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서평]산골 소년 영화만 보고 영어 박사 되다

GE NA 2024. 6. 16.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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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의 저자다.

글쓴이 소개에 "2005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입시 위주의 공교육에 회의를 느껴 1학년 1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사실 나는 '입시 위주의 공교육'에 회의를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 애초에 중학교 1학년 때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는 아이는 없으며, 만약 느꼈다면 그것은 철없는 잼민이의 반항기질일 뿐 진지한 교육관이나 인생관에서 나오는 통찰은 아닐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공교육이ㅡ비록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 있고 갈수록 형해화되어가고 있지만ㅡ개인의 삶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입시 위주의 커리큘럼도 쓸모가 없지 않다고 본다.

내가 회의를 느낀 대상은 '입시 위주의 공교육'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공부에 좀처럼 정을 붙이지 못했다. 수업 듣기가 싫었고 시험 보기가 싫었다. 친구들이 공부하거나 노는 시간에 영화와 미드만 주구장창 봤으니 영어는 당연히 또래들보다 훨씬 잘 했지만 그렇다고 공부로서의 영어, 교과과목으로서의 영어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공교육 시스템 안에서 좋은 성과를 낼 능력과 자신이 없었기에 차라리 일찌감치 공교육에서 벗어나 독자노선을 타서 내가 좋아하는 분야만 깊게 파는 컨셉을 잡아 추후 자소서에 쓸 유니크한 인생스토리를 만들어 보는 것이 오히려 좋겠다 싶어 홈스쿨링을 시작했다. 냉정하게 말해 그것은 도전이라기보다는 회피에 가까운 것이었다.

자퇴서를 내러 갔을 때 담임선생님은 격려와 덕담을 건네면서도 홈스쿨링은 가시밭길일 거라고 걱정해주셨는데, 막상 겪어본 바로는 사실 길 자체는 쾌적한 포장도로이고 다만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안개가 끼어 있는 편에 가깝다. 홈스쿨러에게는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불확정적이며 불안하다. 공교육의 가장 큰 장점인,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이 주는 자극과,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주는 익숙함과,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이 주는 안도감을 포기해야 한다. 정확한 내 위치를 알 수가 없고 내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도 가늠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홈스쿨링은 남들보다 강한 자제력과, 탁월한 자기객관화능력과, 자신에 대한 강한 확신을 지닌 사람들만이 선택해야 한다. 아무런 레퍼런스 없이도 적절한 방향을 정할 수 있어야 하고, 일단 한번 정해진 방향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덕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홈스쿨링을 시작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체감했다. 누가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자퇴 결정을 재고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나에게는 자기객관화능력은 있었지만(지금도 나는 주제파악이란 것을 매우 잘 한다) 자제력과 확신은 부족했다. 하루하루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집중을 더 잘 하거나 이전에 비해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미래에 반드시 무엇이 되겠다는 의지나, 틀림없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믿음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딴짓을 하는 시간이 많았고 아무런 생산적인 활동을 안 하는 날도 많았다. 부모님은 막연히 내가 잘해낼 거라고 믿고 나의 일상에 거의 관여를 안 하셨는데, 아마 심신이 고단하고 신경쓸 곳이 많아 내게 정신을 쏟을 여유가 없으셨기에 그냥 그렇게 믿고 싶으셨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비록 학교와 학원을 다니지 않아 몸 자체는 편했지만 정서적으로는 첩첩산중을 헤매는 것 같은 시기였다.

그렇게 독학으로 중졸검정고시, 고졸검정고시를 통과한 후 영어능력 하나만 평가하는 전형이 있는 대학교를 찾아 입시를 치러 운 좋게 합격해 14살에 대학생활을 시작했으나 학업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1년만에 자퇴한 후 다시 집에서 입시를 준비했다. 이 책은 그 시점에 쓰여진 것이다(출간 이듬해인 2009년에 동기들과 별로 차이나지 않는 나이로 다른 대학에 입학했고, 운 좋게도 그곳에서 적성과 흥미를 찾아 마음을 다잡고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함에 따라 비로소 홈스쿨링 생활을 청산하게 됐다). 비록 서술 자체는 밝고 명랑하지만 사실 내 인생에서 가장 리스크가 많고 불안했던 시기였다. 어투와 문장에 확신을 담기는 했으나 실제로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기간 동안 내가 선택한 노선이 최적의 길까지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괜찮은 길이었다고 느낀 시점은 지금 기준으로도 비교적 최근이다.

좌우간 홈스쿨링은 섣불리 추천하지 않는다. 독학을 하려면 자기 자신과 가족, 주위환경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평균 이상의 인내심과 자제력, 주변에 잘 영향받지 않는 강한 멘탈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자녀가 그렇지 않다면 부모라도 그래야 한다. 자녀와 부모 중 어느 한 쪽만이라도 그런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 되는데 말이 쉽다. 부모의 교습능력이나 학업능력 등도 물론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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