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켈젠(김성룡 역), 규범의 일반이론, 아카넷, 2016
Hans Kelsen, Allgemeine Theorie der Normen (1979)
제59장 효력을 근거지움의 논리적 문제들
Ⅰ. 근본규범
a) 규범의 효력에 관한 언명들의 이론적 삼단논법
전통적 법이론에서는 일반규범에서 개별규범이 논리적으로 도출된다고 이해한다. 즉 “약속은 지켜야 한다”라는 일반규범에서 “A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라는 개별규범이 연역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술했듯 개별규범의 효력은 논리적 추론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실제로는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들’ 간의 이론적 삼단논법만 있을 뿐이다.
「기술한 바에 따를 때, 하나의 일반적인 가설(가정)적 규범의 효력으로부터 이러한 일반적인 규범에 상응하는 하나의 개별적인 정언규범의 효력이 논리적으로 따르게 되는, 하나의 규범적 삼단논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근거지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일반규범과 그와 상응한 개별규범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하나의 삼단논법이 있다. 말하자면 하나의 일반규범이 유효하고 그에 상응하는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개별적 의미가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 그렇다. 여기서는 그 일반규범과 이미 유효한 그에 상응한 개별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Aussagen)이 문제되는 것이 분명하다.」(1편 475쪽)
규범은 사고의 의미가 아니라 의지행위의 의미이다. 규범이 존재하려면 실제 의지행위가 있어야 하며, 논리적 사고만으로는 규범을 생성할 수 없다. 논리는 단지 이미 존재하는 규범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른바 ‘규범적 삼단논법’도 이미 창조된 기존 규범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뿐 그 자체 규범을 창조하지는 못하며, 여기서 등장하는 명제들은 규범이 아니라 사실은 진술이다.
「이것은 이론적인 삼단논법이지, 전혀 실용적이거나 혹은 규범적인 삼단논법이 아닌데, 왜냐하면 모든 세 개의 문장들이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그 개별규범의 효력이 아니라, 소전제에 언급된 개별적인 의미는 대전제에 언급된 일반규범에 상응하는 하나의 규범이라는 그 진술 혹은 소전제에서 언급된 개별규범의 효력은 대전제에서 언급된 일반규범의 효력을 통해 근거 지워져 있다는 그와 동일한 결론인 것이다.」(1편 476쪽)
「이러한 삼단논법 방식에서는 … 개별규범의 효력이 … 일반규범의 효력으로 근거지워진다. 그리고 이러한 근거지움은 그 개별규범이 일반규범에 부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개별규범은 이 일반규범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1편 477쪽)
일반규범(법률)에서 개별규범(법관의 판결)이 규범적 삼단논법에 의해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립한 개별규범과 일반규범 간의 관계가 이론적 삼단논법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다.
「이 근거지움은 그 개별규범이 표현하는 의미는 이미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삼단논법은 규범적인 것이 아니고 이론적인 삼단논법인데, 왜냐하면 대전제, 소전제들, 그리고 결론(문)이 참 또는 거짓일 수 있는 진술이기 때문이고, 결론문은 단지 대전제와 소전제들이 참인 경우에만 진실이기 때문이다.」(1편 477쪽)
| [미주 171] 경험적으로 볼 때, 법관은 대개 자신의 정의감이나 직관에 부합하는 결론을 우선 정해놓은 후, 이후에 그 결론을 정당화하는 법적 이유를 구성한다. 즉 법적 논증은 실제로는 판결의 주문이 결정된 이후에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은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Ch. Perelman, L. Olbrechts-Tyteca, Traité de l’Argumentation. La nouvelle rhétorique, Bruxelles 1970, S. 56; Jerome Frank, Law and the Modern Mind, New York 193; Giulio Calogero, “La Logica del giudice e il suo controllo in cassazione, Studidi Diritto Processuale, Bd. 11, Padova 1937 등) 「프랭크(Jerome Frank)는 자신의 저서(Law and the Modern Mind, New York 1930, 100쪽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판단의 과정은 … 하나의 결론이 순차적으로 나오게 되는 전제로부터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 오히려 반대로 다소간 모호하게 구성된 하나의 결론을 가지고 시작한다; 사람들은 통상 그러한 하나의 결론을 가지고 시작하고 그 후에 그것을 입증하는 전제들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만약 그가, 자신이 만족하도록, 그의 결론을 수용가능한 것으로 생각한 전제들과 연결시키는 적정한 논거를 찾지 못한다면, 그는 그 결론을 거부하고 다른 결론 … 을 찾게 될 것이다. 이제, 법관은 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인간도 그의 통상의 사고과정에서 어떤 그러한 삼단논법적 논증의 과정으로 (제한된 수의 단순한 상황들을 다루는 경우는 예외로 하고) 판단들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법관은, 단순히 법복을 착용함으로써, 그러한 인공적인 논증의 기법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공정하다. 다른 판단들과 같이 법적 판단도 대부분 잠정적으로 구성된 결론들로부터 거꾸로 작업되는 것이다.”」(2편 321-322쪽) 다시 말해 법관이 판결을 내리는 과정은 대개 논리적 연역의 순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단 주문이 정해지고 나면 그 판결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논증구조가 제시된다. 이러한 점에서 형식논리학은 발견의 방법이 아니라 정당화의 방법으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는바, 이 점에서도 판결은 이미 확정된 전제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논리적 결론’이 아니다. 주문에 상응하는 이유설시는 법관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 개별규범에 대해 정당화를 제공하는 절차인바, 그것은 종종 삼단논법의 형식으로 기술되는 하나 본질적으로 ‘판결을 생성하는’, ‘판결에 이르게 된’ 논리적 과정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미 내려진 판결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만약 법관의 판단이 전제들이 주어지기 전에, 즉 법관에게 알려지기 전에 이루어진다면, 그의 판결은 추론(결론)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법관은 자신의 판결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즉 개별규범이 효력이 발생된 다음에 비로소, 그 전제들을―마치 프랭크가 말했듯이―찾으려 한다면, 그 결론문이 법관의 판단의 개별규범인 규범적 삼단논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제들이 확정되지 않는 한, ‘결론’이라는 것은 언급될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이미 창설된 개별 법규범의 효력이 근거지워지는 하나의 절차인 것이다.」(2편 322쪽) |
| [미주 173] 존 듀이(John Dewey)는 법관의 판결이 단순히 이미 주어진 전제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라는 가정이 현실의 법적 판단 과정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법적 판단은 현실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며, 법률규정은 그러한 모든 상황을 미리 완전하게 규정할 수 없기에, 법관의 판단을 기계적 연역구조로 설명함은 과도한 단순화라는 것이다. 「존 듀이(John Dewey)가 자신의 논문 “Logical Method and Law”, The Cornell Law Quarterly, vol. X, 1924, S. 17ff.에서 법원의 판결과 관련하여 “논리학은 반드시 폐기되어야만 하거나 그것은 전제들에 관계된 것보다는 반드시 결론들에 관련된, 확실성의 하나의 연역이라기보다는 개연성 예견의 논리학이어야만 한다.”라고 말했을 때, 이것을 목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듀이는 법관의 판결은, 행해질 수는 있지만 반드시 행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닌,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라는 사실의 확정으로부터 이러한 결론에 이른 것이 아니고, 그가 저마다의 법관의 판결은 사전에 알려진 전제들로부터 논리적인 필연성으로 따라오는 것이라는 입장을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판결은 앞서서 알려진 전제들로부터 형식논리적인 필연성으로 따라와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가정이기 때문에 불합리하다.”(25쪽)라고 말했다.」(2편 324쪽) 듀이가 형식논리학적 판단모델을 거부한 이유는 법규범이 현실의 모든 가능한 상황을 미리 규정할 수 없다는 점, 즉 입법자는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상황을 모두 예견할 수 없기에 법률규정에는 일정한 불명확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 그리하여 구체적 사건에 대한 판결을 단순히 일반규범에서 연역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듀이는 형식논리적 사고가 현실의 불확실성과 복잡성을 무시하고 마치 모든 사건이 이미 준비된 규칙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원들에 의해 적용될 법률들은, 입법자가 가능한 모든 상황들을 예견할 수 없기 때문에, 모종의 불명확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법규들은 … 최상이라고 해도, 부주의함 때문만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상황을 예견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인한 모종의 모호함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예견 없이는 (개념)정의라는 것은 모호할 수밖에 없으며 분류는 정확히 규정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례를 포함할 수 있고 형식적인 삼단논법으로 적용될 수 있는 옛 형태들이 가까이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은 실제로 있을 수 없는 확실성과 규정성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허세의 결과는 실제의 불확실성과 사회적인 불안정성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그 사정들은 정말로 새롭고 오래된 규칙에 포함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래된 규칙이 하나의 특정 사례를 규제하는 것으로 선언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도박이다.”(26쪽)」(2편 324-325쪽) 다시 말해 삼단논법적 연역이 불가능한 이유는 법규범이 충분히 명확하지 않거나 입법자가 특정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듀이의 주장이다. 이 지적에는, 일면 타당한 부분도 있지만,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한 부분도 있다. 만약 법규범이 완전히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고 입법자가 해당 상황을 예견한 경우라면, 듀이의 논리에 따르면 법관의 판결을 논리적 연역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일반규범이 아무리 명확하더라도 법관의 판결은 본질적으로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권한 있는 기관의 의지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규범의 명확성 여부가 아니라 규범의 효력과 논리적 추론 사이의 구조적 차이에 있다는 점을 듀이는 간과했다. 「이로써―듀이의 입장에 따르면―하나의 삼단논법적 연역은 만약 적용될 일반법규범이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는 경우에만 혹은 입법자가 주어진 사례를 예견하지 않았던 경우에만 불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적용될 일반법규범이 명확하게 표현되고 입법자가 문제되는 구성요건을 예견하지 않았다는 가정을 지지할 어떠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면,―듀이의 이러한 문장들에 따르면 그렇게 보인다―법관의 판결을 하나의 논리적 추론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2편 325쪽) |
b) 하나의 규범적 질서의 최상의 효력근거로서 근본규범
법규범의 효력은 다른 법규범에 의해 근거지워질 뿐, 사회학적 사실이나 도덕적 가치로 근거지워지지 않는다. 하나의 법규범이 유효한 이유는 그것이 상위법규범에 의해 수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위규범 역시 또 다른 규범에 의해 수권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꼭대기에 근본규범이 있다. 근본규범은 더 이상 다른 규범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 최종 전제이다. 기독교규범질서에서는 ‘기독교인은 예수의 요구를 따라야 한다’라는 전제가, 법질서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헌법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라는 전제가 그러하다(1편 479-480쪽).
c) 단지 규범만이 규범의 효력근거일 수 있음
근본규범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규범이 아니라 단지 법학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이다. 즉 법질서를 규범적 질서로 이해하려면 근본규범을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드시 그러한 전제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만약 누군가 법질서를 단순한 권력관계나 사회적 사실로 해석한다면 근본규범을 전제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근본규범은 법학적 관점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근본규범은 제정된 것이 아니고 단지 전제된 규범이기 때문에, 그 효력의 근거에 대해서 더 이상 의문이 제기될 수 없으므로 ‘근본’규범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실제의 의지적 행위를 통해서 실정적으로 제정된 것이 아니라, 법적 사고에서 전제된 것이고, 달리 말해 하나의 가공의 규범인 것이다. 그 근본규범은 법질서를 형성하는 모든 법규범들의 최종적인 효력근거인 것이다. 단지 하나의 규범이 하나의 다른 규범의 효력근거일 수 있는 것이다.」(1편 482쪽)
「그 근본규범은 전제될 수 있지만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윤리학과 법학이 근본규범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전제된 경우에만, 다른 사람의 행위에 정향된 의지적 행위의 주관적인 의미는 또한 그의 객관적 의미로서 해석될 수 있고, 이 의미내용은 구속적인 도덕 혹은 법규범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근본규범의 전제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위문들은 단지 이러한 조건적인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유효한 도덕규범 혹은 법규범들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에 반드시 동의해야만 하는 것이다.」(1편 482쪽)
d) 근본규범: 하나의 가공된 규범
순수법학에서 근본규범은 실정법의 최종적 효력근거로 제시되지만,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규범은 아니다. 근본규범은 어떤 입법자나 권위자가 실제로 제정한 규범이 아니라, 규범질서의 효력을 이해하기 위해 사고 속에서 상정되는 규범이다. 이는 ‘가공된 규범’이다. 즉 ‘실제’ 의지행위의 의미가 아니라 ‘가공된’ 의지행위의 의미이다.
이를테면 바이잉거(Hans Vaihinger)는 인간의 사고가 현실을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 ‘마치 … 인 것처럼’이라는 방식의 가공을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가공은 실제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임시로 설정되는 관념적 장치이다. 근본규범도 이런 허구적 관념에 해당한다. 근본규범은 실존하는 규범이 아니라 법질서의 효력을 이해하기 위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되는 허구적 규범, 날조된 규범이다.
「하나의 실정적 도덕질서 혹은 실정적 법질서의 근본규범은 어떠한 실정적인 규범이 아니라, 단순히 사고된 규범이고, 달리 말해 하나의 날조된 가공의 규범이며, 그 의미는 하나의 실제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가공된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다. 그 자체로서 근본규범은, 현실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 스스로 모순투성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통해 표현되는 ‘마치 … 와 같이(흡사 … 처럼)’라는 파이잉거(Hans Vaihinger)의 철학의 의미에서, 하나의 순수한 혹은 ‘고유한’ 가공(eigentlich Fiktion)인 것이다[Hans Vaihinger, Die Philosophie des Als-Ob, 7. und 8. Aufl., Leipzig 1922, S. 24: “단어의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고유한 가공이란 현실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 스스로 모순투성이인 그러한 표상·관념형상(Vorstellungsgebilde)을 말한다. … 그것과 구별되어야 할 것은 단지 주어진 현실에는 모순되거나, 혹은 그 현실에 어긋나지만, 그 자체 스스로는 모순투성이인 것은 아닌 그러한 관념형상이다. … 우리는 후자를 반가공, 유사가공들(Halbfiktionen, Semifiktionen)이라고 표현한다.”]」(1편 482-483쪽)
가령 종교적 도덕질서에서는 ‘신의 요구에 복종해야 한다’는 규범이 근본규범으로 상정될 수 있다. 또한 법질서에서는 ‘강제행위는 역사적으로 최초의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는 규범이 근본규범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은 실제로 누군가가 제정한 규범이 아니라 단지 규범질서 전체의 효력을 설명하기 위해 상정되는 규범이다. 즉 우리는 문제의 사회질서가 유효하다고 설명하기 위해 마치 그러한 규범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할 뿐이다.
이 점에서 근본규범은 현실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자기모순적인 성격을 가진다. 근본규범은 최고 권위를 정당화하는 규범으로서 실제 권위에 의해 제정된 바가 전혀 없지만, 동시에 그 권위 자체 위에 존재하는 또다른―가공의―권위를 전제한다.
「하나의 근본규범을 받아들이는 것(가정 혹은 상정하는 것)은 마치 하나의 종교적 도덕질서의 근본규범: ‘신의 요구에 복종해야 한다’ 혹은 법질서의 근본규범: ‘역사적으로 첫 번째의 헌법이 정한 것과 같이 행위해야만 한다’와 같이 어떠한 그러한 규범도 현실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가장 높은 도덕적 권위 혹은 법적 권위의 수권을 의미하면서도 이러한 권위 위에 존재하는 하나의―물론 단지 가공의―권위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규범 또한 그 자체 모순적인 것이다.」(1편 483쪽)
바이힝거에 따르면, 인간은 어떤 이론적 목적을 달성하려 할 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임시적인 사고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가공은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적 장치이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에서도 완전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들이 사용된다. 경제학에서도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완전경쟁시장의 개념을 전제한다. 그러한 개념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지만, 이론을 설명하고 체계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근본규범이 또한 이와 같다. 근본규범의 목적은 법질서를 구성하는 규범들의 효력을 설명하는 것이다. 법질서 안에는 수많은 규범들이 존재하며, 이 규범들은 서로 효력을 근거지우는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이 구조를 끝까지 추적하면 더 이상 상위규범이 없는 지점에 도달하는바, 이때 우리는 그 규범들이 유효하다고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근본적인 규범을 상정하게 된다. 이 규범은 실제로 존재하는 규범이 아니라 법질서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사고의 장치인 것이다.
「파이잉거(Vaihinger)에 따를 때 가공(Fiktion)은 사람들이 사고의 목적을 주어진 소재로는 달성할 수 없는 경우에 이용하는 임시방편의 사고방법(Denkbehelf)이다. 근본규범의 사고목적, 즉 근본규범을 생각하는 목적은, 하나의 실정적 도덕질서 혹은 법질서를 구성하는 규범의 효력을 근거지우는 것이고, 그것은 이러한 규범들을 설정하는 행위의 주관적인 의미를 그의 객관적 의미로서 해석하는 것이며, 즉 유효한 규범들로, 그리고 그 해당 행위를 규범설정(창설)행위로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단지 가공의 방법으로만 달성될 수 있다.」
이로써 <순수법학>에서 근본규범을 일종의 가설로 이해하는 해석은 변복된다. 가설은 경험적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되는 잠정적인 명제이다. 그것은 현실에 대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될 수 있는 명제이다. 그러나 근본규범은 그런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경험적 명제가 아니라 법질서의 효력을 이해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설정되는 가공이다. 따라서 근본규범은 경험적 가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개념이다.
가공은 그것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근본규범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법질서의 효력을 설명하기 위해 그것을 가정한다. 바로 이 점에서 근본규범은 가설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사용되는 가공, 허구인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단지 가공의 방법으로만 달성될 수 있다. 따라서 그 근본규범은 파이잉거의 Als-Ob(‘마치 … 인 것처럼’, 가공의) 철학의 의미에서는―나 스스로 그것을 때때로 표현했던 것과 같이―결코 가설이 아니고, 하나의 가공, 즉 그것이 현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거나 혹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통해 가설(Hypothese)과는 구별되는 가공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1편 483-484쪽)
e) 상위규범과 하위규범
하나의 규범이 다른 규범의 효력을 근거지울 때, 그 두 규범 사이에는 위계적 관계가 형성된다. 전자는 상위규범이고 후자는 하위규범이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한 논리적 관계가 아니라 규범적 효력의 관계이다. 하위규범의 효력은 상위규범이 규정한 방식에 따라 그것이 창설되었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다시 말해 규범의 위계는 규범의 창설절차와 연결된다(1편 484쪽).
일반적으로 헌법은 국가의 기본규범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어떤 규범이 다른 규범의 창설절차를 규정하는 경우 그 규범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헌법적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도 있다. 가령 법원이 개별 규범을 창설하는 절차를 규정하는 법률은 법원의 활동에 대해서는 헌법적 성격을 갖는다.
「이제 법적용기관이, 특히 법원들이, 그 개별규범들을 창설하는 절차를 규정하는 법률은, 이러한 기관들의 절차에 대한 관계에서는 ‘헌법’이며, 이는 마치 입법절차의 관계에 있어서의 ‘헌법’과 같이 단어의 좁은 특수한 의미에서 헌법과 같은 것이고, 역사적으로 첫 번째의 헌법에 대한 관계에서, 즉 실정법적인 의미에서의 헌법에 대한 관계에서 선험적이고 논리적인 의미에서의 헌법과 같은 것이다. 헌법이라는 개념은 그렇게 상대적이다.」(1편 484쪽)
근본규범은 법질서 전체의 효력을 근거지우는 규범이지만, 그 자체는 구체적인 규범의 내용을 정하지 않는다. 근본규범이 규정하는 것은 단지 누가 규범을 창설할 권한을 가지는가라는 점이다. 즉 그것은 규범창설의 권위와 절차를 정할 뿐이다.
「근본규범이라는 관점으로부터 볼 때, 하나의 실정적 도덕질서는 물론 하나의 실정적 법질서도, 그 근본규범이 단지 누구에 의해서 도덕 혹은 법질서의 규범들이 창출되어야만 하는가를 규정하고 있는 한에서는, 즉 수권받은 권위자에 의해 창설된 규범들의 내용들은 규정하지 않고, 단지 가장 최고의 규범창출권한만을 정하고 있는 한, 하나의 생산관계인 것이다. 만약 보다 상위규범이 창설될 규범의 내용은 정하지 않고 단지 하위규범의 창설행위만을 정하고 있다면, 달리 말해 어떤 내용이건 임의적인 내용의 규범의 창설을 수권하고 있다면 그 하위규범의 효력은 단지 하위규범의 설정행위가 그 상위규범에 부합하는 경우이면 그 상위규범의 효력을 통해 근거지워진다.」(1편 484-485쪽)
| [미주 175] 근본규범은 법질서의 규범들에게 효력을 부여하는 전제이지만, 그 규범들의 구체적 내용을 결정하지 않는다. 실정법 규범은 사고조작이나 논리적 추론을 통해 근본규범에서 도출될 수 없다. 근본규범은 법질서의 효력을 설명하는 이론적 전제일 뿐이며, 구체적 규범을 만들어내는 논리적 출발점이 아니다. 「근본규범은 자신이 그 효력을 근거 지우는 법질서의 규범들이 내용을 결코 정하지 않기 때문에―그것이 근본규범에 맞게 만들어진 것인 한―이러한규범들의 내용은 실정적인, 규범을 창설하는 행위들을 통해 반드시 정해져야만 하기 때문에, 하나의 실정 법질서의 규범들은 근본규범으로부터 사고조작을 통해서는 도출될 수 없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이 하나의 다른 규범의 효력을 통해 무릇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2편 331쪽) |
실제의 법질서는 순수한 규범창설관계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상위규범은 단지 규범창설의 절차를 규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종종 창설될 규범의 내용도 일정하게 제한한다. 이러한 점은 도덕질서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근본규범을 통해 수권받은 최고의 도덕적 권위 혹은 법적 권위에 의해 창설된 규범들 자체는 다시 규범들을 설정하는 다른 권위들에 권한을 줄 수 있고, 동시에 창출될 규범들의 내용을 규정할 수도 있고 규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도덕 영역에서 이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1편 485쪽)
헌법은 단지 입법절차만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법률의 내용에 대해서도 일정한 한계를 설정한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규정은 입법자가 특정한 내용을 가진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금지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규정은 상위규범이 하위규범의 내용에 대해 부정적인 방식으로 제한을 가하는 사례이다. 따라서 법질서는 단순한 규범창설관계만으로 이루어진 구조가 아니라, 내용 규정과 창설절차가 결합된 복합적인 구조를 가진다.
「법 영역에서도 이것은 통상 그와 같다. 왜냐하면 헌법은 적어도 일반적인 법규범들을 생산하기 위한 절차 소위 입법을 규정하는 것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고, 아주 자주 장래의 법률들의 내용도 적어도 부정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1편 486쪽)
f) 생산(Erzeugung)관계로서의 규범질서
법질서는 동일한 수준의 규범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상위규범과 하위규범이 연결된 단계 구조이다. 최상위에는 근본규범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 헌법이 있다.
「여하튼 하나의 실정 도덕질서 혹은 법질서는 동등한 규범의 체계가 아니라, 상위의 규범과 하위의 규범들의 체계이다. 즉 그 최상위의 단계는 전제된 근본규범으로부터 그 타당성이 근거 지워진 헌법이, 그리고 그 최하위의 단계는 개별적인, 하나의 특정한 구체적인 행태를 당위된 것으로 정하는 규범들인, 규범들의 단계구조를 보여준다.」(1편 486쪽)
Ⅱ. 두 개의 규범 간에 ‘상응함’, ‘부합함’으로 표현되는 관계의 논리적 성질
하위규범이 상위규범에 부합하는 방식은 일률적이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상위규범이 단지 규범을 창설할 기관만을 규정한다. 다른 경우에는 규범의 내용까지 규정한다. 따라서 규범 사이의 상응성은 그 규정방식에 따라 다양한 정도를 가진다.
「보다 하위의 규범은 보다 상위의 규범의 효력을 통하여 근거지워진다는 것은, 보다 하위규범은 보다 상위규범에 상응(부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응성은 그 상위의 규범이 하위의 규범의 창설행위를 규정하는지, 즉 단지 하위의 규범을 창설해야 하는 기관만을 규정하는지 아니면 그 기관으로부터 창설될 규범의 내용도 규정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정도를 가진다.」(1편 487쪽)
a) 내용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상위규범들과 하위규범들 간의 관계
i) 상위규범이 규범을 만들 기관을 개별적으로 지정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신이 모세에게 규범을 만들 권한을 부여한 상황이 그러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규범의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점이다. 만약 규범이 지정된 기관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상위규범에 부합한다. 즉 규범의 효력은 내용이 아니라 창설 주체에 의해 결정된다. 이 구조는 근본규범과 헌법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첫 번째의 경우는 하위규범의 효력이 상위규범의 효력을 통해 근거지워진다. 달리 말해 만약 하위규범이 상위규범에서 개별적으로 정해진 개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에 하위규범은 상위규범에 일치한다. 모세로부터 만들어진 특정한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는 법의 효력은 모세에게 규범을 창설하도록 수권을 부여한 신에 의해 만들어진 규범의 효력을 통해 근거지워진다.」(1편 488쪽)
ii) 한편, 수권 기관이 특정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헌법이 ‘왕조 X의 지배자’에게 법 제정 권한을 부여하는 경우가 그렇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규범을 만든 사람이 그 개념에 포섭되는지 여부이다. 만약 그 사람이 해당 개념에 속한다면 그가 만든 규범은 상위규범에 부합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상위규범이 단지 형식적 틀을 제공할 뿐이다.
「권한을 부여하는 규범에서 수권받은 기관이 단지 일반적으로 규정된 경우, 즉 권한을 위임받은 기관이 하나의 특정 기관의 개념을 통해 정해진 경우에는 하위규범의 효력은 상위의 권한을 부여하는 규범의 효력을 통해 근거 지워진다. 즉 그 하위규범을 설정한 개인이 권한을 부여하는 규범에서 함유되어 있는 그 개념에서 정해진 바와 같은 그런 자라면 하위규범이 상위규범에 일치하는 것이다.」(1편 489쪽)
b) 내용적으로 정해진 상위규범들과 하위규범의 관계
상위규범이 하위규범의 내용까지 규정하는 경우, 규범 사이에는 다른 종류의 상응 관계가 발생한다. 이 경우 두 규범 모두 일반규범이다. 상위규범은 보다 일반적인 규범이고 하위규범은 보다 구체적인 규범이다. 따라서 두 규범 사이에는 개념적 포섭 관계가 형성된다. 하위규범의 조건 개념과 법효과 개념이 상위규범의 개념에 포함되면 하위규범은 상위규범에 부합한다.
「상위규범은 하위규범과 마찬가지로 조건 지우는 구성요건 개념과 법효과 개념이라는 두 개의 개념을 함유하고 있다. 하지만 상위규범에서 이 양 개념들은 하위규범에서의 양 개념보다 더 일반적이다. 하위규범은 만약 그 하위규범이 함유하고 있는 조건 지우는 구성요건의 개념이 상위규범이 함유하고 있는 조건 지우는 구성요건개념에 포섭될 수 있다면 상위규범에 부합하는 것이다.」(1편 493쪽)
다음 경우는 상위규범이 일반규범이고 하위규범이 개별규범인 경우이다. 여기서 상위규범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i) 권한 있는 기관, ii) 구성요건, 그리고 iii) 법효과이다. 구체적 사건에 대한 규범으로서 개별규범이 유효하려면 상위규범인 일반규범이 이들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 개별규범은, i) 만약 그 개별규범이 그 일반규범에서 개별규범을 창설할 권한을 수여받은 개별적으로 특정된 기관에 의해 창설되었다면, 환언하면: 구성요건을 확정했고, 개별규범을 확정한 개별적으로 정해진 기관의 표상(Vorstellung)이 일반규범에 함유된 관할 기관의 개념에 포섭될 수 있다면, 그리고 ii) 관할기관에 의해 확정된 개별 특정 구성요건의 표상(Vorstellung)이 그 일반규범에 함유된 조건지우는 구성요건의 개념에 포섭될 수 있으며, iii) 개별규범에서 당위된 것으로 설정된 법효과의 표상(Vorstellung)이 일반규범에서 함유된 하나의 법효과의 개념에 포섭될 수 있을 때, 그 일반규범에 일치한다.」(1편 494-495쪽)
| [미주 178] 법관의 판결은, 적용되는 일반규범과 일치할 때 정당화된다. 즉 법관이 특정한 사실을 규범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 규범이 규정한 법적 결과를 선언할 때, 그 판결은 해당 규범과 부합한다. 이러한 부합을 ‘포섭(Subsumtion)’이라 한다. 포섭은 단순한 형식 논리의 잔재가 아니라 법적 판단의 정당화 구조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법관은, “나의 판결은 기판력이 있다. 즉 내가 적용할 (혹은 나로부터 적용된) 법규범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주어진 구성요건은 절도이고, 나에 의해 부과된 형벌은 -나에 의해 적용된 법규범에 정해진 범위 내에 놓인 정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논문 “Recht und Logik”, Neues Forum, Oktober/November 1965, 499쪽에서 나는 “일반규범이 모살에 대해 그 형벌로서 교수를 통한 사형을 예정하고 있고 법관이 [그가 모살을 범했다고 법관이 확정한] 마이어에게 교수를 통한 사형을 선고했다면, 그 [법관의 판결을 기술하는] 개별규범은 일반규범에 부합한다. 이러한 부합관계(die Beziehung der Entsprechung)가 포섭관계(Subsumtions-Beziehung)이다.”라고 말했다.」(2편 334쪽) |
두 개의 개별규범 간에도 상위규범과 하위규범의 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 가령 상관이 부하에게 특정 명령을 내리고, 부하가 그 명령에 따라 하급자에게 다시 명령을 내리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도 역시 하위규범의 효력은 상위규범에 의해 근거지워진다(1편 495쪽).
| [미주 179]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는 법규범의 유효성을 입증하는 방식에 두 가지 기본적인 규칙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i) 규범은 상위규범으로부터 파생된 경우에만 유효하다는 형식적 유효성 규칙이고, 다른 하나는 ii) 규범의 내용이 법질서 내 다른 규범들과 논리적으로 정합할 경우 유효하다는 실질적 유효성 규칙이다. 보비오는 이 두 가지 규칙을 법적 논증에서 법률가들이 사용하는 기본적인 방법으로 설명한다. 하나의 규범이 법질서 속에서 정당한 지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상위규범과의 일치와, 규범체계 내부의 논리적 정합성이라는 두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비오(Norberto Bobbio, “Considerations introductives sur le raisionnement des juristes”, Revue Internationale de Philosophie, Tome VIII, 1954, S. 72)는 법규범들의 효력을 근거지우는 두 개의 상위한 방법을 표현했다: “법규범의 유효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법률가는 법적 논리에 고유한 규칙을 구성하는 논증의 두 가지 기본방식을 사용한다. 1. 규범은 유효한 상위규범으로부터 파생된 경우에만 유효하다[형식적 유효성 규칙(règle de la validité formelle)]. 2. 규범은 만일 전자가 담고 있는 요구가 법질서상의 다른 규범과 논리적으로 합치한다면 유효하다[실질적 유효성 규칙(règle de la validité materielle)].”」(2편 335쪽) 보비오는 형식적 유효성 규칙의 의미를 특히 법적 행위의 합법성을 판단하는 맥락에서 설명한다. 판결, 행정행위, 그리고 법률행위는 모두 상위규범이 정한 권한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법률가는 이러한 행위가 정당한지 판단하기 위해 그것이 상위규범이 정한 조건과 한계를 준수했는지를 검토한다. 따라서 형식적 유효성의 증명은 법적 행위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는 절차와 직결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형식적 유효성은 법질서의 위계 구조 속에서 규범과 행위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이해된다. 「규칙 1과 관련하여 보비오는 “법률가가 법적인 결정(판결)들, 행정적 행위들, 개인의 의사자치에서 나오는 행위를 해석하는 경우에는 형식적 유효성의 증명(증거)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입증되는 중요한 것은 그것들의 합법성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그 행위가 보다 상위의 규범에 의해 정해진 요구에 부합하고, 그 한계 내에서 수행되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 행위가 형식적으로 옳은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73쪽)라고 했다.」(2편 335쪽) 보비오는 또한 실질적 유효성 규칙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는 규범의 내용이 명확한 경우에는 이러한 규칙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규범이 모호하거나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이때 법률가는 규범의 의미를 명확하게 해석하고 체계 속에서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규범을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규범 간의 논리적 정합성을 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실질적 유효성의 문제는 특히 해석과 체계적 정리의 영역에서 중요해진다. 「규칙 2와 관련하여 보비오는 “실질적 유효성의 증명은, 만약 법적 규범의 내용이 명확하게 설명된다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물론 그것은 심지어 이러한 사례에서도 그것과 그 체계의 다른 규범 사이에 충돌(모순)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법률가들의 과제라고 할지라도. 하지만 만약 그 과제가 모호한 규범을 명확하게 만들고, 암시적인 규범을 명시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극도로 중요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2편 335쪽) 그러나 두 규칙 모두 문제가 있다. 형식적 유효성 규칙은 하위규범의 효력이 상위규범의 효력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다고 전제하고 있으나, 전술했듯 하나의 규범의 효력은 다른 규범의 효력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될 수 없다. 규범의 효력은 규범창설행위에 의해 근거지워질 뿐이며, 단순한 논리적 추론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규범의 위계관계를 논리적 연역관계로 이해함은 순수법학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두 개의 규칙 중 첫 번째의 규칙에 관한 한 그녀에게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보비오는 주지하다시피, 하위규범의 효력은 보다 상위규범의 효력을 통해 논리적으로 도출된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보다 상위의 유효한 규범에서 도출되었다면”(si elle derive d'une normes valable superieure)(S. 72). 보비오는 77쪽에서 ‘위임받은 자에 의해 명시적으로 설정된(explicitement enoncées par la personne deleguée)’ 규범과 ‘명시적인 규범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된(deduites logiquement des normes explicites)’ 규범들을 구분했다. 하나의 다른 규범의 효력으로부터 하나의 규범의 효력을 논리적으로 그렇게 연역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2편 336쪽) 실질적 유효성 규칙에도 문제가 있다. 이는 서로 정합적이지 않은 두 규범 사이에 논리적 모순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규범 사이의 충돌은 논리적 모순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서로 상충하는 두 규범이 동시에 유효할 수도 있다. 실제 법질서에서는 이러한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규칙 2에 반해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보비오는 여기서 ‘정합적’이지 않은 두 개의 규범들 사이에 하나의 논리적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인데.―본문에서 지적되었듯이―그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상호 충돌하는 두 개의 법규범들은 양자 모두 유효할 수 있다. 규범들의 충돌들은 그것이 실정법적 규정에 근거하여 제거되지 않는 한, 가능하고 사실상 존재한다.」(2편 336쪽) |
제60장 조건과 결과의 관계
전술했듯, 모순율이나 추론규칙 같은 전통적 논리법칙은 규범들 사이에 직접 적용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규범의 세계가 전적으로 비논리적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일정한 논리적 관계들, 예를 들어 일반적인 것에 대한 특수한 것의 포섭, 상위규범과 하위규범 사이의 일치, 조건과 결과의 관계 같은 것은 규범에도 적용 가능하다고 본다. 즉 조건이 무엇이고 결과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둘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규범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논리적 작업이므로 논리학의 원칙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조건 지워진 결과를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문장에 함유된 조건과 결과의 관계가 하나의 논리적인 관계라면, 그것이 조건지워진 결과가 당위된 것으로 규정된 문장에서 함유된 경우에 그 관계를 논리적인 관련성으로 간주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앞에서의 분석의 결론은 하나의 규범적인 삼단논법에서 모순율과 추론의 규칙은 규범들 사이의 관계에는 적용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지만, 논리학의 다른 원칙들은, 특별한 것의 일반적인 것으로의 포섭, 그 의미가 하나의 규범인 행위의 이 행위를 권하는 규범에 대한 관계에서 일치, 혹은 조건과 결과 간의 관계가 문제되는 한, 이러한 관계(규범들 사이의 관계)에 적용 가능한 것이다.」(1편 500-501쪽)
제61장 특별한 ‘법적’ 논리학이 있는가
그런데 일부 법학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법적 사고가 일반적인 형식논리와는 다른 독자적인 논리 체계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은 특히 법원의 판단 방식이 일반적인 논리적 추론과 다르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법률가들은 판결과정에서 사용하는 여러 해석방법은 일반 논리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폴란드 논리학자 칼리노브스키는 “수학적 논리학, 철학적 논리학, 법학적 논리학 혹은 어떤 다른 논리학 등과 같은 특수한 논리학은 없다. 수학, 철학, 법적 도그마틱 등에 있어서 논리적 원칙 혹은 법칙의 적용들만 있다.”라고 하여 특수한 법논리학의 존재를 명확하게 부정한다(George Kalinowski, “Y-a-t-i-l une Logique Juridique?”, Logique et Analyse, Nouvelle Série, 1959, S. 48ff). 반면, 벨기에 철학자 페렐만은 그러한 법논리학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수학 외부에서 사용되는 추론의 형태의 구조를 연구하기를 거부하는 논리학자, 법적 추론과 실천적 논증 일반의 특유한 성질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논리학자들은 철학과 인문학에 해를 끼친다”라고까지 한다(Gh. Perelman, “Logique Formelle, Logique Juridique”, in Logique et Analyse, Nouvelle Série, 1960, S. 230).
이른바 독자적인 ‘법적’ 논리학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서 자주 거론되는 것이 법률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유추 논증과 “대는 소를 포함한다”는 논증이다.
「법률문헌에서는 때때로 법학에 특히 법규범에 적용되는 논리학은 일반적인 형식논리학이 아니고, 이와는 상이한 특수한 ‘법적’ 논리학이라는 입장이 주장된다. 이러한 관점은 논쟁거리이다. 폴란드의 논리학자 칼리노브스키(Kalinowski)는 확고하게 이를 거부한다. 벨기에의 철학자 페렐만(Ch. Perelman)은 단호하게 이를 지지한다. 하나의 특수한 법논리학이 존재한다는 근거로 무엇보다 법률가들에 의해 적용되는 소위 유추(추론)와 그곳에서 늘 사용되는 대는 소를 포함한다는 논증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들이 실제로 논리적 추론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I. 유추
법원은 실제 사건을 판단할 때 기존 법규범이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상황에 자주 직면한다. 이런 경우 법관은 규범에 규정된 구성요건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사례에 그 규범을 적용하려고 한다. 이러한 판단방식을 유추라 한다. 전통법학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논리적 추론의 일종이라고 간주되었으나, 이는 법관의 판단에 의존하는 주관적인 결정일 뿐 논리적 추론이 아니다. 어떤 사실이 법규범의 구성요건과 ‘유사하다’거나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판단은 객관적인 논리규칙에 의존하지 않는다. 동일한 사건이라도 어떤 법관에게는 유사하게 보일 수 있고, 다른 법관에게는 그렇지 않게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유추는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법관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새로운 규범을 창조하는 작용이다.
「그 본질은―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듯이―법관이 하나의 유효한 일반 법규범을, 그 일반 법규범에서 추상적으로 정해진 구성요건에는 사실 동일하지 않지만, 법관의 생각에 따를 때 유사한 구성요건에 적용한다는 것에 있거나, 혹은 적용된 법규범에 규정된 구성요건과 본질적인 면에서 일치한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법관의 판결이 연관되어 있는 구체적인 구성요건이 일반 법규범에서 추상적으로 규정된 구성요건과 같지 않다면, 그 일반 법규범은 법관 앞에 주어진 구성요건에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법관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구성요건과 일반 법규범에 추상적으로 규정된 구성요건 간의 하나의 ‘유사성’ 혹은 ‘본질적 부합·일치’가 존재한다는 것은 고도로 주관적인 판단이고, 한 법관에게는 ‘유사한 것’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법관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법질서가 법을 적용하는 기관에 유효한 일반 법규범을 유추를 통하여(per analogiam) 적용하도록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그 법질서는 법적용기관에 자유로운 판단의 광범위한 재량영역을 보장하는 것이고, 그 범위 안에서 이 기관은 그에게 주어진 사례를 위한 새로운 법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1편 503-504쪽)
만약 어떤 사건이 기존 법규범의 구성요건과 동일하지 않다면, 엄밀히 말해 그 규범은 그 사건에 적용될 수 없다. 그런데도 법관이 유추를 통해 그 규범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기존 규범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법관은 실제로는 새로운 법을 창조하면서도, 겉으로는 기존 법을 적용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법학에서는 이를 종종 ‘법의 정신’이라는 표현으로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나 ‘법의 정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불확정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어떤 것이 법의 정신인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법관 자신이다. 따라서 법의 정신이라는 개념은 법관의 재량을 제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재량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점에서 법적 유추는 결코 논리적 추론의 일종이 될 수 없다. 이러한 규범창설은 논리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질서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음으로써만 정당화될 수 있다. 형사법영역에서 대개 유추가 금지되는 것도, 애초에 논리적 추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추에 따른 하나의 판단은 대부분의 현대의 법질서들에 따를 때 특정의 사례들에서, 즉 형사법원의 판결에서는 금지되어 있다는 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 전통적인 법학이 유추에 따른 법관의 판단을 말할 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실정의 일반규범의 효력으로부터 법관의 판결이라는 개별적인 규범의 효력이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추론이 결코 아니고, 유효한 법질서를 통해 권한이 주어진, 어떠한 실체적인 내용적으로 규정된 일반규범에도 상응하지 않는, 하나의 개별규범의 창설인 것이다.」(1편 504-505쪽)
논리학자 카르납이 적절히 지적하듯, 고전 논리학이나 현대 논리학 어디서도 유추의 논리적 기초를 발견할 수 없다. 유추는 논리적으로 반드시 참이 되는 결론을 만들어내는 추론이 아니라, 단지 그럴듯해 보이는 결론을 만들어내는 추론이다. 논리적 추론에서는 전제가 참이면 결론도 반드시 참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죽는다 /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삼단논법에서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이 경우 결론은 단순히 그럴듯한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유추는 이런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유추는 단지 어떤 사례가 다른 사례와 비슷해 보인다는 판단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어떤 법이 ‘자동차는 공원 안에 들어올 수 없다’고 규정한다고 하자. 만약 누군가가 오토바이를 타고 공원에 들어왔다면, 법관은 ‘오토바이도 자동차와 비슷하므로 금지된 것이라고 보자’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적으로 반드시 따라오는 결론이 아다. 다른 법관은 ‘자동차만 금지한 것이므로 오토바이는 허용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두 판단 모두 기존의 일반규범과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유추는 일종의 ‘개연성 추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이 결론이 더 그럴듯하다’는 정도만을 말해줄 뿐, 그것이 반드시 옳다고 보장하지는 않는다. 유추를 통해 판결할 때 법관은 ‘이 사건은 규정된 사례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법의 취지로 보아 적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바,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논리규칙이 아니라 판단, 직관, 가치평가다. 이것은 논리학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판단이나 정책적 판단에 가까운 것이다.
「유추추론은 하나의 개연성 추론이다. 달리 말해 우리가 결론이라고 언급하는 문장에 엄격한 진실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보다 큰 개연성 혹은 보다 작은 개연성의 정도만이 인정되는 것이다. 루돌프 카르납은 고전 논리학에서는 물론 현대 논리학에서도 유추추론을 위한 기초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확언하였다(Rudolp Carnap, “One Inductiv Logic”, Philosophy of Science, vol. XII, 1945, S. 72ff; ‘logical Foundations of Probality’, 2. Aufl., Chicago 1962, S. 569f.). 그리고 이미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는 유추추론은 논리학의 대상이 아니라 심리학의 대상이라고 주장했었다.](1편 506쪽)
| [미주 184]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는, 두 대상이 일정한 표지들을 공유할 때, 우리는 나머지 표지들 또한 동일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경향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어떤 대상 M이 a, b, c, d, e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대상 N이 a, b, c라는 특성을 공유한다면, 우리는 N도 d와 e를 가질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예상하게 된다. 그러나 마흐는 또한, 이러한 기대는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논리적 절차는 이미 확정된 명제들 사이의 일치와 모순의 제거를 보장할 뿐 새로운 속성을 추론하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으며, 유사성에 근거한 이러한 추론은 형식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심리학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마흐(Ernst Mach, Erkenntnis und Irrtum, 3. Aufl., Leipzig 1917. S. 225)는 “만약 고찰의 대상 M이 a, b, c, d, e라는 표지들을 보이고, 하나의 다른 대상 N이 첫 번째의 것과 a, b, c 표지에서 일치하면, 우리는 마지막의 것도 d, e 표지를 보이고 M과 또한 이 표지들에서도 일치하게 될 것이라고 매우 기대하는 경향(sehr geneigt, zu warten)이 있다. 이러한 기대는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것이 아니다. 왜냐면 논리적 절차는 단지 이미 한번 확정된 것과의 일치, 바로 그것의 유지만을 보증하고, 이에 반하는 모순은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향, 우리의 기대는 우리의 심리적-생리학적인 조직(Organisation)에 기초를 두고 있다. 유사성 혹은 유추에 따른 추론은 정확하게 보면 논리학의 대상이 아니고, 적어도 형식논리학의 대상이 아니고, 심리학의 대상이다.”라고 말했다.」(2편 343쪽) 마흐는 유추적 사고가 인간 인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특정한 표지들이 실질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경우 우리는 새로운 대상에서도 그 표지를 찾으려고 하는 경향을 가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며, 이는 인식의 확장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은 논리적 연역의 결과가 아니라 경험적 탐구와 심리적 기대의 결과이다. 유추 추론은 새로운 인식을 생산하는 과정이지만, 그것은 논리적 필연성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대상 M의 표지 d, e가 “그것의 유용한 혹은 해로운 속성으로 인해 하나의 강한 생물학적인 이해(Interesse), 혹은 기술적인 혹은 하나의 순수한 학문적·지적인 목적에 특별한 가치를 가진다면 … 우리는 d, e를 찾도록 내몰리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 우리가 표지 d, e를 대상 N에서 M과 일치하도록 찾든지 혹은 찾지 못하든지, 양 사례에서 우리의 대상에 대한 인식은 확장된다. … 양 사례는 동일하게 중요하고, 양자는 발견(Entdeckung)을 포함한다.”(226쪽) 이러한 마흐의 분석은 법적 유추의 문제에 적용될 수 있다. 과학적 인식에서 유추가 새로운 발견을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법 영역에서도 유추는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법관이 유추를 통해 특정 사건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그는 단순히 기존 규범을 논리적으로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적 규범을 창설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추는 기존 규범의 논리적 적용이 아니라 규범창설행위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에서도 법적 유추는 논리적 연역이 아니라 의지행위의 의미로서 규범의 창설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식행위의 의미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고, 의지행위의 의미가 문제되는, 하나의 법적 유추추론이라는 위에서 주어진 사례에 적용하면, 소위 유추를 통해 획득된 법관의 판결은 하나의 새로운 법이다.」(2편 343쪽) 슈라이버(Schreiber)는 법적 언어에서 흔히 사용되는 다양한 추론 규칙들이 실제로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논리적 규칙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규칙들은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용적인 도움을 줄 수 있지만, 형식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정당한 추론규칙으로 인정될 수는 없다. 법적 추론이 단순한 논리적 연역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적절한 지적이라 하겠다. 「그의 Logik des Rechts, Berlin-Göttingen-Heidelberg 1962, S. 47에서 슈라이버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법언어에서 소위 일련의 추론규칙들이 사용되는데, 그것은 사실 많은 문제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추론규칙으로서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2편 343-344쪽). |
Ⅱ. 대는 소를 포함한다는 논증(Argumentum a maiore ad minus)
전통법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또 하나의 논증방식으로 ‘대는 소를 포함한다’를 들 수 있다. 이는 ‘어떤 규범이 더 일반적인 경우에 적용된다면, 그보다 덜 일반적인 경우에도 당연히 적용된다’는 생각이다. 법학에서는 이를 종종 논리적 추론의 한 형태로 설명한다. 어떤 규범이 넓은 범위의 행위를 허용하거나 금지한다면, 그보다 좁은 범위의 행위는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된다는 식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법적 판단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가령 범죄에 대한 정보를 알린 자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하는 일반규범이 있음을 근거로, 범죄를 사실상 방지한 행위자는 처벌되어서는 안 된다는 개별규범을 창조하는 식이다(1편 506-507쪽).
이 역시 엄밀한 의미의 논리적 추론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일반적인 규범에서 특수한 경우가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법률가들이 말하는 ‘대는 소를 포함한다’는 논증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명제 간의 추론 구조와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특정한 법규범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해석적 판단이다. 새로운 규범을 논리적으로 도출하는 문제가 아니라, 기존 규범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논리적 추론이라면 전제와 결론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존재해야 하나, 여기서는 그러한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 논증을 통해 창조된 개별규범은 기존 규범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입법자의 의도를 추정하는 목적론적 해석에 기반하고 있다. 즉 법학자들이 여기서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은, 만약 입법자가 이러한 상황을 미리 고려했더라면 어떤 규범을 만들었을 것인지 상상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본질적으로 목적론적 해석이다. 법규범의 목적을 고려하여 그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도출되는 규범은 이미 존재하는 규범이 아니라 해석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규범이다.
이러한 해석은 법적 판단에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법질서는 실제로 이러한 해석을 통해 발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논리적 추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의 일반규범의 효력으로부터 하나의 다른 일반규범의 효력을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론적인 고려를 근거로 비실정적인 규범의 효력을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목적론적인 관점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논리적인 추론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1편 508쪽)
| [미주 185] 폴란드 논리학자 코타르빈스키(Tadeusz Kotarbinski)는, ‘어떤 행위가 더 큰 불이익을 포함하는 경우에도 허용된다면, 그보다 작은 불이익을 수반하는 행위 역시 허용된다’는 사고방식(가령 공격자를 죽일 수 있는 행위가 허용된다면, 단지 상처를 입히는 행위 역시 허용된다는 생각)은 엄밀한 의미의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결론은 논리적 필연성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판단과 관련된 초논리적 관계에 기초한다. 엄격한 형식논리적 추론규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레고로비츠(Jan Gregorowicz, “L'Argument a Majori ad Minus et le Probleme de la Logique Juridique”, Logique et Analyse, Nouvelle Serie, 1962, 72쪽)는 폴란드의 논리학자 코타르빈스키(T. Kotarbinski)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대에서 소에로의 추론(argumentum a maiori ad minus)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문제된다: “만약에 법이 그 범위 혹은 강도에서 더 불이익이 큰 행위를 허용한다면, 필연적인 결과로(ipso facto; 사실 그 자체에 의해), 그 법은 동일한 불이익(불편함)을 야기하지만 범위 혹은 강도에서는 그보다 적은 행위를 허용한다. 만약 예를 들어 공격자가 그의 죽음을 야기할 수 있는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면, 바로 그 이유로,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어떤 행위도 허용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가진 것은 보편적인 가치가 없는 초논리적인 관계(relation extra-logique)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로부터 소로의 논증(l'argumentation a maiori ad minus)은 추론의 형태로는 오류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하고, 그것은 논리적 상수와 초논리적 상수 양자를 모두 사용하기 때문에 엄격히 보아 논리적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2편 344쪽) 그레고로비츠(Jan Gregorowicz)는, 코타르빈스키의 이러한 분석 자체는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대는 소를 포함한다’가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는 결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법적 논증이 형식논리와는 다른 유의 추론체계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체계에는 오류 가능성을 가진 일반적 원칙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수사학적 논증방식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레고로비츠는 이를 통해 법적 논증이 형식논리와 독립된 고유한 논리구조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논리학의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하는 것이다. 「그레고로비츠는 이러한 대(大)로부터 소(小)로의 논증을 이렇게 특징짓는 것의 정당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코타르빈스키가 도출한 피할 수 없는 결론을 부정했다. 그레고로비츠는 대에서 소로의 논증의 사례에서 “우리는 많든 적든 일반적인, 오류 가능한, 혹은 초논리적인 상수를 가진 일련의 추론의 형식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추가하여 논리적 상수를 가진 추론형식과, 논리적으로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추론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수사학(la rhétorique)이다.”(74쪽)라고 말했다.」(2편 344쪽) 논리학이라는 개념은 진리 보존을 보장하는 추론규칙들의 체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오류 가능성을 포함하는 규칙들의 집합을 논리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자체 부적절하다. 논리학의 원칙은 오류를 피하기 위한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레고로비츠는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자신의 설명에 일종의 패러독스가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논리학이라는 용어가 수학적 논리학의 의미 외에도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언어도단이다. 「그레고로비츠는 "이 설명에는 패러독스가 포함되어 있다(paradoxe enfermé dans cette affirmation).”라고 고백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패러독스는 단지 외관일 뿐이다(paradoxe n'est qu'apparent). 논리학의 용어는 모호(équivoque)하고, 수학적 논리학(logique mathématique)의 대표자들에 의해 주어진 의미 외에 다른 의미(sens)들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인정하듯이 그것들의 적용들이 ‘오류일 수 있는’ 원칙들의 체계는 결코 논리학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다.」(2편 344-345쪽) 대에서 소로의 논증은 법정책적으로 유용할 수 있다. 그것은 특정한 상황에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논리적 연역의 형태를 가진 추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러한 논증을 논리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 논리학은 합리성이나 유용성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보존을 기준으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대로부터 소로의 논증(argumentum a maiori ad minus)은, 많은 사례들에서 법정책적으로 정당화가 가능하거나 유용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다른 일반규범의 효력으로부터 논리적 추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2편 345쪽) 페렐만은 법적 논증이 형식논리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법적 논증은 엄정한 증명(demonstration)을 제공하지 않으며, 기계적으로 처리될 수도 없다. 법적 논증은 항상 구체적인 상황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해석적 입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증은 형식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 종류의 추론이 아니다. 언어관용상 ‘논리학’이라고 부를 수는 있으나 그것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논리학이 아니다. 「페렐만(Ch. Perelman, “Logique Formelle, Logique Juridique”, Logique et Analyse, Nouvelle Serie, 1960, S. 228)은 하나의 법적 논리학의 특수한 논증들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논거들은, 사실상, 엄정한 예증(설명: Demonstration)을 제공하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을 처리할 수 있는 기계를 상상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사용은, 매번, 특수한 상황에서 그들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지위(position)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논거들의 사용은 입증으로서 공식적으로 옳거나 그르다는 것을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비록 그것이 우리가 전통적으로 논리학으로 표현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의 그런 논증(Argumentation)을 ‘논리학’으로 표현해도 되는지는 용어의 문제이다. 관건은 본질적인 차이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2편 345-346쪽) 법관은 판결을 단순히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결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판결이 논리적 연역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법관의 판결이 하나의 실정 법규범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페렐만은 "현대의 모든 입법에서, 법관은 자신의 판결을 내려야 하고(juger) 이유를 제시할(motiver) 의무를 진다."(229쪽)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법관은 자신의 판단을 하나의 실정의 일반 법규범으로 ‘근거 지워야’만 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결코 법관의 판결이 하나의 논리적 추론의 길에서 획득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법관의 판단은 하나의 실정 일반 법규범에 부합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아가 페렐만은 “법관은, 한편, 처음에 법이 생산할 수 있는 양립 불가능성과 모순 그 자체를 부각시키고, 다른 한편, 일견, 입법자가 남긴 법의 간극을 보충하는 방법을 통해 법을 해석해야 한다.”라고 한다.」(2편 346쪽) 법관은 법률의 모순을 조정하고 법률의 공백을 보충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논리적 연역이 아니라 새로운 법규범을 창설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법관이 자신의 판결을 기존 법률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처럼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실제로는 하나의 유용한 허구일 뿐이다. 이러한 허구는 법적 안정성에 대한 공중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법관의 기능은 법 생산의 성격을 가진다. 법관이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를 위한 규범충돌들을 해소하거나 소위 하나의 ‘흠결’을 채움으로써, 그는 새로운 법을 창조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가 단지 이미 유효한 법률로부터 논리적인 추론만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하나의―아주 유용할 수 있는―허구를 이용하는 것이고, 그 의도는 주지하다시피, 정의를 찾는 공중들에게 법적 안정성의 환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2편 346쪽) 법적 논증은 단순한 논리적 연산이 아니라 다양한 논거의 힘을 평가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평가과정에서는 법관의 판단과 선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법관의 자유와 독립성은 사법기능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논리적 추론에서는 이러한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적 추론은 엄격한 규칙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법적 논증과 논리적 연역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매우 특징적인 것은, 페렐만이 규범충돌(들)과 흠결(들)을 (그것들은 ‘언뜻 보기에’ 그렇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는 것이고, 이로써 법관은 그에 의해 옳은 것으로 여겨진 판결을, 이미 유효한 법률에서 보다 상세하게 주시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나아가 “그렇게 하는 방법으로, 그는 자신의 결론을 법문과 연결하여 정당화해야만 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로써 그는 자기 스스로 이러한 허구를 이용한 것이다. 물론 그는 “이러한 이유제시(motivation)는 구속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하게 예증(설명)적인 추론(raisonnement purement démonstratif)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의 논증(argumentation)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첨언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증'은 논리적인 연역과는 무언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것은 이 논증이 단순한 연산이 아니라, 이 논증 혹은 저 논증의 힘의 평가이기 때문에 법관의 자유와 독립은 (사법)정의의 집행(l'administration de la justice)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를 구성한다.” 법관의 자유와 독립성은 판결(사법)의 본질적 요소이다. 하지만 논리적인 추론(raisonnement) 내에서는 인식하는 주체의 어떠한 자유도 독립성도 없으며, 여기서 유효한 규칙들에 대한 엄한 속박이 지배한다.」(2편 346-347쪽) |
Ⅲ. 요약
결론적으로, 일마 타멜로가 적절히 지적했듯(Ilmar Tammelo, “Sketch for a Symbolic Juristic Logic”, Journal of Legal Education, vol. 8, 1955, S. 300.), “법적 논리학은, … 법적 논증(추론)에 사용되는 형식논리학이다. 그것은 특별한 분과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고, 형식논리학의 특수한 적용의 하나인 것이다.” 하나의 특별한 '법적 논리학' 같은 것은 없다(1편 509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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