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불레즈

피에르 불레즈 [6] - <한 겹 두 겹(Pli selon pli)>

GENA 2017. 2. 28. 13:20

세 번째 피아노 소나타를 완성한 후 휴식을 취하고 있던 불레즈는 쉴 참에 소프라노와 타악 앙상블 편성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의 소네트 <백조>를 가사로 차용한 <즉흥곡(Improvisation)>을 작곡했다. 그 직후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이 작곡을 부탁해 오자 불레즈는 같은 편성으로 역시 말라르메의 시인 <레이스가 사라진다>를 입힌 두 번째 즉흥곡을 발표했다. 1959년에는 말라르메의 시 <짓누르는 구름에게>를 붙인 세 번째 즉흥곡이 탄생했다. 같은 해 기존의 단편 작품이었던 <퓌어스텐베르크 왕자 막스 에곤의 기념비>를 개작한 <무덤(Tombeau)>이 완성되었고, 이듬해 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시의 선사(Don)>가 작곡되었다가 1962년에 관현악 편곡본으로 수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5악장 성악곡 <한 겹 두 겹(Pli selon pli)>의 초판본이 6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초판본 녹음은 불레즈 자신의 지휘와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1969년 이루어졌다.

1980년대에 이르러 불레즈는 이 곡을 전면 개작하기로 한다. 본래 초판본의 구조는 시의 선사 → 즉흥곡 1 → 즉흥곡 2 → 즉흥곡 3 → 무덤으로 갈수록 크레센도되어, 시의 선사에서 피아노와 소프라노의 나지막한 건드림으로 시작하여 무덤에 이르러 장대하게 마무리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불레즈는 즉흥곡 1이 즉흥곡 2나 3과의 연결성에 비추어 너무 간결하고 무게감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즉흥곡 1은 피아노 소나타 3번을 완성한 후 휴식적인 차원에서 작곡한 단순명료한 작품이었다. 마침 <노타시옹(Notations)>의 관현악 편곡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던 불레즈는 동곡의 몇몇 부분들을 차용하여 즉흥곡 1의 오케스트레이션과 멜로디라인을 확장했고 반복도 추가하였다. 이와 함께 <시의 선사>도 더 큰 스케일로 개작했다. 그렇게 해서 1989년 새로 탄생한 판본에서는 <시의 선사>부터는 데크레센도로, <즉흥곡 2>부터 종악장인 「무덤」까지는 크레센도로 처리하게 되었다. 신판본 녹음은 역시 불레즈 자신의 지휘와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의 연주로 2001년 이루어졌다.

1957년에 착수하여 33년 후인 1989년에 완결된 곡인 만큼 불레즈 자신도 처음에는 어떤 완성물이 나올지 몰랐을 것이다. 5개의 악장이 모두 작곡된 후 불레즈는 역시 말라르메의 시인 <벨기에의 친구들을 회상함>의 'Pli selon pli'라는 구절을 따서 제목을 붙인다. 이 구절은 한 겹 한 겹 커튼이 젖혀지듯 안개가 점점 사그라들고 벨기에의 석조건물들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는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백조>에서 나타나는 창조가의 고뇌에서 시작하여, <짓누르는 구름에게>에 이르러 삶과 죽음 사이의 초현실적인 공간에 이르는 과정을 마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모습에 비유한 것이다.

<백조>, <레이스가 사라진다>에 터잡은 첫 두 개의 즉흥곡들은 금속 타악기 앙상블 편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시의 밝고 활기차며 생기있는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함이다. 또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면, 우선 즉흥곡 1의 가사는 아주 또렷하고 분명하게 발음되지만, 즉흥곡 2로 넘어가면 억양에 대비가 생김과 동시에 화려한 선율 속에 딕션이 뭉개지기 시작하고, 즉흥곡 3에 이르면 발음구조가 완전히 몰각되어 텍스트를 알아듣기가 힘들어진다. 이는 즉흥곡 3이 기반한 <짓누르는 구름에게>의 난해한 단어배열 및 해체적인 문장 구조와 대응되는 대목이다. 발음이 흐릿해지고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그 자체로 하나의 악기로 변모한다. 시가 점차 그 의미를 상실해가고 어느 순간부터는 소프라노 파트보다 실로폰과 하프의 대화가 두드러지며, 금속 타악기들의 향연으로 돌입하면서 관현악의 소리도 증폭된다. 종악장 <무덤>에 가서는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자취를 감추고 격앙된 분위기 속에 관현악만의 분해가 이루어진다. 오케스트라의 물리적인 리듬의 향연이 서서히 잦아드는 후반부에 가서야 소프라노가 다시 등장하여 죽음을 노래하며 날카로이 부르짖고, 오케스트라의 냉소적인 경과구가 뒤를 따른다. 이내 소프라노는 탄식찬 체념을 뱉고, 뒤이어 악단의 급격한 크레센도로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