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켈젠(김성룡 역), 《규범의 일반이론》, 아카넷, 2016
Hans Kelsen, Allgemeine Theorie der Normen (1979)
제57장 모순율의 규범에의 적용가능성
1. 당위문에의 적용가능성
전통 논리학은 참과 거짓이라는 진리값을 가진 명제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명제들은 사고행위의 의미이며, 따라서 논리학의 원칙들은 사고의 결과로서 표현된 진술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게 된다. 그러나 규범은 이러한 구조에 속하지 않는다. 규범은 사고의 의미가 아니라 의지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규범은 사실에 대한 언명이 아니라 특정한 행위를 요구하거나 금지하는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규범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다. 따라서 전통 논리학의 원칙은 규범에 직접 적용될 수 없다.
「명제(Aussage)의 진실(참값)에 관련된 전통적 논리학의 원칙들의 기본전제는 참인 명제와 거짓인 명제가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속성을 가진 진술이 있다는 것이다. 참 또는 거짓인 진술은 사고적 행위의 의미이다. 하지만 규범들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맞춰진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고, 그 자체는 진실도 거짓도 아니며, 따라서 전통적 논리학이 진실 혹은 거짓에 관계하는 한 그러한 전통적 논리학의 원칙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1편 398-399쪽)
규범은 일반적으로 명령문이나 당위문 형태로 표현된다. 바로 이러한 언어적 형식 때문에 많은 논자들이 논리학의 원칙을 규범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예를 들어 서로 반대되는 두 당위문을 놓고 그것들이 서로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떤 당위문에서 다른 당위문이 논리적으로 도출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논의는 규범도 명제와 마찬가지로 논리적 관계에 놓일 수 있다는 직관에 기초하는데, 많은 경우 그 당위문이 실제 규범인지, 규범에 관한 진술인지를 구별하지 않고 행해진다.
「규범의 언어적인 표현은 명령(imperativ) 또는 당위문(Soll-Satz)이다. 그리고 만약 무모순성·모순율(ausgeschlossene Widerspruch)과 추론이라는 논리적 원리를 규범에 적용가능하다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통상 당위문들과 관련하여 일어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두 가지의 당위문, 즉 “의사는 자신이 불치의 병이라고 생각하는 환자의 질병에 대해서 환자가 자신의 질병은 불치병인지를 물을 때 진실을 말해야 한다.”와 “의사는 자신이 불치의 병이라고 생각하는 환자의 질병에 대해서 환자가 자신의 질병은 불치병인지를 물을 때 진실을 말해서는 안 된다.”라는 두 가지의 당위문들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한 자신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라는 문장으로부터 “남성 마이어는 여성 슐체에게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한 자신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라는 문장이 논리적으로 도출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 당위문들이 1) 실증적인 도덕 혹은 실정법의 유효한 규범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거나 2) 그러한 규범들의 타당성에 관한 진술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거나, 도대체 그 당위가 다른 사람의 행위에 맞추어진 의지적 행위의 의미인 당위문인지 여부 혹은 의지적 행위의 그러한 의미에 관한 진술인 당위문인지 여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3)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당위문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1편 399쪽)
당위는 단순히 논리적 형식이 아니라 의지와 연결된 의미이다. 어떤 당위문이 규범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어떤 의지적 행위의 의미여야 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의지와 무관한 당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바, 그런 당위를 인정한다면 논리학을 규범에 적용할 가능성도 열릴 수 있겠으나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규범들은 언제나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기 때문에, 진리값을 갖지 않는다.
「당위(Sollen)와 의지(Wollen) 사이에 하나의 본질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당위문들은 무의미한 것이다. …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당위가 있다는 것 … 이 옳다면 그러한 당위문들은 유의미한 것이고, 그렇다면 모순율과 추론이라는 논리적 원리는 유추를 통해 그러한 당위문들에도 적용 가능하다는 가정은 배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 이러한 원리들은 단지 실제적인 의지적 행위의 의미일 뿐이고, 따라서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는 실정 도덕규범 또는 실정 법규범에 적용 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1편 399-400쪽)
| [미주 143] 울리히 클룩(Ulrich Klug)은 법규범을 반드시 당위문 형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법체계는 반드시 ‘해야 한다’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이해될 필요가 없으며, 법규범은 당위문 대신 허용문이나 금지문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규범은 본질적으로 특정 행위를 요구하거나 금지하는 의지적 의미이며, 이러한 의미는 오직 당위문 형식으로만 정확하게 표현될 수 있다. 전술했듯 금지는 명령과 동일한 규범적 기능을 수행한다. 금지와 명령의 차이는 단지 명령이 어떤 행위를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면 금지는 어떤 행위를 하지 말도록 요구한다는 점뿐이다. 즉 금지는 부작위에 대한 명령으로서 역시 특정 행위를 요구하는 당위의 구조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금지문 역시 당위문과 동일한 규범적 의미를 가지며 독립적인 규범 형식이 아니다. 「클룩(Ulrich Klug, “Bemerkungen zur logischen Analyse einiger rechtstheoretischer Begriffe und Behauptungen”, Logik und Logik-Kalkül, Herausgeber: Max Käsebauer und Franz v. Kutschera, Freiburg-München 1962, S. 117)은, “법규범들을 당위문들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당위는 법이론의 근본개념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규범적인 기본화법(양식)의 선택에서 자유롭다. 하나의 법규범체계의 서술을 위해 당위문장의 언어는, 전체적으로 허용문장들의 언어를 통해 혹은 또한 금지문장의 언어를 통해서 대체될 수 있다.”라고 했다. 이것은 옳지 않다. 우선 ‘금지하다’는 명령하다와 동일한 기능, 즉 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규정(지시)하는 것이라는 바로 그 점 때문이다; 금지함과 요구함의 차이는 단지 금지는 부작위의 명령이라는 것에 있다. 하지만 하나의 명령(혹은 금지)행위의 의미는 단지 하나의 당위문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의 의미는, “너는 너의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이지, “너는 너의 이웃을 사랑해도 된다.”는 아니다. 그의 채무를 갚으라는 명령의 의미는, “사람들은 자신의 채무를 변제해야만 한다.”는 것이지, “사람들은 자신의 채무를 변제해도 된다.”가 아니다. 사람은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해도 된다(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 이러한 행위가 허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편 256쪽) 「규범들은 다른 사람의 행위에 향해진 의지적 행위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것이 명령들인 한에서―이러한 행위의 의미는, 하나의 명령을 통해서 혹은 그와 동일한 의미인 당위문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과 다를 수 없다. 당위는 법이론의 근본개념으로서 반드시 승인되어야만 한다!」(2편 257쪽) 허용은 규범의 본질적인 형식이 될 수 없다. 허용은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 규범이 아니라 단지 그 행위를 금지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독립적인 규범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허용은 항상 명령이나 금지를 전제로 하는 2차적 기능이다. 특정 행위가 허용된다는 것은, 그 행위가 원래 금지되어 있었지만 특정 범위에서 그 금지가 제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용은 명령의 1차적인 기능을 전제하는 2차적인 기능이다. 도덕적 권위와 법적 권위는, 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부작위하라는 명령을 특정한 개인들에게 제한함으로써, 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허용한다’. 만약 기독교적 도덕에 따라 성교는 단지 부부간에만 ‘허용’된다면, 단지 부부 상호간의 성적인 관계를 가져‘도 된다’면, 이것은 성교는 금지되고 이 금지는 단지 부부에 관련해서는 제한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만약 입법자가 단지 약사들에게 독극물을 처방하는 것을 ‘허용’하였다면, 단지 약사만이 독극물을 처방해도 된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2편 257쪽) 법질서는 일반적으로 ‘금지되지 않은 것은 허용된다’ 원칙에 따라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허용되지 않은 것은 금지된다’라는 원칙은 성립하지 않는다. 가능한 모든 행위를 미리 금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법질서는 특정한 행위 유형을 금지하고 그 금지의 범위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허용은 단지 금지의 예외로만 이해될 수 있다. 「하나의 행위가 허용되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행위해도 된다는 것은 또한 이 행위가 금지된 것도 명령된 것도 아니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만약 하나의 행위를 ‘허용한다’는 것이 이러한 행위를 금지하는 것도 명령하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라면, 우리는 금지된 행위에 대해서 그것은 허용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사람들은 그렇게 행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실정적인 도덕질서 혹은 법질서는 금지되지 않은 것은 허용된 것이라는 근본원칙에 따라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허용되지 않은 것은 금지된 것이라는 근본원칙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저마다의 가능한 행위를 금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단지 행위의 특정한 유형에 대해서만 이러한 금지에 대한 하나의 예외를 만드는 것, 즉 그것을 허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2편 257쪽) |
2. 의지와 사고의 결합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통한 해결가능성
규범에 논리학을 적용하려는 대표적인 우회전략은 의지와 사고를 본질적으로 결합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무엇을 의지한다면, 그는 동시에 자기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하고, 따라서 그 의욕된 대상은 사고된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규범은 단순한 의지의 의미가 아니라 사고된 내용이 되므로, 참과 거짓의 논리적 틀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사고행위가 의지행위의 전제조건이 될 수는 있더라도, 규범을 규범이게 만드는 의지적 계기를 사고적 계기로 치환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의지와 사고·생각(Denken)이 본질적으로 결합된 것이라고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장애를 피해보려고 한다. 무언가를 원하는 자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고 한다. 즉 의욕된 것(Das Gewollte)은 동시에 사고된 것이고 그 자체가 참과 거짓이라는 양가적인 논리에 종속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의지와 생각은 본질적으로 상이한 두 가지의 기능이라는 것, 의지에는 어떠한 생각도 내재적(immanent)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여기서 이미 언급되었다. 원하는 자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고적 행위는 의지적 행위에 선행하는 것이고, 그 안에 고유한 내재된) 것이 아니다.」(1편 400쪽)
어떤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려면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선행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선행하는 인식이 곧 의지 그 자체는 아니다. 사고행위는 그 자체 의지행위 안의 불가결한 어떤 내용을 이루는 것이 아니며, 의지행위 없이 곧바로 규범으로 이어질 수도 없다. 의지와 사고를 결합해 규범을 명제처럼 다루는 해법은 규범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해체하는 대가를 치르고서만 얻을 수 있다.
「의지하는 자가 원하는 것은, 참 혹은 거짓일 수 있는 명제에서 표현될 수 있는 사고적 행위의 의미가 아니고, 그 행위의 의욕이 문제되는 경우에 그 자체로서는 참도 거짓도 아닌 화법상 구별되지 않는 기체이며, 따라서 전통적인 명제논리학이 소위 진리값에 관련되는 한 그 원칙들은 적용될 수 없다. 의지(Wollen)가 타인의 행위에 정향된 것이라면, 하나의 규범이 존재할 때, 의욕된 것은 당위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바로 거기서 규범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다.」(1편 400-401쪽)
| [미주 145] 논리법칙이 규범에 적용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순수하게 논리적 구조의 문제이고, 법관이 실제 사건에서 오직 일반규범으로부터 논리적 추론에 따라 판단해야만 하는지의 문제는 법정책의 문제이다. 양자는 층위를 달리한다. 법질서에 따라 법관은 특정한 경우 일반규범을 적용하지 않을 권한을 가질 수도 있는바, 이러한 권한이 존재한다고 해서 논리학의 법칙 자체가 규범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논리적 법칙들, 특히 추론의 규칙들이 일반적으로 규범들에, 그리고 특수한 경우로 법규범들에 적용 가능한 것인가의 문제는 법관이 만약 추상적인 일반적 규범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으로 당위된 것으로 설정된 행위의 조건으로 정해진 하나의 구성요건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확정한 경우,그는 법적으로 효력 있는 일반 법규범을 하나의 구체적 사례에서 적용하는 것에 법적으로 구속되는가라는 문제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실정법적으로 법관은 그 일반규범을 특정한 상황들하에서는 적용하지 않는 권한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법관에게 이러한 가능성을 주는 것은 법정책적으로 바람직할 수 있다.」(1편 258-259쪽) 게스트(A. G. Guest)는, 법적 논증이 경험적이고 재량적인 성격을 가지는 반면 논리적 추론은 엄격하고 비탄력적인 것으로 이해되며(즉 법적 판단은 단순한 논리적 연역으로 설명될 수 없다), 특히 판결은 법규뿐 아니라 윤리, 사회적 정의, 역사적 고려 등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고 단순히 기존 규범에서 논리적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법학에서 논리학의 역할이 제한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게스트가 논리학의 법칙이 법규범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법적 판단이 항상 논리적 연역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법관의 판단에는 다양한 원천이 존재하며 논리적 연역은 그중 하나라는 점에서, 법에서 논리학이 적용될 수 없다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게스트(A. G. Guest, “Logic in the Law”, in Oxford Essays in Jurisprudence. Oxford 1961, S. 176)는 … “법에서의 논리학에 대한 주요한 반론은, 법적 논증은 경험적이고 재량적임에 반해, 통상적으로 논리학적 사고 과정들은 엄격하고 비탄력적이라는 형태로 표현된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177쪽에서 “언뜻 보기에는 이러한 주장에는 상당한 진실이 있다고 인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존재하는 원칙들로부터의 단순한 연역 외에 매우 많은 다른 판결의 원천(sources)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연역들이 필연적으로 법적인 것으로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일련의 법규들이 선존한다는 것은, 법관이 그것들에 적용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대한 법관의 재량을 없애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에 도달함에 있어서, 그는 항상 다른 법의 원천―공동체의 윤리적 강령, 사회적 정의, 역사 등―에 그의 시각을 둘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다.”라고 자인했다. 즉 ‘법에서 논리학’에 대한 반론은, 추론의 논리적 법칙은 법규범들에 적용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게스트는, 그것이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존재하는 원칙들로부터의 단순한 연역들 외에’라는 단어들로 인정한 것이다), 사실상 늘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거나, 혹은 법정책적으로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2편 259쪽) 어떤 규범이 모호하거나 불명확할 경우 논리적 추론을 적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로써 논리학이 규범에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경우 단지 규범 자체가 추론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만약 분명하고 명확하게 표현된 일반규범이 존재한다면 그로부터 논리적 추론이 분명 가능하다. 「추론의 논리적 법칙이 규범들에 적용 가능한가의 문제는, 그것(일반규범들)의 효력으로부터 그에 부합하는 하나의 개별규범이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일반규범들이, 하나의 추론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분명하고 명백한가라는 문제와 혼돈되어서는 안 된다. 게스트는 ‘판례법’(case law)를 지적했고, “사례들은 부탁만 하면 그들의 원칙을 내보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카르도조(Carclozo)의 확언을 인용하고, ‘법규들’과 관련해서는 “하나의 법규가 문제되는 경우 그 법률들의 조항들 역시 종종 모호하다.”라고 적고 있다. 추론의 논리적 법칙이 법규범들에 적용 가능한 것인가의 문제는, 하나의 분명하고 명백하게 표현된 일반 법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있으면 혹은 있을 수 있으면, 그와 마찬가지로 명확하고 분명하게 표현된 진술들도 있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2편 259-260쪽) |
3. 진실과 규범 간의 비유사성
규범이 참도 거짓도 아니라면, 규범에 모순율이나 추론규칙을 적용하려는 사람은 규범 안에서 진리값에 상응하는 어떤 속성을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명제의 경우 진리와 거짓이 논리적 관계를 가능하게 하듯, 규범의 경우에도 그와 비슷한 어떤 속성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두 규범 사이에 ‘하나는 가능하고 다른 하나는 불가능하다’거나,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가 따라 나온다’는 식의 논리적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시도로는 크게 i) 규범의 ‘효력’을 명제의 진리에 유사한 것으로 보는 방법론과, ii) 규범의 ‘준수’를 그런 것으로 보는 방법론이 있다. 이 둘은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잘못된 유추에 의존하고 있다.
「규범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다고 하더라도, 즉 그 적용의 근거가 되는 진실과 관련될 수 없다 하더라도, 만약 우리가 배제된 모순(모순율)과 추론이라는 논리적 원칙들을 규범에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규범의 다른 하나의 특성과 연관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특정한 속성을 가진 규범과 그러한 특성을 가지지 못한 규범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규범들의 이러한 특성은 명제(진술)의 진실과 유사해야만 할 것이다.」(1편 401쪽)
「하나의 진술의 진실에서 다른 하나의 진술의 진실이 논리적으로 따라올 수 있는 것과 같이 진실에 유사한 하나의 규범의 속성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규범의 속성이 따라올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논리적 원칙들을 규범에 적용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 다양한 시도들에서 이미 두 가지 방법이 대표적으로 주장되었다. 그중 하나는 규범의 효력(Geltung)을, 다른 하나는 규범의 준수(Befolgung)를 명제의 진실에 유사하게 설정하는 시도이다.」(1편 402쪽)
◎ 규범의 효력과 명제의 진실
진리와 거짓은 명제의 속성이다. 즉 하나의 명제는 존재한 채로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그러나 효력과 무효는 그런 식으로 규범의 ‘속성’을 이루지 않는다.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은 그 규범이 하나의 특수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며, 효력이 없는 규범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규범이다. 가령 ‘존재하는 거짓 명제’에 대응하는 ‘존재하는 무효 규범’ 같은 것은 없다. 때문에 명제의 진리와 규범의 효력을 나란히 놓는 유추는 성립할 수 없다.
「첫 번째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진실 또는 거짓이 진술(명제)의 속성인 것과 같이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과 효력이 없다는 것은 규범의 속성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벌써 명제의 진실과 규범의 효력 간의 유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은 그 규범의 특수한 관념적 실존(Existenz)이고 효력이 없는 규범, 타당하지 않은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 규범인 것이지만, 거짓인 명제는 존재하는 명제인 것이다.」(1편 402쪽)
| [미주 146] 진실과 거짓은 진술에 적용되는 개념이지 규범에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진술은 사고행위의 의미이며, 그것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여부에 따라 참 또는 거짓이 된다. 그러나 규범은 의지행위의 의미로서 진리값을 갖지 않으므로, 참이나 거짓으로 평가될 수 없다. 규범 사이에는 진실 여부가 아니라 상응 여부, 즉 하위규범이 상위규범에 부합하는지 여부만이 문제된다. 진술과 대상 사이의 관계와 규범과 규범 사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구조를 띤다. 「진실과 비진실은 의지행위의 의미로서 규범의 속성이 아니라 사고행위의 의미로서 하나의 진술의 속성이라는 것과, 하나의 진술의 진실과 하나의 규범의 효력 간에는 어떠한 유사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부터, 하나의 진술과 그 대상(진술이 이와 일치하거나 혹은 일치하지 않고, 그에 따라서 진실 혹은 비진실인 대상) 사이의 관계와 하나의 하위규범과 그 하위규범이 이에 부합하거나 부합하지 않는, 상위규범 간의 관계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결과가 도출되고,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부합(Entsprechung) 혹은 불부합(Nicht-Entsprechung)을 ‘진실’ 혹은 ‘비진실’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2편 260쪽) 「하나의 법률이 헌법을 침해하였는가 혹은 침해하지 않았는가의 문제는 “논리적인 의미에서 진실에 관한 물음”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말이다. … 그 인식이론적인 난점은, 하나의 제정법이, 즉 법규범들이, 진실도 거짓도 아니라는 것,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가 문제되는 법률이 헌법에 합치하는지 혹은 헌법위반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는, 우리가 그것을 ‘진실한’ 것으로 혹은 ‘비진실’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 도출되지 않는다. 진실 혹은 비진실은, 하나의 사고행위의 의미가 하나의 진술에서 표현된 이러한 의미가 관련된 대상과 일치(부합)함 혹은 불일치함이다. 그것은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 하나의 하위규범이 다른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 보다 상위규범에 대해 가지는 상응(Entsprechung) 혹은 비상응(Nicht-Entsprechung)과는 무언가 전적으로 상위한 것이다.」(1편 260-261쪽) |
상호 모순되는 두 명제는 함께 존재할 수 있지만,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거짓이다. 그러나 규범충돌은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진다. 하나의 규범이 어떤 행위를 요구하고 다른 규범이 그 부작위를 요구한다고 해서, 둘 중 하나가 자동으로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규범충돌이란 바로 두 규범이 모두 유효하기 때문에 생기는 상황이다. 규범충돌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유효한 규범들 사이의 실천적 대립이다.
「진술의 진실과 규범의 효력 사이에는 유사성이 없다는 것은 특히 우리가 두 개의 진술 사이의 논리적 모순을 규범충돌에 대비할 때 분명해진다. 상호 모순관계에 있는 진술들은, 예를 들어 ‘신은 존재한다.’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신은 정의롭다.’와 ‘신은 정의롭지 못하다.’와 같이, 병렬적으로 존재하지만, 단지 그 하나만이 참일 수 있고, 만약 그 하나가 참이라면 나머지 것은 필히 거짓이어야만 한다. 둘 중 하나의 규범이 특정한 행위를 요구된 것으로, 다른 하나의 규범이 그 행위의 부작위를 요구된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면 규범충돌이 일어난다. 그러한 규범충돌의 경우에는, 마치 하나의 진술이 참이면 다른 하나의 진술은 반드시 거짓이어야만 한다는 논리적 모순의 경우와 같이, 만약 두 개의 규범 중 하나가 타당하다면 다른 하나는 필히 효력이 없어야만 한다고 주장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규범충돌에 있어서 두 개의 규범은 모두 유효하다. 그렇지 않다면 규범의 충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1편 402-403쪽)
| [미주 147] 메이네츠(Eduardo García Máynez)는 규범 사이의 충돌을 논리적 모순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는 특히 동일한 규범체계 내부에서 발생하는 ‘체계 내 충돌’과 서로 다른 규범체계에 속한 규범들 간에 발생하는 ‘체계 간 충돌’을 구분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전자뿐이라고 한다. 가령 법규범과 도덕규범 간에는 충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도 언급했듯 이는 옳지 않다. 「메이네츠(Eduardo García Máynez, “Some Consideration on the Problem of Antinomies in the Law”, Archiv für Rechts- und Sozialphilosophie, Bd. XLIX, 1963. S. 1ff.)는 규범 간의 충돌들은 하나의 논리적 모순이라는 것, 하지만 그러한 충돌들은 단지 단일하고 동일한 규범적 질서의 규범들 사이에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하나의 도덕규범과 하나의 법규범 사이와 같이. 상위한 규범적 질서들의 규범들 간의 충돌인 ‘체계 간의 충돌’(intersystematic conflicts)과 구별하여, 단일하고 동일한 법질서의 규범들 사이에 혹은 단일하고 동일한 도덕질서의 규범들 사이의 충돌과 같은 것을 ‘체계 내적인’ 충돌들(intrasystematic conflicts)이라고 명명했다. 메이네츠는 나 스스로 이미 이전에 받아들인 것과 같이 체계 간의 규범충돌은 가능하지 않다고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 하나의 규범적 질서의 관점에서는 다른 규범적 질서가 효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거나, 다른 규범의 효력이 무시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이것은 틀린 말이다.」 그러나 메이네츠의 주장 가운데 규범충돌의 해결방식에 관한 입장은 전적으로 옳다. 그는 규범충돌의 해결은 항상 실정규범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즉 규범충돌을 해결하는 규칙 자체도 또 하나의 규범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상위법우선원칙이나 신법우선원칙과 같은 규칙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규칙은 충돌하는 규범들과 구별되는 별도의 규범이다. 「그럼에도 물론, 그가 10쪽에서 규범충돌들의 해결은 단지 하나의 실정 규범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을 때는[“언급된 모든 사례(즉 이것은 법규범들 사이의 체계 내적인 충돌들의 사례이다)에서 그 해결책은 실정법에서 발견되어야만 하며, 모순을 해결하는 규범은 모순을 만드는 규범들과는 항상 구별된다.”] 전적으로 그에게 동의해야만 한다.」(2편 147쪽) |
물론 충돌하는 규범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효력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법칙의 작용 결과가 아니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을 제거하는 것은 실효성 상실이나 폐지규범이다. 규범충돌은 해석이나 형식논리로는 해소되지 않으며, ‘신법은 구법을 폐지한다’는 원칙도 논리적 원칙이 아니라 실정법적 또는 실정도덕적 규범일 뿐이다. 이 점에서 규범‘충돌’은 명제‘모순’과는 전혀 다르다.
「두 개의 규범 중 하나의 규범의 효력을 폐지하거나 두 개의 규범 모두의 효력을 제거하는 것은 단지 규범을 만들어내는 절차에서, 특히 규범의 효력을 폐지하는 규범을 통해서 이뤄진다. 이미 아돌프 메르클(Adolf Merkl)이 <오스트리아 국가의 법의 단일성>(Archiv des öffentlichen Rechts, 1917, Bd. 37, S. 75ff)이라는 글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신법은 구법을 폐지한다(lex posterior derogat legi priori)라는 원칙은 논리적 원칙이 아니라 실증적 도덕(positive Moral) 또는 실정법의 규범이다. 하나의 규범과 그 규범의 효력을 제거하는 폐지규범 간에는, 후자의 효력으로 전자의 효력이 중단되는 것이므로, 어떠한 충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와 두 개의―존재하는―진술 사이의 모순과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 상호 충돌에 빠진 규범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어떠한 논리적 모순도 아니고, 논리적 모순(Widerspruch)과는 구별되는 반대(Gegensatz) 혹은 충돌(Widerstreit)인 것이다.」(1편 403-404쪽)
| [미주 149] 스티븐 툴민(Stephen Toulmin)은 윤리학의 관점에서 두 의무가 충돌할 때 위험의 크기를 비교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의무 중 어느 것을 위반하는 것이 더 큰 악을 가져오는지를 계산하여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방식은 규범이론의 관점에서는 충분치 않다. 규범충돌을 해결하는 근거는 단순한 결과평가가 아니라 규범으로부터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툴민(Stephen Edelston Toulmin, An Examination of the Place of Reason in Ethics, Cambridge 1960, S. 146ff.)은 ‘의무들의 충돌’ 사례로, 내가 존에게 책 한권을 특정한 한 시점에 돌려주기로 약속했는데, 그 시점에 나의 할머니가 병이 들었고, 나는 그녀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었다는 사례를 제시했다. 그리고 그는 이 충돌을―윤리학의 저자로서―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풀었다: “존에 대한 나의 약속을 어기는 것에 들어 있는 위험들이 바로 나의 할머니가 혼자 있을 때 나의 할머니에게 존재하는 위험보다 더 크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할머니와 함께 있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두 개의 충돌하는 주장을 고려할 때, 말하자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그중 하나를 무시함에 함유된 위험들을 생각해야만 하고, 그리고 두 개의 악(evil) 중에 보다 적은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2편 263쪽) 여기서 툴민은 할머니 곁에 머무는 것이 의무라는 결론을 실은 이미 전제하고 있다. 위험을 계산하는 과정은 결론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이미 받아들여진 판단을 정당화하는 역할만을 한다. 따라서 위험비교나 결과계산은 규범충돌을 해결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규범충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선택을 허용하는 규범이 존재해야 한다. 만약 그러한 규범이 없다면 한 규범을 따르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다른 규범의 위반을 의미하게 된다. 「할머니 곁에 머무는 것이 나의 의무라는 것은 이 사례에서 이미 전제되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위험에 대한 어떠한 형량도 필요하지 않다. 툴민은 계속해서 “따라서 행위의 옳음(정당함)에 대한 기본적인 심사이긴 하지만, 하나의 단일한 현재의 원칙에 대한 호소는 하나의 보편적 심사에 의존할 수는 없다: 이것이 실패하는 곳에서 우리는 상당한 (개연적인) 결과에 대한 우리의 추산으로 돌아가게 된다.”라고 한다.」(2편 263쪽) 두 규범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더 작은 악을 선택하는 것이 정당하려면 그것을 허용하는 규범이 존재해야 한다. 즉 그러한 선택은 하나의 실정적 규범에 의해 수권되어야 한다. 만약 그러한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다른 규범을 위반하게 된다. 이 경우 규범충돌은 규범체계 내부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실정법 영역에서는 이러한 충돌을 해결하는 규범이 없는 경우도 존재할 수 있다. 「단지 유효한 도덕의 하나의 실정규범이 나에게 이에 대해 권한을 부여한 경우에만, 그러한 하나의 충돌에서 보다 작은 악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나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만약 하나의 그런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중 하나의 규범의 준수(혹은 그것을 통해 구성된 의무의 이행)는 필연적으로 다른 하나의 규범의 침해와 결합된다.」(2편 263쪽) 어떻든, 규범이 아닌 요소에 의해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규범의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 |
법과 도덕처럼 서로 다른 규범질서에 속한 규범들 사이에서는 충돌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특정 질서의 관점에서는 그 질서에 속한 규범만 유효하므로, 다른 질서의 규범은 애초에 효력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충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질서의 관점만을 독단적으로 절대화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하나의 행위는 동시에 법질서와 도덕질서 양쪽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경우, 법적으로는 허용되거나 요구되는 것이 도덕적으로는 금지되거나 비난될 수 있다.
「도덕질서(Moralordnung)와 법질서(Rechtsrordnung) 사이와 같이, 상이한 규범질서(normative Ordnung)에 속하는 두 개의 규범들 사이의 충돌은 내가 주장한 바와 같이 특정 규범질서의 관점에서 단지 그 규범질서에 속하는 규범들만이 유효하고, 따라서 예를 들어 도덕질서라는 하나의 규범질서에 속하는 규범과 법질서라는 다른 하나의 규범질서에 속하는 하나의 규범이 충돌하는 경우에는―그 하나의 질서의 관점에서―이 질서에 속하는 규범과 충돌하는 다른 질서에 속하는 규범은 효력이 없다거나 혹은 그 규범의 효력은 고려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혹은 그와 반대의 주장으로 (규범의 충돌이) 부인될 수는 없다. 도덕질서는 법을 만드는 개인들(Recht-setzende Individuen)에게 하나의 특정한 내용의 법규범을 만들거나 만들지 말도록 지시하는 식으로 법을 만드는 개인에게 특정한 도덕규범들이 향해져 있는 한 법질서와 연관된다. 생부에 의한 자식의 의도적 살해가 불가벌인 하나의 법질서는 현대의 서구 국가에 유효한 도덕에 따르면 도덕위반이며,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다. 특정 행위에 대해서 살인죄를 규정하고 있는 법질서도 인간을 살해하는 것을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금지하는 도덕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마찬가지이다. 사실 법(Recht)이 특정 내용의 도덕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특정 법규정의 적용에서는 하나의 특정 도덕에 부합하는 행위가 위법한 것으로, 하나의 특정 도덕을 침해하는 행위가 적법한 것으로 판단될 수도 있다. 법과 도덕은 단일하고 동일한 행위에 연관될 수 있는 것이다.」(1편 405-406쪽)
물론, 상이한 질서에 속하는 규범들 간에 충돌이 있다고 해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효력을 제거할 수는 없다. 도덕은 법을 비난할 수 있고, 법은 도덕에 합치하는 행위를 제재할 수 있다. 그러나 비난이나 제재는 어디까지나 각 질서 내부의 반응일 뿐, 상대 질서의 규범을 무효화하는 힘은 아니다. 가령 자연법이 실정법과 충돌할 경우 실정법의 효력을 박탈한다는 사고는 잘못된 것이다. 한 규범질서는 다른 규범질서의 효력을 생산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
「도덕이 법규범에 효력을 부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은 법규범의 효력을 폐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소위 자연법이론의―그것(자연법)은 법을 만드는 개인들에게 향해진 도덕의 규범들이다―오류들 중 하나는 자연법은 그와 충돌하는 실정 법질서의 규범의 효력을 폐지한다고 받아들인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하나의 실정법이 그와 충돌하는 자연법의 효력을 폐지하기 어렵듯이 그렇지가 않다. 도덕규범과 법규범 사이에 규범충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도덕질서의 관점에서도 법질서의 관점에서도 부정될 수 없다.」(1편 406쪽)
또 법적용기관이 도덕규범을 적용할 수 없다고 해서 그 도덕규범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사형을 규정하는 법질서 아래에서 법관은 법규범에 따라 사형을 선고해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도덕규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법질서가 법관에게 그 도덕규범을 적용근거로 삼지 못하게 하고 있을 뿐이다. 이 경우 법관의 판결은 법적으로는 유효할 수 있으나 도덕적으로는 비난될 수 있다. 법규범과 도덕규범은 서로를 무효로 만들 수 없다.
「법을 적용하는 기관, 특히 법관에게는 이러한 실정 법규범을 통해 단지 이러한 법질서의 규범들을 하지만 도덕규범들은 만약 이러한 법질서를 통해서 위임되어 있는 경우에만 적용하도록 지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로써 법관에게는 법규범과 유효한 도덕규범 사이에 충돌이 있는 경우 이러한 도덕규범을 적용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도덕규범이 그럼에도 여전히 효력이 있다는 것은 도덕규범과 충돌하는 법관의 판결은 도덕적으로 승인되지 않는다는 것에서 나타난다.」(1편 408쪽)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규범을 무효로 만드는 다른 규범이 등장하면, 그것도 두 규범 사이의 충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폐지규범은 다른 규범과 반대되는 내용을 나란히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범의 효력을 끝내는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두 유효한 규범이 병존하면서 상반된 요구를 하는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 명제논리학의 차원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관계는 없다. 참인 명제가 나중에 다른 명제에 의해 ‘폐지’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규범충돌과 하나의 규범과 그 규범의 효력을 폐지하는 폐지규범 사이의 관계는 반드시 구별되어야만 한다. 후자의 관계는 결코 규범충돌이 아닌 것이다. 명제논리학 영역에서는 폐지의 기능에 유추할 만한 것이 없다. 논리적 모순관계에 있는 두 개의 명제 중 다른 하나가 참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거짓이다. 그 명제는 참(이라는 속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애당초 참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하나의 명제가 참이면, 그 명제는 자신이 참이라는 것을 잃어버릴 수 없다. 풀리지 않는 논리적 모순, 즉 두 개의 상호 모순관계에 있는 명제 중 두 명제가 모두 참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1편 408쪽)
모순되는 두 명제는 동시에 참일 수 없지만, 충돌하는 두 규범은 동시에 유효할 수 있다. 오히려 두 규범이 모두 유효하기 때문에 충돌이 발생한다. 이 점에서 규범충돌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규범적 질서 안의 반대 또는 대립이다. 규범의 효력은 명제의 참됨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규범의 관념적 실존이다. 그래서 두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들 사이에 모순이 생길 수는 있어도, 규범들 사이에는 명제모순과 같은 형태의 모순이 성립하지 않는다.
「충돌에 빠진 두 개의 규범 사이에는 전혀 논리적인 모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충돌하는 두 개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들 사이에도 논리적 모순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두 개의 진술의 대상을 구성하는 규범은 병존한다. 하지만 모순관계에 있는 두 명제의 대상을 구성하는 사실은 병존할 수 없다. 논리적 모순은 단지 하나의 특정 규범은 유효하다는 명제와 이 규범은 효력이 없다는 명제 사이에 있는 것이다. 이 중 하나의 명제가 참이라면 다른 하나는 참일 수 없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은 하나의 명제가 참이라는 것에 유사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사실의 존재에 유사한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의 규범의 효력은 그―관념적―실존이기 때문이다.」(1편 409쪽)
규범학에 모순율을 적용하려는 생각은 명제의 진실과 규범의 효력 사이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사성을 가정하는 데 기초한다. 규범은 참도 거짓도 아니며, 충돌하는 두 규범은 동시에 유효할 수 있으므로, 모순율을 규범에 유추적용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유추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두 개의 규범이 상호 충돌할 때는 양자 모두 유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규범충돌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한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유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순율이라는 논리적 원칙을 규범들에 유추 적용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1편 411쪽)
「일마 타멜로(Ilmar Tammelo)는 자신의 논문 <상징적 법논리학에 관한 스케치(Sketch for a Symbolic Juristic Logic)>(Journal of Legal Education, vol. 8, 1955, s. 277ff.)에서 규범충돌은 하나의 논리적 모순을 말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타멜로는, 두 개의 법규범이 존재하고 그중 하나의 규범은 특정한 하나의 조건에 특정한 하나의 결과를 연결하고 있고, 다른 하나의 규범은 동일한 조건에 그 반대의 효과를 연결하고 있다면, “… 법적 결론은 … 상호모순적”이고, “이러한 법규들은 양립불가능한 상호모순이다.”(같은 글, 300쪽)라고 말했다. 이것으로부터 그는 “만약 우리가 위에서 서술한 규범의 법적 개념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상호 모순적인 요소들로 이뤄진 개념정의가 될 것이고, … 그 개념정의는 아무것도 언급하는 대상이 없는 언급으로 구성될 것이며, 그 자체 무의미한 것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것은 옳지 않다. 두 규범 중 각각의 규범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양자가 모두 유효하기 때문에, 그 규범이 상호 충돌에 빠진다는 것은, 마치 두 개의 힘이 하나의 지점을 향해 반대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듯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 규범들의 효력은 바로 그 규범의―관념적인―실존이지, 그 진실이 아니다. 무의미성은 단지 논리적 모순관계에 있는 두 개의 진술들을 말하는 것이며, 예컨대 단지 두 개의 명제 중 단지 하나의 명제가 참일 수 있는 한에서는 두 진술이 모두 참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상호 충돌하는 두 개의 규범은 모두 유효할 수 있다. 단지 양자가 모두 유효한 경우에만 충돌이 있는 것이다. 타멜로가 규범충돌은 무의미하다는 입장에 이른 것은 충돌하는 두개의 규범은 하나의 논리적 모순을 의미한다는 잘못된 가정 때문이다.」(1편 412쪽)
| [미주 151] R. M. 헤어는, 모순율이 진술문뿐 아니라 명령문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서로 동시에 충족될 수 없는 두 명령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군함의 제독과 선장이 동시에 서로 반대되는 조타 명령을 내리는 사례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조타수는 두 명령을 동시에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두 명령은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헤어(R. M. Hare, The Language of Morals, Oxford 1964, S. 22)는 모순율은 … ‘명령문’에도 적용가능하다는 입장을 주장한다. … 그는 다음과 같이 그 예를 제공한다(23쪽): “그들의 기함인 순항함의 해군제독과 선장이 거의 동시에 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타수에게 고함을 질렀는데, 한 명은 ‘좌현으로 바짝 틀어!’, 다른 한 명은 ‘우현으로 바짝 돌려!’라고 했다. … 두 개의 명령들은, 그 둘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은 자체모순적이라는 의미에서, 상호모순된다는 것이 된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두 개의 예견들, 즉 ‘너는 좌현으로 바짝 틀게 될 것이다.’와 ‘너는 우현으로 바짝 틀게 될 것이다.’라는 예견 사이의 관계와 동일하다. 어떤 명령들은, 물론 반대됨이 없이 모순될 수 있다; ‘문을 닫아라’의 단순한 모순은 ‘문을 닫지 말라.’이다.” 그리고 24쪽에서 헤어는 “명령들은 서로 모순될 수 있다 … ”라고 한다.」(2편 265쪽) 그러나 모순율은 진술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두 진술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은 그중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거짓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명령문은 참이나 거짓의 값을 가지지 않는다. 명령은 사실을 기술하는 진술이 아니라 의지를 표현하는 규범이기 때문이다. 두 명령 사이에는 진술 사이의 의미에서의 모순이 존재할 수 없고 단지 ‘충돌’만 있을 수 있다. 이 충돌은 논리적 모순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진다. 「이러한 입장에 반박해서 언급되어야 할 것은 모순율의 논리적 원칙은, 만약 두 개의 진술이, 예를 들어 “이 목초지는 녹색이다.”, 그리고 “이 목초지는 녹색이 아니다.”와 같이, 서로 모순되면, 만약 그중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참이 아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거짓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문들을 닫아라.”와 “그 문들을 닫지 마라.”라는 것과 같은 명령(문)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다. 양 진술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모순은, 달리 말해 양 명령들 사이에는 존재할 수 없다. 단지 하나의 유비적(유사한) 의미에서만 ‘모순’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2편 265-266쪽) 예를 들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시에 서로 반대되는 명령을 내리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두 명령은 모두 유효할 수 있는바, 두 사람 모두 명령할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명령을 받은 사람은 두 유효한 명령 간 충돌상황에 놓이게 된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 문들을 닫아라.’라고 명령하고, 엄마는 아들에게, ‘그 문을 닫지 말라’고 명령한다. 양자는 그 아들에게 명령할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명령은 유효하다. 하나의 명령충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헤어가 제시한 첫 번째 사례에 대해서도 맞는 말이다. 조타수는 두 개의 유효한 명령에 직면한 것이다. 논리학은, 만약 그 하나의 명령이 유효하면, 다른 명령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양자가 다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명령의 수신자는 양 명령을 통해서 하나의 충돌에 빠지게 된 것이고 그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모순과는 다른 것이다.」(2편 266쪽) 진술의 경우 두 모순되는 진술 중 하나는 반드시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두 진술이 모두 거짓일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명령의 경우 서로 충돌하는 두 명령이 동시에 유효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른바 배중률 또한 규범에 적용되지 않는다(2편 266쪽). |
◎ 규범의 준수와 명제의 진실
어떤 학자들은 명제의 진실과 규범의 준수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보고, 이를 통해 논리적 원칙을 규범에도 적용하려고 했다. 즉 명제가 참이라는 것은 사실과의 일치이고, 규범이 준수된다는 것은 행위가 규범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규범논리 역시 명제논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다.
「또한 명제(Aussage)의 진실과 규범의 준수(Befolgung)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논리적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 시도도 원했던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다.」(1편 413쪽)
물론 ‘문을 닫아라’와 ‘문을 닫지 말라’는 명령은 동시에 준수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단지 실천적 충돌일 뿐 논리적 모순과 유사한 것이 아니다. 논리적 모순은 어디까지나 명제의 진리값과 관련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명제의 속성이며, 어떤 명제가 사실과 일치하면 우리는 그것을 참이라고 말한다. 반면 규범의 준수는 규범의 속성이 아니라 행위의 속성으로, 어떤 행위가 규범에 부합할 때 우리는 이를 규범준수라고 말한다.
「‘문을 닫아라’와 ‘문을 닫지 마라’라는 두 개의 명령 사이에는 어떠한 논리적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두 개의 명령이 동시에 동일한 사람에 의해 준수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두 개의 명령 사이에 논리학이 ‘모순’이라고 표현하는 관계가 존재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1편 414쪽)
「참은 이미 강조했듯이 진술의 속성이다. 하나의 명제가 그것이 언급하는 사실에 부합하는 경우 그 명제는 참이다. 그러나 하나의 규범을 따른다는 것은 규범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의 속성이다. 이러한 행위가 규범에서 요구된 행위와 일치할 때 우리는 그것을 규범의 준수라고 부른다.」(1편 414-415쪽)
두 규범이 충돌하는 경우, 한 사람이 같은 행위로 두 규범을 동시에 준수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나의 규범은 살인을 언제나 금지하고, 다른 규범은 전쟁이나 사형집행의 경우 살인을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 동일한 행위는 한 규범의 준수이면서 다른 규범의 침해가 된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성립하는 것은 규범 자체에 대한 모순율의 적용이 아니다. 성립하는 것은 오직 ‘어느 규범이 이 행위를 통해 준수되었다’는 진술들 사이의 논리적 배제관계이다. 다시 말해 논리적 모순은 규범 자체 사이가 아니라, 규범의 준수 여부를 말하는 명제들 사이에서만 발생한다.
가령 ‘모든 인간은 죽는다’와 ‘모든 인간은 죽지 않는다’ 같은 일반 명제들 사이의 모순은 시간적 교대나 상황 변화에 의해 해소되지 않는다. 둘 중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고, 이 관계는 일정한 행위의 지속기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충돌하는 규범은, 한 시점에서는 이쪽이 준수되고 다른 시점에서는 저쪽이 준수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규범충돌에서 나타나는 배제관계는 명제의 논리적 모순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 점에서 모순율은 규범에 적용된다고 말할 수 없다. 적용되는 것은 언제나 ‘이 규범은 이 행위에 의해 준수되었다’ 혹은 ‘준수되지 않았다’라는 진술들뿐이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라.”고 명령하고,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지 마라.”고 명령한 경우, 아들은 한 번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고 어머니의 명령을 어길 수 있고, 다른 기회에는 역으로 아버지의 명령을 침해하고 어머니의 명령을 준수할 수도 있다. “인간은 죽는다.”와 “인간은 죽지 않는다.”와 같이 두 개의 일반 명제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경우에는 이와 모종의 유사한 것은 가능하지 않다. 둘 중 하나의 명제의 진실과 다른 하나의 명제의 진실 간의 불일치는 두 개의 규범 준수가 일치될 수 없는 경우와 유사하게, 예를 들어 하나의 명제 또는 다른 하나의 명제를 그 목적(의미)으로 하는 행위의 지속기간에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규범충돌의 경우 둘 중 하나의 규범이 하나의 특정 행위를 통해 준수된다면, 나머지 규범은 이 행위를 통해서 침해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충돌하는 규범들에 모순율이라는 논리적 원칙의 적용을 의미하는 것도, 유추적용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러한 원칙을 규범의 준수에 관한 명제(진술)에 적용한 것이다.」(1편 420-421쪽)
4.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과 충돌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
규범과, 그 규범이 유효하다는 사실에 관한 진술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은 다른 모든 진술과 마찬가지로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그러나 규범 자체는 참이나 거짓의 담지자가 아니다. 따라서 모순율이나 배중률이 적용될 수 있는 1차 대상은 규범이 아니라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이다. 예컨대 ‘이 규범은 유효하다’와 ‘이 규범은 무효다’라는 두 진술은 전형적인 모순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그것이 곧 상호 충돌하는 두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들이 논리적 모순이라는 뜻은 아니다.
「재차 강조되어야만 하듯이, 규범과 그 규범에 관한 명제, 즉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은 구별되어야만 한다. 규범들의 효력에 관한 명제(진술)들은 다른 모든 명제들과 같이 참 또는 거짓이다. 그 규범이 효력이 있으면 그 규범의 효력에 관한 명제는 참이고, 그 규범이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인 경우에는 유효한 것이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명제는 그 의미가 규범인 의지적 행위의 존재에 관한 명제는 아니다. 두 명제는 반드시 서로 구분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규범의 효력에 관한 명제는 단지 그 의미가 규범인 의지적 행위의 존재에 관한 명제가 참인 경우에만 참이다. 규범들의 효력에 관한 명제는 참 또는 거짓일 수 있기 때문에 논리학의 원칙들은 규범들의 효력에 관한 명제에 적용 가능하다.」(1편 421-422쪽)
하나의 규범이 어떤 행위를 요구하고, 다른 규범이 그 행위의 부작위를 요구하더라도, 양 규범이 모두 유효할 수 있다면 그 각각의 효력에 관한 진술도 모두 참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는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라는 모순관계가 없다. 심지어 이것은 반대관계로도 정리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양자가 모두 거짓일 수도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둘 다 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충돌하는 규범들의 효력에 관한 진술들은 명제논리학에서 말하는 모순대당도, 반대대당도 이루지 않는다. 상충하는 규범들은 동시에 유효할 수 있다.
「상호 충돌상태인 두 개의 규범 모두 유효할 수 있기 때문에―그렇지 않다면 규범충돌이 아닐 것이다―하나의 규범이 하나의 특정 행위를 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다른 하나의 규범이 그 행위를 하지 말아야(부작위)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양 규범의 효력에 관한 명제들은 어떠한 논리적 모순도 보이지 않는다. 두 개의 규범의 효력을 주장하는 문장들, 즉 ‘A이어야만 한다.’와 ‘A가 아니어야만 한다.’는 명제들은 두 개의 규범이 모두 유효하기 때문에 양자는 모두 참이므로 어떠한 모순적인 반대·모순대당(Kontradiktorischer Gegensatz)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규범들의 효력에 관한 두 개의 명제 간의 반대가 하나의 반대관계·반대대당(konträr)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따라서 그중 하나의 명제가 참이라면 다른 하나의 명제는 반드시 거짓이어야만 한다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제3의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양자 모두 거짓일 수는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여기에 빨간 사과가 있거나 혹은 사과라고는 전혀 없는 경우에 단일하고 동일한 (즉 바로 그 하나의) 사과에 대한, 1) 여기 녹색 사과가 있다. 2) 여기 노란색 사과가 있다는 진술들에서와 같이, 배중률은 적용 불가능하다.」(1편 422-423쪽)
5. 해석을 통해서는 규범충돌이 해소되지 않음
만약 충돌이 논리적 모순이라면, 해석은 그 의미를 바로잡음으로써 충돌을 제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법해석은 법인식의 행위일 뿐, 새로운 효력을 창설하거나 기존 효력을 제거하는 규범설정행위가 아니다. 해석은 충돌하는 일반규범 가운데 어느 하나를 특정한 개별사건에 적용하도록 선택할 수는 있어도, 일반규범들 사이의 충돌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개별 사건에서 선택이 이루어져도, 일반규범의 층위에서는 충돌이 그대로 존속한다.
「충돌의 해결, 특히 법규범 사이의 충돌의 해결은 해석의 방법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입장은 규범충돌에 모순율이라는 논리적 원칙이 적용 가능하다는 잘못된 가정과 연관되어 있다. 법규범들의 해석은 법을 인식하는 것(Rechtserkenntnis)이기 때문에 법의 인식은, 법규범들의 효력을 폐지할 수 있는 그러한 법규범들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즉 효력을 창설할 수 없고, 법규범의 효력을 폐지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해석은 규범의 충돌을 해결할 수가 없다. 법을 적용하는 기관이 두 개의 일반규범들 간에 충돌이 있는 경우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의 의지적 행위에서 두 개의 규범 중에 하나 혹은 다른 하나를 적용하도록 결정하는 것인데, 하지만 그럼에도 두 개의 일반 법규범 사이의 충돌은 여전히 존속하는 것이다.」(1편 426쪽)
| [미주 155] 칼리노프스키는 법체계가 본질적으로 완전하고 모순이 없는 체계라고 본다. 따라서 법규범 사이의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 그것은 해석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법해석의 기능은 모호함을 제거하고 모순을 제거하며 법의 공백을 채우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해석규칙도 법체계의 일부라고 본다. 즉 해석은 법규범체계 내부에서 작동하는 규칙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칼리노프스키(George Kalinowski, “Interprétation Juridique et Logique des Propositions Normatives”, Logique et Analyse, Nouvelle Série, 1959)는 법의 충돌은 해석으로 해소될 수 있다는 이론의 전형이다. 그는 128쪽 이하에서, “한 사회에서 유효한 법적 규범의 체계는 … 모든 행위에 대해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법적 성격을 부여하는 법규범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완전한 시스템이다. 그리고 또한 동일한 장소, 시간, 그리고 동일한 관점에서 동일한 사람의 행위를 명령하고 금지하는 두 개의 규범들을 함유하지 않고, 허용하고 허용하지 않는 두 개의 규범들을 함유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모순적이지 않다.”라고 설명한다.」(2편 272쪽) 그러나 법학은 규범을 창설하는 학문이 아니라 규범을 인식하고 기술하는 학문이. 따라서 법학이 구성한 해석규칙은 법규범이 될 수 없다. 만약 법적용기관이 충돌하는 규범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개별규범의 창설이다. 즉 법관은 해석이라는 이름 아래 실제로 규범창설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규범충돌이 해석에 의해 해결된다는 설명은 실제 현상을 잘못 기술한 것이다. 「해석원칙(규칙)들이 법학으로부터 구성·표현되는 한, 그것은 법규범일 수 없다. 왜냐하면 법학은 단지 법규범을 인식하고 기술할 수 있을 뿐이지,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칼리노브스키가 ‘법실무가(juristes-praticiens)’를 법을 적용하는 기관들로 이해했다면, 만약 그 기관들이 규범충돌의 경우에 둘 중 하나를 적용한다면, 그들이 한 것은, 해석이라는 핑계(Prätext) 아래, 충돌하는 양 일반규범의 하나에는 부합하지만, 다른 하나에는 부합하지 않는 하나의 개별규범을 설정한 것이다.」(2편 273쪽) <순수법학(제2판)>은 규범충돌이 해석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같은 책은 규범충돌 그 자체는 논리적 모순으로 이해될 수 없지만,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에는 논리 원칙이 적용될 수 있으므로, 간접적으로 모순율이 규범에도 적용된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 입장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또한 나는 이전의 나의 글에서(Reine Rechtslehre, 2. Aufl., 1960, S. 209ff.를 비교하라) 규범충돌은 해석을 통해서 해소될 수 있고 반드시 해소되어야만 한다는 입장을 주장했다(같은 책, 210쪽). 나는 보다 정확히는 하나의 규범의 충돌을 논리적인 모순으로 보는 것을 거부했는데, 왜냐하면 논리적인 원칙들과 특히 모순율은 단지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진술(명제)들에만 적용 가능하기 때문이고, 규범들은 참도 거짓도 아니고, 유효하거나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논리적 원칙들과 특히 모순율은, 그것들은 진실 혹은 거짓일 수 있는 규범들의 효력에 관한 진술에 적용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또한 규범들에, 그리고 특히 법규범들에 적용 가능한 것이라고 받아들였었다. 이 입장을 나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2편 273-274쪽)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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