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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젠 '규범의 일반이론' 강독[16] - 규범적 삼단논법

斧針 2026. 3. 12. 00:03

한스 켈젠(김성룡 역), 규범의 일반이론, 아카넷, 2016
Hans Kelsen, Allgemeine Theorie der Normen (1979)


제58장  추론규칙의 규범에의 적용

I. 일반규범과 개별규범 간 관계와 삼단논법

학문으로서의 윤리학 또는 법학에서는 당연히 논리적 추론이 작동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인식/기술의 대상인 도덕질서 또는 법질서 내에서, 다시 말해 규범의 창출과 적용과정 안에서 삼단논법과 같은 논리적 추론이 당연히 작동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삼단논법의 논리적 사고작용이 도덕에서, 그리고 법에서, 즉 도덕과 규범의 창출과 적용의 절차에서 일어나는가라는 문제이지, 삼단논법의 사고작용이 윤리학과 법학에서 이뤄지는가의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추론은―모든 사고절차에서, 그리고 따라서 모든 학문에서와 같이―윤리학과 법학에서도 그렇게 자리를 잡고 있기에, 후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고찰했듯이 지나치게 자주 일어나는 도덕과 윤리학, 법과 법학을 섞어버리는 것은 문제를 어렵게 하고 여기서 다룰 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어렵게 한다. 이것은 특히 일반적 도덕규범 또는 법규범과,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되는 개별규범의 관계가 논리적 추론의 성격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환언하면 이러한 개별규범의 효력이 논리적 추론의 방법으로 달성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1편 427-428쪽)

II. 법적용으로서 법창조

법관의 판결은 흔히 일반규범을 단순히 적용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그러나 순수법학의 관점에서 그것은 단순한 적용이 아니다. 법관의 판단은 동시에 새로운 개별규범을 창조하는 행위이다. 이는 입법이나 관습법 형성과 같이 법창조과정의 연속선 위에 놓인다. 일반규범은 추상적인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구체적 사건을 직접 해결할 수 없다. 법관은 일반규범을 개별화하는 행위를 통해 구체적 사건에 맞는 개별규범을 만들어낸다. 일반규범의 적용인 동시에 개별규범의 창조인 것이다.

「구체적 사례에 대한 법관의 판단을 말하는 개별규범이 문제된다면, 이러한 판단은 결코 단지 법적용(Rechts-Anwendung)만이 아니고, 동시에 법창조(Rechts-Erzeugung)이며, 입법(혹은 관습법) 절차에서 나타나는 법창조과정의 연속인 것이다. 법창조는 적용될 일반 법규범을 개별화(특화)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하나의 사례가 일반규범만을 통해서는 판단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개별화는 필연적인 것이다.」(1편 428쪽)

III. 이른바 '법의 흠결'

법의 흠결이라는 개념은 전통적인 법이론에서 중요한 문제로 취급된다. 일반적으로는 법질서가 특정한 상황을 규율하지 못할 때 법의 흠결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법관이 어떤 사건에서 제재를 가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에조차, 그 판단은 하나의 개별규범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는 제재가 가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규범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건도 법질서의 외부에 놓이지 않는다. 법관의 무죄판결조차도 법질서의 적용과정에서 창조되는 규범적 결과이다.

「실정법에 따를 때 법을 적용하는 기관, 특히 법관이 자신에 의해 확정된 구체적인 구성요건에 대해 어떠한 강제행위로도 반응할 수 없다고 판단해야만 하는 경우가 그러한 경우이다. 이를 유효한 법질서가 이러한 경우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의미의 흠결은 존재할 수가 없다. 만약 법관이 이러한 사안에서 공소를 기각해야만 하거나 피고인에 대해 무죄선고를 해야만 한다면, 즉 ‘피고 또는 피고인에 대해 (제재로서) 어떠한 강제행위도 투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개별규범을 창설해야만 한다면, 이것은 실정법의 적용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1편 429쪽)

실정법질서가 언제나 구체적 사건을 규율하는 일반규범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건의 구성요건이 기존 일반규범과 전혀 관련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실정법질서는 법적용기관에게 재량적 판단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 즉 법관이 스스로 정당하다고 평가하는 일반규범에 따라 사건을 판단하도록 위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판단은 여전히 실정법질서 안에서 이루어진다. 왜냐면 그 재량 자체가 실정법에 의해 부여된 권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의 실정법질서는, 입법 또는 관습을 통해 창설된 유효한 어떠한 일반 법규범도 법적용기관에 의해 확정된 구성요건과 무관한 경우에는, 법적용기관이 그 사례를 자신의 재량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고 규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1편 429쪽)

나아가 실정법은, 특정한 일반규범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항상 적용할 필요는 없다고 정할 수도 있다. , 법적용기관이 그 규범을 적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만 적용하도록 위임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법관의 판단이 매우 넓은 재량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경우에만 우리는 법관의 과제를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법체계의 구조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특정한 전제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한 특수한 상황이다.

「물론 실정법질서는 법적용기관으로 하여금 심지어 하나의 실정적 일반 법규범을, 단지 이 사례에서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만,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할 권한을 위임할 수도 있다. 단지 이러한 전제조건하에서만 우리는 법관의 과제는 하나의 ‘정당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1편 429-430쪽)

많은 사람들이 법관의 역할을 정의로운 판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생각은 법률가들뿐 아니라 법률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중요한 전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타당한 정의가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또한 구체적인 사건에서 무엇이 정의인지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를 포함한다. 이러한 전제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법 문외한들에 의해서도, 때로는 법률가들에 의해서도 전적으로 법관의 과제라고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의 일반적으로 타당한 정의가 있다는 것이 받아들여지고, 구체적인 사안에서 무엇이 정의인지라는 물음이 명백하게 답해질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여진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근본적 착오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정의 관념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양하고 상호 충돌하는 정의관념Gerechtigkeits-Ideen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편 430쪽)

[미주 157]

모리스 코헨은
, 새로운 사례는 이미 존재하는 법규칙으로 결정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법관의 판결은 기존 규칙의 기계적 적용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 대한 민감한 인식과 공정한 해결을 찾는 창의적 판단에 기초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판결이 새로운 법규칙을 만들어내고 법질서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코헨(Morris R. Cohen, Law and the Social Order, New York 1933, S. 231f.)은 “새로운 사례는 오래전에 확립된 원칙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라는 공준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했다. “모든 사례를 위해서 미리 존재하는 (실체적인) 규칙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고 단지 지적인 혼란을 낳을 수 있는 소용없는 허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옛 언어들을 늘려 그것들이 모호하고 무의미하도록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법관의 판결은 종종 부적절한, 존재하는 규칙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례에서의 실제의 요소들의 민감한 인식에 기초하고, 삶의 다양한 요구들에 부합하게 되는 공정한 (just) 해법들을 발견하는 데에 있어, 정신의 창의성에 기초하는 것이고 기초해야만 한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해법들을 체화하고 있는 판결들은 새로운 규칙들을 법에 가져다주고, 따라서 성장하고 변화하는 조건에 법이 적절하게 부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2편 277쪽)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법적 판단의 객관성을 약화시킬 위험을 가지고 있다. 어떤 해결이 공정하다거나 적절하다는 평가는 법관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다른 법관이나 당사자의 관점에서는 동일하게 평가되지 않을 수 있다. 나아가 새로운 사례라는 표현은 법적으로 명확한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어떤 사례가 기존 일반규범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법관이 새로운 규칙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법관의 재량을 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입법자가 그 사례를 예견했더라면 규정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구체적 사건은 언제나 그 자체의 특수성을 지니며, 어떤 사건이든 기존과 완전히 동일한 형태로 포섭되기는 어렵다. ‘새로운 사례라는 개념은 실제로는 거의 모든 사례에 적용될 수 있는 설명방식이다.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에서 권한 있는 법관의 관점에 따를 때 ‘공정한(just)’, 그리고 ‘적정한(adequate)’ 것일지라도, 다른 법관의 관점에 따를 때 혹은 심지어 당해 당사자들의 관점에 따를 때도 필연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의 ‘새로운’ 사례는 법관이, 어떠한 선존하는 실질적으로 정해진 (하나의 추상적으로 규정된 불법효과를 하나의 추상적으로 정해진 구성요건에 결합하는) 일반적 법규범도 연관되지 않은, 하나의 구체적인 구성요건을 확정한 그런 사례이다. 만약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사례라면, 하나의 일반 법규범이 하나의 불법효과를 결합하고 있는 어떠한 구성요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법관이 소제기를 기각하거나 피고인을 무죄선고해야만 하는 저마다의 (모든) 사례는 하나의 ‘새로운’ 사례이다. 하지만 하나의 그러한 용어는 의미가 없다.」(2편 277-278쪽)
 
새로운 사례라는 개념은 입법자가 특정한 구성요건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실제 입법과정과 맞지 않는다. 입법자는 구체적 사건 하나하나를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구성요건을 설정할 뿐이다. 어떤 사건이 기존 규범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것을 새로운 사례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는 법관이 기존 규범의 적용을 원하지 않을 때 언제든지 사용될 수 있는 허구적 논리로 기능할 뿐이다.
 
「하나의 ‘새로운’ 사례가 존재한다는 가정은 분명히, 만약 입법자가 존재하는 구성요건을 그 특수성에서(그 구성요건의 특수성을) 예견했었다면, 그 입법자는 그러한 유형의 구성요건들에 하나의 불법효과를(혹은 어떠한 불법효과도) 결합했었을(하지 않았을) 하나의 일반규범을 설정했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입법자가 예견했었다면, 규정했었을 것이라는 것은 하나의 허구이다. 왜냐하면 저마다의 구성요건들은 어떻게든, 일반 법규범에 포함된 하나의 구성요건의 개념에 포함되는 다른 구성요건들과는 상위하기 때문에, 이러한 허구는, 만약 법관이 유효한 일반 법규범을 이 사례에 적용하는 것이 어떠한 하나의 이유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경우라면, 저마다의 구체적인 사례에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2편 278쪽)

정의규범은 단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정의관념이 동시에 존재하며, 이들은 서로 충돌할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사건에서 무엇이 정의로운 판단인지 객관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어떤 판단이 정의로운지 여부는 그것을 판단하는 법관의 가치판단에 의존한다. 다른 법관이라면 동일한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판단을 정의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정의는 법적 판단의 객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단지 문제되는 정의는 사례를 판단할 권한 있는 법관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법관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법관에게 그의 앞에 놓인 사례들을 ‘정의로운’, 즉 그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판단할 권한이 주어졌다면, 입법 혹은 관습을 통해 창설된 일반 법규범의 효력은 과잉이라는 의미가 된다.」(1편 430쪽)

IV. 흠결을 메우기 위한 권한부여

법관이 정의에 따라 판단할 권한을 갖게 되면 법적 안정성이라는 정책적 요구가 약화된다. 법관의 판단을 미리 예측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실정법 규범으로부터 논리적 추론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구조가 성립하기 어렵다. 즉 전통적인 의미의 규범적 삼단논법이 작동하기 힘들어진다. 물론 이 경우에도 여전히 특정한 일반규범으로부터의 추론가능성이라는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정법이 법관에게 정의에 따라 판단할 권한을 준다고 하더라도 법관의 판단은―실정법에 의해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므로―법의 적용 안에서 이뤄지고, 법실증주의의 요구, 즉 모든 구체적 사례들은 유효한 실정법을 근거로―즉 적용으로―판단되어야만 한다는 법실증주의의 요구가 지켜지는 것이다. 물론 이로써 법적 안정성이라는 법 정책적 요구. 즉 법관의 판단은 확실한 개연성으로 예견할 수 있어야 하고, 따라서 법관의 행위는 그에 맞춰질 수 있어야만 한다는 요구는 사실상 폐지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또한 일반적·실체적으로 규정된 하나의 실정법규범으로부터의 논리적 추론은 문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법적용기관으로부터 정당한 것으로 전제된) 일반규범―어떠한 실정법의 규범은 아니지만, 실정법으로부터 법을 적용하는 기관에 적용하도록 위임된 일반규범―으로부터의 논리적 추론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1편 431)

V. 이론적 삼단논법

이론적 삼단논법은 명제논리학의 기본적인 추론형식이다. 여기서 결론은 두 전제로부터 도출되지만, 사실은 이미 전제에 내포되어 있는 내용이다. 즉 결론의 진리값은 전제의 진리값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따라 나온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절차가 아니라 전제의 의미를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인 것이다.

「명제(술어)논리학의 삼단논법, 소위 이론적 삼단논법은 언어적으로 하나의―(추론의) 결과―문장에서 표현되는 의미내용의 진리값(참)이 언어적으로 두 개의 다른 문장―대전제와 소전제―에서 표현되는 의미내용의 진리값(참)으로부터 도출되는 일련의 진술(명제)들을 말한다. 이것은 특히 일반적인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추론, 보다 정확하게는 하나의 일반 명제가 참이라는 것으로부터 여기서 문제되는 하나의 특별한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추론하는 것이다. 통상적인 예로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추론이다.」(1편 431-432쪽)

VI. 명제의 진실은 표현행위를 통해 좌우되지 않는다

하나의 명제는 사고행위의 의미이지만 그 진실 여부는 사고행위의 존재와 무관하다. 어떤 명제가 참인지 여부는 누가 그것을 생각했는지와 관계없이 결정된다. 명제의 진실은 사고행위가 발생하기 이전에도 존재할 수 있다.

「진술들은 사고행위(Denk-Akt)의 의미이다. 하지만 하나의 명제의 참은 사실상 사고적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하나의 진술문(Aussage-Satz)이 표현하는 의미는 진실이거나 거짓이다. 그것은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 사고적 행위가 사실상 있었는지와 전혀 무관하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는 명제는 만약 그 명제가 참이라면 실제 생각되고 표현된 것인지 여부와 전혀 무관하게 참이다.」(1편 433쪽)

VI. 추론: 어떠한 새로운 진실에 이르는 사고활동이 아님

삼단논법 또한 새로운 진리를 생산하는 사고활동이 아니며, 추론은 단지 전제에 이미 포함된 사실을 명시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추론문(Schluß-Satz)은 단지 그 의미가 전제들의 의미에 함유되어 있는 경우에만 참이기 때문에 추론은 새로운 진실에 이르는 어떠한 사고활동이 아니며, 이미 전제가 참이라는 것에 암시되어 있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顯現)이다.」(1편 434쪽)

VII. 소위 규범적 삼단논법

일반적으로 규범적 삼단논법은 일반규범에서 개별규범이 도출되는 구조로 이해된다. 대전제는 일정한 조건 아래 특정한 행위를 요구하는 일반적 규범이다. 소전제는 그러한 조건이 특정한 개별 상황에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진술이다. 그리고 결론은 그 일반규범에 상응하는 개별규범이다. 이러한 구조는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나아가는 추론으로 설명된다.

「대전제는 일반적인 가정적 규범이고, 그 규범은 특정한, 그리고 일반적으로 규정된 조건들 아래에서 하나의 일반적 행동이 요구되는 것으로 되어있고, 그 소전제는 대전제에서 정해진 조건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그 결론문은 대전제에서 일반적으로 규정된 행위가 개별적으로 요구된다는 하나의 개별규범인 경우를 우리는 일반에서 특수로의 규범적 삼단논법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그 개별규범이 일반규범에 상응(부합)한다는 것을 뜻한다.」(1편 437쪽)

가령 대전제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일반규범이고, ‘소전제는 특정한 사람이 실제로 약속을 했다는 사실이라면, ‘결론은 그 사람이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개별규범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외형적으로는 이론적 삼단논법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이론적 삼단논법과 규범적 삼단논법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론적 삼단논법에서는 두 전제 모두 명제이다. 즉 두 전제는 동일한 논리적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규범적 삼단논법에서는 두 전제가 서로 다른 논리적 성격을 가진다. 대전제는 규범이고 소전제는 진술이다. 두 전제들은 동일한 논리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이론적 삼단논법은, ‘i) 만약 한 존재가 x라는 속성을 가진다면, 또한 그 존재는 y라는 속성도 가진다. ii) X라는 존재는 x라는 속성을 가진다. iii) 그렇다면 X라는 존재는 또한 y라는 속성도 가진다.’라는 일반적인 도식에 일치한다. 양 전제들은 동일한 논리적 특성을 가진다. 양 전제들은 진술(명제, 주장)이다. 하지만 소위 규범적 삼단논법에서는 양 전제들은 상이한 논리적 특성을 가진다. 대전제는 하나의 일반규범이고 소전제는 하나의 주장(진술)이다.」(1편 438쪽)

IX. 개별규범의 효력은 그에 상응하는 일반규범의 효력에서 암시되지 않는다

만약 규범적 삼단논법이 진정한 의미의 삼단논법이라면, 결론의 효력은 전제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어야 한다. 즉 개별규범의 효력은 일반규범의 효력과 사실진술로부터 논리적으로 따라와야 한다. 이는 이론적 삼단논법에서 개별명제의 진실이 일반명제의 진실에서 도출되는 것과 유사한 구조를 의미한다. 그러나 명제의 진실과 규범의 효력은 동일한 성격의 것이 아니다. 명제는 참과 거짓의 속성을 가지지만 규범은 효력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규범의 효력은 논리적 추론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다. 규범의 효력은 특정한 의지적 행위를 통해 정해진다. 즉 규범은 어떤 권위가 의지적 행위를 통해 그것을 설정할 때 존재한다. 이러한 의지적 행위가 규범의 실정성을 구성한다. 따라서 일반규범으로부터 개별규범을 논리적으로 도출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X. 하나의 규범의 효력은 그 의미가 규범인 의지적 행위를 통해 정해진다

규범 사이의 관계는 논리적 관계가 아니라 권위적 행위에 의해 매개되는 관계이다.

「개별규범의 효력은 대전제로 기술된 일반규범의 효력과 소전제로 기술된 진술이 참이라는 것에서 암시될 수는 없다.」(1편 441쪽)
「일반적 규범의 효력과 그에 부합하는 개별규범의 효력 사이에는, 그 의미가 개별규범인 하나의 의지적 행위가 반드시 끼워져야만 하기 때문에, 개별규범의 효력은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는 없다. … 하나의 규범이 그 행위의 의미가 그 규범인 의지적 행위를 통해 결정된다는 것에 그 실정성이 있는 것이다. 명령자 없이 명령 없고, 규범을 창설하는 권위 없이 규범은 없다. 달리 말해 그 의미가 규범인 의지적 행위 없이는 규범은 없다.」(1편 442쪽)

XI. 단순히 '사고된' 규범과 허구(가상)의 규범

규범이 반드시 의지적 행위의 의미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실제로 어떤 의지적 행위에 의해 창설되지 않은 규범도 생각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예컨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라는 문장을 우리는 현실에서 누가 그것을 의욕하지 않았더라도 사고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그 문장은 하나의 규범이며, 이처럼 의지행위의 의미가 아니라 사고행위의 의미로 존재하는 규범들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의지적 행위의 의미가 아니고 사고행위의 의미인 규범이 있을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환언하면 우리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의 규범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사고적 행위의 의미이지 의지적 행위의 의미가 아닌 당위문들, 하나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명제가 아니고, 그 자체 규범들인 당위문들이 있을 수 있다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특정 방식으로 행위해야만 한다고 하는 하나의 문장에서 표현되는 의미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실정 규범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즉 하나의 실제적인 의지적 행위의 의미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규범이다. 나는 나 스스로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다루어져야만 한다고 원하지 않으면서도, 그리고 누구도 그런 의미를 가지는 하나의 실제적인 의지적 행위를 하지 않아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취급되어야만 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1편 442-443쪽)

그러나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우리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생각할 때, 그것이 실제로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있는 것처럼 사고한다. 사고 속에서 존재를 허구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고된 규범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라는 규범을 생각할 때, 실제로 그런 규범을 창설하는 의지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런 의지행위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규범은 실제 규범이 아니라 허구적으로 구성된 규범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실제 의지행위의 의미가 아니라 상상된 의지행위의 의미이다.

「만약 내가 예를 들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생각한다면, 나는 이러한 대상을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나는 이 사례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그것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마치 존재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존재를 허구로 지어내는 것이다.b 단순히 사고된 규범은 하나의 허구의 조작된 사고적 행위의 의미이다. 만약 내가 단순히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러한 의지적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하나의 그러한 의지적 행위의 의미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사고된 규범들은 어떠한 실증 규범도 아니고, 그 효력이 허구로 만들어진 규범이고, 그 의미가 허구로 만들어진 것이지, 현실세계의 의지적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닌 규범이다.」(1편 443쪽)

결국 규범은 언제나 의지행위의 의미이다. 단순히 사고된 규범은 실제 의지행위에 의해 창설된 규범이 아니라, 사고 속에서 가정된 의지행위의 의미일 뿐이다. 따라서 사고된 규범의 존재는 규범이 의지행위의 의미라는 기본 원칙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 원칙을 다시 확인하게 만든다. 사고된 규범이 존재하려면 그 규범을 의미로 갖는 의지행위가 함께 생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규범을 생각할 때 항상 어떤 의지행위를 함께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규범이 단순히 사고된(gedacht) 것이라면 필히 그 의미가 규범인 의지적 행위도 함께 생각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하나의 사고된 규범은 단순히 사고된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지, 실제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는 아니다. 단순히 사고된 규범은 실정 규범이 아니고 허구로 만들어진 규범이라는 것이 ‘그 의미가 규범인 의지적 행위 없이는 규범은 없다.’는 기본원칙의 제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행위에 맞추어진 의지의 의미인 당위가, 즉 그 규범이 효력이 있는 한, 달리 말해 그 의미가 규범인 의지적 행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후에도 그 규범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의지적 행위의 존재가 그 본성에 따를 때, 그 (규범)창설행위를 하는 아주 짧은 시간간극에 제한되는 한, 이러한 근본원칙은 제한된다.」(1편 444쪽)

규범은 그것을 창설한 의지행위가 존재하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행위는 매우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지만, 그 의미로서의 규범은 그 이후에도 계속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입법자가 어떤 법률을 제정하는 의지행위를 했을 때, 그 행위는 한 순간에 끝나지만 법률의 효력은 이후의 시간 동안 지속된다. 심지어 규범은 소급적으로 효력을 가질 수도 있다. 따라서 규범의 존재는 의지행위의 존재와 시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의 규범의 효력은 바로 일반적으로 의지적 행위가 이루어진 이후의 시간을 위해 정해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규범은 또한, 그 의미가 규범인 의지적 행위의 투입 전의 시간에도, 즉 소급적으로 효력을 가질 수 있다. 그 의미가 하나의 일반규범인 입법자의 의지적 행위는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당위의 존재, 규범의 효력의 존재는 그 의미가 당위인 의지의 존재와 함께하는(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고하는 것. 생각하는 것과 의지(의욕)하는 것은 두 개의 상이한 심리적 기능들이고 그들의 차이는 바로 그중 하나의 의미는 명제(진술)이고 다른 하나의 의미는―의지가 하나의 다른 행위에 맞추어진 한―당위, 즉 하나의 규범이라는 것에 있다. 하나의 사고적 행위는 하나의 의지적 행위와 결합될 수 있고, 누군가 무엇인가를 원한다면 그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한다고 하는 한 (의지적 행위와) 통상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적 행위는 의지적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지, 의지적 행위와 동일하거나 의지적 행위(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1편 444쪽)

[미주 163]
 
브루진(Otto Brusiin)은 판결 전체를 삼단논법으로 볼 수는 없지만, 판결 안에 포함된 사고형식적 핵심에 한해서는 삼단논법이라는 표현이 어느 정도 들어맞을 수 있다고 보았다(Otto Brusiin, Über das juristische Denken, Helsingfors 1951, S. 106). 그는 이른바 법적 사고(juristisches Denken)’과정과 그 산물, 그리고 객관화를 구별하며, 법문·판결문·행정결정문 등을 법적 사고의 객관화된 형태로 이해한다. 그러나 법문이나 판결문은 사고의 객관화가 아니라 의지행위의 의미가 언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것들은 어떤 판단내용을 진술하는 문장이 아니라, 특정한 규범을 설정하는 행위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다.
 
브루진은 판결의 핵심을 어떤 인간의 행위가 위법인지 적법인지 확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설명은 논리적 관점에서는 일정 부분 타당성을 가진다. 구성요건의 존재 여부를 확정하는 판단은 참 또는 거짓일 수 있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켈젠은 법적 관점에서는 이 판단의 진실성은 핵심이 아니다. 법적 절차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실이 참인가 거짓인가가 아니라, 법관이 특정한 확정을 행했다는 사실이다. 이 확정을 기초로 법관은 강제행위의 집행을 명령하거나 거부하는 개별규범을 설정한다. 이 점에서 판결의 본질적 기능은 판단이 아니라 개별규범의 설정이다.
 
판결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법관의 사고가 아니라 법관의 의지다. 법관의 사고는 구성요건을 확정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며, 판결의 본질은 강제행위의 집행을 명령하거나 거부하는 규범을 창설하는 데 있다. 판결은 어떤 사실을 서술하는 문장이 아니라, 하나의 규범적 명령을 창설하는 행위이다. 이 때문에 판결을 삼단논법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구조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삼단논법은 진술문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설명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규범의 창설이라는 행위는 이러한 논리적 연역으로 설명될 수 없다.
 
브루진은 특히 형사판결의 경우에는 삼단논법적 구조를 명확히 거부한다. 그는 형벌의 구체적 내용이 전제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형법이 형벌의 범위를 규정하는 경우 법관에게 일정한 재량이 존재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설령 법률이 특정 범죄에 대해 단 하나의 형벌만을 규정하고 있어서 법관에게 전혀 재량이 없는 경우라도, 판결은 여전히 의지행위의 의미이다. 판결이 삼단논법이 아닌 이유는 재량의 존재가 아니라 판결의 본질이 의지행위라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절도에 대해 1년 이상 5년 이하의 형을 규정하는 법률이 있다고 하자. 어떤 법관은 1년형을 선고하고 다른 법관은 3년형을 선고할 수 있다. 이 경우 두 판결 모두 일반규범에 부합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규범으로부터 여러 개의 개별규범이 논리적으로 도출된다는 뜻이 아니다. 각각의 판결은 서로 다른 개별규범을 설정하는 의지행위일 뿐이다. 단지 그 내용이 일반규범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 있을 뿐이다.

XII. 그 의미가 개별규범인 의지적 행위는 그 의미가 일반규범인 의지적 행위에서 내포되지 않는다

이론적 삼단논법에서는 일반 명제에서 개별 명제가 논리적으로 도출되지만, 규범적 삼단논법에서는 이러한 구조가 성립하지 않는다. 일반규범이 존재한다고 해서 개별규범이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개별규범은 별도의 의지적 행위를 통해 창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규범을 창설한 의지와 개별규범을 창설하는 의지는 서로 다른 행위이다. 이미 이 점에서 개별규범은 일반규범 속에 논리적으로 내포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실정 개별규범(positive individuelle Norm) … 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실제 현실적인 의지적 행위의 의미여야만 하고, 그것은 그 의미가 (개별규범이 부합하는) 일반규범인 실제의 의지적 행위와는 다른 것이다. 단지 개별규범을 그 의미로 하는 의지적 행위가 그 의미가 일반규범인 의지적 행위에 함축되어 있다고 하는 경우에만, 이러한 개별규범의 효력은 … 일반규범의 효력에서 암시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1편 445쪽)

XIII. 일반규범의 승인과 개별규범의 창설

개별규범은 단순한 논리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특정 주체의 의지적 행위를 통해 설정된다. 일반규범이 특정 사례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규범을 승인하고, 그에 따라 특정한 명령이 설정되어야 한다. 이로써 개별규범이 비로소 존재하게 되며, 이는 논리적 연역이 아니라 의지적 창설이다(1편 447-448쪽).

XIV. 일반규범의 효력으로부터 개별규범의 효력을 추론할 수 없음

법질서의 경우 일반규범은 입법자가 만들지만, 개별규범은 법관이 만든다. 전통법학은 법관의 판단이 일반규범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된다고 설명해 왔으나 이는 잘못된 이해다. 입법자는 미래의 모든 개별 사건을 알 수 없다. 입법자의 의지 속에 모든 개별 판결이 미리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개별규범은 법관의 의지적 행위에 의해 별도로 창설된다.

「입법자가 만든 일반규범들은 통상 입법자가 미리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장래의 행위에 관련된 것이다. 만약 입법자가 일반적 규범을 만들면, 즉 사건을 판단하는 법관이 한 사람이 절도를 저질렀다는 것을 확정한다면 그 법관은 그 사람은 교도소에 구금되어야 하는 것으로 판단해야만 한다는 일반규범을 만들 경우에도, 달리 말해 (법관은) 그 사람은 교도소에 구금되어야 한다는 개별규범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원하는 경우에도, 그 입법자는 장래에 법관 쾨르너가 마이어라는 사람이 슐체라는 사람에게서 말을 훔쳤다는 것을 확정하게 될 것임을 알지 못한다.」(1편 449쪽)

XV. 개별규범 창설조건으로서 일반규범의 승인

법관은 일반규범을 승인함으로써 그것을 구체적 사례에 적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승인 자체는 의지적 행위이다. 개별규범의 효력은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의지적 승인에 의해 발생한다. 법관이 일반규범을 승인하지 않는다면 개별규범은 창설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규범의 효력은 언제나 의지적 행위와 결합되어 있다.

「문제되는 개별규범의 창설은 그 규범의 적용에 권한 있는 자들이 적용될 일반규범을 승인하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는 법과 도덕간에 차이가 없다. 이전에 다양하게 주장되었던 승인이론(Anerkennungstheorie)은 법적용기관을 통한 구체적 사안에의 일반 법규범의 적용이 사실상 구체적인 사안에 적용될 일반 법규범의 승인에 의존하는 한에서는 타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개별 법규범이 그 의미인 의지적 행위는 단지 일반 법규범의 효력을 승인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1편 452쪽)

XVI. 충족연산

-생략

XVII. 일반규범의 효력은 개별규범의 효력에 선존한다; 일반명제와 개별명제의 진실성은 시간적으로 상호 무관하다

명제논리에서 일반 명제가 참이라면 개별 명제의 참도 이미 포함된다. 따라서 두 명제 사이에는 시간적 선후가 없다. 그러나 규범의 경우에는 다르다. 일반규범이 먼저 창조되고, 그 적용인 개별규범은 나중에 창조된다. 개별규범은 별도의 의지적 행위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일반규범의 효력은 개별규범의 효력보다 시간적으로 앞선다. 개별규범은 일반규범이 효력이 있는 경우에도 효력이 없을 수 있다. 개별규범은 그 행위의 의미가 일반규범인 의지적 행위와는 구별되는 하나의 의지적 행위에 의해서 비로소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즉 그 행위의 의미가 개별규범인 의지적 행위에 시간적으로 앞서는 일반규범을 창설하는 의지적 행위와 구별되는 개별규범을 창설하는 의지적 행위가 이뤄질 때 비로소 유효한 것이다.」(1편 458쪽)

XVIII. 일반규범의 '조건': '사실'이 아니라 '사실확정'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범죄가 발생하면 형벌이 부과된다는 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실제 법 구조는 그렇지 않다. 법규범의 조건은 실제 범죄사실이 아니다. ‘법원이 범죄가 발생했다고 확정하는 행위가 조건이다. , 법규범의 작동조건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법적 확정이다. 이 점에서 법적 판단은 단순한 사실서술이 아니라 구성적 행위다.

「대전제로 기능하는 일반규범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만약 누군가가 절도를 범했다면 그는 교도소에 구금되어야만 한다.’가 되어서는 안 되고, ‘권한 있는 법원이 한 사람이 절도를 범했다고 확정했다면 그 법원은 이 사람은 교도소에 구금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규정하는 하나의 개별규범을 창설해야만 한다.’가 옳다. 도대체 그러한 규범적 삼단논법이 있다고 할 때, (소전제로서) 참이어야만 하는 것은 ‘마이어는 절도를 범했다.’라는 명제가 아니라 ‘권한 있는 법원이 마이어가 절도를 범했다는 것을 확정했다.’라는 명제인 것이다.」(1편 459쪽)

[미주 167]

전통적인 논리학에서는 삼단논법의 소전제가 참일 때만 결론이 정당하게 도출된다고 이해된다
. 그러나 법적 판단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법적으로 결정적 의미를 갖는 것은 사실이 진실에 부합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법관이 그것을 어떻게 확정하는가이다. 인식론적 측면에서 법관의 사실확정은 단지 개연성을 지닐 수 있을 뿐, 과거의 실체적 진실과 일치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호이즐러(A. Heusler, “Die Grundlagen des Beweisrechtes”, Archiv für die civilistische Praxis, 62. Bd., 1879, S. 209ff.)는 Lotze, Logik, §§278ff.를 제시하며, 만약 사실들이 직접적으로 인지되지 않는다면 그에 해당하는 진술들은 단지 개연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221쪽). 이로부터 법관의 사실확정은 대부분 그렇듯이 그것이 법관 측에서의 직접적인 인지를 근거로 하지 않는 한 단지 개연성의 성격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 도출된다.」(2편 314쪽)
 
법관의 사실확정은 직접적인 인식이 아니라 증거와 추론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절대적 확실성은 지닐 수 없다. 법효과발생의 근거가 되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법관에 의한 사실의 확정이다. 다시 말해 법적 결과는 어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법관이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판단했는가에 의존한다. 때문에 법적 판단은 경험적 진리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법관이 어떤 사실을 확정하고 그 판단이 더 이상 폐기될 수 없게 되는 순간, 그것이 실체적 진실에 부합하는지, 즉 참인지 거짓인지 여부는 더 이상 법적으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법적 질서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실체적 진실이 아니라 권한 있는 기관의 판단이다.
 
「하지만 이것은 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불법효과를 규정하는 구성요건은 문제되는 사실이 아니라 법관을 통한 확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정이 참인가 혹은 거짓인가는 법관의 판결이 기판력을 얻는 순간, 즉 더 이상 폐기될 수 없는 순간, 더 이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2편 314쪽)
 
법관 본인이 그 사실을 직접적인 감각적 인식에 의해 파악한 경우(가령 법관이 그 사건의 목격자인 등)에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감각은 오류를 포함할 수 있으며, 우리가 인식한 것이 외부세계의 실제 상태와 완전히 일치하는지 확신할 수 없으므로, 감각적 인식에 근거한 사실 진술조차도 완전한 확실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론적 불확실성 역시 법적 판단의 구조에는 본질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법적 판단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의 절대적 진실이 아니라 법적 절차를 통해 확정된 사실이다. 법관의 판결이 확정되면 그 사실은 법적 현실 속에서 확정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 밖에 자신의 인지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하나의 사실에 관한 진술도 확실성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감각적인 인식이 외부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에 부합하는지, 심지어는 그것이 과연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사실인지 여부에 대해서도 물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2편 315쪽)
 
지그문트 지엠빈스키(Zygmunt Ziembinski)는 법적 삼단논법에서 소전제의 증명이 일반적인 이론적 삼단논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이론적 삼단논법에서는 소전제가 참인지 여부를 자유롭게 검토할 수 있지만, 법적 판단에서는 사실의 증명이 일정한 절차적 규칙에 의해 구속되며, 특히 복멸할 수 없는 추정(praesumptio juris ac de jure)과 같은 제도가 존재한다. , 법적 판단에서 사실의 증명은 과학적 탐구와 유사한 측면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법적 절차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이다.
 
「지엠빈스키(Zygmunt Ziembinski, “La Vérification des Faits dans un Procès Judiciaire”, Logique et Analyse, Nouvelle Serie, 1963, S. 385ff.)는 법의 영역에서 실천적인 혹은 규범적인 삼단논법의 경우에는 소전제에서 주장된 사실의 증명이 특정한 규칙을 통해 구속되는 반면, 하나의 이론적 삼단논법이 고려되는 한 소전제의 증명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는 “이것은 그 사건을 판결할 권한이 있는 법관에 의한 사실에 관한 주장의 증명은 전반적으로 과학자에 의해 사실의 증명과 유사하지만, 법률가들에 의해 고안된 특정 방식으로 구성되고 특정한 방법론적 지침에 근거한 절차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볼 수 있다.”라고 한다.」(2편 315쪽)
 
그러나 이는 엄밀한 설명은 아니다. 지엠빈스키는 법적 삼단논법의 소전제가 법관에 의해 참으로 간주된 사실이라고 하지만,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법관이 특정한 사실을 규범의 구성요건 아래에 포섭 가능한 것으로 확정했음이 되어야 한다. 즉 법적 판단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의 진실성이 아니라 법관의 확정(행위)이다. 법관이 어떤 사실을 확정하고 그 판결이 더 이상 폐기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 사실이 실제로 참인지 여부는 법적으로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옳지 않다. 이미 앞에서 지적되었듯이 세칭 법적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만약 관할 있는 법관이 법관의 입장에 따를 때 법관에 의해 적용될 일반적 법규범에서 정해진 구성요건의 개념하에 포섭 가능한 하나의 구체적인 구성요건을 확정했다면 …”이다. 이러한 구성요건에 관한 법관의 진술이 참이라는 것은 최종심에서는, 만약 법관의 판단이 더 이상 폐기될 수 없다면 중요하지 않다.」(2편 315쪽)

XIX. 법인식으로서 법관의 기능

많은 법이론은 법관의 기능을 법의 창조가 아니라 법의 인식으로 보았다. 즉 법관은 이미 존재하는 법을 발견하는 존재라고 이해되었다. 이 관점에서는 법관의 판결은 새로운 규범의 창설이 아니라 기존 법규범의 논리적 적용이기에, 법관의 판단은 논리적 추론과정으로 설명된다. 이른바 규범적 삼단논법의 전통도 바로 이 생각에 기초한다.

「법관에 의해 창설될 개별규범의 효력이 논리적 추론의 방법으로, 즉 하나의 사고작용으로 일반적인 규범으로부터 나온다는 가정은, 하나의 의지의 기능인 입법자의 기능과 구별하기 위해서 법관의 기능이 법인식(Rechts-Erkenntnis)으로 파악된다는 것, 법관은 구체적인 사례에서 이미 효력이 있는 법을 (그 법의) 인식이라는 방법으로 ‘찾아야’만 한다는 것, 그에 의해 창설된 행위는 하나의 ‘판결’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1편 460-461쪽)

이러한 관점은 오래된 자연법적 전통에서 유래했다. 과거에는 입법자조차 법을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라 발견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즉 법은 신이나 자연이 이미 만들어 놓은 질서라고 여겨졌다. 입법자와 법관은 그 질서를 찾아내어 공표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이런 사고에서는 법이 일종의 과학처럼 이해된다.

「보다 오래된 입장에 따르면 심지어 입법자의 기능도 신에 의해 혹은 자연에 의해 이미 창출된 규범들을 찾고 이를 공포하는 것에 있었지, 그 규범들을 창출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입법자와 법관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법을 인식해야만 한다는 것은 법은 하나의 학문이라거나 혹은 법학도 하나의 학문이라는 전혀 드물지 않게 주장되는 입장의 결론인 것이다.」(1편 461쪽)

[미주 168]

법적 판단을 삼단논법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단순한 논리학적 습관이 아니라 하나의 법이론적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 그것은 법을 입법자의 의지로 이해하는 고전적 법실증주의의 도그마이다. 모든 법은 입법자의 의지의 표현이므로, 법관의 역할은 그 의지를 단순히 인식하고 적용하는 데 그쳐야 하며, 법관의 판결은 새로운 규범의 창설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규범의 반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판결은 논리적 연역을 통해 도출되는 삼단논법의 결론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로스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로스(Alf Ross, Theorie der Rechtsquellen, Wiener Staats- und Rechtswissenschaftliche Studien, Band XIII, Wien 1929)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배적인 법실증주의는 모든 법은 입법자의 의지라고 하는 법이론적인 도그마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로부터는 판결을 단지 하나의 삼단논법으로 보는 것이 일관성 있는 것이다. 이로써 표현되는 것은 판결은 단지 그것이 명백하게 객관적으로 규정 가능한 입법자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나타나는 경우에만 법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법관의 기능은 따라서 전적으로 하나의 인식하는 기능이다. 그가 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단지 그가 그것을 반복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것은 이미 사전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객관적으로 정해질 수 있는 것이다.”」(2편 315-316쪽)
 
로스는 이러한 전통적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법관의 기능은 단순한 인식이나 반복에 그치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법창조의 기능을 포함한다고 보았다. 법관은 단순히 입법자의 의지를 재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 사건 속에서 규범을 형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로스의 입장은 전통적 법실증주의와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그는 법적 판단이 단순한 논리적 연역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해석과정을 단순히 텍스트의 의미를 확인하는 절차가 아닌, 규범을 구체적인 사건에 맞게 형성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법관의 해석은 이미 주어진 규범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작업이며,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논리적 적용이 아니라 하나의 실천적 활동이라는 것이다. 타당한 지적이다.
 
「로스는 이에 반해 적절하게도, 본질적으로 법관의 기능은 법을 창조하는 기능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했다(332쪽 이하). 그는 336쪽에서 “… 해석절차는 논리적으로 두 개의 연속적인 단계(Stufenfolge)로 생각될 수 있다. 먼저 그 추상적으로 주어진 형태에서 법문의 진정한 의미가 정해진다. 그러고 나서 구체적인 것으로의 전이(Übergang)가 행해진다. 해석은, 이 개념이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과 같이, 비록 사람들이 이것을 보통 통찰하지 못할지라도, 실제로는 하나의 사고된, 선취된 법률의 구체화를 의미한다.」(2편 316쪽)
 
로스는, 추상적인 규범에서 구체적인 판결로 이동하는 과정은 단순한 논리적 절차로 설명될 수 없다고 한다. 추상적인 개념과 구체적인 현실 사이에는 단순한 논리로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며, 이 간극은 단순 논리적 영역이 아닌 어떤 실천적 활동을 통해서만 메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하나의 그러한 활동이 객관적·논리적인 절차에 근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이르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 우리는 여기서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절대적인 반대, 합리적인 것과 하나의 구체적-현실적인 것 간의 절대적인 반대를 마주한다.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사이에는 어떠한 논리학도 채울 수 없는, 단지 하나의 행위(eine Tun)만이 메울 수 있는 간극이 있다."라고 하고 있다.」(2편 316쪽)

XX. 법적 사고와 논리적 원칙들

흔히 논리학이 법에 적용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논리적 원칙은 모든 사고에 적용된다. 따라서 법적 사고에 논리가 적용되는지는 새삼 문제삼을 것이 못된다. 문제는 규범 자체에 논리가 적용되는지이다. 규범은 사고의 의미가 아니라 의지의 의미이기 때문이다사고는 단지 이미 존재하는 규범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규범의 효력은 사고를 통해 발생하지 않는다. 규범의 효력은 의지적 행위를 통해 발생한다. 따라서 논리적 추론은 규범을 창설하거나 폐지할 수 없다.

「만약 ‘법적 사고’와 같은 그러한 무엇이 있다면, 그런 논리적 원칙들은 이러한 사고에, 보다 정확하게는, ‘법적’ 사고행위로 표현될 수 있는 그런 사고행위의 의미에 적용 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고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논리적 원칙들은 모든 사고행위의 의미에 그런 것과 같이 당연히 소위 법적 사고행위의 의미에도 적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규범들은 사고행위들의 의미가 아니고,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고, 하나의 ‘법적’ 사고는 단지 의지적 행위의 의미인, 즉 이미 창설된 법규범을 대상으로 하는, 하나의 사고일 수 있을 뿐이다. 법적 사고를 통해서는 어떠한 법규범도 생산되거나 폐지될 수 없고, 하나의 법규범이 효력을 가질 수도 효력을 잃을 수도 없다.」(1편 462-463쪽)
「하지만 규범에 대한 모순율과 추론의 논리적 법칙의 적용 가능성의 문제는 하나의 규범충돌의 경우에, 그리고 하나의 일반적인 규범을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하는 경우에 문제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규범들의 효력발생과 효력상실이 문제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고의 방법에서는, 또한 하나의 ‘법적인’ 사고의 방법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법적 사고'와 같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1편 463쪽).

[미주 169]

카를 게오르크 부르첼
(Karl Georg Wurzel)은 이미 1904년 자신의 저서 Das juristische Denken에서 법관의 판결을 단순한 논리적 추론으로 설명하려는 전통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당시 지배적인 견해는 법적 판단을 입법자의 의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구체적 사건에 적용하는 과정으로 이해했고, 이에 따라 법관의 활동은 본질적으로 입법자의 의지를 탐색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인식행위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부르첼은 이러한 설명이 실제 법적 사고의 모습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법적 판단이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입법자의 의사를 찾아내는 과정으로 환원될 수 없고, 특히 사회적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실관계는 입법자가 사전에 모두 예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법관의 판단은 단순한 논리적 포섭 이상의 요소를 포함한다고 지적했다.
  
「이미 부르첼(Karl Georg Wurzel)은 자신의 저서 Das juristische Denken, Wien 1904에서 법관의 판결은 항상 하나의 논리적 추론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가정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법적 사고는 결코 그 기능을 하나의 실제 있었던 (입법자의) 의지의 탐색에서 다하지 않는다.”(50쪽)라고 말하고, 52쪽에서는 “입법자의 의사의 조사가 항상 하나의 실제의 의사의 조사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2편 316-317쪽)
 
법적 문제에서 등장하는 사실관계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며, 그 모든 상황을 입법자가 미리 예상하여 규정할 수는 없으므로, 구체적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입법자의 의사를 찾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입법자는 사회의 넓은 영역을 포괄적으로 규율하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의지는 단지 몇몇 지점만을 비추는 빛과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제한된 지침만으로는 현실의 모든 사건을 해결할 수 없으므로 법관은 단순한 논리적 포섭 이상의 판단을 수행하게 된다. 이를 이유로 부르첼은 법적 판단을 기계적 논리 연산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비판했다.
 
「그는 이어서, “오히려 법률가들에게 비난으로 기여하기도 하는, 무시무시할 정도의 양의 사실 및 결합된 사실관계들은, 어떤 의사에 의해서도 하나의 단순한 포섭이 해결책을 줄 수 있도록, 예견된 것은 아니다. 입법자의 의사는 삶의 넓은 영역에서 단지 개별적인 점들만을 밝게 비추고, 이러한 빛은 어떠한 유형의 단순한 논리적 조작(이성의 발견, 연역 등)을 통해서도 단순히 스스로 보다 더 넓게 될 수도 없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2편 317쪽)
 
판결은 일반규범 속에 명시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은 요소들을 포함하게 되므로, 판결을 일반규범 속에 이미 들어 있는 내용을 단순히 포섭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만약 일반규범 속에 포함되지 않은 요소가 판결에 포함된다면, 그 판단은 단순한 포섭이 아니라 새로운 판단행위가 된다는 점에서, 법적 결정은 단순한 논리적 연역과는 다른 구조를 가진다. 따라서 부르첼의 위와 같은 지적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부르첼이 의도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법관의 판결의 개별규범은 또한 법관으로부터 적용된 일반규범에서 함유되어 있지 않은 요소들을 함유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관점에서는 어떠한 포섭도 아니고, 따라서 어떠한 논리적 추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편 317쪽)
 
그러나 부르첼의 논의가 완전히 일관된 것은 아니다. 그는 법적 판단을 단순한 논리적 포섭으로 이해하는 견해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법적 사고가 논리적 추론의 형태를 갖는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법적 사고가 수많은 판결과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이며 논거를 제공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법적 사고가 여전히 논리적 추론의 형태로 이해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즉 법적 판단이 단순한 포섭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판결 자체가 논리적 추론의 결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여전히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 법적 사고인가? 무엇이 그것의 근본원칙들이고 그것의 특성인가? 무엇을 통해 그것은 인습적인 비법적 사고와 구별되는가? 그것은 애당초 비개연적인 것, 하나의 특별한 논리학의 변종인가 아니면 단지 법의 소재에 특별히 맞추어진 방법론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서는 명확성이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물론 법적 사고는 그것을 통해 무수한 판결들과 결론들이 도출되는 방법이고 논거들을 제공하고 그렇게 많은 절차들과 분쟁들을 결정하는 방법이다. 법률가가 도출하는 논리적인 추론의 힘으로 누군가 얘기했듯이 단두대의 도끼가 한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다른 사람의 등 뒤에서 교도소의 문이 닫힌다. 만약 그 결론이 법적 사고에 맞는 것이면 그 결론은 논리적인 것이다.”」(2편 317쪽)
 
부르첼은 법적 판단이 항상 정확한 결론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결이 논리적 추론의 형태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술했듯 법관의 판결은 단순한 사고과정의 결과가 아니라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다. 판결은 어떤 사실이나 규범을 인식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규범을 창설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의지적 행위는 논리적 사고조작의 결과로는 도출될 수 없다. 법적 판단을 논리적 추론의 결과로 이해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규범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형사법관의 판결들은 하나의 논리적 추론의 방법에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부르첼은 여기서 고부하지 않았다. 11쪽에서 그는, ‘법학’은 ‘항상 주어진 사실관계로부터 전적으로 정확한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편집자-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는 그런 도출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읽힌다는 것임). 본질적인 특징은, 법관의 판결은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라는 것 그리고 이것은 사고조작의 방법에서는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을 뷔르첼은 여기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2편 317-318쪽)

사람들이 일반규범에서 개별규범을 추론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논리적 추론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개별 행위가 일반규범에 부합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즉 논리적 도출이 아니라 규범적 정당화이다. 개별규범의 효력은 여전히 의지적 행위에 의해 발생한다. 사고는 단지 그 규범이 정당한지를 설명할 뿐이다.

「개별규범의 효력은―그것이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 설정된 것이라면―단지 하나의 다른 의지적 행위의 의미인 하나의 일반적인 규범의 효력을 통해서만 근거지워지거나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거지움 혹은 정당화는 다름이 아니라 그 개별규범이 일반규범에 부합한다는 것의 확정에 있는 것이다.」(1편 466쪽)

XXI. 기판력의 의미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범죄의 존재 여부가 객관적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법원의 확정이다. 즉 범죄가 실제로 있었는가보다 법원이 그것을 확정했는가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판결이 기판력을 획득했을 때 비로소 법적으로 확정된다. 따라서 법적 현실은 사실이 아니라 규범적 결정에 의해 형성된다.

「앞의 언급에서 하나의 범죄가 존재하는가(행해졌는가)라는 물음은, 법적으로 중요한 방식으로는, 그것으로 강제행위의 창설이 명령되는 그 법원의 판결이 기판력(res judicata, Rechtskraft)을 얻었을 때 비로소 대답될 수 있다는 것이 지적되었다.」(1편 467-468쪽)

기판력 원칙에 따라, 법원이 설정한 개별규범은 일반규범과 충돌하더라도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법은 일반규범에 따라 적용된다고 이해되지만 실제 법체계에서는 기판력이 그러한 원칙을 제한한다. 법원의 판결은, 확정되면 일반규범과의 불일치 여부와 무관하게 효력을 가진다. 이는 법질서에서 개별규범의 독립성을 보여준다.

「하나의 실정법질서에 규정된 기판력의 원칙은, 법적용기관을 통해, 특히 법원을 통해 개별적으로 설정된―입법자를 통해 혹은 관습을 통해 생겨난, 실질적으로 규정된, 일반규범에 부합하지 않는―규범이 유효할 수 있다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예를 들어 법원으로부터 확정된 명예훼손의 사례에서, 비록 입법자를 통해 일반적으로 설정된 규범이 명예훼손의 사례에 대해서는 단지 금전형만을 예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구금형을 선고한 법원의 판결이 기판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1편 468쪽)

[미주 170]

존 치프먼 그레이(John Chipman Gray), 법적 효력을 갖는 규범은 법원이 판결을 통해 설정한 개별규범뿐이라고 하면서, “모든 법은 법관이 만든 법이다라는 명제를 남긴 바 있다. 입법이나 관습을 통해 만들어진 일반규범은 그 자체 법이 아니라 단지 법의 원천(source of law)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법률이나 관습은 법관이 판결을 내릴 때 참고하는 자료일 뿐이며, 실제 법은 판결을 통해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아마도 법관의 판결이 단순한 논리적 연역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이 이러한 이론이 나오는 데 상당한 자극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반규범이 법이 아니라 단지 법의 원천일 뿐이라는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관계에 대한 통찰은 짐작건대 그레이(John Chipman Gray, The Nature and Sources of the Law, 2. Aufl., New York 1927)에 의해 주장된 다음과 같은 이론에 이르게 한 것 같다. “모든 법은 법관이 만든 법이다.” 즉 단지 개별적인 법원들을 통해 설정된 규범들만을 법규범들로, 입법과 관습을 통해 생성된 일반적 규범들은 단지 법의 원천(source of the law)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 법규범들에 법이라는 특성을 부인할 어떤 충분한 근거도 없기 때문에 본문에서 주장된 사실관계의 해석은 물론 그에 부합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2편 318쪽)
 
모리스 코헨(Morris R. Cohen)에 따르면, 법률의 의미는 법원이 해석을 통해 확정하기 때문에, 실제로 법을 만드는 것은 법원이라고 한 바 있다. 이러한 견해는 특히 판례 중심의 법체계에서 자주 제기되는 주장인데, 여기에는 해석과 법 자체를 동일시하는 오류가 있다.져 있다고 지적한다. 해석은 해석의 대상이 되는 어떤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법의 해석과 법 자체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은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해석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코헨(Morris R. Cohen, “The Process of Judicial Legislation”, The American Law Review, vol. XLVIII, 1914, S. 162)은 “우리는 그레이 교수와 함께 그 마지막 분석에서 법원들이 우리의 제정법(statute law)을 만든다는 것을 계속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을 구성하는 법규의 의미에 대한 법원의 해석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2편 318쪽)
 
성경이나 셰익스피어의 작품 역시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그 해석자에 의해 쓰여졌다고 말하거나, 햄릿이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해석자에 의해 창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법률이 해석된다고 해서 그 법률이 해석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해석은 해석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법과 법의 해석을 동일시하는 것은 개념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법관이 해석이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 새로운 규범을 적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법관이 만든 것은 법률이 아니라 새로운 개별규범일 뿐이다. 법관이 판결을 통해 창설하는 것은 특정 사건에 적용되는 개별규범이지 일반적 법률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법관의 활동을 일반규범창조로 이해하는 것은 과장된 해석이다.
 
「성경 혹은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해석된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성경은 그 해석자에 의해 혹은 햄릿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그 해석자에 의해 씌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단지 법률의 해석만이 있는 한, 그것은―법원에 의해 해석된―법원이 적용한 법률이지, 법원이 만든 법률은 아니다. 그럼에도 당연히 해석될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해석되는 것은 해석과 동일할 수는 없는 것이다.」(2편 318-319쪽)

그리하여 기판력 원칙은 법관에게 일정한 재량을 부여하는 효과를 지닌다. 물론 법원은 일반적으로 일반규범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기판력은 그 판결이 일반규범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아도 효력을 인정한다. 따라서 법관의 판단은 단순한 논리적 적용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규범을 창설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점에서 법적 판단은 의지적 행위의 성격을 가진다.

「사람들은 ‘만약 법관의 판결이 기판력의 실정법 원칙을 근거로 효력을 발하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이러한 원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라고 논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내용적으로 특정된 하나의 일반 법규범으로부터 법관의 판결이 논리적으로 연역된다는 가정에 대해 제시되었던 것과 동일한 내용의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기판력의 원칙을 근거로 효력이 발생한 법관의 판결도 단지 그것이 법관에 의해 설정된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 등장하는 경우에만 유효하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적 행위는 논리적인 사고조작의 방법으로 달성될 수 없다.」(1편 469쪽)

XXII. 다양한(상위한) 보편성을 지닌 일반규범들의 관계

어떤 일반규범은 더 일반적이고 다른 규범은 더 구체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서로 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은 매우 일반적이다. ‘사람은 서로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은 더 구체적인 형태이다. 이러한 경우 두 번째 규범은 첫 번째 규범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새로운 규범이 창설된 것이 아니라 기존 규범의 의미가 명확해진 것이다.

「하나의 일반규범과 그에 부합하는 개별규범 간의 관계는 두 개의 일반규범, 즉 단지 그의 일반적인 성격의 정도를 통해서만 구별되는 … 두 개의 일반규범 간의 관계와는 반드시 구별되어야만 한다.」(1편 470쪽)

그러나 개별규범의 경우에는 다르다. 개별규범은 일반규범의 단순한 구체화가 아니다. 개별규범은 특정한 사람, 특정한 사건, 특정한 행위를 규정한다. 따라서 일반규범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개별규범은 새로운 규범적 내용을 포함한다(1471-472).

「‘총격으로 농부의 죽음을 야기한 제화공은 종신 구금형에 처해져야만 한다.’는 개별규범은 ‘만약 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자신 본인의 행위를 통해 다른 한 사람의 죽음을 야기했다면, 그는 종신구금형에 처해져야만 한다.’는 일반규범보다 더 많이 규정하고 있다.」(1편 471쪽)

XXIII. 단순히 사고된 규범들과 실정 규범들에의 논리적 법칙 적용

많은 사람들은 규범의 내용이 서로 모순될 수 있기 때문에 논리적 법칙이 규범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간통자는 처벌되어야 한다간통자는 처벌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제는 서로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규범의 의미 내용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규범의 효력 자체는 논리적 관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상위규범으로부터의 수권 여부와 의지적 정립행위의 존부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당위문장들에서 표현된 의미내용들은, 만약 그것들이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 파악되지 않는다면, 실정적으로 전혀 유효한 규범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실제로, 사실상 이루어진 의지적 행위의 의미내용으로서만 실정적으로 유효한 규범들이다. 그것들의 효력(그것은 그들의 관념적인 실존이다)은 이러한 실제의 의지적 행위에 의존한다. 그리고 여기 놓인 문제는 모순율과 추론의 규칙들이 실정적으로 유효한 규범들에 적용 가능한가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에서는 그것의 의미로 유효한 규범들이 등장하는 의지적 행위가 간과될 수는 없다. 여기서 문제되는 의미내용에, 그것이 실제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인지를 문제삼지 않고, 양 논리적 원칙들이 적용 가능하다는 것으로부터, 그 원칙들이 단지 실제 의지적 행위의 의미형상으로서 실정의 유효한 규범들인 그 규범들에 적용가능하다는 것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1편 473-474쪽)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