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쫌 아는 10대 | 김나영 - 교보문고
법 쫌 아는 10대 | 법은 왜 생겨났고, 왜 필요하고, 왜 지켜야 할까? 교과 이해, 논술, 세특을 한 번에 완성하는 맞춤 독서모든 사건을 법의 시각으로, 법관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사회 규
product.kyobobook.co.kr
1.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만약 도움이 된다면 그 수혜자는 과연 누구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나는 이런 책들을 아주 많이 접했는데, 대개 어린 학생들에게는 너무 어렵고 법률전문가들에게는 너무 쉽다. 이 책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제목에서는 10대를 타겟팅한 것처럼 표방하지만 사실 10대가 편하게 읽고 이해할 만한 책은 아니다. 물론 내가 요즘 10대들의 문해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
Why?나 살아남기 시리즈 등의 학습만화들이 히트를 치고 잘 팔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그림과 스토리텔링의 퀄리티가 높아서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주인공 학생과 실제 독자인 어린이들의 수준차가 크지 않다는 데 핵심이 있다. 대개 주인공인 어린이는 독자로 타겟팅된 어린이들과 수준이 비슷하거나 그보다 좀 더 멍청하게 묘사된다. 작중 등장하는 어린이 캐릭터가 지적 능력에서 나와 큰 차이가 없다고 느낄 때, 아이들은 비로소 몰입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틀리는 문제를 얘도 틀리고, 또 간혹 내가 맞히는 문제를 얘가 틀릴 때 무의식에서 작동하는 몰입감과 재미가 있다.
롱런하지 못하거나 고전하는 학습만화 또는 어린이 교양서적들을 보면 주인공인 어린이의 수준이 너무 높은 경우가 상당히 많다. 작중 화자인 나영이도 다소 그런 면이 있다. 나영이와 아빠가 나누는 대화의 수준은 냉정하게 말해 부녀간 대화보다는 법학개론 수업을 듣는 20대 학생과 교수의 대화에 더 가깝다. 이 책이 정말 10대를 위한 책이 되려면 나영이와 아빠의 대화가 '나와 비슷한 청소년'과 '나이 많은 어른' 간의 대화여야 한다. 그래야 10대들이 몰입한다. 그런데 작중의 나영이는 말투만 청소년일 뿐, 하는 말의 내용을 곱씹어보면 그냥 어른 그 자체다. 어른과 어른 간 대화가 되는 것이다.
짧게 툭툭 제기하는 의문과 몇 마디 리액션에서 나영이의 천부적인 이해력, 지식수준, 공감능력 그리고 인사이트를 엿볼 수 있다(특히 레이거노믹스 이야기가 나왔을 때 "세금을 걷어서 도로도 만들고, 학교 급식도 무료로 주고, 아플 때 내는 진료비도 저렴하게 깎아주고... 좋은 게 정말 많은데 너무 많이 걷으면 그것도 문제일 것 같아. 일해서 돈을 벌 의욕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세금 내는 게 싫어서 국적을 옮기는 사람이 많아질 수도 있고."라고 하는 부분이 하이라이트). 나영이 같은 캐릭터는 이런 류의 책에서 멍청한 주인공의 이해를 돕는 서브 캐릭터로서는 적합하지만 메인 캐릭터로는 적합하지 않다. 나영이의 지적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독자층으로 타겟팅된 청소년들 입장에서 몰입을 해치는 요소다.
아빠의 설명도 물론 친절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똑똑하고 재주많은 나영이에게 친절한 것이지, 평범한 문해력과 지식을 가진 청소년에게 친절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 결과 책의 전반적 내용도 10대에게는 다소 어려운 이야기들로 되어 있다.
2.
그러나 그럼에도 이 책은 상당히 좋은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면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는 20대 학생들, 그중에서도 고등학생 시절 수능에서 정치와법을 선택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상당히 괜찮은 선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은 실정법과 법철학에서 중요한 큰 줄기의 주제들을 쉽고 짧은 언어로 풀이해 대학생 수준에서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대학생에서는 너무 쉬운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저자 본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짜깁기식으로 쓴 법학입문 교재나 로스쿨 입시용 배경지식 책들보다 이 책이 훨씬 나은 선택이다. 이 책의 또다른 화자인 '아빠'의 대사는 웬만한 법학개론 수업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명강의이다. 이만큼 쉽고 직관적인 언어로 이 정도 퀄리티의 법학수업을 할 수 있는 교수가 얼마나 될까?
법학 배경지식 쌓기는 우선 이 책으로 밑그림을 그린 후 추가적으로 기본삼법 입문서나 법철학 교과서, 각종 고전들로 확장해 나가도 무방할 것으로 본다.
물론, 부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서술도 몇몇 있다. 가령 '아빠'는 대처의 경제정책에 대해 "당시 영국의 경제 성장률이 높아지긴 했지. 하지만 희생된 사람들도 있었어."라고 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이야기에 반 페이지를 할애하고(68-69쪽), "대처가 집권하면서 영국이 성장했다고 말했잖아? 그럼 일자리도 많아지지 않았어?"라는 '나영'의 질문에 "응,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성장으로 인해 일자리가 많아지고, 여러 사람이 잘 살게 된다고. 이러한 생각을 '낙수 효과'라고 부르는데, 정말 그런 효과가 있었는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해."라고 대답하는데(70쪽), 아무래도 대처리즘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내가 알기로 대처의 임기 동안 고용률은 계속 중가했고, 오히려 대처 집권 직전 노동당 정권 때에는 고용률이 감소했다. 일자리 창출 면에서도 보수당 정권이 노동당 정권의 그것을 현저히 상회했다.). 또 대공황이 생겼어도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케인즈가 제시했던 것처럼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개입했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56쪽), 개인적으로 대공황은 케인즈식 정책을 쓰지 않았으면 더 빨리 극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중요한 건 고문 금지! 아무리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받는 상황이어도 형을 확정받기 전까지는 무죄인 것처럼 대해야 하고, 그러니 조사 과정 중 고문이 있으면 절대 안돼."라고 하여(64쪽) 고문금지와 무죄추정원칙을 결부시키고 있는데, 이런 방향의 서술은 바람직하지 않은 면이 있다. '그럼 형을 확정받았으면 고문을 당해도 되나?'라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고문금지와 무죄추정원칙은 이론적으로 보나 발전사적으로 보나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설령 사형수라 해도 고문을 당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다만 이 책만의 잘못은 아닌 것이, 대부분의 형사소송법 교과서들이 고문금지가 무죄추정원칙에서 도출되는 내용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서술은 최초에 어떤 한 명이 잘못 주장한 것을 다른 사람이 베끼고, 또 베끼고 하는 패턴이 수십년 반복되면서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의문들은 말단지엽적인 것에 불과하고, 전체적으로 이 책의 내용적 충실도와 서술, 그리고 주제선정에 대해서는 매우 높이 평가한다. 앞에서 로스쿨준비생들에게 좋다고 썼지만, 직업적 법률가들이 머리를 식히는 용도로 또는 강의준비 용도로 활용하기에도 괜찮다. 특히 장기간 법률실무에 찌들어 지낸 탓에 법학의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들에 대한 기억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이들이 화장실이나 지하철에서 시간 때우는 용도로 훅훅 보기에도 나쁘지 않겠다.
내가 과연 20년차, 30년차 법조인이 되었을 때 이런 책을 쓸 역량을 갖출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대부분의 법률가들이 그럴 것이다. 책을 다 읽고 저자약력을 보니 제1저자가 '최강의 실험경제반 아이들'을 쓰신 분이라는 걸 알았다. 두 책의 저자가 같은 사람이라니 역시 세상은 넓고 능력자들은 많다는 걸 새삼 느낀다. 겸손해지게 된다.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드메 (0) | 2024.06.24 |
---|---|
[서평]산골 소년 영화만 보고 영어 박사 되다 (1) | 2024.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