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설/法律

혓바닥이 긴 판결

GENA 2024. 6. 11. 09:43

판결문이 반드시 길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충실한 논증을 위해 긴 판결문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혓바닥이 길어서’ 판결문을 길게 쓰는 경우도 많다. 사실심인 하급심의 판결이 분량이 많은 것은 대체로 적확한 사안확정을 위한 논증 때문인 수가 많지만 대법원판결이 분량이 많은 것은 십중팔구는 긴 혓바닥 때문이다.

70~90년대 대법원판결들은 대체로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다. 결론의 타당성 여하를 떠나 기준이 명확하기만 해도 중간은 가는 판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소한 예측가능성은 확보되기 때문이다. 당시 판결들에서는 뭘 해야 하고 뭘 해서는 안 되는지를 비교적 확실하게 말해주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대법원판결들을 보면 길이만 길 뿐 논증은 수십 년 전 판결들보다도 현저히 불성실하고 허점이 많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궤변을 만연체와 미사여구의 향연 속에 교묘하게 숨기는 판결이 넘쳐난다. 온갖 예외인정가능성, 단서, 특별한사정이없는한어쩌고저쩌고 등 악세사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서 아무리 읽어봐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불법이 아니라는 것인지, 무엇이 죄이고 무엇은 죄가 아닌지를 분명히 알 수가 없다.

근래 대법원은 구체적 타당성이라는 미명 하에 일반적이고 통일적인 기준을 제시하기를 애당초 포기한 것 같다. 개별사안에서 타당한 결과를 도모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런 흐리멍텅한 판결을 지지하는 경우들도 많은데 별로 공감가지 않는다. 대법원이 그런 판결들을 내놓는 이유는 '통일적이고 확실한 기준을 제시했을 때의 결과를 감당할 용기가 없어서’인 듯하다. 바꿔 말하면 판결에 자신이 없기에 빠져나갈 구멍을 여기저기 만들어 놓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있으나마나한 지침만을 제공하면 결과적으로 개별사안에서 판사들에게 너무 큰 심적 부담이 지워지는 게 아닐까? 그걸 감수하고라도 전체로서 사법부의 권한만 강화되면 그만이라는 건가? 배움이 짧아서 법원의 의중을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요즘 판례는 전체적으로 거대한 정신착란에 빠져서 오로지 복잡성을 증대시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