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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톤 격언과 배심원후보자 기피

배심재판(국민참여재판)에서 변호인이 배심원후보자들에게 물어보는 단골 질문 중 하나로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더라도 열 명의 범죄자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열 명의 범죄자를 풀어주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한가'가 있다.  전자는 '하늘이 무너져도 범인을 밝혀내 처벌해야 한다'는 범인필벌주의로, 후자는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Better ten guilty go free than one innocent suffer)'는 격언으로 알려져 있다. 후자의 격언은 1769년 윌리엄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이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이런 사고 자체는 로마법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

법/형사 2024.10.25

수능 정치와법 띄어쓰기

요즘 수능 법률과목에선 어떤 게 나오는지 궁금해서 정치와법 기출문제를 찾아봤는데, 내용은 차치하고 띄어쓰기가 정말 가관이다.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이 붙여쓰는 용어('자유민주적 기본질서', '근로기준법', '소정근로시간', '지방노동위원회', '부당해고', '배상명령', '공판절차', '구속적부심사', '행정소송', '국선변호인' 등)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대체 무슨 권위와 자격으로 저렇게 악착같이 띄어쓰는지 모를 일이다. 저런 용어들은 그 자체 독립된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붙여써야 한다. 붙여쓰는 게 더 좋다는 것이 아니라 띄어쓰는 게 틀렸다. 그렇다고 일관성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 '노동조합'은 또 붙여쓰고 있다. 외국에도 우리나라 국립국어원이나 교육과정평가원처럼 자신들이 제멋대로 정해놓은 한심한 기준..

법/일반 2024.10.04

판사의 재량

어떤 명제의 진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특별한 의의를 지니는 경우가 있는데, 그 대표적 예가 '모든 사건에는 단 하나의 정답(one-right-answer)만 존재한다'이다. 드워킨이 한 말인데 우리나라 법률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말을 아는 법조인보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법조인이 훨씬 많을 것이다.객관적/실체적 차원에서 정말로 모든 사건에 단 하나의 정답만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사건들도 많다. 그러나 판사는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 사건을 대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내린 결론이 정답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논증하고 근거를 제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결론이 '가능한 여러 선..

법/일반 2024.10.04

베토벤: 교향곡 9번 - 벤자민 잰더, 필하모니아

벤자민 잰더(Benjamin Zander)가 지휘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Philharmonia Orchestra) 및 동 합창단(Philharmonia Chorus)의 2018년 연주다. 해석, 특히 템포설정과 다이나믹 면에서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녹음이라고 하겠다.2악장[링크 참조] 404마디의 급가속(stringendo il tempo)과 Presto 부분의 템포(온음표=116)를 준수하는 몇 안 되는 연주 중 하나다. 첼리비다케(EMI 1989)가 Presto 부분을 빠르게 진행하기는 하지만 전반적 템포 자체가 느려터져서 의미가 없고, 그나마 현대적 경향의 모범적 연주인 진만(ARTE NOVA 1998)도 급가속을 구현하고 템포를 잘 지키는 편이나 메트로놈 표기에 비해서는 살짝 느린 편이다..

음악/베토벤 2024.10.03

[서평]법 쫌 아는 10대(김나영, 풀빛)

법 쫌 아는 10대 | 김나영 - 교보문고법 쫌 아는 10대 | 법은 왜 생겨났고, 왜 필요하고, 왜 지켜야 할까? 교과 이해, 논술, 세특을 한 번에 완성하는 맞춤 독서모든 사건을 법의 시각으로, 법관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사회 규product.kyobobook.co.kr1.사실 이런 종류의 책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만약 도움이 된다면 그 수혜자는 과연 누구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나는 이런 책들을 아주 많이 접했는데, 대개 어린 학생들에게는 너무 어렵고 법률전문가들에게는 너무 쉽다. 이 책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제목에서는 10대를 타겟팅한 것처럼 표방하지만 사실 10대가 편하게 읽고 이해할 만한 책은 아니다. 물론 내가 요즘 10대들의 문해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Wh..

잡담 2024.10.02

스드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문 신부가 드레스 뭐 입었는지, 메이크업이 어떤지 아무 관심 없다. 신부랑 같이 사진 찍는 친구들도 그 신부 드레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눈여겨보지 않으며, 눈여겨봤더라도 돌아서자마자 까먹는다.사실 대다수 하객들은 신부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고 싶어하지 않고, 식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행위와 현상에 관심이 없다. 식장에서 관심있는 척들은 열심히 하지만 말 그대로 척일 뿐이다. 다만 같은 테이블에 존예녀나 존잘남이 앉으면 그 존예녀 존잘남의 얼굴은 아주 오래 기억에 남는다.물론 당신은 아닐 수도 있다. 그거 당신만 그렇다. 당신 친구들도 그렇다고? 그럼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만 그렇다. 결혼식은 그저 당사자 본인들에게만 잊지 못할 추억일 뿐이다(물론 그조차 못 될 수도 있다...

잡담 2024.06.24

대학교 조기입학

[중고] (중고) 산골 소년 영화만 보고 영어 박사 되다 [jvl] : 알라딘[알라딘] 알라딘 인터넷서점smartstore.naver.com이 책을 낼 당시 영재교육, 홈스쿨링, 조기입학 등을 향한 대중의 관심이 상당했다. 하지만 그때 이른바 '영재'로 불리며 주목을 받았던 이들 중 지금까지도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두각은 고사하고 논문표절 등 이슈로 나락간 사람도 있다.영재라는 단어를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내 관점은 이렇다.① 고점이 남들보다 높은 사람을 영재라 한다.② 고점이 높지 않고 성장속도만 빠른 것은 영재가 아니라 단순 조숙(早熟)이다.③ 고점이 높으면서 성장속도도 빠르면 조숙한 영재다.소위 영재라고 불리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 중 대다수가 하는 착각은 내 아이가 ②일..

2024.06.16

[서평]산골 소년 영화만 보고 영어 박사 되다

[중고] (중고) 산골 소년 영화만 보고 영어 박사 되다 [jvl] : 알라딘[알라딘] 알라딘 인터넷서점smartstore.naver.com나는 이 책의 저자다.글쓴이 소개에 "2005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입시 위주의 공교육에 회의를 느껴 1학년 1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사실 나는 '입시 위주의 공교육'에 회의를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 애초에 중학교 1학년 때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는 아이는 없으며, 만약 느꼈다면 그것은 철없는 잼민이의 반항기질일 뿐 진지한 교육관이나 인생관에서 나오는 통찰은 아닐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공교육이ㅡ비록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 있고 갈수록 형해화되어가고 있지만ㅡ개인의 삶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

잡담 2024.06.16

혓바닥이 긴 판결

판결문이 반드시 길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충실한 논증을 위해 긴 판결문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혓바닥이 길어서’ 판결문을 길게 쓰는 경우도 많다. 사실심인 하급심의 판결이 분량이 많은 것은 대체로 적확한 사안확정을 위한 논증 때문인 수가 많지만 대법원판결이 분량이 많은 것은 십중팔구는 긴 혓바닥 때문이다.70~90년대 대법원판결들은 대체로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다. 결론의 타당성 여하를 떠나 기준이 명확하기만 해도 중간은 가는 판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소한 예측가능성은 확보되기 때문이다. 당시 판결들에서는 뭘 해야 하고 뭘 해서는 안 되는지를 비교적 확실하게 말해주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대법원판결들을 보면 길이만 길 뿐 논증은 수십 년 전 판결들보다도 현저히 불성실하고 허점이..

법/일반 2024.06.11

유죄추정의 심증과 피해자의 이익

어떤 변호사 단톡방에서, 성범죄 사건 판사가 변론종결 후 피고인에게 '오랜 시간 재판 받느라 고생했다'고 말한 것을 두고 부적절하다며 문제를 삼는 사람을 봤다. 그는 피해자 변호사 입장이었는데, 물론 그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나는 그런 시각과 마음가짐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피고인의 비난가능성이 높을수록 오히려 온화하게 대해주어야 한다.피해자 대리를 많이 하는 입장으로서 개인적으로 가장 극혐하는 류의 재판부는 바로 공판정에서 피고인에게 적대적 유죄추정의 심증을 보이며 함부로 대하는 재판부다. 단언컨대 그런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한다.공판에서 피해자에게 가장 이익되는 것은ㅡ유죄인정을 전제로ㅡ종국판결이 신속히 확정되는 것이다. 합의를 했든 안했든 피해자로서는 재판이 빨리 끝나기..

법/형사 2024.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