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켈젠(김성룡 역), 규범의 일반이론, 아카넷, 2016
Hans Kelsen, Allgemeine Theorie der Normen (1979)
제16장 존재의 화법과 당위의 화법
“누군가가 무엇을 원한다”는 진술은 존재에 관한 사실 서술이다. 반면 “누군가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진술은 당위에 관한 규범적 명제이다. 이 둘은 문장 형식만 다른 것이 아니라, 지시하는 대상 자체가 다르다. 존재와 당위는 논리적으로 상호 환원될 수 없는 두 영역이다.
「이것은 두 개의 상이한 대상들에 관련된 두 개의 진술이다. 그중 하나는 당위에 관한 진술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에 관한 진술이다. 하나의 당위는 하나의 존재로,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당위로 환원(소급될 수 없다. 따라서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당위로부터, 하나의 당위는 하나의 존재로부터 도출될 수도 없다. 당위와 존재는 두 개의 서로 전적으로 상이한 의미들이거나, 두 개의 전적으로 상이한 의미내용들이다.」(1편 125쪽)
| [미주 48] 헤어는 이른바 ‘가정적 명령(hypothetical imperative)’ 개념을 제시하면서, 존재명제들로부터도 일정한 방식으로 명령적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목적을 원한다는 사실이 주어지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위를 지시하는 명령문이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옥스퍼드에서 가장 큰 식료품가게가 그림리 휴스(Grimbly Hughes)라는 사실과 어떤 사람이 그 가게에 가기를 원한다는 사실이 주어지면, ‘그림리 휴스로 가라’라는 명령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는 존재에서 당위가 도출된 것이 아니라 단지 수단-목적 관계가 진술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은 논리적으로는 명령이 아니라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필연적 수단을 기술하는 진술일 뿐이다. 「헤어(Hare, The Language of Morals, Oxford 1964, S. 33f.)는 “… 일련의 순수한 직설(암시)적 전제들에 수반될 수 있는 일종의 명령(문)적 결론이 있다. 이것은 소위 ‘가정적 명령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즉 하나의 조건지워진 당위는 존재진술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하나의 ‘가정적 명령’의 예로서 다음과 같은 예를 제시했다. “‘만약 네가 옥스퍼드에 있는 가장 큰 식료품가게에 가고 싶다면, 그림리 휴스(Grimbly Hughes)로 가라.’ 이것은 ‘그림리휴스가 옥스퍼드에서 가장 큰 식료품가게라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고, 그것을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2편 77쪽) 이러한 문장은 외형적으로만 명령문의 형식을 취할 뿐 논리적으로는 명령이 아니다. 문장을 엄밀하게 구성하면 그것은 ‘만약 네가 옥스퍼드에서 가장 큰 식료품가게에 가기를 원한다면 너는 그림리 휴스로 가야 한다’라는 형태의 조건문이 된다. 이것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필연성을 표현하는 진술일 뿐이며, 그 자체로 어떤 행위를 명령하거나 규범을 설정하는 당위명제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만약 네가 옥스퍼드에서 가장 큰 식료품가게에 가기 원한다면, 그림리 휴스로 가라.”라는 문장은 단지 언어적으로만 하나의 명령문이지, 논리적으로 하나의 명령문은, (즉) 하나의 당위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언어적으로 바르게 구성한다면 그 진술은 “만약 네가 옥스퍼드에서 가장 큰 식료품가게에 가기 원한다면 너는 반드시 그림리 휴스로 가야만 한다(할 것이다).”이다. 그것은 수단-목적 관계의 진술이고, 수단-목적 관계는 위의 본문에서 표현했듯이, 당위가 아니고 명령이 아니고, 하나의 필연(Mussen), 하나의 원인-효과 관계인 것이다.」(2편 77쪽) ‘그림리 휴스는 옥스퍼드에서 가장 큰 식료품가게이다’라는 사실명제와 ‘너는 옥스퍼드에서 가장 큰 식료품가게에 가고 싶어 한다’라는 사실명제에서 명령문 ‘그림리 휴스로 가라’가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는 없다. 명령은 진리값을 갖는 명제가 아니라 의지행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논리적 추론은 참과 거짓을 갖는 명제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며, 명령문은 이러한 논리적 연산의 결과로 산출될 수 있는 종류의 문장이 아니다. 「(1) 그림리 휴스는 옥스퍼드에서 가장 큰 식료품가게이다; (2) 너는 옥스퍼드에서 가장 큰 식료품가게에 가고 싶어 한다(원한다)라는 진술들의 진실로부터, 논리적인 사고작동의 방법으로 ‘그림리 휴스로 가라!’라는 명령문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명령문은 단지 이러한 식으로 달성될 수 없는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 유효하기 때문이다.」(2편 78쪽) |
| [미주 49] 볼차노는 명령문을 심리적 현상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이해하면서 그 속에 당위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명령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위를 원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가령 ‘문을 닫아라’라는 명령은 단지 특정 행위를 요구하는 문장이 아니라 ‘나는 네가 문을 닫기를 원한다’라는 의지의 진술로 해석된다. 그는 이러한 명령을 하나의 ‘과제(Aufgabe)’라고 부르며, 명령문을 과제문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명령하는 행위와 명령의 의미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를 낳는다. 후썰이 지적했듯이 심리적 행위, 즉 의미를 부여하는 체험과 그 행위가 산출하는 의미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볼차노(Bernhard Bolzano, Wissenschaftslehre, 2. Bd., 2. Aufl., Leipzig 1929)는 명령문들을 ‘심리적인 현상을 표현하는 문장들’이라는 표제어 아래서 다루었다. 그는 명령문에는 하나의 ‘당위’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명령은 의지(원함)의 표현이라고 했다. ‘이리 와!’라고 말하는 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와야만 한다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하나의 요구, 하나의 명령을 볼차노는 ‘과제·과업(Aufgabe)’이라고 불렀다. 명령은 하나의 ‘과제문’이다. 그는 한 다른 사람의 행위에 향해진 하나의 원함(Wollen)이 존재한다고 했다. 따라서 ‘문을 닫아라’라는 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나는 네가 그 문을 닫아야만 한다고 원한다’이다. 볼차노는 의지적 행위, 즉 명령하는 것과 이러한 행위의 의미, 즉 명령을 구분하지 않았다.」(2편 78쪽) 후썰은 이러한 혼동을 비판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심리적 행위와 그 행위가 산출하는 의미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명령하는 행위는 심리적 사건이지만 명령의 의미는 그 사건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실제 철학 논의에서는 이 두 차원이 자주 뒤섞인다. 베커 역시 규범을 인간의 선택행위나 의지적 행위와 연결시키면서 규범의 본질을 행위 자체에서 찾으려 한다. 이러한 접근은 규범의 의미를 규범설정행위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여 준다. 「그에 대해 후썰(Edmund Husserl, Logische Untersuchungen, 5. Aufl., Tübingen 1968, 2. Bd., I. Teil, S. 4, 42ff.)은 심리적인 행위, 즉 ‘의미를 부여하는 체험’과 그 ‘의미’를 구별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양자의 혼합은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예를 들어 베커(Walter G. Becker, “Die Realität des Rechts”, Archiv für Rechts-und Sozialphilosophie, Bd, XL, 1952/1953, S. 216ff. u. 275ff.)가 그렇게 말했다: “만약 하나의 행위가 규범으로 특징 지워져야만 한다면, (Gehlen의 입장에 따를 때) 선택행위가 문제되는 것이 분명하다(행위는 선택을 암시·내포한다: act implies a choice). 하지만 여전히 무엇보다 규범의 미숙한 상태(Embryonalzustand)는 정신, 의지, 오성과 이성을 갖춘 특수한 인간의 역량으로부터 조종되는 인간의 조직적인 선택행위에, 즉 (무감각적인 실제행위 혹은 반감적인 범죄행위에 반해서) 공감적인 설정행위에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판단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 판단에는 (지식에 의한) 지식형상 혹은 인식형상이 존재하며, 물론 (의지에 의해서) 하나의 의지형상도 존재한다.”(399쪽)」(2편 78-79쪽) 규범을 설정하는 행위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 행위 자체가 규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규범은 행위가 아니라 의미이며, 따라서 판단이나 의지의 상태와 동일시될 수 없다. 모리츠 역시 이러한 점을 강조하면서 명령의 의미를 “나는 네가 그것을 원한다.”라는 판단으로 환원하는 해석을 거부한다. 명령은 어떤 사실을 알리는 진술이 아니라 특정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반해서 정당하게도 모리츠(Manfred Moritz, “Gebot und Pflicht. Eine Untersuchung zur imperativen Ethik”, Theoria, vol. VII, 1941, S. 224)는 “그것을 하라!”는 명령의 의미는 “나는 네가 그것을 하는 것을 원한다.”라는 판단을 통해 재현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모리츠는 명령하는 주체의 의지에 관한 판단으로서 명령을 해석하는 것은 거부한다. 그는 222쪽에서 “그 [명령하는] 주체는 무언가를 고지하려고 원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도록)로 유도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 그것은 명령의 의미이다.”라고 했다. 즉 명령은 진술이 아니고, 판단이 아니다.」(2편 79쪽) 그러나 모리츠 역시 완전히 일관되지는 않다. 그는 명령 속에 어떤 형태의 진술이 암시되어 있다고 인정한다. 예컨대 명령을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알게 되며, 이 점에서 명령 속에는 일종의 정보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적 요소는 명령의 의미 자체가 아니라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요소일 뿐이다. 명령 그 자체는 여전히 요구이며 진술과는 다른 의미 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모리츠는 명령에서 하나의 진술이 암시(포함)되어 있다고 받아들인다. 그는 225쪽에서 명령을 판단(Urteil)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이러한 이론은 명령 자체에서 말해진 것을 고수하지만 동시에 명령적인 요소, 즉 명령함 자체는 간과한다. 물론 이러한 이론에 의해 사람들은 하나의 판단과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하는 이론에 유리하게 이용된 그러한 하나의 고지(정보의 제공)가 명령 속으로 들어간다. 물론 명령을 받은 주체는 당연히 사람들이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도 반드시 알게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거기에 바로 명령적인 구성요소, (즉) 요구 그 자체가 들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적인 구성요소는 명령문의 표현(문장구성)에 있다.”」(2편 79쪽) 명령이 어떤 사실을 알리는 진술이거나 진술을 포함한다는 생각은 규범과 규범에 관한 진술을 혼동한 결과이다. 규범은 어떤 행위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규정한다. 따라서 규범은 진술이 아니며, 진술을 포함하지도 않는다. 명령 속에 진술이 포함된다고 보는 모리스의 설명은 결국 규범 자체와 규범에 관한 서술을 뒤섞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명령은, 이러한 고지가 명령 속으로 ‘들어간다면’ 이러한 고지 속으로 다가갈 수(덧붙여질 수) 없다. “사람들을 또한 명령에서 말해진 것이 판단과 같이 파악될 수 있다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Moment)에는 우선 명령적 요소가 덧붙여지는 것이다. 이것은 그것에 동일하게 겹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명령(Imperativ), 보다 정확히는 명령(Befchel), 요구(Gebot), 규범은 또한 하나의 진술·언명(Aussage)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명령, (즉) 규범은 어떠한 진술도 아니고, 어떠한 진술도 함유(내포)하지 않는다. 규범이 명령하는 것, 즉 그 규범이 규정하는 행위는, 규범에서 언급(ausgesagt)되지 않으며, 달리 말해, 기술되지 않고 규정되는 것이다. 모리츠는 여기서 규범인 명령을 규범에 관한 진술과 섞어버린 것이다.」(2편 80쪽) 이러한 혼동은 다른 논리학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지크바르트는 명령문과 진술문을 구별하면서도 명령문 속에 하나의 주장이 포함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네가 그것을 하길 원한다’라는 문장은 명령문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문장이다. 그것은 명령의 의미를 설명하는 진술일 뿐이며 명령 자체가 아니다. 「물론 매우 명망 높았던 논리학자도 그렇게 했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지크바르트도, 진술 혹은 주장(명제)문은 참 혹은 거짓이지만, 명령문은 ‘그것의 진실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고, 진술 혹은 주장문과 같이 ‘하나의 사실을 알리는 것’을 의도하는 것은 아니라고 확인함으로써, 비록 명령문(Imperativsatz)과 진술문(Aussagesatz)혹은 주장문(Behauptungssatz)을 명백하게 구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령문도 물론 하나의 주장을 포함한다. 즉 말하는 자가 그에 의해 요구된 행위를 지금 바로 원한다. … 는 주장을 포함한다.”라고 그렇게 말했던 것(Sigwart, Logik, I, 5. Aufl., 1924, S. 18)이다.」(2편 80쪽) 후썰 역시 규범적 문장 속에 이론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전사는 용맹해야만 한다”라는 규범적 문장이 사실상 “용감한 전사만이 훌륭한 전사이다”라는 이론적 문장을 포함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역시 규범과 규범에 관한 진술을 혼동한 것이다. 후자의 문장은 규범을 설명하는 새로운 진술일 뿐이며 규범 자체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후썰(Edmund Husserl, Logische Untersuchungen, 5. Aufl. Tübingen 1968, 1. Bd., S. 40)은 저마다의 규범적 군기(Disziplin) 규정들은―그는 이것을 이러한 군기를 ‘세우는’ 규범들로 이해한다―“(당위의) 규범화의 사고와는 구별 가능한 이론적인 내용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48쪽에서 “‘A는 B여야만 한다.’[예를 들어 규범으로서 ‘전사는 용맹해야만 한다.’, (혹은) ‘전사야, 용맹해라!’라는 명령문과 동일한 의미로]와 같은 형태의 저마다의 규범적 문장은, ‘단지 B인 A만이 C라는 속성(여기서 우리는 C를 통해 ‘좋은.훌륭한(gut)’이라는 표준이 되는 술어의 구성적인 의미를 암시한다)을 가진다.‘[즉 ‘단지 용감한 전사만이 좋은 훌륭한 전사이다.’]라는 이론적인 문장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2편 80쪽) 이러한 시도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규범을 설명하는 이론적 문장은 규범과 동일한 문장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문장이다. 규범은 어떤 행위를 규정하는 의미를 가지며, 규범에 관한 진술은 그 규범을 설명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 둘을 구별하지 않으면 규범에 논리적 원칙을 적용하려는 시도들이 잘못된 전제 위에 서게 된다. 「하지만 후썰은 “새로운 문장은 하나의 순수한 이론적인 문장이고, 이 문장은 더 이상 규범화의 사고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라고 첨언했다. 사실상 이러한 ‘이론적’ 문장은, 후썰 스스로 인정해야만 했듯이, 하나의 ‘새로운’ 문장이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규범적’인 문장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고, 따라서 여기에는 포함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용감한 전사만이 훌륭한 전사이다.”라는 이론적 문장은 “전사는 용감해야만 한다.”라는 진술문과 전적으로 동일한 의미이다. 왜냐하면 무언가 ‘좋은·훌륭한’이라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규범에서 당위된 것이라는 의미와 전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2편 80-81쪽) 명령하는 행위와 명령의 의미가 다른 것처럼, 규범과 규범을 설명하는 진술 역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구별이 무너지면 규범을 논리적 명제처럼 취급하는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후썰에 의해 표현된 이론적 문장은 하나의 진술적 당위문(aussagender Soll-Satz), 즉 하나의 규범에 관한 진술(Aussage über eine Norm)의 전형적인 예이다. 명령하는 자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을 진술하는 문장과 그 자에 의한 명령을 표현하는 규범적인 문장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것은 후썰이 자신의 연구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체험(사건)’과 ‘의미’ 간의 연구로 인정했던 것이다]과 매한가지로 하나의 규범인 당위문은, 단어의 표현(Wortlaut)에 따를 때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의 의미에 따를 때는, 하나의 규범에 관한 진술인 당위문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양자를 구별하지 않는 것은 논리적 원칙들을 규범들에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들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2편 81쪽) |
두 개념은 서로 다른 형식이며, 각각 임의의 내용을 수용할 수 있다. 즉 동일한 내용이 존재적으로도, 당위적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형식 자체에서는 어떠한 특정 내용도 도출되지 않는다. 형식은 단지 내용을 담는 방식일 뿐이다.
「‘존재’와 ‘당위’는 순수한 형식적 개념들이고, 각각 임의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두 개의 형식들(Formen)이고 화법(양식; Modi)이지만, 그것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특정한 내용을 가져야만 한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종의 것이고, 존재해야만 하는 모종의 것이다. 하지만 형태(Form)로부터는 어떠한 특정 내용도 나오지 않는다.」(1편 125쪽)
| [미주 50] 해거스트룀은 존재와 당위의 이원론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법적 당위의 개념을 부정하는 독특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단지 도덕적 당위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당위이며, 법적 규범은 이러한 의미의 당위가 아니라고 한다. 도덕적 명령은 다른 모든 명령보다 권위 있는 것으로 경험되며,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것으로 느끼는바, 그러한 경험적 특징 때문에 도덕적 명령만이 ‘진정한 당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특정한 도덕체계의 당위를 당위 일반과 동일시하는 오류에 해당한다. 도덕적 당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다른 규범체계, 특히 법적 규범의 당위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하나의 특정 도덕의 당위와 당위를 동일시하는 전형적인 예는, 해거스트룀(Hägerström, Inquiries into the Nature of Law and Morals, Uppsala 1953, S.201ff.)이다. 그에게는 단지 하나의 도덕적인 당위만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법적 당위라는 개념을 거부했다. “모든 상황하에서 도덕적 의무의 인식을 구별(특징) 짓는 것은 이러한 ‘명령’을, 모든 다른 명령과 비교할 때, 권위있는 것으로 느낀다는 것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명령은, 모든 다른 명령 이전에, 준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혹은 솔직히 말하면 이 명령을 따르는 것만이 행위의 옳은(right) 방법(길)이다. 그것은 내가 준수해야만 하는 명령으로 두드러짐을 통해 특별한 신성함을 부여받게 된다.”」(2편 81쪽) 해거스트룀은 도덕적 의무와 법적 의무 사이에 공통의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도덕적 의무는 ‘발생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당위에 속하지만, 법적 의무는 단지 특정한 외적 권력의 명령을 받는 사실적 관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도덕적 당위와 법적 당위를 동일한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은 하나의 특정한 방법으로 행위해야만 한다는 도덕적 의무에 의해 이해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무엇이건 간에 그 속에, 두 가지의, 즉 법적이라고 불리는 것과 단순히 누군가(one)는 (하나의) 특정한 외적 힘의 명령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있다고 하는 것, 이 두 가지의 의무가 속하는 공통의 유형(genus)은 없다. 후자에 대해서는 사실상의(de facto) 관계라고 표시되고, 전자의 것은 ‘발생해야만 하는 것’(ought to happen)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곳에는 순전히 사실적인 것과 ‘당위’(ought)인 것을 포함하는) 공통의 것(common genus)은 없다.」(2편 82쪽) 해거스트룀은 법규범이 사람들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한다는 생각 자체를 부정한다. 다시 말해 그는 법규범을 규범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사실적 명제나 권력관계의 표현으로 이해한다. 「해거스트룀은 존재와 당위의 이원론은 승인했다. 하지만 그는 ‘법규들’(rules of law)이 사람들은 특정한 식으로 행위해야만 한다는 것을 규정한다는 것을 부정했다. 달리 말해 법규들은 당위규범들이라는 특수한 의미에서 규범들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단지 도덕적인 당위만이 ‘진정한’ 당위이고, ‘genuine ought’(222쪽)라는 것이다.」(2편 82쪽) 그러나 법규범을 단순한 존재명제로 이해하는 해석은 유지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절도를 처벌과 결합시키는 법규범을 단순한 사실적 진술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절도를 하면 처벌된다’라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절도가 처벌되지 않는 사례들이 무수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진술은 사실 명제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법규범은 단순한 존재명제도 아니며, 특정한 의미에서의 규범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법의 규칙(법규)들’이 어떠한 당위규정도 아니라면, 그것들은 단지 존재규정일 수 있다. 그것들(법규들)은 그것(존재규정)이 아니라는 것, 절도를 형벌과 결합하는 법규들은 만약 누군가가 절취했다면 그는 처벌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절도가 처벌되지 않는 무수한 사례들이 있기 때문에, 자명한 것이다.」(2편 82쪽) |
이를테면 ‘무언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식의 표현은 마치 당위가 존재를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당위는 존재를 기술하는 문장이 아니다. 존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행위이지, 당위 그 자체가 아니다. 당위는 존재진술을 내포하지 않는다.
「‘무언가 있어야만(존재해야만 한다)’라는 언어관용은 착오를 유발한다. 이 표현(언어관용)은 마치 그 당위가 하나의 존재를 함유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무언가가 당위되었다(의무지워졌다)’라는 분사화된 형태의 언어사용에서는 이러한 인상은 피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의 당위는 하나의 존재를 목적으로 한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이것도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언어관용이다. 당위는 하나의 존재를 목적으로 하는 것, 즉 하나의 특정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1편 127쪽)
존재와 당위는 서로 다른 화법이지만, 그 안에 담기는 내용은 동일할 수 있다. 가령 ‘무엇이다’와 ‘무엇이어야 한다’는 표현은 형식이 다르지만, 그 안의 내용, 즉 그 표현이 가리키는 행위 자체는 동일한 기체[基體; Substrat(기체, 기초, 기본 재료, 화법과 상관없는 기본적인 내용)]일 수 있다.
「‘존재’와 ‘당위’는 두 개의 상호 본질적으로 다른 화법(표현양식; modi), 하나의 특정 내용을 가지는 두 개의 상이한 형태이다. ‘무언가 존재한다(무엇이다)’와 ‘무언가 (존재)해야만(있어야만) 한다’는 진술에서 우리는 두 개의 상이한 구성요소들을 구별해야만 한다. 즉 i) 무언가 있다는 것과 무엇이라는 것, ii) 무엇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과 무엇이어야만 하는 것을 구별해야만 한다. 무엇이라는 것과 무엇이어야만 하는 것, 존재의 내용과 당위의 내용은 화법상 구별되지 않는 기체이다.」(1편 129쪽)
예를 들어 ‘A는 도박채무를 지불한다’는 문장과 ‘A는 도박채무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문장에서 ‘도박채무를 지불함’이라는 내용은 동일하다. 존재의 화법에서는 그것이 사실로 나타나고, 당위의 화법에서는 그것이 규범적 요구로 나타난다.
「‘A는 그의 도박채무를 지불한다’는 문장에서는 화법상 차이가 없는 기체인 ‘도박채무를 지불함(하다)’이 존재 화법의 옷을 입고 있고, ‘A는 그의 도박채무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문장에서는 화법과는 무관한 기체인 ‘도박채무를 지불함(하다)’이 당위 화법의 옷을 입고 있다. ‘A는 그의 도박채무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규범은 화법에서 구별되지 않는 기체에 당위의 화법을 준다.」(1편 129쪽)
기체 자체에는 논리학의 원칙이 적용될 수 없다. 참과 거짓은 존재의 화법에서만 문제된다. 유효와 무효는 당위의 화법에서만 문제된다. 그러나 기체 자체는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 유효하지도 무효하지도 않다.
「동시에 주의해야 할 것은, 화법상 차이가 없는 기체는 존재의 화법에서 나타나는 진술과 같이 참이거나 참이 아니거나, 혹은 당위의 화법에서 등장하는 규범과 같이 유효하거나 유효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따라서 논리학의 원칙들은 화법에서 차이 없는 기체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1편 130쪽)
(객관적) 가치는 현실에 덧붙여지는 심리적 감정이 아니다. 어떤 행위가 ‘가치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누군가가 그것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다. 가치는 규범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된다. 어떤 행위가 규범에 의해 의무지워졌다는 사실이 곧 그 행위의 객관적 가치이다. 따라서 가치판단은 현실판단과 구조적으로 구별된다.
「하나의 특정 행위를 의무진 것으로 설정하는 규범은 하나의 가치를 구성한다. 하나의 특정 행위가 ‘가치 충만하다’라는 판단, 하나의 가치를 ‘가진다’는 판단은 (그리고 이 의미에서 ‘선’하다는 판단은) 이 행위가 화법상 차이 없는 기체로서 하나의 규범에서 의무지워졌다는 것이고, 하나의 당위의 내용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또한 이것을, 사람들이 하나의 특정-존재하는 행위는 하나의 규범에 ‘일치한다’라고 말한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화법상 구별되지 않는 기체로서 하나의 행위가 존재의 양식에서 존재한다는 것만을 표현하는 하나의 현실판단(Wirklichkeits-Urteil)과는 달리, 하나의 가치판단(Wert-Urteil)이다.」(1편 131쪽)
현실에서 곧바로 가치를 도출할 수 없고, 가치로부터 현실을 추론할 수도 없다. 객관적 가치판단은 유효한 규범을 전제로 한다. 반면 주관적 가치판단은 단지 사실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표현할 뿐이다.
「존재와 당위의 이원주의는 현실(실재·사실; Wirklichkeit)과 가치(Wert)의 이원주의와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현실(사실)로부터는 어떠한 가치도, 가치로부터는 어떠한 현실도 도출될 수 없다. 하나의 특정 행위가 유효한 것으로 전제된 규범에 일치하거나 혹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판단은 객관적 가치판단으로, 한 인간 혹은 다수의 인간에 의해 희구된다거나 혹은 희구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즉 단지 하나의 특정 인간의 행위만이 아니라 하나의 특정 대상이 기대된다거나 혹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만을 표현하는 주관적인 가치판단과 반드시 구별되어야만 한다.」(1편 131쪽)
빨간색이 사물의 물리적 속성인 것처럼, 가치도 행위의 속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가치란 존재와 당위의 내용이 동일하다는 관계에서 발생한다. 즉 화법상 구별되지 않는 기체의 동일성 속에서만 가치가 성립한다.
「그러한 하나의 객관적 가치판단의 경우에 가치는 마치 예를 들어 하나의 색깔이 하나의 현실의 대상의 실제 속성인 것처럼, 그렇게 그 현실의 속성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하나의 현실(적인 것)이 객관적으로 ‘가치충만하다’는 것은 하나의 존재가 하나의 당위에 부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확인되었던 것과 같이, 화법상 차이가 없는 기체가 존재의 양식에서, 그리고 당위의 양식, 두 가지 양식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1편 132쪽)
| [미주 52] 어떤 행위가 평가될 때 우리는 흔히 그 행위가 특정한 규범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예컨대 법적 가치판단에서 어떤 행위가 적법하다고 평가되는 것은 그것이 입법자의 의사에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가치판단은 일종의 객관적 판단처럼 보이며, 어떤 실제적 의지와의 관계를 말하는 현실판단처럼 이해될 여지도 있다. 그러나 객관적 가치란 특정한 행위가 실제 의지에 부합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효한 것으로 전제된 규범에 부합한다는 점에 있다. 「만약 우리가 평가될 행위가 단지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규범에 대해 가지는 관계에 관한 객관적 판단에서, 그 의미가 이 규범인 실제의 의지적 행위로 나아간다면, 그리고 그 가치판단에서 실제적 행위가 실제적 의지적 행위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말한다면, 우리는 또한 이러한 객관적 가치판단을 현실(성)판단으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 가치는 하나의 행위가 유효한 것으로 전제된 하나의 규범에 부합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지, 그 의미가 규범인 의지에 부합한다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에 대한 반론이다.」(2편 84쪽) 뒤르켐은 가치판단과 현실판단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가치판단은 어떤 대상이 하나의 ‘이상’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표현하는 판단이다. 여기서 ‘이상’ 역시 하나의 실제적인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며, 결국 가치판단은 현실판단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주어진 요소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명제라는 것이다. 「뒤르켐(E. Durkheim, “Jugements de valeur et jugements de réalité”,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1911, S. 437ff.)은 가치판단과 현실(성)판단 간에는 어떠한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451쪽에서 “언급한 바에 따를 때 우리는 그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았다. 가치판단은 하나의 것(존재, thing)이 하나의 이상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혹은 이상은, 비록 다른 방식으로지만, 그 대상과 같이 주어진 실제 그 자체이다(주어진 것이다). 표현된 관계는 현실 판단에서처럼 두 개의 주어진 용어들을 결합한다.”라고 말했다.」(2편 84쪽)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는 문제가 있다. 뒤르켐은 가치판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관적 가치를 무시하고 오직 객관적 가치만을 고려하였다. 또한 가치판단을 설명하기 위해 ‘이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지만, 이 용어는 항상 적절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특정 행위가 실정법 규범에 부합하기 때문에 적법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그 규범을 반드시 ‘이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규범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과 정반대의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뒤르켐은 이러한 ‘이상’을 사회적 현실의 한 형태로 이해하려 했다. 그는 사회를 단순한 기능적 조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이상을 지닌 하나의 정신적 실체로 파악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상은 공동체의 의지적 요구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440쪽에서 “이러한 이상들, 그것들은 단순히 그 사회가 자신의 발전단계에서 최고도의 지점에서 자신을 드러내고(묘사하고) 존재한다는 관점에서의 생각(사고)이다. 단지 우리가 사회를 어떤 살아 있는 기능을 위해 조직된 신체로서 바라보는 것은 그것을 축소하는 것이다. 이 신체에는 정신이 살고, 그 정신은 전체적인 집단적 이상들이다.”라고 말했다.」(2편 85쪽)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공동체의 실제 의지적 행위와 그 행위의 의미를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규범은 의지적 행위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의미이다. 의지적 행위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인과적 사건이지만, 규범의 효력은 이러한 사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규범은 행위의 의미로서 존재하며, 이러한 점에서 의지적 행위와 동일시될 수 없다. 이러한 구별을 무시하고 ‘이상’을 하나의 특별한 현실로 이해하게 되면, 결국 행위의 존재와 행위의 의미 사이의 차이를 흐리게 만드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현실(Realität)’로서 ‘이상(Ideale)’을, 또한 특별한 성질(Natur)의 현실로서 이상, 즉 사회적 본질의 실제로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행위의 존재와 이러한 행위의 의미의 존재간의 차이가 무시된다는 의심스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2편 85쪽) |
규범에서 당위된 행위가 현실의 장래 행위라는 생각 역시 타당하지 않다. 규범은 미래 사실을 예측하는 명제가 아니라, 어떤 행위를 의무로 설정하는 의미구조이다. 가치는 현실과 규범의 비교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체와 기체의 동일성에서 성립한다.
「규범에서 당위된 것으로 설정된 행위는 존재하는 행위, 사실상의 행위, 그 규범에 일치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그 규범에서 의무지워진 행위는 또한 규범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의 장래의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하나의 특정 행위를 당위된 것으로 설정하는 규범의 효력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사전에 규정된 행위가 아직은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만약, 그것의 화법상 차별 없는 기체가 규범에서 당위된 행위의 화법상 차이 없는 기체와 같은 행위는 현실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사실관계는 바르게 기술된 것이다.」(1편 132-133쪽)
제17장 존재와 당위의 이원론 부인
존재와 당위의 차이는 추가적인 분석이나 정의를 통해 환원될 수 있는 종류의 구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형식적 구별이다. 여기서 직접성은 특정한 도덕규범의 내용이 의식에 주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있다’와 ‘있어야 한다’라는 두 표현양식이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다는 점이 자명하게 파악된다는 의미이다. 존재는 사실의 실존에 관한 진술이고, 당위는 규범의 효력에 관한 언명이다. 이 두 진술은 형식상 유사해 보일 수 있으나, 지시하는 대상과 의미구조에서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존재와 당위의 차이는 보다 더 상세하게 해명될 수 없다. 그 차이는 우리의 인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다[이것이 우리의 인식(Bewußtsein)에 특정한 내용의 당위가, 예를 들어 내용적으로 정해진 하나의 도덕규범이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당위의 개념은 존재의 개념이나 마찬가지로 정의되기 어렵다. 하지만 누구도 무언가 존재한다(있다)는 진술[이것은 하나의 존재에 관한 진술이고, 하나의 사실의 존재·실존(Existenz)에 관한 진술이다]은 무언가 있어야(존재해야)만 한다(이것은 하나의 당위에 관한, 하나의 규범의 효력에 관한 언명이고, 이 효력은 그 규범의 특수한 실존이고, 그 규범의 존재함이다)는 진술과 상이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1편 135쪽)
어떤 것이 현실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규범적 결론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반대로 어떤 것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규범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증하지 않는다. 존재와 당위는 서로 독립적인 두 영역을 형성하며, 이 간극은 해소될 수 없다.
「하나의 규범에서 당위되지 않은 무엇이 존재할 수도 있고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 하나의 규범에서 당위될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이 있다(존재한다)는 것으로부터 무엇이 있어야만 한다가 도출될 수는 없고, 따라서 무엇이 있어야만 한다로부터 무엇이 있다(존재한다)가 도출되지는 않는다. 당위와 존재는 해소될 수 없는 이원주의의 관계에 있다.」(1편 135-136쪽)
이러한 논리적 이원주의는 윤리학에만 국한된 명제가 아니라, 존재와 당위의 일반적 구별에 관한 원칙이다. 윤리적 전제 없이 윤리적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는 명제는, 보다 일반적으로 존재명제로부터 당위명제를 도출할 수 없다는 원칙의 특수한 적용에 불과한 것이다.
「Arthur N. Prior는, Logic and the Basis of Ethics, Oxford 1949, S. 18에서, “전적으로 비윤리적인 전제들로부터 하나의 윤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존재와 당위의 논리적인 이원주의라는 일반적인 원칙을 윤리학이라는 특수한 영역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1편 136쪽)
제러미 벤담은 당위를 사실적 진술이나 심리적 동기의 문제로 환원하려 한다. 그는 ‘ought’라는 표현이 논증 없이 권위를 가장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고 비판하면서, 윤리학에서 당위 개념을 제거하고자 시도한다. 규범을 폐기하고, 인간이 실제로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사실적 목표를 중심으로 윤리학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무론(Deontology, or The Science of Morality: in which the Harmony and Coincidence of Duty and Self-Interest, Virtue and Felicity, Prudence and Benevolence, are explained and exemplified“, vol. I, London 1834, S. 31f.) 》에서 윤리학으로부터 당위를 제거하기를 원했던 제러미 벤담 … 은 “오만, 게으름, 그리고 무지의 부적은 권위적 사칭이라는 한 단어에서 알 수 있고, 여기 몇 페이지에서 자주 베일이 벗겨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해야만 한다’(ought)―해야만 한다 혹은 해서는 안 된다(ought or ought not)―라는 단어이다. ‘너는 이것을 해야만 한다―너는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결정에 있어서 도덕의 모든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만약 그 단어의 사용이 어쨌거나 허용이 된다면, ‘해야만 한다’(ought)는 도덕의 단어에서 사라져야만 한다.”라고 한다.」(1편 154쪽)
벤담은 왜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또 다른 ‘해야 한다’로 답하는 것이 순환적이라고 본다. 그에게 당위는 근거 없는 선언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어떤 사실이나 결과에 대한 설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윤리학은 규범을 정립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추구하는 행복을 증진시키는 수단을 탐구하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벤담이 ‘당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왜 사람들은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항상 당위문으로 대답된다는 사실이다. “교조주의자(dogmatist)들은 ‘너는 해야만 한다’―‘너는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질문자가 묻는다―왜? ‘너는 해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극도로 쉽다. 왜?라는 탐색적인 질문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왜 나는 해야만 하는가? 왜냐하면 너는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드물지 않은 대답이다. 그 왜?는 승리를 얻은 추가된 이익을 가지고 다시 돌아온다.”(같은 책, S. 32)」(1편 155쪽).
그러나 벤담의 비판은 당위가 당위에 의해만 정당화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그친다. 이는 윤리학의 구조적 특징이지, 당위를 제거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공리주의 원리를 제시하는 순간, 다시 당위의 형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달성‘되어야 할’ 상태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벤담의 의무론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원칙의 적용이다. 이 원칙은 주지하다시피 인간들의 사실상의 행위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사실상 그들의 행위를 통해서 달성하려고 하는 소망·욕망(Lust)은 최대다수의 최대의 행복상태라는 주장도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규범, 요구, 즉 그들의 행위를 통해 이러한 상태를 가져와야만 한다는 하나의 규범이고 요구인 것이다. 이 규범은 벤담의 공리주의 윤리학의 주장자들에 의해 묵시적으로 전제되었지만, 인간은 만약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적합한 수단이도록 행위하는 경우에 진실로 행복하다고 하는, 의문시되는 명제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1편 156-157쪽)
벤담은 당위를 제거하려 했지만, 결국 다른 형태의 당위를 도입한다. 행복이 사실상 추구된다는 진술과 행복이 추구되어야 한다는 규범은 동일하지 않다. 벤담의 체계는 존재와 당위를 동일시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규범을 사실로 위장하는 방식으로 당위를 유지한다. 이 점에서 그는 존재와 당위의 논리적 이원주의를 해소하지 못한다.
「벤담 스스로 자신의 '의무론'의 근본명제를 “모든 즐거움은 일견 선한(좋은) 것이고, 추구되어야만 한다. 모든 고통은 얼핏 보기에는 악이고, 회피되어야만 한다.”라는 식으로 표현했을 때, ‘당위’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할 수 없었다.」(1편 155쪽)
쉴리크는 논리실증주의의 입장에서 윤리학을 규범의 학문이 아니라 사실에 관한 학문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의 기본 생각은 윤리적 판단이 객관적 당위를 기술하는 명제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행위나 사고행위와 같은 사실적 과정에 관한 진술이라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윤리학이 다루는 대상도 규범이나 당위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평가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라는 경험적 사실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규범을 창설하는 행위와 그 행위의 의미를 혼동한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원하거나 의지한다는 사실은 하나의 존재사실이지만, 규범은 그러한 의지행위의 의미로서 특정한 행위를 해야만 한다는 당위를 표현한다. 규범의 유효성과 그것이 실제로 준수되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으며, 규범을 사실의 진술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존재와 당위의 논리적 구별을 혼동하게 만든다.
「벤담의 의무론에 전적으로 유사한 하나의 견해는 모리츠 쉴리크(Moritz Schlick)에 의해 기초가 잡힌 소위 논리적 실증주의(logische Positivismuso)이다. 그의 글 《윤리학의 물음들(Fragen der Ethik)》(Schriften zur wissenschaftlichen Weltauffassung, Bd. 4, Wien, 1930, S. 81)에서 쉴리크는 당위를 하나의 존재로 환원하려 시도했다. “‘나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른 한 사람이 내가 그것을 하기를 원한다는 것과 결코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나에게 향해진 다른 사람의 바람은 단지 그 사람이 어떻게든 자신의 바람에 역점을 둘 수 있다는 것, 즉 (바람의) 충족에 상을 주고, 충족하지 않음을 처벌하거나, 적어도 준수하거나 무시한 경우의 자연스런 결과들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한 경우에만 당위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과 결코 다른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1편 156-157쪽)
쉴리크는 규범을 하나의 사실의 재현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규범이란 실제로 어떤 행위가 선하다고 평가되는 상황을 기술하는 명제일 뿐이며, 윤리학은 그러한 가치평가의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입장에서 규범은 그 자체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평가행위나 심리적 태도를 설명하는 언어적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규범이 사실을 기술하는 명제가 아니라 특정한 행위를 의무로 규정하는 의미이며, 어떤 사건이 발생할 조건을 단순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행위가 일어나야 한다는 당위를 설정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러한 당위의 부정은 규범을 설정하는 행위와 이러한 행위의 의미를 섞어버리는 것에 연유하고 있다. 그 ‘바람’은 결코 당위로 표현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바람은 또한 그의 의미인 규범이 그것을 준수하지 않는 경우에는 형벌로 위하하고, 준수하는 경우에는 상을 약속함으로써, 혹은 그 규범의 준수와 비준수의 결과를 제시함으로써 효과적이 될 수 있는 경우에도, 하나의 존재이지 당위가 아니다. 규범의 유효성, 그 규범이 사실상 준수됨은 그 효력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규범이 ‘효력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준수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규범은 또한 바로 그 규범이 준수되지 않은 경우에도 물론 효력이 있는 것이다.」(1편 157쪽)
쉴리크의 오류는 규범을 개념이나 정의와 동일시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규범이 어떤 행위가 선하다고 평가되는 상황을 제시한다고 보지만, 켈젠에 따르면 규범은 단순한 개념이나 정의와 다르다. 개념은 어떤 대상이 특정한 속성을 갖는지를 분류하는 도구이지만, 규범은 특정한 행위를 해야만 한다는 당위를 설정한다. 어떤 행위가 규범에 부합한다는 것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라 가치판단을 의미한다.
「쉴리크는 “‘규범’은 … 유효하다는 사실의 단순한 재현과 전혀 다를 바 없고, 그것은 말하자면 단지 하나의 행위 혹은 양심 혹은 성격이 사실상 ‘좋은’(선한) 것으로 표시되는, 환언하면 도덕적으로 가치평가되는 상황들을 알려주는 것이다. 규범의 창설(설정)은 윤리학이 인식하려고 시도하는 선의 개념 확정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같은 책, 11쪽)라고 생각한다. 아마 유효하다는(유효성) 사실의 단순한 재현으로서 그 규범은 아마도 하나의 존재 사실에 대한 진술일 것이다.」(1편 157쪽)
윤리학이 학문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존재에 관한 학문이라는 뜻을 의미하지 않는다. 윤리학은 규범의 창설을 수행하는 학문이 아니라 규범의 의미를 인식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윤리학의 대상은 인간의 의지행위나 사고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행위의 의미로서의 규범, 즉 당위이다.
「쉴리크는 규범을 ‘유효하다는 사실의 재현’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그는 윤리학은 ‘사실학’이라고 주장했고, ‘설령 그 윤리학이 하나의 규범학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사실에 관한 학문이라는 것’은 여전하다. ‘그것은 전적으로 실제 하는 것과 연관된 것’이라고(같은 책, 14쪽 이하) 주장하는 것이다. ‘최종적인 평가’는 ‘인간의 인식의 실제에 존재하는 사실’에 있다고 한다.」(1편 158-159쪽)
마우트너는 언어 자체에 대한 급진적인 회의주의를 통해 존재와 당위의 구별을 해체하려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현실세계에는 단지 인간의 의지와 행위만이 존재할 뿐이며, 윤리학이 말하는 당위는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속에서 만들어진 표현에 불과하다. ‘존재’, ‘당위’, ‘가치’와 같은 개념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구분일 뿐 실제 세계에는 이러한 구별이 존재하지 않으며, 규범이나 당위 역시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사용에서 생겨난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윤리학이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는 학문이 아니라 규범을 내세워 현실에 맞서는 가짜 학문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비판을 통해 규범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규범이 언어로 표현된다는 사실이 규범의 의미를 제거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고 요구할 때, 그 요구는 단순한 사실 진술이 아니라 규범적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당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적 행위가 가지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프리츠 마우트너(Fritz Mauthner)도 《언어비판을 위한 기고들(Beiträge zu einer Kritik der Sprache)》(III. Bd., 3. Aufl., Leipzig 1923, S. 299)에서 당위를 의지(원함)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논리학에서 “그 단어(즉, 당위)는 미학과 윤리학에서와 같이 뻔뻔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현실세계는 단지 예술가의 의도만을 알고, 그의 눈에 띄는 창조만을 안다. 그리고 전래되어오는 미학은 어딘가 하나의 신성한 산으로부터, 예를 들면 파르나소스 산으로부터, 하나의 당위를 가지고 현실에 맞선다. 심리학적인 현실세계는 단지 인간의 의지만을, 그의 행위만을 알고, 윤리학은 여전히 시나이 산으로부터, 다시 당위를 가지고 그에 맞선다.”(같은 책, 299쪽)」(1편 159-160쪽)
마우트너 나아가 윤리학과 미학을 진정한 학문이 아니라 겉모습만 학문처럼 보이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의 관점에서는 당위라는 개념 자체가 현실세계에 대응되는 어떤 실체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당위의 의미를 오해한 것이라고 본다. 인간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추상적 학문이 아니라 실제 인간들 사이의 의지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일정한 행위를 요구하고, 그 요구는 승인과 제재를 통해 현실에서 작동한다.
「“나는 이제, 미학과 윤리학이 여전히 진정한 학문들로 통용된다는 것이 두렵다.”(같은 책, 299쪽) 하지만 그 학문들이라는 것은 마우트너에 따르면 천문학에 대한 관계에서 점성술과 같이 단지 ‘외관상의 학문’(scheinwissenschaft)들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하나의 당위로 맞서는 것은 하나의 학문이 아니고, 특히 윤리학이 아니고,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해야만 한다고 그에게 명령하는 하나의 다른 인간―모세, 예수 혹은 마호메트와 같은―이거나, 혹은 그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인간들, 그들의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하나의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의지를, 소위 공동체의 의지를―이러한 당위에 부합하거나 혹은 부합하지 않는―행위에 반응함에 있어서 매우 분명하게 표현하는 다른 인간들이다.」(1편 160쪽)
당위가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단지 언어 속에만 존재한다는 주장은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규범의 의미를 단순한 언어현상으로 축소한 것이다. 인간의 판단과 언어행위는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발생하며, 그 속에서 특정한 행위를 요구하는 의미가 형성된다. 당위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적 행위가 지니는 규범적 의미이다.
「나중에 마우트너는 “하나의 당위는 현실세계에는 없고 단지 판단에서 혹은 말에서 존재한다. 말 없는 피조물은 해야만 하는 것이 없다(당위된 것이 없다).”(같은 책, 343쪽)라고 했다. 하지만 판단하는 것(Urteilen)과 말하는 것(Sprechen)은 물론 현실세계에서도 일어난다! 우리가 만약 말 없는 피조물은 아무것도 해야만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하나의 말 없는 피조물은 아무것도 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따라서 특히 하나의 다른 말 없는 피조물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해야만 한다는 것을 원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인 것이다.」(1편 160쪽)
코헨은 존재와 당위의 구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서로 다른 영역을 형성한다는 결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무엇이 존재하는가’와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서로 다른 질문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로부터 존재의 영역과 당위의 영역이 분리된다는 결론이 반드시 도출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변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에 관한 질문과 어떤 것이 존재해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이 바로 존재와 당위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존재와 당위의 대립은 화해 불가능함을 부정하고 당위를 존재로 환원하고자 한 시도의 하나의 특징적인 예는 코헨(Felix S. Cohen)의 문헌, 《윤리적 체계들과 법적 이상들. 법적 비평의 기초에 관한 에세이(Ethical Systems and Legal Ideals. An Essay on the Foundations of Legal Criticism) (Ithaca, New York, 1959, S. 115)》에서도 발견된다. 그곳에서 코헨은, “확실히 주어진 것(giving thing)이 존재하는가 여부에 대한 물음은 그것이 존재해야만 하는가 여부에 관한 질문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이것으로부터 무엇이 존재해야만 하는가라는 영역이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영역과는 구별된다는 것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1편 161쪽)
코헨은 당위명제가 어떤 존재명제와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라는 문장은 규범의 표현이거나 의지의 표현이며, ‘무언가가 존재한다’라는 문장은 사실에 대한 진술이다. 두 문장은 의미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심리적으로 어떤 사실이 인간에게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다른 상태를 원하게 될 수는 있지만, 그러한 심리적 연관이 두 문장의 의미를 동일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코헨은 계속해서,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명제는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명제와 동일할 수 있다.”라고 한다.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한다.”라는 문장은 결코 “무언가 다른 것이 존재한다.”라는 문장과 동일한 의미일 수 없다. 이 양 문장은 두 개의 전적으로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한다.”라는 문장은 하나의 당위규범이거나 하나의 바람 혹은 하나의 의지의 표현이고, "무언가 다른 것이 존재한다."라는 문장은 하나의 존재-언명(진술)이다.」(1편 161쪽)
코헨은 또한 당위명제가 특정한 심리적 태도나 가치판단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려 하지만, 이 역시 잘못된 동일시이다. 어떤 사람이 평화를 원한다는 사실과 평화가 존재해야 한다는 규범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심리적 사실의 진술이고, 다른 하나는 규범적 요구의 표현이다.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고 두 문장을 동일시하는 것은 존재와 당위의 구별을 혼동하는 결과를 낳는다.
「코헨은 그의 주장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근거 지우려 했다: “어떤 주어진 특징과 관계에도 타당한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구별이 존재와 비존재의 (서로) 구별되는 왕국을 만드는 데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맥락에서 유효한, 존재(is)와 당위(ought) 사이의 구별은 사실과 가치의 (서로) 구별되는 왕국을 창설하지 못한다.”」(1편 162쪽)
존재와 당위의 구별은 단순한 언어적 차이나 심리적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의미구조의 차이다. 존재명제는 사실을 기술하고, 당위명제는 규범을 표현한다. 이 두 종류의 명제는 서로 환원될 수 없으며, 어느 한쪽을 다른 쪽으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하게 된다.
「“국가 사이에는 평화가 존재해야만 한다.”라는 문장은 “평화는 선하다(좋다), 그러나 전쟁은 좋지 않거나 평화만큼 좋지 않다.”라는 문장과 동일하지 않다. “무언가 선하다.”라는 진술을 “무언가 존재해야만 하는 것과 같이 존재한다.”와 같은 의미라고 인정하더라도, “평화는 국가 사이에 존재해야만 한다.”라는 규범 혹은 바람의 표현은 결코 “국가들 사이의 평화는 선하지만, 전쟁은 선하지 않거나 평화만큼 선하지 않다.”라는 가치판단과 동일하지 않다.」(1편 164쪽)
제18장 칸트 철학에서 존재와 당위
칸트는 종종 존재와 당위의 이원론을 정당화하는 철학자로 인용되지만, 이는 정확한 이해라 할 수 없다. 사람들이 흔히 인용하는 《순수이성비판》의 문장은 도덕적 규범이 경험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지, 존재와 당위라는 두 영역이 논리적으로 완전히 분리된다는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가 문제삼은 것은 도덕적 법칙의 근거를 경험적 사실에서 찾을 수 있는가라는 입법정책적 문제였다. 즉 인간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라는 사실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규범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했을 뿐이다.
「존재와 당위의 이원론의 정당화를 위해 사람들은 칸트의 권위에 호소하곤 한다. 사람들은 《순수이성비판》의 익히 알려진 부분을 인용한다: “자연을 고찰함에 있어 경험은 우리에게 규칙을 제공하며, 진실의 원천이다; 하지만 도덕적 법률들을 고려하면 경험은 (유감스럽게도!) 외형의 어머니이고, 내가 해야만 하는 것에 관한 법칙들을 무엇이 행해졌는가로부터 끄집어내려고 하거나 그것을 통해 제한하려고 하는 것은 고도로 비난받을 일이다.” 이에 앞서 칸트는 국가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서술에 연결하여, “만약 이데아에 따라서 옳은 시점에 그 준비가 되었다면 … 전혀 존재하지 않을, 모순되는 경험을 천박하게 끌어들이는 것보다 더 해롭고 철학자에게 더 무가치한 것은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같은 책, 201쪽).」(1편 165쪽)
칸트 철학에서는 존재와 당위의 이원주의가 철저하게 유지되기보다 오히려 일정한 방식으로 약화된다. 칸트는 도덕규범을―경험에서 도출하지 않지만―이성에서 도출한다. 그런데 이 이성은 존재를 인식하는 이성과 동일한 이성이다. 즉 도덕법칙은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이성에서 나오지만, 그 이성은 존재의 인식을 담당하는 동일한 이성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존재와 당위가 완전히 독립된 두 영역으로 분리되기 어렵다.
「이미 칸트의 철학에 따르면 도덕규범, 도덕적 당위, 도덕률은, 그 기능이 존재의 인식인 이성과 동일한 이성인, 실천적 이성으로서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와 당위의 이원주의는 칸트의 철학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천적 이성, 도덕적인 입법자, 그리고 이론(순수)적 이성은 기본적으로 하나라고 칸트가 분명하게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나는 순수한 실천적 이성의 비판을 위하여, 만약 그 순수한 실천이성이 완벽한 것이어야만 한다면, 하나의 공동체의 원칙에서 사변적인 이성과 실천적 이성의 단일성도 반드시 함께 기술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론 종국에는 단지 그 사용(적용)에서만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한, 단일하고 동일한 이성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391쪽)」(1편 166쪽)
이론적 이성은 존재를 인식하는 능력이고, 실천적 이성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 당위를 설정하는 의지적 능력이다. 인식은 수용적인 활동인 반면 의지는 생산적인 활동이므로 둘은 동일한 능력으로 이해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칸트는 실천이성을 통해 도덕법칙이 생성된다고 주장하면서, 이론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을 동일한 이성의 두 사용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차이점은 이성의 사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이성의 본질과 실천적 이성의 본질 간에도 있다. 이론적 이성의 본질은 존재의 순수한 인식이고, 실천적 이성은 그 의미가 인간의 행위의 당위인 하나의 원함(의지)이다. 인식은 수용적이고, 의지(원함)는 생산적이다. 이러한 차이는 물론 칸트의 인식론에 따를 때, 마치 실천적 이성이 도덕의 질서를 만드는 것과 같이, 이론적 이성의 그 인식이 감각들의 혼돈을 하나의 자연 질서로 변형함으로써 그 인식이 구성적인 의미를 가지는 한, (칸트의 인식론에서는) 모호해져 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양 질서들은 본질적으로 상이한 것이다. 그 하나는 하나의 존재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의 당위질서이다. 존재질서는 인식을 통해 이루어지고, 당위질서는 단지 의지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166-167쪽)
| [미주 63] 빈델반트는 칸트에 기대어 “자유롭다는 것은 이성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이성이 단지 표상들의 체계가 아니라 “평가하는 힘, 느낌과 원함의 힘”일 때 지배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이를 “실천이성”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지배(herrschen)는 결국 ‘명령에 따르게 하는 것’을 뜻하는데, 명령은 어디까지나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만 성립한다. ‘실천이성’이 지배할 수 있다면, 그것은 느끼는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의지로서일 뿐이다. 인식기능이면서 동시에 의지기능인 하나의 이성, 곧 ‘인식하면서 의지하는 이성’이라는 발상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게다가 빈델반트가 말하는 자유는 실천이성의 요구(명령)에 의한 구속으로 귀착되는바, 자유를 말하면서 구속을 본질로 삼는 서술은 결국 ‘자유=구속’이라는 역설을 정식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Über Willensfreibeit, Tübingen und Leipzig 1904)는 95쪽에서 칸트에 연결하여, “자유롭다는 것은 이성에 복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은 단지 그것이 생각(표상)들의 체계가 아니라, 평가하는 것의 힘, 느낌과 원함의 힘인 경우에만 지배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것을 실천이성이라고 부른다.”라고 한다. 소위 ‘실천적 이성’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원함(의지)이지, 느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의 명령에만 따를 수 있는 것이고, 단지 하나의 의지·의향(Wollen)으로만 실천적 이성은 ‘지배할(herrschen)’ 수 있다. 인식기능이면서 동시에 의지기능이기도 한 하나의 이성은 하나의 이러한 실천적 이성과 본질적으로 결합된 ‘자유’(즉 그것은 동시에 그와 바로 정반대인, 말하자면 구속인 것이다)를 말하는 그 자체가 자기모순인 것이다. 빈델반트에 따르면 의사의 자유(Willensfreiheit)는 전적으로 칸트 이론의 의미에서 실천이성의 요구(명령)를 통한 구속인 것이다.」(2편 93-94쪽) |
| [미주 64] 셸러는 이성과 의지활동의 엄격한 구분을 전제로, 윤리의 기초로서 이성의 사고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이성과 의지활동을(피히테 등 독일 관념론처럼) 더 가깝게 결합시키든지 해야 한다는 양자택일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인식과 의지가 본질적으로 상이한 기능인 이상 그러한 생각은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두 영역은 애초에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한다. 이론적 이성의 질서화는 존재질서의 구성(인식의 범주적 정리)이고, 실천의 영역이 다루는 것은 당위질서의 설정(의지의 의미로서 규범의 성립)이다. 하나는 인식으로, 다른 하나는 의지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양자는 병렬이 아니라 범주적으로 이질적인바, 그렇다면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셸러(Max Scheler, “Beiträge zur Feststellung der Beziehung zwischen den logischen und ethischen Prinzipien”, Inauguraldissertation, Jena 1899, S.8f)는 … 이성과 의지활동의 엄격한 구분을 지적하면서, “사람들은 이성의 사고를 윤리적 기초로서 반드시 포기해야만 하고, 저 ‘엄격한 구분’을 내버려 두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사고를 반드시 유지하고 이성과 의사활동을, 예를 들어 독일 이상주의 철학(특히 피히테)의 의미에서 보다 가까이 접근시켜야만 한다.”라고 적고 있다. 셸러는 두 개의 택일안 중에서 첫 번째를 선택했다. 그러나 인식과 의지는 서로 본질적으로 상위한 기능들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셸러는 정당하게 칸트에 반대하며, 이론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의 차이를 ‘그 능력의 활동의 상이성’ 자체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2편 94쪽) |
칸트는 실천이성을 의지와 동일시하며, 이성이 스스로 법칙을 입법하는 능력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인식능력과 의지능력을 결합하는 결과를 낳는다. 인식은 사실을 파악하는 활동이고, 의지는 행위를 명령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천이성이라는 개념은 결국 존재와 당위를 하나의 능력 안에서 결합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인식이자 동시에 의지이고, 따라서 그 안에 존재와 당위의 이원론이 폐지되어버린, 그 자체 모순에 가득 찬 실천이성이라는 개념은 칸트 윤리학의 기초이다. … 칸트는 ‘의지’는 “실천이성과 다를 바 없다.”(실천이성이다)고 했다(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IV, S. 412). 그는 ‘실천이성’이라는 표현에 ‘의지’라는 단어를 괄호로 끼워넣음으로써, ‘실천적 이성’을 ‘의지’와 동일시하였다(같은 책, 441쪽).」(1편 167쪽)
| [미주 65] 흄은 도덕이 행위와 감정에 영향을 미치므로 이성에서 도출될 수 없다고 하며, 이성의 기능을 “참과 거짓의 발견”으로 한정한다. 진리/허위는 관념들의 관계나 사실의 존재에 대한 동의·부동의에 달려 있고, 열정·의지·행위는 그런 동의·부동의에 ‘민감하지 않으므로’ 참/거짓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덕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참/거짓으로 판정되는 진술의 영역에서 벗어나며, 그 ‘해야 한다’는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만 성립한다. 「흄은 단호하게 이성과 도덕의 본질적 관련성을 부인한다. 그는 그의 저작 A Treatise of Human Nature, vol. II, London 1962, S. 167에서 ““따라서 도덕들은 행위들과 감정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것들은 이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도덕들은 열정들을 자극하고 행위를 야기하거나 막는다. 이성 그 자체는 이러한 특별한 경우에 아주 중요하다. 도덕의 규칙들은, 따라서 우리의 이성의 결론들이 아니다. 활성적인 원칙들은 결코 비활성의 것에 기초할 수 없고, 만약 이성이 그 자체 비활성(inactive)인 것이라면, 그것은 그것의 모든 형상과 외관들에서 그대로 그렇게 비활성으로 머물러야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167쪽 이하에서 “… 이성은 참과 거짓의 발견이다. 진실 혹은 허위는 이상들의 실제 관계들에 대한 동의나 부동의에 있거나, 혹은 사실의 실제 존재와 중요성에 대한 동의나 부동의에 있다. 따라서 무엇이건 간에 이러한 동의 혹은 부동의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들은 진실이거나 거짓일 수 없고, 결코 우리의 이성의 객체(대상)가 될 수 없다. 이제 분명한 것은 우리의 열정들, 의지들, 그리고 행동들은 어떠한 그런 동의나 부동의에 민감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진실로 혹은 거짓으로 선언·표명되는 것과 이성에 반하는 것으로 혹은 부합하는 것으로 선언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따라서 도덕적인 뛰어남(Moral distinctions)이 이성의 산물(offspring)은 아닌 것이다. 이성은 전적으로 불활성이고, 결코 양심 혹은 도덕감과 같은 그러한 활동적인 원칙의 출처(source)일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2편 95-96쪽) 툴민은 윤리에서 이성의 자리를 확보하려고 하며, 도덕적 결정에서 이성에 얼마만큼 의지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여기서도 동일한 혼동이 발생한다. 논증(reasoning)은 어떤 규범을 인식하거나 정당화하는 판단을 산출할 수는 있어도,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를 목적하는 것’은 사고가 아니라 의지다. 바다에 빠진 아이를 보고 규범을 ‘인식’하는 것은 사고행위일 수 있으나, 그 인식이 곧바로 ‘구조하라’는 개별규범(내게 향한 명령의 의미)을 낳는 것은 아니다. 인식은 의지를 야기할 수는 있어도 의지를 ‘목적’하지 않는다. 가열이 금속의 팽창을 야기하지만 팽창을 목적하지 않듯이, 사고가 행위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어도 그 사고가 행위를 ‘목적’하는 것은 아니다. 목적함은 규범(의지의 의미)의 기능이고, 사고는 그 규범을 대상으로 삼아 파악할 뿐이다. 「흄과는 반대로 툴민(Stephen Edelston Toulmin, An Examination of the Place of Reason in Ethics, Cambridge 1960)은 도덕의 영역에서 그가 대부분 도덕과는 구분하지 않고 말한 것과 같이, 윤리학의 영역에서 이성의 기능을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문제는 “사람은 도덕적 결정들에 도달함에 있어서 얼마까지 이성에 의지할 수 있는가?”(같은 책, 3쪽)이다. 여기서 그는 이성은 선과 악 사이를 구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논리학은 도덕 영역에 자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는 131쪽에서 자신의 저술에 대해 “이 책은 논리적으로, ‘도덕적’ 근거들에 기초한 결정의 행위특성에 있어서 변화의 유형들에 대한 연구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윤리적인’ 등등으로 불린다면 그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고안되어야만 하는 논증(reasoning)의 방법에 대한 연구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툴민은 따라서 ‘논증·추론’, 말하자면 이성적인 사고, 이성은, ‘도덕적인 것으로 혹은 ‘윤리적인 것’(두 가지는 동일한 의미임)으로 판단될 수 있는 인간의 행위를 목표로 하는 것임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사고(생각하는 것)가 아니라 원함만이 도덕적으로 평가된 행위를 ‘목적할 수 있다’. 단지 의지적 행위의 의미만이, 소위 규범만이, 한 인간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해야만 한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단지 그것이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인 규범에 부합할 때에만 ‘도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의 그런 규범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단지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 신과 같이 도덕적인 권위자로 승인된 존재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 공동체의 한 지도자의 의미적 행위의 의미로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고된 규범이지 그 특정한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나의 사고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한 아이가 바다에 빠지는 것을 본다. 나는 즉시 생명의 위험에 처한 사람을 자신이 생명의 위험에 처해도 구조하려고 노력하라고 규정하고 있는 도덕규범을 인식한다. 그 규범이 인식되는 행위(Akt des Bewußtwerdens der Norm)는 하나의 사고행위이다. 그 사고행위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내게 하나의 의지적 행위, 즉 그 의미가 ‘너는 어린이의 생명을 구할 노력을 해야만 한다’, 즉 일반규범에 부합하는 하나의 개별규범인 하나의 의지적 행위를 야기한다. 도덕적으로 선한 것으로 평가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이러한 일반적이고 개별적인 규범이지 나의 생각(Denken)이 아니다. 일반규범에 대한 나의 생각은―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고―마치 개별규범에 대한 나의 의지(원함)가 그 일반규범에 부합하는 나의 행위를 야기할 수 있는 것과 같이(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개별규범에 대한 나의 의지를 야기할 수 있다. 나는―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어린이의 생명을 구하기를 시도하고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나의 의지를 실행에 옮길 수 있고, 그래서 하나의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를 완수할 수 있다. 위의 마지막 줄에 있는 이것을 ‘목적하는 것’은, 그 의미가 일반규범에 부합하는 개별규범인 나의 의지적 행위이다. 하지만 무엇을 야기한다(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무엇을 목적으로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열은 금속물체의 확장을 야기하지만 금속물체의 확장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2편 96-97쪽) |
그러나 칸트는 동시에 이성과 의지를 서로 다른 능력으로도 설명한다. 그는 인간을 “이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말하며, 이성이 의지를 결정하는 근거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설명에서는 이성과 의지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칸트의 체계는 실천이성을 의지와 동일시하는 입장과, 이성과 의지를 구별하는 입장이 동시에 존재하는 긴장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칸트는 다른 한편 인식능력으로서 이성을 욕구능력(Begehrungsvermögen)으로서의 의지와 구별했다. 그는 인간을 ‘이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로 언급했다(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IV, S. 395). 의지로서 이성이 아니라, 이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로, 칸트는 ‘실천적 능력으로서 이성’은 ‘의지에 영향력을 가져야만 하는’ 능력으로서 이성이라고 했다(같은 책, 396쪽). … 실천이성의 칸트적 개념은, 두 개의 상호 본질적으로 다르고 또한 칸트 스스로에 의해서도 구별된, 두 개의 인간의 능력들의 허용될 수 없는 혼합의 결과이다. 」(1편 168-169쪽)
| [미주 66] 에르트만은 규범을 관념적 대상의 한 그룹으로 놓고, 논리학이 윤리학처럼 ‘우리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를 가르친다고 말하며, 법학을 실천적·규범적 학문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학문을 학문으로 만드는 것은 규범의 창설이 아니라 이론적 지식이다. 지식은 실천적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목적을 ‘형성’하거나 규범을 ‘창설’하는 것은 아니다. 윤리학과 도덕, 법학과 법을 뒤섞는 전형이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크라프트가 윤리학을 ‘인간의 과제의 필요충분한 특징들을 정하는 진실한 주장의 체계’로 정의하며, 진실한 진술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순간, 진술(참/거짓)과 규범(명령/요구)의 범주가 붕괴한다. ‘진실한 주장’이 곧 ‘요구’를 산출한다는 표상 자체가 실천이성 개념의 잔상이다. 「규범적인, 즉 규범을 설정하는 학문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 모순 가득한, 즉 인식하는 동시에 입법하는, 의지하는 이성인 실천이성과 관련성이 있다. 논리학과 특히 윤리학이 그런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형적인 한 예는 에르트만(Benno Erdmann, Logik, 3. Aufl., Berlin und Leipzig 1923)이다. ‘현실적인 것에 대한 관계에 따른 사고의 대상들’이라는 표제어가 붙은 편장(141쪽)에서 에르트만은 “[그가 실제의 대상들로부터 구별한] 관념적인 대상의 마지막 그룹은 우리가 거기서 무엇이다(무엇이 존재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어야만 한다(무엇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유형의 규범들로 구성된다 … ”라고 말한다. 달리 말해 그는 규범들을 사고유형들의 의미로 본 것이다. 따라서 그는 논리학에 대해서, “논리학은 마치 예를 들어 윤리학이, 입법이, 교육학이 그들의 영역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행위해야만 하는가를 확정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 우리가 어떻게 사고해야만 하는가를 가르친다.”(25쪽)고 말한다. 에르트만은 법학(Jurisprudenz)을 ‘실천적 학문’으로 표현하면서 ‘규범적 학문’으로 분류하고, 그에 대해서 “모든 이러한 학문들의 과제는 사회적 문화를 학문적인 사고의 발전에 맞추는 것이다.”(9쪽)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이론분과들을 학문들로 만드는 것은 단지 그것들의 기초를 이루는 이론적 지식인 것이다. 학문적인 사고는 그 안에서 사실 실용(실천)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되지만, 언급한 목적에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목적들이 이 지식에 부합하도록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론’으로서, 즉 학문들로서, 인식기능들로서 논리학과 윤리학은 ‘입법’에 대등하게 놓이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위해야만 하는지를 기술한다. 학문들의 과제는 사회적 문화를 형성하고 그것을 어떤 하나의 목적에 맞추는 것이다. 이러한 ‘학문들’에서 사고는 실천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목적은 ‘형성된다(만들어진다).’ 즉 이러한 학문들은 규범들을 창설한다. 이것은 윤리학과 도덕, 법과 법학의 전형적인 혼합(혼동)인 것이다.」(2편 97-98쪽) 「칸트의 실천이성이론은, 그가 명백하게 흄에 의해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했고, 흄은 실천이성의 개념을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바로 그 때문에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 로스(Alf Ross, Kritik der sogenanntenpraktischen Erkenntnis, Kopenhagen 1933)는 아주 기여도가 높은 이 문헌에서 실천이성 개념을 최고로 설득력 있게 비판했다.」(2편 99쪽) |
칸트는 도덕의 자율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도덕법칙의 궁극적 근거를 신적 입법자와 연결한다. 그는 도덕적 의무를 신의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며, 도덕법칙의 권위를 신적 의지와 연결한다. 이러한 설명은 실천이성이 궁극적으로 신적 입법과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칸트는 또한, “따라서 신적인, 그리고 무릇 신성한 의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명령도 효력이 없다: 의지는 이미 그 스스로 법률(즉 당위)과 필연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당위는 여기서 잘못된 자리에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1편 170쪽)
「그리고 《단순한 이성의 한계 내에서 종교(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6. Aufl., Hamburg 1956, S. 6)에서 칸트는 “즉 도덕은 불가피하게 종교에 이르고, 이를 통해서 그것은 인간 외에 권력을 가진 도덕적 입법자라는 사고로 확장된다.”라고 했고, “종교는 (주관적으로 볼 때) 모든 우리의 의무를 신의 명령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라고 했다.」(1편 171쪽)
| [미주 67] 도덕이 자율적이라고 말하려면, 도덕법칙에 복종하는 주체와 그 법칙을 입법하는 주체가 동일해야 한다. 즉 경험적 인간이 도덕법칙에 종속되면서 동시에 그 법칙의 입법자여야 한다. 그러나 칸트의 이론에서는 이러한 동일성이 실제로 성립하지 않는다. 「칸트가 도덕의 자율성(Autonomie)의 원칙을 고수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고찰로부터 나온다: 도덕의 진정한 자율성은 단지 도덕적 법률에 종속되어 있는 그 주체가―이것은 경험적인 인간이거나 경험적 인간의 의사이다―동시에 도덕적 입법자일 경우에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지만 칸트 스스로의 서술에 따르면 가능하지 않다. ‘자율성’을 칸트는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즉 그는 “우리가 동시에 의무라는 개념을 우리를 법률에 종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또한 이를 통해 동시에 그들의 모든 의무를 충족한 그 사람들에 대한 모종의 고결성(Erhabenheit)과 가치(존엄성)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도덕적 법률에 종속되어 있는 한 사실상 어떠한 숭고함도 그에게는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시에 입법적인 것이며, 단지 그 이유로 그(법률)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에 숭고한 것이다.”라고 말했다(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Kants Werke, Akademieausgabe, Bd. IV, S. 439f.).」(2편 100쪽) 칸트의 설명에서는 경험적 인간과 입법적 의지 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그에 따르면 도덕법칙을 실제로 입법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적 의지가 아니라 실천이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도덕법칙에 복종하는 존재이지만, 그 법칙의 실제 입법자는 다른 차원에 위치한다. 「즉 도덕적 법률에 종속된 그 사람은―이는 경험적인 사람이다―반드시 동시에 ‘입법적’이어야만 하고, 입법하는 의사(의지)는 반드시 경험적인 인간의 의지여야만 한다. 하지만 칸트의 이론에 따르면 도덕적 입법자는 의사·의지(Wille), 그가 실천이성으로 표시한 그 의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는 결코 인간의 경험적 의지와 같은 것이 아니다. 칸트는, “도덕철학은”―그는 종종 이것이 또한 인식인 한에서는 실천이성과 동일시했다―“이성적인 존재로서, 그에게 경험독립적인 법률들(Gesetze a priori)을 주는데, 이 경험독립적인 법률들은, … 인간의 의지 속으로 들어갈 그들의 입구를 마련하고, 그 집행을 위한 추동력을 만들기 위해 물론 경험을 통해 날카로워진 판단력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 인간의 의지는, 그 자체 아주 많은 편향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하나의 실천적인, 순수한 이성의 이상이 될 수 있지만, 그렇게 쉽게 그 이상(이데아)을 구체적으로 자신의 처신에 있어서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IV, S. 389)」(2편 100-101쪽) 도덕법칙을 입법하는 것은 순수한 실천이성이며, 인간의 경험적 의지는 그 법칙의 수범자일 뿐인 이상, 도덕법칙의 입법자와 그 법칙에 종속되는 주체는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도덕 법칙에 대한 복종은 자기 입법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규범적 원천에 대한 복종이 된다. 「도덕률들(Moralgesetz)은 따라서 그 도덕률에 지배를 받는, 인간의 경험적인 의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이러한 의지로 들어갈 ‘입구’가 반드시 마련되어야만 한다. 그 의미가 도덕규범들의 당위인 의지는 이러한 규범들이 향해진 그 의지가 아니다. 도덕규범들이 기인한다는 것은 ‘무엇이 일어나야만 하는 것인지를 명령하는’ ‘순수한, 하지만 실천적인 이성으로부터’이다(같은 책, 408쪽). … 실천적 이성의 완전한 입법적 의지와 인간의 불완전한 경험적 의사 사이에 오인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이원주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자율성의 원칙이 견지되어야만 한다면 입법적 의지로서 실천이성은 반드시 그의 자리를 경험적인 인간에게 |
제19장 자율성의 원칙-도덕적 권위로서 양심
자율성은 흔히 “스스로 규범을 만든다”는 뜻으로 오해되지만, 공동체에 타당한 도덕질서·법질서는 개인 내부에서 자생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 예언자적 권위, 또는 입법행위처럼 개인 외부의 방식으로 이미 생산된다. 그러므로 개인에게서 발견되는 자율성은 “규범의 생산”이 아니라 “이미 생산된 타율적 규범의 승인”이라는 제한된 국면에서만 성립한다. 이때 승인행위는 단순한 준수의 사실이 아니라, 자신에게 향하는 규범을 새로 구성하는 의지적 행위로 이해된다.
「공동체(사회) 내에서 타당한 하나의 도덕질서 혹은 법질서는 결코―이러한 질서가 적용되는―한 개인인 주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고, 관습의 방식으로 생겨나거나, 도덕의 경우에는 모세, 예수, 마호메트와 같은 선구자적인 사람들을 통해서, 법의 경우에는 입법의 방법으로 창설되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주체가 외부로부터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도덕규범 혹은 법규범을―그 규범이 그에게 유효하기 위해서―스스로 승인해야만 하는 한에서만 자율성이 존재하는 것이다.」(1편 172쪽)
승인될 규범은 승인주체에게 ‘이미 타율적’이다. 승인할 수 있으려면, 승인 이전에 규범은 이미 사회적으로 생산되어 타인에게 효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반대로 최초 창설자에게는 승인이 필요하지 않다. 이처럼 자율성은 타율성의 전제 없이는 성립할 수 없고, 오히려 타율성의 내부에서 ‘이차적 요소’로만 등장한다.
「승인될 도덕질서 혹은 법질서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 생산되어 있어야만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효력이 있어야만 하고, 즉 그것을 승인하는 주체와 관계해서는 타율적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단지 하나의 타율적인 규정(질서)의 규범만이 승인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규범을 최초로 만들어내는 하나의 주체 측에서는 이 규범은 어떠한 승인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1편 172쪽)
승인은 ‘준수’와 동일시될 수 없다. 준수는 규범에 부합하는 행위가 현실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가리키지만, 승인은 ‘그렇게 행해야만 한다’는 당위를 자신에게 부과하는 의지적 의미형성을 가리킨다. 승인행위는 심리적 결심이나 습관이 아니라 규범구성의 행위이다. 이는 기술적 결심인 ‘내가 그렇게 하겠다’가 아니라 규범적 자기지시인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이다.
「승인은 하나의 의지적 행위이고, 그것은 규범을 승인하는 주체의 행위에 향해진 것이나, 그 규범을 승인하는 주체가―이미 만들어졌고 타인에게 유효한―규범이 규정하는 것과 같이 행위하기를 원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즉 그 주체가 이러한 규범을 준수하려고 의욕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주체가 이러한 규범이 규정하고 있는 것과 같이 행위해야만 한다는 의미에서이다.」(1편 173쪽)
승인자는 자신을 규범수신자로 분할하고, 자신에게 명령형 당위를 부과하는 규범을 스스로 창설한다. 타율적 규범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일한 행위를 지시하는 자기지향 규범을 새로 만들어 자기구속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이때 자율성은 창설의 ‘내용’이 아니라 창설의 ‘형식’—자기에게 향하는 규범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만 성립한다.
「예수로부터 창설된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규범이 유효하다면, 나는 이 규범을, 내가 내 원수를 사랑하기를 시도한다는 것을 통해, 즉 규범을 준수하는 것을 통해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지적 행위, 즉 그 행위의 의미가 ‘나의 제2의 자아야, 너의 원수를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의지적 행위를 통해 승인하는 것이다.」(1편 173쪽)
자율성의 외양을 띠는 자기구속은 결국 “이중의 창설”을 전제한다. 외적 권위에 의한 최초 창설이 1차 조건이고, 규범수신자가 승인행위를 통해 자신에게 같은 내용을 지시하는 규범을 다시 창설하는 것이 2차 조건이다. 자율성은 이 2차 계기에서만 성립하므로, 전체 구조는 자율성이 타율성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타율성을 토대로만 작동한다는 결론으로 수렴한다.
「―이미 존재하는―규범을 승인하는 의지적 행위의 의미는 승인하는 주체에 의해 창설된, 그 스스로에게 향해진 규범이다. 하나의 주체가 하나의 타율적인 도덕 혹은 하나의 타율적인 법의 규범을 승인함으로써, 그는 그 스스로에게 승인된 규범과 동일한 행위를 지시하는 규범을 창설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자기구속·의무화(Selbstverptlichnung)’라고 표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타율적인 규범적 질서의 규범은 규범수신자에게는 단지 그자가 이러한 규범을 승인할 때만 효력이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그 규범의 효력의 조건은 ‘이중의 창설(doppelte Setzung)’이다. 외부의 권위자에 의한 규범의 창설과 규범수신자에 의한 이러한 규범을 승인하는 규범의 창설이다.](1편 173-174쪽)
| [미주 68] 규범을 인식하는 것과 규범을 승인하는 것을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규범을 인식하는 것은 사고의 행위이며 그 의미는 하나의 기술적 진술이다. 반면 규범을 승인하는 것은 의지의 행위이며 그 의미는 규범이다. 이 둘을 혼동하면 규범이 마치 인식의 대상인 것처럼 이해되는 오류가 발생한다. 「하나의 규범을 승인하는 것은 그 규범을 인식하는 것과는 반드시 구분되어야만 한다. 규범의 인식은 사고행위이고, 그 행위의 의미는 하나의 기술적인 진술(언명)이다. 하나의 규범의 승인은 하나의 의지적 행위이고, 그 의미는 하나의 규범이다.」(2편 103쪽) 그러한 혼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지크바르트(Sigwart)의 논리학을 들 수 있다. 지크바르트는 사고의 목적을 단순히 존재의 인식에 두지 않고, 인간 행위를 평가하는 규범적 기준과 연결시키면서 인식과 규범 승인 사이의 구별을 흐리게 만들었다. 「양자를 혼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는 지크바르트(Sigwart, Logik, 5. Aufl., 1924, I, S. 5ff.)의 논리학의 과제에 관한 설명들이다: 우리의 사고의 목적은 단지 ‘존재하는 것의 인식’만은 아니다; “지적 충동의 이러한 이해(관심)로써 우리 사고의 목적은 결코 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고에게, 존재하는 것의 인식이라는 개념에 들어갈 수 없는, 하나의 방향에서 동일한 충동을 요구한다. 우리는 사실상, 그들(법률들)에 따라 인간의 행위들을 평가하고 그것에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 행위에서 우리를 그것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보는, 특정한 법률들의 지배 아래에 있는 것이다.”」(2편 103쪽)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사고는 단순히 사실을 인식하는 기능을 넘어서 인간 행위를 규범에 따라 평가하고 지도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사고와 의지를 혼동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규범들에 향해진 ‘사고함’, 우리에게 우리는 어떻게 행위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인식은, 달리 말해 우리가 그 규범들을 우리에게 효력이 있는 것으로 승인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2편 103-104쪽) 이와 같은 혼동 때문에 지크바르트는 ‘행위를 지도하는 사고’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결국 칸트의 실천이성 개념의 잔상으로서 인식과 의지를 동일한 영역에 두는 오류로 귀결된다. 「지크바르트는 규범들의 인식을 규범들의 승인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행동을 지도하는(이끄는) 사고(unser Handeln leitendes Denken)’를 받아들였다. 이―우리의 행위를 이끄는―사고, 인식이자 동시에 승인은, 즉 의지는, 당연히 지크바르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칸트의 실천이성이라는 그 자체 모순 가득한 개념이다.」(2편 104쪽) |
칸트의 의도는 당위를 존재로부터 초월한 영역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이성의 내부에서 규범의 내재성을 확립함으로써 이원론을 약화시키는 데 있었다. 이 문제의식은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의 답을 외부 권위가 아니라 내부의 심급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양심론과 평행한다.
「―칸트의 윤리학에서 실현되지 않은―도덕적 입법자로서 실천이성론의 의도는, 처음에 제공된 존재와 자연의 이원론을[존재와의 관계에 있어서 당위의 논리적 초월성 (Transzendenz)], 종국에는 존재에 있어 당위의 (인간의 이성에서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들의) 내재성을 증명함으로써 (이원주의를) 폐지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우리는 행위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그 자신의 고유한 내부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실천적 이성에 관한 이론은 도덕의 원천으로 양심Gewissen에 관한 이론과 비슷하다. 칸트 스스로, 양심은 인간의 실천이성에 있다고 했다.」(1편 174쪽)
양심론은, 도덕규범은 외부 권위에서 오지 않고 내부의 ‘양심의 목소리’에서 직접 발견되며, 따라서 외부 규범 없이도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가 결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규범은 본성적으로 감정이나 지식의 사실로부터 ‘근거지워질’ 수 없고, 오직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만 성립한다. 양심이 감정이든 지식이든, 그것만으로 규범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양심’이라는 말로 우리는 또한 앎·예지(Wissen)를 표현하기도 한다; 자신의 행위의 선함, 악함, 당위되어 있음 혹은 비당위됨에 관한 지식이며, 그것은 이러한 행위에 관한 하나의 가치판단에서 표현되고 ‘선한’ 혹은 ‘악한’ 양심으로 표현되는 감정을 생겨나게 한다. 하지만 도덕의 원천으로서 양심에 관한 이론에서는 사람들은 감정이 일차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며, 하나의 행위는 우리가 그것이 우리 자신의 행위라고 하면, 부끄러움과 후회의 감정으로 이러한 행위에 반응할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고,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만족이라는 감정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그 반대는 아니다.」(1편 175쪽)
양심론이 설령 양심을 의지현상으로 재해석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각자의 양심이 도덕적 입법자라면, 타인의 행위에 대한 선악 판단은 원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적 도덕질서는 바로 타인의 행위를 평가·비난·승인하는 기능을 통해 실효성을 유지한다. 일관된 자율적 양심윤리학은 사회적 도덕질서의 작동조건—공동체 구성원들의 대체로 일치하는 도덕반응—을 설명할 수 없다.
「도덕적 입법자로서 양심에 관한 이론(양심론)은 무엇보다, 사람은 어떻게 행위해야만 하는가를 규정하는 규범들은 단지 의지적 행위의 의미일 수 있기 때문에, 양심은 정념(감정; Gefühl)으로서도 앎(예지; Wissen)으로서도 규범들을 근거 지울 수 없다는 점에서 좌초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설령 사람들이 양심도 의지현상으로 해석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각 주체들에 있어서는 단지 그 자신의 양심이 도덕적 입법자라는 것으로부터, 누구도 다른 사람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선하다 혹은 악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게 될 것이다.」(1편 176쪽)
실제로 공동체에서 관찰되는 도덕판단의 수렴(자기 행위뿐 아니라 타인 행위에 대한 판단의 일치)은 양심의 자율적 생성이 아니라, 외부 도덕질서가 교육·모방을 통해 내면화되어 양심이라는 형식으로 반응한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이때 관습이든 예언자적 권위든 생성 경로는 부차적이고, 핵심은 ‘외부에서 오는 규범’을 제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도덕의 자율성은 규범의 내재성(초월성의 부정)이라는 강한 의미에서는 유지될 수 없고, 외적 규범을 전제로 한 제한적 자율성(승인·자기구속)의 형태로만 남는다.
「그렇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상 그런 경우라면, 만약 하나의 사회공동체의 사람들이 대체로 인간의 행위를 그들이 (도덕적으로) 판단함에 있어서, 그리고 자신의 행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위를 판단함에 있어서도 일치한다면, 이것은 단지 그들이 단일하고 동일한 도덕질서 아래에서 살고, 이러한 도덕질서는 교육과 모방을 통해 그들의 느낌과 사고로 들어가고, 그래서 양심으로서 반응한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질서가 어떻게 생겨나는가(관습을 통해서 생겨나는가 혹은 모세, 예수 혹은 마호메트와 같은 교조들의 행위를 통해서 생겨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관건은 도덕적 입법자로서 양심에 관한 이론은 외부로부터 인간들에게로 다가오는 규범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규범의 초월성의 부정으로서, 그리고 따라서 당위와 존재의 이원론의 부정으로서―인간의 심리적 실제에서 규범의 내재성이라는 의미에서 도덕의 자율성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1편 177쪽)
제20장 흄의 철학에서 존재와 당위
흄의 논지는 ‘실천이성’이라는 매개를 원천 차단한다는 점에서 칸트보다 더 일관적이다. 흄에게 이성은 참·거짓의 발견 기능에 한정되며, 그 참·거짓은 관념 사이의 관계 또는 사실에 대한 동의·부동의로 귀속된다. 따라서 동의·부동의를 받을 수 없는 것―특히 욕정, 의지, 행위―은 참·거짓의 평가를 받지 못하므로 이성의 대상이 아니다. 규범과 당위가 의지적 행위의 의미라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이상, 행위와 감정에 작용하는 도덕은 결코 이성에서 도출될 수 없다. 다시 말해 도덕규칙은 이성의 결론이 아니다.
「존재와 당위의 관계와 관련하여 흄은 칸트보다 더 일관성이 있다. 그에게는 실천이성이란 없다. 그는 말하기를 “도덕들(morals)은 … 행위와 감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로부터 그것들은 이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성 그 자체는 특히 이 경우에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도덕의 규칙들은 우리의 이성의 결론들이 아니다.”(A treatise of Human Nature, vol. II, London 1962, S. 167)」(1편 178쪽)
| [미주 69] 흄은 이성이 의지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성은 단지 열정의 도구일 뿐이며, 행동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흄(Hume, A Treatise of Human Nature, vol. II, London 1962, S. 126f.)은 “이성 혼자는 결코 어떠한 행동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혹은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그와 동일한 능력은 의지를 막을 능력도 없고, 혹은 어떠한 열정이나 감정으로 선호하는 것을 다툴 수 있는 능력도 없다고 추론한다. … 이성은 열정의 노예이고, 단지 노예여야만 하고, 결코 그들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과는 어떤 다른 것인 척 가장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2편 104쪽) 흄의 입장과 달리 칸트는 이성에 능동적 구성 기능을 부여했다. 칸트에게서 이성은 감각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며 자연의 질서를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흄의 입장에 반하는 칸트의 이성에 대한 견해 또한 이론적 이성에 관한 견해이다. 왜냐하면 칸트에 따르면 이 이론적 이성은, 단순한 수용적-선언적 기능이 아니라, 능동적-구성적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들의 혼돈에 질서를 준다. 자연의 질서는―인식(이)론적으로 고찰할 때―이론적 이성의 산물이다.」(2편 104-105쪽) 칸트의 체계에서 이론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이 만들어내는 질서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종류의 질서이다. 이론적 이성은 존재의 질서를 구성하지만, 당위의 질서는 인식이 아니라 의지에 의해 창설된다. 규범질서는 이성의 인식작용에서 나올 수 없고 반드시 의지적 행위에서 발생해야 한다. 「따라서 칸트가 그와 동일한 이성의 산물로 도덕질서를 실천적 이성으로 해석한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칸트에 따르면 이성이 창조한 이러한 양 질서들은 상호 아주 본질적으로 상위한 것이다. … 칸트의 이론적 이성은 인식의 능력이고, 인식은―도대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그에게 주어진 존재에 대해서 아무런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단지 하나의 존재질서만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당위질서는 단지 의지를 통해서만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2편 105쪽) 하지만 칸트는 실천이성을 동시에 의지로 설명하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이성이라고 부르니, 이는 그 자체 개념적 모순이라 하겠다. 「칸트는 물론 자신의 실천이성을 하나의 의지(Wollen)로 표시했다. 하지만 그 실천이성이 하나의 의지라면, 그것은 이론적 이성의 인식과 하나일 수 없고, 당연히 ‘이성’일 수도 없는 것이다.」(2편 105-106쪽) |
이성의 대상이 되려면, 그 내용이 참·거짓의 술어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흄이 제시하는 기준은 ‘동의 혹은 부동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욕정·의지·행위는 동의·부동의의 대상이 아니므로 참·거짓으로 규정될 수 없고, 이성에 반하거나 적합할 수도 없다. 여기서 도덕적 차이는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더 나아가 흄은 이성을 ‘소극적’이라 규정함으로써, 양심이나 도덕감각 같은 ‘활동적 원칙’의 근원이 이성이 될 수 없음을 못박는다. 이 대목에서 ‘당위는 존재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고전적 명제가 논리적 형태를 얻는다.
「이성은 진실과 거짓의 발견이다. 진실 혹은 거짓은 사고의 실제의 관련성에 혹은 실제(적) 존재와 사실(문제)(matter of fact)에 대한 동의 혹은 부동의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동의 혹은 부동의를 받을 수 없는 것은 진실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능력이) 없고, 결코 우리의 이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나의 규범, 하나의 당위는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고, 흄은 의지적 행위에 대해서 “이제 우리의 욕정(열망), 의지 및 행위는 동의나 부동의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 그러므로 그것들이 진실 혹은 거짓으로 선언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성에 대해 반하거나 혹은 적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차이(구별)들은 이성의 산물(offspring)이 아니다. 이성은 전적으로 소극적인 것이고, 결코 양심이라거나 혹은 도덕감각과 같은 하나의 그러한 활동적인 원칙의 근원일 수가 없다."라고 했다(같은 책, 167쪽 이하). 따라서 하나의 당위는 하나의 존재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1편 178-179쪽)
수많은 도덕철학자들은 존재명제의 연쇄로 논증을 전개하다가, 어느 순간 설명 없이 당위명제를 불쑥 제기하곤 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저속한 비약일 수밖에 없다. 악과 선의 구별은 대상들의 관계에서 발견될 수 없고, 이성에 의해 인지될 수도 없다. 도덕판단을 존재판단의 산물로 오인하는 방법론은 철폐되어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도덕성의 모든 체계에서, 저자는 한동안 논증의 통상적인 방법으로 진행하고, 하나의 신의 존재를 설정하거나 혹은 인간사에 대해 관찰한다고 나는 항상 지적했다. 갑자기 내가 있다(is)와 있지 않다(is not)(존재와 비존재)는 명제들의 통상적인 연계(혼합) 대신에, 당위(ought) 혹은 비당위(ought not)와 연결되지 않은 명제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이러한 변화는 지각할 수 없지만 마지막 결론이다. 이러한 해야만 한다, 혹은 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것으로 모종의 새로운 관계 혹은 확언이 표현되기 위해서, 그것은 관찰되고 설명되어야만 할 필요가 있고, 이와 동시에 왜 전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지, 어떻게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지라는 이유(reason)가 제시되어야 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예방책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독자들에게 그것을 당연히 추천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조그마한 주목이 도덕성이라는 모든 저속한 체계들을 뒤집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고, 악(vice)과 선(virtue)의 구별은 단순히 대상들의 관계에서 발견될 수 없으며, 이성에 의해서 인지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보았으면 한다.”(같은 책, 177쪽 이하)」(1편 179쪽)
제21장 푸앵카레의 학문(과학)과 도덕의 관계에 대한 견해
푸앵카레는 존재로부터 당위를 도출할 수 없다는 명제를 논리적 형식의 문제로 파악한다. 그의 논지는 삼단논법의 문법적 구조에서 출발한다. 전제들이 모두 직설문이라면 결론 역시 직설문이 될 수밖에 없고, 결론이 명령문이 되려면 전제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이미 명령문이어야 한다. 그런데 과학의 원리나 자연법칙은 모두 직설문이며 사실에 대한 진술의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과학적 명제들로만 구성된 논증에서 도덕적 명령이나 규범이 도출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푸앵카레가 강조하는 것은 존재명제와 당위명제의 논리적 형식 차이이며, 이는 흄의 명제—존재로부터 당위가 나오지 않는다는 주장—을 논리적 문장 구조의 수준에서 재확인하는 것이다.
「당위는 존재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명제를 위해 사람들은 또한[Manfred Moritz, “Der praktische Syllogismus und das juridische Denken", Theoria, vol. XX, 1954, S. 78ff.], 자신의 에세이 도덕과 학문(과학)(La morale et la science)(in: Dernières Pensées, Paris 1913, S. 33)에서 과학적 윤리학의 가능성을 부인한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è)를 언급한다. “… 하지만 그것도 더 이상 비윤리(도덕)적인 학문(과학)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순수하게 문법적으로,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이 이유이다. 만일 삼단논법의 전제 모두가 직설(문)이라면 결론도 마찬가지로 직설문이 된다. 결론이 명령문으로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전제들 중의 하나는 그 자체 명령문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학문(과학)의 원칙들, 기하학의 원칙들은 직설적이며, 직설적일 수 있고, 그것은 여전히 경험적인 진실과 같은 양식(화법)인 것이고 과학의 기초이며, 그와 다른 것은 없으며, 그와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없다. 따라서 가장 민감한 변증론자는 이 원칙을 유효한 것으로 최대한 조작할 수 있으며, 서로를 결합하고 비계로 엮을 수 있고, 그러는 사이에 그것은 직설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것을 하라 혹은 이것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제안이 될 수 없고, 그것은 도덕적인 것(윤리성)을 증명하거나 반대하는 제안들인 것이다. 환언하면: 직설법의 문장들로부터는, 즉 존재를 말하고 있는 문장들로부터는 당위규범들인 어떠한 명령문들도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1편 180-181쪽)
그러나 푸앵카레는 동시에 규범적 추론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규범은 규범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즉 하나의 전제가 당위명제일 때, 다른 존재명제와 결합하여 규범적 결론을 낳는 실천적 삼단논법이 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윤리학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다만 윤리학의 전제 자체가 이미 규범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윤리는 자연과학의 명제들로부터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규범적 전제 위에서만 논리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
「하지만 푸앵카레는 명령문들은 명령문들로부터, 규범들은 규범들로부터, 하나의 당위로부터 하나의 당위의 추론으로서, 도출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주지하다시피 윤리가 윤리 그 자체와 다른 무엇에 의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주의자들은 윤리를 다른 무언가에 기대려고 한다.”라고 말한다(같은 책, 34쪽). 푸앵카레는 양 전제의 하나는 존재문, 다른 하나의 전제 및 결론문은 당위문, 즉 하나의 규범인, (하나의) 규범적 삼단논법의 가능성에 의심을 제기하지 않았다.」(1편 181쪽)
그러나 푸앵카레는, 존재로부터 당위가 도출될 수 없다는 주장을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하지는 않는다. 그는 과학이 도덕의 조력자가 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는데, 이때 과학은 진리에 대한 사랑을 길러주는 활동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과학적 활동이 하나의 도덕적 기능을 가진다는 결론을 함축하며, 이는 존재적 사실로부터 도덕적 가치가 발생한다는 방향으로 다시 논증을 밀어넣게 된다.
「하지만 푸앵카레는, 하나의 존재로부터 하나의 당위가 나올 수 없다는 것, 존재진술들로부터 규범들을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관련하여, 그렇게 일관된 것은 아니다. 그는 학문(과학)을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으로부터 방어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경향)에서 그는 과학에 하나의 도덕적 기능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단어의 과학적(학문적) 의미에서 윤리적이라는 것은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에 첨언하여 “그러나 과학은 도덕의 조력자라는 간접적인 방법(길)일 수 있고, 그것은 과학이 광범위하게 이해되는 데 봉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같은 책, 47쪽)라고 말했다.」(1편 181쪽)
푸앵카레는 과학적 활동의 동기를 진리에 대한 사랑에서 찾는다. 과학자는 진실을 추구하는 열정에 의해 움직이며, 이러한 태도는 도덕적 성격을 가진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거짓말과의 투쟁을 강조하면서, 진리에 대한 사랑이 하나의 도덕이라고까지 표현한다. 그러나 과학이 다루는 것은 논리적 의미에서의 진실이며, 도덕이 명령하는 것은 진실‘성’인바, 이 둘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다. 과학의 진리 추구를 곧바로 도덕적 규범으로 연결할 수는 없다.
「푸앵카레는 과학의 이러한 기능을 ‘과학의 사람(과학적인 사람)은 진실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라고 말하는 식으로 근거지운다. “그것에 영감을 주는 열정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고 그러한 사랑은 하나의 도덕이 아닌가? 그것(거짓말)은 단순소박한 사람에게서의 가장 일반적인 결함이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저급한 것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거짓말과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지 않은가?”(같은 책, 36쪽 이하)」
과학적 진리는 명제의 객관적 참·거짓과 관련된 논리적 가치이며, 도덕적 진실성은 행위자의 태도와 관련된 규범적 가치이다. 과학은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하며, 이러한 오류는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의 진리 탐구 과정은 도덕적 평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속이지 말라는 규범은 학문에 의해서 창설된 규범이 결코 아니고, 단지 도덕의 한 규범이다. 그것은 의식적인(알고 하는) 거짓을 금지하는 규범인 것이다. 그리고 과학의 사람(der Mann der Wissenschaftchaft)은 도덕의 이러한 규범에 대해 저마다의 다른 사람들이 가지는 관계와는 다른 관계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과학안에서의 진리값은 어떠한 도덕적인 가치가 아니고, 진술의 진실이 어쨌거나 ‘가치’로 표현되는 한, 즉 무언가 명령된(요구된 것으로 표현되는 한(즉, 두 개의 상호 모순되는 진술 중에는 단지 하나만이 참일 수 있다는 논리적 법칙인 한), 단지 진실된 진술들만을 만드는 하나의 명령으로, 하나의 규범으로 파악될 수 있는 하나의 논리적 가치이다.」(1편 182쪽)
과학은 사실에 대한 진술을 다루는 체계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와 수정은 도덕적 범주와 무관하다. 반면 도덕은 인간행위에 대한 규범을 설정하는 체계이다. 따라서 과학이 도덕의 조력자가 된다는 주장은, 존재진술로부터 규범이 도출될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는다.
「과학의 역사는 진실의 역사인 것과 같이 착오들의 역사이고, 과학적인 오류들은 과학적인 진실이 도덕적인 것과 거의 무관하듯이, 비도덕적이라는 것과는 거의 관계없다. 과학은 과학적인 활동의 도덕적 가치 혹은 무가치와 관련하여 차이가 없고, 따라서 이 점에서는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도덕의 ‘조력자’로 여겨질 수는 없거나 도덕에 ‘기여할’ 수도 없다.」(1편 182-183쪽)
자연법칙을 통해 개별 사실을 설명하는 사고방식이 개인의 이익을 공동체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윤리적 태도로 이어진다고 말하는 순간, 존재명제에서 규범명제가 도출되는 구조가 다시 등장한다. 이러한 연결은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과학 자체가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푸앵카레는 “과학은 일반적인 것이고, 특정 사실이 존재하는 경우에, 과학은 일반적인 법칙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의 일반화는 보다 더 확장되어간다. 그것은 우선 지적인 습관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지적인 습관은 자신의 윤리적 반향을 가지고 있다.”(같은 책, 37쪽)라고 말했다. 하나의 일반적인 자연법칙을 통해 하나의 구체적 사실을 해명하는 사고작용이 하나의 ‘도덕적인 반향’을 가진다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존재진술로부터 하나의 규범이 따라올 수 있다는 것이 된다.」(1편 183쪽)
과학은 사실을 설명하는 체계이며, 도덕은 행위를 규정하는 체계이다. 두 영역은 서로 다른 논리적 차원에 속하며, 존재명제로부터 당위명제를 도출할 수 없다는 명제는 여전히 유지된다. 푸앵카레가 과학의 윤리적 효과를 강조하려 한 시도는 이해될 수 있으나,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존재와 당위의 구별을 흐리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푸앵카레의 “따라서 우리는 개별 이익이 일반 이익의 아래에 있다는 경향이 있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그것은 다시 하나의 윤리학이다.”(같은 책, 38쪽)라는 기술에서도 이러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 하나의 구체적인 사실을 일반적인 자연법칙을 통해 설명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개인적인 이해를 공동체의 이익에 종속시켜야 한다고 느낀다면, 즉 그러한 종속을 요구하는 도덕규범을 승인하도록 유인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는 하나의 구체적인 사실은 하나의 일반적인 자연법칙을 통해 규정된다는 진술로부터, 사람들은 개인의 이해를 공동체의 이익에 종속시켜야만 한다는 규범이 나온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거나, 진술과 규범 사이에는 무언가 하나의 관련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데, 그것이 착오라는 것은 주지의 것이며, 그것은 과학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1편 183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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