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재판(국민참여재판)에서 변호인이 배심원후보자들에게 물어보는 단골 질문 중 하나로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더라도 열 명의 범죄자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열 명의 범죄자를 풀어주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한가'가 있다.
전자는 '하늘이 무너져도 범인을 밝혀내 처벌해야 한다'는 범인필벌주의로, 후자는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Better ten guilty go free than one innocent suffer)'는 격언으로 알려져 있다. 후자의 격언은 1769년 윌리엄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이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이런 사고 자체는 로마법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우호적 배심원이 될 수 있다. '열 명의 범죄자를 놓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적대적 배심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원론적으로 '열 명의 범죄자를 놓쳐서도 안 되고,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라고 대답하는 후보자에게는, 무조건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고르겠느냐고 다시 물어본다. 만약 끝까지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기피 처리하는 것이 좋다. 자기 고집이나 예단에 함몰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무고한 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처럼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로 표현하지 않고, "열 사람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걸까? 무고한 사람을 잡지 않으면서 열 명의 범죄자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유는 간단하다. '무고한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들지 않으면서 모든 범인을 남김없이 처벌하는 재판제도 같은 건 세계 그 어느 나라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법시스템은 과거 존재한 적 없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불가능하다.
무고한 사람을 위해 열어둔 탈출구로는 언제나 죄 있는 자들이 조금씩 섞여서 빠져나갈 수밖에 없고, 모든 죄인을 다 잡아들이는 그물에는 무고한 자들이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다.
물론 무고한 사람 한 명 풀어주는 대가로 죄 있는 사람 열 명 풀어주는 건 말도 안 되는 교환비겠지만, 핵심은 그런 교환비가 실제로 옳으냐 아니냐가 아니라 법관이나 배심원이 그런 교환비를 감수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데 있다. 블랙스톤 격언의 진정한 의미는 죄인 열 명을 놓아주는 한이 있더라도 무고한 한 명을 구하는 게 먼저라는 마인드셋을 입법자와 법원 그리고 배심원 모두가 장착하라는 것이다.
열 사람의 범인이 빠져나가는 것을 감수하겠다는 자세 없이 한 사람의 무고한 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은 '나는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나는 앞으로 실수로라도 곤충 한 마리도 죽이지 않겠다', '나는 살면서 절대 분노하거나 화를 내지 않겠다' 와 비슷한 수준의 허언(虛言)이다.
한 나라의 형사사법제도는 흉악한 범죄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는 열 명의 범인도 처벌하고 무고한 자도 만들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무장한 선량한 법조인들에 의해 망가진다. 본인은 그게 정의이고 선의라고 생각하겠으나 그런 정의관념과 의협심, 선의가 모이고 커질수록 사법시스템은 수렁에 빠진다.
대법원은 근래 들어 죄인도 다 잡고 무고한 사람도 다 풀어주려고 온갖 해괴하고 복잡한 법리를 잔뜩 생산해내고 있지만, 연쇄작용을 생각하지 않고 관념적 이상으로만 만들어낸 아이디어는 현실세계에서 으레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무고한 사람을 남김없이 풀어주고 죄인을 남김없이 잡기 위해 설계된 법리는 역설적으로 죄인도 풀어주고 무고한 사람도 잡게 되어 있음이 사물의 본성이다.
문제는 배심원후보자에게 이런 걸 구구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럴 시간도 없거니와 그렇게 설명한다고 해서 생각을 바꾸지도 않기 때문이다. 양자택일을 강요해도 무조건 둘을 동시에 지향해야 한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문답무용 기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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