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켈젠(김성룡 역), 《규범의 일반이론》, 아카넷, 2016
Hans Kelsen, Allgemeine Theorie der Normen (1979)
제38장 규범들에 관한 진술(언명)
법규범(Rechts-Norm)은 법적 권위자가 창설한 규범이고, 법명제(Rechts-Satz)는 법학이 그것을 기술하는 문장이다. 통상 언어관용에서는 양자가 뒤섞여 사용되는 예가 많지만, 이 둘은 엄격히 구별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법과 법학, 규범과 규범서술이 끝없이 혼동되기 때문이다.
「법학은 법규범들에 관한 진술인 명제들을 함유하고 있다. (법학에 함유된) 명제들은 법규범들을 기술하고, 법규범들을 서술한다. 이 명제들은 그 자체가 어떠한 규범들이 아니고 규범들에 관한 언명이다.」(1편 299쪽)
「허용되지 않지만 늘상 만나게 되는 규범학과 그 인식의 대상인 규범들의 혼재, 윤리학과 도덕, 법학과 법의 혼재를 피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기여하는 규범과 하나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을 용어상 구별하기 위해, 독일의 법언어는 ‘법규범(Rechts-Norm)’과 ‘법명제(Rechts-Satz)’라는 두 개의 단어를 제공하고 있다. 나는, 두 개의 단어가 동의어로 사용되는 통상적인 언어사용에 의식적으로 거슬러, 법권위자로부터 창설된 규정들을 ‘법규범들(Rechts-Normen)’로, 법학에 의해 표현된, 그 법규범들을 기술하는 명제(문장)들을, ‘법명제들(Rechts-Sätze)’로 표현할 것을 제안했다.」(1편 301쪽)
이는 윤리학과 도덕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윤리학자는 도덕규범을 만들 수 없고 단지 이미 존재하는 도덕질서나 도덕규범을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윤리학의 당위문도 규정적 의미가 아니라 기술적 의미를 지닌다.
「학문으로서 윤리학은 무언가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에게 주어진 규범을 기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학자의 문장은 규범이 아니다. 학자로서의 윤리학자는, 마치 법학자가 법규범들을 창설할 권한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규범들을 설정할 역량이 없다. 윤리학자는, 마치 법학자가 주제넘게 법적 권위를 행사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듯이, 도덕적 권위를 행사할 권한은 없는 것이다.」(1편 302쪽)
당위는 실제로 행위를 지시하는 규범 속에서 사용될 수도 있고, 이미 존재하는 규범의 효력을 서술하는 문장 속에서 사용될 수도 있다. 전자를 ‘진정당위’, 후자를 ‘부진정당위’라고 부를 수 있다.
진정당위는 도덕적 권위자나 법적 권위자가 실제로 설정한 규범에 내재한 당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다른 사람의 행위를 규정하는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다. 반면 부진정당위는 학문이 어떤 규범이 유효하다고 기술할 때 사용하는 당위이다.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규범이 효력을 가진다고 말하는 진술의 한 요소이다.
「‘해야만 한다(당위; Sollen)’의 이중적 의미, 즉 규정적 의미와 기술적 의미라고 말하는 대신에 우리는 또한 ‘진정’당위와 ‘부진정’당위라고 말할 수도 있고, 전자로는 도덕적 권위 혹은 법적 권위에 의해 창설된 규범에서의 당위가, 후자로는 윤리학과 법학에서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에서의 당위가 표시된다.」(1편 302쪽)
‘사람들은 그 원수를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문장이 윤리학 속에 등장할 때, 그것은 예수의 계명이 직접 다시 발동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절도를 했다면 그는 구금형에 처해져야만 한다’라는 문장이 법학교과서에 적혀 있을 때, 그것은 교과서 저자가 새로운 법규범을 창설하는 것이 아니다. 두 경우 모두 그 문장은 어떤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 유효성을 기술하는 학문적 진술이다.
법학과 윤리학의 당위문은 일종의 2차적 언명이다. 그것들은 비록 ‘~해야만 한다’라는 형태를 취하더라도, 사실은 ‘~해야만 한다는 규범이 유효하다’는 관념을 압축한 기술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적인 도덕을 기술하는 윤리학에서 ‘사람들은 그 원수를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문장이 표현되거나, 하나의 실정 법질서를 기술하는 교과서에서 ‘한 인간이 절도를 했다면 그는 구금형에 처해져야만 한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면, 첫 번째의 경우는 ‘인간은 그들의 원수를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을,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에는 ‘만약 한 사람이 절취했다면 그는 구금형에 처해져야만 한다.’라는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1편 302-303쪽)
동일한 당위문이라도, 이처럼 따옴표 안에 들어가 인용되는 순간 그 규정적 힘은 정지된다. 따옴표 안의 문장은 규범 그 자체를 재현하지만, 따옴표 바깥의 말까지 포함하는 전체 문장은 더 이상 규범이 아니라 그 규범의 존재를 말하는 진술이다. 규범을 인용하는 문장은 그 자체로는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어떤 규범적 당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이상적 존재가 유효하다는 점을 진술할 뿐이다.
「따옴표 사이에 들어 있는 단어들에서 당위(해야만 한다)는 하나의 규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따옴표 사이에 넣는 것은 그 규범을 인용하는 전체의 문장으로부터 규정적인 의미를 배제하는 것이다. 이 규범들을 인용하는 두 문장들은, 그들의 의미에 따를 때, 특정한, 이상적인 존재에 관한 진술이고, 하나의 규정적인 당위의 존재에 관한 진술이며, 달리 말해 진실이거나 혹은 거짓일 수 있는 존재들에 관한 진술들이다.」(1편 303쪽)
이렇게 인용된 규범을 포함하는 학문적 문장 속의 “Sollen”은 진정한 의미의 당위가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의 행위를 규정하는 힘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규범의 효력을 기술하는 기능만을 가진다. 그러므로 이 당위는 ‘부진정당위’ 또는 ‘기술적 당위’라고 불려야 한다.
진정당위는 참이나 거짓이 아니라 유효나 무효의 문제와 관련되지만, 부진정당위는 하나의 진술이므로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동일한 ‘해야만 한다’라는 표현은 이처럼 규범 속에 있느냐, 아니면 규범을 기술하는 학문적 문장 속에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논리적 취급을 받아야 한다.
「그 문장들이 언어적으로 당위문장들로 표현되면, 그곳에서 사용된 ‘Sollen’이라는 단어는 결코 진정한 의미의 당위, 즉 어떠한 규정적인 당위가 아니고, 하나의 부진정한, 즉 하나의 기술적인 당위인 것이다.」(1편 303쪽)
법과 법학, 도덕과 윤리학이 자주 혼동되는 이유는, 법학과 윤리학의 많은 저술에서 이 따옴표가 생략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즉 규범과 규범에 관한 진술이 언어적으로 동일한 당위문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형식상의 유사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학문적 문장을 곧바로 규범으로, 또는 규범을 곧바로 학문적 진술로 오인하게 만든다. 그 결과 법학이 곧 법을 창설하는 것처럼, 윤리학이 곧 도덕을 설정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오류가 발생한다.
규범을 기술하는 문장은 진술이기에 논리적 법칙을 적용할 수 있지만, 하지만 그로부터 곧장 규범 그 자체에 같은 논리적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자연과학에서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명제에 논리법칙이 적용된다고 해서, 그 논리법칙이 곧바로 자연현상 자체에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규정(지시·명령)하는 규범과 그 규범을 기술하는 진술이 언어적으로 동일한 당위문들에서 표현된다는 사정은, 그 규범이 하나의 규범에 관한 진술과, (따라서)법이 법학과―오히려 거의 규칙적인―그리고 도덕이 윤리학과 혼재되는 것(이것은 논리적 문제에 있어서 아주 의심스런 결과들을 가져온다)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논리학적 법칙들을 법과 도덕의 학문의 원칙들에 적용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논리적 법칙들을 그러한 학문(과학)들의 대상인 그 규범들에 적용하는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가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물론 자연과학에 논리학적 법칙을 적용하는 것으로부터, 결코 이러한 원칙들을 그 학문의 대상―자연적 실제라는 사실(자연적인 사실)―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도출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1편 303쪽)
-제39장, 제40장 생략-
제41장 문장들의 다양한 의미로서 규범과 진술
규범은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며, 진술은 사고행위의 의미이다. 이들은 동일한 문장 형식을 지닐 수 있지만, 그것이 표현하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양자는 규범 자체와 규범에 관한 진술을 혼동하는 오류를 피하기 위해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 어떤 문장이 당위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규범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논리적인 관점에서 규범과 하나의 규범에 관한 진술의 구별을 위한 결정적인 요소는 하나의 규범과 그것의 언어적인 표현이 어떠하건 간에, 예를 들어 명령문 혹은 당위문, 달리 말해 하나의 문장의 의미로서 규범과 하나의 진술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이다; 여기서는 또한 ‘진술’은 언어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것의 특수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고, 주장 혹은 판단으로 표현되는 하나의 의미(뜻)로 이해될 수 있다. 일반 언어에서 진술이라는 단어는 물론 진술하는 행위, 하나의 진술을 하는 행위를 표현하고, 따라서 행위는 물론 그 행위의 의미도 표현한다.」(1편 316쪽)
특히 중요한 것은 의지행위 자체와 그 의지행위를 표현하는 언어행위 사이의 구별이다. 어떤 사람이 명령을 내릴 때 실제로 일어나는 사태는 둘이다. 하나는 누군가에게 특정한 행동을 요구하는 의지적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의지를 말로 표현하는 발화행위이다. 우리가 듣는 것은 말해진 문장이지만, 그 문장의 의미는 그 뒤에 있는 의지행위에서 비롯된다. 진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실을 말하는 문장은 사고행위의 결과이며, 그 사고의 의미가 언어를 통해 표현된 것이다. 여기서도 문장 자체와 그 문장의 의미를 낳는 행위는 구별되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의 의미가 하나의 규범인 의지적 행위는, 의지적 행위의 의미가 표현되는 언어행위와는 반드시 구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단어들이 말해지면, 그것은 하나의 문장, 즉 하나의 명령 혹은 하나의 당위문이 말해지는 것이다. 의지적 행위의 의미인 규범은 의지적 행위의 의미가 표현되는 발화행위의 산물인 문장의 의미이다. 그와 같이 그것의 의미가 하나의 진술인 사고행위는 사고행위의 의미가 표현되는 발화행위와는 구별되어야만 한다. 말해지는 것은 하나의 문장이다. 사고행위의 의미인 그 진술은 사고행위의 의미가 거기서 표현되는 발화행위의 산물인 문장의 의미이다.」(1편 317쪽)
진술은 어떤 사실을 기술하는 기능을 가지며, 따라서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비가 온다’라는 문장은 실제 상황과 일치하면 참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다. 반면 규범은 어떤 행동을 요구하거나 규정하는 의미를 가진다. ‘문을 닫아라’와 같은 문장은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규범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규범과 진술 간의 차이는 의지적 행위의 의미가 표현되는 문장의 의미와 사고행위의 의미가 표현되는 문장의 의미 간의 차이다. 그 의미가 하나의 진술인 문장은 무언가를 기술한다. 그것은 진실이거나 비진실이다; 즉 그것은 그가 기술한 것에 부합하거나 부합하지 않는다. 그의 의미가 하나의 규범인 문장은 무언가를 규정한다. 그것은 진실도 거짓도 아니다. 우리는 또한 이것을, “사람들은 진술들이 하나의 직설적인 혹은 선언적인 의미를 가지고, 규범들은 하나의 명령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표현한다. 후자가 아니라 단지 전자만이 진실이거나 거짓이다.」(1편 317쪽)
| [미주 100] 판단은 참과 거짓을 주장하는 사고형식이다. 반면 규범이나 명령은 복종을 요구하는 표현이기에 참이나 거짓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규범은 판단이 될 수 없다. 지크바르트와 팬더가 이 점을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지크바르트(Sigwart, Logik, 5. Aufl., 1924, I, S. 20)는 판단들에 대해서, 즉 ‘진술문들 혹은 주장문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문장들은’, ‘자신의 진실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을 요구하는 명령문과는 반대로, “진실이기를 원하고 주장이 믿겨지기를 의욕한다.”고 말했다. 팬더(Alexander Pfänder, Logik, Jahrbuch für Philosophie und phänomenologische Forschung, 4. Band., Halle a.d.S. 1921, S. 209)는, “저마다의 판단은 그 자체에 진실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원하는 대로 만들어질 수는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진실주장을 그 자체 함유하고 있지 않은 사고형상은 따라서 확실히 판단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규정들(Vorschriften), 처분들(Verfügungen), 요구들(Gebote), 금지들(Verbote), 명령들(Befehle), 그리고 법률들(Gesetze)’(149쪽), 그리고 말하자면 규범들과 같은 명령(문)적인 성격의 사고형상들은 판단일 수 없다.」(2편 152쪽) |
진술의 기능은 어떤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 즉 진술은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규범의 기능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규범은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를 결정하고 행동을 규정하려 한다. 따라서 진술은 사고행위의 의미이고 규범은 의지행위의 의미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둘은 심리적 기능에서도 서로 다른 종류의 행위이다.
「진술의 기능은, 말하는 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알게 한다는 것, 그의 지식을 넓혀준다는 것에 있다. 규범의 기능은 다른 사람을 무언가를 원하게 한다는 것, 그의 의사를 결정하게 하고, 심지어 자신의 의지를 통해 야기되는 그의 외적인 행동이 규범에 부합하도록 결정하게 한다는 것에 있다. 진술은 하나의 사고행위의 의미이고, 규범은 다른 사람의 행위에 정향된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다. 그것의 의미가 하나의 진술인 사고함과 그의 의미가 하나의 규범인 원함은 두 개의 서로 상이한 심리적인 기능들이다.」(1편 317-318쪽)
동일한 당위 형식의 문장이 실제로는 규범이 아니라 규범에 관한 진술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형법교과서에서 ‘절도는 구금형으로 처벌되어야 한다’라고 말할 때, 그 문장은 실제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법규범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장은 규범이 아니라 규범에 관한 진술이다. 겉으로는 당위문이지만 실제 의미는 존재에 관한 진술인 것이다.
「하나의 진술은 무언가 있다, 있었다, 있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다: 달리 말해 진술은 무언가를―현재에, 과거에 혹은 미래에―존재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것의 언어적 표현은 하나의 존재문이다. 우리가 규범으로 표현하는―하나의 의지적 행위의―의미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무엇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진술도 또한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를 표현할 수도 있다; 만약 그것이 하나의 규범에 관한 진술이라면 말이다. 이러한 진술은 하나의 존재이지만 또한 하나의 당위문일 수도 있다.」(1편 318쪽)
| [미주 102] 르네 마르칙(René Marčić)은 기존의 법이론이 존재의 문제를 망각했다고 주장하면서, 법을 존재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새로운 법이론을 제안했다.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언어를 이용하여 법을 설명하려 했는데, 그에 따르면 법은 인간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부터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의 역할은 법의 창조가 아니라 발견에 있으며, 법의 생성과 발전은 법을 ‘찾고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자연법론의 오래된 주장, 즉 법이 자연이나 존재 속에 이미 내재하고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표면에 드러나게 할 뿐이라는 견해와 궤를 같이한다. 「마르칙(René Marčič, “Um eine Grundlegung des Rechts”, in: Die ontologische Begründung des Rechts, Darmstadt 1965)은, 하나의 새로운―당위에 향해진 법이론 대신에―존재에 향해진 법이론을 기안하려 했다. 달리 말해 아마도 법을 당위로서가 아니라 존재로서 파악하는 하나의 법이론을 구상하는 것이다. … 마르칙이 의도한 것은, 마르칙의 생각에 따를 때 하이데거(Heidegger)가 ‘불명확하게 말한 것’이다. 즉 법은 ‘이미 존재가 열리면서 시원적으로 그곳’에 있었다(524쪽)는 것, ‘존재로부터’ 법률(Nomoi, 규범)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것(525쪽), 법과 관련하여 인간의 기능은―혹은 마르칙이 말하듯; ‘인간의 시원적 책임’은―“하나의 창조, 하나의 활동이 아니고 하나의 모색, 하나의 발견이고, 지시들의 영향을 받기 위한 자기개방이고, 그 규칙의 수용이라는 것”; “법의 발달의 본질, 법의 생기의 본질은, 즉 법의 생산과 법의 적용”은, “법을 모색하고 찾는 것이다.”(531쪽 이하)라는 것이다.」(2편 156-158쪽) 그러나 법이 인간의 입법활동이 아니라 존재질서에서 흘러나온다는 설명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존재에는 하나의 당위가, 자연의 실제에는 인간행위의 진실되고 정의로운 규범들이 내재하고 있다는, 그리고 따라서 인간은 진실한 법을 만들 수 없고, 단지―자연에서―찾을 수만 있다는 자연법론의 유지될 수 없는 주장처럼 오래되었다. 이것은 마르칙이, “인간과 그의 법은 법질서가 존재상태의 특징으로 파악된다면 비로소 확실해진다. … 법은 인간의 활동에 의해, 입법자를 통해서, 일반의지·총의(volonté générale)를 통해서 비로소 창조되거나 설정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발견하는 존재질서의 배출구이다.”라고 말했을 때 (531쪽), 그리고 마르칙이 가톨릭 저자 아우어(Albert Auer, Der Mensch hat Recht, Naturrecht auf dem Hitergrund des Heute, Graz-Wien-Köln 1956)의 법의 시원은 신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을 때 아주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2편 158쪽) 이러한 법이론은 결국 신의 의지에 근거한 자연법론으로 귀결된다. 만약 법이 존재로부터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신의 의지라면 인간은 그것을 단지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규범의 본질을 설명하지 못한다. 규범은 의지의 의미이며,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설정된 것이다. 「법을 이렇게 기초 짓는 결과는 “(당위로서) 규범은 따라서 어떠한 독자적인 가치영역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의 modus essendi, 하나의 특정한 존재방식이라는 것이다.”(563쪽) 만약 규범으로서 법이 하나의 당위라면 그 법은 하나의 가치를 구성(창설)한다는 것은, 무언가 가치 있다는 판단이 그 무언가가 유효한 규범에 비추어 존재해야만 하는 것과 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에도, 부인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규범의 존재, 당위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바로 이러한 존재는, 자연적인, 오감으로 인지 가능한 현실의 존재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의 특수한 관념적인―실제의 존재와는 구별되는― 것이다.」(2편 159쪽) |
규범 자체는 참도 거짓도 아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도덕규범은 사실에 대한 서술이 아니기 때문에 참이나 거짓으로 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규범이 존재하거나 유효하다는 진술은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법에 따르면 절도는 구금형으로 처벌되어야 한다’라는 진술은 실제로 그러한 법규범이 존재할 때 참이다. 이처럼 규범과 규범에 관한 진술은 서로 다른 논리적 지위를 가진다.
「하나의 규범은 참도 거짓도 아니지만, 하나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은 진실 혹은 비진실이다. ‘오스트리아 법에 따르면 절도는 구금형에 처해져야만 한다.’라는 진술은 하나의 그러한 규범이 실제로 효력이 있으면 진실이다. ‘오스트리아 법에 따르면 절도는 사형에 처해져야만 한다.’라는 진술은 그러한 하나의 규범이 효력이 없다면 거짓이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도덕규범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하지만 만약 ‘사람은 속여서는 안 된다.’라는 도덕규범이 유효하다면, ‘속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다’ 혹은 ‘속이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가치판단은 참이고, ‘속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다’ 또는 ‘속이는 것은 옳은 것이다’라는 가치판단은 거짓이다.」(1편 319쪽)
제42장 사고함과 원함
사고와 의지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기능이다. 사고는 어떤 사실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활동이며, 의지는 특정한 행위를 실현하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활동이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행위에서는 이 두 기능이 서로 결합되는 경우가 자주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사실을 설명하는 진술을 하면서도 동시에 상대방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도 그 문장의 논리적 성격은 여전히 진술이며, 그것이 명령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고(생각)함과 원함은 사실 두 가지 상이한 기능들이지만, 이 둘은 상호 결합될 수 있다. 이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다. 사람들은, 하나의 사고행위의 의미의 표현으로서 하나의 진술을, 그것을 통해 그 진술이 향해진 그 사람의 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야기할 의도로 (그 진술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엄마가 그녀의 아이에게 ‘만약 네가 그 이글거리는 가스레인지의 불판을 잡으면 너는 화상을 입게 될 것이고 그것은 너를 매우 아프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이 진술을 통해 그 자식이 불이 이글거리는 레인지 불판을 쥐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이러한 진술을) 한 것이다.」(1편 320쪽)
어머니는 아이에게 어떤 사실을 설명하는 진술을 하고 있지만, 그 진술의 목적은 아이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즉 아이가 뜨거운 불판을 잡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가 그 뒤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가 있다고 해서 그 문장이 명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직접 ‘불판을 잡지 마라’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사실을 설명했을 뿐이다. 그 문장의 의미는 여전히 사실에 관한 진술이며,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명제이다.
「이러한 의도, 이러한 원함, 의지함은, 그 의미가 이러한 진술에 표현된, 사고에 앞서 있다. 그 엄마는 그 자식이 뜨거운 불판을 잡지 않기를 … 원하지만, 이러한 의지를 표현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기능이 그 아이가 무언가를 원하게 하는 것인, 어떠한 명령도 그 아이에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사고행위의 의미만을 표현했고, 그것의 기능이 그 아이가 무언가를 알게 하는 것인, 진술을 한 것이다.」(1편 320-321쪽)
어머니는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또는 하지 않도록 만들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말한 것은 명령이 아니라 사실에 관한 진술이다. 이러한 진술은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으며, 그 점에서 명령과 구별된다. 명령은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참과 거짓의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진술의 논리적 기능은 말하는 자가 그 진술과 결합한 심리학적인 의도와 구별되어야만 한다. 엄마는 언급된 진술들을 함으로써, 만약 그 아이가 불이 이글거리는 불판을 잡는 것은 그 아이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을 안다면, … 그 아이는 레인지의 불판을 잡지 않을 것 … 이라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하지만 사고행위를 그에 앞서 있는 의지행위와 결합하는 것은 사고행위의 의미의 표현인, “만약 네가 ... (한다면) 그렇다면 너는 ... (하게)될 것이다.”라는 진술을 명령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말한 문장은 참이거나 거짓이기 때문에, 명령이 아니다; 명령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1편 321쪽)
때로는 진술과 명령이 명시적으로 함께 표현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에게 어떤 질병의 위험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믿으라고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사실에 관한 진술과 명령이 각각 독립적인 언어 행위로 존재한다. 즉 하나는 사고행위의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의지행위의 표현이다.
「통상 하나의 진술은, 그 진술이 향해진 자가 그 진술을 인식하고 그것을 참으로 생각하기를 말하는 자가 원한다는 식으로 의도와 결합되기도 한다. 이러한 의도를 말하는 자는 하나의 명령에서 표현할 수도 있다. 의사는 환자에게 “나를 믿어라, 만약 당신이 계속해서 그렇게 많이 먹는다면 당신은 지방심(Herzverfettung)으로 인해 죽을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세요.” 혹은 “만약 당신이 그렇게 계속해서 많이 먹는다면 지방심으로 사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시오.”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다른 심리학적 행위들과 두 개의 다른 언어적 표현들이―그 의미가 하나의 진술인 사고행위와 그 의미가 하나의 명령인 의지적 행위가―존재한다.」(1편 321-322쪽)
명령이나 규범을 설정하는 의지행위에도 사고가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된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특정한 행동을 요구하려면, 먼저 그 행동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상정해야 한다. 즉 의지행위는 그 대상이 되는 행위를 사고 속에서 미리 떠올리는 과정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단지 의지행위의 전제가 될 뿐이며, 그 자체가 규범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규범은 어디까지나 의지행위의 의미로서 성립한다.
「그 의미가 하나의 명령 혹은 하나의 규범인, 저마다의 의지적 행위는, 사고행위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결합된다: 즉, 만약 누군가 무엇을 원한다면, 특히 다른 한 사람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해야만 한다고 원한다면, (그리고 만약)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가 하나의 명령 혹은 하나의 규범이라면, 그 명령 혹은 그 규범을 설정하는 개인은 그 명령 혹은 규범에서 정해진 행위를 사전에 어떻게든 생각·상정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사고행위는 의지행위에 앞선다. 이런 식으로 그 의미가 명령 혹은 규범인 저마다의 의지행위는 하나의 사고행위와 결합된다. 하지만 명령 혹은 규범에서 정해진 행위는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만약 명령 혹은 규범을 설정하는 개인이 그 명령 혹은 규범에 정해진 다른 사람의 행위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달리 말해 이 행위는 이미 존재한다고, 그 타인은 이미 그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의미가 명령 혹은 규범인 의지적 행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그 타인이 그렇게 행위해야만 한다는 것을 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1편 322쪽)
제43장 진술도 규범도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종종 진술과 규범의 차이를 ‘의도’의 차이로 설명하려 한다. 예를 들어 진술은 ‘진실이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규범은 ‘준수되기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원함, 의도함, 요구함과 같은 것은 모두 심리적 기능이며, 이러한 기능은 오직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다. 문장이나 규범 자체가 무엇인가를 원하거나 요구할 수는 없다. 진술은 단지 참이거나 거짓일 뿐이며, 규범은 단지 준수되어야 하는 당위를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술이 진실을 원한다’거나 ‘규범이 복종을 요구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는 진술이나 규범을 만든 인간의 심리적 의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술과 규범에 귀속시키는 의도의 상위성을 통해 진술과 규범 간의 차이를 근거 지우는 것이 통상적이다. 우리는 진술이 진실이기를 원한다, 진실이라고 주장한다고 말하고, 규범은 준수되기를 원한다. 복종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오해를 초래한다. 원함, 의도함, 요구함은 심리적 기능들이다. 단지 인간들만이 이러한 기능을 행사할 수 있다. 진술은 진실이거나 거짓이다. 진술은 진실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규범은 준수되어야만 한다. 규범은 준수되기를 ‘원’하지 않는다.」(1편 324쪽)
진술을 하는 인간의 의도와 진술의 진리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진술이 참이기를 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진술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참이라고 믿기를 바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의도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진술의 참과 거짓은 이러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결정된다.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그것이 기술하는 사실과의 일치 여부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따라서 진술의 의미를 설명할 때 인간의 심리적 의도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단지 그 진술을 하는, 그 규범을 설정하는 인간만이 무언가를 원하고, 무언가를 의도하고, 무언가를 요구한다. 진술을 하는 인간은 하나의 진실한 진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진술이 참인가는 그의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의 진실한 진술을 하기를 원할 수 있고, 그럼에도 그 진술은 진실이 아닐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진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진실로 여겨지기를 원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통상적이나 결코 필연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진실한 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개 그 대답이 진실이기를 원하지 않고 단지 하나의 답을 할 의도에서 하나의 물음에 하나의 진술로 답할 수 있다.」(1편 324-325쪽)
규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구별이 필요하다. 규범 자체가 준수를 원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준수를 원하는 것은 규범을 설정한 인간이다. 어떤 사람이 명령을 내릴 때 그는 그 명령이 지켜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때 원하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이지, 명령이나 규범 자체가 아니다. 규범은 단지 당위를 표현하는 의미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규범은 ‘원함’이 아니라 ‘당위’이다. 따라서 규범설정행위와 그 행위의 의미는 구별되어야 한다. 규범을 준수되기를 ‘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우리는 규범을 설정하는 행위와 규범 자체를 혼동하게 된다.
「물론 하나의 규범을 설정하는 자, 하나의 명령을 하는 자는 사람들이 그 자신에 의해 창설된 규범이 혹은 그에 의해 주어진 명령이 정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행위해야만 한다는 것을 반드시 원해야만 하고, 그 규범, 그 명령은 준수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필히 원해야만 한다. 그 규범의 효력은 그 의미가 규범인 의지적 행위를 통해 정해진다. 하지만 그것은 그 규범을 설정하는, 명령하는 인간이며, 그것을 원하는 인간이다. 그 행위의 의미인 규범 혹은 명령은 어떠한 원함·의지(Wollen)가 아니라 하나의 당위(Sollen)이다. 누군가 규범은 준수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규범설정행위를 그 행위의 의미와 혼동하는 것이다.」(1편 325-326쪽)
어떤 사람은 명령이 항상 명령자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장교가 상관의 명령 때문에 부하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명령하지만, 실제로는 그 명령이 실행되지 않기를 바랄 수도 있다. 이러한 사례는 명령의 당위가 반드시 명령자의 의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증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타당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단순히 서로 충돌하는 두 가지 의지가 존재할 뿐이다. 장교는 한편으로는 상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명령을 전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명령이 실행되지 않기를 바랄 수도 있다. 이러한 의지의 충돌이 존재한다고 해서 명령의 의미가 의지와 무관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우리는 다른 한 사람에게, 그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고도, 심지어는 그가 그 명령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원하면서도, 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명령할 수 있기 때문에, 명령의 당위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의지의 의미인 것은 아니라는 반론은 옳지 않다. 만약 예를 들어 한 장교가 전쟁에서 보다 상급지휘부로부터 전쟁포로들을 사살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는 그 명령을 국제법위반으로 보고 이를 불승인하면서도 이러한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가 받게 될 불이익이 되는 결과를 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명령을 따랐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그에게 소속된 군사들 중 한 형집행반에 대해 전쟁포로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그때 자신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기를 원했다.」(1편 326쪽)
인간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의지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할 수도 있는 것처럼, 어떤 행동을 명령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실행되지 않기를 바랄 수도 있다. 이러한 모순적 의지의 병존은 인간 심리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명령의 의미가 의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기본 명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명령의 당위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행동을 향한 의지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제44장 진술의 참과 규범의 효력
진술의 참과 규범의 효력을 서로 평행한 것으로 보려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진술은 참이면 성립하는 것 같고, 규범은 효력이 있으면 성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논자들이 진리값과 효력값 사이에 구조적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논리학의 원리들이 진술에 적용되듯 규범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규범의 효력은 규범을 설정하는 의지적 행위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진술의 참은 진술을 말하는 사고행위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양자는 애초에 병렬적인 관계에 놓일 수 없다.
「사람들이 잘못되게도, 진술과 규범에 하나의 ‘원함·의지(Wollen)’를 인정한다는 것, 사람들이 양자는 무언가 ‘원한다(wollen)’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 착오, 즉 사람들이 진술과 규범 간에 마치 그 진술이 진실이기를 원하는 것과 같이 그 규범은 준수되기를 원한다는 하나의 유사성을 본다(이 있다고)고 믿는 착오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이 있다. 그 규범은 준수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그(규범)의 효력이다. 그 규범이 ‘효력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은 규범이 규정한 대로 그렇게 행위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의 진술의 진실과 하나의 규범의 효력 간에는 유사성이 있다. 논리적 원칙들은 진술에 적용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혹은 유사한 방식으로―또한 규범들에도 적용가능하다는 학설교의(Doktrin)는 대부분 이러한 진리값(Wahrheitswert)과 효력값(Geltungswert)의 유사성이라는 가정(Annahme)에 근거하고 있다.」(328-329쪽)
규범은 하나의 행위의 의미이지만, 그 규범의 효력은 그 규범을 창설한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 규범은 누군가의 의지적 설정행위를 통해서만 효력을 갖는다. 반대로 진술 역시 사고행위의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 진술이 참인지 여부는 그것이 실제로 발화되었는지, 누가 발화했는지, 어떤 사고행위를 했는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진술은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참일 수 있고, 반대로 누군가 진지하게 말했더라도 거짓일 수 있다. 이 점에서 규범의 효력과 진술의 참 사이에는 구조적 비대칭이 존재한다. 이 비대칭을 보지 못할 때 규범을 진술처럼 다루는 오류가 발생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 규범이 만들어진 행위와 그 규범의 효력 간의 관계는 진술이 이루어지는 행위와 그 진술의 진실 간의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점이 이러한 유사성에 반하는 것이다. 사실 진술은 규범과 같이 하나의 행위의 의미이다; 하지만 하나의 진술의 진실은 그것이 행해지는 행위를 통해 좌우(결정)되는 것이 아니지만, 규범의 효력은 그것이 만들어지는 행위를 통해 조건 지워지는 것이다. 물론 이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것으로 규범이 창설되는 행위는 그 의미가 규범인 행위지만 규범의 효력의 조건은 규범의 효력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행위는 존재이고, 규범의 효력은 당위이다. 규범의 효력은 폐지(부분적 폐지; Derogation)라는 방식으로 소멸한다. 그것으로 규범이 만들어지는 행위는 폐지될 수 없다. 또한 그 행위는 효력의 조건이지, 효력근거가 아니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근거, 하나의 당위의 효력근거는 존재일 수가 없고, 단지 하나의 당위, 다른 하나의 규범의 효력일 수 있는 것이다.」(1편 329쪽)
효력은 규범의 단순한 성질이나 부가적 속성이 아니라, 특수한 존재방식이다. 규범은 창설되지 않으면 애초에 효력을 가질 수 없고, 효력이 없다는 것은 곧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는 책상이나 돌멩이 같은 현실적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의미내용으로서의 존재, 다시 말해 관념적·이념적 존재이다. 따라서 아주 엄밀하게 말하자면 ‘유효한 규범’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동어반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규범이라면 이미 효력을 가진 것이고, 효력이 없다면 그것은 규범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규범은 유효하기 위해서(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필히 창설되어야만 한다. 규범은 창설되지 않으면 (그것은) 효력이 없다; 그리고 단지 그것이 창설된 경우에만 효력이 있다: 그것이 효력이 없으면 창설(설정)된 것은 어떠한 규범도 아니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은 이미 언급했듯이 그의 특수한 실존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존재 사실의 실존이 아니라, 말하자면 하나의 의미(혹은 의미내용)의 존재인 실존, 하나의 사실의 의미의 실존, 사실상의 설정행위의 의미의 실존이다. 하나의 의미의 존재는 하나의 관념적인 실존이지, '실제'의 실존이 아니다. 하나의 특정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은 하나의 그런 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규범은 효력이 발생한다. 즉 특수한 실존에 들어간다. 유효하기 시작한다. 하나의 규범은 “효력을 잃는다(효력에서 나온다).” 즉 실존 밖으로 나온다. 유효하기를 멈춘다.」(1편 330쪽)
진술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진술은 누군가가 그것을 말했을 때 비로소 하나의 진술로 성립하지만, 그 진술의 참은 그 발화행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열은 금속성 물체를 확장시킨다’라는 문장은 아무도 그 말을 하지 않아도 참일 수 있다. 반대로 거짓인 문장도 여전히 하나의 진술이다. 참은 진술의 존재조건이 아니라 진술의 속성이다. 그래서 참인 진술도 있고 거짓인 진술도 있는 것이다. 규범에서는 이와 같은 구조가 성립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규범이면서 동시에 효력이 없는 규범이라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진술은 진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로 혹은 거짓으로 판단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진술은 비록 그것이 행해지지 않아도 진실인 것이다. 열은 금속성 물체를 확장시킨다는 것은, 누구도 이러한 진술을 하지 않아도 진실이다. 살인자들은 사형에 처해져야만 한다는 것은 단지 이 규범이 입법자로부터 설정된 경우에만 유효하다. 하나의 진술은 그 진술이 말한 것이 있을 때 진실이다. 또한 비진실인 진술도 하나의 진술이다. 법관의 “X는 교도소에 수감되어야만 한다.”라는 선고가 무언가 하나의 이유로 효력이 없다면 이 선고는 무효이고, 달리 말해 규범이 아니며 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진술의 진실은―하나의 규범의 효력과 같이―폐지를 통해 폐지될 수 없다. 술어논리학 내에서 ‘폐지’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없다.」(1편 331쪽)
효력은 규범의 속성이 아니라 그 규범의 존재 자체다. 진실은 진술에 붙는 성질이지만, 효력은 규범에 붙는 성질이 아니다. 규범을 하나의 대상에 귀속되는 ‘속성’처럼 생각하면, ‘당위되어 있음’이 마치 행위나 사람의 성질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예컨대 ‘절도범은 처벌되어야 한다’는 문장은 절도범이라는 인간에게 ‘처벌되어야만 함’이라는 속성이 붙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절도범을 처벌하라는 규범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진실은 진술의 속성이다. 효력은 규범의 속성이 아니라, 그 규범의 실존이고, 존재는 속성이 아니다. 또한 하나의 규범의 효력은 규범에서 당위된 행위의 속성도 아니다. 하나의 규범이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한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우리가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이 요구된다(당위되어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언어적 표현에서 당위되어 있음은 약속한 것을 지킴에 존재하는 행위의 속성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다. 하나의 특정 행위가 ‘당위되어 있다.’라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행위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그렇게 행위해야만 한다는 것은 하나의 규범이고, 이 규범은 이 행위의 속성이 아니다. 한 인간의 이러한 행위는 존재사실이고, 존재이고, 하나의 당위는 하나의 존재의 속성일 수 없기 때문이다.」(1편 331쪽)
| [미주 108] 울리히 클룩(Ulrich Klug)은 법규범을 일종의 속성 진술로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영업적 장물범은 10년 이하의 교화소형으로 처벌되어야 한다’라는 규범을 “영업적 장물범은 처벌되어야 할 속성을 가진다”라는 진술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규범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형벌은 어떤 사람의 속성이 아니라 단지 특정한 강제행위를 부과해야 한다는 규범적 명령이다. 「클룩(Ulrich Klug)은 자신의 Juristische Logik, 2. Aufl., Berlin-Göttingen-Heidelberg 1958, S. 53에서, ‘모든 영업적 장물범은 10년 이하의 교화소형으로 처벌되어야만 한다.’라는 법규범은 ‘모든 영업적 장물범은 10년 이하의 교화소형으로 처벌되어야만 할 속성(Eigenschaft)을 가지고 있다.’라는 진술로 ‘번역’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번역을 통해 ‘누구건 개인들에 대해 공공연하게’, 그들에게 ‘하나의 영업적인 장물범임’이라는 속성이 부여된다면, 항상 그들은 또한 ‘10년 미만의 교화소형에 처해져야만 함’이라는 속성을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형벌은 하나의 특수한 제재이다. 한 인간이 처벌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하나의 특정한 강제행위가 부과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코 이 사람의 특성 혹은 이 사람의 행위의 속성이 아니다.」(2편 164-165쪽) 이러한 오류는 특히 민사집행과 같은 경우에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법규범은 특정 조건이 충족될 때 어떤 강제행위가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한다.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그의 재산을 강제로 압류하여 채권자의 만족에 사용해야 한다는 규범은, 채무자의 ‘속성’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강제행위를 해야 한다는 당위를 설정할 뿐이다. 「예를 들어: ‘만약 채무자가 자신의 채권자에게 채무를 진 금액을 지급하지 않으면, 그 채무자에게는 강제적으로 하나의 특정한 재산적 가치가 박탈되고 채권자의 만족을 위해 이용되어야만 한다.’라는 규범이 유효하다. 한 법관이 하나의 구체적 사례에서 ‘채권자에게 채무 10000(DM)을 지급하지 아니한 채무자 마이어에게는 그의 자동차가 강제적으로 압류되어야만 하고, 그것을 판매한 것은 채권자의 채권에 충당되어야만 한다.’라고 판결했다. 일반규범은 채무이행을 지체한 채무자의 속성이 아니다. 개별규범은 마이어의 속성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클룩은 일반규범으로부터 특정 영업적인 장물범에 대한 개별규범의 효력으로의 추론의 적용가능성을, 영업범인 장물범은 처벌되어야만 한다는 규범을 영업범인 장물범의 하나의 속성으로 보는 허용되지 않는 번역에 근거하고 있다.」(2편 165쪽) |
규범의 ‘효력’과 진술의 ‘참’은 시간과 관계 맺는 방식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규범의 효력은 시간 속에서 시작하고 종료할 수 있다. 규범은 제정되어 효력을 얻고, 폐지되어 효력을 잃는다. 심지어 그 내용에 따라 장래에 효력을 발생시키거나 소급효를 가질 수도 있다. 반면 진술의 참은 이런 식으로 시간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진술이 참이라면 처음부터 참이었고, 거짓이라면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단지 우리가 나중에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게 될 뿐이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은 그 규범의 특수한 존재이고,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규범의 효력은 시간적으로 정해진 것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효력이 발생한 하나의 규범이 효력을 상실할 수 있듯이, 그 규범은 특정 시간에 효력을 가지기 시작했다가 특정 시점에 유효하기를 멈출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규범이 효력을 갖기 시작한 그 시점은 그 규범이 창출된 그 시점과 맞아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점은 또한, 그 규범의 내용에 따를 때, 그 규범이 그렇게 규정하는 한, 창설행위에 선행하는 (소급효를 가진 규범들) 혹은 후행하는 시점일 수도 있다. 하나의 규범이 그 규범의 효력을 폐지하는, 부분 폐지하는 규범을 통해 그 효력을 상실하는 사례를 차치하면, 규범이 유효한 그 시점은 그 규범이 그 내용에 따를 때 그에 의해 정해진 행위에 대해 규정한 시간과 일치한다.」(1편 333-334쪽)
‘지금은 한낮이다’라는 문장은 그것이 밤중에 말해졌다면 거짓이고, 열 시간 뒤 낮이 되었다고 해서 그 밤의 발화가 참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낮 12시에 말해졌다면 밤이 되어도 그때의 진술은 여전히 참이다. 진술의 내용이 어떤 시간을 가리킬 수는 있어도, 그 진술의 진리 자체가 그 시간 동안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진술의 참은 규범의 효력처럼 ‘발생했다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진술의 내용이 시간과 관련된다는 사실과 진술의 진리가 시간적으로 제한된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말이다.
「하지만 하나의 진술의 진실은 시간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진술은 하나의 특정한 시점에 진실이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특정한 시점에 진실이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참이라면, 그것은 항상 참이고, 그것이 항상 참이었고 항상 참일 것이다. 열이 금속물질을 확장한다는 것은, 만약 그것이 참이라면, 항상 참이다. 어느 날, 열기는 금속성의 물질을 확장하지 않는다 혹은 열기는 모든 금속물질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어느 곳에서건 금속물질을 확장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면 열이 금속물질을 확장한다는 것은 바로 진실이 아닌 것이며, 따라서 열은 금속물질을 확장한다는 문장은 항상 거짓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시간적으로 정해진 개별적인 사실의 존재에 관련된 진술에도 맞는 말이다.」(1편 334쪽)
혼란은 사람들이 진술에도 ‘효력’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더 심해진다. 우리는 실제로 ‘유효한 주장’, ‘타당한 판단’ 같은 표현을 쓴다. 그러나 이때의 ‘효력’은 규범의 효력과 전혀 다른 뜻이다. 규범에 관해 효력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규범의 존재를 뜻하지만, 진술에 관해 효력이라고 할 때 그것은 진술의 참됨을 가리킨다. 거짓인 진술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지만, 효력 없는 규범은 존재하는 규범이 아니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과 하나의 진술의 진실 간의 차이는, 사람들이 규범에서만 아니라, 진술들에서도 ‘효력’이라고 말함으로써 모호해진다. 우리는 하나의 규범이 ‘유효하다. 효력이 있다.’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진술, 하나의 주장, 하나의 판단도 ‘유효하다. 효력이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의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은 하나의 진술이 ‘유효하다’는 것과는 모종의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은 그 규범이 존재한다, 그 규범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진술이 유효하다는 것은 그 진술이 존재한다, 그 진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진술이 참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진실이 아닌 진술도 존재하고, 그것은 참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하지만 유효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유효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효력 없는 규범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규범과 관련해서는 ‘효력’은 존재, 그 규범의 존재를 의미하지만, 진술과 관련해서는 ‘효력’은 속성, 그 진술의 하나의 속성, 그 진술의 진실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규범의 ‘효력’과 하나의 진술의 ‘진실’은 한 문장의 ‘효력’이라는 공통의 상위개념 하에 들어갈 수 없다.」(1편 335-336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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