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불레즈

피에르 불레즈 [2] - 지휘자 불레즈

Onsol 2017. 2. 22. 16:43

1960년대 중반의 불레즈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파리 극장 오케스트라를 오가는 촉망받는 지휘자였다. 처음에는 가끔씩만 지휘봉을 잡으나 점점 포디움에 오르는 일이 잦아졌고 1971년에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뉴욕 필하모닉의 수장을 맡게 된다. NYP 상임으로 재직하는 7년 동안 불레즈는 공연 선곡으로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전임인 번스타인의 전통적인 고전음악 레퍼토리에 익숙해져 있던 뉴욕 시민들은 전위음악들로 채워진 불레즈의 공연프로그램에 큰 충격을 받았다. 차이콥스키와 모차르트를 즐기던 관객들은 베베른과 베르크로 채워진 팸플릿을 보고는 기겁하여 예매를 취소하곤 했다. 그러자 불레즈도 어쩔 수 없이 레퍼토리에 고전음악을 적절히 섞는 방법을 취하게 된다.

"...현대음악을 무대에 올릴 때에는 고전적인 레퍼토리도 포함시켜야 한다. 오케스트라는 고전 레퍼토리 없이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어느 정도는 절충을 취해야 한다. 대중들에게 '익숙한 곡도 지휘한다'는 확신을 주어야 지휘자를 신뢰하게 된다."

실험정신 강하고 비타협적인 음악가였던 불레즈가 베토벤과 모차르트도 지휘하게 된 이유였다. 실제로 CBS 시절 불레즈가 녹음한 음반들 중에는 고전·낭만 레퍼토리도 상당히 섞여 있다. 1967년부터 10년 동안 녹음된 고전·낭만 작품들을 보면 1967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런던 심포니), 1968 말러 교향곡 5번(BBC 심포니)과 베토벤 교향곡 5번(뉴 필하모니아), 1970 말러 <고발의 노래>(런던 심포니), 1971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6번, 말러 교향곡 9번(BBC 심포니), 1972 말러 교향곡 9번(BBC 심포니), 1972 베를리오즈 <로마의 사육제> 서곡(뉴욕필), 1974 말러 교향곡 2번(BBC 심포니), 1975 베토벤 교향곡 9번(뉴욕필), 1976 말러 교향곡 3번(뉴욕필) 등이다.

위 녹음들 중 말러 교향곡 2번/3번,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6번,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실황녹음인데 실제로 들어보면 불레즈가 지휘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이며 특히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셀이나 토스카니니의 실황을 방불케 하는 폭연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당초부터 고전 레퍼토리를 조금씩 섞는 전략적 선택의 일환이었으므로 동시대의 일반적인 경향에서 크게 벗어난 해석방향을 기대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즉 연주 수준과는 별개로 지휘자로서의 불레즈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나마 위 녹음들 중 불레즈 특유의 진지하고 이지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녹음은 CBS의 현대음악 프로젝트로 스튜디오 녹음된 베를리오즈의 관현악곡들, 말러의 「고발의 노래」, 그리고 베토벤 교향곡 5번일 것이다. 베토벤 교향곡 5번이 특히 문제작이다(https://pilebunker.tistory.com/9).

 

베토벤: 교향곡 5번 - 피에르 불레즈,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3악장 도돌이표를 준수하는 최초의 녹음이다. 수십년 전 이 곡의 3악장 스케르초 부분의 도돌이표가 있었을 것이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불레즈는 그 견해에 확신을 가지고 이 녹음에 반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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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불레즈는 1990년대와는 달리 악기들을 팽팽하게 대비시키며 자극적인 색채를 만들어냈다. 다만 각 성부의 소리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데에 주력했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감정적인 부분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의 녹음들은 정서적으로는 상당히 어둡고 건조하며 기괴하기까지 한 인상을 주지만 다른 한편 대편성에도 불구하고 목관을 포함해 악기들 하나하나가 깨끗하게 포착된다. 낭만음악보다는 근현대음악에 더 어울리는 이러한 음색과 불레즈 특유의 지적인 해석이 곁들여진 고전·낭만음악을 들은 청자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더 이상의 새로운 해석은 없을 것만 같던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색다른 면을 드러냈고 말러의 <고발의 노래>를 처음으로 스테레오로 녹음해 소개했으며,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철저히 계산된 순수음악으로 해석해 보였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레퍼토리를 단순히 현대음악에 이골이 난 청중들을 위로하는 데에만 사용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불레즈의 주력 레퍼토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신빈악파와 바레즈, 드뷔시, 라벨, 스트라빈스키, 바르톡이었다. 신빈악파 녹음 중에서도 특히 베르크의 오페라 <룰루>의 체르하 3막 완성 판본을 세계 초연한 실황녹음은 각 인물들의 층층의 심리상태에 대한 불레즈의 면밀한 통찰이 돋보이는 명반이다. 번스타인이 조탁한 NYP의 신랄하고 거친 음색을 강하게 표출한 바레즈의 관현악곡집도 주목할 만하다. <봄의 제전>을 포함한 스트라빈스키 녹음들은 지금까지도 확고한 레퍼런스로 남아 있다.

특히 눈여겨볼만한 것은 LSO와 녹음한 베베른 전곡집이다. 최초의 베베른 전곡집이며, 불레즈 자신이 1990년대에 새로 내놓은 전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1990년대 신전집이 <파사칼리아> 등의 관능적이고 고혹적인 초기 작품들이나 음렬구조성이 고도로 전개되는 <9개의 악기들을 위한 협주곡>에서 유연하고 감미로운 소리를 부각시켰다면, 1960년대 전집은 음색선율이 강하게 부각되는 칸타타 1번이나 점묘적 기교들이 극단적으로 두드러지는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등에서 치열하고 격앙된 소리를 들려준다.

우리에게 익숙한 불레즈의 냉철하고 간결한 소리는 198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부터 불레즈는 차분하고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각 악기들의 소리를 자연스럽게 표면에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1960-1970년대의 불레즈와 1980년대 이후의 불레즈 둘 다 감정적인 분출이나 서사보다는 구조를 모토로 하여 악보를 객관적으로 조망하는 시각을 택하는 것은 동일하다. 명료함을 소리로 드러내는 데 있어 1980년대 이후의 불레즈와 CBS시절의 불레즈는 전혀 다른 방식을 채용하는 것이다. 1960년대의 불레즈가 갓 썰려 과즙이 흘러내리는 날것 그대로의 과일이었다면 1980년대 이후의 불레즈는 적절히 다듬어진 채소들이 섞이지 않고 정갈히 플레이팅된 샐러드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