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불레즈

피에르 불레즈 [5] - <메사제스키스(Messagesquisse)>

GENA 2017. 2. 26. 16:49

스위스의 지휘자 파울 자허(Paul Sacher)의 70세 생일이 가까워지자, 평소 그와 친했던 12명의 작곡가들이 모여 축하곡을 헌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자허와 친분이 두터웠던 불레즈 역시 여기에 합류한다. 처음에는 브리튼(Benjamin Britten)이 메인 테마를 작곡하고 나머지 11명이 각자 변주곡을 1개씩 쓰기로 했었으나, 참여한 작곡가들 모두가 열의를 보여 결국 12개의 개별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작곡시에 규칙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Eb-A-C-B-E-D의 6개 음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자허의 성인 S-A-C-H-E-R의 알파벳을 기보에 대입시킨 것이다. 음계는 A부터 G까지만 있으니 S가 Eb로, H가 B로, R이 D로 되었다. 이 'S-A-C-H-E-R' 모티프는 자허를 상징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곡의 체계를 이루는 데에도 제법 쓸만했다. 한 옥타브 내 12음의 절반인 6음이므로 헥사코드를 이루었고, 배열을 바꾸면 A-B-C-D-E의 연속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불레즈는 원래 곡명을 <자허(Sacher)>로 할 생각이었으나, 악보를 완성한 이후 <메사제스키스(Messagesquisse)>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메사제스키스는 영어의 messages(메시지, 전언)와 불어의 esquisse(스케치, 초안)의 합성어로, 불레즈가 만든 단어이며 사전에는 없다. 자신의 메시지를 음악적 스케치에 담아 보낸다는 뜻으로 자허에 대한 우정의 표시였다. 7개의 첼로로만 구성되는 실내악이었다. 불레즈는 초연의 솔로를 로스트로포비치가 맡을 것이라는 데에 착안하여 그의 호쾌하고 냉랭한 음색에 어울리는 선율을 채용했다. 또한 거침없고 생명력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연주자와 감상자 모두를 숨죽이게 만드는 전투적인 템포를 도입했다.

François Salque, l'Orchestre de Violoncelles, 2006

도입부 - 변주1 - 변주2 - 변주3 - 카덴차 - 코다로 이루어져 있다. 도입부에서는 앙상블의 나지막한 피아니시모 속에 솔로 첼로가 'SACHER'를 표상하는 Eb, A, C, B, E, D를 차례로 암시한다. 이어서 세 차례의 변주가 진행된다. 첫 번째 변주에서는 앙상블의 6대의 첼로가 트레몰로로 각자 Eb, A, C, B, E, D를 나누어 연주하는 동안 솔로 첼로의 피치카토와 아르코가 번갈아 사용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앙상블의 트레몰로가 점차 공격적으로 변하면서 하이라이트인 두 번째 변주 부분으로 돌입한다. 파괴적이고 거친 무궁동은 난타공연을 떠올리게 할 만큼 막대한 에너지를 분출한다. 정교하고 복잡하면서도 난잡하지 않다. 세 번째 변주에서는 독주 첼로의 거칠고 빠른 활놀림과 앙상블의 트릴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아주 천천히 데크레센도가 연출되며, 이어 독주 첼로의 변화무쌍한 카덴차가 흘러나온다. 코다에서는 다시 사나운 무궁동으로 돌아가고, 조각들이 서로 부딪히며 파열하듯 점점 거칠게 치닫다가 일시에 종지부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