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켈젠(김성룡 역), 규범의 일반이론, 아카넷, 2016
Hans Kelsen, Allgemeine Theorie der Normen (1979)
제34장 효력의 조건
제재의 목적은 규범질서가 실제로 작동하도록 보장하는 데 있다. 규범질서가 실효적이라는 것은 규범이 실제로 준수되고, 준수되지 않는 경우에는 제재가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재규범은 규범준수를 유도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규범을 위반했을 때 발생하는 불이익을 피하려는 동기, 또는 규범을 준수했을 때 얻는 이익에 대한 기대가 규범준수의 동기가 된다.
제재규범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규범에 맞게 행동한다. 특정 행위를 명령하는 규범의 실효성은 그러한 제재규범의 실효성에 의존한다. 제재규범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행위규범 역시 실효성을 잃게 된다.
「제재는, 하나의 (규범적) 질서의 실효성·효력(Wirksamkeit)을 보장하기 위해서, 그 규범적 질서에 의해서 규정된다. 하나의 규범질서의 효력은―통상적인 견해에 따를 때―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요구하는 그 규범들이 실제로 준수된다는 것에, 준수되지 않는 경우에는 (그 규범이) 적용된다는 것에 있다. 만약 하나의 규범질서가 제재를 규정하면 규범침해사례를 위해 규정된 해악을 피하고 규범준수의 경우를 위해 규정된 행복(Wohl)을 얻으려는 바람이 규범에 합치되는 행위의 동인이라는 것이 전제된다. 법규범의 경우에는―우리가 2차규범과 1차규범을 구별하는 한―2차규범(도덕규범과 달리 법규범의 경우에는 제재규범이 1차규범이다)의 침해사례를 위해 1차규범에서 정해진 해악―형벌 혹은 민사제재―을 피하려는 바람이 관건이 된다. 하나의 특정 행위를 요구(명령)하는 규범의 실효성·효력은 따라서 그 제재를 규정하는 1차규범의 효력에 의존한다.」(1편 272-273쪽)
그러나 규범준수의 동기가 반드시 제재에 대한 두려움일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규범을 다양한 이유로 준수할 수 있다. 도덕적 확신, 관습, 사회적 압력 등 여러 요인이 규범준수의 동기가 될 수 있다. 또한 규범 준수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실제로 확인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규범이 실제로 준수되었는지 여부이다. 어떤 동기에서 행동했든 규범에 부합하는 행동이 이루어졌다면 그 규범은 준수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규범의 실효성은 사람들의 심리적 동기를 분석하는 문제라기보다, 규범에 부합하는 행위가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여부와 관련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의 규범을 따르거나 혹은 하나의 규범을 적용하는 동기는―준수하지 않거나 적용하지 않는 경우를 위해 규정된 해악을 피하고, 혹은 준수하는 경우를 위해 규정된 행복(Wohl)을 얻는 것―두려움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규범들은 아주 다른 동기로부터 준수될 수도 있고 적용될 수도 있다. 그리고 사실상의 동기들은 많은 경우에 전혀 확정될 수가 없다. 사실상 하나의 규범은, 어떠한 동기로―그 규범의 준수 혹은 적용을 보여주는―사실상의 행위가 이루어졌는지와 무관하게, 준수된 것으로 혹은 적용된 것으로 간주된다.」(273-274쪽)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은 그 규범이 항상 준수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규범이 대부분의 경우 준수되고 적용된다면 그것은 실효적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어떤 규범이 항상 예외 없이 준수된다면, 그것은 규범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 필연성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어떤 규범이 결코 준수될 수 없는 행위를 요구한다면, 그러한 규범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규범은 인간이 실제로 위반할 수도 있고 준수할 수도 있는 행위를 대상으로 해야 하며, 규범 준수는 통계적으로 ‘대체로’ 이루어지는 정도면 충분하다.
「나아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의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은 그 규범이 항상, 그리고 예외 없이 준수되고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그 규범이 대부분의 경우에(im großen und ganzen) 준수되고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물론 준수되지 않고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은 당연히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만약 그러한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일어나야만 하는 것이 자연필연적으로 항상, 그리고 예외 없이 필히 일어나야만 한다면), 이러한 행위를 당위된 것으로 규정하는 규범은 불필요한 (과잉의) 것이기 때문이다.」(1편 274쪽)
실효성은 규범이 실제로 준수되거나 적용되는 사실적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효력은 규범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의미를 의미한다. 이 둘은 존재와 당위의 차이에 대응한다. 실효성은 사실의 영역에 속하고, 효력은 규범의 영역에 속한다. 전통적인 법학과 윤리학은 이 둘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지만, 양자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효성과 효력이 서로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어떤 규범이 전혀 실효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결국 그 규범은 효력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실효성은 효력의 조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규범의 실효성(Wirksamkeit)은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 사실상 준수되고, 준수되지 않는 경우에는 대부분의 경우 적용된다는 것에 있지만 그 규범의 효력(타당성; Geltung)은 그것이 준수되고 준수되지 않는 경우에는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에 있기 때문에 존재에서 당위와 같이 효력(타당성)은 실효성으로부터 구별되어야만 한다. 양자를 혼합하는 것, 효력(타당성)을 실효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전통적 법학과 윤리학에서 너무나 잦은 일이다. 효력과 실효성은 상호 완전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양자 사이에는 하나의 중요한 관계가 존재한다. 실효성은, 만약 하나의 개별규범과 그 전체의 규범질서가 그들의 실효성을 혹은 그 실효성의 가능성을 잃는 경우, 그것(하나의 개별규범과 하나의 전체의 규범질서)이 그 효력을 잃게 되는 한, 유효하기를 멈추는 한, 실효성은 효력(타당성)의 조건이다.」(1편 274쪽)
| [미주 88] 규범은 일단 효력을 지니게 된 뒤에도 실효성을 상실할 수 있고, 이로써 효력을 잃게 된다. 가령 규범은 공포 직후 아직 실제로 적용되거나 준수되지 않았더라도 일단 효력을 지닌다. 그러나 이후 장기간 불준수되면 실효성을 잃어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개별 규범 단위에서 실효성은 효력의 발생조건이 아니라 그 효력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한 조건이다. 따라서 ‘실효성이 없으면 효력이 없다’는 명제로부터 ‘실효성과 유효성은 동일하다’는 결론은 도출될 수 없다. 슈라이버(Rupert Schreiber, Logik des Rechts, Berlin-Göttingen-Heidelberg 1962, S. 81)는 나의 <순수법학>에서 주장된 ‘실효성은 효력의 조건이지만 효력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에 반대해서, “법규범의 효력은 그 법규범의 실효성과 동일하다.”라고 주장한다. 나의 이론에 반대하는 그의 논거는 “만약 하나의 법규범이 실효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또한 효력이 없는(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라는 문장으로부터는, 논리적인 이유들로 인해, 단지 만약 하나의 법규범이 유효하다면, 그것은 또한 실효적이라는 것(문장)만이 도출된다.”라는 것이다. “만약 하나의 법규범이 실효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또한 유효한(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나는 한번도 주장한 적이 없다. 나는 만약 하나의 유효한 법규범이 그의 실효성을 잃어버리거나, 전혀 실효적이지 못하다면, 그 법규범은 그 효력(Geltung)을 상실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나의 순수법학, 제2판 1960에서 명확하게 “하나의 법규범은 이미 그것이 실효적이기 전에, 즉 준수되거나 적용되기 전에 효력을 발생한다; 한 법원이, 그 법이 공포되고 난 직후에, 따라서 아직도 실효적이 되지 못한 법을 직접적으로 하나의 구체적인 사안에 적용한다면 그 법원은 하나의 유효한(효력 있는) 법을 적용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고, 슈라이버도 그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82쪽).」(2편 130-131쪽) |
예를 들어 어떤 법규범이 특정 동물을 사냥하는 행위를 금지했는데 그 동물이 멸종해버린 경우, 그 규범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효력을 잃게 된다. 또 어떤 법이 실제로 전혀 집행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desuetudo(불사용에 의한 폐지)라고 부른다.
「만약 인간들 사이에 어떠한 적대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나타나게 되면, 도덕규범은 따라서 준수되지도 적용되지도 않을 수 있으며, 그 도덕규범은 또한 그 효력을 잃게 된다. 만약 하나의 법규범이 특정한 종의 동물을 죽이는 행위를 그에 대한 제재로서 형벌을 결합하여 금지하는 경우에, 만약 이러한 동물의 종이 멸종해버리고, 따라서 이러한 법규범의 준수도 이 법규범의 적용도 가능하지 않게 된다면, 그 규범은 그 효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알코올 음료를 판매하는 자는 구금형에 처해져야만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알코올 음료의 판매를 금지하는 하나의 일반적인 법규범은, 만약 그 규범이 수범자들의 저항으로 인해 준수되지 않는다는 것이 확정되고, 만약 준수되지 않는 경우 관할기관으로부터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 효력을 잃게 될 것이다.」(1편 275쪽)
규범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i) 규범이 실제로 창설되어야 한다. 즉 인간의 행위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관습을 통해 형성되어야 한다(정립행위). 둘째 ii) 그 규범이 일정한 실효성을 가져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이 결합될 때 당위는 비로소 효력있는 규범, 그리하여 ‘실정적 규범’이 된다. 즉 법이나 도덕의 실정성은 규범이 인간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사실과, 실제 사회에서 일정한 실효성을 가진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실효성(혹은 실효성의 가능성)은 하지만 유일한 조건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다른 존재사실(seins-Tatsache)도, 하나의 규범의 창설(Setzung)이라는 존재사실도, 하나의 규범의 효력(타당)조건이다. 의식적인 창설의 방법으로 혹은 관습(법)의 방법으로 설정된 규범만이 도덕 혹은 법의 실정적(positiv) 규범으로 유효할 수 있다.](1편 277쪽)
제36장 장소적·시간적 효력(범위)
인간의 행위와 그 조건, 그리고 그 효과는 모두 공간과 시간 안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그러한 행위를 규율하는 규범 역시 언제나 특정한 공간과 특정한 시간에 관련된다. 규범이 효력을 가진다는 말은 단순히 규범이 유효하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장소에서 어떤 시점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유효하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규범의 효력은 필연적으로 공간적·시간적 효력을 가진다.
이러한 공간적·시간적 관련성은 규범의 효력범위와 관련된다. 효력범위는 규범의 외적 부가요소가 아니라 규범내용의 한 구성요소이다. 규범이 무엇을 규정하는가를 말하려면, 그 규정이 어느 장소와 어느 시점의 사건들에 미치는가도 함께 말해야 한다. 따라서 장소적 효력범위와 시간적 효력범위는 규범의 내용에 내재한 요소이며, 경우에 따라 상위규범에 의해 미리 정해질 수도 있다.
「인간행위 및 그것의 조건들과 효력들은 공간과 시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시간과 마찬가지로 규범을 통해 정해진 구성요건들이 그 안에서 생겨나는 공간은 규범의 내용에서 정해져 있어야만 한다.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규범들 일반의 효력은―그리고 물론 특히 법규범들의 효력은―이 규범들이 공간·시간적 사건(경과)들을 그 내용으로 하는 한 공간·시간적 효력이다. 규범이 효력이 있다(glit)라는 것은 항상, 그 규범이 어느 하나의 공간과 어느 한 시점에 효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규범은 단지 어딘가에서만, 그리고 어느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에 연관된 것임을 뜻한다.」(1편 283쪽)
「규범은 단지 하나의 특정한, 달리 말해 그 규범에 의해 혹은 다른 보다 높은 규범에 의해 정해진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 유효할 수 있다. 즉 하나의 특정한 장소와 하나의 특정한 시간 안에서의 사건들을 규율할 수 있는 것이다. 제한된 공간적 효력범위에 대한 가장 특징적인 예는 국가의 한 요소로, 달리 말해 ‘국가영토(Staats-Gebiet)’로 기술되는 국가 법질서의 규범들의 효력범위이다. 하지만 그 규범은 또한 그 규범들의 의미에 따라 어느 곳에서나 항상 유효할 수도 있다.」(1편 283-284쪽)
규범의 효력범위는 제한될 수도 있고 제한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국가법질서는 보통 특정한 영토 안에서 효력을 가지므로 장소적 효력범위가 제한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규범은 특정한 기간에만 효력을 가질 수 있으므로 시간적 효력범위도 제한될 수 있다. 반대로 상위규범이 특별히 제한하지 않고, 해당 규범 자체도 특정한 장소나 시간에 대한 제한을 두지 않는 경우에는 그 규범의 효력범위는 무제한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서 ‘무제한’은 규범이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타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켈젠이 강조하듯이, 그것은 단지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점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 규범은 어디서나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에 관계될 수 있다는 뜻이지, 공간과 시간 자체를 벗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어떠한 다른 규범, 상위의 규범이 그 규범의 장소적 혹은 시간적 효력범위를 제한하지 않고, 그 규범도 어떠한 특별한 장소와 시간규정을 함유하고 있지 않는 경우의, 그 규범의 의미이다. 그 규범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 없이 타당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특정한 공간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의 특정한 시간을 위해서 타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규범의 장소적, 그리고 시간적인 효력범위는 제한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범위는 그 규범의 내용의 한 요소이고, 이러한 내용은 우리가 뒤에서 보게 되듯이, 하나의 다른 보다 상위의 규범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사전에 정해질 수 있는 것이다.」(1편 284쪽)
일반적으로 규범은 그것이 창설된 이후의 행위, 즉 장래의 행위에 대해 적용된다. 그러나 규범은 예외적으로 과거의 행위에도 관계될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소급효이다. 법규범의 경우 소급효란 규범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점의 행위를 사후적으로 범죄로 평가하고, 그에 대해 제재를 정당화하는 경우를 말한다.
소급효는 단지 과거의 행위를 사후적으로 범죄화하는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과거에 행해진 강제행위를 사후적으로 제재로 정당화하는 경우에도 소급효가 성립할 수 있다. 즉 과거에는 단지 범죄였던 행위를, 사후에 규범을 통해 제재로 재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규범은 사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의 규범적 의미를 사후적으로 변경한다.
「하나의 실정 규범의 시간적 효력범위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규범의 창설 이후의 시간과 이전의 시간을 구분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규범들은 단지 장래의 행위, 즉 규범의 창설 이후에 일어나는 행위에 관련된 것이다. 물론 그 규범들은 또한 과거의 것에, 즉 규범의 창설 이전에 일어난 하나의 행위에 연관될 수 있다. 그것은, 법규범들이 문제되는 한, 일반적으로 승인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의 법규범의 ‘소급하는 효력(소급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행위의 조건에 하나의 제재를 그 효과로 결합하는 하나의 일반규범이, 그 조건을 구성하는 행위가 그 법규범의 창설 이전에 일어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제재가 집행되어야만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예를 들어 그 행위가 형벌을 구성하는 법규범이 아직도 만들어지기 전이었고, 따라서 그 행위가 사후적으로, 즉 소급적으로 범죄로 평가되어, 사람들이 그 행위로 인해 처벌되어야만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1편 284-285쪽)
「또한 하나의 법규범은 소급효를 가지고 그것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공포된 일반 법규범의 효력을 폐지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이러한 법규범의 효력은 장래에 폐지되는 것만 아니라(즉 단지 미래에만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전 법규범하에서는 제재로서 집행된 강제행위들이 형벌 혹은 민사제재로서의 그 성격을 사후적으로 벗고, 그것의 조건이 된 인간 행위들의 구성요건들은 범죄로서의 성격을 사후적으로 벗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소급효를 가진, 예를 들면 혁명적으로 권력을 갖게 된 정부의 법률을 통해 이전 정부에 의해 공포된 법률(이에 따르면 혁명적인 당파에 속하는 개인들이 범한 일정 행위들이 정치적인 범죄로 처벌되는 법률)의 효력이 소급적으로 폐지될 수 있다. 사실, 일어난 것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될 수 없지만, 이미 일어난 것에 대한 규범적인 의미가, 해석되어야 할 사건 이후에 만들어진 규범들을 근거로, 사후적으로 변경될 수 있는 것이다.」(1편 286쪽)
제37장 인적·물적 효력범위
규범은 전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의 특정한 행위를 규정한다. 인간은 규범의 직접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 주체로만 문제된다. 규범의 인적 효력범위란 전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지배범위가 아니라, 어떤 인간들의 어떤 행위들이 규범에 의해 포착되는가의 범위를 뜻한다.
「장소(공간)적인 효력범위와 시간적인 효력범위 외에 우리는 또한 규범의 인적 효력범위와 물적 효력범위를 구별할 수 있다. 규범들을 통해 규율되는 행위는 인간의 행위, 인간들의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의 규범에서 정해진 저마다의 행위에는 하나의 인적, 그리고 물적 요소, (즉)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해야만 하는 인간, 그리고 그가 어떠한 조건하에서 어떻게 행위해야만 하는지 하는 방법과 유형이 구별될 수 있다. 두 요소들은 상호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규범이 하나의 특정 행위를 명령하고, 적극적으로 허용하거나 수권하는 한―하나의 규범에 의해 포착되는, 그 규범에 종속되는 것은, 그 전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항상 단지 인간의 하나의 특정한 행위라는 점이다.」(1편 288쪽)
「하나의 도덕질서는 모든 인간들에 대해 유효하다는 주장으로 나타날 수 있다; 즉 이러한 (도덕)질서의 규범들에 의해 정해진 행위는 저마다의 인간의 행위이지, 그 질서에 의해 정해진, (특정한 자격이 있다고) 평가된 인간들의 행위는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관행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질서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고 말한다고 표현한다. 하나의 국가 법질서의 규범들에 의해 정해진 행위는 단지 그 국가의 영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이거나, 혹은―(그 영토가 아니라) 다른 어느 곳이라면―국가시민인 인간들의 행위이다. 우리는, 국가의 법질서는 단지 이런 식으로 정해진 인간의 행위만을 규율한다고 말한다. 단지 이 인간들만이 국가의 법질서에 종속된다라고, 즉 인적 효력범위는 이러한 인간들에게 제한된다고 말한다.」(1편 288쪽)
물적 효력범위는 인간행위의 내용적 방향에 관한 것이다. 규범은 언제나 인간행위를 규율하지만, 그 행위는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군사적, 가족적 등 서로 다른 방향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규범이 경제를 규율한다거나 종교를 규율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실 경제적 성격이나 종교적 성격을 띤 인간행위를 규율한다는 뜻이다. 즉 규범이 직접 규율하는 것은 사물 자체나 객관적 영역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나 인간행위이며, 다만 그 행위가 특정 사물이나 특정 영역과 관련될 뿐이다. 이는 연방국가에서처럼 하나의 전체 법질서가 여러 부분 법질서로 나뉘어 물적 효력범위를 분할하는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우리가 경제적인, 종교적인, 정치적인 행위 등등으로 규정된 인간 행위의 다양한 방향들을 주시하는 한, 우리는 하나의 물적 효력범위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경제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을 우리는 그 규범이 경제를 규율한다고 말하고, 종교적 활동을 정하는 규범에 대해서는 그 규범이 종교를 규율한다는 등으로 말한다. 사람들은 규율(Regelung)의 다양한 대상들에 대해 언급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규범에 의해 정해진 행위들의 다양한 방향들을 의미한다. 하나의 질서(Ordnung)의 규범들이 규율하는 것은 항상 인간의 행위이다. 단지 인간의 행위만이 규율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행위와는 다른 구성요건들은 단지 인간의 행위와 관련해서만, 이미 지적했듯이, 단지 인간의 행위의 조건 혹은 효과로서, 규범들의 내용일 수 있다.」(1편 288-289쪽)
하나의 전체 법질서가 그 내부에서 여러 부분 법질서들로 나뉘어 각자의 물적 효력범위를 가질 수는 있지만, 전체 법질서 자체의 물적 효력범위는 무제한적이다. 전체 법질서는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인간의 전체 행위를 어떤 방식으로든 규율하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는 명시적으로 규정될 수 있고, 어떤 행위는 금지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경우를 합치면 인간의 전체 행위가 규범적 질서 안에 포섭된다(법질서의 폐쇄성). 전체 법질서는 부분 법질서들의 물적 효력범위를 배분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인간행위 전반을 규율할 가능성을 갖는 완결적 질서로 이해된다.
「물적 효력범위 개념은 예를 들어 하나의 전체적인 법질서가―예를 들어 연방국가의 경우에서와 같이―다수의 부분 법질서들로 나누어지고, 그것들의 효력범위가 그것에 의해 규율될 대상들과 관련하여 상호 한계지워질 때 사용된다. 그것은 예를 들면 연방을 구성하는 개별주의 법질서들은 단지 전적으로 특정한, 헌법에서 나열된 대상들만을 규율할 수 있거나, 혹은 단지 이러한 대상들의 규율이 연방을 구성하는 개별국가들(Gliedstaat)의 권한(관할)에 속하고, 모든 다른 대상들의 규율은 상위국가(Oberstaat)의 법질서(그것 또한 단지 하나의 부분법질서이다)에 유보되어 있을 때, 혹은 다른 말로 하면, 상위국가의 권한에 속할 때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의 전체 법질서의 사물적 효력범위는, 그러한 법질서가 그 본질상, 하나의 적극적 의미 혹은 소극적 의미에서, 그에 복종하는 인간의 그 전체 행위를 규율하는 한 항상 무제한적이다.」(1편 290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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