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켈젠(김성룡 역), 《규범의 일반이론》, 아카넷, 2016
Hans Kelsen, Allgemeine Theorie der Normen (1979)
제2장 규범과 목적-수단 관계
당위(sollen)와 필연(müssen)은 구분되어야 한다. 인과법칙은 특정 조건 아래에서 어떤 결과가 ‘반드시’ 발생함을, 즉 인과적 필연성을 표현한다. 그러나 당위가 표현하는 필연성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언어에서는 ‘해야만 한다’와 ‘반드시 그렇다’가 혼용되는 일이 잦지만, 규범적 필연성과 인과적 필연성은 본질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존재규칙·법칙(Seins-Regel)은 하나의 인과법칙의 성격을 가질 수 있고, 그에 따르면 특정한 조건들 아래에서는 무언가 특정한 것이 반드시 발생해야만 한다. ‘(반드시) … 이어야만 함’(Müssen)은 인과적 필연성을 표현한다. 우리가 ‘당위’(Sollen)도 하나의 필연성을 표현한다고 본다면, 인과적 필연성과 규범적 필연성을 반드시 명백하게 구분해야만 한다.」(1편 42쪽)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규범의 효력에 대한 물음이다. 반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적절한 수단에 대한 물음이다. 전자는 규범적 차원에 속하고, 후자는 인과적·기술적 차원에 속한다. 가령 금속을 팽창시키려면 열을 가해야 한다는 명제는 인과적 필연성을 기술하며, 특정 목적을 위한 적절한 수단이 무엇인지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너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는 인과적 필연성을 기술하는 것도 아니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을 지시하는 것도 아니다.
「“목적을 원하는 자는 수단을 반드시 원해야만 한다.”라는 공식은 “나는 하나의 특정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고, 이 물음은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과는 필히 구별되어야만 한다.」(1편 43쪽)
「특정한 행위가 하나의 특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적절한 하나의 수단이라는 것은 결코 이러한 행위가 당위되었음을, 즉 하나의 유효한 도덕규범 또는 법규범을 통해 규정된 것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 수단과 목적의 관계는 하나의 원인과 그 효과, 하나의 인과관련이다. … 목적론적 필연성은 하나의 인과적인 필연성이고, 하나의 필연(Müssen)이지 당위(Sollen)는 아니다.」(1편 43쪽)
| [미주 14] 빈델반트는 “목적의 원함은 수단의 원함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이른바 thelematische Grundgesetz를 말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는 칸트적 가언명령의 심리학적 버전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하든 이러한 ‘법칙’은 예외를 인정하는바, 예외가 있다면 이미 논리적 필연성도 심리적 불가피성도 아니다.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Über Willensfreiheit, Tübingen und Leipzig 1904, 66쪽)는 ‘목적의 원함은 수단의 원함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원칙(법칙)(thelematische Grundgesetz)’을 말했다. 하지만 이 ‘원칙’은 빈델반트에 따르면 예외를 가지고 있다. 그는 “하지만 목적은 수단을 신성하게 한다라는 문장의 효력은, 바로 수단에 혹은 그 부수결과 자체에 사실상 내재하고 있는 가치결정들에 그의 한계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 효력은, 이러한 가치결정들이 부정적인 특성을 가진 사례들에서,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때에 따라서는 그에 이르는 수단이 그 자체 혹은 그 효과들에 있어서 그것들을 거부하게 하는 가치감정들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 목적의 달성은 반드시 포기해야만 하는 모든 그런 사례들에서 변경되고 폐기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자체 종결된 목적의 선택이 수단의 선택을 통해서 번복될 수 있는 것이다. … ”라고 했다.」(2편 31-32쪽) 빈델반트 스스로 인정하듯이, 수단이 부정적인 가치판단을 불러일으키는 경우 목적은 포기될 수 있다. 목적은 수단 없이도 의욕될 수 있으며, 다만 수단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목적을 나중에 철회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수단의 원함은 목적의 원함에 대한 논리적 귀결이 아니며 심리적 필연성도 아니다. 목적이 한때 의욕되었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수단이 거부된다고 해서 그 목적이 애초에 의욕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팬더는 수단이 의욕되지 않는 한 목적을 의욕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관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팬더(Alexander Pfänder, Phänomenologie des Wollens, 2. Aufl., Leipzig 1930)는 사람들은 또한 수단도 의욕된 것일 때만 목적의 하나의 ‘원함’을 말할 수 있다는 입장을 주장했다. 그는 “즉 원함의 목표는 목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럼에도 하나의 열망의 목표를, 단지 그 목표의 실현의 조건들에 대한 추구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목적이라고 부른다. … 이러한 조건들은 그 목적에 대한 수단이라고 불린다.”(95쪽 이하)라고 했다.」(2편 32쪽) 가령 나는 2주 안에 파리에 있기를 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단—배를 탈지 비행기를 탈지—에 대해 아직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파리에 가기를 ‘원했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수단의 선택은 나중으로 연기될 수 있다. 심지어 나중에 목적을 포기하더라도, 한때 그것을 의욕했던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 2주 안에 파리에 있기를 목적으로 설정하기를 원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우선 그것을 통해 2주 안에 파리에 있는다는 목적이 실현되는 수단과 관련해서는 전혀 의욕함이 없이 말이다. … 나는 수단에 해당하는 결정을 연기할 수도 있다. … 하지만 나는 2주 내에 파리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원했고’, 단순히 바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2편 32-33쪽) 또한 팬더 자신도 다른 곳에서는, 목표는 수단을 고려하기 전에 이미 원함의 대상이 된다고 인정한다. 「팬더 자신은 … “그 목표는, 우리가 그것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수단의 달성에 다가가기 전에 이미 우리의 원함의 대상이다.”(87쪽)라고 했다. … “나는 예를 들어 … 콘서트를 방청하려고 원한다. … 나의 지금의 원함은 단순한 바람도 아니다. … 나의 지금의 원함은 … 영원히 하나의 원함이었던 것이다.”(89쪽)라고 했다.」(2편 33쪽) 목적의 원함은 수단의 원함을 논리적으로 포함하지 않는다. 수단은 나중에 선택될 수 있고, 아예 선택되지 않을 수도 있다. 목적은 수단과 독립적으로 의욕될 수 있다. 따라서 “목적의 원함은 수단의 원함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명제는 논리적 법칙도 아니고, 심리적 법칙도 아니다. |
| [미주 15] 헤어는 가령 독살범에게 (상대를 죽이기 위해) “약을 두 배로 먹여야만 한다”고 지시하는 경우와 도덕적으로 “너는 진실을 말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에서 각 ‘ought’의 논리적 차이가 크지 않다고 본다. 「헤어(R. M. Hare, The Language of Morals, Oxford, 1964, S. 160ff.)는 “너는 두 번째의 복용량(약)을 주어야만 한다(약의 두 배를 주어야 한다)(독살범이 되려고 하는 자에게 말했다).”(너는 두 배의 약을 주어야만 한다고 다른 사람을 독살하려는 자에게 말했다)와 “너는 진실을 말해야만 한다.”는 문장에 대해서, “해야만 한다.’(ought)라는 단어의 논리(학)는 두 사례에서 현저히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2편 34쪽) 그러나 이 두 문장은 전혀 다른 종류의 구조를 가진다. 전자는 조건적 인과명제에 가깝고, 후자는 규범적 당위를 표현한다. 양자를 동일한 ‘ought’의 논리로 처리하는 것은 Sollen과 Müssen을 혼동하는 결과를 낳는다. 만약 첫 번째 문장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네가 그의 죽음을 야기하려고 의지하는 경우에는 두 배의 복용량을 주어야 한다”라면, 그것은 규범이 아니라 조건부 기술명제이다. 그것은 ‘해야만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의 인과적 필연성을 말할 뿐이다. 즉 여기서의 ‘ought’는 독일어의 ‘soll’이 아니라 ‘muß’에 해당한다. 「하지만 만약 두 개의 문장 중 그 첫 번째의 문장이 “너는 그의 죽음을 야기하려고 의지하는 경우에는 그에게 두 배의 복용량의 약을 주어야만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바르게 표현한다면, “해야만 한다.”가 아니고, 달리 말해 ‘당위’(Soll)가 아니라, 바로 하나의 ‘필연’, ‘muß’인 것이다.」(2편 34쪽) 영어에서는 ‘ought’와 ‘must’의 구별이 독일어의 ‘soll’과 ‘muss’만큼 분명하지 않다. 바로 이 언어적 애매성이 혼동을 강화한다. 헤어는 두 문장의 차이를, “it is your duty”라는 표현을 두 번째 문장에는 삽입할 수 있지만 첫 번째 문장에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찾는다. 그러나 독일어에서는 “du sollst”와 “es ist deine Pflicht”가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문제는 단어의 치환 가능성이 아니라, 문장의 구조적 성격에 있다. 「영어에서는 물론 ‘ought’와 ‘must’의 구별이, 독일어에서의 ‘soll’과 ‘muss’의 구별과 같이 그렇게 뚜렷한 것은 아니다. 헤어는 첫 번째 문장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단지 두 번째의 문장에서 “너는 해야만 한다.”(you ought)에 “그것이 너의 의무이다.”(it is your duty)가 투입될 수 있는 한, 양 문장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독일어에서는 “너는 해야만 한다.”(du sollst)는 “그것은 너의 의무이다.”(es is deine Pflicht)와 같은 의미이다.」(2편 34쪽) “너는 진실을 말해야만 한다”는 문장은 하나의 규범을 전제하거나 진술한다. 반면 “너는 두 배의 약을 주어야만 한다”는 문장은 특정 목적을 전제한 조건적 인과관계를 표현한다. 두 문장의 표면적 문법이 동일하다고 해서, 그 논리적 지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규범적 당위와 인과적 필연성은 동일한 논리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ought’의 논리는 하나가 아니라, 적어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
| [미주 16] 목적론적 필연성은 어디까지나 인과적 필연성(Müssen)일 뿐이며, 윤리학이 다루는 규범적 필연성(Sollen)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다. 그러므로 목적론적 논리학과 규범적 논리학을 병렬적으로 구분하는 시도는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윤리학은 본질상 규범의 효력, 즉 당위의 타당성을 문제삼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목적론적 필연성은 인과적 필연성이지 규범적 필연성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윤리학은 본질적으로 규범들의 효력, 하나의 당위, 하나의 규범적 필연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규범적인 논리학과 목적론적인 논리학을 구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2편 34쪽) 도덕철학의 흐름은 크게 의무중심 윤리학과 목적중심 윤리학으로 나뉘는바, 전자는 법과 명령, 의무와 복종의 체계를 강조하고, 후자는 재화와 목적의 달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둘이 서로 다른 논리구조를 가진 별개의 체계라고는 할 수 없다. 후자도 결국 특정 행위를 ‘마땅히 실현되어야 할 상태’로 전제함으로써 이미 규범적 구조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위의 선함을 도덕규범에 대한 합치에서 찾든, 목적 달성의 수단성에서 찾든, 결국 ‘선하다’는 평가는 어떤 규범적 기준을 전제한다. 「로스(W. David Ross, Foundation of Ethics, Oxford 1939, S.3)는 “도덕적 문제들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들의 복잡한 구조 속에서 두 개의 중요한 입장이 발견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의무의, 옳고 그름의, 도덕법과 법률들의, 명령들의 (상호) 밀접하게 결합된 이상들을 포함하고 있는 일련의 견해들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목적이 되는 선(재화들)과 목적들(goods and ends)의 이념을 담고 있는 견해들이 있다. 하나의 경우에는 인간 삶의 이상이 법에 대한 복종으로서 상정되고, 다른 경우에는 욕망의 점진적인 충족과 목표의 달성으로서 예정된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두 윤리적 이론 간의 차이점은 그 하나에 따를 때 윤리적인 가치, 하나의 행위의 선함은 그 행위가 도덕규범에 부합한다는 것에 있지만, 다른 하나에 따르면 그 행위가 하나의 특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도덕적 가치는 유효한 것으로 전제된 규범에 대한 하나의 행위의 관계에서 혹은 이러한 목적에 대한 관계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규범적 윤리학과 하나의 목적론적 윤리학의 차이고, 그 하나의 윤리학에 따르면 하나의 행위는 그것이 유효한 것으로 전제된 도덕규범에 부합하는 경우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윤리학과, 다른 하나의 윤리학에 따르면 만약 그 행위가 전제된 목적에 부합하는 경우라면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라는 윤리학 사이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목적론적 윤리학도 단지 하나의 규범적 윤리학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윤리학이 목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특정 행위를 당위된 것으로 규정하는 하나의 규범일 수 있기 때문이다.」(2편 34-35쪽) 도덕은 규범이며, 도덕체계는 규범적 질서다. 규범은 언제나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 누군가의 의지에서 설정된 것이다. 설령 그것이 신의 의지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 존재하는바, 이를 ‘목적’의 체계로 재서술한다고 해서 그 성격이 변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실정 도덕의 규범은 마치 하나의 실정법의 규범과 같이 항상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다. …하 나의 의지적 행위를 통해 창설되지 않은,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가 아닌 하나의 실정 규범은 그 자체 모순이며, 명령(하는)자(Befehlsgeber) 없는 명령(Befehl)이거나 … 명령자(Imperator) 없는 명령(Imperativ)이다.」(2편 36쪽) 아이슬러는 ‘규범적 목적개념’과 ‘설명적 목적개념’을 구별하려 한다. 그는 목적론적 사고가 단순한 인과적 설명과는 다른 고유한 논리적 지위를 가진다고 본다. 특히 그는 목적을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수단을 규정하는 이상적 근거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목적을 통해 수단이 요구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실제로 수단이 목적 실현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다른 표현으로 서술하는 것에 불과하다. 인과관계가 제거되면 목적과 수단의 관계는 공허해진다. 따라서 ‘목적론적 필연성’을 규범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목적법칙에서 말하는 Müssen은 여전히 인과적 필연성일 뿐이다. 「아이슬러(Rudolf Eisler)가 Der Zweck. Sein Bedeutung für Natur und Geist, Berlin 1914, S.65ff.에서 말한 것처럼[“하나의 규범적-목적론적 필연성은 우리가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인과적 관계로 환원하지 않고, 목적을 그 수단이 관념적으로 따라오는 이상적 근거(Idealgrund)로 생각할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수단의 설정은 이제 목적의 설정을 통해 정해지는 것 혹은 요구되는 것으로 보이거나, 또는 수단에 관한 판단은 목적의 설정이 유효하기 때문에 유효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는 논리적인 것의 하나의 특수한 공간에의 적용 즉 ‘목적론적 논리학’ 혹은 목적의 논리학이 문제된다. 여기서 인과성은 직접적으로 고려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규범적’ 목적개념을 하나의 ‘설명적’ 목적개념과 구분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목적개념은, 목적의 실현이 수단의 실현의 효과로, 수단의 실현이 목적의 실현의 원인으로 생각되는 한, 설명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를 지배하는 사건의 필수불가결성’은 하나의 ‘목적론적-인과적 필연성’이다(S.66).」(2편 37쪽) 목적을 통한 수단의 ‘피규정성’이라는 표현은 인과적 구조를 은폐하는 수사에 불과하다. 목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사건이 발생해야 하며, 그 사건은 원인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목적법칙에서 말하는 Müssen은 여전히 인과적 필연성을 뜻한다. 그것은 Sollen이 아니라 Müssen이다. 「‘목적을 통한 수단의 피규정성’은 단지, 목적의 실현이 수단의 실현의 효과이고, 수단의 실현은 목적의 실현의 원인임에 있다는 반론이 당연히 제기되어야만 할 것이다. 만약 그 ‘목적법칙’이, “만약 하나의 특정 목적이 충족되어야만 한다면, 특정한 무엇인가가 반드시 일어난다.”라면, 그 ‘Müssen’은, 만약 그것이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단지 하나의 인과적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의 특정 목적이 충족되어야만 한다면, 무언가 특정한 것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은 단지 이 사건 없이는 목적이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원인으로서 이러한 사건은 효과로서 목적의 실현을 야기하기 때문에 맞는 말이다.」(2편 37-38쪽) 아이슬러는 또한 목적판단이 수단의 ‘적정성’을 평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적정성 역시 인과적 성공 가능성의 판단에 불과하다. 수단이 적정하다는 것은 그것이 목적을 실현시킬 능력을 가진다는 뜻이다. 이 능력은 원인으로서 효과를 산출할 수 있는 힘이다. 목적론적 판단은 설명적 판단을 넘어서는 별도의 규범적 영역을 형성하지 않는다. 「아이슬러는 ‘목적판단은 수단이 하나의 소망스런 효과에 이르는 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있는 하나의 수단의 가치를 평가하기를 원한다.’라고 한다. 하지만 수단은 바로 그것의 실현이 목적 실현의 원인이라는 것을 통해서 바랐던 결과에 이르는 것이다. 73쪽에서 아이슬러는 지크바르트를 인용하여 “하나의 특정 행위가 하나의 특정 목적을 위한 하나의 합목적적인 수단이고 바로 그 목적이 의지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의지되어야만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일반적으로 그 목적이 그 수단의 필수적인 효과라는 확실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어진 총체적 상황하에서도 이 수단은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확실성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한다.」(2편 39쪽) 어느 모로 보나 수단이 목적에 의해 요구된다는 말은, 수단이 없으면 목적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인과적 사실을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목적과 수단의 관계는 인과적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 윤리학은 목적론적 논리학이 아니라 규범적 논리학이다. |
목적-수단 관계는 존재의 차원에 속한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연결이다. 당위는 이러한 두 사실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당위는 행위의 ‘의미’이며 규범 그 자체다. 규범은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목적은 의지하는 주체의 것이다. 규범은 단지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 존재할 뿐이다.
「당위는 두 개의 요소들 간의 관계가 아니다. 하나의 규범과 그 규범에 부합하는 행위 간의 관계도 아니고, 규범의 설정행위와 그 규범에 부합하는 행위 간의 관계또 아니다. 당위는 규범이다. 즉, 당위는 행위의 의미인 것이다. … 규범은 아무것도 ‘원할 수’(will) 없기 때문에, 그 규범이 아니라, 하나의 의지적 행위에서 그 규범을 설정하는 인간만이 무언가를 목적할 수 있고, 목적을 추구할 수 있다.」(1편 46-47쪽)
| [미주 17] 모리츠(Manfred Moritz)는 ‘진정한 명령’과 ‘부진정한 명령’을 나누면서, 전자는 목표 자체를 요구하고 후자는 특정 목적을 전제한 조건부 행위를 권고한다고 본다. 그러나 명령은 목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특정 행위를 당위로 설정한다. 목표나 목적은 명령의 내용이 아니라 명령에 부합하는 행위의 사실적 결과일 수 있을 뿐이다. 모리츠가 말하는 ‘부진정한 명령’은 사실상 ‘명령’이 아니라 ‘인과적 관계’를 부정확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모리츠(Manfred Moritz, “Gebot und Pflicht, Eine Untersuchung zur imperativen Ethik”, Theoria, vol. VII, 1941, S.227f.)는 ‘진정한’ 명령과 ‘부진정한’ 명령(Imperativ oder Gebot)을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의 진정한 요구(명령)에서는 요구하는 주제의 목표(즉 요구의 내용; Ziel)이 요구된다.” 또 부진정 명령에서는, “표현되건 표현되지 않건 명령을 수신하는 주체[Gebotnormierte; 명령수신자(Gebotsadressat)]가 특정의 구체적인 목적들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 혹은 전제조건하에서 명령문의 형태에서 하나의 행위가 권고되는” 그러한 명령이 문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명령은 전제된 목표의 달성을 위해 적합한 수단으로 간주되는 모종의 행위들의 수행을 요구한다. 그러한 명령은 ‘네가 이러이러한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혹은 있다면) … 을 하라’는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지적되어야 할 것은 하나의 진정한 명령은 어떠한 목표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어떠한 목적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의 사실상의 결과가 목표일 수 있는, 즉 그것으로 명령이 설정된 그 행위의 목적일 수 있는, 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요구한다. 목표, 즉 목적은 명령의 내용이 아니고, 현실에서의 명령에 부합하는 존재하는 행위인 것이다.」(2편 39-40쪽) ‘부진정한 명령’, 가령 “만약 네가 건강하고 싶다면 술을 마시지 말라”는 표현은 명령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금지나 규범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알코올 섭취와 건강 사이의 인과관계를 말하는 진술에 불과하다. 여기서의 “soll”은 사실상 “muß”에 해당한다. 목적을 전제한 조건적 인과명제, 다시 말해 명령이 아니라 기술적 진술인 것이다. 「‘부진정’ 명령은 도대체 명령이 아니며, 수단과 목적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인과관련성에 관해 언어적으로 부정확하게 표현된 하나의 진술이다. 예를 들어 “만약 네가 건강하게 머물고 싶다면, 너는 알코올 음료를 즐기는 것을 피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거나 “만약 네가 계속 건강하고 싶으면, 알코올 음료를 마시는 것을 피해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의미가 하나의 명령인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로써 무언가를 명령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알코올 음료의 섭취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알코올 음료의 건강에 대한 작용을 확언하는 것이다. 모리츠는 또한 “고유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여기서 무언가 요구되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요구하는 주체는 스스로는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228쪽)라고 인정했다.」(2편 40쪽) 지크바르트는 목적과 규범을 상호 전환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목적은 규범이 아니다. 목적은 현실에서 실현되는 상태이며, 규범은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다. 규범은 당위를 설정하는 것이고, 목적은 사실적 효과일 수 있다. 이 둘은 동일시될 수 없다. 「지크바르트(Sigwart, Logik, II, 3, Aufl., 1904, S.743)는, “저마다의 목적은 하나의 단지 특수한 규범으로서, 저마다의 규범은 하나의 일반적인 목적으로서 표현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목적은 규범이 아니다. 단지 하나의 규범에 부합하는 사실상의 행위만이 하나의 목적일 수 있고, 규범을 설정하는 인간이 그 규범설정으로 추구한 목적일 수 있다. 또한 하나의 규범은 목적이 아니다. 단지 규범설정행위만이 이러한 목적에 대한 수단일 수 있다. 규범에 부합하는 사실상의 행위인 목적에 대한 수단일 수 있다.」(2편 40-41쪽) |
규범을 설정하는 행위는 어떤 효과를 의도할 수 있다. 예컨대 규범설정자는 그 규범에 부합하는 행위를 유도하려는 목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존재의 차원에 속한다. 규범의 당위는 그 목적과 동일하지 않다. 규범설정행위와 그에 부합하는 사실행위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그 관계가 곧 당위는 아니다.
「무언가가 하나의 특정한 목적을 야기하는 수단으로 적합하다(geeignet)는 판단은 … 객관적인 가치판단이 아니다. … 음식에 독을 섞어 한 인간에게 주는 것은 그의 죽음을 야기하기 위한 적합한 하나의 수단이다. 하지만 이러한 목적은 도덕, 그리고 법위반이기 때문에 그 수단은 도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가치가 있을 수 없고, 그 목적이 그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비록 목적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선하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 또는 도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선한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폭군으로부터 도시(국가)를 해방시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선하다. 하지만 폭군을 살해하는 것은―모살로서―도덕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나쁜 것이다.」(48쪽)
| [미주 18] 페렐만과 올브레히츠-티테카는 수단이 목적과의 관계 속에서 평가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수단을 ‘평가한다’거나 ‘정당화한다’는 표현은, 수단이 목적 실현에 적합하다는 인과적 판단과 규범적 가치판단을 뒤섞는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은 인과적 적합성과 규범적 타당성을 동일시하는 오류로 이어지게 된다. 「만약 페렐만과 올브레히츠-티테카(Ch. Perelman-L. Olbrechts-Tyteca, Traité de l’Argumentation, La nouvelle rhétorique, 2. Aufl., Bruxelles 1970, S.371)가 “하지만 어떤 행위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평가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만약 그들이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만약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하더라도, 목적은 항상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수단의 사용은 그 자체로 비난받을 수 있거나 누군가 확보하고자 한 목적을 능가하는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372쪽)라고 제한적으로 덧붙인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valoriser’가 “하나의 가치를 부여하다.” 혹은 “무언가를 가치 있게 만든다.”를 뜻하는 것이라면, ‘valoriser’는 ‘정당화하다’와 같은 의미이다.」(2편 41쪽) 수단이 목적을 실현하는 데 적합하다는 판단은 어디까지나 인과적 적합성의 문제이다. 그것은 수단이 원인으로 기능하여 특정 효과를 산출할 수 있다는 설명적 판단이다. 그러나 ‘정당화’는 규범적 범주에 속한다. 그것은 어떤 행위가 타당한가, 허용되는가, 당위적인가의 문제이다. 인과적 적합성을 근거로 규범적 정당화를 도출하는 것은 범주 혼동이다. 목적이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그것이 수단에 규범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이유에서 “목적이 항상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표현에도 문제가 있다. 그 전제에는 역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적과 수단의 관계는 인과적 관계이지, 규범적 정당화 관계가 아니다. 수단이 목적에 적합하다는 사실은, 그 수단이 도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허용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목적의 달성 가능성과 규범적 정당성은 서로 다른 차원이다. 목적은 수단에 규범적 가치를 창설하지 않는다. 수단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과적 설명일 뿐이며, 규범적 타당성은 오직 규범의 효력에서만 도출될 수 있다. |
제3장 칸트의 가언명령
칸트는 명령을 요구(Gebot)의 언어적 형식으로 이해하며, 모든 명령은 당위를 통해 표현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언명령과 정언명령을 구분하여, i) 가언명령은 어떤 목적이 있다는 전제하에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필요성을 말하는 반면, ii) 정언명령은 목적과 무관하게 행위를 그 자체로 요구한다고 설명한다. 가령 “만약 네가 어떤 목적을 원한다면, 너는 그것을 위한 수단을 원해야 한다”는 명제는 가언명령으로서, 행위가 ‘어떤 목적을 위해’ 선하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정언명령은 행위가 ‘그 자체로’ 선하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객관적 원칙에 대한 표상은, 그것이 하나의 의지를 위해 불가결한 것인 한, (이성의) 요구라고 하며, 이 요구의 형식을 명령(Imperativ)이라고 한다. 모든 명령은 하나의 당위를 통해 표현된다.”(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Bd. IV, S.413) … “모든 명령은 이제 가정적으로 또는 정언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가정적 명령은 사람들이 얻기를 원하는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의 가능한 행위의 실제적인 필요불가결성을 상정한다. 정언적 명령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행위를, 하나의 다른 목적과 연관짓지 않고, 객관적-필수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것일 수 있다.”(S.414) … 이에 따르면, … 두 가지 명령은 그것이 이제 정언적이건 가설적이건, 목적으로서건 아니면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요구되건 간에 선한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 선한 것이고, 두 번째의 경우에는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 선한 것이다.」(1편 49-50쪽)
그러나 이 구분은 규범적 필연성과 인과적 필연성을 혼동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수단-목적 관계는 본질적으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며, 그 ‘필연성’은 인과적 필연성이지 규범적 필연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하나의 금속물질을 확장시키려고 원한다면, 너는 필히 그 물체에 열을 가해야 한다.”라는 문장, 응용자연과학의 한 원칙이고 기술의 한 원칙인 이 문장은 하나의 가언적 명령인 것이고, 그것은 하나의 당위를 표현하는 것이며, 이러한 당위는 수단과 목적 사이의 관계에 존재하는 ‘실용(실천)적인 필요불가결성’(praktische Notwendigkeit)을 표현하는 것이다. … 하지만 만약 수단-목적-관계가 하나의 원인-효과관계라면, 이러한 관련성의 ‘불가결성’(Notwendigkeit)은 하나의 인과적인 것, 필연(Müssen)이고, 하나의 명령의 의미인 당위의 규범적인 필연성과는 전적으로 상이한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이러한 차이를 간과하였다.」(1편 51쪽)
금속을 팽창시키기 위해 열을 가해야 한다는 것은 인과적 사실의 기술이다. 이는 공학적·기술적 명제이다. 그 안에서 ‘해야만 한다’는 표현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는 자연법칙의 적용이다. 그러나 규범적 당위는 이런 구조와 다르다. “너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그 자체로 요구하는 것이다.
칸트는 나아가, 목적의 도덕성 여부는 가언적 명령의 가치와 무관하다고 말한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려 할 때 약물을 사용하는 것과, 독살자가 살인을 위해 독을 사용하는 것은, 각각의 목적을 달성하는 한에서 동일한 구조를 가진다. 이 점에서 가언적 명령은 도덕적 가치와 분리된다.
「무언가가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당위되었다는 것은, 어쨌거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 목적이 당위된 경우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바로 이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마지막에 인용된 문장에 연달아, “그 목적이 이성적이고 선한 것인가의 여부는 여기서 전혀 문제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단지 무엇(was)을 필히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의 환자를 철저히 건강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의사에 대한 규정(지시)들과 그를 확실하게 살해하려는 독살자에 대한 규정들은 그 각각이 그들의 의도를 완전하게 실현하는 데 기여하는 한 동일한 가치의 것이다.”(415쪽)라고 하기 때문이다.」(1편 52쪽)
독약이 살인을 실현하는 데 적합하다는 것은 인과적 의미에서 ‘적합한 수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규범적으로 ‘해야 할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목적의 희구로부터 수단의 당위가 논리적으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만약 네가 죽이려 한다면 독을 써라”는 문장은 규범이 아니라 조건부 인과명제이다. 그것은 하나의 Müssen일 뿐, Sollen이 아니다.
| 본(Fred Bon, Über das Sollen und das Gute. Eine begriffsanalytische Untersuchung, Leipzig 1898, S.57ff.)은 “…을 하기 위하여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분석하면서, 이 질문이 규범의 내용을 묻는 것이 아니라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을 묻는 것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무엇이 의무인가?”가 아니라 “어떤 행위가 그 목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이므로, 어떤 행위가 특정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적합한 수단이라는 진술은 그 행위가 규범에 의해 요구되었다는 진술과 결코 동일하지 않다. 전자는 인과적 적합성에 관한 기술적 판단이고, 후자는 규범적 효력에 관한 판단이다. 이에 본은 기술적 당위(technisches Sollen)와 규범적 당위(normatives Sollen)를 구별하려 했으며, 수단-목적 관계를 규범적 당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조언(Rat)’과 ‘명령(Gebot)’의 구별로 설명하면서, 목적을 전제로 한 조건적 진술은 본질적으로 권고의 성격을 가지며, 모든 경우에 유효한 규범적 요구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2편 41-42쪽). 본의 이러한 기본 통찰, 즉 수단-목적 관계와 규범적 요구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은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본의 표현방식과 논리전개는 여전히 혼동의 여지를 남긴다. 특히 “ …을 하기 위하여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이 질문은 규범적 당위를 묻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을 묻는 것(Müssen)이다. 다시 말해 효과를 낳는 원인을 묻는 인과적 질문이지, 규범의 타당성을 묻는 질문(Sollen)이 아니다. 본은 비록 개념적으로는 이를 구별했지만, Sollen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혼동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2편 42-43쪽). 한편 본은 가정적 형식의 문장을 조언으로 이해하고 정언적 명령과 구별하지만, 형식만으로 규범성을 판단할 수는 없다. 도덕규범 역시 조건적 구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문장의 가정적 형식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규범의 효력을 진술하는가 아니면 인과적 관계를 설명하는가에 달려 있다. 가령 형법규범은 가정적 규범들인데, 그것을 “형벌을 피하려면 이렇게 하라”라는 조언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법의 구조를 심리적 동기 구조로 환원함에 다름 아니다. 입법자는 조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조건 하에서 제재가 당위된다고 규정할 뿐이다. 조언은 외부적 설명일 수 있지만, 그것이 곧 규범은 아니다. |
제4장 목적을 원함과 수단을 원함 사이의 논리적 관련성의 부재
I. “목적을 원하는 자는 수단을 원해야만 한다.”는 원칙
목적을 원함과 수단을 원함 사이에 논리적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칸트는 “목적을 원하는 자는 수단을 원해야만 한다”고 하여(이른바 ‘능숙함의 명령’), 목적을 원한다는 개념 안에는 이미 수단의 원함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칸트의 능숙함의 명령은 “목적을 원하는 자는 반드시 수단을 원해야만 한다”는 원칙이다. 칸트는 <도덕과 형이상학을 위한 정초>에서 “능숙함의 명령이 어떻게 가능한가는 어떠한 특별한 해명이 필요치 않다. 목적을 원하는 자는 (이성이 그의 행위들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한) 자신의 힘 안에 놓여 있는, 그(목적)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불가결한 수단을 또한 원한다. 이러한 원칙은, 원함, 즉 의지에 관한 한, 분석적이다. 왜냐하면 나의 (행위의 효과로서 하나의 대상(Objekt)을 원한다는 것에는 이미 행동하는 원인으로서 나의 인과성이, 즉 수단의 사용이 함께 고려되고 있고, 그 명령은 이러한 목적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행위들의 개념을 이미 하나의 목적을 원함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1편 54-55쪽)
그런데 이때 “이성이 그의 행위들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한”에서 말하는 이성은 실천이성, 즉 규범적 입법자로서의 이성이다. 그렇다면 칸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자는, 목적을 원할 경우 수단을 원해야만 한다.’
「‘이성이 자신의 행위들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이라는 제한은, 칸트가 목적을 원하는 자는, 필요불가결한 수단도 원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되는 이성은, 규범적인 입법자로서 실천이성이기 때문이다. ... 칸트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는 하나의 인과적 관련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목적을 원함과 수단의 원함 간의 관계를 그는 당위관계로 보았는데, 왜냐면 그는 목적을 원하는 경우에는 수단을 원함이 이성으로부터 요구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1편 55쪽)
그러나 주지하듯 인간은 비이성적으로 행위할 수 있다. 그는 목적을 원하면서도 수단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수단을 알지 못할 수도 있고, 알더라도 그것을 도덕적으로 거부할 수도 있다. 따라서 목적을 원함과 수단을 원함 사이에는 개념적 포함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두 개의 의지적 행위 사이에는 논리적 연관이 없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만약 그가 적합한 수단을 알지 못한다면, 사실상 그에 적합한 수단을 원함이 없이 목적을 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하나의 이유로, 예를 들어 그 수단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위법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수단을 사용하기를 원치 않을 수 있다. 이 수단이 의욕하는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의 수단이라면, (수단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그 목적을 계속 원한다는 것은 사실 비이성적인 것이긴 하지만, 인간도 비이성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것이고, 사실상 그렇게 비이성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전혀 낯선 일은 아니다.」(1편 56쪽)
사실 여기서는 애초에 논리적 필연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도 없다. 논리적 필연성이라는 것은 사고의 의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지 의지적 행위들 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적을 원하는’ 의지행위와 ‘수단을 원하는’ 의지행위는 모두 존재사실의 영역에 속한다. 존재사실 간에는 논리적 포함관계가 있을 수 없다.
| [미주 20] 지크바르트는 목적과 수단 사이의 관계를 단순한 인과적 관계 이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는 “목적을 원하는 자는 수단도 반드시 원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목적에 대한 사고와 수단에 대한 사고 사이에는 논리적 관련성이 있다고 본다. 즉 어떤 목적이 의지되면, 그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 역시 논리적으로 의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이 논리적 필연성이 공허한 추론이 아니라, 존재의 인과적 구조에 근거한다고 한다. 수단이 효과 있는 원인이라는 점이 인식되면, 목적이 원해지는 순간 수단의 원함도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는 또한 지크바르트(Christoph Sigwart)가 Logik, 5. Aufl., 1924, I, S.267에서 “(즉) 목적을 원하는 자는 또한 수단도 반드시 원해야만 하고, 하나의 특정한 목적의 전제된 의지·원함은 특정한 수단의 원함을 필수적으로 만든다. 우리의 원함의 대상으로서 목적에 대한 사고와 수단에 대한 생각 사이의 관련성은 하나의 논리적인 것이지만, 사고의 필연성은 존재의 알려진 인과적 필연성에 근거한다.”라고 말했다. 효과 있는 원인의 인식으로부터 “무엇이 하나의 특정 목적을 위한 수단인지가 논리적인 필연성으로 나온다는 것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목적이 원해지게 되면 바로 그 수단도 반드시 원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2편 45쪽) 그러나 지크바르트 자신도 다른 글에서는, 목적을 원한다고 해서 수단을 실현할 의지가 자동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목적을 원함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하나의 결단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의지 없이는 목적은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단의 원함은 목적의 원함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의지적 결단을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사실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논문 “Der Begriff des Wollens und sein Verhältnis zum Begriff der Ursache”, in Kleine Schriften, Zweite Reihe, 2. Aufl., Freiburg i. B. und Tübingen 1889, 170쪽에서, 지크바르트는 “행위에의 의지는 결코 의욕된 목적을 위한 수단을 고려한 순수한 논리적인 결론일 수 없다. … 목적을 원함은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하는 용기의 동인 없이는 행위의 원함에 이를 수 없다. 하나의 결단도 하나의 확정된 목적의 수행의 시작에 속한다는 것이 바로 여기서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수단을 실현할 의사(의지)는 그 목적을 원함의 논리적인 결과는 아니다.」(2편 45-46쪽) 만약 수단의 원함이 목적의 원함의 논리적 결과라면, 추가적인 결단이나 용기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 논리적 귀결이라면 자동적으로 따라야 한다. 그러나 지크바르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수단의 원함이 목적의 원함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목적과 수단 사이에는 인과적 관련성은 있을 수 있지만, 두 ‘원함’ 사이에는 논리적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회플러는 수단이 목적보다 약하게 의욕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 이 역시 수단의 원함이 하나의 독립적인 의지행위임을 전제한다. 만약 수단의 원함이 목적의 원함의 논리적 결과라면, 강도나 정도의 문제가 별도로 제기될 필요가 없다. 두 원함은 단지 두 개의 사실적 심리 상태일 뿐이며, 그 사이에는 논리적 관계가 아니라 경험적, 심리적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회플러(Alois Höfler, Psychologie, Wien 1897, S. 504)는 “그렇지만 그 ‘수단’은 항상 또한 실제적으로 그 목적 자체보다 약하게 의욕된 것이어서는 결코 안 된다.”라고 했다. 수단의 원함은 목적의 원함과 같이 하나의 존재사실이다. 하지만 두 개의 존재사실 사이에는 어떠한 논리적 관련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목적이 원해진다고 해서 수단이 논리적으로 원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목적의 원함과 수단의 원함은 각각 하나의 존재사실이며, 존재사실들 사이에는 논리적 필연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수단-목적 관계는 인과적 구조에 속하며, 의지의 논리적 구조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목적을 원하는 자는 수단을 원해야 한다”는 명제는 규범적 당위도 아니고, 논리적 필연성도 아니며, 단지 인과적 관계를 오해하여 표현한 주장에 불과하다. |
가령 ‘네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는 격언은
(1) 너는 평화를 원한다.
(2) 전쟁을 대비하는 것은 평화를 얻게 한다.
(3) 따라서 너는 전쟁을 대비해야만 한다.
라는 삼단논법을 축약한 것인데, 이는 논리적으로는 타당한 것이 아니다. (1)은 의지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고, (2)는 인과적 사실에 대한 진술인바, 존재에서 당위는 도출되지 않으므로 이 둘로부터 (3)의 규범은 도출될 수 없다(1편 57쪽).
설령 (1)을 “너는 평화를 원해야만 한다.”라는 규범으로 바꾼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술하듯, 여기서도 (3)의 규범은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Ⅱ.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원칙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명제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Der Zweck heiligt das Mittel)”가 있다. “목적을 원하는 자는 수단을 원해야만 한다”에서 목적이 의지의 대상이었다면, 이 명제에서 목적은 당위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타당하지 않은데, 설령 목적이 당위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수단의 당위를 논리적으로 산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미주 21] “목적이 합법적이면 수단도 합법적이다”라는 명제는, 목적의 허용성으로부터 수단의 허용성이 도출된다는 연역적 규칙처럼 쓰이는 수가 많지만, 본질적으로 결코 논리법칙일 수 없다. 그것은 일정한 도덕신학적 맥락 안에서 제시된 실천적 판단원칙일 뿐이다. 목적의 합법성으로부터 수단의 합법성이 논리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2편 45쪽). 홉스[Thomas Hobbes, De Cive, Capt. I, §8]는 목적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면서 수단을 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 또한 목적의 허용성에서 수단의 허용성이 논리적으로 도출된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는 자기보존권이라는 자연권을 실효성 있게 보장하려면 그에 필요한 수단도 인정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요구를 제시했을 뿐이다. 이는 논리적 필연성의 명제가 아니라, 법정책적 일관성에 대한 주장이다(2편 45-46쪽). |
가령 “너는 평화를 원해야만 한다.”와 “전쟁의 대비는 평화를 실현한다.”가 모두 참이라도, 이 둘로부터 “너는 전쟁을 대비해야만 한다.”라는 규범은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규범은 존재사실의 결합으로부터 생성되지 않으며, 오직 규범창설행위의 의미로서만 존재한다.
「“너는 전쟁을 대비해야만 한다.”라는 규범은 단지, 그 규범이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인 경우에만, 즉 그것이 하나의 규범-창출-행위의 의미인 경우에만 타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행위(규범창출행위)는 “너는 전쟁을 원해야만 한다”라는 규범과 “전쟁의 대비는 평화를 실현한다”라는 진술의 진실성이 결합한다고 해서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는 없다. “너는 평화를 원해야만 한다.”라는 규범은 창설될 수 있고, 유효할 수 있다. 그리고 “전쟁의 대비는 평화를 촉진한다.”라는 진술은 참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전쟁을 대비해야만 한다.”라는 규범은, 만약 그러한 규범이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가 아닐 때, 하나의 그러한 규범이 창설되지 않았을 때, 어떠한 실정(positive)규범이 아닐 때에는, 유효하지 않다. 그나 이러한 의지(적)행위는 하나의 논리적 연산의 방법, 즉 사고작용(Denkoperation)의 방법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1편 58-59쪽)
따라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는 논리적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과적 적합성을 가치판단으로 오해한 것이다.
「목적을 의욕(원)하는 것과 수단을 의욕(원)하는 것 간의 필연적 관련성에 대한 진술은 이로써 단지 원인으로서의 수단과 효과로서의 목적 사이의 관련성의 인과적인 필연성이 표현될 때에만 참인 것이다.」(1편 59쪽)
수단과 목적 사이에는 인과적 필연성만이 존재한다, 목적을 원함과 수단을 원함 사이에는 논리적 필연성도, 규범적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Sollen은 Müssen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제5장 실정도덕의 일반규범들과 실정법의 일반규범들
일반적으로 정언규범은 무조건적으로 의무를 부과하는 규범이고, 가언규범은 특정한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의무를 부과하는 규범이라고 이해된다.
「정언적 규범(kategorische Nomen)과 가설적 규범(hypothetische Normen)을 구별하는 것은 하나의 특정 행위를 무조건적으로 의무지워진 것으로 설정하는 규범과 하나의 특정 행위를 단지 일정 조건하에서만 의무지워진 것으로 규정하는 규범을 구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별은 개별규범(individuelle Norm)은 물론 일반규범들(generelle Normen)에도 동일하게 사용된다. 개별적인 정언규범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 파울에게 “파울, 문 닫아라!”라고 하는 명령을 들 수 있다. 하나의 가정적 개별규범으로는 “만약 네가 오늘 밖에 나간다면 외투를 걸치고 나가라!”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들 수 있다. 한 법관은 “절도범 슐체(Schulze)는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한다.”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법관은 또 “쾨르너가 마이어에게 2주 내로 1,000(마르크)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쾨르너의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이 이뤄져야만 한다.”라고 판결할 수도 있다. 일반규범들은 예를 들면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혹은 “인간은 그의 원수를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식으로 아주 자주 정언적으로 구성된다. “(금전을) 대차한 자는 합의된 시간까지 반환하여야 한다.” 혹은 “절취한 자는 처벌되어야만 한다.”라는 규범이 하나의 가설적 일반규범에 해당한다. 이런 모든 사례들에 있어서, 규범에서 당위로 설정된 행위는 조건적으로 혹은 무조건적으로 구성된다.」(1편 60-61쪽)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형식상의 차이일 뿐, 규범의 실제 효력구조를 설명하지 못한다. 규범은 그것이 표현되는 문장의 문법적 형식에 의해 성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적용될 수 있는 사실상태를 전제로 하여야만 효력을 지닌다. 즉, 규범은 항상 어떤 조건을 전제한다. 바로 이 점에서 모든 실정규범은 가언적이다.
| [미주 22] 윤리학자는 규범을 설정하는 자가 아니라 규범을 인식하고 기술하는 자일 뿐인 만큼,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은 규범창설행위(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누군가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가 아니다. 정언명령은 어떤 구체적 행위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칙의 일반성’이라는 형식만을 지니고 있다. 무언가를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도덕규범은 보편화 가능해야 한다는 형식적 조건의 진술인 것이다. 규범의 타당성을 선언하는 의지행위의 의미가 아니라 도덕규범의 보편적 형식을 설명하는 철학적 분석인 이상, ‘명령’이라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칸트가 ‘정언명령’으로 표현한 것은 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정언(범주)적으로 기술하는 일반 도덕규범은 아니다. 윤리학자로서 칸트는 하나의 도덕규범의 창설에 권한이 없다. 그가 정언명령에 관한 그의 이론을 기술하고 있는 그의 문헌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은 하나의 윤리적 논문이다. 그리고 윤리학은, 그 자신 스스로 자신의 도덕의 형이상학의 기초의 서문(칸트의 작품집, Akademieausgabe, Band IV, S. 385ff)에서 말했듯, 하나의 학문 Wissenschaft, 즉 하나의 대상의 인식, 소위 규범들의 하나의 체계로서 도덕의 인식이라고 말했다. ‘명령’으로서, 그리고 요구·명령으로서, 규범으로서, 정언명령은 단지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의 윤리학에서는 이러한 의지적 행위의 의미를 위한 자리가 없다. 칸트가 하나의 정언적 ‘명령’의 형태로 옷을 입힌 것은, 도덕의 규범들은 ‘하나의 법칙의 일반성’의 성격, 즉 보편(일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윤리학의 진술이다. 칸트 스스로도 말하기를 “하지만 내가 하나의 정언적 명령을 생각하면, 나는 즉시 그것이 무엇을 함유하고 있는지를 안다.”(같은 책, 420쪽)라고 했다. 그리고 그 정언명령이 포함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는 “하나의 법칙의 일반성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같은 책, 421쪽)라고 했다.」(2편 47쪽) |
정언적으로 구성된 규범이라 하더라도, 그 규범이 실제로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사실상태가 전제되어야 한다. 문이 이미 닫혀 있다면 “파울, 문 닫아라!”는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 그 명령은 침해될 수도, 준수될 수도 없다. 따라서 그 명령은 일정한 조건, 즉 문이 열려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또한 (개별규범으로서) 명령과 일반규범, 즉 예를 들어 “파울, 그 문들을 닫아라!”라는 개별규범 혹은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일반규범과 같이 하나의 특정한 행위가 조건적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당위된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일반규범도, 단지 조건적으로 [“하나의 개별규범 혹은 일반규범이 타당(유효)하다.”는 것은 그 규범이 준수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제할 때] 타당한 것이다. 아버지의 명령은 단지 그 문들이 이미 닫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조건하에서만 효력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 문들이 이미 닫혀 있다면―개별규범으로서―그 명령은 따를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이미 닫힌―문들을 닫지 않은 파울이 아버지의 명령을 ‘침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버지의 말은 이 사례에서 어떠한 유효한 명령이 아니다. 환언하면, 그 명령은 대상이 없는 것이다.」(1편 61쪽)
이 논리는 법적 판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정언적으로 구성된 개별 법규범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유효하다. 만약 판결의 집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면, 그 규범은 효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우리는 그 규범이 침해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침해란 준수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법관의 판단인 정언적으로 구성된 개별 법규범, “절도범 슐체는 교도소에 수감되어야만 한다.”는 규범은 단지 그 절도범 슐체가 교도소에 수감된다는 것, 달리 말해 그 규범이 준수될 수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타당한 것이다. 만약 절도범 슐체가 판결이 이뤄진 이후에, 하지만 그가 교도소에 수감되기 전에, 사망했다면, 그리고 이 개별규범이 이로 인해 지켜질 수 없다면 그 규범은 효력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물론 우리는 이러한 사례에서 그 규범이 ‘침해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법관의 판단과 같은 개별 법규범이 정언적으로 만들어진다면, 그 규범을 설정하는 권위(자)는 그 규범이 준수되거나 침해될 수 있는 조건(상황)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1편 61-62쪽)
정언적으로 구성된 일반규범조차도 조건적이다. 원수가 없는 자에게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규범은 적용될 수 없다. 따라서 이 규범은 언뜻 정언명령처럼 보이지만 실은 조건적 구조를 가지는 가언명령이다. 단지 위 문장의 형태로는 조건이 명시되지 않았을 뿐이다.
「또한 정언적으로 구성된 일반규범,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규범은 단지 (한) 인간이 (한) 원수를 갖고 있다는 조건하에서만, 즉 조건적으로만 효력이 있는 것이다. 정언규범은 한 인간이 원수가 없는 사안에서는 유효하지 않고, 따라서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한 인간이 원수가 있다면 그는 그 원수를 사랑해야만 한다.”가 된다.」(1편 62쪽)
종교규범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인간은 신의 존재를 믿어야만 한다.”와 같이 정언적으로 만들어진 일반규범조차 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 규범의 의미는 인간들이 중단 없이, 그리고 모든 상황하에서(어떤 경우에도) 신의 존재를 믿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규범은 아마 불가능한 것을 규정하는 것일 거다.」(1편 62쪽)
규범은 준수되거나 침해될 수 있는 경우에만 타당하다. 따라서 그 적용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규범은 무의미하다. 바꿔 말해, 침해가능성 없이는 효력도 있을 수 없다.
「침해될 수 없는, “인간은 죽어야만 한다.”라는 규범과 같이 자연필연적(naturnotwendig)으로 발생해야만 하는 것을 당위로 설정하는 규범이나, 준수될 수 없는 “인간은 영원히 살아야만 한다.”와 같은 자연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당위로 설정하는 하나의 규범은 무의미한 것이고, 따라서 유효한 것으로 볼 수 없다.」(1편 62쪽)
「하나의 규범은 그것이 준수될 수 있거나 침해될 수 있는 경우에만 단지 ‘타당·유효’(gelten)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규범의 준수 혹은 침해의 가능성은 그 규범의 효력의 조건인 것이다.」(1편 63쪽)
| [미주 23] 지크바르트는 금지규범은 부작위로써 항상 준수된다고 하나(Sigwart, Logik, II, 5. Aufl., 1924, S.760), 이는 타당하지 않다. 금지규범은 그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이 현실적 선택지로 존재할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규범은 행위가능성의 조건 하에서만 작동한다. 즉 “만약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형식을 가진다(2편 48쪽). |
결국 모든 실정규범은 조건적이다. 정언적 형식은 단지 문법적 외양일 뿐이다. 규범의 효력은 항상 일정한 사실상태의 존재를 전제한다. 따라서 실정도덕과 실정법의 일반규범들은 모두 가언적 구조를 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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