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한스 켈젠

켈젠 '규범의 일반이론' 강독[1] - 규범(Norm)

斧針 2026. 2. 10. 21:17

한스 켈젠(김성룡 역), 《규범의 일반이론》, 아카넷, 2016
Hans Kelsen, Allgemeine Theorie der Normen (1979)

법(철)학 필독서임에도 오래 전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으므로, <순수법학>에 이어 이 책 또한 간략하게 정리해 보려 한다. <순수법학> 2판 이후 켈젠의 변경된 견해(바이힝거의 허구이론을 받아들여 기존의 입장을 수정하고, 규범충돌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등)를 확인할 수 있다. 목차는 원저의 편제에 따라 그대로 쓰고 본문을 해설하면서 중간중간 원문을 인용하기로 한다. 번역본 기준으로 1편은 본문, 2편은 미주로 구성되어 있으나 따로따로 다루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으므로, 본문과 미주를 대응시켜 한꺼번에 서술하기로 한다. 구별하기 쉽도록 미주 부분에는 녹색 음영을 적용한다.


제1장  - 규범(Norm)

 

. ‘규범이라는 말과 그 의미

규범은 단순한 사실서술이나 상태묘사가 아니라, 어떤 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방향성을 담은 의미내용이다. 다시 말해 규범은 무엇이 있다를 말하는 개념이 아니라, ‘무엇이 있어야 한다를 말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 해야 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명령이나 강제만을 뜻하지 않는다. 규범 개념은 그보다 훨씬 넓은 기능을 포괄한다.

「‘규범’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표현, norma에서 나온 것이고, 독일어에서는 차용어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이 단어는 결코 전적으로 그런 의미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선적으로 하나의 요구(계명), 하나의 지시(규정), 하나의 명령(지시)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요구(명령)하다는 것이 그 규범의 유일한 기능은 아니다. 수권하다, 허용하다. 폐지하다는 것도 그 규범의 기능이다.」(1편 25쪽)

다시 말해 규범을 명령으로 환원하려는 사고는 거부되어야 한다. 규범은 명령일 수 있지만, 명령만은 아니다. 법규범을 예로 들면, 어떤 행위를 반드시 하라고 요구하는 규범만큼이나, 특정 행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규범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어떤 행위가 허용된다는 것을 선언하는 규범, 혹은 기존의 의무를 제거하거나 제한하는 규범 역시 규범질서의 필수적 요소이다. 이로써 규범은 단순한 강제 규칙이 아니라, 행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허용과 금지를 함께 구조화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다양한 종류의 규범

인간 사회에는 도덕규범과 법규범이 존재하며, 이들은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규범체계로 기능한다. 이때 도덕이나 이라는 말은 단일한 규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규범들의 집합, 다시 말해 하나의 체계를 가리킨다. 문제는 논리학의 경우이다. 전통적으로 논리학의 원리들, 예컨대 모순율이나 추론 규칙이 규범인지 여부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우리는 인간의 상호간의 행위에 대한 규정들로서 도덕규범들, 법(의)규범들을 말하고,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가 ‘도덕’ 혹은 ‘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규범의 집합 혹은 규범체계인 규범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또한 사고를 위한 규정으로 논리학의 ‘규범들’을 말한다. 하지만 논리학의 원칙들, 예를 들면 모순율·무모순성의 원칙이나, 추론규칙과 같은 것들이 규범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 학문으로서의 논리학은 윤리학이나 법학과 마찬가지로 규범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생각은 논쟁거리이다.」(1편 26쪽)

윤리학이나 법학이 규범을 다룬다는 사실 때문에, 이 학문들이 마치 규범을 창설하는 것처럼 이해되는 경향이 발생한다. 그러나 학문은 본질적으로 인식 활동이지, 의지적 행위를 통해 규범을 만들어내는 활동이 아니다. 만약 논리학이 사고의 규범을 창설하는 학문이라면, 논리학은 더 이상 인식학문일 수 없게 된다.

「만약 우리가 도덕규범과 법규범과 같이, 사고의 규범, 논리규범이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논리학’이라는 표현으로 하나의 학문은 물론 그 학문의 대상도 표현하는 것이고, 혹은 우리가 논리학(학문) 자체가 사고의 규범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고, 창설setzen하는 것으로, 즉 사고의 특정한 유형을 요구·명령하는 규정을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논리학이라는) 학문에 주어진 대상의 인식(깨달음)Erkenntniss으로서 학문이라는 본질과 조화되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는,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윤리학이라는 학문을 그의 대상인 도덕과, 법학이라는 학문을 그의 대상인 법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고, 규범들을 단순히 그들에게 주어진 대상으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을 설정하고 규정을 만드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양자를 ‘규범적’ 학문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1편 26-27쪽)

 

.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 규범

규범은 단순한 문장이나 명제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의지행위가 갖는 의미내용이다[1]. 어떤 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고 의욕하거나 의지했다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규범은 항상 의지와 연결되어 있으며, 의지 없는 규범은 개념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이로써 규범은 자연적 사실이나 인과관계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방식을 갖게 된다.

「‘규범’이라는 단어(말)가 하나의 규정, 하나의 명령을 표현하는 한, ‘규범’은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 혹은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규범의 언어적 표현은 명령Imperativ이거나 당위문Soll-satz이다. 그 의미가 모종의 것이 명령되었다 혹은 지시되었다는 행위는 하나의 의지적 행위Willensakt이다. 요구된 것, 지시된 것, 명령된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의 특정한 인간의 행위이다.」(1편 27-28쪽)

[미주 1]

만약 ‘행위’와 ‘의미’를 구별하지 않는다면, 규범은 심리적 사건이나 물리적 사건으로 환원될 위험에 놓인다. 리케르트 역시 이 둘의 구별을 철학적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

「행위와 그 행위의 의미를 구별해야 할 필요성은 리케르트(Heinrich Richert)가 Vom Begriff der Philosophie, Logos, Bd. I, 1910, S.19ff.에서 언급했다. 물론 거기서 리케르트는 그 의미가 하나의 규범인 행위, 즉 규범창설행위Norm-Setzungs-Akt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고, 그 행위로) 하나의 대상이 평가되는 행위로부터 출발했다.」(2편 9쪽)

여기서 ‘의미’란 언어표현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 행위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규범의 의미’라는 표현은 두 가지 차원의 뜻을 가질 수 있는바, 하나는 i) 규범을 담고 있는 문장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ii) 규범을 생산한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다. 이 둘을 구별하지 않으면, 해석의 문제와 존재방식의 문제가 혼동된다.

「브로블레브스키(Jerzy Wróblewski)는 “The Problem of the Meaning of the Legal Norm, Österreichische Zeitschrift füröffentliches Recht, Neue Folge, Bd. XIV, 1964, S.253ff.에서 법규범은 하나의 의미(meaning)라는 관점을 거부했다. 브로블레브스키는 “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규범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의무지워진 행위를 사전에 기술한 것으로서 받아들이면서 규범의 의미라는 문제를 다루어야만 한다.”고 했다(S.261).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사람들은 하나의 의미로서―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규범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한 하나의 규범의 의미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규범의 의미는 규범이 모습을 드러내는 언어적인 표현이 분명하지 않을 때 문제가 된다. 이 규범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은, 규범 해석의 목적인 것이다. 브로블레브스키 스스로도 “법해석(Legal Interpretation)은 적용될 규범이 문제되는 사례를 판단할 만큼 충분히 명백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법해석을 수단으로 해서 우리는 문제되는 규범의 의미 흠결·결손(deficiencies)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263쪽)고 했다. 이러한 ‘해석’은 ‘무엇이 도대체 규범으로 이해될 수 있는 단어의 의미인가?’라는 물음에 답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규범의 의미―는 사람들이 규범을 생산한다. 낳는다erzeugen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의지적 행위의 의미와는 다른 것이다. 후자에서는 단지 규범은 그것의 의미, 즉 이러한 의지적 행위의 의미(목적)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2편 9쪽)

i)에서는 해석, 즉 언어표현의 의미를 확정하는 작업이 문제된다. 그것은 적용의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반면 ii), 즉 규범이 의지적 행위의 의미라는 점은 해석 이전의 구조적 진술이다. 다시 말해 규범의 의미를 해석한다고 해서, 규범이 의지적 행위의 의미라는 명제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석은 그 의지적 의미가 언어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이다.

 

. 근원적 범주로서 당위

당위는 경험적 사실이나 심리적 상태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범주를 이룬다. 규범은 무엇이 있다를 설명하지 않고, ‘무엇이 있어야 한다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그 존재방식 자체가 사실의 존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규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과적 설명이나 경험적 관찰이 아니라, 의미와 당위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당위는 이미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이 그의 <도덕학입문(Einleitungin die Moralwissenschaft)>에서 말했듯이, 존재와 같이 하나의 ‘근원적인 범주’이고, 사람들이 무엇이 존재인지에 대해 거의 기술할 수 없듯이, 당위의 개념정의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의미(목적)가 규범인 의지적 행위는 사람들이 규범이 그 행위로 인해 ‘생산’erzeugt되었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규범이 창설되는 행위이고, 규범제정행위Normsetzungsakt이다.」(1편 28-29쪽)

[미주 2]

당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이지만, 그것을 더 기본적인 개념으로 환원하여 정의하려는 순간 곧바로 난관에 부딪힌다. 당위는 사실적 존재와 구별되는 차원의 개념이며, 그 자체로 더 이상 분해되기 어려운 의미구조를 지니기 때문이다. 짐멜(George Simmel)과 시지웍(Henry Sidgwick) 역시, 당위는 다른 개념의 조합으로 구성된 파생적 개념이 아니라 그 자체로 더 분해될 수 없는 기본개념이라고 보았다. ‘존재가 더 이상 정의될 수 없는 개념이듯, ‘당위 역시 정의불가능한 개념인바, 이 점에서도 규범은 사실적 개념이나 심리적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짐멜(George Simmel)은 Einleitung in die Moralwissenschaft, Berlin, 1892, S.8에서 “당위에 대한 개념정의는 없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시지웍(Henry Sidgwick)도, The Methods of Ethics, London, 1963, S.32에서 “동일한 근본적인 개념(fundamental notion)을 표현하는 ‘당위’, ‘옳은(권리)’, 그리고 기타의 용어들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개념)정의를 줄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나는 이러한 용어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개념은 너무나 기본적(elementary)이어서 어떠한 형식적 (개념)정의도 인정하기 어렵다고 말해야만 한다.”고 했다.(2 10-11)
 
폰란텐은 당위를 존재와 동렬의 근원적 개념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당위는 시원적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당위를 어떤 상위개념 아래에 포섭하려는 시도를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결국 당위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꿔 설명하거나, 또다른 당위를 전제한 채 설명하는 순환에 빠지게 된다. 당위는 그 자체 정의의 대상이 아니라, 규범이론을 구성하는 근원적 전제이자 기초적 단위일 수밖에 없다.

이미 내가 Hauptprobleme der Staatsrechtlebre(1911)라는 나의 책 7쪽에서 짐멜로부터 넘겨받은 주장, 즉 당위에 대한 개념정의는 없다.’라고 주장한 것에 반대하여 폰란텐(Albert Vonlanthen)은 나를 반박하는 데 초점을 맞춘 그의 비방글(“Zu Hans Kelsens Anschauung über die Rechsnorm”, Schriften zur Rechtstheorie, Heft 6, Berlin, 1965)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당위라는 것은 결코 존재와 같이 하나의 그렇게 시원적인 개념을 만들 수 없고, 따라서 어떠한 개념에도 (하위요소로) 포섭될 수가 없다.”(46) 하지만 폰란텐이 당위의 개념정의로 내놓은 것은, 내가 나의 대답인 “Rechtswissenschaft oder Rechtstheologie?”, Österreichische Zeitschrift für öffentliches Recht, Bd.XVI, 1966, S. 233ff에서 표현했듯이 당위는 당위라는 공허한 순환논증에 빠져들고 있다.(2 11)

규범의 생산이란 물리적 생성이 아니라 의미의 성립을 뜻한다. 규범은 어떤 사실이 발생함으로써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규범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적 행위를 통해 성립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규범이 의지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의지행위의 의미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규범은 심리적 의욕이나 주관적 결단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가 갖는 객관적 의미내용이다. 이로써 규범은 자연적 사실과 구별되는 독자적 실존방식을 갖게 된다.

「물론 하나의 규범은 단지 의식적으로 규범의 생산에 향해진 의지적 행위를 통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관습을 통해서, 즉 인간들이 사실상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곤 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생산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한다.」(1편 29쪽)

 

. 규범의 효력

규범이 의지적 행위를 통해 성립한다고 해서, 곧바로 경험적 사실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규범은 효력(Geltung)’이라는 특수한 존재방식을 가진다. 규범이 효력을 가진다는 것은 그 규범이 타당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자연적 사실의 존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실존이다. 규범은 어떤 사실이 발생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위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한다.

「이런 방식으로 혹은 저런 방식으로, 즉 창설행위를 통해서 혹은 관습을 통해서 규범은 효력을 갖는다. 만약 우리가 ‘하나의 규범이 효력이 있다.’in Geltung treten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의 규범이 존재한다는vorhanden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효력’은 그 규범에 특이한 실존(존재방식) Existenz이며, 자연적인 사실의 존재, 그리고 특히 그것을 통해 규범이 생산되는 사실의 존재와는 구별되어야만 한다.」(1편 29쪽)

규범은 사실적 행위와 마찬가지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존재는 당위적 존재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당위에는 명령뿐만 아니라 수권, 허용, 폐지까지 포함된다. 규범질서 전체는 이러한 다양한 당위규정들의 체계로 구성된다.

「우리가 저마다의 모든 규범이 하나의 ‘당위’를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단어는 모든 가능한 규범적 기능(명령한다. 수권한다. 허용한다. 폐지한다)을 포괄하는 것이다.」(1편 30쪽)

 

. 규범의 준수, 침해 및 적용

규범은 단지 존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준수되거나 침해되며, 나아가 적용된다. 그러나 모든 규범이 동일한 방식으로 준수되거나 침해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특정 행위를 요구하는 규범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준수되거나 침해될 수 있다. 한편 규범은 준수 여부와 무관하게 적용될 수도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규범의 효력과 실효성이 구별된다. 규범의 존재는 그것이 사실상 얼마나 지켜지는가와 동일시될 수 없다.

「하나의 특정 행위를 요구하는 규범은―그리고 단지 그런 규범만이―준수되거나 침해될 수 있다. 물론 하나의 규범은 단지 준수(혹은 비준수, 즉 침해)되는 것만이 아니고 적용될 수도 있다.」

도덕규범은 승인과 비승인을 통해 적용되며, 법규범은 강제적 제재를 통해 적용된다. 중요한 것은 규범이 적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그 규범의 효력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규범은 준수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규범일 수 있으며, 다만 그 경우에는 적용을 통해 그 효력이 현실화된다. 이로써 규범의 효력과 사실적 준수는 개념적으로 분리된다.

「하나의 규범이 준수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준수되지 않을 때는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에 바로 규범의 효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규범의 특이한 실존(현존의 방식: 존재)인 것이다. 규범이 사실상 준수되었다는 것, 그리고 만약 준수되지 않으면 적용된다는 것에 그 규범의 실효성이 있다. 규범의 효력(타당성)과 실효성은 명백하게 구별되어야만 한다. 존재하기 위해서는―즉, 타당하기 위해서는―그 규범은 하나의 의지적 행위를 통해 창설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이러한 원칙을 적어도 ‘명령자 없이는 명령 없다(Kein Imperativ ohne einen Imperator)’, ‘명령을 발하는 자 없이는 명령 없다(Kein Befehl ohneeinen Befehlsgeber)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이, 규범창설적인 의지적 행위 없이는 규범은 없다(Keine Norm ohne einen normsetzenden Willensakt).」(1편 30-31쪽)

 

. ‘규범통상적인 것

규범 개념은 일상언어에서 흔히 통상적인(normal) 과 혼동되곤 한다. 규범은 본질적으로 당위의 영역에 속하지만, ‘통상적이라는 표현은 존재의 영역에 속한다. 어떤 일이 보통 그렇게 일어난다는 사실은 그것이 그렇게 일어나야 한다는 규범적 명제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 사고에서는 흔히 반복되는 사실이 곧 정당화된 규범인 것처럼 오인된다. 이 지점에서 존재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오류가 발생한다.

「Norm(규범)이 그 형용사인 normal(통상적인)로 표현되는 한, 그것은 당위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이다. 즉 normal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실적으로 일어나는 것·발생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Normal이라는 표현으로 하나의 당위가 표현되는 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일어나곤 하는 것이 또한 일어나야만 한다, 특히 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행위하곤 하는 것과 같이 행위해야만 한다는 규범의 효력을 전제한다.」(1편 31쪽)

「이러한 관점에서 표현되는 것은 ‘의무’와 ‘하곤 한다’, ‘늘 …하곤 한다’라는 단어들이 상호유사하다는 것이다. 무언가 통상 사실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으로부터 또한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이 도출된다는 것은 오류이다. 하나의 존재로부터 논리적으로 하나의 당위가 도출될 수는 없다. 단지 효력 있는 하나의 규범이, 일반적으로 일어나곤 하는 것이 또한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1편 31-32쪽)

[미주 3]

통상적인 것에서 규범적인 것으로의 전이는 수사학과 논증이론 속에서도 반복되어온 사고방식이다. 가령 페를망(Ch. Perelman)과 올브레히츠-티테카(L. Olbrechts-Tyteca)는 논증의 장소(loci) 가운데 가장 빈번한 것이 바로 보통 그러하다는 사실에 기초하는 추론임을 인정한다. 이들은 통상성(normalité)이 논증의 설득력 있는 기반으로 작동해왔음을 분석하면서, 존재에서 당위로의 전환이 실천적 담론에서 자주 암묵적으로 승인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승인과 실제 논리적 타당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논증에서 자주 사용된다는 사실은 그것이 논리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페를망과 올브레히츠-티테카는, (Traité de l’Argumentation. La nouvelle rhéthroque, 2. Aufl., Bruxelles 1970, S.118을 비교할 것) “가장 자주 일어나는 것, 보통의 것, 통상적인 것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loci(논증의 장소)의 하나의 주제이고, 따라서 (너무나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난 것으로부터 일어나야만 하는 것으로, 통상적인 것으로부터 규범으로 나아가는(전환하는 것은 아주 자명한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위 저자들은 “보통(normal)으로부터 규범적인 것(nomatif)으로의 변환은, 정당하게도, 논리학에서의 하나의 오류(faute)로 간주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역(분야)이 고려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변환이 암묵적으로 승인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논증들의 유효한 기초들의 하나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그것의 흔적은 사람들이 … 하곤 한다(man pflegt)라는 의미에 가까운 독일어의 의무(Pflicht)라는 단어에 남아 있다. 이러한 통상적인 것에서 규범으로의 변환은 통상적으로 발생하는 것의 하나의 현상이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통상적인 것에 대한 규범의 우위를 주장하며 그것들을 해체시키고 그에 반대하는 것은 논증에 의한 정당화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 논증은 대부분 양의 그것보다는 다른 논증의 장소(loci)를 사용함으로써, 통상적인 것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고 확언했다(S.118f.).」(2편 11-12쪽)
 
존재에서 당위로의 전이는 한편으로는 논리학적으로 오류로 간주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설득력 있는 기초로 기능해왔다. 만약 논증이 엄정한 논리적 절차라면, 오류는 곧 무효를 의미한다. 반면 논증이 수사학적 설득의 절차라면, 논리적 오류일지라도 실천적으로는 효력을 가질 수 있다. 논리적 타당성과 수사학적 유효성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하는바, 규범이론은 수사학적 설득이 아니라 논리적 정합성의 문제이다.

「저자들이 확정했듯이 ‘통상적인 것에서 규범적인 것으로의 전이’(la passage du normal au normatif à juste titre)가 하나의 논리적인 오류(faute de logique)라는 것이 통상적인 것에서 규범적인 것으로의 이동·전이가 ‘논증의 유효한 기본요소 중에 하나’라는 것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논증’(argumentation)이라는 것으로 하나의 엄정한 논리적인 절차가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것과는 상이한, 저자가 표현한 바와 같이(259쪽), 단지 하나의 ‘유사논리적인’(quasi-logisch) 절차가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2편 12쪽)
 
존재에서 당위를 도출하는 전이가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음은 흄의 고전적 통찰을 통해 재차 확인된다. 모리츠(Manfred Moritz)가 지적하듯, 이미 흄은 도덕이론에서 있다에서 해야 한다로의 전환이 아무런 설명 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문제삼은 바 있다. 이는 단순한 형식적 비판이 아니라 도덕과 법의 논리구조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다. 규범은 존재명제의 연장선에서 도출될 수 없으며, 별도의 전제가 필요하다. 이 전제는 바로 당위명제이거나 명령문이어야 한다.
 
「모리츠는 “Der praktische Syllogismus und das juridische Denken”, Theoria, vol. XX, 1954, S.78f.에서, 이미 데이비드 흄은 자신의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문, II장(Theodor Lipps에 의해서 번역된, Leipzig, 1923, S.211f.)에서 “당위문’은 ‘존재문’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사고를 표현했다고 지적했다. 모리츠는 “오늘날 사람들은 아마도 명령문은 직설(존재)문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만약 사람들이 당위문들’을 판단들(Urteile)로 파악하더라도, 흄의 논거는 그대로이다. 무엇이 ‘존재한다’, ‘있다(etwas ist)’는 것을 확인하는 문장으로부터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한다’라는 것이 확인되는 문장들이 도출될 수는 없다. 하지만 흄의 논거는 사람들이 ‘당위문’을 ‘명령(문)’으로 해석하는 경우에도 타당하다.”라고 했다.」(2편 12쪽)
 
흄은 도덕이론에서 무심코 이루어지는 있다에서 해야 한다로의 전환을 비판하며, 그 전환이 설명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규범적 관계는 존재적 관계와 질적으로 다르며, 전자의 도출은 후자의 확장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흄은 A Treatise of Human Nature, vol.II, London, 1962, S.177f.에서 “내가 지금까지 만난, 도덕성의 모든 체계에서, 저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은 통상적인 논증의 방식으로 진행하고, 그리고 신의 존재를 확립하고, 혹은 인간사와 관련한 관찰을 한다고 나는 항상 논평해왔는데, 그때 나는 내가 갑자기 ‘있다’와 ‘있지 않다’라는 명제(진술)들의 통상적인 결합 대신에, 나는 ‘해야만 한다.’ 혹은 ‘해서는 안 된다.’로 결합되지 않은 명제는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이 변화는 감지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결론이다. 이러한 해야만 한다(ought), 혹은 해서는 안 된다(ought not)로써 무언가 새로운 관계 혹은 확신(affirmation)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것은 관찰되고 설명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이유(reason)가 주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떻게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들로부터의 연역이 될 수 있는지,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러한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때, 나는 독자들에게 그것을 추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사소한 주의가 모든 저속한 도덕성의 체계들을 뒤집어놓게 된다는 것을 믿고 있고, 선과 악의 구별은 단순히 대상들의 관계에 기초하는 것도 아니고 이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도록 하자.”라고 했다.」(2편 13쪽)
 
삼단논법에서 결론이 명령문이 되기 위해서는 전제 중 적어도 하나가 명령문이어야 한다. 존재명제만으로 구성된 전제로부터는 존재명제만이 도출된다. 따라서 규범을 정당화하려면 이미 규범적 전제가 필요하다.
 
「모리츠는 계속해서, “동일한 생각은 푸앵카레(Poincaré)에서도 등장한다. 하지만 푸앵카레는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즉 그는 사람들은 명령들을 판단들로부터 도출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주장에, 사람들은 명령문을 단지 명령문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주장을 추가했다.”고 했다. 푸앵카레는 “만일 삼단논법의 전제가 양자 모두 직설문이라면 결론도 마찬가지로 직설문(진술)이 될 것이다. 결론이 명령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전제 중 하나가 명령이었어야 한다.”라고 했다.」(2편 13쪽)

어떤 행위가 일반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은 그 행위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정도덕이나 실정법은 오히려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행위를 금지할 수도 있다. 따라서 대개 그렇다는 사실은 규범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규범은 오직 효력 있는 규범을 통해서만 성립한다.

「무언가 통상 사실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으로부터 또한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이 도출된다는 것은 오류이다. 하나의 존재로부터 논리적으로 하나의 당위가 도출될 수는 없다.」(1편 31쪽)

[미주 4]

일상언어에서는 흔히
이 상황이 그런 행위를 요구한다거나 이 사실이 의무를 낳는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러한 표현은 마치 사실상태 자체가 규범을 산출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를 낳는 언어관용이다. 사실상태는 결코 의무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이미 유효한 규범이 적용되는 조건일 뿐이다.

 
「(그에 따를 때) 하나의 특정한 사실상태가 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요구한다’고 하는, 하나의 특정한 사실상태로부터 특정한 의무가 나온다고 하는, (혹은) 하나의 특정한 사실상태는 특정한 의무의 근거라고 하는 언어관용은 하나의 특정한 사실상의 사실상태(sachlage)에는 인간행위의 특정한 규범들이 내재하고 있다는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이건 특유한 자연법적인 전제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언어관용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요구하는, 이러한 행위를 해야 할 의무의 근거는 실제 사실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태(관계)는 단지 하나의 조건, 즉 (그 조건하에서) 유효한 것으로 전제된 하나의 규범이 하나의 특정 행위를 당위된 것으로 설정하는 조건, 명령하는 조건인 것이다.」(2편 18쪽)
 
규범은 사실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규범은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 유효하게 전제된 상태에서만, 특정 사실상태를 조건으로 삼아 작동한다. 사실이 의무를 만드는것이 아니라, ‘유효한 규범이 특정 사실을 조건으로 삼아 의무를 설정하는것이다. 만약 사실이 의무의 근거라면, 윤리학은 자연과학과 동일한 인식학적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없다.

어떤 상황이 특정 행위를 요구한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하나의 도덕규범이 전제된다. 상황 자체는 아무런 도덕적 요구를 생산하지 않는다. 도덕규범이 그 상황을 특정 방식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요구가 비로소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의무)이 “도덕적으로 요구된다.”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도덕규범이 이러한 의무를 구성(확립하고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이러한 도덕규범은 상황에 내재적인 것이 아니다.」(2편 19쪽)

 

. 규범의 실정성

실정규범이란 의지적 행위가 존재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 그 의미로서 성립한 규범을 가리킨다. 규범은 객관적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제정행위를 통해 성립한 것이다. 따라서 도덕실증주의나 법실증주의는 규범의 내용이 옳으냐 그르냐의 판단 이전에, 무엇이 학문의 대상이 되는 규범인가를 선결한다. 규범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의지적 설정을 통해 성립하며, 자연이나 이성 그 자체가 규범을 산출한다고 봄은 타당하지 않다.

「존재의 현실(존재하는 현실)Seinswirklichkeitchkeit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규범은 실정(적) 규범Positive Norm이다. 도덕실증주의Moralpositivismus 혹은 법실증주의Rechtspositivismus의 관점에서는 단지 실정적인, 즉 의지적 행위를 통해서 만들어진, 그리고 인간의 의지적 행위를 통해서 제정된 규범만이 인식의 대상으로 고려될 뿐이다.」(1편 33쪽)

규범을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 파악하는 한, 의지적 행위를 떠난 규범은 개념적으로 불안정해진다. 인간의 의지적 행위로부터 벗어난 규범을 상정하면, 규범이 인간행위의 의미가 아니라 사고행위의 의미이거나, 혹은 초인간적 의지의 의미로 이동한다. 그 이동은 곧 규범이론을 형이상학으로 끌고 가며, 법학·윤리학을 인식학문으로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인간의 의지적 행위를 통해서 만들어진 규범들은―그 단어의 본질적 의미에서―하나의 자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즉, 어떤 행위라도 그 규범 안에서 당위지워진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자의’에서 나오지 않는 규범들이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활동의 의미가 아닌 규범개념에 이르게 된다. 즉 무언가 하나의 ‘행위’의 의미가 아니거나, 사고-행위Denk-Akte의 의미거나, 또는 의지적 행위의 의미가 인간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가 아니라 초인간적인 의지적 행위인 경우에는, 특히 신적인 의지적 행위의 의미인 경우에는 인간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가 아닌 규범이라는 개념에 이르게 한다.」(1편 33쪽)

 

. 소위 자연법의 규범들

a) 자연에서의 의지

자연법론에 따르면 규범은 인간의 제정행위를 거치지 않고도 자연 속에 내재하거나 자연의 질서에 의해 정초되어 타당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은 존재사실과 과정들의 총합일 뿐이며, 그에 대한 인식은 있다라는 서술을 넘어설 수 없다. 자연에서 있다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로부터 있어야 한다가 논리적으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연법론은 결국 존재와 당위의 구별을 흐리거나, 그 구별을 지우기 위한 추가 전제를 몰래 도입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자연법론은 규범이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신학적 가정에 의존하는 설명체계로 흐르게 된다.

「도덕규범 또는 법규범들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는데 그것이 타당(유효)하기 위하여 (반드시) 어떠한 하나의 행위를 통해 창설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규범들은 현실에·‘자연’에 주어져 있기 때문에, 자연에 내재하기 때문에, (혹은) 직접적으로 타당하거나gelten 직접적으로 효력을 발생하는 규범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규범들의 효력은 마치 인과적인 자연법칙의 효력과 같이 거의 ‘자의적’이지 않다. 그 규범들의 효력은 그 규범들을 규정하는 행위의 주체들의 의지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도 아니며, 그 규범을 제정하는 하나의 주체의 의지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1편 34쪽)

[미주 5]

i) 뷔르첼
(Karl Georg Wurzel)의 입장은 자연법적 사고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법규범이 사실에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자체에 내재한다고 본다. 이는 법을 자연법칙과 유사한 구조로 이해하는 사고이다. 법이 사회적 현실의 자연법칙이라면, 법은 사회적 사실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창설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에 내재하는 법이라는 사고는 결국 존재에서 당위를 도출하는 전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뷔르첼(Das juristische Denken, Wien 1904, S.32)이 주장하기를, 실제 (적어도 높은 정도로) “법규정들은, 마치 예를 들어 운동법칙이 물체에 내재하는 것과 같이, 그것이 연관된 사실들에 내재하는 것이고, 그 외부에서 덧붙여진 재갈과 같은 것은 아니다.”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법규범은 일정 정도까지 사회적 발전의 자연법칙들이다.”(31쪽)라고 했다. 이것이 자연법론이다. 하지만 뷔르첼은 자연법론을 거부했다. 자연법론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이 ‘현실의 심사’Probe der Wirklichkeit를 통과할 수 없었다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현실은 그것이 이러한 법적 사고의 결과들과 지속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서 그것의 결점을 증명했다.”(32쪽) 하지만 옳게 인식된 현실에 ‘내재하는’ 하나의 규범도 현실에서는 침해될 수 있고, 달리 말해 한 인간의 사실상의 행위도 그러한 하나의 규범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2편 14쪽)
 
설령 규범이 현실에 내재한다고 하더라도, 현실 속 행위는 그 규범을 위반할 수 있다. 그런데 위반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사실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은 위반될 수 없다. 운동법칙은 침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규범을 사실에 내재한 자연법칙과 동일시하는 것은 개념적 혼동이다.
 
ii) 노스롭(F. S. C. Northrop)의 논의는 자연과학의 발전이 법의 형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그는 특히 원자에너지의 발견이 법의 기초를 뒤흔들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법의 개념을 잘못 전제하고 있다. 법은 자연과학적 세계상에 따라 존재하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법은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규범체계이지, 자연에 대한 기술이 아니다.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변한다고 해서, 살인금지규범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노스롭은 The Complexity of Legal and Ethical Experience, Boston and Toronto 1959, S.8ff.에서, 현대 자연과학의 발전은 특히 원자에너지의 발견은 법의 형상에 중요한 반작용을 불러일으켰다고 혹은 일으켜야만 했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지금까지의 법이 전제했던 자연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과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자연 혹은 보다 정확히는, 우리가 자연에 대해 가지고 있는 표상은 원자에너지의 발견을 통해 본질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이, 이미 원자력의 발견 이전에 이미 존재하던 우리들의 자연에 대한 표상·생각(Vorstellung)은 고대 그리스의 것과는 아주 본질적으로 상이한 것들이었다는 점이다. 전기의 발견은 원자력의 발견에 못지않게 자연과학에 본질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었다. 인간들이 적어도 하나의 정해진 그룹의 인간들이 서로 해악을 가하는 것을 막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는 법은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들이 상호 칼로, 총으로, 전기력으로 혹은 원자력을 이용하여 서로 상처를 주고 살해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동일한 것이다. 법은 바로 다른 사람의 일정한 이익을 침해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 특히 타인을 살해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고, 이것은 항상 어떤 방식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법규범은 단지 일정한 제한하에―예를 들어 정당방위, 제재들과 같이―효력이 있다는 것은 여기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는다. 노스롭은 “원자력시대에 계몽된 사람들은 그야말로 전쟁을 할 형편이 못된다.”(10쪽)라고 했다. 하지만 원자에너지가 발견되기 아주 오래전에 전쟁은 국제법상 금지되었었다. 단지 제재들의 형상과 관련하여, 자연에 대한 점증하는 통찰이, 제재 그 자체로서 단지 목을 매달거나 물에 빠트리는 것만이 아니라, 총격과 전기의자의 사용, 혹은 원자력의 사용이 명령될 수 있음으로써, 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이것도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원자력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목매닮을 통한 사형(교수형)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2편 14-15쪽)

법이 좋은가의 문제는 자연과학적 진리에 얼마나 부합하는가가 아니라, 설정된 목적을 달성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노스롭은 법을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정한 지식에 맞추어 평가하려 하나, 법학은 자연과 인간을 기술하는 학문이 아니다. 법은 규율이며, 행위의 방향을 제시하는 체계이다. 법을 자연과학적 명제와 동일선상에서 평가하는 것은 범주의 오류이다.

「자연과학에서의 최근의 발견들이 법에 미치는 본질적인 파급효과로 노스롭은 자연법을 통한 실정법의 대체를 들었다(12쪽 이하). 거기서 그는 법에 대한 유지될 수 없는 개념정의와 자연법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는 “법은 다른 사람과 자연과 관련한 인간의 배치(ordering)이다. 법은 만약 그것이 이러한 인간(존재)을 다른 사람과 자연에 대하여 무엇이 인간이고 자연인지에 대한 진실한, 그리고 가능한 한 완전한 지식의 관점에서 명령한다면 좋은 것이다. 법은 그것이 무례(naughty)하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고, 자연에 대하여 인간들을 배치함에 있어서 법이 진정한 과학적 지식이 인간과 자연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밝히고 있는 것에 반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짜 맞추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11쪽)라고 했다.」(2편 15쪽)
 
자연법은 자연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투사된 것일 뿐이다. 자연법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화되기 위해 자연이라는 권위를 빌릴 따름이다. 자연법론자는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자연에 귀속시켜 객관화한다. 그러나 이는 규범의 근거를 자연적 사실에 두는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존재의 법칙이지, 당위의 법칙이 아니다.

「노스롭이 구성한 자연법은 본문에서 언급되었듯이 자연에 내재하는 규범들의 체계이고, 자연의 의지에 의해 창설된 규범들의 체계이다. 그러한 법은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우리가 ‘자연법’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한 자연법론자 혹은 다른 자연법론자에게 정당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고 그가 그에게 필수적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자연’에 투사한projizieren 것이다. 노스롭은 “... 이러한 자연법(jus naturae)은 문언적으로, 물리학에 의해서 실증된 자연의 법으로서, 그 본래의 그리스와 로마 스토아학파의 의미에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12쪽)라고 했다. 이러한 ‘자연의 법’은 사실상의 소여Geschehen의 법으로서, 즉 존재의 법으로서 자연법이고, 무엇이 일어나야만 하는가를, 특히 인간은 어떻게 행위해야만 하는지를 규정하는 규범으로서 자연법이 아니다. 실정법을 자연법을 통해 대체하거나 혹은 보완한다는 주장은, 물론 노스롭 스스로 확언한 것과 같이, 이미 고대의 그리스에서, 즉 원자력의 발견보다 아주 오래전에, 제기되었고, 거부되었던 것이다.」(2편 16쪽)

법실증주의는 정의를 실정법과 동일시하는 이론이 아니다
. 오히려 법과 정의를 구별하는 이론이다. ‘살아 있는 법이라는 개념도 실정법과 대립되는 별도의 차원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것이 법이 되기 위해서는 적용기관의 승인과 적용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살아 있는 법 역시 실정법의 일부로 편입된다.

「마찬가지로 노스롭의 법에 대한 정의와 자연법의 본질에 관한 그의 입장과 같이 잘못된 것은, 그가 자연법론을 통해 대체되기를 원했던 법실증주의에 대한 그의 이해이다. 44쪽에서 그는 “법실증주의는 정의의 문화적 규범들이 순전히 실정적 법적 헌법, 법률, 코드와 제도 그 자체라는 측면에서 발견되고 이해되는, 아마도 경찰권력 혹은 강제력에 의해서 보완되는 그런 이론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그는―법사회학자 에를리히(Eugen Ehrlich)를 따라―실정법(52쪽)에 ‘살아 있는 법’(living law)을 대치시킨다. 물론 이것은 자연법을 통하여 실정법을 대체하자는 자신의 요구와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법학(즉 에를리히의 법학)의 핵심은 실정법과 살아 있는 법 사이에 하나의 구별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법’은 실정법의 법규, 코드, 그리고 사례들과 구분되는, 사회에서의 사람들의 행위에 깔려 있는 내적인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살아 있는 법’이라는 에를리히의 이론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가 “실정법은 그것이 관계하는 사회의 살아 있는 법에 상응하여야만 하고, 실정법은 그렇게 부합하지 않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54쪽)라고 설명한 것에서 추론된다.」(2편 16-17쪽)

[법실증주의 이론은
, ‘정의의 규범들’(norms of justice, Normen der Gerechtigkeit)을 단지 실정법에서만 찾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와 완전히 반대로, 그것은, 아주 분명하게, 실정법과 정의를 상호 구분하는 것에 있다. 실정법은 법실증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헌법과 법률들에서 포함된 규범들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법규·관례들’(codes)은 규정들과 제도들이고, 규정의 하나의 특정한 대상과 관련하여 일체를 이루는 법규범들이다. 관습의 방법으로 생성되는 규범들도 실정법에 속한다. 에를리히에 의해 각인된 ‘살아 있는 법’이라는 개념에 관한 한, 그의 실정법과의 구별은 유지되기 어렵다. ‘사회에서 사람들의 행위의 내적 질서’는 이 내적 질서가 법적용기관들로부터, 특히 법원들로부터, 적용되지 않는 한 ‘법’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러한 내적 질서는 습속 혹은 도덕으로서 타당할 수 있으나, 이에 권한 있는 법기관의 적용을 통해서만 법이 되는 것이다. 소위 ‘살아 있는 법은 법률적 법과 관습법이라는 실질적으로 특정된 일반규범들과는 구별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법적용기관들이 ‘유효한 법적 법 또는 관습법을 통해 수권을 받아야만 한다. 단지 그들에 의해 적용된 ‘살아 있는 법이 기판력이라는 실정-법적 원칙을 근거로 법이 되는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 이것으로부터, 소위 ‘살아 있는 법은, 그것이 법이라면, 실정법의 구성부분이라는 것이 도출되고, 따라서 양자의 구별 혹은 심지어 하나의 다른 하나에 대한 대립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된다.」(2편 17-18쪽)

자연법론은 규범의 객관성을 자연법칙의 객관성과 유비시키려 한다. 그러나 자연법칙의 객관성은 인과적 규칙성의 객관성이고, 규범의 객관성은 당위의 타당성이라는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다. 자연은 존재사실의 복합체인바, 그에 대한 인식은 결코 당위를 말할 수 없다. 설령 특정 조건에서 특정 결과가 일반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더라도, 그 결과가 발생해야 한다거나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명제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자연법론이 말하는 자연에 내재한 규범은 자연을 규범의 원천으로 만들기 위해 자연 속에 의지를 집어넣는 가정을 필요로 한다. 그 가정은 결국 신의 의지이다.

「자연은 존재사실(Seins-Tatsachen)과 사실적인 과정(경과)들의 복합체이다. 이러한 대상에 향해진 인식은 단지 무언가가 존재한다·있다고만 말할 수 있으며,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심지어 특정한 조건들 아래에서는 항상 혹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결과가 사실상 발생한다는 것이 확정된다고 하더라도, 특히 특정한 생명체는 특정한 조건들 아래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한다는 것이 확인된다고 하더라도, 특정한 조건들 아래에서 이미 관찰된 그러한 결과들이 발생해야 한다거나 발생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거나, 마치 그들이 사실상 그렇게 행위하곤 하거나, 혹은 일반적·통상적으로 그렇게 행위하곤 한다는 것과 같이, 특정한 생명체는 특정한 조건들 아래에서는 그렇게 행위해야만 한다거나, 그렇게 행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미 강조했듯이 무언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부터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거나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도출될 수는 없다.」(1편 35쪽)

b) 자연에서 신의 의지

규범이란 특정 행위를 당위로 규정하는 의미내용이고, 그 의미내용은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만 성립한다. 따라서 자연이 규범의 원천이 되려면 자연이 의지를 갖는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자연은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 자연법론은 자연 속에 내재한 의지를 다른 방식으로 확보해야 한다. 그 결과 자연법론은 신의 의지라는 신학적 전제로 넘어가게 된다.

「자연을 규범들의 원천으로 간주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연에 무언가Dinge의 특정한 행위, 그리고 특히 생명체의 하나의 특정한 행위에 향해진 의지가 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연법의 규범들은 하나의 특정한 인간의 행위를 당위된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에 맞춰진 하나의 의지여야만 한다. 하지만 그 자연은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그(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 속의 신의 의지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Moralphilosophie(Bd. 1. 6. Aufl., Leipzig 1924, S.565)에서 자연법을 실정법의 필수적인 기초로서 다음과 같이 근거지운 카트라인(Victor Cathrein)과 같은 신학자들에게 동의해야만 한다: ‘누가 인간 공동체에 혹은 인간(정부)당국에 우리를 의무 지우는 법을 주었는가?’ 그는 그 답은 단지 ‘자연 자체 혹은 보다 더 (분명하게는) 자연의 창조자’일수밖에 없다고 했다.」(1편 35-36쪽)

자연에 규범이 있다는 말을 유지하려면, 자연에 의지가 있다는 명제를 채택해야만 한다. 그런데 자연이 의지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 의지는 자연의 창조자인 신에게로 이행한다. 자연법론이 객관성과 비자의성을 주장할수록, 그 객관성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신적 의지의 객관성으로 재기초된다. 따라서 자연법론은 법이론이나 도덕이론의 내부 논증만으로 자립하기 어렵고, 형이상학적·신학적 전제 위에서만 자신의 정당화를 완결한다.

「죙엔(Gottlieb söhngen)은 자연법을 신이 인간본성에 쓴 법이라고 표현했다(Grundfragen einer Rechtstheologie, München 1962, S.24f.). 이것은 형이상학적·신학적 전제조건이며, 이것 없이는 자연법론은 가능하지 않으며, 자연법론은 이것과 존망을 함께하는 것이다. 자연법의 최종 원천은 신의 의지이다. 자연법의 규범들은 신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다. 신이라는 존재가 이성으로, 즉 사고 Denken로서 간주된다면, 자연법의 규범은 그러한 신의 사고-행위 Denk-Akte의 의미이거나 신의 생각 속에 함유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규범들은 신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거나 그 신의 의지 속에 함유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신에 있어서는 사고가 의지와 일치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신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알고 있는 한, 신은 선한 것은 존재해야만 한다고 의욕할 수 있고, 악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원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은 이미 인식의 나무(선악과)에 관한 신화에서 표현되었다.」(1편 36쪽)

c) 이성-법으로서 자연법: 단순히 생각된 규범

자연의 자리를 인간의 본성으로 옮기고, 인간의 본성을 다시 이성으로 동일시하면, 자연법은 이성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성은 본래 인식능력·사고능력이지, 규범을 생산하는 의지능력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성법이 말하는 규범은 의지된 규범이 아니라 생각된 규범이 될 수밖에 없다. 생각된 규범은 결국 허구적 의지행위의 의미로만 성립한다.

「자연법의 규범들이 그 속에 내재하는 자연이 인간의 본성이고, 우리가 인간의 본성을 -동물의 본성과는 구별하기 위해 인간의 이성에서 찾는다면, 자연법은 이성법Vernunftrecht으로 등장한다. 이성은 사고능력과 인식능력이기 때문에 이성법의 규범들은 사고행위의 의미로서 표현되고, 그 규범은 의지된 것이 아니고 생각된gedachte 규범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사고 속에서의―실정적인, 즉 실제 의지적 행위를 통해 창설된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규범들이 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단순히 사고된 규범들은 사고행위의 의미가 아니고, 존재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며, 우리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모든 가능한 것을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듯이, 우리가 생각한 것, 상상한 의지적 행위의 의미인 것이다.」(1편 36-37쪽)

결국 이성법은 언뜻 신의 의지를 제거한 듯 보이지만, 결국 규범을 성립시키기 위해 다시 의지를 호출한다. 다만 그 의지는 현실에서 존재하는 의지가 아니라, 사고 속에서 가공된 의지, 다시 말해 허구적 의지로 호출된다. 이성법이 아무리 생각된 규범을 말하더라도, 그 규범은 결국 함께 생각된 의지행위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나는 어떠한 권위(있는 기관)에 의해서 제정되지 않았고, 그 의미가 현실에 존재하는 어떠한 실제의 의지적 행위가 아닌 하나의 규범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규범을 단지 내가 동시에(함께) 생각한mitgedachte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규범을, 비록 그 규범이 사실상 제정되지 않았으며 그 의미가 규범인 어떠한 의지적 행위가 없었음에도, 마치 그 규범은 하나의 권위(있는 기관·당국)로부터 창설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권위 있는 기관의 의지적 행위가 가공된다고fingiert 하더라도, 규범을 창설하는 권위 없이는 규범은 없다고 하는 기본원칙은 여전히 고수되는 것이다. 단순히 사고된 규범(생각 속의 규범)은―하나의 현실적인 의지적 행위의 의미인 하나의 실정규범과 구별한다면―하나의 (꾸며낸) 허구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다. 아주 일반적으로 표현한다면―비록 단지 가공된 것이라고 하더라도―하나의 의지 없이는 당위 없다.」(1편 37쪽)

[미주 6]

후썰
(Edmund Husserl)은 당위를 의지와 무관한 의미로 이해하려 한다. 그는 당위가 반드시 명령이나 요구와 연결될 필요는 없으며, 가치판단의 형식으로도 성립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전사는 용맹해야만 한다.’라는 문장에서 보이듯, 당위는 누군가의 의지 표현이 아니라 객관적 가치판단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후썰은
, Logische Untersuchungen, 5. Aufl., Tübingen 1968, 1. Band, 40쪽 이하에서 의지와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하나의 당위의 의미에 대해 확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예를 들면 ‘너는 나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X는 나에게 와야만 한다.’와 같이, 하나의 모종의 원함 혹은 의지함. 하나의 요구 혹은 명령에 관계된 당위의 원래 의미는 주지하다시피 너무 좁다.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아무도 요구하는 자가 그곳에 없어도, 경우에 따라서는 또한 요구를 받는 자가 아무도 없어도 하나의 요구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종종 누군가의 바람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하나의 당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사는 용맹해야만 한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우리 또는 그 밖의 누군가가 이것을 원한다. 혹은 의욕한다. 명령한다 또는 요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전사는 용맹해야만 한다.’는 것은 오히려, 단지 용감한 전사가 좋은 전사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2편 19-20쪽)

 
그러나 가치판단도 그 자체 특정한 규범을 전제한다. ‘용감한 전사가 좋은 전사이다라는 판단이 객관적으로 타당하려면, 이미 전사는 용맹해야 한다는 규범이 유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판단은 단지 주관적 선호에 불과하다. 즉 가치판단의 객관성은 규범의 효력을 전제로 한다. 후썰이 말하는 의지와 무관한 당위는 사실상 가공된 권위의 의지를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그의 예는 오히려 규범이 의지적 행위의 의미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확인해줄 뿐이다.
 
「만약 그 당위가, 하나의 의지(의욕)에 관계하지 않고도, 하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보다 정확히는, 하나의 의미일 수 있다면―, ‘누구도 요구하는 자가 그곳에 없음’에도 우리가 요구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또한 그 의미가 규범인 어떠한 의지적 행위가 없는 경우에도 하나의 규범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물론 실제로 요구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요구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치 누군가 요구하는 자가 그곳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의 단순히 상상된, 가공된 요구자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요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2편 20쪽)
 
후썰은 당위문을 하나의 판단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것은 참이거나 거짓이어야 한다. 그러나 전사는 용맹해야만 한다.’가 참이 되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러한 내용을 규정하는 유효한 규범이 존재할 때뿐이다. ‘전사는 겁쟁이여야만 한다.’가 거짓인 이유도, 이를 규정하는 규범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당위문의 진리조건은 규범의 효력에 달려 있다.
 
「”전사는 용감해야만 한다.”라는 문장은 후썰에 따를 때(42쪽), 하나의 판단. 즉 ‘규범적 형태의 판단이다. 그것이 하나의 판단이라면, 반드시 진실 혹은 거짓(비진실)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 “전사는 용맹해야만 한다.”는 판단이 참인가? 그것은 단지 도덕 혹은 법적 권위자에 의해 창설되었을 때만, 혹은 관습의 방법에서 발생한, 전사는 용감해야만 한다는 것을 규정하는 규범이 유효할 때만 참인 것이다. “전사는 겁쟁이여야만 한다.”라는 판단은 그것을 규정하는 규범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거짓이다. 하지만 하나의 규범은 단지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만 효력이 있는 것이다.」(2편 21쪽)
 
의지와 무관한 당위란 있을 수 없다.

d) 실천적 이성 개념

인식능력으로서의 이성은 규범을 만들 수 없고, 규범을 만들려면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성이 규범을 입법할 수 있다는 주장(도덕적 입법자로서의 이성), 이성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의지로서 기능하는 경우에만 성립한다. 칸트가 말한 실천이성이 바로 그러한 성격을 갖는다. 실천이성이론은 결국 종교적·형이상학적 사변과 결합되어 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의 인식능력 혹은 사고능력이기 때문에, 소위 이성법의 규범들은 이성을 통해서 창설될 수 없다. 이성을 수단으로 해서 우리는 권위자의 의지적 행위를 통해서 만들어진 규범을 인식할 수 있고, 개념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규범들을 창출할 수는 없다. 도덕적 입법자로서 이성은 칸트적 윤리학의 핵심개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은 칸트에 따르면 실천이성praktische vemunti이고, 이 실천이성은―신의 이성과 같이―사고이면서 동시에 의지이다.」(1편 38쪽)

[미주 7]

플라톤적 이데아론의 영향 아래에서는 개념이 사고의 규범으로 이해되며
, 더 나아가 존재의 원형으로까지 격상된다. 그러나 규범은 사고의 기능이 아니라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다. 개념이 사고의 질서를 정립한다는 사실이 곧 개념이 규범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구별이 무너지면 규범은 존재론적으로 사고의 산물로 환원된다.

 
「규범은 개념과 같이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법칙’이라는 개념 및 다른 개념들도 있는 것처럼 ‘규범’이라는 개념도 있다. 하지만 ‘규범’이라는 개념은 쉴리크(Moritz Schlick)가 “Fragen der Ethik”, Schriften zur wissenschaftlichen Weltauffassung, Bd. 4, Wien 1930, S.11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개념’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종종 그 개념에는 하나의 규범적 기능이 인정되고, 개념은 규범으로서 기술된다. 이것은 플라톤적 형이상학적 이데아(론)의 특징적인 한 요소이다.」(2편 22-23쪽)
 
라인홀트(E. Reinhold)의 사례는 이 형이상학적 경향을 잘 보여준다. 그는 개념을 사고의 질서규범이자 구성규범으로 이해하며, 더 나아가 신의 창조행위의 원형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여기서 개념은 인간의 활동을 지도하는 규범일 뿐 아니라, 절대자의 의지와 결합된 원형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는 순수한 플라톤주의이다. 개념이 사고의 구조를 제공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규범이라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규범은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지, 사고의 형식이 아니다.
 
「라인홀트는 자신의 글 Theorie des menschlichen Erkenntnisvermögens, Gotha und Erfurt 1832, S.98에서 말하기를, 개념들은 “우리의 표상·생각(Vorstellen)을 위해서 부분적으로는 필수적인 질서(조직·정돈)규범들(Ordnungsnomen)이며, 이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사고소재를 분야별로 분류하고 각 분야의 고유한 것들을 하나의 유일한 개별표상에서 유지한다. 부분적으로는 필수적인 구성규범(Bildungsnorm)으로, 반드시 이 구성규범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사례들에서 개별적인 대상들에 대한 생각(표상)들을 구상해야만 (윤곽을 그려야만)한다.” … 라인홀트는 System der Metaphysik, Jena 1842, S.324에서, 개념이 그것으로 표현되는 규범들에 대해서 “자신의 사고에 포함된 규범들의 그(정신)에 의해 생각된 합목적성과는 다른 어떠한, 그리고 그보다 더 높은 법률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는 정신은 자연활동성을 조종한다.”라고 말했다. 신의 생각에 함유된 개념들은 규범들이다. 신의 사고의 규범들과 기능들, 그것은―물론―동시에 의욕(원함)이다.」(2편 23-24쪽)

이성으로 규범을 만든다는 명제는, 이성이 인식만 하는 능력이라는 통상적 의미를 유지하는 한 성립하지 않는다. 그 명제가 성립하려면 이성 자체가 의지여야 하고, 결국 신적 이성과 동형의 구조가 필요해진다. 규범을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 이해하는 틀 안에서, 이성법의 규범 생산론은 끝내 형이상학적 토대를 요구하게 된다. 그 결과 이성법은 세속적 자연법처럼 보이더라도, 존립 구조는 자연법론과 같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조금 더 자세하게 고찰하면, 인간에서의 신의 이성, 신에 의해서 자신의 모습과 동일하게 만들어진 것Ebenhild으로서 인간이 참여하는 신의 이성인 것이다. 또한 규범을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서가 아니고 사고행위의 의미로서 파악하고자 한 이성법이론 내에서 이뤄진 시도도 형이상학적·종교적인 사변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와 존망을 같이하는 것이다.」(1편 38쪽)

[미주 8]

규범은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관념적 존재이다
. 그러나 그것이 사고내용이라는 뜻은 아니다. 규범은 사고의 의미가 아니라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다. 따라서 규범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그것이 곧 사고의 산물이라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당위를 그에 대응하는 의지주체를 명시하지 않고도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규범이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우리는 규범을 그 창설행위로부터 추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규범의 인식가능성은 그것의 존재론적 독립성을 의미하지 않는다(225-26).

 

. 개별규범과 일반·보편규범

규범의 개별성은 수신자가 한 사람인지 다수인지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당위로 설정된 행위가 일회적·특정적인지, 아니면 반복 가능하고 일반적인지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특정인에게 향한 규범이라고 해서 곧바로 개별규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일한 개인에게 향해진 규범이라도, 그가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할 행위를 정한다면 그것은 일반규범의 성격을 가진다.

「규범은 개별적 성격 혹은 보편적·일반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다. 하나의 규범은 만약 일회적이고 개별적인 특정 행위가 당위된 경우라면 개별적인 성격을 가진다. 절도범 슐체는 1년간 구금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법관의 판결이 그 예이다. 하나의 일반적인 특정 행위가 의무 지워진 것으로 만들어졌다면 그 규범은 보편적인 성격을 가진다. 모든 절도범은 구금형에 처해져야만 한다는 규범이 그 예이다.」(1편 38-39쪽)

[미주 9]

모리츠
(Manfred Moritz)는 불특정 다수에게 향해진 명령을 일반적 명령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일반성이 단지 수신자의 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명령이 개별적으로 특정된 사람에게 향해졌더라도, 그 내용이 일반적으로 규정되어 있고 반복적 적용을 전제로 한다면, 그 명령은 일반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일반성은 수신자의 범위가 아니라 명령내용의 구조와 적용방식에서 나온다.

 
모리츠(Manfred Moritz, “Der praktische Syllogismus und das juridische Denken”, Theoria, vol. XX, 1954, S.88)는 특정되지 않은 다수의 사람에 향해진 것을 ‘일반적 명령’generelle Imperative이라고 표시했다. 하지만 또한 이름이 언급된, 즉 개별적으로 특정된 사람에게 향해진 하나의 명령도, 만약 그 명령된 행위가 개별적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정해진 경우라면, 즉 명령이 애당초 제한되지 않은 수의 사례들에서 개별적으로 정해진 명령수신자들에 의해서 준수되어야만 할 때는, 일반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다.」(2편 26쪽)
[미주 10]

규범의 개별성과 일반성은 수신자의 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 인적 요소와 물적 요소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특정되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행위주체와 행위내용이 모두 일회적·구체적으로 특정될 때 그 규범은 개별적이다. 반대로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추상화되면 일반성이 개입한다. 이때 일반성은 단절적 구분이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기에, 스펙트럼상 다양한 유형이 존재할 수 있다.

「일반적인 성격의 정도는 다양할 수 있다.
1. 아버지는 자신의 세 아들 B, C, D에게 “지금 학교에 가라!”고 명령한다. …

2. 한 하사관이 일렬로 선 20명의 군인들에게 “세 명 앞으로!”라고 명령했다. …
3. 교황이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특정한 날에 특정한 시간에 하나의 특정한 기도를 신에게 하라고 명령했다. …
4. 모든 사람들은 그가 한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
5. 모든 사람들은 예수가 규정한 것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
6. 사람은 무언가(어떤) 하나의 권위(자)가 규정한 대로 행위해야만 한다. …
만약 그 행위의 인적 요소뿐만 아니라 물적 요소가 구체적으로, 달리 말해 개별적으로 특정된 한 인간의 일회적인 행위로서 당위된 것으로 설정된 경우에 하나의 규범은 개별(인)적인 것이다. … 규범 6은 하나의 규범의 최고의 일반적 성격을 보여준다. 규범 6은, 나중에 보다 상세하게 특징지워질, 하나의 실정 도덕질서와 법질서의 근본규범의 예이다. 규범 1부터 5까지는 개별적인 규범과 최고도로 일반적인 규범 간의 다양한 중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2편 26-27쪽)
 
특히 6번 규범은 어떤 권위가 정한 대로 행위해야 한다는 형식으로, 행위내용을 전혀 특정하지 않는다. 이는 구체적 행위규범이 아니라 규범창설권위에 대한 복종을 정식화한 규범으로서 근본규범의 전형이다. 일반성의 극단은 특정 행위가 아니라 권위의 명령형식 그 자체에 대한 당위이다.

일상적으로는 개별적 요구를 명령이라 부르고 일반적 요구를 규범이라 부르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개념적 필연이 아니다. 규범에 본질적인 것은 특정 행위가 당위로 설정되었다는 점이며, 그 설정은 개별적으로도 일반적으로도 가능하다. 따라서 규범이 반드시 일반적이어야 한다는 견해는 언어관용이나 통상적 사용에서 비롯된 오해일 수 있다. 그 오해는 다시 통상성논의와 맞물리면서, 존재규정으로서의 정상/통상을 규범성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규범이 하나의 일반적인 성격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 규범을 당위-규정Soll-Regel으로 표현한다. 단지 이러한 경우에만 ‘규범’이라고 말하는 것, 즉 일반적인 성격을 규범이라는 개념을 위해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근거지워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의 규범에서 본질적인 것은 하나의 행위가 당위된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물론 개별적인 방식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1편 40쪽)

[미주 11]

‘rule of law’
라는 표현은 때로는 단순히 일반적 법규범을 가리키지만, 법정책적 이상이나 자연법적 요구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예도 많다. 이 경우 그것은 실정법의 기술이 아니라, 실정법을 평가하는 초실정적 기준이 된다.

 
「‘규칙’(Regel)은 영어에서는 ‘rule’이다. ‘법적 규칙’·‘법규’(Rechtsregel)는 영어에서 ‘rule of law’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단지 실정법의 일반적인 규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표현은 또한 모종의 법 정책적인 명제(요구, Postulate)를 위해 사용된다. 그런 식으로는 마시(Norman S. Marsh)가 그의 논문 “The Rule of Law as a Supra-National Concept” in Oxford Essays in Jurisprudence, edited by A. G. Guest, Oxford 1961, S.223에서 “보다 최근에는 … 법의 지배는 사실상 그중에서도 … ‘문명화된 국가에 의해 인정된 법의 일반원칙’들과 공통점이 많다.”라고 말했다.」(2편 27-28쪽)
 
여기서 ‘Rule of Law’는 국제법적 일반원칙과 연결되며, 일종의 보편적 법이념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용은 이미 실정법의 기술을 넘어선다. 그것은 합법성, 법원의 독립, 법 앞의 평등, 기본적 자유 보장과 같은 이상적 요구를 포함한다. 이 경우 법의 지배는 특정 규범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법질서가 충족해야 할 가치적 기준을 표현한다. 자연법적 사고인 것이다.

「대부분 ‘법의 지배’(Rule of Law)라는 공식의 사용은―이로써 실정 법률의 하나의 일반규범이 표현되는 것이 아닌 한―자연법적인 이상으로 귀결된다. 하나의 규범적 강제행위는 단지 그것이 ‘법의 지배’(Rule of Law)로서 표현된 요구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법’으로서 유효하다는 것이다.」(2편 28쪽)
 
타멜로(Ilmar Tammelo)의 논의는 이를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Rule of Law’‘Rule of Reason’으로 대체하려 하며, 법의 유효성을 이성적 기준에 종속시킨다. 그러나 이성이나 공익과 같은 개념은 고도로 평가적이고 주관적이다. 만약 실정법의 구속력이 이러한 가치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면, 법질서는 안정성을 잃게 된다. 이는 자연법론 혹은 이성법론의 반복이며, 실정법의 효력을 상대화하는 위험을 내포한다.
 
「‘Rule of Law’의 공식의 법정책적인 특성에 대한 특징적인 내용은 타멜로(Ilmar Tammelo)의 에세이 “The Rule of Law and the Rule of Reason in International Legal Relations”, Logique et Analyse, Nouvelle Série, 6 Année, 1963, 335쪽부터 368쪽에서 볼 수 있다. … 타멜로는 … “그것은 법을 따르는 것이, 심지어 악법(dura lex)인 경우에도, 우리의 의무라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것이다. 법을 따를 도덕적 의무는 단지 그것의 명백하고 언어도단적인 불합리성과 우리가 필수적이고 없어서는 안 될 공익의 요구로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이름으로 도전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공익’(common good)이라는 개념은 고도의 주관적인 가치판단을 암시한다.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에서 ‘공익으로 간주되는 것은 자본주의자의 관점에서는 바로 그 반대로 판단된다. 타멜로는 주지하다시피, reason은 이성이며, 무엇이 ‘공익’인가에 대한 대답을 준다고 전제한다; (이것은) 이성법으로 표현되는 자연법의 전형적인 환상이다. 타멜로는 불가피하게 ‘이성이라는 단어는 모호하고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것’(358쪽)이라고 고백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합리성은 국제법을 구성하는 요소’(362쪽 이하)라고 설명했다. 즉 만약 한 국가의 관습 혹은 국가 간의 계약을 통해 생겨난 실정 규범이, 이 규범을 따르거나 혹은 적용해야만 하는 주체의 생각에 따를 때 ‘합리적이지 않다면, 즉 ‘이성적’이지 않다면 그 규범은 이러한 주체로부터 구속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말이다. 365쪽 이하에서는 “근본적인 정당화가 법적 정당화로 흘러들어가거나, 법적 정당화를 무시(능가하는 지점들이 있다. 합법성보다는 반드시 더 높은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고려들을 지적함으로써 법은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데 반해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 있는 예들이 있다.”라고 한다. 여기서 고려되는 관계는 이성에 대한 관계이고, 즉 법에 종속된 주체들이 ‘이성’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한 관계인 것이다. 이것은 법실증주의에 반대하는 자연법이론 혹은 이성법이론이고, 이것들은, 만약 그것이 사실상 적용된다면, 필시 완전한 무정부(Anarchie)상태에 이르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2편 29-30쪽)
[미주 12]

왈리스왈피츠
(Mieczyslaw Wallis-Walfisz), 규범은 언제나 일반적이어야 하며, 일회적으로 소멸하는 명령은 규범이 아니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수행과 동시에 효력을 상실하는 명령은 단지 개별적 지시일 뿐이고, 반복적 적용 가능성을 갖는 것만이 규범적 문장이다. 그러나 이 일반성이 규범성의 본질이라고 볼 이유가 없다.


「하나의 규범은 필수적으로 일반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의 가장 전형적인 주장자는 왈리스왈피츠(Mieczyslaw Wallis-Walfisz, “Les enonces des appreciations et des normes”, Studia Philosophica, vol.II, 1937, S.421ff.)이다. 그는 “즉각적인 성격을 가지며, 그것이 수행이 되는 순간 바로 그 효력이 상실되는 명령들과는 달리, 규범들과 그 진술들, 규범적 문장들은 항상 일반적 특징을 가진다. ‘네 우산을 챙겨라.’라는 조언은 규범적 문장이 아니다. 그에 반해 중국 고사 ‘비록 날씨가 좋아도 우산을 휴대하라.’는 규범적 문장이다. ‘피에르는 산책가야 한다.’라는 진술은 규범적 문장을 구성하지 않지만, 우리가 ‘피에르는 매일 산책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규범적 문장이 된다.”라고 했다.」(2편 30쪽)
 
개별 명령이 이행으로써 그 효력을 잃는다는 점을 들어 그것이 규범이 아니라고 한다면, 일반규범 역시 모든 적용 가능 사례가 소멸하면 효력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예컨대 피에르는 매일 산책해야 한다는 일반규범도, 피에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적용조건이 사라지면 효력을 상실한다. 따라서 일반성은 규범성의 본질적 기준이 될 수 없다. 규범의 본질은 반복성이나 지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당위로 설정하는 의미형식에 있다.
 
「만약 규범들이 하나의 일반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에 대한 근거가 하나의 개별 명령은 만약 그것이 준수되면 그 효력을 잃는다는 것이라면, 이에 대해서는 또한 하나의 일반규범도 그것이 준수될 수 있는 모든 사례들에서 실제로 준수되었다면 그 효력을 잃는 것이고, 따라서 그 일반규범이 효력을 발하는 조건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2편 31쪽)
[미주 13]

명령하다’(befehlen)요구하다’(gebieten)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며, 그 언어형식은 명령문이나 당위문이다. 그러나 일상 언어에서는 명령이라는 말이 개별적 지시에 한정되어 사용되거나, 반대로 일반적 명령규칙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용어상의 구별이 본질적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명령의 형식이 아니라 그 일반성의 정도이다.

 
「‘명령하다’(Befehlen)는 ‘요구(명령)하다’(Gebieten)와 같은 의미이다. 이들의 언어형태는 하나의 명령문 혹은 당위(요구)문이다. … 종종 우리는 ‘명령’(Befehl)이라는 단어―영어에서는 ‘command’―를 개별적인 ‘명령’(Imperative)에 제한하고, 일반적인 ‘명령’을 ‘규정·규칙들’(Regeln)로 표현한다. 그렇게 메이요(Bernard Mayo)는 “… 특별한 명령들(imperatives)은 명령들(commands)이고 일반적인 명령은 규칙들(rules)이다.”라고 말했다.」(2편 31쪽)
 
선생이 학생에게 지금 앞으로 와라라고 말하는 것과 매일 85분 전에 교실에 와라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명령이다. 전자는 개별적 명령이고, 후자는 일반적 명령일 뿐이다. 이를 각각 명령규칙으로 부르는 것은 용어상의 선택에 불과하다. 규범의 본질은 특정 행위를 당위로 설정하는 데 있으며, 그것이 일회적이든 반복적이든 규범성 자체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 규범과 규범의 수신자(수범자)

규범이 향하는 대상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특정한 행위이다. 따라서 규범의 수신자라는 개념은 인격적 주체를 규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당위로 설정된 행위가 누구의 행위인가를 표시하는 개념이다. 이 관점에서는 규범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기술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방향을 설정하는 형식적 구조로 이해된다. 규범의 수신자를 논하는 것은 규범과 행위의 결합방식을 논하는 것이며, 규범이론의 중심이 행위에 놓여 있음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이다.

「하나의 규범이 한 인간에게 ‘향해졌다’gerichter는 것은 한 인간의 그 행위 Verhalten가, 즉 한 인간의 행위가 당위되었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 그 (인간의) 존재와 그 행위의 총체로 그 인간 자체가 아니라, 그 규범이 관계하는 하나의 특정한 인간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 규범은 한 인간들의 하나의 특정한 행위 또는 일정한 수의 인간 혹은 불특정 다수의 인간들의 하나의 특정한 행위를 당위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한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41쪽)

규범은 어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이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따라서 규범의 수신자란 당위 구조의 논리적 자리, 즉 당위가 귀속되는 행위주체의 자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때 수신자 개념은 도덕철학에서 흔히 등장하는 인격론적 전제나 실체적 인간관을 요구하지 않는다. 규범이론은 그러한 전제로부터 분리되어 형식적·구조적 분석으로 정련되어야 한다.

「‘규범의 수신자’NomAdressat라는 것은 규범에서 당위된 것으로 규정된 행위는 하나의 인간의 행위, 즉 한 인간의 행위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1편 41쪽)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