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켈젠(김성룡 역), 《규범의 일반이론》, 아카넷, 2016
Hans Kelsen, Allgemeine Theorie der Normen (1979)
제45장 진술의 진실과 행위의 선함
‘진술의 참’과 ‘행위의 선함’은 서로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얼핏 보면 둘 다 어떤 대상에 붙는 평가처럼 보인다. 우리는 진술에 대해서는 참이라고 말하고, 행위에 대해서는 선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도 하나의 가치이고 선함도 하나의 가치라면, 양자 사이에 병렬적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유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예컨대 하나의 진술(언명)의 진실과 하나의 규범의 효력 사이는 아니라고 해도, 하나의 진술의 진실임과 하나의 행위의 선함 사이에 병렬 혹은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려는 경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인’ 혹은 ‘선한’은 양자 모두 사실상 속성(특성)들이다. 하나의 행위는 그것이 이러한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에 부합할 때 ‘좋다·선하다’는 것은 가치이고, 그 가치를 구성하는 것이 법규범인지 혹은 하나의 도덕규범인지에 따라 하나의 도덕적 가치 혹은 하나의 법적 가치이다. 우리가 또한 진실을 하나의 ‘가치’로 고려한다면, 하나의 실천적인 가치로서 하나의 도덕적인 혹은 법적인 가치와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의 논리적인 혹은 이론적인 가치로 생각한다면, 그들이 바라는 진술과 규범 간의 병렬 혹은 유사점을, 그 양자는 그 가치들과 무언가 하나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1편 337-338쪽)
어떤 행위가 ‘선하다’는 평가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그 행위를 선한 것으로 정하는 규범이 이미 효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선함은 규범매개적 개념이다. 반면 어떤 진술이 참이라는 판단은, ‘진술은 참이어야 한다’는 규범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진술은 그 대상에 부합하면 참이고, 부합하지 않으면 거짓이다. 선함을 말하는 판단은 진정한 의미의 가치판단이지만, 참을 말하는 판단은 같은 의미의 가치판단이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이것도 가능하지 않다. 하나의 진술의 진실임과 그 행위의 선함 사이, 하나의 진술이 참이라는 판단과 하나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좋다는 판단 사이에는 어떠한 병렬 혹은 유사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후자는 진정한 가치판단이지만, 전자는 그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행위가 선하다는 진술은 이러한 행위를 당위된 것으로 규정하는 하나의 규범의 효력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의 규범을 통해서만, 이러한 단어의 특수한 의미에서의 하나의 가치, 즉 객관적인 가치가 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진술이 참이라는 판단은, 그 진술들이 참이어야만 한다고 규정하는 하나의 규범의 효력을 전제하지 않는다. 이러한 판단은 그러한 저마다의 전제(조건) 없이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 진술이 진술의 대상에 부합하고, 주요(전형적인) 사례에서 (즉 실제의 사실에 관하여 진술하는 경우에) 만약 그 진술이 관계하고 있는, 즉 그 진술의 대상인 실제에 부합하는 경우에는 참이기 때문이다.」(1편 338쪽)
| [미주 112쪽] 죙엔(Gottlieb Söhngen)은 사고의 형식적 정확성과 실질적 진실의 관계가, 법의 형식적 합법성과 실질적 정의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의를 법의 “진실”에 해당하는 것으로, 실정법상의 합법성을 법적 “정확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켈젠은 이러한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형식 논리의 올바름은 실질적 진실을 전제하지만, 실정법의 합법성은 정의를 전혀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관계 사이에는 구조적인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죙엔(Gottlieb Söhngen, Grundfragen einer Rechtstheologie, München 1962, S. 22ff.)은 사고의 형식적 올바름(Richtigkeit)에 대한 실질적 진실의 관계와 형식적인 합법성 (Rechtsmäßigkeit)에 대한 실질적 정의의 관계 사이에는 하나의 유사점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곳에서 그는 정의를 법의 ‘진실’로 실정적 합법성(positive Rechtsmäßigkeit)을 ‘법적 정확함(juristische Richtigkeit)’으로 표시했다. 이러한 유사점(Analogie)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정적인 적법성은 정의를 결코 전제하지 않는 반면에, 형식논리적 진실 혹은 올바름은 정말 본질적으로 실질적인 진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논리학은 만약 하나의 진술이 실질적으로 참이라면 이러한 진술에 모순관계에 있는 진술은 거짓이라는 것을 말한다. 만약 하나의 삼단논법의 두 개의 전제들이 실질적으로 참이라면 결론은 참이다.」(2편 170쪽) 논리학에서 형식적 올바름은 실질적 진실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실정법에서 합법성은 정의와 아무런 필연적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형벌이 법률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면, 그 형벌이 정의로운지 여부와 관계없이 적법하게 집행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정의는 실정법의 효력조건이 아니다. 「실질적인 진실에 대한 관계는 형식논리적인 진실에 내재한다. 하지만 하나의 실정적 적법성에 대한 진술에는 정의에 대한 관계가 내재하지 않는다. 사형선고를 받은 모살자에 대한 사형집행은, 만약 실정법이 모살의 경우에 사형을 규정하고 있다면, 이것이 정의로운지 부정의한지와 무관하게, 적법하다. 정의의 무의존성·독자성은 법의 실정성(positivität)의 본질적인 표지이다.」(2편 171쪽) 진실은 진술의 속성이고, 규범은 진술이 아니라 의지행위의 의미이다. 규범은 진실하거나 거짓일 수 없으며, 단지 유효하거나 무효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정의를 법의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념적으로 잘못된 표현이다. 「법의 ‘진실’은 말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법은, 또한 정의로운 법도 규범이고―규범으로서―진실도 거짓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진실은 하나의 진술의 속성이고 하나의 진술은 하나의 사고행위의 의미이다. 정의는 하나의 규범의 속성이고 규범은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다. 사고함과 원함은 두 개의 전적으로 상이한 정신적인 기능들이다.」(2편 171쪽) 만약 신의 영역에서 사고와 의지가 동일하다면, 진실과 정의가 동일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논리와 경험을 넘어서는 신학적 가정일 뿐이다. 그러한 전제 위에서는 합리적 논의가 불가능하다. 더욱이 인간의 정의를 ‘행동하는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부적절한 표현이다. 「하지만 신에게서, 즉 모든 인간적인 경험의 저편에 있는, 따라서 인간의 논리의 저편에 놓여 있는 공간에서는 사고와 원함은 서로 같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신은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를 앎으로써 선한 것이 존재해야만 하고 악한 것은 존재하지 않아야만 한다고 원하는 것이다. 신에게서 진실과 정의는 하나이다. 만약 죙엔이 ‘신의 진실은 그의 활동하는 정의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합리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무언가를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인간의 정의는 우리의 활동하는 진실이다.’라고 덧붙인다면, 그는 당치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2편 171쪽) |
보통 진실을 도덕적 가치와는 다른 종류의 가치, 곧 논리적 또는 이론적 가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가치는 규범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인식의 결과인 참을 가치라고 부르는 순간 논리학을 규범학처럼 이해하는 방향으로 미끄러지게 된다. 논리학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명령하는 학문이 아니다. 사고행위를 지휘하는 훈령이 아니라, 생각된 것과 진술된 것의 관계를 분석하는 학문이다.
「진술들은 진실한 것(참)이어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그래서 진실을 논리적 가치로 구성하는 논리학의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학은, 그것이 특정한 하나의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규범들을 설정한다는 의미에서도, 혹은 윤리학이 실정적 도덕규범들을 기술하듯이, 하나의 다른 권위자들로부터 만들어진 사고규범들을 기술한다는 의미에서도, ‘규범적’ 학문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이성만이 이러한 권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인식능력으로서―단지 의지적 행위의 의미일 수 있는 어떠한 규범도 설정할 수 없다는 것은 앞에서 칸트의 하나의 입법의 이성으로서, 실천적 이성개념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나온다. 반대입장은 논리학의 윤리화에 이르게 된다. 이 입장은 논리학의 원칙들은 ‘진실’에 연관되어 있고, 진실은 가치로 파악된다는 것에 소급한다. 만약 논리적 원칙들이 하나의 가치로서 진실(참)을 구성한다면 그것은 필히 규범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단지 규범들만이 하나의 가치를 구성하기 때문이다.」(1편 340-341쪽)
| [미주 114] 후설은 논리학이 규범적 분과학인지 이론적 분과학인지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고, 실제로 논리학을 규범적 분과학으로 보는 입장을 취했다. 그에 따르면 논리학은 학문 일반의 가능조건을 해명하고, 학문들이 진실을 추구할 때 따라야 할 일반적 규범과 규칙을 세우는 역할을 맡는다. 즉 논리학은 단순히 진실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실을 향한 올바른 절차와 방법을 규범화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논리학의 과제는 단지 개별 학문들의 서술을 외부에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일반이 진실을 추구하는 방식에 대한 일반 규범과 규칙을 세우는 것이다. 여기서 후설은 논리학을 단순한 이론이 아닌, 규범을 세우는 분과학으로 자리매김하는 듯 보인다. 과연 후설이 말하는 ‘규범적’의 뜻이 단순한 비유인지, 아니면 실제 규범설정인지를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논리학이 하나의 규범적인 분과학인지 혹은 이론적인 분과학인지에 대한 논쟁적 문제에 관해서는 후썰(Husserl, Logische Untersuchungen, 5. Aufl., Tübingen 1968, 1. Bd., S. 7ff.)을 비교하라. 후썰 스스로도 논리학을 ‘규범적인 분과학’으로 보았다. 그는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한 것에 따를 때 논리학은 하나의 과학이론이라는 여기서 문제되는 의미에서 규범적인 분과학이 된다.”(같은 책, 26쪽)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의 과학·학문의 존재는 과학·학문이론을, 즉 바로 하나의 논리학을 필요하게 만든다(16쪽). 하나의 학문들의 원칙들(문장들)의 진실은 반드시 ‘근거지워진’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지움은 학문이론으로서 논리학이 수행한다고 한다. “우리는 근거지움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은 학문들을 가능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학문들과 함께 또한 하나의 학문이론, 하나의 논리학을 가능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학문들이 방법론적으로 진실을 추종하여 진행한다면, 그 모든 학문들은 그렇지 않으면 숨겨진 채 있을 진실 혹은 개연성을 깨닫기 위해 많건 적건 인공·기교적인 보조수단을 사용한다. … ” 이제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들의]그러한 진행방법을 위해 일반적인 규범들을 설정하고 그와 동시에 상이한 사례의 유형에 따라 그것을 발견하는 구조들에 대한 규칙들도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17쪽).」(2편 172-173쪽) 후설은 논리학이 학문의 ‘이념’을 연구함으로써 규범적 성격을 띤다고 말한다. 즉 실제로 존재하는 학문들이 참된 학문이라는 이상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판단하려면, 먼저 학문의 이념이 무엇인지가 정해져 있어야 하는바, 규범적 학문이란 어떤 대상이 일정한 근본척도나 최고목적에 적합한지를 판정할 수 있게 해 주는 일반원칙들을 정초하는 학문이며, 그게 바로 논리학이라는 것이다. 이 설명은 표면상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실은 규범과 가치판단 간의 경계를 교묘히 흐리고 있다. ‘어떤 것이 규범에 상응한다’는 식의 일반문장은 이미 규범을 전제하는 가치판단인데, 후설은 오히려 그것을 규범적 학문의 토대로 놓으려 하기 때문이다. 「나중(26쪽)에는, 논리학은 … 우리가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학문들이 그의 이념에 부합하는지를, 혹은 어느 정도까지 학문들이 그 이념에 다가섰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그것과 충돌하는지를 측정할 수 있기 위해서 … “그것(논리학)이 무엇이 학문의 이념을 형성하는 것인지를 연구하려고 함으로써 ‘규범적인 학문으로’ 나타난다.”라고 한다. 이러한 학문의 이념은―후썰이 앞에서 말한 것에 따를 때―단지 진실일 수 있다. 즉 후썰이 ‘규범적인 학문의 본질’로 표현한 것은, “학문들이, 그곳(일반적인 원칙들)에서 규범화하는 기본측정값·근본척도―예를 들면 이념 혹은 하나의 최고의 목적―와 관련하여 특정한 표지들이 주어지는 일반적인 원칙들을 근거지운다는 것이다.” (근본)척도에 걸맞는다는 것을 후썰은 “근본규범 Grundnorm에 상응하기 위해서 하나의 객체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야만 하는가.”(27쪽)라는 것으로 이해했고, 이에 대해 나중에는, 그것(근본규범)은 ‘[하나의 규범적 분과의] 모든 규범적인 문장들에 규범화의 사고를 집어넣은 것’이라고 했다.」(2편 173쪽) 가령 ‘인간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규범이 있고, ‘어떤 사람이 원수를 사랑했다면 그 행위는 그 규범에 적합하다’라는 일반 문장이 있을 수 있다. 후설 식으로 보면 후자가 규범적 학문이 근거지우는 일반 명제가 된다. 그러나 ‘적합하다’는 말은 이미 어떤 규범이 유효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가치판단이다. 가치판단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규범이지, 반대로 규범을 기초 짓는 것이 가치판단이 아니다. 「내가 후썰을 바르게 이해했다면, 규범학으로서의 윤리학은 만약 한 인간이 그의 원수를 사랑한다면 그의 행위는 ‘인간들은 그의 원수를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규범에 상응(적정)하다라는 일반적인 문장(명제·원칙)을 근거지운다. 이러한 표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한 인간의 행위가 그 규범에 부합한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학문으로서 윤리학이 ‘근거 지우는’ 일반적 문장은 하나의 사실상의 행위가 유효한 것으로 전제된 하나의 규범에 대해 가지는 관계에 관한 하나의 진술이다. 이러한 진술은 하나의 가치판단이다. 이러한―가치판단을 기술하는―일반적인 명제를 ‘근거 지우는’ 것은 ‘인간들은 그의 원수를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규범이다.」(2편 173-174쪽) 후설은 ‘전사는 용감해야 한다’라는 규범과 ‘용감한 전사만이 좋은 전사다’라는 가치판단을 예로 들면서, 후자가 전자를 기초짓는 이론적 문장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좋은 전사’라는 평가는 이미 ‘전사는 용감해야 한다’라는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가치판단은 규범을 기초 짓는 것이 아니라, 규범에 의존하여 가능해진다. ‘좋다’, ‘훌륭하다’와 같은 술어는 어떤 행위나 상태가 유효한 규범에 부합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므로 가치판단을 규범의 기초로 놓는 것은 논리적으로 뒤집힌 설명이다. 오히려 규범질서, 예컨대 도덕체계나 규범체계가 가치판단과 그에 관한 학문적 작업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다. 규범적 학문이 이론적 학문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론적 가치판단의 가능성이 규범질서에 의존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예를 들면 ‘A는 B이어야만 한다.’라는 형태의 각각의 규범문은, ‘B인 A만이, C라는 속성을 가진다.’라는 이론적인 문장을 포함하며, 여기서 우리는 C를 통해 기준이 되는 술어 ‘좋은’의 구성적인 내용을 암시하는 것이다.”(48쪽) … 후썰은 구체적인 예로 이미 41쪽에서 “(한) 전사는 용감해야만 한다.”라는 규범을 제시했고; 이러한 규범이 포함하는 이론적인 문장으로서, “단지 한 용감한 전사만이 하나의 좋은 전사이다.”라는 문장을 제시했다. 이 문장은 하나의 가치판단이고, 후썰은 그 문장을 또한 명백하게 “이러한 가치판단이 타당하기 때문에, 이제 누구나 한 전사에게 용감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주장으로 후썰은 “(한) 전사는 용감해야만 한다.”는 요구 혹은 규범은 “단지 한 용감한 전사만이 하나의 좋은 전사이다.”라는 가치판단인 이론적인 문장을 통해 기초지워진다는 것을 명확하게 표현한다. 이론적인 문장, 가치판단은, 후썰이 주장했듯이, 그 규범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 문장은 그 규범의 토대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규범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전사는 용감해야만 한다.’라는 규범은 또한 ‘단지 한 용감한 전사만이 좋은 전사이다.’라는 가치판단을 전혀 전제하지 않으며, 바로 그 반대이다: ‘단지한 용감한 전사는 한 좋은 전사이다.’라는 가치판단은 ‘(한) 전사는 용감해야만 한다’는 규범의 효력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행위를 ‘좋은·선한·훌륭한’으로 평가하는 가치판단은 그것이 유효한 것으로 전제된 하나의 규범에 부합한다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전사는 용감해야만 한다.’라는 규범의 전제 없이, ‘단지한 용감한 전사만이 훌륭한 전사이다.’라는 가치판단은 가능하지 않다. 만약 그 규범과 그 가치판단 사이의 관계와 관련하여 도대체 ‘토대·기초’라고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판단을 기초지우는 규범인 것이다. 우리가 가치판단들은 하나의 고유한 이론적 학문 혹은 학문들을 형성한다고 받아들인다면, 규범적인 학문의 기초로서 이론적인 학문들이 아니라 그와 반대이다: 규범적인 학문들은 사실 아니지만, 가치판단들과 분과학들의 기초를 형성하는 도덕 혹은 법과 같은 규범의 체계들, 규범적 질서들을 형성하는 것이다.」(2편 176-177쪽) |
| [미주 115] 칸트가 논리학의 원칙들을 규범으로 이해했는지, 아니면 이론적 진술로 이해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칸트의 저작들 안에는 두 방향의 진술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목에서는 논리학을 오성과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위한 규칙, 곧 규정과 지침의 체계처럼 말한다. 다른 대목에서는 논리학이 단지 오성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해명하는 이론으로 소개되는 듯 보인다. 「칸트가 논리학의 원칙들을 규범들로, 사고를 위한 규정(지시)으로 혹은 이론적인 진술들로 고려했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 즉 다른 말로 하자면, 그가 논리학을 소위 ‘실용적인’ 분과학으로 보았는지 혹은 하나의 이론적인 분과학으로 보았는지는 전혀 대답되지 않았다. 그의 문헌에는 양 입장들에 대한 지지의 증거들이 보인다.」(2편 177쪽) 우선 칸트는 자연 일반에 관한 설명에서 ‘규칙’이라는 말을 쓴다. 여기서의 규칙은 명백히 자연법칙을 가리킨다. 물이 떨어지고, 물고기가 헤엄치고, 새가 나는 것은 어떤 규범에 복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필연적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말해지는 규칙은 ‘그에 부합할 수도 있고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규범’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존재법칙’이다. 따라서 칸트가 오성의 규칙에 관해 말할 때도 우선은 오성이 사실상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뜻하는 것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이 대목만 보면 칸트는 논리학을 규범학이 아니라 오성의 필연적 기능 법칙을 다루는 이론처럼 말하고 있는 셈이다. 「“칸트의 위임에 따라 예셰(Jäsche)에 의해 출간된 그의 Logik, Kants Werke. Akademieausgabe, Band IX에서 칸트는 논리학을 ‘오성과 이성 일반의 필수적인 법칙들에 대한 학문’으로 정의했다(13쪽). 앞에서의 설명에 따를 때, 칸트는 이러한 ‘법칙들(Gesetze)’을 ‘규칙들(Regeln)’로 이해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논리학’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자연에 있는 모든 것들은, 무생물의 세계에서는 물론, 생명이 있는 세계에서도 (우리가 동시에 이러한 규칙들을 항상 알고 있지 않다는 것과 무관하게) 규칙들에 따라 일어난다. 그리고 물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떨어지고, 동물들에 있어서는 걸어가는 움직임 또한 규칙에 따라 일어난다. 물속에 있는 고기, 공중에 있는 새는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전체 자연은 무릇 본질적으로 규칙에 따른 발현의 결합과 다름없다. 그리고 도처에 이러한 규칙이 없는 것은 없다. 만약 우리가 하나의 그러한 것(규칙 없는 것)을 찾을 생각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사례에선 단지 ‘우리에게 그 규칙들이 알려져 있지 않다.’라고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2편 177-178쪽)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칸트는, 오성이 규칙을 ‘찾고’, ‘발견하고’, 심지어 그 규칙들의 ‘원천’이라고도 말한다. 만약 오성이 단지 이미 주어진 규칙을 인식하는 것이라면, 논리학의 법칙은 자연법칙처럼 이론적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오성이 스스로 규칙의 원천이라면, 이 규칙들은 단순한 존재법칙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오성이 자기 자신에게 부과하는 법칙처럼 보이게 된다. 이로써 칸트의 서술이 이론적 이해와 규범적 이해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띤다. 오성이 규칙을 발견한다고도 말하고, 동시에 그 규칙의 원천이라고도 말한다는 점에서, 규칙의 존재방식에 관한 칸트의 입장은 모호한 것이다. 「칸트가 나중에 “그런데 모든 우리의 힘들 전체와 같이, 특히 오성도 그 행위를 함에 있어서,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규칙들에 구속된다.”(11쪽) … “물론 오성은 규칙일반을 무릇 생각하는 원천으로, 그리고 능력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오성은 따라서 규칙들을 찾기 위해 열망하고, 만약 그 규칙들을 찾으면 만족한다.” … “물론 오성은 그 규칙들의 원천(Quelle)이기 때문에, 그 오성 자체는 어떤 규칙에 따라 거동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12쪽) “논리학은 따라서 오성과 이성의 자기 인식이다. …논리학에서 문제되는 것은 단지 어떻게 오성이 스스로 인식되는가이다.”(14쪽)라고 말했다.」(2편 178-179쪽) 칸트는 분명히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는가’를 논리학의 과제로 말하고, ‘올바른 오성의 사용’이라는 표현도 반복해서 쓴다. 이런 표현들은 논리학의 원칙이 단순한 존재법칙이 아니라, 사고가 따라야 할 규범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왜냐면 ‘올바르다’는 말은 언제나 ‘올바르지 않음’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그것은 규범에의 부합 여부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논리학 이해 안에는 분명 규범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오성이 어떻게 활동해야만 하는가’라는 문장은 이론적 기술보다 규정적 지시의 언어에 훨씬 더 가깝다. 「이러한 사고인, 이성으로부터 창설되고 인식된 사고의 법칙들은 그에 따라 이성이 사실상 행동하는, 반드시 활동해야만 하는 것이고 달리 행위할 수 없는 것인, 사고법칙들이라는 것을 다음의 문장이 말하고 있다(12쪽): “왜냐하면 우리는 특정한 규칙들에 따르는 것과 달리 생각할 수 없고, 우리의 오성을 특정한 규칙에 따르는 것과 달리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오성이 활동하는 모든 규칙들은 필연적이거나 혹은 우연한 것이다. 전자의 것은 그것 없이는 오성의 사용은 전혀 불가능한 그런 것이고, 후자의 것은 그것 없이는 모종의 특정한 오성의 사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나중에 칸트는 이러한 규칙들에 대해 말하는데, 우리는 “그것들이 없이는 전혀 생각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에 바로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했다.」(2편 179쪽) 「하지만 칸트는 이에 추가하여, “그것은 따라서 오성이 유일하게 그 자신과 일치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조건들이다. 그것의 올바른 사용의 필수적인 법칙들과 조건들 …”이라고 말한다. … 또 14쪽에서 “논리학에서는 …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는지가 문제이다. … 우리는 논리학에서 오성이 어떠하며, 어떻게 생각하고 지금까지 사고에서 어떻게 활동해왔는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오성이 사고에서 어떻게 활동해야만 하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논리학은 우리에게 올바른, 즉 그 스스로 일치하는 오성의 사용을 가르쳐주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2편 180쪽) 그런데 여기서 또 반대방향의 진술이 등장한다. 칸트는 다른 곳에서 일반논리학이 단지 오성의 필수적 규칙들을 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대상과 무관한 순수한 형식의 학문으로 설명한다. 또 순수논리학과 응용논리학을 구별하면서, 응용논리학은 심리학적 요소와 섞여 있기 때문에 진정한 논리학이 아니라고도 한다. 이처럼 칸트는 논리학을 때로는 규범적 척도라고 말하면서도, 또 다른 때에는 오성의 형식적 구조를 분석하는 이론처럼 다룬다. 즉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오성이 실제로 어떤 필수 규칙 아래 작동하는가’를 말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이 두 입장은 끝내 정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16쪽에서 “논리학은 … 즉 올바른 오성의 사용과 이성의 사용 일반에 대한 학문이다. 하지만 마치 오성이 생각하듯이, 주관적인 것이 아닌, 달리 말해 경험(심리학)적인 원칙들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즉 오성이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는가라는 선험적인 원칙에 따르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에 따라 논리학의 원칙들은 규범들이고, 논리학은 하나의 이론적인 분과학이 결코 아니라, 경험적인 분과학이다. 그리고 110쪽에서, “논리학은 단지 실용(실천)적인 문장들을 그 형태에 따라 논구해야만 하며, 이러한 한에서 이론적인 것과 구분된다. 실용적인 문장들은, 그 내용에 따를 때,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관조적인 것과 구별되는 것은, 도덕에 속한다.”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2편 180-181쪽) 칸트가 쓰는 ‘표준’, ‘규준’, ‘정화제’, ‘비판’ 같은 표현들은 모두 논리학을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판단과 교정을 가능하게 하는 척도로 이해하는 방향을 가리킨다. 논리학이 진실의 부정적 시금석이라면, 그것은 사고를 심사하고 평가하는 기준이어야 한다. 그런데 기준은 본질적으로 규범적 성격을 띤다. 다른 한편 칸트는 또 일반논리학은 판단력에 아무 규정도 줄 수 없다고도 말한다. 종합하자면 논리학은 규범의 역할을 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규정 자체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15쪽에서는 일반적인 논리학에 대해 “논리학은, 즉 단순한 비판보다는 많은 것이다; 그것은 나중에 비판을 위해 기여하는, 달리 말해 모든 오성의 사용 일반의 판단원칙으로 기여하는 하나의 척도·기준(Kanon)이다. 비록 그의 단순한 형태만을 고려해서 그의 올바름·정당성(Richtigkeit)을 판단하는 것이지만 …”라고 언급하고 있다. 칸트는 “Kritik der reinen Vernunft”, Kants Werke, Akademieausgabe, Band III, S. 517에서 ‘표준·척도·기준(Kanon)’을 ‘특정한 인식능력 일반의 정당한 사용의 선험적인 법칙들의 총체’라고 표현했다. ‘비판’에, 즉 ‘판단’에 기여하는 ‘표준’으로서 논리학은 규범적인 성격을 필히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Band IV, 426쪽)에서, “도덕적인 판단의 규준”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의 하나의 척도가 하나의 일반적(보편적) 법률이 되는 것을 필히 원할 수 있어야만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Logik 20쪽에서 칸트는 … “논리학은 … 인식의 비판으로서 유용하고 폐기 불가능한 것이거나, 혹은 일반적 이성은 물론 관조적 이성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옳게 하고 그 스스로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 일반적 이성 및 관조적 이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도 유용하고 불가결한 것이다.”라고 한다.」(2편 182-183쪽) 이처럼 어떤 문장들은 논리학을 사고의 규정과 기준으로 말하고, 다른 문장들은 오성의 필연적 기능 구조를 해명하는 분석처럼 말한다는 점에서, 칸트가 논리법칙을 규범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이론적 진술로 보았는지를 명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전체적인 인상으로는 규범적 성격을 긍정하는 진술이 더 우세해 보이기는 하지만, <논리학>은 칸트 자신이 직접 출간한 저작이 아닐뿐더러 다른 저작들에서도 양 방향의 진술이 함께 발견된다. 이러한 모호성은 이후 논리학과 규범이론의 논쟁을 낳았다. 「따라서 칸트의 Logik으로부터는 논리학의 원칙들이 규범들인가, 아니면 이론적인 진술들인가라는 물음에 어떠한 명확한 답도 얻을 수가 없다. 적어도 논리학의 규범적 성격에 대한 입장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Logik은 칸트 자신에 의해 출간된 책이 아니고, 따라서 아마도 전적으로 원본 문서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논리적 원칙들의 본성에 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다른 칸트의 작품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먼저 “Nachricht von der Einrichtung seiner Vorlesungen in dem Winterhalbjahre von 1765-1766”, Kants Werke, Akademieausgabe, Band II, S. 305ff가 고려된다. 그곳에서는 논리학에 대해 “이러한 학문에는 본래 두 개의 유형들이 있다. 첫 번째의 것은 건강한 오성의 비판과 규정들이다. … 두 번째의 논리학의 유형은 고유한 박식함의 비판과 규정들이다.”(310쪽)라고 한다. 즉 논리학은 모든 사례들에 대한 ‘규정’이고, 그의 원칙들은 규범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Handschriftlichen Nachlaß”(Band XVI, S. 36)에서는 “논리학은 그 재료에 따를 때는 물론 그 형식에 따를 때도 하나의 이성학이다. 형식과 관련해서는 그것은 이성의 canon으로 소위 경험독립적인 원칙(principia a priori)이지 경험적인 것, 즉 심리학으로부터 차용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론적 논리학이다.”라고 한다. 즉 이성의 한 ‘척도(Kanon)’가 하나의 이론적인 학문이라고 하더라도, 그 바로 다음 문장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주관적인 법칙들을 함유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즉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는가라는 객관적인 법률들을 [함유하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물론 이로써 도출되는 것은 또한 <순수이성비판>도 논리학의 원칙들이 규범들인지, 아니면 이론적인 진술들인지 여부에 대한 물음에 대해 어떠한 명백한 답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2편 183-184쪽) |
진실(Wahrheit)은 진술과 대상의 일치 여부에 관한 문제이지만, 진실성(Wahrhaftigkeit)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것을 말했는가의 문제이다. 전자는 논리의 문제이고, 후자는 도덕의 문제다. 거짓말 금지는 진실의 규범이 아니라 진실성의 규범이다. 사람이 객관적으로 틀린 말을 했더라도 그것을 참이라고 믿었다면 그는 오류에 빠진 것이지 도덕규범을 어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논리학의 법칙들이 관련된 진실은 하나의 규범을 통해 구성되는 가치가 아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가치는 ‘진실’이 아니고 ‘참(진실성)’이며, 이 가치는 논리학의 규범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도덕의 규범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진실의 반대는 착오인 반면에 ‘참’의 반대는 허위. 거짓이다. 하나의 도덕의 규범은 거짓말하는 것을 금지한다. 즉 의식적으로 하나의 비진실의 진술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 하지만 어떠한 규범도 착각하는 것, 착오를 범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참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자가 착오로 그것을 참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면 어떠한 규범도 침해한 것이 아니고, 단지 도덕의 금지일 수도 있을, 하나의 금지에 반해 행위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착오(하는 것)는 인간적이다.”라는 격언의 의미이다.」(1편 341쪽)
규범은 행위를 규율할 수는 있지만, 진술의 내용 자체를 참으로 만들 수는 없다. 도덕은 “네가 참이라고 믿는 것만 말하라”라고 요구할 수는 있어도, “네 말이 객관적으로 참이어야 한다”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규범은 행위만을 지배할 수 있을 뿐, 진리값 자체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발언이 객관적으로 참이더라도 상황에 따라 도덕적으로 나쁠 수 있고, 반대로 객관적으로 거짓인 말이라도 특정한 상황에서는 요구될 수 있다.
「규범은 진술이 진실이어야만 한다고 규정할 수 없고 단지 진술행위가 진정한 것이어야만 한다고 규정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사람들은 단지 그 스스로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말해야 하며, 그 스스로 거짓으로 여기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할 수 있고, 사람들은―우리가 대부분 그것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진실을 말해야만 하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할 수 있다. 하나의 그러한 규범은 단지 하나의 도덕규범이지, 논리학의 규범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규범은 단지 일정한 제한하에서 유효하다. 화자로부터 진실로 여겨진 진술이 행해지는 그 행위는 결코 모든 상황에서 가치 있고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나쁜’ 것이다.」(1편 342쪽)
제46장 진술의 실증가능성, 효력의 실증불가능성
진술은 참인지 거짓인지 입증할 수 있지만, 규범의 효력 그 자체는 그런 식으로 직접 입증할 수 없다. 진술의 참은 진리값의 문제이지만, 규범의 효력은 진리값이 아니라 규범의 특수한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은 참인가’라는 물음과 ‘이 규범은 유효한가’라는 물음은 다른 층위에 놓인다.
「하나의 진술의 진실과 하나의 규범의 효력 간의 중요한 하나의 차이점은, 하나의 진술의 진실은 실증가능하지만, 즉 분명히 진실 혹은 비진실로 증명가능하지만, 하나의 규범의 효력은 실증가능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은, 그것이 그의 특수한 실존이고, 따라서 하나의 사실의 존재와 같이 참 또는 거짓일 수 없기 때문에, 실증가능하지 않다. 실증하다. 확인하다는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사실의 존재에 관한 진술의 진실만이 실증가능한 것이다. 단지 하나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이 실증가능한 것인지 여부가 의문스러울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는 당연히 긍정으로 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진술은 저마다의 진술과 같이 진실 혹은 비진실일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따라서 실증 가능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1편 346쪽)
규범의 효력은 직접 실증될 수 없지만, 규범의 효력에 대한 진술은 충분히 실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법학교과서가 ‘국가 X의 법에 따르면 이런 경우 강제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서술한다면, 그 문장은 하나의 규범을 설명하는 진술이다. 따라서 그 진술은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실제로 그런 규범이 제정되었는지, 아직 폐지되지 않았는지, 관습법이라면 관습으로 성립했는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직접 확인되는 것은 언제나 사실들이고, 규범의 효력은 그러한 사실들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 하나의 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문장, 하나의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을 말하는 문장은 이 규범이 존재하는 경우, 그 규범이 효력이 있는 경우에는 진실이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은 그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그 규범이 ‘효력’이 없는 경우에는 비진실이다. 하나의 규범은, 만약 그것이 ‘창설된’ 경우, 즉 그것이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인 경우에 존재하고 ‘유효’하다. 하나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하나의 진술의 진실과 비진실은 다음과 같은 예들이 보여준다: 만약 X라는 국가의 형법을 서술하는 한 교과서가 “만약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결혼을 약속했고,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 그리고 만약 그가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음을 통해 그 여자에게 야기된 손해를 배상하지 않았다면, 국가 X의 법에 따라 그 여자의 소제기가 있을 경우 그의 재산에 강제집행이 결정되어야 하고, 강제적으로 박탈된 재산을 매각한 금액으로부터 손해가 배상되어야만 한다.”라는 문장을 함유하고 있다면, 이 문장은 만약 이러한 내용의 하나의 규범이 유효하다면 참이고, 만약 그 규범이 입법의 방법으로 혹은 관습으로 설정된 것이라면 그 규범은 유효한 것이다.」(1편 346-347쪽)
누군가는 ‘결국 규범의 효력도 설정행위나 실효성 같은 사실들로 입증되는 것이라면, 규범의 효력도 사실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규범의 설정과 실효성은 효력의 조건일 뿐, 효력 그 자체는 아니다. 설정행위와 실효성은 존재의 차원에 속하고, 효력은 당위의 차원에 속한다. ‘이 규범은 제정되었다’와 ‘이 규범은 유효하다’는 문장은 서로 다른 문장이다. 다만 첫 번째 문장이 참일 때에만 두 번째 문장의 참이 따라올 수 있다.
「여기서 만약 하나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의 진실이, 그것의 의미가 규범인 사실의 존재, 즉 설정행위의 존재, 어떠한 폐지 규범도 창설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규범은 그 실효성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의 존재가 증명되었다는 것을 통해 증명된다면, 즉 그 진술이 실증되었다고 한다면, 하나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이 진술은 존재사실에 관한 진술이라고 하는 반론이 예상될 수 있다. 이 반론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 반론은 하나의 규범의 효력과 그 규범의 설정 및 실효성을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앞서 강조했듯이, 하나의 규범의 설정과 그 실효성은 그 규범의 효력의 조건들이기는 하지만, 그 규범의 효력은 아니다. 설정행위와 실효성은 존재이고, 효력은 하나의 당위이다. 하나의 규범이 설정되었고 실효성이 있다는 진술과 하나의 규범이 유효하다는 진술은 두 개의 상이한 진술이다. 하지만 두 번째의 문장은 단지, 그 첫 번째의 문장이 진실일 때 참이다.」(1편 348쪽)
‘그리스도교적 도덕에 따르면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문장은 문장 형태만 보면 당위문이지만, 실제 기능은 명령이 아니라 기술이다. 그것은 규범을 새로 세우는 문장이 아니라, 이미 유효한 규범을 서술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같은 점은 도덕판단이나 법적 가치판단에도 적용된다. ‘이 행위는 도덕적으로 나쁘다’라는 말도 결국 어떤 유효한 규범을 전제로 한 기술적 진술이므로, 참과 거짓의 문제로 다뤄질 수 있다.
「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규정하는 하나의 특정한 규범이 유효하다는 진술인, 하나의 규범에 관한 진술은 그 진술이 하나의 당위문에서 표현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기술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하나의 규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교적인 도덕을 기술하는 윤리학에서 ‘그리스도교적 도덕에 따라 사람은 그의 원수를 사랑해야만 한다.’ 혹은 ‘그리스도교 신자는 자신의 원수를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문장이 표현되었다면, 이 문장은 규범이 아니고 하나의 규범에 관한 진술, 기술이지, 규정이 아닌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러한 하나의 문장은 진실 혹은 비진실일 수 있다. 이것은 도덕 판단들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즉 하나의 특정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좋다’ 혹은 ‘나쁘다’라고 말하고 동시에 이러한 행위는 유효한 것으로 전제된 하나의 규범에 부합한다거나 모순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문장들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또한 이러한 문장들도 하나의 기술적인 의미를 가지며, 진실 혹은 비진실일 수 있다.」(1편 348-349쪽)
제47장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사람들은 보통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윤리학의 핵심질문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질문이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하나의 정보를 요구하는 행위다. 질문자는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싶어하며, 상대방이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전제한다. 따라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질문자의 지식을 증가시키는 진술이어야 한다.
「하나의 규범과 하나의 규범에 관한 진술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우리가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의 의미를 확정할 때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사람들이 윤리학으로부터 그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이다. 하나의 질문으로 사람들은 하나의 정보를 기대한다. 다른 한 사람에게 질문하는 사람은 그가 아직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기를 기대하고, 그는 그것에 대해 그 다른 사람은 알 것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질문을 하는 자의 지식을 풍부하게 해줄 정보의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 질문자는 그 대답에서 진실인 하나의 진술을 기대한다.」(1편 350쪽)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장이 진짜 질문이라면, 그 대답 역시 참이나 거짓이 될 수 있는 문장이어야 한다. 그런데 규범 자체는 참도 거짓도 아니다. 규범은 지식을 전달하는 문장이 아니라 의지를 지시하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규범 그 자체일 수 없다. 가능한 대답은 오직 하나, 이미 존재하는 규범을 서술하는 진술이다. 윤리학의 문장들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규범이 아니라 규범에 관한 진술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문장이 하나의 질문이라면 이 물음도 대답으로 하나의 진실인 문장을 기대한다. 따라서 이러한 물음에 부합하는 대답은 규범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규범은 진실도 거짓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의 목적은 그것이 향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알게(wissen) 하는 것, 그의 지식을 늘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원함(Wollen)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대답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규정하는 하나의 규범과 모종의 무언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대답은 단지 진술로서 진실 혹은 비진실일 수 있는, 하나의 규범에 관한 진술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나의 윤리학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의 문장들은 하나의 학문의 원칙들로서, 어떠한 규범이 아니고, 단지 규범들에 관한 진술들이다.」(1편 351쪽)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을 보통 친구나 스승, 혹은 윤리학자에게 던진다. 그러나 그 사람은 우리에게 새로운 규범을 창설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어떤 규범이 이미 유효한지, 그리고 그 규범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대답은 명령이 아니라 설명이다. 문장의 형태는 당위문일 수 있지만, 그 의미는 규범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을 기술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은 한 사람에게 향해질 수 있고, 사실상 대부분 전혀 규범들을 설정할, 질문자에게 무언가를 규정할 역량이 없는 사람에게 향해지곤 한다. 질문은 의미를 가진다: 하나의 규범이 있는지, 즉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규정하는 하나의 규범이 유효한지, 그리고 그것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내게 알려달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질문을 받은 자는 단지 질문자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기술하는 하나의 규범이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만 그에 의해 기대되는 대답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규범을 설정하는 권위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규범을 단지 기술할 수 있을 뿐이고, 이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의 대답은 반드시 하나의 당위문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질문자에게 무엇을 그가 해야만 하는지를 규정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전혀 하나의 규정을 요청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대답인 문장에서의 그 당위는 단지 하나의 기술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어떠한 규정적인 의미도 가질 수 없다.」(1편 351-352쪽)
우리는 흔히 이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기도 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질문은 자신에게 던질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과정을 이렇게 표현하곤 한다. 이 경우의 의미는 단순하다. 지금은 답을 알지 못하지만, 더 생각해 보면 나중에는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그러나 어떤 윤리학, 특히 칸트적 윤리학은 여기서 더 나아가 도덕규범이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 설정된다고 말한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된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는 상투어는 익숙한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나는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고 나의 고유한 사색을 통해, 내가 아직 가지지 않은, 하지만 내가 나중에 획득하기를 원하는 하나의 지식을 갖기를 원하며, 그래서 나는 나의 현재의 정신상태에서는 아직도 대답할 수 없는 그 질문을 내가 심사숙고한 다음에 나중의 내 정신상태에서는 대답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사람들이, 도덕의 규범들은 그 규범이 그 사람의 행위를 규정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 의해서 설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도덕은 자율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받아들인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은 무릇 단지 그 자신에게만 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 질문에 대해, 그가 주어진 상황을 위해 고려될 규범을 설정한 때에 비로소, 즉 도덕적인 결정을 내린 때에 비로소 답할 수 있을 것이다.」(1편 352-353쪽)
그러나 만약 우리가 자기성찰을 통해 규범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규범을 인식하는 이성과 규범을 설정하는 의지가 결국 동일한 것이 된다. 그러면 규범과 규범에 관한 진술의 구별도 사라진다. 인식은 어디까지나 사고행위이고, 규범의 창설은 의지행위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다. 우리는 자기성찰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규범’을 알 수는 있을지라도, 이성 속에서 규범을 새로 발견하거나 창조할 수는 없다.
「―위에서 언급된 의미에서 이해할 때―도덕의 자율성의 원칙은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을 자신의 이성, 즉 실천적 이성에서 심사숙고를 통해, 즉 자기의식(성찰)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이 옳다고 한다면, 물론 규범과 규범에 관한 진술을 구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의 의미가 규범인 의지적 행위와 그것의 의미가 그 규범에 관한 진술인 사고행위를 구별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다. 그 규범을 설정하는, 즉 실천적인, 그리고 그 규범을 인식하는, 즉 이론적인 이성은 단일하고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혹은―자율적 도덕의 칸트적 윤리학에서와 같이―실천이성은 인식임과 동시에 규범을 설정하는 의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자기성찰(자의식)을 통해서, 즉 사람들은 그의 이성에서 그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규정하는 규범들을 찾을 수가 없다.」(1편 353쪽)
요컨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규범을 창설하라는 요청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규범을 알려 달라는 요청이다. 그래서 윤리학의 문장들은 명령이 아니라 기술이다. 위 질문에 대한 답은 규범이 아니라 규범에 관한 참인 진술이어야 한다.
제48장 효력에 관한 진술과 행위에 대한 진술
또 한 가지 구별해야 할 것은 i) 규범이 유효하다는 진술과 ii) 어떤 구체적 행위가 그 규범에 부합하는지 또는 어긋나는지를 말하는 진술이다. 앞의 것은 규범의 존재 내지 효력을 말하는 진술이고, 뒤의 것은 어떤 행위를 좋다거나 나쁘다고 평가하는 가치판단이다. 이 둘은 자주 혼동되지만 논리적으로는 전혀 다른 기능을 지닌다.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은 아직 아무 행위도 평가하지 않지만, 가치판단은 이미 유효한 규범을 전제로 하여 특정 행위와 그 규범의 관계를 말한다.
「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로부터, 이 규범에 대한 하나의 특정한 사실상의 행위의 관계에 관한 진술, 이러한 행위가 그 규범에 부합한다거나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좋은’ 혹은 ‘나쁜’ 것임을 확정하는 진술은 당연히 구별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진술은 하나의 가치판단이지만, 하나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은 가치판단이 아니다. 하나의 가치판단은 하나의 규범의 효력을 전제한다. 그것은 하나의 객체, 특히 하나의 특정한 행위가 이러한 규범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기술하고, 그래서 이 행위가 ‘좋은’ 것으로 혹은 ‘나쁜’ 것으로 평가되는 그 관계를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의 가치판단은, 하나의 존재하는 혹은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 행위의 화법상 구별되지 않는 기체가 하나의 규범에서 당위된 행위의 화법상 구별되지 않는 기체와 비슷하다, 혹은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확정한다.」(1편 354쪽)
‘속여서는 안 된다’라는 규범이 있을 때, ‘A가 속였다’는 사실은 그 규범과 맞지 않으므로 나쁘다고 평가된다. 반대로 ‘절도범은 처벌되어야 한다’는 규범 아래에서는, 실제로 절도범이 처벌되었다는 사실이 규범과 맞아떨어지므로 정당하다고 평가된다. 다시 말해 가치판단은 행위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규범 사이의 일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좋음과 나쁨은 사물에 붙은 자생적 성질이 아니라, 규범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기는 판단이다. 그래서 가치판단은 언제나 하나의 규범을 이미 전제한다.
「‘속이는 인간 A의 행위는 나쁘다’는 가치판단에서 나는 화법상 차이 없는 ‘인간 A는 속인다’는 기체는 ‘인간은 속여서는 안 된다’는 규범의 화법상 차이 없는 기체, ‘인간은 속이지 않는다’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확정한다. ‘도둑 A의 처벌은 합법적(정당하다)이다.’라는 가치판단에서 나는, ‘절도범 A는 처벌되었다’라는 화법상 차이 없는 기체는, ‘모든 절도범은 처벌되어야만 한다’는 규범의 화법상 차이 없는 기체와 같다는 것을 확정한다. 하나의 그러한 가치판단은 하나의 대상(객체)이 다른 하나와 비슷하다는 것을 확정하는 그 어떤 하나의 가치판단과 동일한 유형이다. 하나의 규범에 관한 진술, 즉 하나의 규범이 ‘효력이 있다’, 혹은 존재한다고 하는 진술은, 그 효력이 전제된 하나의 다른 규범에 대한 그 규범의 관계를 기술하지 않는다. 그 진술은 그 진술이 효력을 말하는 그 규범을 ‘좋은’ 것으로 혹은 ‘나쁜’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다.」(1편 355-356쪽)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 그 자체는 가치판단이 아니다. ‘이 규범은 유효하다’는 말은 그 규범을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 규범이 존재하며 효력을 가진다는 점을 기술할 뿐이다. 그러므로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은 가치의 존재를 말할 수는 있어도, 아직 어떤 대상이 가치에 부합하는지 어긋나는지 말하지는 않는다. 규범의 존재를 말하는 것과, 행위의 선악을 말하는 것은 결코 동위의 판단이 아니다.
「그 진술은―그 대상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하지 않고―그의 특별한 실존을 주장한다. 그 규범이 하나의 가치를 형성하는 한 하나의 규범에 관한 진술은 이 규범이 구성하는 가치에 관한 진술을 포함한다. 그것은 가치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지 하나의 대상의 가치 충만함이나 가치위반임을 주장하지 않으며, 그 규범에 부합하는 혹은 부합하지 않는 행위의 선함과 악함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전제된 규범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사실상의 행위가 부합함 혹은 부합하지 않음을 말하는 가치판단은 하나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진술과 매한가지로 진실 혹은 비진실일 수 있다. “중혼은 위법하다, 즉 법적으로 나쁘다.”라는 가치판단은, 만약 중혼을 금지하는 효력 있는 규범이 없다면 비진실이다. “자신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다.”라는 가치판단은 인간에게 자신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하나의 규범이 유효하면, 진실이다.」(1편 355쪽)
모든 ‘가치판단’이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훔치는 것은 나쁘다’라는 말이 엄밀한 의미의 판단이 아니라, 단순한 감정적 불승인의 표출일 수 있다. 이는 주관적 가치판단으로, 그 문장은 참이나 거짓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고행위의 의미가 아니라 감정적 반응의 표현일 뿐이다. 반대로 어떤 행위가 유효한 규범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말하는 문장은 객관적 가치판단이며, 진실하거나 비진실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사고행위 혹은 인식행위의 의미인 진정(한) 가치판단에 들어맞는 것이지, 하나의 감정적 행위의 의미, 즉 승인 혹은 불승인의 행위의 의미인 가치평가에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훔치는 것은 나쁘다.”라고 말하거나 “너는 이 돈을 훔침으로써 나쁜 행위를 했다(나쁘게 행위했다).”라고 말하고, 이로써 단지 일반적으로 절취에 대한 혹은 하나의 구체적인 절도에 대한 나의 불승인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면 내가 말한 그 문장은 진실도 비진실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사고행위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고, 어떠한 판단도 아니기 때문이며, 즉 어떠한 가치판단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의 행위를 승인한다거나 불승인한다는 것은 그 행위가 나에게 소망스러운 것이거나 혹은 소망스럽지 않은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달리 말해 사람은 그렇게 행위해야만 한다거나 혹은 그렇게 행위해서는 안 된다고 내가 원한다는 것이며, 내가 나의 그 승인 혹은 불승인으로 하나의 명령, 하나의 규범을 설정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적인 반작용을 나는 이러한 문장들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장은 “아하!”, “피!”라는 외침과 동일한 특성을 가진다.」(1편 356쪽)
-제49장 생략-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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