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켈젠(김성룡 역), 규범의 일반이론, 아카넷, 2016
Hans Kelsen, Allgemeine Theorie der Normen (1979)
제29장 규범충돌
규범충돌은 두 규범이 동일한 상황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당위를 규정할 때 발생한다. 규범은 특정 행위를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당위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서로 다른 규범이 동일한 행위에 대해 상반된 요구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행위자는 두 규범을 동시에 준수할 수 없게 되며, 이때 규범충돌이 발생한다. 규범충돌은 결코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규범체계에서 충분히 그리고 자주 발생할 수 있는 일상적 현상이다. 특히 법질서에서는 입법의 시간적 변화, 상위규범과 하위규범의 관계, 또는 다양한 규범의 중첩 때문에 서로 다른 규범이 동일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만약 하나의 규범이 당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다른 하나의 규범이 당위로 규정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의 규범의 준수 혹은 적용은 필연적으로 혹은 아마도 다른 규범의 침해를 함유하는 경우, 두 개의 규범이 충돌하는 것이다. 충돌은 양면(쌍방)적일 수도 있고, 일면(일방)적일 수도 있다. 만약 양 규범 중 하나의 준수나 적용이 다른 규범의 침해를 필수적으로 혹은 가능태로 함유하고 있다면 양면적 충돌이고, 만약 양 규범 중 하나의 준수 혹은 적용만이 다른 규범의 침해를 포함하고 있다면 일면적 충돌이다. 그 충돌은 전체적인 충돌일 수도 있고 부분적인 충돌일 수도 있다. 하나의 규범이 하나의 특정 행위를 명령하고, 다른 하나의 규범이 동시에 이러한 행위를 금지하는 경우에는 그 충돌은 전체적 충돌이다. 만약 그 하나의 규범의 내용이 단지 부분적으로 다른 하나의 규범의 내용과 상이한 경우에는 부분적 충돌이다.」(1편 246쪽)
양면적 충돌의 전형적 형태는 두 규범이 동일한 행위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요구를 하는 경우, 즉 전체적 충돌이다. 이러한 경우 어느 규범을 따르더라도 다른 규범은 반드시 침해된다. 이와 같은 충돌은 규범의 내용이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경우에 발생하는 것으로 도덕규범과 법규범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특히 처벌 여부와 관련된 규범이나 특정 행위를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규범에서 이러한 충돌이 발생하기 쉽다.
「필연적인 규범충돌의 예들은,
규범(1):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규범(2): 너의 원수를 사랑하지 말고, 증오하라!
규범(1)을 따르면 필연적으로 규범(2)를 침해하고, 규범(2)를 따르면 필연적으로 규범(1)을 침해한다.
규범(1): 중혼은 처벌되어야만 한다.
규범(2): 중혼은 처벌되어서는 안 된다.
규범(1)의 적용은 필연적으로 규범(2)의 침해이다. 규범(2)의 적용은 필연적으로 규범(1)을 침해한다.
양 사례에서 규범충돌은 전체적이다.」(1편 246쪽)
모든 양면적 충돌이 완전한 상호 모순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규범체계에서는 두 규범이 동일한 행위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의 제재나 조건을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 두 규범은 완전히 상반되지는 않지만 동일한 상황에서 동시에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충돌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동일한 범죄에 대해 하나의 규범은 사형을 규정하고 다른 규범은 구금형을 규정하는 경우, 두 규범은 동일한 행위에 대해 서로 다른 법적 결과를 요구한다. 이 경우 충돌은 존재하지만 그 범위는 특정한 부분에 한정되므로 부분적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규범(1): 모살은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
규범(2): 모살은 구금형으로 처벌되어야 한다.
이 두 규범들 중 각 하나의 적용은 필연적으로 다른 하나의 침해가 된다. 그 충돌은 하지만 단지 부분적인 것이다.」(1편 246쪽)
규범충돌은 항상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 조건에서만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모든 인간은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일반 규범과 ‘의사는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속여야 한다’는 특수 규범이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의사가 실제로 환자를 속인 경우에는 두 규범이 충돌하게 되지만, 속임이 발생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충돌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충돌은 조건부로 발생하는 가능적 충돌이며, 규범의 적용상황에 따라 충돌 여부가 결정된다.
「단지 가능태로서의 가능한 규범충돌들의 예로는:
규범(1): 모든 인간들은 속이지 않아야 한다.
규범(2): 만약 의사들은 그들의 환자를 보호할 수 있다면 속여야만 한다.
규범(2)를 따르는 것은 필연적으로 규범(1)을 침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규범(1)을 따르는 것은 단지 규범(2)를 침해할 가능성만이 있는 것이다. 그 충돌은 양면적이지만 단지 부분적이고 단지 한 규범의 측면에서만 필연적인 것이다.」(1편 246-247쪽)
규범충돌과 논리적 모순은 구별되어야 한다. 논리적 모순은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 없는 경우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A이다’와 ‘A가 아니다’는 동시에 참일 수 없기 때문에 그중 하나는 반드시 거짓이다. 그러나 규범은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요구이기 때문에 서로 상반된 규범이 동시에 유효할 수 있다. 따라서 규범충돌이 발생한다고 해서 그중 하나의 규범이 논리적으로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규범충돌은 ‘의무의 충돌’이라는 이름하에 법에서와 같이 도덕에서도 하나의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 규범충돌은 충돌하는 양 규범들이 유효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양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들이 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규범충돌은 논리적인 모순이 아니며, 전혀 논리적인 모순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개의 언명 사이의 논리적인 모순이 있는 경우는 양 진술의 하나가 애초부터 거짓이다.」(1편 248쪽)
규범충돌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는 규범적 힘의 충돌이다. 규범은 특정한 행위를 요구하거나 금지하는 규범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동일한 상황에서 서로 다른 방향의 행위를 요구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규범들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작용하는 힘과 유사한 관계에 놓인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은 그 규범의 특수한 실존이기 때문에 하나의 규범충돌은 논리적인 모순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동일한 지점으로 향하는 상호 반대되는 방향에서 작용하는 힘들과 비교될 수 있다. 규범충돌은 바람직하지 않으나 가능하고 결코 드문 경우가 아니다.」(1편 248-249쪽)
규범충돌의 해소는 논리적 필연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규범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하나의 규범충돌이 발생했을 때 어느 규범이 효력을 상실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논리적 판단이 아니라 또 다른 규범의 기능이다. 가령 규범충돌상황에서 둘 중 하나를 제거하는 폐지(derogation)는, 충돌하는 두 규범 자체에서가 아니라 제3의 규범에 의한 작용이다.
「폐지를 통한 규범충돌의 해소가 일어날 수 있으나,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폐지는 단지 그것이 규범을 설정하는 권위자에 의해 규정될 때만 일어난다. 규범충돌이 논리적인 모순이 아니듯이 그 충돌을 해소하는 폐지도 전혀 논리적인 원리가 아니며, 하나의 실정 도덕규범, 특히 하나의 실정 법규범의 기능이며, 보다 정확히 말하면, 충돌하는 두 개의 규범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제3의 규범, 즉 규범충돌의 경우에 그 양 규범들 중의 하나 혹은 다른 하나, 혹은 양 규범이 그 효력을 잃는다고 규정하는 제3의 규범의 기능이다.」(1편 249쪽)
규범충돌은 다양한 규범단계에서 발생할 수 있다. 동일한 규범단계에 속하는 두 규범 사이에서도 충돌이 발생할 수 있으며, 상위규범과 하위규범 사이에서도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법질서에서는 입법의 시간적 변화로 인해 동일한 규범 단계에서 서로 상반되는 규범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입법자가 특정 행위를 명령하는 규범을 제정한 후, 나중에 그 행위를 금지하는 규범을 다시 제정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어떤 규범이 효력을 유지할 것인지는 규범체계 내부의 규정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헌법과 법률 사이에서도 충돌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경우 위헌법률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충돌은 동일한 단계(지위)의 두 개의 규범 사이 혹은 상위의 한 규범과 하위의 한 규범 사이에도 발생할 수 있고, 이때는 양 규범의 설정이 시간적으로 달라 그중 하나의 규범은 이전에 창설된 것이고, 다른 규범은 나중에 설정된 것이다. 규범을 설정하는 권위(자), 예를 들면 입법자는 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규정하는 하나의 규범을 특정 시점에 창설할 수 있고, 그 이후의 한 시점에 이 행위의 부작위를 규정하는 규범을 창설할 수 있다. 한 국가의 헌법은 인간들은 그의 종교나 인종을 고려함이 없이 입법자에 의해 동일하게 취급되어야만 한다고 규정할 수 있지만, 그 입법자는 나중에 특정 의무를 단지 특정한 종교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만 부과하거나, 특정한 권리를 부여하게 되는 법을 공포할 수 있다.」(1편 249-250쪽)
위헌법률이 반드시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법질서에 따라 위헌으로 보이는 법률도 일정한 절차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유효할 수 있다. 규범의 효력은 그것이 정의로운지 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규범체계 내부의 규정에 의해 결정된다. 위헌법률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그 법률이 즉시 효력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며, 헌법에서 규정된 특정 절차에 따라 폐지될 때 비로소 효력이 상실된다. 위헌은 무효가 아니라 폐지가능성이다.
「이 경우에는 실정법에 따르면 이른바 ‘위헌적 법률’이 그럼에도 유효할 수 있지만, 그 효력은 하나의 특수한 헌법에서 예정된 절차에 의해, 예를 들어 특수한 법원의 판결을 통해 폐지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제 규범충돌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문제되는 법률이 유효하다면 그것은 또한 헌법합치적인 것이고, 달리 말해 헌법이 입법자에게 문제되는 법률을 공포하는 권한을 주었으며 단지 이 법률을 하나의 특정한 절차에서 폐지하는 가능성만을 예견한 것이기 때문이다.」(1편 250쪽)
전통법학는 ‘후법은 전법을 폐지한다(lex posterior derogat priori)’는 원칙을 마치 논리적 법칙처럼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 [미주 82] 전통법학에서는 ‘후법은 전법을 폐지한다(lex posterior derogat priori)’는 원칙은 단순한 실정법규칙이 아니라 법질서 자체에 내재한. 입법자가 변경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논리적 원리로 간주해 왔다. 가령 무어(J. Moor)와 아이젤레(Fr. Eisele)는 입법자의 의사가 시간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lex posterior 원칙의 논리적 정당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새로운 의사는 이전의 의사를 논리적으로 대체한다.’ 「이러한 원칙(Grundsatz)이 하나의 논리적 법칙이라는 것은 전통적 법학에서 다양하게 주장되어왔다. 예를 들어 무어(Julius Moor, “Das Logische im Recht”, Internationale Zeitschrift für Theorie des Rechts, Bd. II, 1927/1928, S. 165)가 그렇게 말했다: “‘사후법은 사전법을 폐지한다.’라는 원칙은 입법자를 통해서 변경될 수 있거나 혹은 무시될 수 있는 그러한 실정법적 규정이 아니라, 법생성의 논리적인 한계이다.” 아이젤레(Fr. Eisele, “Unverbindlicher Gesetzesinhalt”, Archiv für die Civilistische Praxis, 69. Bd., 1886, S. 275ff.)는 283쪽에서: 의지(의사)는, “또한 공포된 의사도 … 자기 스스로에 대해 법적으로 자유이고, 따라서 변경 가능한 것이다.” “입법자의 의사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 자유로운 것임은 사전법은 사후법을 폐지한다는 문장(원칙)―이것은 또한 법원칙(Rechtssatz)이 아니고, 법적 진실(사실; Rechtswahrheit)이다―에서 사실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은 아니지만, 그 전제로서 그와 동일한 것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아돌프 메르클(Adolf Merkl)은 자신의 Allgemeines Verwaltungsrecht, 1927, S. 211에서 “‘사후법은 사전법을 폐지한다(lex posterior dergat priori)’는 원칙은 단지 실정법적 규정 (Satzung)의 힘으로만 유효한 것이고,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해되는, 법적 공리(Axiom)로서 유효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2편 121쪽) |
이는 잘못된 것이다. 후법이 전법을 폐지한다는 원칙은 논리적 필연성이 아니라 실정법적 규범에 의해 인정되는 원칙일 뿐이다. 즉 어떤 법질서가 이 원칙을 채택하고 있을 때에만 적용되는 규범적 규칙이다. 만약 법질서가 다른 방식으로 규정한다면, 오히려 이전 규범이 나중 규범을 폐지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부분적인) 폐지의 본질에 대한 통찰은, 후법은 전법을 폐지한다는 원칙에서 표현되어 있는 로마법학에 의해 전수된 이론을 통해 희미해져 버렸다. 이 원칙은 오해를 초래한다. 무엇보다 그 원칙은 마치 폐지가 충돌하는 양 규범의 하나의 기능인 듯한 인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옳지 않다. 문제되는 근본원칙은 또한 그 원칙이 (폐지가 전혀 논리적인 법칙이 아니고 하나의 실정법적 원칙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이 실정법적으로 규범화된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규범충돌의 모든 사례들에서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바로 그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1편 251쪽)
또한 법질서는 후법에 의해 전법의 효력이 상실되는 경우뿐 아니라 그 두 규범이 모두 효력을 상실하는 경우도 예정할 수 있다. 규범충돌의 해결방식은 각 법질서가 채택하고 있는 규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규범충돌의 경우에는 이전의 규범이 아니라 사후 규범이 그 효력을 상실할 수 있다 … 는 점이 논구되었다. 또한 폐지의 방법으로 충돌하는 양 규범이 효력을 상실하는 사례, 그 양자의 효력을 상호 폐지하는 사례는 무시되었다.」(1편 251-252쪽)
규범충돌을 해결하는 원칙들은 논리적 원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실정규범이다. 실제 법질서에서는 이러한 원칙들이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러나 입법자나 법적용 기관이 이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해석을 통해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에도 그 원칙들은 여전히 실정법적 규범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중요한 점은 법학이나 논리학이 스스로 규범충돌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규범의 효력은 언제나 규범체계 내부에서 정해진 규칙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의 규범충돌을 해소하는 폐지는 특히 후법은 전법을 폐지한다는 원칙에서 표현되는 근본원칙은 논리적인 원칙이 아니라 단지 실정법적 원칙 … 이다. … 입법자가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거나 혹은 묵시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이를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 세 가지 유형의 규범의 충돌을 해소하는 것이 법적용기관에 의해 해석원칙들로 일반적으로 적용되어 그 효력이 자명한 것으로―또한 입법자로부터도―간주되고, 따라서 묵시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전제되는 것도 당연히 가능한 것이고, 헌법입법자가 ‘나중에’ 입법자로부터 만들어진, 헌법과 충돌하는 법률은 그 효력을 잃는다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도 전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입법자가 하나의 규범을 반들 때 그에 의해 이전에 만들어진, 사후에 만들어진 규범과 충돌하는, 규범은 그 효력을 잃는다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도 전적으로 가능하며, 만약 그에 의해 공포된 법률에서 두 개의 규범이 상호 충돌하고 그가 이러한 경우를 위해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았다면, 규범을 적용하는 기관들이 두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 혹은 두 규범이 그들의 효력을 상실한다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라는 것도 전적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바로 이러한 폐지원리들이 실정 법규범들이다. 하지만 법이론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이러한 폐지원리들이 전혀 논리적인 원칙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것이 명시적으로 규정되거나 묵시적으로 규정된 것으로 전제되지 않는다면, 규범충돌은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법학도 마찬가지로―예를 들어 해석을 통해서―존재하는 규범충돌을 해소할 능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며, 달리 말해 규범들에 효력을 부여하는 것과 같이 만들어진 규범의 효력을 폐지할 능력도 없다는 점이다.」(1편 253쪽)
| [미주 83] 규범은 진술이 아니라 당위적 의미를 가지는 규범적 명령이기 때문에, 두 규범 사이의 관계를 논리적 참·거짓의 문제로 이해할 수는 없다. 후법이 전법을 폐지한다는 원칙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법질서 내부에서 설정된 규범일 뿐이다. 규범의 효력은 언제나 권위 있는 규범창설행위에 의존하며, 규범의 폐지도 마찬가지로 규범적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 lex posterior 원칙은 법논리의 결과가 아니라 법질서가 채택한 실정규범일 뿐이다. 「물론 하나의 규범충돌의 해소는 법적용기관 측에서의 해석을 통해서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두 개의 일반규범들 사이에 하나의 충돌이 있고 한 법원이 그 두 개의 규범 중 하나를 적용한다면, 즉 그 법원이 하나의 구체적 사례를 두 개의 충돌하는 규범 중의 하나에 부합하는 하나의 개별규범에서 판결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판결이 기판력을 가지면, 이 사례는 더 이상 충돌하는 두 개의 일반규범 중 다른 규범에 부합하는 개별규범을 통해 결정될 수가 없다. 이러한 일반규범을 다른 규범에 따라 결정된 사례에 적용하는 것은 배제된다. 하지만 일반규범들의 영역에서 충돌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2편 122쪽) 슈라이버는 법규범 사이의 모순이 존재할 경우 이러한 규범들은 법적으로 무효가 된다고 주장한다. 즉 논리적 모순이 규범의 효력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규범의 효력을 논리적 진리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서로 충돌하는 규범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규범들이 자동적으로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특정한 실정규범이 그 규범의 효력을 폐지할 때만 규범의 효력이 상실된다. 「루페르트 슈라이버(Rupert Schreiber)는 Logik des Rechts, Berlin-Göttingen-Heidelberg 1962, S. 59에서, 법언어에서 모순들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87쪽에서, “법규범들 사이에 모순들이 생겨나면, 상호 모순관계에 있는 모든 규범들은 법적으로 무효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순에 가득 찬 규범들은 법적으로 효력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하나의 실정법규범이 상호 충돌하는 규범의 효력을 폐지하는 경우에만 옳은 말이다. 슈라이버는 또한, 그러한 충돌들은―혹은 그가 말했듯이, ‘모순들(Widersprüche)’은―단지 실정법적 규정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는 것임을 자인했다. 왜냐하면 그는 59쪽에서 “하지만 법언어에서는 모순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적정한 결정(geeignete Festsetzung)을 통해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한다.”라고 했고, 87쪽에서 “이러한 충돌사례를 위해 어떠한 규정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법질서의 상당한 부분들이 모순으로 인해 기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2편 122쪽) 논리학의 원리는 사고의 법칙을 다루지만, 법의 규범은 의지적 행위와 관련된다. 배중률이나 추론규칙과 같은 논리학의 원리는 진술의 참·거짓을 결정하는 규칙일 뿐, 법규범의 효력을 직접적으로 결정하는 규칙은 될 수 없다. 법의 영역에서 논리학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제한적이며, 규범의 효력 여부는 항상 법질서 내부의 규범적 결정에 의해 정해진다. 「이것은 배중률의 원칙과 추론의 규칙이 법의 규범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논리학의 원칙들은 사고법칙의 의미들에 관계하지만, 법의 규범들은 법기관의 의지적 행위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배중률의 원칙은 상호 모순되는 두 개의 진술들 중에서 단지 하나가 참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중 하나가 참이라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거짓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옳은 것은 단지 두 개의 규범이 논리적 모순이 아닌 충돌을 하면, 법률 혹은 판결이 폐기될 수 있다는 것뿐이다. 추론의 원칙은 만약 전제들이 참이고, 결론이 전제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 결론은 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옳은 것은 단지, 만약 하나의 법률 혹은 하나의 판결에 하나의 잘못된 추론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 법률 혹은 그 판결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뿐이다.」(2편 123-124쪽)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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