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순수법학

켈젠 순수법학 강독[2] - 법과 자연 下(사회질서, 법질서)

斧針 2025. 11. 6. 13:05

한스 켈젠(변종필/최희수 역), 《순수법학》, 길안사, 1999 
Hans Kelsen, Reine Rechtslehre (1963)

<차 례>

[01] - 법과 자연 上

[02] - 법과 자연 下(사회질서, 법질서)

[03] - 법과 도덕

[04] - 법과 과학 上

[05] - 법과 과학 下

[06] - 법정태학 上(제재, 의무, 책임, 권리)

[07] - 법정태학 中(행위능력과 권리능력)

[08] - 법정태학 下(법률관계, 권리주체)

[09] - 법동태학 上 (근본규범)

[10] - 법동태학 中(법질서의 단계구조 1: 위계질서)

[11] - 법동태학 下(법질서의 단계구조 2: 규범충돌)

[12] - 법과 국가 上(공법-사법 이원론 비판)

[13] - 법과 국가 下(국가-법 이원론 비판)

[14] - 국가와 국제법

[15] - 해석

[16] - 부록 1(정의의 규범들)

[17] - 부록 2(자연법론)


 

5. 사회질서

 

a) 제재를 확정하는 사회질서

법이나 도덕과 같은 사회질서는 모두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는 행위를 규율하는 체계다.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살인은 직접적으로 타인의 생명을 박탈하는 행위이고, 재물손괴는 간접적으로 타인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지만, 두 경우 모두 사회적으로 조정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켈젠은 사회질서를 다른 사람과 직접적 또는 간접적 관계에 있는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규범질서라고 정의한다. 즉 사회질서는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호작용을 조정하는 규범적 장치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질서는 왜 필요할까? 켈젠은 사회질서를 도덕화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 기능을 매우 사실적으로 설명한다. 사회질서는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줄이고, 사회적으로 유익한 행위를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직접적 또는 간접적 관계에 있는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규범질서가 사회질서이다.」(57쪽)
「심리학적,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사회질서의 기능은 그 질서에 속하는 인간이 일정한 행위를 하도록 하는 것, 즉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적으로 유해한 행위를 중단하고 사회적으로 유익한 행위를 하도록 하는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다.」(57쪽)

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사회질서는 사회질서는 명령이나 금지를 통해 인간의 행위를 조정한다. 그리고 어떤 행위에 이익(상훈), 반대되는 행위에 불이익(형벌)을 연계시킨다. 켈젠은 이 두 가지를 함께 제재(Sanktion)라고 부른다. 다만 일반적으로는 상훈보다 형벌이 제재의 중심개념으로 이해된다.

「인간의 일정한 행위에 대해 상훈이나 형벌로 대응하는 원리가 응보원칙이다. 상훈이나 형벌은 제재(Sanktion)라는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상훈이 아니라 일정한 행위의 결과로서 부과되는 해악, 즉 생명·건강·자유·명예 또는 경제적 가치와 같은 일정한 이익의 박탈로서의 형벌만을 제재라고 부른다.」(58쪽)

법질서를 비롯한 사회질서는 제재 특히 불이익부과를 통해 명령을 실질화한다. 어떤 행위가 명령되었다는 것은 해당 행위가 직접적으로 당위적 대상으로 설정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위의 반대행위가 금지되고 제재의 조건으로 규정되었다는 뜻이다.

「사회질서는 일정한 행위와 반대되는 행위에 대해 이익박탈이라는 불이익, 즉 광의의 의미에서의 형벌을 연계시킴으로써 일정한 행위를 명령할 수 있다.」(58쪽)
「제재가 당위적인 것이라 함은 제재의 특수한 조건이 되는 행위가 금지된 것이고 그 반대되는 행위가 명령된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58쪽)
「어떤 행위가 명령되어 있다 함은 그 행위에 반대되는 행위가 제재라는 당위적인 것의 조건이 됨을 의미한다.」(59쪽)

이때 명령된 행위당위적 행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당위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제재이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명령된 행위가 당위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규범의 구조를 혼동한 것이다.

「명령된 행위는 당위적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당위적인 것은 제재이기 때문이다.」(59쪽)

이러한 구조를 통해 사회질서는 인간의 행위를 통제하며, 제재의 존재를 통해 명령을 실현한다. 법질서도 사회질서에 속하니, 그 역시 단순한 명령체계가 아니라, 그 명령이 제재를 통해 구체화되는 응보(desert)의 구조를 가진 질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b) 제재 없는 사회질서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도덕질서는 제재가 없는 질서로 여겨지고그 때문에 법질서와 구별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일정한 행위에 대해 상훈도, 그 반대행위에 대해 형벌도 연계시키지 않으면서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는 사회질서, 즉 응보원칙이 적용되지 아니하는 사회질서는 (넓은 의미에서의) 제재를 확정하고 있는 사회질서와 엄격하게 대립된다. 대개 도덕이 그러한 사회질서로 간주되고 있으며, 또한 바로 그런 이유에서 제재를 확정하고 있는 질서인 법과 구별된다.」(61쪽)

가령 예수의 산상수훈에서는 응보의 원리(‘악에는 악’, ‘선에는 선’)가 거부된다. 예수는 악에 대적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통해, 악을 악으로 갚는 현세적 응보를 포기하라고 설파한다(‘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에 대적하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그러나 켈젠은 이조차도 완전히 제재 없는 질서라 할 수는 없다고 한다. 산상수훈도 최소한 내세의 응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윤리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은 자에게는 내세의 보상이악을 행한 자에게는 내세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 다시 말해 초월적 신의 심판이라는 형태로 여전히 ‘응보원칙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가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분명 천상의 보답이다. … 이와 같이 고도로 승화된 도덕질서에서도 응보원칙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현세에서 응보원칙의 적용을 포기하는 자는 물론 현세적 보상은 아니지만 내세의 보상이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세에서의 형벌을 전제로 하여 현세에서의 형벌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월적이고 제재를 확정하며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인 도덕질서이긴 하지만 결코 제재 없는 도덕질서는 아니다.」(62쪽)

나아가 켈젠은 도덕질서에는 분명 현실적 제재가 사실상 내제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도덕규범이 어떤 행위를 명령하면그에 대한 사회적 승인(칭찬)이나 불승인(비난)이 따르며, 이 역시 심리적으로 상벌, 즉 제재의 기능을 한다는 이유에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칭찬과 인정에 대한 욕구혹은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 도덕규범의 실효성을 만들어내는 힘이 된다.

「도덕질서가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는 경우 그와 동시에 그 도덕질서는 일방 주체에 대해 명령된 행위가 타방 주체에 의해 승인되고 그 반대행위는 승인되지 않을 것을 명령하고 있다. … 동료들에 의한 승인이나 불승인은 상훈이나 형벌로 느껴질 수 있고, 따라서 제재로 해석될 수 있다. 승인이나 불승인은 때때로 다른 형식의 상훈이나 형벌에 비해 보다 더 실효성 있는 제재이기도 하다.」(62쪽)

이러한 점에 비추어, 도덕과 법의 차이는 제재의 유무가 아니라 제재의 방식에 있을 뿐이라고 켈젠은 말한다법은 제도화된 강제력을 통해 제재를 가하고도덕은 사회적 승인이나 내면의 양심을 통해 제재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결국 둘 다 제재를 동반하는 사회질서라는 것이다.

「제재를 가하는 사회질서와 제재 없는 사회질서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 이들 사회질서를 서로 구별짓는 차이점은 단지 제재의 유형이 서로 다르다는 데 있을 뿐이다.」(62-63쪽)

 

c) 초월적 제재와 사회내재적 제재

켈젠은 제재의 두 형태, 즉 초월적 제재와 사회내재적 제재를 구분한다(63). 초월적 제재란, 인간이 신을 비롯한 초자연적 존재의 심판을 믿을 때 그 초자연적 존재가 행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제재를 말한다. 가령 원시사회에서 인간은 자연현상을 도덕적 응보로 해석해재해나 풍요를 신이 내린 보상 또는 벌로 여겼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적 제재는 고등종교에서도 여전히, 신의 명령과 내세의 심판으로 확장된 응보의 형태로 남아 있다.

「초월적 제재란 질서에 복종하는 인간의 신앙에 따라 초인간적 심급에서 비롯되는 제재를 말한다. … 원시인은 그의 이익과 직접 관련되는 자연현상을 응보원칙에 따라 해석한다. 즉 그에게 유리한 현상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준수한 데 대한 상훈으로, 그에게 불리한 현상은 그러한 사회질서를 준수하지 않은 데 대한 형벌로 해석한다. 원시인의 종교관념에 따를 경우 사회적으로 선한 행위에 대해서는 성공적인 사냥, 풍성한 수확, 전쟁에서의 승리, 건강, 많은 자식 또는 장수와 같은 것으로 보답하고, 사회적으로 악한 행위에 대해서는 그 반대, 즉 질병이나 죽음으로 벌주는 존재는 다름아닌 사자의 영혼이었던 것 같다. … 유대·기독교와 같은 고등종교의 단계에서도 자연에 대한 규범적 해석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63쪽)

반면, 사회내재적 제재는 인간 사회 안에서 사람들에 의해 집행되는 제재를 뜻한다. 이런 제재는 단순한 승인·비난 같은 비공식적 행위부터, 법에 의해 제도적으로 집행되는 강제행위까지 포함한다.

「현세에서, 즉 사회 내에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따라서 사회내재적 제재라고 부를 수 있는 제재는 초월적인 제재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한 제재는 동료의 측면에서 임의적인 방법으로 표현되는 단순한 승인이나 불승인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 질서에 의해 규정된 일정한 자에 의해 규율되는 일정한 절차에 따라 행해지는 행위로 나타날 수도 있다.」(64쪽)

켈젠은 상훈보다 형벌(이익박탈, 불이익부과 전반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이 사회적으로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본다. 인간 사회에서 질서가 유지되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응보이념에 합치되는 두 개의 제재인 상훈과 형벌 중에서 사회적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65쪽)
「원시인의 생활을 지배했던 공포에 견주어 볼 때 상훈에 대한 희망은 부차적 의미만 가질 뿐이다.」(66쪽)

 

6. 법질서

 

a) : 인간행위의 질서

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라는 개념이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단순히 국가의 명령이나 규칙으로 막연히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존재방식으로 성립하는지를 개념적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켈젠은 우선, 각국의 다양한 언어에서 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인간의 행위를 일정한 방식으로 질서화하는 것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돼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법이론은 무엇보다 그 대상을 개념적으로 규정하여야 한다. 법을 정의하기 위해서 먼저 언어관용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독일어의 ‘법’이란 말과 다른 언어권의 유사한 표현들(law, droit, dritto 등)이 갖는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서로 다른 민족들이 서로 다른 시기에 ‘법’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대상들을 비교해 보면, 이들 대상들은 모두 인간행위의 질서를 의미한다.」(66~67쪽)

여기서 질서란 단순히 행동의 반복이 아니라 규범의 체계, 즉 각각의 규범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모든 규범이 공통적으로 그 근원을 두는 상위규범이 존재하는 체계를 말한다. 켈젠은 이 상위규범을 가리켜 근본규범(Grundnorm)이라 부른다.

「질서란 규범체계이며, 규범의 통일성은 모든 규범이 동일한 효력근거(Geltungsgrund)를 가짐으로써 형성된다. 그리고 규범질서의 효력근거는 근본규범이며, 그 질서에 속하는 모든 규범의 효력은 바로 근본규범에서 유래된다.」(67쪽)

법은 인간행위를 규율한다. 애니미즘 사상이 지배했던 고대사회나 중세시대의 경우 동물이나 무생물의 행위도 법적으로 다뤄졌지만 근대법질서의 규율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적극적 작위’(행동)소극적 부작위’(하지 않음)를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앞서도 언급했듯 법은 인간 상호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사회질서다. 따라서 법이 규율하는 인간행위란 결국 타인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결된 행위, 인간의 인간에 대한 행위인 것이다.

「법질서의 규범들은 인간의 행위를 규율한다.」(67쪽)
「그러한 인간의 행위는 적극적 작위나 소극적 부작위일 수 있다 … 법질서가 일종의 사회질서인 한, 그러한 법질서가 인간의 행위를 적극적인 방법으로 규율하는 경우는 인간의 행위가 직간접으로 타인과 관련되는 경우에 한한다.」(68-69쪽)

가령 살인을 금지하는 규범,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돈을 갚을 의무를 지우는 규범, 타인의 재산권을 존중하라는 규범 등은 모두 인간 간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모든 사람에게 타인을 살해하지 말라는 의무를 지우는 규범, 채무자로 하여금 채권자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불할 의무를 지우는 규범 또는 모든 사람에게 타인의 재산권을 존중할 의무를 지우는 규범 등이 그러하다.」(69쪽)

물론 법은 집단적 관계, 즉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나 공동체에 대한 행위를 규율하기도 한다. 가령 병역의무나 조세의무, 자살미수에 대한 처벌 등은 개인이 타인에게 직접 해를 끼치는 행위는 아니지만, 사회 전체의 질서와 공동체적 가치를 훼손하기 때문에 법에 의해 규율되는바, 이 또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행위라 할 수 있다. ‘법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행위인 것이다.

「병역의무를 지우는 규범을 통해 규율되는 행위는 … 법공동체, 즉 법질서에 복종하고 법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행위이다.」(69쪽)

법이 어떤 행위를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이유는 그 행위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익을 넘어, 법은 공동체의 지속성과 정당성을 보존하는 질서의 원리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법적 권위가 일정한 인간행위를 명령하는 것은 곧 그러한 행위가―정당하든 부당하든―인간의 법공동체에 대해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69쪽)

 

b) : 강제질서

법의 또 하나의 중요한 표지는 바로 강제질서라는 점이다. 법은 사회적으로 유해하다고 간주되는 사태특히 그 성질을 띠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생명·자유·재산 등 이익을 박탈하는 강제행위(해악)를 연결해 대응한다. 이 강제행위는 종교적·초월적 응보가 아니라, 사회 안의 절차와 기관을 통해 집행되는 사회내재적·조직화된 제재이다.

「법질서는 사회적으로 유해하다는 이유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는 일정한 상황, 특히 그러한 성질을 띠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일정한 강제행위, 즉 해악을 가함으로써 그에 대처하고, 또한 그러한 해악이 관련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 부과되며 필요한 경우에는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여 강제적으로 당사자에게 부과된다는 의미에서 강제질서인 것이다. … 법질서에 의해 확정된 제재는 초월적 제재와는 달리 사회내재적 제재이며, 단순한 승인이나 불승인을 본질로 하는 제재와 구별되는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제재이다.」(70쪽)

강제의 조건(무엇을 하면 강제가 따르는가)은 반드시 인간의 작위·부작위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유해적 사태 일반이 그 조건이 될 수도 있다.

「강제행위가 연계되어 있는 조건은 반드시 인간의 일정한 행위일 필요는 없고 인간행위가 아닌―그 어떤 이유에서 사회유해적인 것으로 간주되는―사태일 수도 있다.」(71쪽)

α) 제재로서 확정된 강제행위

법이 강제질서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강제적 제재를 부과한다는 의미이지 적법한 행위를 하도록 강제로 유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법은 물론 제재의 위협을 통해 개인에게 적법행위의 동기를 줄 수 있지만, 그것은 법의 가능한 기능일 뿐 본질은 아니다. 적법행위의 유발은 도덕·종교 등도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이다. 심리적 강제(두려움·욕구)와 강제행위의 법적 확정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한 동기부여란 법이 가질 수 있는 하나의 기능에 불과할 뿐이지 결코 필연적 기능은 아니며, 적법한 행위 즉 명령된 행위가 또 다른 동기에 의해서도 초래될 수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매우 빈번하게 종교나 도덕관념과 같은 다른 동기에 의해 유발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72쪽)
「심리적 강제는 강제행위의 확정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 법이란 그것이―보다 정확히 말해, 법에 대한 관념이―심리적 강제를 행사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생명이나 자유, 경제적 이익 또는 기타 이익에 대한 강제적 박탈인 강제행위를 법이 규정한 조건에 대한 효과로 확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강제질서이다.」(73쪽)

β) 법공동체의 강제독점

법발전의 일반적 경향은 사적 폭력행사 금지와 공적 강제의 독점으로 요약된다(74). 물론 그 과정은 점진적이며, 역사적으로는 자력구제가 부분적으로 허용되기도 했다(75). 성숙한 법질서에서는 누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절차로 강제를 행사할지 법이 창설적으로 지정한다.

「법질서는 창설적인 방법으로 물리적 강제가 행사되어야 할 조건과 그 행사자를 규정한다.」(75쪽)

γ) 법질서와 집단적 안전

법은 강제를 수반하는 규범질서다. 그런데 이 강제가 분산된 채로(개인의 보복, 혈연집단 간 폭력, 자력구제 등) 행사되는 사회에서는 전체적으로 집단적 안전이 매우 낮다. 인간은 자기 이익을 기반으로 보복하거나 심판하기 때문에, 각 집단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처벌하는 상태는 분쟁을 더 크게 만들기 쉽다.

국가가 강제력을 독점한 상태는 무정부상태보다는 안전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단지 폭력사용을 국가만이 할 수 있다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단계는 가장 낮은 정도의 집단적 안전이다. 보다 진정한 의미의 안전은 i) 권리침해 여부를 갈등당사자가 아닌 제3자적 기관이 판단할 것, ii) 제재의 행사주체를 명확하게 분리해낼 것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나타난다. 즉 법원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집행기관이 객관적으로 강제를 행사할 때 비로소, 국가의 폭력은 절차적제도적으로 정당한 제재가 되며, 이로써 진정한 법적 안전이 확보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법질서가 공동체의 강제독점을 실현한 경우 … 우리는 그러한 상태에서 가장 낮은 정도의 집단적 안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적 안전의 개념을 보다 좁게 파악할 수도 있으며, 이 경우 법공동체의 강제독점이 최소한의 집중화에 이른 때, 즉 자력구제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배제된 때 비로소 집단적 안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로는 구체적인 사안에서 권리침해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누가 그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결정이 적어도 직접적으로 갈등에 관여하고 있는 주체들로부터 분리되어 분업적으로 기능하는 특별한 기관인 독립된 법원에 맡겨지는 경우, 다시 말해 폭력행사가 불법인가 아니면 공동체에 귀속 가능한 행위인 제재인가 하는 문제가 객관적인 방법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75-76쪽)

평화란 폭력이 완전히 없는 상태가 아니라 폭력을 질서화하고 독점해 통제된 방식으로 행사하도록 조직하는 것이다. ‘법적 평화폭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폭력이 무제한으로 난무하지 않는 상태’, ‘폭력행사 여부가 객관적 절차에 따라 판단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법질서도 폭력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고 다만 그 폭력을 통제하고 정당화하여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법적 평화는 본질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법적 평화란 상대적인 것일 뿐,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 법은 강제질서이며, 강제질서로서의 법은 … 안전질서이며 평화질서이다.」(76쪽)

δ) 제재가 아닌 강제행위

근대 이전의 법질서에서는 공권력이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 주로 확정된 위법행위, 즉 이미 저질러진 범죄나 법 위반이었다. 그러나 근대 행정국가로 이동하면서 강제의 조건은 크게 확장됐다. 공권력이 개인의 자유·재산·신체를 침해할 수 있는 사유는 이제 이미 성립한 불법에 한정되지 않는다. 공권력은 위험의 가능성, 공익상 필요, 장래의 법질서 교란 등을 우려해 선제적으로 강제를 행사하기도 한다.

가령 범죄수사를 위한 체포구속, 압수수색 등은 아직 범죄가 확정되지 않은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 조치다. 이때 자유박탈의 조건은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아니라,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할 만한 혐의라는 점에서 제재와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같은 맥락에서 현대국가들은 정신질환자나 전염병 환자를 강제로 격리하거나 수용할 수 있으며, 공익상 필요에 따라 재산을 수용하거나 철거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경우에 강제행위는 외형적으로는 제재와 마찬가지로 생명·자유·재산을 직접적으로 제한하지만, 그 조건은 이미 확정된 불법행위가 아니다.

「범죄혐의가 있는 자들이 범죄를 저질렀는지 여부를 확정할 목적에서 그들에 대해 행해지는 사법절차의 진행을 보장하기 위하여 그들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권한을 경찰과 같은 특정한 공동체기관에게 부여하고 있는 규범들이 일차적으로 이에 해당한다. 자유박탈의 조건은 관련 당사자의 특정한 행위가 아니라 그러한 행위에 대한 혐의이다. 경찰기관은 위법한 침해행위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법질서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정한 개인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권한, 즉 그들을 이른바 구치소에 수감할 수 있는 권한을 법질서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다. 근대적 법질서는 정신병자를 보호소에 격리하거나 전염병자를 일정한 격리시설에 강제적으로 수용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공익적 요청에 따라 재산권을 강제적으로 박탈하거나, 전염병에 감염된 가축의 강제적 도살 또는 붕괴위험이 있거나 화재가 확산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행하는 건물의 강제적 철거 등도 이에 해당한다.」(79쪽)

어디까지나 장래 위험의 예방, 사회적 안전 확보, 공익 실현 등을 위해 행해지는 이들 조치들은 엄밀히 말해 제재가 아니다. 제재란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확정된 불법행위에 대한 반응이며, 그 조건은 이미 일어난특정한 인간의 작위 또는 부작위이기 때문이다.

「이들 조치들이 제재와 구별되는 것은 그러한 강제행위가 법적으로 확정되어 있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정한 인간의 특정한 작위 또는 부작위와 결부되어 있지 않다는 점, 다시 말해 그들 조치의 조건이 일정한 인간에 의해 행해진, 법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불법이나 범죄가 아니라는 점뿐이다.」(80쪽)

물론 개념을 넓히면, 장래의 불법 가능성에 대응하는 이러한 조치들도 광의의 제재로 볼 수 있게 된다. 그처럼 넓은 의미의 제재 개념을 취한다면, 제재는 더이상 불법효과라고만은 할 수 없게 되며, 오히려 제재가 불법에 선행할 수도 있다(81).

ε) 자유의 최소한

법은 적극적으로(금지·의무와 제재를 연결하여), 그리고 소극적으로(강제를 연결하지 않음으로써 허용) 행위를 규율한다.

「적극적 방식이라 함은 일정한 행위와 반대되는 행위에 대해 제재로서의 강제행위를 결부시킴으로써 그러한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고 그리하여 그 반대행위를 금지하는 것을 말하며, 소극적 방식이라 함은 일정한 행위에 대해 어떤 강제행위도 결부시키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행위를 금지하지 않고 나아가 그 반대되는 행위를 명령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82쪽)

그런데 소극적 허용만으로는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자유는 단지 금지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는 실제로 실현되기 어렵다. 법이 금지하지 않았더라도 타인이 이를 방해하거나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이 이 길을 지나가도 좋다고 금지하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길을 막거나 폭력을 행사해 통행을 방해한다면 실제로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자유가 참으로 법적 자유가 되려면 일단 타인의 방해를 금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정한 인간에게 일정한 행위가 금지되어 있지 않고 따라서 허용되어 있음을 그 본질로 하는 인간의 자유는 법질서가 타인에 대해 이러한 자유를 존중할 것을 명령하고 동시에 이러한 자유에 대한 침해를 금지하는 경우에만, 즉 일정한 자에게 금지되어 있지 않는 (이러한 의미에서 허용되어 있는) 행위를 타인이 방해하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는 경우에만 법질서에 의해 보장될 수 있다. 그럴 경우에만 금지되어 있지 않은 행위, 즉 이러한 소극적 의미에서 허용된 행위는 권한, 즉 상응하는 의무의 반사로서의 성격을 갖는 권한의 내용이 될 수 있다.」(83쪽)

법이 인간행위를 아무리 세세하게 통제하더라도 완전히 모든 행동을 규율할 수는 없다. 국가가 인간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통제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의 선택과 행동은 너무 다양하고 복잡하므로, 법이 이를 모두 규율할 수 있는 기술·감시체계를 갖추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비현실적이다. 더욱이 규범은 조건이 충족되면 제재가 따른다는 구조를 갖는데, 인간의 모든 행위를 규범화하려면 무한한 조건과 제재를 설계해야 한다. 이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래서 켈젠은 어떤 법질서에서도 자유의 최소한은 남는다고 한다. 이것은 자연권이나 철학적 권리가 아니라, 법이 인간을 100% 규율할 수 없다는 기술적현실적 한계에서 생기는 여지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켈젠은 자유권이란 어떤 자연적도덕적 권리가 아니라 다만 법질서가 기술적으로 확보할 수밖에 없는 자유의 최소한이며, 이를 정치적으로 제도화한 것이 헌법적 기본권이라고 본다. 즉 이는 자연권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법이 규율할 수 없는 영역을 명시적정치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제도화된 것이다. 물론 이 자유 또한, 실제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금지하지 않는 것을 넘어 타인의 침해를 금지하는 것’, 즉 방해금지규범이 존재해야 한다.

「자유의 최소한, 다시 말해 어떤 명령이나 금지에 의해서도 간섭받지 아니하는 인간실존의 영역으로서 법적으로 구속받지 않는 최소한의 영역은 언제나 보장되어야 한다. 설령 전체주의적인 법질서 아래에서라 할지라도 불가양의 자유와 같은 그런 어떤 것은 존재하기 마련인데, 이것은 생태적인 자연권으로서가 아니라 인간행위에 대한 적극적 규율가능성이 기술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이러한 자유영역은 법질서가 자유에 대한 침해를 금지하는 한에서만 법적으로 보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84-85쪽)

 

c) 규범적 강제질서로서의 법, 법공동체와 강도집단

◎ 법강제의 객관적 의미

일상적으로 사람들은 법을 위협으로 이해하곤 한다. 어떤 행동을 하면 벌이 따른다는 식으로, 법을 일종의 조건적 위협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켈젠에 따르면 이런 설명은 법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법은 단순히 조건이 충족되면 해악이 부과된다는 인과적 서술이 아니라, ‘조건이 충족되면 해악이 부과되어야 한다는 규범적 확정이다. 법은 단순한 사실적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반드시 어떤 강제행위가 따라야 한다는 당위를 체계적으로 확인하는 구조이다. 그래서 법을 위협으로 이해하는 표현은 법질서가 갖는 본래의 규범적 성격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우리는 때때로 법이란 강제행위의 ‘위협’ … 을 통해 일정한 인간행위를 명령한다고 말함으로써 강제질서로서의 법을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법질서가 일반적으로는 강제행위, 개별적으로는 제재를 확정하고 있는 규범적 의미를 무시하고 있다. … 법질서의 의미는 일정한 해악이 일정한 조건하에서 부과되어야 한다는, 보다 일반적으로 표현하자면, 일정한 조건하에서 일정한 강제행위가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85쪽)

이 지점에서 켈젠은 주관적 의미객관적 의미의 차이를 강조한다. 어떤 인간이 타인에게 일정한 행위를 요구하는 표현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표현이 규범으로 승인될 수 있으려면, 단순한 의사의 표출을 넘어 객관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 법정립행위나 법의 집행행위는 그 행위가 객관적으로 효력 있는 규범의 일부로 승인될 때에만 비로소 법적 행위가 된다.

「곧 그것이 행위의 객관적 의미로 해석될 경우에만 이들 행위는 법정립적 행위, 즉 규범창조적 또는 규범집행적 행위로 승인되는 것이다.」(85-86쪽)

가령 강도가 돈을 내놓으라(돈을 내놔야 한다, 돈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쨌든 당위적 언표라는 점에서 형식적으로는 법적 명령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강도의 명령을 규범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강도의 요구는 그가 원한 결과를 얻기 위한 주관적 의미일 뿐이며, 객관적으로 승인된 규범적 효력을 갖지 않는다. 반대로 법관이나 경찰의 명령은, 그 내용이 자연적 언어 차원에서 강도의 명령과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법질서 내부에서 효력을 가진 것으로 해석된다. 바로 이 객관적 의미의 승인 여부가 단순한 의사표시와 규범을 구분짓는다.

「노상강도의 명령에 대한 기술과 법기관의 명령에 대한 기술간에는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 일방 개인이 타방에 대해 행하는 명령의 주관적 의미가 아니라 그 객관적 의미를 기술하는 경우에 비로소 양자간의 차이점이 나타나게 된다. … 우리는 전자의 명령은 객관적으로 효력 있는 규범으로 해석하지만, 후자의 명령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아가 … 전자의 경우는 강제행위를 확정하고 있는 객관적으로 효력 있는 규범의 적용 또는 집행으로 … 후자의 경우는—규범적으로 해석하는 한—이를 범죄로 해석한다.」(85-86쪽)

객관적 의미를 가능케 하는 토대

그렇다면 왜 어떤 명령은 규범으로 승인되고, 다른 명령은 그렇지 않은가? 켈젠은 그 이유를 효력근거의 연쇄에서 찾는다. 법원의 판결이나 국회의 입법행위가 법적 효력을 갖는 것은 그 자체가 특별한 물리적 행위여서가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상위규범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결은 법률의 집행으로 승인되고, 법률은 헌법의 집행으로 승인된다. 헌법이 효력을 갖는 이유 역시, 그것이 헌법제정행위로 해석되고 그런 행위가 규범창조적 행위로 인정될 수 있게 하는 규범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연쇄의 최종에는 행위가 아니라 근본규범(Grundnorm)이 존재한다.

「법원의 행위를 법률 … 에 대한 집행으로 승인하고 있기 때문이다.」(87-88쪽)
「입법행위를 헌법의 집행 … 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88쪽)
「역사상 최초의 헌법 … 은 … 헌법제정으로 해석되는 행위가 객관적으로 효력 있는 규범을 정립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고, 나아가 그러한 행위를 정립하는 자들이 헌법제정권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하는 규범을 전제하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 규범이 근본규범이다.」(88쪽)

근본규범은 누군가가 어떤 명시적 행위를 통해 만들어낸 규범이 아니다. 그것은 법질서를 법질서로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근원적인 전제, 헌법은 준수되어야 한다는 식의 원초적 당위규범이다. 법질서는 이 근본규범을 전제로 할 때에만 하나의 유기적 질서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 결과 특정 명령은 법적 명령으로, 다른 명령은 범죄적 행위로 구별된다. 근본규범이 있기 때문에 법원의 사형집행을 살인으로 보지 않고, 강도의 명령을 법규범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근본규범은 적극적인 법적 행위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헌법제정행위로 해석되고 이러한 헌법에 의거해 정립된 행위가 법적 행위로 해석되는 한에서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88쪽)

강도집단과 국가의 구분

켈젠은 법질서를 다른 강제질서특히 강도집단의 강제와 구별하는 기준을 정의도덕성같은 가치판단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법을 실정법의 관점에서 순수하게 기술하려 했기 때문에, 규범의 효력을 설명할 때도 가치적 요소가 아닌 구조적·사실적 조건을 강조한다. 그 핵심이 바로 실효성(efficiency)과 근본규범의 전제가능성이다.

법이 효력을 가진다는 것은 단지 누군가 강제로 명령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명령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반적으로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 즉 지속적 실효성을 갖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법질서의 효력을 설명하는 근본규범을 상정하려면, 최소한 그 헌법이나 상위규범이 일정한 기간 동안 실효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집단이 일시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법질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강도집단과 국가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어떤 집단이 특정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규율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외형상으로만 보면 구성원에 대한 명령, 제재, 내부 규율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법질서와 유사한 모습을 띨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은 근본규범을 전제할 만큼의 안정성과 지속적 실효성이 결여되어 있다. , 그들의 강제질서는 사회 전체를 규범적으로 조직하는 체계가 아니라, 단지 물리적 힘의 일시적 행사에 불과하다.

「강도집단의 강제질서가 실효성을 갖지 못함은 명백하다.」(90쪽)

반대로, 어떤 강제질서가 일정한 영역 내에서 다른 모든 강제질서를 배제할 정도로 안정적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그 내용이 정의로운지 여부와 관계없이 법질서로 간주될 수 있다. 심지어 그 강제질서가 외부세계에서는 불법적 행위를 하며 해적국가로 불린다 하더라도, 내부적으로 독자적이고 지속적인 규범체계를 유지한다면 그 지역 주민에게는 법질서로 기능한다. 켈젠의 이 설명은 법을 가치판단이 아니라 효력구조의 문제로 다루는 순수법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 강제질서는 법질서로 간주될 수 있고, 그를 통해 구성되는 공동체는 아마도 ‘국가’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들 집단은 타국의 선박에 대해 국제법에 위배되는 폭력행사를 하였다는 점과 관련해서만 ‘해적’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91쪽)

가령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와 강도집단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정의를 제시하며, 정의가 없다면 그 공동체는 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켈젠은 이러한 기준이 상대적 가치판단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불충분하다고 비판한다. 한 공동체의 법이 정의로운지 여부는 사람마다, 시대마다, 관점마다 달라질 수 있다. 만약 정의가 국가와 비국가를 가르는 기준이라면, 법학은 필연적으로 윤리학이나 정치철학의 가치논쟁 속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러나 켈젠은 법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가치논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정의가 법을 다른 강제질서와 구분시켜 주는 표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공동체질서를 정의롭다고 보는 가치판단이 상대적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92쪽)

역사적 경험 역시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한다. 어떤 혁명정부가 등장했을 때, 기존의 법질서와 충돌하면서 그 행위를 불법적 폭력으로 평가하는 시기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새로운 질서가 사회 전반에 실효적으로 정착하게 되면, 이전에는 반역이나 폭력으로 간주되던 행위가 법정립적 행위로 재해석된다. , 지속적 실효성이 확보된 순간, 새로운 강제질서는 기존의 법질서와 동일하게 법적 효력을 갖는 체계로 승인되는 것이다.

「혁명에 의해 수립된 강제질서가 지속적으로 실효성 있는 것으로 입증되자마자 그 질서는 법질서로 승인되었고 … 그들의 행위는 … 법적 행위로 승인되었다.」(93쪽)

 

d) 제재 없는 법의무?

켈젠에게 법은 무엇보다 강제질서다. ‘법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려는 순수법학의 관점에서, 법규범이 성립하려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강제행위의 확정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강제의 구조는 개별 법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법질서 전체를 구성하는 헌법적·제도적 장치 속에 체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켈젠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근본규범을 끌어온다. 근본규범은 역사적으로 최초의 헌법에게 강제행위를 확정하는 규범을 정립하는 절차를 규정할 권한을 부여하는 규범으로 전제되며, 이를 통해 하나의 법질서가 강제질서로 조직될 수 있게 된다. 즉 어떤 규범이 법규범으로 객관적으로 승인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근본규범에 따른 절차로 정립된 행위의 의미이어야 하고, 또한 강제행위를 확정하는 규범과 실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법을 강제질서로 파악한다면, 국가법질서의 근본규범을 나타내는 공식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즉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강제는 역사적으로 최초의 헌법이 규정하는 방식과 조건에 따라 행사되어야 한다. 근본규범은 역사적으로 최초의 헌법에다가 강제행위를 확정하는 규범을 정립하는 절차를 규정할 권한을 위임한다. 어떤 규범이 객관적으로 법규범으로 해석되려면, 그 규범은 이상과 같이 근본규범에 따른 절차를 통해 정립되는 행위의 주관적 의미이어야 하며, 나아가 강제행위를 확정하거나 또는 그러한 규범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근본규범과 더불어 근본규범 속에 강제질서인 법에 대한 정의(定義)도 포함된 것으로 전제된다.」(94쪽)

이때 강제행위가 반드시 명령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강제행위의 집행이나 발동이 단순한 권한의 부여로서 나타날 수도 있으며, 그 자체가 명령 형식으로 기술될 필요는 없다.

「강제행위 그 자체가 반드시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명령될 필요는 없으며, 강제행위의 명령이나 그 집행이 단순히 권한에 그칠 수도 있다.」(94쪽)

그런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제재 없이도 의무가 성립할 수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어 왔다. 예컨대 허용규범이나 수권규범처럼 제재와 무관한 규범이 존재하기 때문에 법을 강제질서로 정의하는 것이 온전히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또 하나의 반론은 의무는 부여하지만 그 반대행위에 제재를 연결하지 않는 규범도 현실의 법 속에 존재하므로, 법적 의무가 반드시 제재와 결부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다.

켈젠은 이 두 반론 모두에 대해 일관되게 대응한다. 그는 법질서를 구성하는 개별 규범들 중에는 분명히 제재를 직접 포함하지 않는 규범들이 있지만, 전체적인 법질서가 강제질서로 조직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비독립적 규범들이 제재규범들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면, 법을 강제질서로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헌법규범이다. 입법절차를 규율하는 헌법규범 자체는, 그것이 위반될 경우의 제재를 확정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헌법이 강제와 무관한 규범이라고 할 수는 없다. 헌법은 독립된 제재규범이 아니라 강제규범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정하는 비독립적 규범이며, 헌법규정의 준수 여부는 다른 강제규범들의 성립·유효성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헌법이 무력화되면 강제규범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헌법은 법질서 전체의 강제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적 규범으로 기능하게 된다.

「법을 강제질서로 정의하는 것은 강제행위로서의 성격을 갖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규범 또는 그러한 행위를 적극적으로 허용하는 규범에 대해서도 유지될 수 있는바, 이것은 이들 규범이 강제행위를 확정하는 규범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 비독립적 규범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강제의 요소를 법개념 속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견해에 대한 반대논거로서 제시되고 있는 규범의 전형적인 예가 바로 헌법규범이다. 일반적으로 주장되고 있는 바와 같이, 입법절차를 규율하는 헌법규범은 그것이 준수되지 않는 경우에 대비해 어떤 제재도 확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좀 더 자세하게 분석해 보면 헌법은 다른 규범에 의해 확정된 강제행위가 명령되고 집행될 수 있는 조건만을 규정하고 있는 비독립적 규범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헌법은 입법기관에게 규범창조의 권한을 부여하는 규범이지, 규범창조를 명령하는 규범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결코 제재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 헌법규정들이 준수되지 않는 한 어떠한 효력 있는 규범도 성립될 수 없으며, 그렇게 창조된 규범은 무효이거나 폐지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 행위, 따라서 근본규범에 따라 정립되지 아니한 행위의 주관적 의미는 그 객관적 의미로 해석되지 아니하거나 또는 그런 해석은 잠정적으로 효력을 갖더라도 다시금 폐지되고 만다.」(95~96쪽)

다시 말해 제재 없는 법적 의무처럼 보이는 규범들도 결국은 제재규범의 효력 제한으로 설명될 뿐, 독립적 의미에서의 제재 없는 의무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채무가 대표적이다. 자연채무는 소송을 통해 강제집행을 청구할 수는 없지만, 임의로 이행이 이루어지면 부당이득반환을 청구할 수 없다. 이는 제재가 없는것이 아니라 강제규범의 발동 요건과 효력이 제한된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켈젠은 자연채무를 제재 없는 의무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보지 않는다.

「강제행위를 확정하는 그러한 규범의 효력이 법질서가 규정하고 있는 일정한 경우에는 제한됨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켈젠은 더욱 단호하게 말한다. 어떤 행위가 규범을 창조하는 행위로 해석되더라도, 그 행위가 반대행위에 대한 제재를 전혀 규정하지 않는다면, 그 주관적 의미는 더 이상 법규범의 객관적 의미로 승인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의무만 규정하고 그 반대행위에 대한 법적 불이익이 일체 없다면, 그 규범은 법질서 내부에서 법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법의 형식을 갖추었더라도 규범적 내용을 갖지 않는 빈 외피에 불과하다.

「그 주관적 의미가 일정한 인간행위를 명령하는 규범인 행위를 정립하면서 … 그 반대행위에 대해 제재 … 를 확정하는 규범인 행위를 정립하지 않는 경우 … 법규범으로 해석될 수 없고 법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96~97쪽)

이러한 맥락에서 켈젠은 근본규범의 절차에 따라 제정된 법률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규범적 의미즉 권리·의무·금지·허용를 갖지 않다면 그것은 법형식을 빌린 정치적 표어, 종교적 선언, 축원문 등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법은 신으로부터 유래한다거나 법률은 정의로운 것이라거나 또는 법률은 전체 국민의 이익을 실현한다라는 명제 등이 그러하다. 헌법에 따라 성립된 법률이라는 형식을 통해 국가원수의 정부수립을 기념하여 국민적 축원이―오직 그러한 축원에 특별히 장엄한 형식을 부여할 목적에서―바쳐질 수도 있다. 헌법에 따라서 성립된 행위들이 글로 표현되는 한, 그러한 행위들은 어떤 의미라도 임의대로 지닐 수 있다. 즉 규범만을 내용으로 하지 않는 어떤 형식일 수 있다. 법 일반을 규범으로 정의하는 한, 법학은 법적으로 무의미한 내용의 개념을 갖지 않게 된다.」(97쪽)

켈젠은 전통적 구별을 한층 정교하게 다듬어 법률형식과 법률내용을 분리한다. 어떤 행위가 헌법이 정한 절차를 거쳐 성립했다는 사실즉 형식적 정당성만으로는 그 행위가 법규범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행위의 내용이 실제로 규범적 의미, 즉 명령·허용·수권이라는 당위적 구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성의 판단 기준은 궁극적으로 근본규범이 전제하는 법정의에 의해 결정된다. 근본규범은 역사상 최초의 헌법을 규범창조의 권위로 승인하라는 전제로서 작동하고, 이 전제로 인해 특정한 행위의 의미가 규범으로 해석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이 지점에서 켈젠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법을 강제질서가 아닌, 단지 근본규범에 따라 정립된 질서로만 정의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이런 관념을 취한다면, 헌법적 입법자가 제재를 부과하지 않은 순수한 명령규범을 만들 경우 그것 역시 법규범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지만 그 반대행위를 제재로 연결하지 않는 규범즉 무제재 명령규범도 절차만 충족하면 법으로 인정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만약 법을 강제질서가 아니라 근본규범에 따라 정립된 질서로 정의하고 그에 따라 역사상 최초의 헌법에 의해 규정된 조건에 따라 역사상 최초의 헌법이 규정하는 바대로 행위하여야 한다라는 식으로 근본규범을 표현한다면, 제재 없는 법규범, 즉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일정한 인간행위를 명령하면서 이를 준수하지 않더라도 다른 규범을 통해 제재를 확정하고 있지 않은 그런 법규범이 존재할 수도 있다.」(98쪽)

그러나 이러한 규범은 도덕규범과 구분되지 않는다. 특히 관습을 통해 형성되는 도덕 전체가 법질서의 일부로 취급하게 되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법개념을 붕괴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법을 강제질서로 규정하지 않는 법정의는 원천적으로 거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경우 근본규범에 따라 정립된 행위의 의미는 결코 규범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어떤 규범과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것으로서 법적으로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헌법적 입법자에 의해 정립된 규범, 즉 일정한 인간행위를 명령하면서 동시에 그 반대되는 행위에 대해 제재로서의 강제행위를 확정하고 있지 않은 규범은 그 기원상 도덕규범과, 그리고 관습의 방식으로 창조된 법규범은―마찬가지로 관습에 의해 창조된―도덕규범과 결코 구분될 수 없을 것이다. 관습이 헌법에 의해 도입된 법규범창조적 요건사실이라면, 전체 도덕은―이들 도덕규범이 사실상 관습에 의해 창조되는 한에서―법질서의 구성요소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법을 강제질서로 규정하지 않는 법정의는 거부해야 한다(98쪽).

오로지 강제질서로 이해할 때에만 법은 다른 사회적 규범도덕, 종교, 예절과 명확히 구별될 수 있다. 또한 법과 국가라는 강제질서 사이의 구조적 연관성도 비로소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다. 근대 국가법은 본질적으로 강제의 독점·집중화에 의해 조직되어 있으며, 법질서 역시 그 강제의 기술적 배열을 규정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강제는 법개념의 부가적 속성이 아니라 법을 법이도록 만드는 본질적 요소라 하겠다.

「무엇보다 강제의 요소를 법개념 속에 포함시킬 경우에만 법이 여타의 다른 사회질서와 분명하게 구분될 뿐만 아니라, 강제라는 요소를 통해 비로소 사회적 관계의 인식을 위해 극히 중요한 요소이자 ‘법’이라고 불리는 사회질서에 있어 극히 특징적인 요소가 그 기준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를 통해 법의 인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안인 근대 국가법의 경우에 있어 법과, 본질상 강제질서인 국가, 더욱이 사실상 중앙집중화되어 있으면서 그 영역적 적용범위에 있어 제한적 강제질서인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이 고려되기 때문이다(98-99쪽).

현실에서도 이러한 이론적 결론을 확인할 수 있다. 켈젠은 근대적 법질서에서 제재 없이 단지 명령만을 부과하는 규범은 극히 예외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입법이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면서도 그 반대행위를 제재의 조건으로 삼지 않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법이 실제 작동방식에서도 강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입법행위의 주관적 의미인 규범이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면서 그 반대되는 행위를 제재인 강제행위의 조건으로 삼고 있지 않은 경우는 근대적 법질서에서는 극히 예외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99쪽)

법을 강제질서로 규정하는 법정의를 버리고, 단순히 근본규범에 따라 정립된 질서라는 형식만을 강조하면, 도덕규범과 법규범, 관습적 규범과 법적 규범의 구분은 전면적으로 무너진다. 켈젠은, 만약 역사적으로 강제가 완전히 사라진 사회가 성립한다면예컨대 마르크스가 구상한 공산주의적 미래그때는 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강제가 없는 사회에서는 법이 더 이상 성립할 수 없으며, 그런 사회에서는 국가와 더불어 법도 사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질서는―여기서 받아들이고 있는 법정의의 의미에서―그 법적 성격을 상실하고 그에 의해 구성된 공동체도 국가적 성격을 상실할 것이며, 마르크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국가는―그리고 국가와 더불어 법 역시―‘사멸’하게 될 것이다.」(99쪽)

 

e) 비독립적 법규범

◎ 비독립규범의 개념

켈젠은 법규범을 분석함에 있어 독립적 규범비독립적 규범을 구별한다. 독립적 규범이란 스스로 제재를 확정함으로써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거나 명령하는 규범을 말하는 반면, 비독립적 규범은 제재규범에 의존해서만 규범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규범이다. 어떤 행위가 명령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반대행위가 제재의 조건이 되어야 하며, 이때 명령규범은 제재규범이 규정한 조건을 소극적으로특정하는 보조적 규범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켈젠은 명령규범은 독립적인 규범이 아니며 후자의 제재규범과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

「일방의 규범이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면서 타방의 규범이 그 일방 규범을 준수하지 않는 경우를 대비하여 제재를 확정하고 있다면, 그 두 규범이 상호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음은 이미 다른 곳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 의회에 의해 의결된 법률이 일정한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 규범의 비준수에 대해 제재를 결부시키고 있는 또 다른 규범을 포함하는 경우, 전자의 규범은 독립적인 규범이 아니며 후자의 규범과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즉 전자의 규범은 후자의 규범이 제재를 결부시키는 조건만을―소극적으로―규정할 뿐이다. 그리고 만약 후자의 규범이 적극적으로 제재의 조건을 규정한다면, 법기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자의 규범은 불필요하다.」(99-100쪽)

◎ 전형적 사례

비독립규범의 예를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i) 행정법령에서 금지행위 규정 그 자체는 제재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 제재는 벌칙규정이나 과태료결정에 규정돼있다. 금지행위 규정은 결국 이 벌칙규정 등과 결합하여 하나의 규범을 이루는 것이다. ii) 민법이 대부금 상환의무를 규정하고, 별도의 규범이 상환하지 않을 경우 강제집행을 명한다면, 상환의무규범의 모든 의미는 결국 집행규범 속에 조건으로 포함되는 것이다. iii) 현대 형법은 별도로 사람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라는 금지행위규정을 두지 않는다. ‘사람을 살해한 자는 처벌되어야 한다는 제재규범이 이미 그 자체로 금지적 의미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민법이 채무자는 그가 수령한 대부금을 계약에 따라 채권자에게 상환하여야 한다는 규범을 두면서 동시에 … 상환하지 않을 경우 … 강제집행이 행해져야 한다는 규범을 두는 경우, 전자의 규범이 규정하는 모든 내용은 후자의 규범에 소극적으로 그 조건으로서 포함되어 있다 … 근대형법은 … 살인이나 간통 등의 범죄를 금지하는 규범을 두고 있지 않으며, 일정한 구성요건에 대해 형사적 제재를 결부시키는 데 국한되어 있다. 이 경우 ‘살인하는 자는 처벌되어야 한다’라는 규범이 적용되는 경우에는 ‘살인하지 말라’라는 규범이 불필요함은 분명하게 드러난다.」(100쪽)

적극적 허용규범도 비독립규범이다. 허용규범은 금지·제재규범의 적용범위를 제한하는 규범에 불과하므로, 그것만으로는 규범적 완결성을 갖지 못한다.

「일정한 행위를 적극적으로 허용하는 규범도 비독립적 규범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규범은 위반행위에 대해 제재를 결부시킴으로써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는 법규범의 적용범위를 제한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00~101쪽)

국제법에서도 이러한 구조가 나타난다. 유엔헌장이 제2조 제4항에서 무력행사를 금지하고 제39조에서 그 위반에 제재를 연결하는 한편, 51조에서 자위권 발동을 허용하는 조항을 두는 것은, 허용규범이 제재규범과 결합할 때 비로소 규범적 의미를 획득한다는 구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행정법상의 허가제도도 마찬가지다. 가령 주류 무허가판매를 처벌하면서, 허가를 받은 경우에는 금지를 해제하는 규범을 두는 경우, 후자의 규범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는 비독립규범이다. 그 전체가 허가 없이 판매하는 행위를 제재하는 하나의 규범을 이루는 것이다.

「유엔헌장은 회원국들에 의한 무력행사에 대해 제39조에 정한 제재를 연계시킴으로써 제2조 제4항에서 모든 회원국에 의한 무력행사를 금지하고 있으며, 나아가 제2조 제4항의 일반적 금지를 제한함으로써 제51조에서 개별적 또는 집단적 자위를 목적으로 한 무력행사는 허용하고 있다.」(101쪽)
「주류판매행위를 처벌(즉 금지)하면서 … 당국의 허가가 있을 경우에는 … 이를 허용하는 또 다른 규범 … 은 비독립적인 규범이다. … 이들 규범의 내용은 … ‘당국의 허가없이 주류를 판매하는 자는 처벌된다’는 하나의 규정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101쪽)

폐지규범이나 정의규범도 비독립규범이다. 어떤 규범의 효력을 제한하거나 폐지하는 규범, 또는 구성요건을 기술하고 개념을 정하는 규범은, 그것만으로 제재를 구성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강제규범의 적용범위를 조정하는 기능을 한다. 예컨대 형법이 살인이란 고의로 타인의 사망을 초래하는 모든 행위라고 정의할 경우, 이 조항은 그것만으로는 규범성을 갖지 못하며, 오직 살인을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규범과 결합될 때 비로소 하나의 구성요건 규정으로 기능한다.

「폐지규범 역시 강제행위를 확정하고 있는 다른 규범과 결합할 경우에만 이해될 수 있는 비독립적 법규범이다.」(101~102쪽)
「형법은 ‘살인이란 고의로 타인의 사망을 초래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이다’라는 조항을 둘 수 있다. … 이 조항은… ‘누군가가 살인을 행했을 경우에는 … 사형을 부과해야 한다’라고 규정하는 다른 조항과 결합할 경우에만 규범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104쪽)

권한부여 규범 역시 마찬가지로 비독립적이다. 권한을 부여하는 규범이 규범창조 또는 규범집행이라는 법적 효과를 발생시킨다 해도, 그 자체로는 강제행위를 확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도죄의 집행을 예로 들면, 형벌을 부과하는 규범이 독립적 규범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발동되기 위해서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정한 절차적 규범들이 선행해야 하며, 이 모든 규범들은 강제규범과 결합할 때 비로소 기능한다.

「일정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규범도 … 비독립적 법규범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그 법규범은―독립적인 규범에서―강제행위가 결부되는 조건들 중의 하나만을 규정하기 때문이다.」(102쪽)

절도 처벌을 예로 들면, 처벌 자체는 강제규범이 정하지만, 그 발동에는 비독립규범으로서 헌법·형사소송법의 규정들이 정하는 절차라는 추가 조건이 필요하다(103).

이처럼 법질서에는 다양한 비독립적 규범들이 존재하지만, 이 사실은 법질서가 강제질서라는 점을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는다. 비독립규범들은 모두 독립적 강제규범과 결합하여야만 규범적 의미를 갖기 때문에, 전체 법질서는 여전히 강제행위의 구조 속에서 조직된다.

「법질서는 비록 그에 속한 모든 규범들이 강제행위를 확정하고 있지 않더라도 강제질서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스스로 강제행위를 확정하거나 명령하지 않고 규범을 정립할 권한을 부여하거나 적극적으로 허용하는 모든 규범들은 강제행위를 확정하는 다른 규범과 결합함으로써만 효력을 갖는 까닭에 비독립적 규범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104쪽)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