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명제의 진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특별한 의의를 지니는 경우가 있는데, 그 대표적 예가 '모든 사건에는 단 하나의 정답(one-right-answer)만 존재한다'이다. 드워킨이 한 말인데 우리나라 법률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말을 아는 법조인보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법조인이 훨씬 많을 것이다.
객관적/실체적 차원에서 정말로 모든 사건에 단 하나의 정답만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사건들도 많다. 그러나 판사는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 사건을 대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내린 결론이 정답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논증하고 근거를 제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결론이 '가능한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라고만 주장하는 자는 굳이 그 선택지를 택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것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선포하는 자는 당사자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자세한 근거를 제시할 수밖에 없다.
'~는 판사의 재량이다'라는 말을 흔히들 하는데, 법률가들이 무심코 흔히 쓰는 말이지만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재량이라는 것은 '사건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라는 관념을 전제한 용어다. 다시 말해 가능한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임의로 취사선택하는 것이 바로 재량(discretion)이다. 법원은 자신이 재량을 행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단 하나의 정답을 찾아야 한다고, 또는 최대한 정답에 근접한 답을 내려야 한다고 전제해야 한다. 실제로 정답이 존재하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판사들은 자신이 재량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행세한다.
말같잖은 판결, 논증이 부실한 판결이 많이 나오는 것은 바로 그러한 태도와 깊이 관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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