 사안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 상당수는 평등의 요구가 아니라 단지 규범합치성에 대한 요구에 불과하다. 가령 절도에게 자유형을 과한다는 규정이 있는 경우 법관은 모든 절도사례에 대해 자유형을 부과해야 하는바, 이는 절도범들 사이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용규범이 그렇게 일반적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관이 어떤 절도사례에는 자유형을, 다른 절도사례에는 사형이나 벌금형을 부과한 경우 그러한 재판이 평등에 반한다고 주장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부당함의 진정한 이유는 ‘같은 죄에 다른 형벌을 부과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가치를 형성하는 독립된 규범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만약 부정의의 본질이 ‘비동일한 취급 그 자체’에 있다면 자유형을 부과한 판결 역시 부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도 다른 사례의 판결과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정당한 규범에 합치된 판결은, 비교대상이 어떻든 정당한 것이다. 위와 같은 판결이 부당하다는 가치판단에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의 요구가 기여하는 바는 전혀 없다.
「응보원칙에 합치되는 형법규범이 … 그 규범에 의해 규정된 요건사실(즉 절도)이 존재하는 때에는 언제나 그 규범에 의해 규정된 형벌(즉 자유형)이 부과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면, 법관은 모든 경우에 있어 동일한 요건사실(즉 절도)에 대해서는 언제나 동일한 형벌(즉 자유형)을 연계시켜야지 다른 형벌을 연계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적용규범인 바로 그 형법규범이 다른 요건사실이 아닌 그 요건사실(즉 절도)에 대해서만, 그리고 다른 형벌이 아닌 그 형벌(자유형)만을 연계시키고 있고, 또한 이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도에 대해 자유형을 연계시키는 규범이 응보원칙의 적용례로 여겨지는 까닭에 정의가치를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그리고 법관이 어떤 절도사례에서는 자유형을 부과하고 다른 절도사례에서는 사형이나 벌금형을 부과한다면, 그의 판결은 위법함과 동시에 부당하다. 이는 그가 죄가 동일한 두 사례에서 동일하지 않은 두 형벌을 부과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가치를 형성하는 규범, 즉 절도에 대해서는 사형이나 벌금형이 아닌 자유형을 연계시키고 있는 규범에 반하여 행위했기 때문이다. 그가 내린 두 판결 중 하나만이 부당하다. 즉 그가 그에 의해 적용된 규범을 침해하여 절도에 대해 사형이나 벌금형을 부과한 판결만이 부당하고, 그에 의해 적용된 규범에 따라 절도에 대해 자유형을 부과한 다른 판결은 부당하지 않다. 법관이 두 사례에서 동일한 형벌을 부과하지 않은 데 부정의의 본질이 있다면, 그가 절도에 대해 자유형을 부과한 판결 역시 부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례의 경우에도 역시 형벌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가 다른 절도사례에서 부과한 형벌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에 의해 적용된 정당한 규범과 합치하여 자유형을 부과한 판결은, 비록 부당한 판결과 비교해 볼 때 동일하지는 않지만, 부당하지 않고 정당하다.」(578-579쪽)
「법률적용기관이 그 법률이 고려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차등만을 고려한다면, 이른바 법률 앞에서의 평등은 보장되는 것이다. 따라서 법률 앞에서의 평등은 평등이 아니라 규범합치성이다. 그것의 본질은 개별적 규범의 정립(법적용기관의 결정)이 일반적 규범에 합치된다는 데 있다. 이러한 합치는 논리적 정확성을 의미하며, 정의(특히 평등의 정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580쪽)
평등의 요구가 논리적으로 뻔한 이야기가 되지 않으려면, 다시 말해 진정 ‘정의규범’, ‘정의원칙’의 위상을 지닐 수 있으려면, i)과 같이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떠한 차등도 고려하지 말라’는 급진적 형태를 띠어야 한다. 이렇게 이해할 때에만 평등원칙은 여타 정의원칙들과의 관계에서 독자적 의의를 지니게 된다.
「평등의 정의원칙으로 간주될 수 있는 유일한 규범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규범, 즉 그들 간에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떠한 차등도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범이다.」(576쪽)
그러나 이 명제가 현실에서 작동하기란 불가능하다. 인간 사회에서 ‘평등’은 결코 전면적·무차별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평등은 언제나 ‘어떤 측면에서의 평등’으로만 가능하다. 가령 ‘어떤 사람도 죽이지 말라’는 규범은 살해 금지라는 한 가지 취급(살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다룬다. 여기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 그러나 처벌의 문제로 가면 즉시 차등이 들어온다. 범죄자와 비범죄자를 구분하지 않으면 처벌규범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평등의 범주는 별도의 규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도 죽이지 말라는 규범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취급하고 있으며, 어떤 차이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즉 이러한 규범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이러한 평등은 살해되지 않는다는 점에만 관련되어 있을 뿐이지, 모든 다른 종류의 취급에 관련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처벌받는다는 점과 관련해서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과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 사이에 차이를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572-573쪽)
오히려 그 반대명제인 ‘모든 차등을 고려하라’는 원칙, 즉 각 개인은 모든 타인과 다르므로, 각 개인은 특수한 취급을 요구할 수 있다는 원칙은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다. 이 원칙이 실제로 힘을 갖는 전형적 장면은, 일반규범이 법적용기관을 구속하는 것을 거부하고, 각 사건을 특수성에 맞게 처리할 재량을 요구할 때다. 이는 ‘자유로운 법발견’의 정책적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원칙, 즉 어떠한 차등도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과 정반대되는 원칙이 모든 인간은 불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원칙, 즉 모든 차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 다시 말해 각 개인은 모든 타인과 다르므로 각 개인은 특별한 취급을 요구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 역시 정의원칙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관습이나 입법에 의해 정립된 일반적 법규범을 통해 법적용기관을 구속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법적용기관이 각각의 구체적 사례를 그 특수성에 맞게 처리할 수 있도록 법적용기관에게 완전한 자유재량을 허용할 것이 요청되는 경우에 그러하다. 각각의 특수한 사례가 그 특수성에 맞게 취급되는 경우에만 그 취급은 정당하다. 이것은 자유로운 법발견이라는 정책의 근간이 되는 정의원칙이다.」(573쪽)
D. 결 론
앞서 언급했듯, 지금까지 합리적 유형의 정의규범들을 여럿 검토한 것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적 내용을 찾기 위함이었다. 논의 끝에 켈젠이 내린 결론은,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공통분모는커녕 각 정의규범들 간의 차이는 자못 극단적이며, 현실에서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가령 ‘죄를 범한 자에게는 처벌을, 공적을 쌓은 자에게는 상을’이라는 응보규범은 ‘과거의 행위’를 평가기준으로 삼는 반면, ‘각자에게 그의 필요에 따라’라는 공산주의 법이론은 ‘현재의 필요’를 평가기준으로 삼는바, 이 둘은 동일한 사안에 대해 정반대의 취급을 요구한다. 또 많은 정의규범들은 인간의 자유를 일정 정도 제한하는 실정적 도덕질서나 법질서를 추구하지만, 자유의 정의규범은 그러한 사회규범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공통점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 즉 그들 모두가 일반적 규범이라는 점에 있을 뿐이다. 모든 정의규범은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취급할 것’을 ‘일반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만 동일하다. 결국 ‘정의’라는 일반개념은, ‘인간은 어떻게 취급되어야 하는가’라는 결정적인 물음 앞에서는, 「완전히 공허한 것일 뿐이다.」
「합리적 유형의 다양한 정의규범이 규정하고 있는 취급과 관련해서 볼 때 결코 공통적 요소를 확인할 수 없다. 이들 다양한 유형의 정의규범들이 규정하고 있는 취급은 너무 달라서 서로 다른 정의규범들간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응보의 정의규범에 따르면 죄를 범한 자는 처벌받아야 하고 공적을 쌓은 자는 상을 받아야 하지만, 각자는 그의 필요에 따라 취급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정의규범에 따르면 죄와 공적은 고려될 여지가 없다. 대부분의 정의규범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를 다소간 제한하는 실정적 도덕질서나 법질서가 전제되어 있지만, 자유의 정의규범에 의하면 다른 모든 사회규범은 배제된다. 합리적 유형의 모든 정의규범에 공통되는 요소는 이들 규범이 규정하고 있는 취급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다만 그들 모두가 일반적 규범, 즉 일정한―다양한 정의규범에 의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규정된―조건 아래에서 일정한―다양한 정의규범에 의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규정된―취급을 규정하는 일반적 규범이라는 점에 공통점이 있을 뿐이다. 정의라는 일반개념은 인간에 대한 취급이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려면 인간은 어떻게 취급되어야 하는가라는 결정적인 물음과 관련해서는 완전히 공허한 것일 뿐이다.」(581쪽)
다양한 정의원칙들을 검토하면서 켈젠은 유독 자유의 정의원칙에 대해서만 전면적인 부정이나 해체를 시도하지 않았다. 다른 정의원칙들과는 달리, 자유는 인간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실질적 정의내용으로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응보, 평등, 필요, 사랑과 같은 정의원칙들은 모두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인간을 어떠한 방식으로 대우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서로 충돌한다. 그러나 ‘규범질서 하에서의 자유’, 즉 자기구속과 자기결정의 자유는, 인간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를 규정하기보다는 규범이 어떠한 방식으로 정립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형식적 원리의 성격을 띤다. 내용적 규범이 아니라 규범정립의 절차와 형식에 관한 규범인 것이다.
응보나 평등, 필요의 원칙은 실정법에 일정한 내용을 요구하며, 그 내용이 정의로운지 부당한지를 판단하려 들 때 실정법의 효력과 충돌한다. 반면 자유는 실정법이 어떠한 내용을 가져야 하는지뿐만 아니라, 그 법질서가 수범자들의 의사에 의해 정립되었는가, 다시 말해 자기결정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가 역시 문제삼는다. 정의의 실질적 기준으로 기능할 수는 없더라도 규범정립의 정당화 형식으로서는 끝까지 유지될 수 있기에(오히려 법실증주의적 관점하의 '자유로운 법발견' 이론에 대해 정책적 근거를 제공한다), 자유는 켈젠이 단행한 정의담론 해체의 피의 숙청 속에서도 살아남은 것이다.
켈젠은 정치적 입장과 제도 선호의 차원에서는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민주주의, 특히 자유주의적·절차적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옹호했고, 전체주의·권위주의·신정정치에 대해 분명한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켈젠은 자유주의를 ‘정의의 참된 내용’이나 ‘도덕적으로 우월한 원칙’으로 정당화하지는 않았다. 켈젠은 자유를 자연권, 도덕적 진리, 인간의 본질에서 도출되는 가치로 설명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러한 시도들을 형이상학적 정의론으로 분류하고, 플라톤·기독교·자연법론과 같은 맥락에서 비판했다. 그가 정의원칙으로서 자유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던 것은 개인적으로 자유주의적 가치를 옹호해서가 아니라, 자유만이 유일하게 정의의 내용이 아닌 규범질서의 형식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법 > 순수법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켈젠 순수법학 강독[17(完)] - 부록 2(자연법론) (0) | 2025.12.19 |
|---|---|
| 켈젠 순수법학 강독[15] - 해석 (0) | 2025.12.17 |
| 켈젠 순수법학 강독[14] - 국가와 국제법 (0) | 2025.12.17 |
| 켈젠 순수법학 강독[13] - 법과 국가 下(국가-법 이원론 비판) (0) | 2025.12.17 |
| 켈젠 순수법학 강독[12] - 법과 국가 上(공법-사법 이원론 비판) (0) | 2025.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