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순수법학

켈젠 순수법학 강독[6] - 법정태학 上(제재, 의무, 책임, 권리)

斧針 2025. 11. 16. 19:52

한스 켈젠(변종필/최희수 역), 《순수법학》, 길안사, 1999 
Hans Kelsen, Reine Rechtslehre (1963)

<차 례>

[01] - 법과 자연 上

[02] - 법과 자연 下(사회질서, 법질서)

[03] - 법과 도덕

[04] - 법과 과학 上

[05] - 법과 과학 下

[06] - 법정태학 上(제재, 의무, 책임, 권리)

[07] - 법정태학 中(행위능력과 권리능력)

[08] - 법정태학 下(법률관계, 권리주체)

[09] - 법동태학 上 (근본규범)

[10] - 법동태학 中(법질서의 단계구조 1: 위계질서)

[11] - 법동태학 下(법질서의 단계구조 2: 규범충돌)

[12] - 법과 국가 上(공법-사법 이원론 비판)

[13] - 법과 국가 下(국가-법 이원론 비판)

[14] - 국가와 국제법

[15] - 해석

[16] - 부록 1(정의의 규범들)

[17] - 부록 2(자연법론)


 

27. 제재: 불법과 불법효과

법을 강제질서로 파악하는 켈젠의 관점에서, 법을 기술하는 법명제는 강제행위가 특정 조건 아래에서 가해져야 한다는 구조를 띤다. 여기서 강제행위란 상대방의 의사와 무관하게, 필요하면 물리적 힘을 동원해 실행되는 행위를 말한다. 켈젠은 법질서가 규정하는 강제행위가 두 종류로 나타난다고 설명하는데, 하나는 i) 특정한 작위·부작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작동하는 제재로서의 강제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ii) 특정 행위와 관련 없이 공익을 위한 수용·박탈처럼 규정되는 강제행위이다.

「강제행위란 관련대상자의 의사에 반해서도 집행되며 또 그 자가 저항할 경우에는 물리적 강제를 동원해서 집행될 수 있는 행위를 말한다. … 법질서에 의해 규정된 작위나 부작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확정되어 있는 강제행위와 …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지 않는 강제행위가 그것이다.」(189쪽)

제재는 형벌강제집행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해악의 부가 또는 재산박탈이라는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그러나 강제집행은 위법하게 발생한 상태를 법에 부합하는 상태로 되돌리려는 배상적 성격을 갖는 반면, 형벌은 배상의 목적과 연관되지 않으며 그러한 목적을 통해 정의될 수도 없다. 형벌에 예방목적이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강제집행 또한 해악부과를 통해 예방효과를 가지는 만큼, 목적을 기준으로 해서는 둘을 구분할 수 없다.

「집행(강제집행) 역시 해악을 강제적으로 부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 불법에 대한 배상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형벌과 구분된다.」(190쪽).

켈젠은 형벌과 강제집행은 모두 일정한 절차에 따라 명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단지 형사법원·행정기관·민사법원 등 집행기관의 차이에 의해 구별될 뿐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제재를 명하는 행위와 그 제재를 실제로 실행하는 행위는 구분되어야 하며, 실제 집행은 항상 행정기관이 담당한다는 점 역시 지적한다(192).

한편, 일반 국제법상의 보복 또는 전쟁은 형벌도 민사집행도 아니지만, 배상을 관철하기 위해 타국의 이익을 강제로 박탈한다는 점에서 강제집행과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현행 국제법상 일방국가는 타방 국가에 대해 그 타방 국가가 위법하게 야기한 손해의 배상을 거부할 경우에만 보복이나 전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강제행위는 오직 배상을 받아낼 목적에서만 실행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일반적 국제법상의 제재와 민법상의 강제집행 사이에는 일정한 유사성이 성립한다.」(192쪽)

켈젠은 법질서 내부에서 불법이란 강제행위를 작동시키는 조건을 이루는 작위·부작위를 의미한다고 한다. 흔히 불법을 법의 부정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 불법은 법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법 내부에 있는 구성요건, 법질서가 제재를 결부시키는 조건 자체라는 것이다. 어떤 행위가 불법이 되는 것은 그 행위 자체의 본질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가 법질서에 의해 강제행위의 조건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불법이기 때문에 제재가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제재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불법이 된다.

「불법과 불법효과의 관계는, 전통법학이 인정하고 있듯이 일정한 작위나 부작위는 그것이 불법이나 범죄이기 때문에 불법효과인 강제행위와 결합되어 있다는 데 그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작위나 부작위는 그것이 그 행위의 효과인 강제행위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불법이나 범죄가 된다는 데 그 본질이 있다. 일정한 인간행위를 불법이나 범죄로서의 특성을 갖도록 만드는 것은 어떤 내재적 특성 및 초법적・자연적・신적 규범, 즉 실정법을 초월하는 세계와의 일정한 관계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 인간행위가 실정법질서에 의해 강제행위(제재)의 조건으로 된다는 점 때문이다.」(193쪽)

가령 일신론적 신학에서 이란 신과 대립하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신의 섭리 안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요소로 재해석되는데, 불법과 법의 관계도 그러한 것이다. 법의 외부에서 법과 대립하는 법파괴적 요소가 아니라 법이 구성한 내부요소(제재를 발생시키는 조건)이며, 법이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다.

「법학이 … 범죄를 법의 조건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제 그것은 신학이 신정론의 문제에 대해 거치는 것과 유사한 과정을 겪는다. … 악은 신의 작품이 아니라 신에 대립되는 것으로 마귀의 작품이라는 전제는 일신론과 조화될 수 없다.」(196쪽)

전통적 법학은 흔히 불법과 형벌을 도덕적 가치와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불법은 반도덕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으며, 형벌은 비난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켈젠은 이러한 관점은 유지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도덕적 가치판단은 사회마다, 시대마다, 계층마다 극도로 상대적이라는 이유에서다. 가령 형사법의 경우, A라는 공동체의 법이 범죄로 규정하는 행위를, B라는 공동체는 이해하거나 심지어 정당화할 수도 있다. 가령 간통한 배우자나 그 정부를 살해한 남편은 대부분의 법질서에서 범죄자로 취급되지만, 일부 문화나 집단에서는 명예를 지키기 위한 행위로 승인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회계층에서는 결투가 형벌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 의무로 여겨지기도 한다. 불법에 도덕을 본질적으로 결부시키는 관점은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전통법학에서 지배적인 입장을 차지하고 있는 견해, 즉 불법과 불법효과의 개념에는 도덕적 가치요소가 내재하며, 불법이란 불가피하게 반도덕적인 어떤 것을, 그리고 형벌은 비난하는 어떤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는―이미 고려대상인 가치판단이 극히 상대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에―지지할 수 없다. 법질서가 강제행위의 조건으로 규정한 작위와 부작위가 일정한 부류에 속한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반도덕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나 또 다른 부류에 속한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193-194쪽)
「동일한 구성요건이 어떤 법질서에 따르면 그것이 제재와 결합되어 있어서 불법이나 범죄가 되는 반면, 다른 법질서에 따르면 그러한 효과를 전혀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법이나 범죄가 아닐 수도 있다.」(194쪽)

따라서 자연적으로 악한 범죄가 있으며, 법은 단지 그 악을 인정한다는 자연법적 관념은 유지될 수 없다. 실정법의 입장에서 보면 악은 원래 악이어서 금지된 것이 아니라, ‘금지되었기 때문에 악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불법의 근거는 언제나 법에 있다. 실체형법의 기본원칙인 법률 없으면 범죄 없고 형벌 없다도 자연적 악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법실증주의의 산물이다.

「그 자체 악(자연범, mala in se)은 없고 다만 금지된 악(법정범, mala prohibita)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것은 형법상 일반적으로 승인된 원칙인 법률 없으면 범죄없고 형벌 없다(nullum crimen sine lege, nulla poena sine lege)는 원칙의 결과일 뿐이다.」(194쪽)

민사법에서도 마찬가지다. 민사상의 불법행위와 그로 인한 강제집행 역시 도덕적 가치와 무관하며, 단지 법질서가 어떤 효과를 결부시키느냐에 따라 불법성이 결정될 뿐이다. 다시 말해, 법이 제재를 연결해 놓았다는 사실 외에 그 자체로 불법인 행위라는 것은 없다.

「불법이 본질상 도덕적 특성을 지닌다는 원칙은 민사상의 불법행위 및 그와 결부된 불법효과인 민사상의 강제집행에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 실정적 법이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법질서에 의해 확정된 효과를 고려하지 않고서 그 자체로 불법이나 범죄가 되는 구성요건은 없다.」(194쪽)

결국 법률이 없다면 불법도 형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법질서가 어떤 행위를 강제행위의 조건으로 삼는 이유가 사회적 유해성 때문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적 평가가 불법 개념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행위가 도덕적으로 유해한지 유익한지는 불법 개념과 무관하며, 오직 법이 그 행위에 제재를 결합했는지 여부가 불법성을 결정한다.

「법질서에 의해 규정된 작위나 부작위가 강제행위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면, 그러한 작위나 부작위를 전혀 해롭지 않은 것으로 보거나 심지어 유익한 것으로 보는 법률가에 의해서도 그것은 불법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리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 자연법적 관념은 불법의 특성인 소극적 가치가 일정한 구성요건들에 내재해 있으며, 실정법의 측면에서 처벌을 요청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자연법론의 기초가 되는 전제, 즉 가치와 반가치는 현실에 내재한다는 전제가 거부되면, 그와 동시에 그러한 차이도 사라지고 만다.」(194-195쪽)

 

28. 법의무와 책임

독일어 전통, 특히 칸트 윤리학 이후 의무라는 말에는 절대적 도덕가치의 뉘앙스가 붙어 있다. 그러나 법의무는 오직 실정법질서에만 관련된 개념이며, 어떠한 도덕적 함의도 본질적으로 포함하지 않는다. 즉 법의무는 심리적 압박감이나 양심의 느낌, 혹은 어떤 자연법·신적 규범에의 구속이 아니라, 실정법이 특정한 행위와 제재를 결합시키는 구조 그 자체일 뿐이다.

「법의무의 개념은 오로지 실정법질서에만 관련되며, 어떤 종류의 도덕적 함의도 갖고 있지 않다. 법의무는 어떠한 도덕체계가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행위를 그 내용으로 가질 수 있지만(그러나 이것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 반대행위도 내용으로 삼을 수 있다.」(201쪽)
「법의무란 인간에 내재된 충동, 인간이 명령된 것으로 느끼는 행위에로의 압박, 인간에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자연적 또는 신적 규범에 의한 구속이라고 보는 전제는 잘못된 것이다. 법의무란 일정한 행위와 반대되는 행위에 대해 제재를 연계시킴으로써 그 일정한 개인의 행위를 명령하는 실정적 법규범에 다름 아니다.」(199쪽)

켈젠은, 법의무와 법규범은 각기 다른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대상에 대해 단지 방점을 달리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어떤 행위가 사회질서에 의해 명령되어 있다는 것과, 그 행위를 해야 할 의무를 개인이 진다는 것은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법규범이 법의무를 확정한다는 말은 아주 엄밀히 이야기하면 동어반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법질서를 강제질서로 이해하면, 법의무는 일정한 행위를 했을 때 제재가 결부되는 구조에서만 성립한다.

「일정한 행위를 해야 할 법의무는 그 행위를 명령하는 법규범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고, 법의무가 법규범 그 자체이다. 개인이 법적으로 일정한 행위를 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언명은 법규범이 개인의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고 있다는 언명 및 법질서가 일정한 행위와 반대되는 행위에 제재로서의 강제행위를 연계시킴으로써 그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고 있다는 언명과 일치한다.」(198쪽)
「사회질서에 의해 명령된 개인의 행위는 그 개인이 의무를 지고 있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개인은 그 행위가 사회질서에 의해 명령되어 있을 경우에는 일정한 방식으로 행위해야 할 의무를 진다. 어떤 행위가 명령되어 있다는 것과 어떤 개인이 일정한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 즉 그와 같이 행위하는 것이 그의 의무라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198쪽)

법의무가 그 자체 법적 당위인 것은 아니다. 법에서 ‘~해야 한다라는 당위표현은 단지 명령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수권적극적 허용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 i) ‘당위는 모든 규범적 의미(명령·허용·수권)를 가리키는 상위범주이고, ii) ‘법의무는 그중 반대행위가 제재조건이 되는 구조로 된 것만을 가리킨다.

「‘~해야 한다’(sollen)라는 말은 강제행위의 설정이 법의무의 내용인지, 적극적 허용의 내용인지 또는 수권의 내용인지 여부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이 말에는 이 세 가지 경우가 모두 담겨 있다는 점이다. ‘~해야 한다’는 말이 일정한 행위를 명령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행위를 적극적으로 허용하고 또 일정한 행위를 수권하는 모든 규범의 의미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라면, 다시 말해 일정한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표현으로써 다만 그 행위가 규범에 확정되어 있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라면, 법의무란 요구되거나(다시 말해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것 자체가 다시 강제행위의 조건이 되거나) 수권된 또는 적극적으로 허용된 강제행위의 조건이 되는 행위와 반대되는 행위를 말한다.」(203쪽)

전통적 법학에서는 법의무와 (법적) 책임(Haftung, Verantwortung)을 혼용하는 일이 많았지만, 켈젠은 이 둘을 개념적으로 분리한다. 양자는 본질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동일한 것이 아니다.

i) 법의무는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또는 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적 요구를 의미한다. 이는 그와 반대되는 행위가 강제행위(제재)의 조건으로 규정되어 있을 때 성립한다. 한편, ii) 책임은 그러한 제재의 대상이 되는 지위를 의미한다. 전통적 도덕관념에서는 책임은 행위자 자신에게만 귀속된다고 전제하지만, 법질서에서는 의무를 지는 자(위반행위를 통해 제재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와 책임을 지는 자(그 제재가 실제로 향하는 대상)가 같지 않을 수 있다. , 법질서는 책임주체를 임의적으로 구성하여, 자기책임뿐 아니라 타인책임도 인정할 수 있다.

「법의무의 개념과 본질상 결합되어 있지만 그것과 구분해야 할 개념이 책임(Haftung) 또는 법적 책임(rechtliche Verantwortung)의 개념이다. 개인이 법적으로 일정한 행위를 할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은 그의 반대행위가 (제재인) 강제행위의 조건으로 되어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 강제행위, 즉 불법효과로서의 제재는 이미 언급했듯이 의무를 부담하는 개인, 즉 그의 행위가 강제행위의 조건이 되는 개인(범죄자)에게로 향해 있을 필요는 없고, 법질서에 의해 그와 일정한 관계에 놓여 있는 다른 개인에게로 향해 있을 수도 있다.」(204쪽)

i) 자기책임이란 자기가 저지른 불법에 대해 자신이 제재를 받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 도덕에서의 책임 개념은 이처럼 행위자와 책임주체가 일치하는 경우를 상정하는바, 이때 그 책임주체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제재를 야기하거나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잠재적 범죄인(der potentielle Täter)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반면, ii) 타인책임이란 타인의 불법에 대해 자신이 제재를 받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하지 않은 행위로 인해 제재가 가해진다는 점에서 전통적 도덕에 따른 책임개념과는 배치되며, 이때 책임을 지는 개인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제재를 야기하거나 피할 수 없다.

「불법효과의 대상이 되는 개인은 불법에 대해 책임을 지며(haftet), 불법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이 있다(verantwortlich). 전자의 경우에 그는 자신의 불법에 대해 책임을 진다. 즉 여기서는 의무를 지는 개인과 책임을 지는 개인이 일치한다. 책임을 부담할 수 있는 자는 잠재적 범죄인이다. 후자의 경우에 개인은 타인이 범한 범죄(또는 불법행위)에 대해 책임을 진다. 즉 여기서는 의무를 지는 개인과 책임을 지는 개인이 일치하지 않는다. … 의무를 지는 개인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제재를 야기할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의 의무불이행에 대해 책임을 지는 개인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제재를 야기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204쪽)

 

29. 주관적 권리: 권한과 수권

 

◎ 의무의 반사로서 권리

켈젠은 먼저 권리와 의무의 전통적 배치 방식에서 나타나는 언어적·개념적 편향을 지적한다. 법학에서는 흔히 권리와 의무라고 표현하며 권리를 중심에 놓는 경향이 강한데, 이런 습관은 권한(Berechtigung)이 법의 본질적 기능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특히 독일어나 프랑스어에서는 ‘Recht’, ‘droit’가 객관적 법질서와 주관적 권리를 동시에 지칭하기에 더더욱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켈젠은 이와 달리 객관적 법과 주관적 권리를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권리, 즉 일정한 주체의 권리로서의 권한과 ‘객관적’ 법으로서의 법질서를 구별하여야 한다.」(212쪽)

켈젠은 주관적 권리는 실제로 타인의 법적 의무의 반사(Reflex)에 불과하다고 한다. 가령 개인이 타인의 행위를 수인해야 할 의무를 지는 경우, 그 상대방에게 수인의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이는 새로운 법적 실체를 창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동일한 사태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서술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특정인이 급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곧 상대방이 그 급부를 제공해야 할 의무를 진다는 것과 동일한 내용이며, 이 둘을 두 개의 상이한 법적 실체처럼 상정하는 것은 개념적 중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개인의 ‘권리’ 또는 ‘청구권’으로 표현되는 사태는 타인의 의무에 다름 아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경우에 개인의 주관적 권리 또는 청구권이라 말함으로써 이러한 권리나 청구권이 마치 타인의 의무와 다른 어떤 것인 것처럼 표현한다면, 이것은 법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 두 개의 사태를 창조하는 셈이 된다. … 개인이 일정한 행위를 해야 할 의무를 진다는 것은 그 반대되는 행위에 대해 제재가 결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의무는 일정한 행위와 반대되는 행위에 대해 제재를 결부시킴으로써 그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는 규범인 것이다. 개인이 타인에 대해 일정한 급부의무를 지는 경우 의무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그 타인에 의해 수령되어야 할 급부이다. 즉 우리는 타인이 수령하는 것만을 타인에게 급부할 수 있다. 또한 개인이 타인에 대해 그의 일정한 행위를 수인해야 할 의무를 지는 경우에는 바로 그러한 행위를 수인하는 것이 의무내용이 된다. 이것은 의무로서 지고 있는 행위에 상응하는 상대방의 행위, 즉 의무에 대립해 있는 상대방의 행위는 의무의 내용을 이루는 행위 가운데 이미 함께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타인이 일정한 행위를 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상대방인 개인과 그 타인과의 관계를 ‘권리’라고 표현한다면, 이 권리는 그러한 의무의 반사(反射)일 뿐이다.

때문에 켈젠은 전통적 법학에서 널리 통용되는, 주관적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된 이익으로 이해하는 태도, 이른바 이익설에 찬성하지 않는다. 이러한 설명은 그 자체로 한편에 규범(객관적 법), 다른 한편에 이익(주관적 권리)을 두어 양자를 구별하는 이원적 사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보호된 이익이라는 표현은 단지 법질서가 어떤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에 제재를 결부시키고, 그 침해를 하지 말아야 할 법적 의무를 정한다는 사실 외에는 가리키는 것이 없다. 가령 채권채무관계에 관해, 이익설은 채권자의 권리는 대부금 상환에 대한 이익으로서 채무자의 상환의무에 의해 보호된다고 보지만, 켈젠의 분석에 따르면 채권자의 권리는 채무자의 법적 의무의 반사일 뿐이다.

「이익설에 따를 경우, 채권자의 권리는 대부금상환에 대한 이익이며, 이것은 채무자의 법적 의무를 통해 보호된다. 그러나 반사적 권리로서 채권자의 권리는 채무자가 부담하는 이러한 법적 의무에 다름 아니다.」(222쪽)

물권관계에서도 그러하다. 가령 로마법은 대인권(jus in personam)’물권(jus in rem)’을 구분하여 전자는 특정 상대방에 대한 급부청구권으로, 후자는 물건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으로 이해하지만, 켈젠은 이 역시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물권이 흔히 물건을 직접 지배할 권리로 표현되기는 하나 그 또한 결국 모든 타인이 그 개인의 지배에 간섭하지 않아야 할 의무’, 즉 대인적 의무구조를 본질로 한다는 이유에서다.

「만약 우리가 물권과 대인권 간의 구별을 유지하기 위해 전자를 일정한 물건을 일정한 방식으로 처분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라고 정의한다면, 이러한 권리는 타인이 법적으로 이러한 처분을 수인해야 할, 다시 말해 그러한 처분을 방해하지 않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침해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부담한다는 데 그 본질이 있음을 간과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건에 대한 권리는 적어도 인격에 대한 권리이기도 하다. 이른바 물권의 경우에도 일정한 타인에 대해 일정한 행위를 해야 할 의무를 그 본질로 하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일차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218쪽)

즉 물권과 대인권의 차이는 사람 vs 사람의 관계사람 vs 물건의 관계의 차이가 아니라, 의무를 부담하는 개인이 단수인지 다수인지, 반사적 권리가 특정 개인을 향하는지 불특정 다수를 향하는지의 차이인 것이다. 켈젠은 이를 각각 상대적 반사적 권리절대적 반사적 권리로 설명한다. 다만, 여기서 절대적이라는 말도 결국 다수의 개인에 대한 상대적 관계일 뿐이라는 점에서 잠정적·기술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른바 ‘절대적’ 권리 역시 단지 한 사람과 다수의 관계를 그 본질로 할 뿐인 까닭에 결국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유권이라는 반사적 권리는 본래부터 절대적인 권리는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타방에 대한 일정한 일방의 한 가지 의무의 반사에 불과한 채권과는 달리, 동일한 물건과 관련하여 동일한 개인에 대해 불특정 다수의 개인들이 부담하는 수많은 의무들의 반사이다.」(221쪽)

결국 켈젠에게 있어 법은, 이익을 대상으로 삼아 이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익의 침해행위를 제재와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의무를 정할 뿐이며, 그 의무에 상응하는 반사적 지위를 굳이 권리라고 부를 수는 있더라도 이는 개념적으로 독립된 법적 실체라기보다는 설명 편의를 위한 부차적 표현에 불과하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권리와 의무는 같은 것이라 하지는 않는데, 범주상 권리보다 의무가 더 넓은 외연을 지니기 때문이다. 가령 의무의 대상이 특정 개인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면예컨대 일정한 동물이나 건조물의 파괴 금지 규범그에 상응하는 권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권리는 본질상 의무에 종속되는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권리 개념은 법적 설명의 보조장치로는 활용될 수 있지만, 법의 본질적 구조에 관한 이론으로 승인할 수는 없다. 켈젠은 전통법학처럼 권리를 독자적인 법적 실체로 취급하는 방식, 특히 자연법론이 강조해온 선험적·생래적 권리개념은 실정법의 관점에서 폐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권리는 실정법이 구성한 의무구조를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 표현에 불과할 뿐 독립적 법인식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 법적 권능으로서 주관적 권리

켈젠은 이익설과 대비되는 전통적 견해인 의사설(Willenstheorie)을 다룬다. 의사설은 주관적 권리를 법질서에 의해 부여된 의사의 힘으로 보는 견해로 알려져 있는데, 켈젠은 이 의사의 힘을 바로 법적 권능, 즉 소송법적 권한(Ermächtigung)으로 이해한다.

「일반적으로 의무의 상대방인 개인이 제재의 집행을 목적으로 하여 법적용기관에 대해 소송이라는 형식으로 제기한 행위가 법의무를 구성하는 제재의 조건이 되는 경우에 의사의 힘이 존재한다. 이런 경우 법적용기관은, 권한 있는 개인(즉 원고)이 불법효과를 목적으로 하여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에만―그리고 이런 경우에만 비로소 법적용기관에 의한 절차, 특히 재판절차가 진행될 수 있다―, 일반적 법규범을 적용할 수 있다. 즉 당해 기관에 의해 확정된 구체적인 불법구성요건에 구체적인 불법효과를 연계시키는 개별적법규범을 정립할 수 있다. 이 경우에 법, 즉 법기관에 의해 적용되어야 할 일반적 법규범은 일정한 개인, 즉 일정한 행위를 해야 할 의무부담자의 상대방인 개인의 처분에 맡겨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객관적―법은 사실상 그 개인의 권리가 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반사적 권리라는 보조 개념을 사용한다면, 단지 법적 의무의 반사에 불과한 권한에는 이러한 권한을 가지는 자가 반사적 권리를, 즉 의무―이것의 반사가 곧 권리이다―의 불이행을, 소송을 통해 주장할 수 있는 법적 권능이 부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223-224쪽)

권한 있는 개인(원고)이 소송을 제기할 때만 법원이 구체적 사건에 대해 재판을 하고, 일반규범을 개별규범으로 적용할 수 있게 되는데, 이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법적 권능, 그 자체 타인의 의무가 만들어낸 반사가 아니라 독립된 법적 사태다. 오로지 이 법적 권능이 있을 때에만, 그 개인은 기술적 의미에서 권리의 주체가 된다고 한다.

「법질서가 그러한 법적 권능을 부여하는 경우에만, 법적 의무와는 구별되는 주관적 의미에서의 권리, 즉 법적 의무의 불이행을 주장할 수 있도록 부여된 법적 권능을 의미하는 기술적 의미에서의 주관적 권리가 존재하게 된다.」(224쪽)

권리란 쟁송절차를 시작할 수 있는 능력, 즉 당사자가 법원이나 행정기관을 움직여 개별 법규범(판결·행정행위)의 창조를 유도할 수 있는 법적 권능인 것이다. 전통적 언어에서는 여전히 급부를 받거나 물건을 사용하는 행위를 권리행사라고 부르지만, 켈젠에 따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무의 반사일 뿐이고, 소송을 통해 의무불이행에 따른 제재를 주장하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주관적 권리의 행사다. 이런 법적 권능은 피고에게도 상소권의 형태로 주어진다. 그리고 공법영역에서 각종 불복신청이나 행정심판, 행정소송 등은 시작할 수 있는 권능 역시 주관적 권리에 해당한다. 통상적 언어에서는 이들을 주관적 권리라고 부르지 않지만 말이다.

켈젠은 이러한 의미의 주관적 권리를 확정하는 것이 법의 본질적 기능은 아니라고 한다. 법의 본질적 기능은 어디까지나 의무를 정하는 데 있으며, 주관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하나의 기술적 선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술적 의미에서의 주관적 권리를 확정하는 것은 법적 의무를 확정하는 것과는 달리 객관적 법의 본질적인 기능은 아니다. 이를 확정하는 것은 객관적 법이 가질 수 있는 가능한 내용일 수는 있지만 필연적인 것은 아니며, 법이 활용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일 수는 있지만 반드시 활용해야 하는 기술은 아니다.」(226쪽)

가령 형사법을 예로 들면, 범죄혐의 있는 자를 소추하여 형사절차를 개시하는 것은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기관이다. 즉 형사법은 피해자에게 기술적 의미의 주관적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 행정청의 적극적 허용으로서 주관적 권리

다음으로 켈젠은 또 다른 유형의 권한, 즉 행정법에서 중요한 허가’, ‘인가’, ‘면허형태의 권리를 검토한다. 어떤 개인이 일정한 활동을 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단지 그 활동이 금지되어 있지 않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 활동을 방해하지 않을 의무를 진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가령 법질서가 어떤 활동을 특정 행정청의 허가에 결부시키는 경우, 그 활동을 할 권리는 그러한 행정청의 적극적 행위를 전제로 한다.

주류판매업·독성이 있는 의약품 판매업 등은 전형적으로 인가·면허에 기속되는 활동이다. 이 경우 판매할 권리란 단순한 반사적 권리가 아니라, 일정한 요건을 충족할 때 행정기관이 적극적 행위(면허 부여)를 해야만 비로소 발생하는 법적 지위다. 러한 권한은 누군가에게 일정한 의무를 부담시키는 것의 반사로서 성립하는 구조가 아니라, 행정기관의 수권(면허를 가진 사람만이 유효하게 판매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한)에 따라 비로소 개인에게 행위의 자유 + 그 행위에 관한 법적 유효성이 함께 부여되는 구조를 띤다. 켈젠은 이 경우에도 넓은 의미에서 주관적 권리라고 부를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법규범이 어떤 개인에게 일정한 법적 권능을 수여하는 데 있다고 본다.

「권한이나 주관적 권리라고 지칭되는 사태는 법질서가 일정한 활동, 예컨대 일정한 영업행위와 같은 활동을 ‘인가’나 ‘면허’라고 불리는 허가의 조건에 결부시키는 경우에도 존재할 수 있다. 이 경우 허가는 일정한 공동체기관인 관계당국에 의해 법질서가 규정하고 있는 조건 아래에서 또는 당해 기관의 자유재량에 따라 행해질 수 있다. 관계당국의 이러한 허가 없이 문제가 되는 활동을 영위하는 것은 금지되며, 따라서 그 경우 일정한 제재를 받게 된다. 이러한 허가는 금지되어 있지 않다는 단순한 소극적 사실을 그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기관의 적극적인 행위를 그 본질로 한다. … 그와 같은 적극적인 허가에 기초하고 있는 권한은 결코 반사적 권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권한은 그에 상응하는 의무의 기능이 아니기 때문이다.」(228-229쪽)

◎ 정치적 권리

마지막으로 켈젠은 주관적 권리의 세 번째 범주로서 정치적 권리를 다룬다. 통상 정치적 권리는 국민이 국가의사 형성, 즉 법질서(법규범)의 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 권능으로 이해된다. 직접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이 국민투표나 국민의회 참여를 통해 직접 일반 법규범의 제정에 참여하고,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선거를 통해 의회 구성에 참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입법에 참여하는데, 이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전형적인 정치적 권리다.

「이른바 ‘정치적’ 권리는 … 국가의사의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한, 다시 말해 ‘국가의사’의 표현인 법질서의 창조에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한으로 규정한다.」(229쪽)

앞서 언급한, 쟁송을 시작할 권능도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법창조 참여권이다. 채권자가 소를 제기할 때, 법원은 그 사건에 관해 새로운 개별적 법규범(판결)을 창조한다. 선거권자는 입법·행정·사법기관의 구성에 참여함으로써, 이 기관들이 일반·개별 규범을 창조하는 과정에 간접적으로 참여한다. 두 경우 모두 개인의 행위가 규범창조의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둘을 모두 법적 권능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다.

자유권을 비롯한 기본권의 문제도 같은 틀에서 재구성될 수 있다. 근대헌법은 평등권, 재산권, 신체의 자유, 표현·출판의 자유, 종교·양심의 자유, 결사·집회의 자유 등을 보장하지만, 켈젠에 따르면 이 보장은 처음부터 개인에게 권리가 있다는 선언이 아니라 입법·행정·사법작용을 제한하는 헌법규범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내용의 법률은 위헌으로서 폐지될 수 있다는 기준을 제공하는 규범인 것이다. 그래서 켈젠은 이렇게 적는다.

「이른바 기본권과 자유권이 실효성 있게 보장되기 위해서는 이들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이 일반입법의 방식이 아니라 특별한 절차를 통해서만 개정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234쪽)

기본권·자유권이 실제로 개인의 주관적 권리가 되려면, 단지 헌법에 선언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헌법규범을 근거로, 위헌법률이나 위헌적 개별규범을 폐지하는 절차를 개인이 스스로 개시할 수 있는 법적 권능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법률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믿는 개인이 actio popularis 형식의 위헌법률심판을 제기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다면, 그때 비로소 종교의 자유는 주관적 권리로 기능한다. 마찬가지로, 위헌적 법률에 근거한 행정처분이나 재판에 대해 개인이 소원·상소를 제기해 그 처분이나 재판의 폐지를 구할 수 있을 때, 그 기본권은 구체적 사건에서 주관적 권리로 작동한다.

◎ 요  약

결론적으로 주관적 권리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첫째 i) 단지 법적 의무를 뒤집어 표현한 것에 불과한 반사적 권리. 이는 의무와는 별개인 독립된 법적 실체가 아니며, 기술적 의미에서의 법적 권리는 아니다. 둘째 ii) 기술적 의미의 주관적 사권이다. 이는 어떤 개인이 자신에 대한 법적 의무의 불이행을 사법소송을 통해 주장할 수 있는 법적 권능, 다시 말해 의무불이행과 연계된 제재를 명령하는 개별적 법규범의 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 권능을 뜻한다. 셋째는 iii) 관계당국에 의한 적극적 허용이다. 넷째는 iv) 정치적 권리, 즉 개인이 입법·행정·사법기관의 구성 및 헌법적 통제를 통해 일반적·개별적 규범의 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 법적 권능이다. 여기에는 위헌법률이나 위헌적 규범을 폐지하는 절차를 개시할 수 있는 권능이 포함된다.

「개인의 주관적 권리는 단순한 반사적 권리, 즉 그에 대해 존재하는 법적 의무의 반사이거나 혹은 기술적 의미에서의 주관적 사권이다. 그리고 이 후자는 그에 대해 존재하고 있는 법적 의무의 불이행을 사법적 소송을 통해 주장할 수 있는 법적 권능, 다시 말해 의무불이행과 결부된 제재를 명령하는 개별적 법규범의 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 법적 권능을 의미한다. 나아가 개인의 주관적 권리는 정치적 권리이다. 이 경우 정치적 권리란 개인이 입법을 행사하는 국민의회의 구성원으로서 법률이라 불리는 일반적 법규범의 창조에 직접 참여하거나 아니면 의회나 행정부를 선출하는 선거권의 주체로서 법규범의 창조―선출된 기관이 이러한 창조의 권한을 부여받고 있다―에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법적 권능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헌법에 의해 보장된 기본권과 자유권으로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평등과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법률의 효력을 일반적으로(모든 사안에 대해서) 폐지하거나 단지 개별적으로(구체적 사안에 대해서)만 폐지하는 규범의 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끝으로 관계당국의 적극적인 허용도 주관적 권리라 부를 수 있다.」(237-238쪽)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