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불레즈

피에르 불레즈 [4] - <노타시옹(Notations)>

GENA 2017. 2. 23. 11:19

불레즈가 파리음악원에서 메시앙의 수업을 들을 시절 메시앙은 항상 정규 수업과는 별도로 불레즈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수업에서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 바르톡의 작품들을 가르쳤다. 또한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였던 라이보비츠는 불레즈에게 쇤베르크와 베베른의 작곡법들과 메시앙의 잘 알려지지 않은 습작들을 연구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불레즈는 이들의 가르침을 종합하여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섰다.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은 그와 같은 가르침들을 흡수하여 탄생한 대표적인 초기 작품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불레즈는 서른 살이 되던 해인 1955년, 제2차대전 세대들 중 가장 명철하고도 비타협적인 작곡가이자 음악적 전통 그 자체에 대한 무용론과 허무주의로 무장한 문제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950년대의 불레즈.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불레즈의 작곡가 겸 지휘자로서의 위상은 더 확고해졌다.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바이로이트 축제의 중추로 자리매김했고, 1960년대에는 바그너의 <파르지팔>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했으며 1976년에는 <니벨룽의 반지> 전곡 사이클을 완성하기도 한다. 또한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음악/음향연구소(Institut de recherche et de co-ordination acoustique-musical, "IRCAM")를 설립하기도 했다. IRCAM은 1960년대에는 프랑스 내에서의 음악교육과 연구자료가 모이는 중심기관이 되었고, 1970년대부터는 작곡에 필요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역할도 맡음과 동시에 컴퓨터 음악을 대중에 소개하는 데에도 앞장서게 된다. 또 IRCAM의 자체 악단인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Ensemble InterContemporain)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현대음악 연주단체가 되었다.

1967년,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파리 내의 전문연주자들이 모여 샤를 뮌쉬(Charles Munch)를 상임으로 한 파리 오케스트라(Orchestre de Paris)가 설립되었다. 대규모의 단일화된 악단을 조직하여 음악가들을 한데 묶어두는 것보다는 각 연주자들이 따로 자유분방하게 창조적인 음악활동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겼던 불레즈는 파리 오케스트라의 설립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당국과 뮌쉬의 합작으로 파리 오케스트라가 발족하자 불레즈는 화가 나 한동안 객원지휘조차도 거부하다가, 1970년대에 절친한 친구인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 음악감독으로 발탁되면서 앙금을 풀게 된다.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된 바렌보임은 불레즈에게 피아노 작품 <노타시옹(Notations)> 중 제1곡부터 제4곡까지를 관현악곡으로 편곡해 줄 것을 부탁했다. <노타시옹>은 과거에 불레즈가 1945년 파리음악원에서 메시앙의 제자로 공부하던 시절 작곡한 것으로, 메시앙의 작곡기법과 프랑스 전통음악의 색채를 조화시킨 12개의 습작이었다. 1948년 초연된 이후 40년 동안 단 한번도 연주되지도 출판되지도 않았고, 불레즈 자신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작품이었다.

위촉을 받은 불레즈는 학생 시절의 습작을 지금에 와서 대규모의 관현악곡으로 개작할 수 있을까 우려했지만,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4천년 된 씨앗을 땅에 심었는데 싹이 났다는 기사에 용기를 얻어 편곡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사실 환경은 나쁘지 않았다. 뉴욕 필하모닉과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라는 두 대형 관현악단들의 수장으로 활동하면서 복잡한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한 노하우를 축적했고, IRCAM의 수장으로서 직접 익힌 고차원적인 음향감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레즈는 자신의 모든 기량을 총동원하여 <노타시옹> 제1곡-제4곡의 관현악 편곡에 쏟아부었다.

노타시옹 제1곡 및 제2곡.

말랑말랑 부드럽고 단순했던 피아노곡은 그렇게 대수술을 거쳤다. 템포는 확장되었고 방대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입혀졌다. 구조가 더욱 복잡해졌으며 색채대비 또한 뚜렷해졌다. 메시앙과 프랑스 전통음악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며 대신 거칠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음색이 가득차게 되었다. 플루트(4), 피콜로, 오보에(3), 잉글리쉬 호른, 클라리넷(5), 바순(3), 콘트라바순, 호른(6), 트럼펫(4), 트롬본(4), 튜바, 퍼커션(8), 팀파니, 셀레스타, 하프(3), 피아노, 현악(제1바이올린 18, 제2바이올린 16, 비올라 14, 첼로 12, 베이스 10) 편성이 되었다. 퍼커션의 경우 8명의 연주자들이 각자 실로폰, 비브라폰, 마림바, 글로켄슈필, 튜블러벨, 스틸플레이트, 글래스 차임스, 벨 트리, 우드블록, 템플블록, 일본우드블록, 부뱀, 앤빌, 클라베스, 팀발레스, 심벌즈, 크로탈, 카우벨, 마라카스, 트라이앵글을 연주하게 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니 홀이 꽉 찰 정도의 편성에 20가지가 넘는 타악기들이 동원되는 것이다.

연주 순서도 제1곡→제4곡→제3곡→제2곡 순서로 변경되었다. 제1곡의 단순하고 소박한 텍스쳐에서 시작하여 제4곡의 신경질적인 금관악, 제3곡의 무중력적인 서정성을 거쳐 제2곡에 이르러 전 악기들의 파괴적인 광란으로 막을 내리는 구조로 변모했다. 제1곡에서는 잔잔한 수면에서 갑자기 냉랭한 진동이 일며 빙하들이 불쑥불쑥 튀어오른다. 제4곡에서는 빙하를 깨고 허공으로 튀어오르는 얼음조각들 하나하나가 금속을 구기는 듯한 관악의 파열음으로 묘사된다. 제3곡에서는 얼음조각들이 불안하게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고 햇빛을 난반사시키며 공중을 떠다니고, 제2곡에 이르러서는 얼음덩어리들이 각자 광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충돌하고 부서지며 파편을 튀기는 무법천지를 연출한다. 제일 인기가 많은 것은 제2곡인데, 입자들이 날카롭게 부딪히고 깨지면서 거세게 파열하다가 불시에 수축한 후 이내 대폭발을 일으키며 모든 것이 정지하는 대목은 과연 이 곡의 하이라이트이다. 불레즈는 제2곡을 마지막에 연주하도록 한 것이 종악장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 아니라 제2곡이 연주순서 중간에 들어가 있을 경우 다른 곡들이 붕 뜨게 된다는 실용적인 차원에서라고 한 바 있으나 결과적으로 구조 측면에서 종악장의 위상을 갖게 되는 효과는 부인할 수 없다.

1997년에 노타시옹 제7곡의 관현악 편곡도 완성되었다. 일그러진 심해 물고기들과 플랑크톤들이 천천히 몸을 할퀴고 지나가는 촉감을 맛볼 수 있는 제7곡은 1999년 바렌보임과 시카고 심포니의 연주로 시카고에서 초연되었다. 제7곡이 완성된 후에도 불레즈는 "노타시옹은 각각의 곡들이 독립된 작품이며 각자가 독립된 곡들이고 순서배열에 정답은 없다"고 하였으나 막상 공연에서는 제1곡→제7곡→제4곡→제3곡→제2곡의 순서를 채용했다(https://youtu.be/DpVU_gWV9dI).

<주인 없는 망치>를 비롯하여 <폴리포니 X>, <파편>, <삽입절에> 등 실내악 작품들 대부분은 악장마다 악기편성이 다르거나 자주 사용되지 않는 악기를 요한다. <두겹의 모습들, 프리즘들>이나 <제의: 브루노 마데르나를 추모하며>, <응답>과 같은 관현악곡들은 일반적이지 않은 무대 설정을 필요로 한다. <...정지된-폭발...>이나 <앤섬 2> 등 전자음악들의 경우 IRCAM 스튜디오 내에서 숙련된 기술자들에 의해 편집과정을 거쳐야 하는 곡들이다. 실연으로 감상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반면 방대한 타악 편성의 풀 스케일 오케스트라가 기용되는 <노타시옹> 관현악 편곡본은 상대적으로 자주 연주되며 인기 또한 대단하다. 아래는 베를린필과의 제2곡인데, 사실 연주도 연주이지만 끝난 후 터져나오는 진심 담긴 경탄과 박수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https://youtu.be/dyXGfztLEMA).◈

이 곡의 결정반으로 대개 불레즈 본인의 DG 자작자연을 꼽으나, 미하엘 길렌과 남서독일 방송교향악단의 연주 그 못지 않게 탁월하며 개인적으로 자작자연보다 오히려 이 쪽을 추천하는 편이다. 입체적인 음색 조탁과 더불어 마이크배치도 밸런스 있게 잘 한 듯하다(커플링된 말러 9번도 개인적으로 세 손가락 안에 꼽는다). 아바도의 Wien Modern 음반의 경우 현재 나와 있는 노타시옹 음반 중 가장 사납고 격앙된 해석을 보여주는 것으로 빠른 템포에 빈필 특유의 과격한 스크래치를 즐기는 맛이 있지만, 자주 듣다 보면 음향, 음색 면에서 단조롭게 느껴진다. ◈

Michael Gielen, SWR Sinfonieorchester, Hanssler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