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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젠 '규범의 일반이론' 강독[4] - 규범을 정립하는 행위

斧針 2026. 3. 2. 14:20

한스 켈젠(김성룡 역), 규범의 일반이론, 아카넷, 2016
Hans Kelsen, Allgemeine Theorie der Normen (1979) 


 

제8장 규범창설행위

규범은 하나의 행위가 아니다. 규범은 행위의 의미다. 의지적 행위는 존재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나 그 행위가 가지는 의미, 곧 당위는 존재가 아니라 규범이다. 따라서 규범을 하나의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규범은 의미를 소유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의미 그 자체다.

사실과 규범, 존재와 당위의 구별은 단순한 논리적 구별이 아니라 존재론적 구별이다. 의지적 행위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그 의미로서의 규범은 별도의 차원에서 존재한다.

「상술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하나의 의지적-행위이고 그 자체로 소여의 성격, 즉 존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요구, 규정, 규범을 창설하는 행위와 이러한 행위의 의미로서, 환언하면 하나의 당위로서의 요구(명령), 규정, 규범을 구별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 규범은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그 규범은 하나의 의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것이다. 존재-행위로서 의지적 행위는 하나의 당위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당위는 그 규범이다.」(1편 73쪽)

[미주 27]

골드슈미트는 법을 이상적 대상과 실제적 대상으로 이중적으로 파악하려 한다
. 그는 법을 명령, 곧 규범으로서 하나의 이상적 대상으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공포된 명령이라는 점에서 정신적·물리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지적 행위는 실제적 사실일 수 있으나, 법은 그 행위의 의미이며, 그 의미로서의 규범은 관념적 존재이지 결코 실제적 사물이 아니다. 법은 행위에 의해 생산된다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으나, 그것은 물리적 산물이 아니라 의미적·관념적 산물이다. 법을 법적으로 고려한다는 것은 오직 법을 창설하고 적용하는 행위가 다시 법규범에 의해 규율된다는 의미에서일 뿐이다. 의지적 행위는 존재하는 사건으로서 인과적 세계에 속하는 반면, 규범은 그 사건의 의미로서 타당성의 세계에 속한다. 법을 실제적 대상으로 파악함으로써 규범은 사실로 환원되고 존재와 당위가 섞여버리게 된다.

 
「골드슈미트(Werner Goldschmidt, “Beziehungen zwischen Ontologie und Logik in der Rechtswissenschaft”, Österreichische Zeitschrift für öffentlichen Recht, Bd. III, Neue Folge, 1951, S.186)는 ‘이상적인(ideale)’ 대상으로서 법과 ‘실제·현실적(reale)’ 대상으로서 법을 구분한다. 명령으로서―즉 규범으로서―법은 하나의 이상적인 대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공포된 명령’이기 때문에, 그 법은 ‘하나의 정신적-물리적인 사실(소여)이고, 그리고 그 자체, 양 측면(이상적, 실제적 측면)에서, 전적으로 실제적 소여(reale Gegebenheit)’인 것이다. 하나의 ‘실재하는’ 사실은 그 의미가 규범인 의지적 행위이다. 하지만 법은 의지적 행위가 아니라, 그것의 의미이고, 규범은 하나의 이상적인 대상이지, 결코 실제 대상은 아니다. 만약 그 행위와 그 의미, 즉 규범 간의 관계가 비유적으로 표현된다면, 우리는 법은 하나의 의지적 행위를 통해 ‘생산된다’고 말한다. 법은 실제 행위의 산물, 즉 관념적 산물이다.」(2편 51-52쪽)

규범은 진술(statement)이 아니다. 진술은 사고행위의 의미이며, 참과 거짓의 문제에 속한다. 그러나 규범은 의지행위의 의미(meaning). 여기서는 참/거짓이 아니라 유효/무효만 문제될 수 있다. 규범을 말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허용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진술과 동일하다는 오해를 낳아서는 안 된다.

법학은 규범을 창설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에 관해 진술할 뿐이다. 법학의 임무는 법규범을 창조하는 학문이 아니라 법명제를 제시하는 학문이다.

「그 규범은 무언가 존재해야만 한다거나 일어나야만 한다고 ‘말(의미)한다(besagt)’라는 표현은, 우리가 그 표현을 통해 그 규범이 하나의 진술·언명(Aussage)과 혼돈되는 오해에 이르지 않게 하는 한 허용된다. 왜냐하면 규범은 어떠한 진술도 아니고―조금 더 상세하게 논구하겠지만―하나의 진술, 특히 하나의 규범에 관한 진술과는 구별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진술은 하나의 사고행위의 의미이기 때문이고, 그 규범은, 이미 지적했듯이, 하나의 특정한 인간의 행위에 의도적(intentional)으로 향해진 의지적 행위(Willensakt)의 의미이기 때문이다.」(1편 74쪽)

여기서의 의지희망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의지는 의미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존재를 향하지만, 희망은 자연현상에도 향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비가 오기를 바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의지할 수는 없다. 의지는 규범과 연결되어 있고, 희망은 그렇지 않다.

「원함·의지(Wollen)는 단지 원함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에 부합된 행위를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의 행위에만 향해질 수 있다. 이를 통해 의지는 다른 소여에도 향해질 수 있는 바람과 구별된다. 나는 내일 비가 와야만 한다고 바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의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의 그러한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1편 74쪽)

모든 명령이 규범은 아니다. 가령 노상강도의 명령은 규범에 속하지 않는다. 수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권되지 않은 명령은 주관적 의미만을 지니며, 그것은 단지 명령자의 의지에 머문다.

명령은 어떤 상위규범에 의해 권한을 부여받음으로써 비로소 객관적 의미(objektiver Sinn)를 지닌다. 그렇게 수권된 명령만이 규범수신자를 구속한다. 객관성은 초월적 실체가 아니라 수권구조 속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규범으로 인정되는 것은 단지 특정한 방식으로 인정된 명령행위의 의미, 즉 하나의 실정 도덕질서 혹은 법질서의 규범을 통해 권한이 부여된 명령행위의 의미일 뿐이다.」(1편 75쪽)
「수권되지 않은 명령은 명령의 수신자를 구속하지 않는 반면에, 오직 수권받은 명령만이 규범수신자들에 대해 구속력이 있는 규범이고, 규범수신자를 그 규범에 규정된 행위를 하도록 의무지우는 것이다. 단지 그렇게 우리는 한 노상강도의 명령을 도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권위 있는 자(Autorität)의 명령과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1편 76쪽)
「당위의 객관성(즉 다른 사람의 행위에 향해진, 하나의 권한 있는 의지적 행위의 의미는 하나의 규범이라는 것)은 규범이 타당(유효)하다는 것에서도 나타나고, 비록 그 의미가 당위인 의지적 행위가 이미 (오래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의미로서 이러한 당위는 존재한다는 것에서 표현되는 반면, 단지 수권되지 않은 명령의 주관적인 의미인 당위는 그 의미가 당위인 의지적 행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과 동시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1편 76-77쪽)

[미주 29]

카시우스 키저는 학문의 대상은 자연적 현상이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 법학이 학문이라면 그 대상 역시 자연적 현상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법을 인간행위의 한 유형으로, 더 구체적으로는 법관의 결정이라는 사실적 행위로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법을 순수한 사실로 환원하는 것이다. 법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행위의 의미이다. 법관의 판결이라는 사실적 사건은 존재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 판결이 의미하는 바, 곧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라는 당위는 존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키저는 이러한 차원을 간과하고 있다.

 
「행위(Akt)와 그 행위의 의미(Sinne des Aktes)를 구별하지 않는 대표적인 예는 키저(Cassius J. Keyser, “On the Study of Legal Science”, Yale Law Journal, vol. XXXVIII, 1928~1929, S. 413 bis 422)의 논문이다. 키저는, 하나의 학문의 대상은 자연적인 현상들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고, 따라서 만약 법에 대한 연구가 하나의 학문이거나 학문이어야만 한다면, 그의 대상은 반드시 자연적인 현상(natural phenomena)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법은 하나의 학문의 대상으로서 자연적인 현상이어야만 할 것이고, 물론 사람들의 사실상의 행위여야만 할 것이다. 키저는 또한 법을 ‘인간행위의 한 특정 유형’(a certain species of human behavior)이라고 표현하고, 좀 더 상세히는 무엇이 정의로운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기능을 가진 인간들의 행위라고 표현했다. 그는 “법학의 주제는 법관의 결정이다.”라고 했다.」(2편 56쪽)
 
만약 법이 법관의 사실상의 행위라면, ‘법관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누가 법관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이미 법이 전제되어야 한다. 법관은 법에 따라 판단하는 자이며, 법적 권한에 의해 규정된 지위에 있는 자이다. 즉 법관이라는 개념은 규범을 전제로 하여서만 성립한다. 법을 법관의 행위로 정의하는 순간, 우리는 순환에 빠진다. 왜냐하면 법관은 법을 전제하고, 법은 다시 법관의 행위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법관의 판결이라는 행위는 존재하는 사건이지만, 그 판결이 의미하는 바는 피고인이 수감되어야 한다거나 강제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이다. 이 당위는 존재가 아니다. 키저는 이 당위적 의미를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법을 행위로 환원하였다.
 
「법은 단지 하나의 행위의 의미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지, 행위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관은 마치 목수가 탁자를 만드는 것과 같이 법을 ‘만든다(macht)’. 그리고 하나의 책상이 한 목수의 만듦이 아니고, 그 목수가 만든 것인 것처럼, 법은 법관의 활동(Tätigkeit)이 아니라, 법관이 한(만든) 것, 법관의 행위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는 무언가 존재해야만 한다거나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 … 즉 당위이지,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법관의 행위는 하나의 존재이다. 이러한 다우이-의미는 키저에 의해서 완전히 무시되었다.」(2편 57쪽)
 
단지 실제적인 것과 가능한 것에 관한 물음만으로는 규범을 다루기에 충분하지 않다. 규범의 영역은 제3의 차원, 곧 무엇이 존재해야만 하는가라는 차원을 포함한다. 실제적이거나 가능한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당위적인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많은 행위는 존재하지만,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또한 가능하지만 실현되지 않는 행위 역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가능하지만 실행되지 않은 범죄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존재와 가능성의 차원과는 구별되는 당위의 차원이 있음에도 키저는 이 차원을 배제함으로써 법의 규범적 본질을 간과하였다. 결국 그의 법학관은 법을 사실적 행위의 집합으로 환원하며, 법의 의미 차원을 제거하는 결과에 이른다(257-58).
[미주 30]

카를로스 코시오는 법학의 대상은 규범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 규칙이나 규정이 아니라, 인간적 경험 속에서 주어지는 행위가 법학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문화적 경험의 과학으로 규정하면서, 자연적·인과적 경험과 구별한다. 그러나 문화적 대상의 창조와 관련되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인과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실적 사건이다. 행위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고, 경험 속에서 주어지며, 존재를 가진다는 점에서 존재의 범주에 속한다. ‘문화적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인과적 결정성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법을 생산하거나 적용하는 인간의 행위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사실적 사건이며, 다른 자연적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인과성의 원칙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 법생산행위이든 법적용행위이든 존재의 영역에 속한다. 법학이 그 행위를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규범을 생산하거나 적용하는 한에서만, 다시 말해 규범에 의해 규정된 행위로서만 의미를 가진다(2편 58-59쪽).


코시오(Carlos Cossio, “Phenomenology of the Decision", Latin-American Legal Philosophy, 20th Century Legal Philosophy Series, vol. III, Cambridge-Messachusetts, 1948, S. 343부터 400까지)는 법학의 대상은 규정들이 아니고, 즉 법의 규정들은 규범들이기 때문에, 법학의 대상은 규범들이 아니고, 인간적인, 경험에서 주어진 행위(
“egological Theory는 법률가에 의해 알려져야 하는 대상은 규칙이 아니고, 인간의 행위라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S. 348). … 법학은 실제의 과학이고 문화적 경험과 인간의 경험의 과학이라고 보지만, 자연적 경험 혹은 인과적 경험으로서의 과학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들의 사실상의 행위는, 그것이 법생산과 법적용의 행위라고 하더라도,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 자연적인 인과적 경험에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의 사실상의 행위는 실제의 모든 다른 사실과 같이 반드시 인과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단, 우리들이 종교적-형이상학적인, 하지만 학문적으로는 수용될 수 없는, 의사(결정의)자유라는 이념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바로 이것을 코시오가 한 것이다. 그는 … 인간의 행위는 자연적 대상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경험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적 대상들은 필연적으로 원인과 결과와의 동일성에 의해 지배되는 경험을 구성하는 데 반해, 인간의 행위는, 무언가 독창적인 것의 창조가 매 순간 나타나는 자유의 경험을 구성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자유의 경험이라는 이러한 개념을 유지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는, 자신의 생각에 따를 때 법학의 대상을 이루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위는 동기부여된, 즉 인과적으로 결정되는 것임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선호에 의해 동기부여된 인간을 통해 특정한 방식으로 창조된 문화적인 대상 혹은 재화들은, 그들의 방향에서는, 실제적이다. 그것들은 존재를 가지고, 경험 안에 있으며 시간 안에 존재한다. … 모든 문화적 대상들은 그렇게 존재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하나의 의미의 존재처럼 만약 그것이 법이라면 공정하거나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2편 58-59쪽)

효력(유효성)은 규범의 관념적 실존방식이다. 규범이 유효하다는 것은 그것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효력은 물리적 존재가 아니며, 의지행위의 존재와도 구별된다. 의지행위가 사라져도 규범은 유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한 객관적 의미에서 ‘유효(타당)함(Gelten)’은 “준수되어야만 한다(Befolgt-Werden-Sollen).”는 뜻이다. 하나의 규범의 이러한 ‘효력’은 그의 특수한, 관념적 실존이다. 하나의 규범이 ‘효력이 있다(gelten)’라는 것은 그 규범이 현존·존재한다(vorhanden)는 것을 의미한다. ‘효력이 없는’ 규범은, 존재하는 어떤 규범이 아니기 때문에, 규범이 아니다.」(1편 77쪽)

규범은 언제나 두 사람, 즉 설정자(명령하는 사람, 명령을 주는 사람, 규범을 설정하는 사람)와 수신자(명령이 향해지는 사람, 명령되는 사람, 규범이 그에게 당위된 것으로 설정된 행위를 규정하는 사람)를 전제한다. ‘설정하는 권위 없이 규범 없고, 수신자 없이 규범 없다’.

「규범을 설정하는 하나의 권위(자) 없이는 규범 없고, 규범수신자(들) 없이는 규범 없다.」(1편 78-79쪽)

수신자 없이 규범 없다는 것은, 규범은 동물이나 자연현상이 아니라 특정 인간행위를 의무로 설정함을 의미한다. 규범은 언제나 행위지향적이다. 단지 인간행위만이 효력 있는 도덕규범 또는 법규범에서 의무지워진 것으로 규정된다.

「단지 인간의 행위만이 현재 유효한 도덕규범과 법규범에서 의무지워진 것으로 규정되는 것이지, 동물, 식물 혹은 무생물의 행위는 그렇지 않다.」(1편 79쪽)

[미주 31]

페렐만과 올브레히츠
-티테카는, 도덕과 법이 행위와 행위자를 동시에 판단한다고 주장한다. 책임과 죄책감은 사람에게 귀속되고, 규범과 규칙은 행위에 관련되지만, 양자는 상호 독립적이면서도 사회적 삶 속에서 긴밀히 결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와 사람은 동등한 지위에서 병렬적으로 판단되는 두 요소가 아니다. 규범적 구조에서 결정적인 것은 행위와 제재 사이의 관계이다. 사람은 그 행위가 제재의 조건으로 규정되는 한에서만 문제된다. 규범은 행위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사람은 제재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간접적으로만 관련된다.

 
「페렐만과 올브레히츠-티테카(Ch. Perelman & L. Olbrechts-Tyteca, Traite de l’Argumentation. La nouvelle rhétorique, 2. Aufl., Bruxelles 1970, S. 398)는 “도덕(성)과 법은 행위와 행위자를 동시에 판단한다: 도덕과 법들은 단순히 이러한 두 요소 중의 하나를 고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책임이라는 개념 및 죄책감 혹은 훌륭함의 개념은 사람에게 관련된 반면에 규범의 개념과 규칙의 개념들은 근본적으로 그 행위에 연관된 것이다. … 규칙들이 특정 행위들을 규정하거나 혹은 금지하는 경우에 그것들의 윤리적 혹은 법적 중요성은 그것들이 사람에게 향해져 있다는 그 사실에 놓여 있는 것이다. … ”라고 한다.」(2편 60-61쪽)
 
우리는 한 사람의 공적을 그의 행위와 무관하게 주장할 수 없다. 훌륭함이나 비난가능성은 결국 특정 행위에 의해 매개된다. 한 사람이 공적이 많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수행한 행위가 규범적으로 긍정된다는 뜻이거나, 그가 그러한 행위를 수행할 능력과 의지를 가졌다는 의미일 뿐이다. 규범적 판단의 직접적 대상은 행위이다.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은, 어떤 도덕규범이나 법규범이 특정 행위를 제재의 조건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하나의 도덕규범 혹은 법규범이 이러한 행위를 그 사람에게 향해진 하나의 제재의 조건으로 만듦으로써, 하나의 특정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 … 그 사람은 바로 하나의 도덕규범 혹은 법규범이 그 행위를 하나의 제재의 조건으로 만들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범죄인 그 행위로 ‘유죄’이다. 결정적인 연관(성)은 행위(Akt)와, 도덕 혹은 법이 제재로서 규정하고 있는, 이 행위에 대한 반응(Reaktion) 사이에 있다.」(2편 61쪽)
 
규범은 만약 A라면 제재 B가 부과되어야 한다는 형식을 가진다. 이때 A는 행위이며, B는 제재이다. 사람은 이 구조 속에서 제재의 대상이 된다. ‘유죄라는 평가 역시 그 사람이 어떤 행위를 했고, 그 행위가 규범에 의해 제재의 조건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의 행위를 매개로 하여 판단된다. 도덕과 법이 사람에게 향한다는 말은, 규범이 행위의 인적 요소를 특정한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규범은 인간의 행위를 명령하거나 금지하며, 그 행위가 특정한 인간에 의해 수행될 수 있는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규범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행위-제재의 관계이다(261-62).

누군가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닌, ‘자율적 도덕이라는 관념도 설정자-수신자의 이중적 구조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격체의 자아는 스스로를 입법하는 자아와 복종하는 자아로 분할하며, 한 자아가(ego)가 다른 자아(alter ego)에게 규범을 설정하고, 그 다른 자아는 이에 복종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구속은 내가 이렇게 행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행해야 한다고 의지하는 것이다.

「자율적 도덕이라는 관념은 하나의 규범은 두 사람을 전제한다고 하는 주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은 단지 그 인간의 인식이 자아와 제2의 자아로 나누어지고, 그래서 그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향해진 규범을 설정한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 그가 자신 스스로의 입법자로 원하는 것은 그 스스로 하나의 특정 방식으로 행위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해야만 한다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1편 80쪽)

 

제9장 의지적 행위

의지적 행위에는 크게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타인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자기관찰을 통해 확인 가능한 의지의 내적 과정이 존재하지만, 그 지향대상은 서로 다르다. 자신의 행위에 향해진 의지는 존재하는 행위로 이행될 수 있는 자기결정의 형식이지만, 타인의 행위에 향해진 의지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행위를 향해 있으며, 이때 그 행위는 비로소 존재가 아니라 당위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타인의 행위에 향해진 의지만이 당위의 의미를 가지며, 그 의미가 곧 명령, 요구, 규정, 규범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단지 다른 사람(제2의 자아를 포함해서)의 행위에 향해진 의사(Wollen)만이 하나의 당위의 의미를 가지며, 그것을 명령이라고, 요구라고, 하나의 규정이라고, 혹은 하나의 규범이라고 일컫는다. 다른 사람의 행위에 향해진 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 하나의 명령행위의 의미는 단지 ‘당위(Sollen)’라는 단어로 기술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의지가 향해진 다른 사람의 행위는 다른 사람의 존재하는(현존의) 행위(seiendes Verhalten)가 아니다. 나는 이러한 행위를 의무지워진 것으로 원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것이 존재하기 이전에 당위 지워진 것이고, 달리 말해 그 다른 사람이 나의 명령을 따르기 전인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그 다른 사람은 나의 명령을 따를 수 있고 혹은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행위는 나의 명령에서는 존재의 형식(Modus des Seins)으로가 아니라 당위의 형식(Modus des Sollens)으로 등장한다.」(1편 83쪽)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