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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켈젠(이남원 역), “과학의 법정에 선 자연법론”

斧針 2026. 6. 1. 11:27

한스 켈젠(이남원 역), “과학의 법정에 선 자연법론”, 정의란 무엇인가, 울산대학교출판부(2018), 215-277쪽
Hans Kelsen, The Natural Law Doctrine before the Tribunal of Science, 2 The Western Political Quarterly 481-513 (1949)


자연법론은 정의라는 영원한 문제에 대한 일정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인간 상호관계에서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주려고 시도한다. 대답은 자연적인 인간행동, 즉 자연이 요구하기 때문에 자연에 일치하는 인간행동과 비자연적인, 따라서 자연에 어긋나고 자연에 의해 금지된 인간행동을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가정 위에 의거한다. 이러한 가정은 자연으로부터, 즉 인간의 자연[본성]으로부터, 사회의 자연으로부터, 심지어는 사물들의 자연으로부터 인간행동의 매우 적절한 규범을 제공하는 어떤 법칙을 연역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하며, 또한 자연의 사실을 조심스럽게 검토하면 우리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정의로운 해결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자연은 입법자로서, 그것도 최고의 입법자로서 이해된다.

이런 견해는 자연의 현상들이 어떤 목적을 향하고 있거나, 어떤 목적에 의해서 그것의 모습이 형성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자연의 과정이나 전체로서 이해된 자연은 궁극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목적론적인 견해이며, 따라서 자연은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자연이 일종의 초인간적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즉 인간이 마땅히 복종해야 하는 권위라는 것을 함의한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인간 문명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스스로를 소위 애니미즘에서 드러낸다. 원시인들은 자연적인 것들, 즉 동물·식물··하늘의 별 등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고, 정령이나 영혼이 이들 현상 배후에 깃들어있으며, 결국 이것들은 사람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과 같은 원리에 따라서 마치 인격적 존재처럼 다른 사람에 반응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자연의 사회적 해석이다. 왜냐하면 원시인들은 자연을 자신의 사회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연현상을 움직이는 정령이나 영혼은 대단히 힘이 세다고 믿고 있고, 사람들을 보호할 수도 해를 끼칠 수도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숭배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애니미즘은 자연에 대한 종교적 해석이다. 종교적 발전의 보다 높은 단계에서, 일신교가 애니미즘을 대신하게 될 때, 자연은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신의 전능하고 정의로운 의지의 현현으로서 간주된다. 자연법론이 일관성을 가지게 되면, 그것은 종교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자연법론은 자연으로부터 인간행동의 정의로운 규칙을 연역한다. 그 유일한 이유는 자연이 신의 계시로 이해되기 때문이요, 그리하여 자연을 고찰하는 것은 신의 의지를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중요한 자연법론이 다소간 종교적 성격을 가지지 않는 경우란 없다. 예를 들면 그로티우스는 자연법을 자연의 권위, 즉 신이 어떤 행동을 금지하거나 요구하는 자연의 명령이라고 정의한다[1]. 그의 진술에 따르면 “인간 안에 심어져 있는 본질적인 특성에 연유하는 자연법은 올바로 이야기하면 신에 귀속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특성이 우리 안에 존재하기를 신이 바랐기 때문이다.”[2] 홉스의 진술에 따르면, 자연법은 이성의 명령이지만, 이성의 명령은 인간 자신의 존속과 방어에 도움이 되는 것의 결론이거나 정리(定理)인 반면에, 법은 적절하게 이야기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정당한 권리로 명령을 내린 자의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동일한 정리를 모든 것에 대해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서 명령을 내리는 신의 말 속에서 전해진 것으로 간주하면, 그것 역시 법이라 부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3] 홉스에 이어서, 푸펜도르프는 이성의 명령, 즉 자연법의 원리가 법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것은 자연법의 의무가 신에게 유래한다는 것이 모든 상황 아래서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4]고 진술한다. 그리해야만 자연으로부터 연역된 법은 영구적이고 불변적이라 가정될 수 있으며, 이런 법은 인간에 의해 제정되어 단지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질서에 불과한 실정법에 대립한다. 자연법에 의해 확립된 권리는 인간 천부의 신성한 권리이다. 왜냐하면 이 법은 신의 자연[본성]에 의해 인간 안에 심어졌기 때문이다. 반면에 실정법은 이들 권리를 확립할 수도 폐기할 수도 없으며, 단지 그것들을 보호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자연법론의 핵심이다.

[1] Hugo Grotius, De Jure Belli ac Pacis, Bk. I. chap. I, sec. 10.

[2] 같은 책, Prolegomena, sec. 12.

[3]
Thomas Hobbes, Leviathan, Part I, chap. xv.


[4]
Samuel Pufendorf, De Jure Naturae et Gentium, Bk, II, chap, iii, sec. 20.

과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생겨나는 첫 번째 반대는, 이 학설은 자연과학이 자신의 대상을 기술할 때 사용하는 법칙인 과학의 자연법칙과, 윤리학과 법학이 자신의 대상, 즉 도덕과 법을 기술할 때 사용하는 법칙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의 자연법칙은 두 현상을 원인과 결과와 같은 인과 원리에 따라서 서로 결합시키는 법칙이다. 그러한 법칙은 예를 들면 금속은 열을 받으면 팽창한다는 진술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그것이 필연성의 관계로서 간주되든 단순한 개연성의 관계로서 간주되든, 인간 또는 초인간적인 의지의 행동에 귀속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우리가 도덕 또는 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인간행동을 명하는 규범, 즉 인간 혹은 초인간적 존재의 행동이라는 특수한 의미를 가진 규범이다. 그런 규범은 예를 들면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기꺼이 도우라는 그리스도의 도덕규범이거나 살인자에 대해서 처벌을 명하는 입법자의 법규범이다. 윤리학은 도덕규범 하에 존재하는 상황을 다음의 진술로써, 즉 사람이 곤경에 처하면 그의 동료는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진술로써 기술한다. 법학은 법규범 아래에 있는 상황을 다음처럼, 즉 만약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면 그는 처벌받아야 한다고 기술한다. 명백한 일이지만, 도덕법칙이나 법적 법칙은 인과원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원리에 따라서 조건과 그것의 귀결을 결합시킨다. 자연법칙은 A가 존재한다면, B가 존재한다는 취지의 진술인 데 반해, 도덕법칙이나 법적 법칙은 A가 존재한다면, B가 존재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다. 그것은 존재와 당위간의 차이이며, 인과와 규범(혹은 귀속)간의 차이이다.

어떤 유형의 인간행동을 명하는 일반규범을 전제한다면, 이 전제된 규범과 일치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선한, 옳은, 정당한 행동으로 볼 수 있고, 전제된 규범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그릇된, 나쁜, 정당하지 않은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진술은 가치판단이라 하고, 이것은 객관적인 의미에서 사용된 용어이다. 용어의 이 의미에서 가치는 전제된 규범과 일치한다. 그것은 긍정적 가치이며, 전제된 규범과 일치하지 않는 부정적 가치에 대립해 있다. 특정 개인의 구체적 행동이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진술은, 또는 긍정적 가치를 지닌다거나 부정적 가치를 지닌다는 진술은, 그의 행동이 전제된 일반규범과 그의 행동이 일치하거나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는 그가 실제로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을 해야 한다거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하는 진술에 의해서 이 가치판단을 표현할 수 있겠다. 어떤 것을 지시하는 혹은 금지하는 일반 규범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다. 대상에 귀속된 가치는 전제된 규범과 관련되지 않고서는 그 대상의 특성들로 주어지지 않는다. 가치는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된 대상에 고유한 것이 아니고, 이 대상과 전제된 규범간의 관계인 것이다. 우리는 실재하는 대상의 가치를 또는 현실적 행동의 가치를 이들 대상의 분석을 통해서는 발견할 수 없다. 가치는 자연의 실재 안에 내재해 있지 않다. 따라서 가치는 실재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어떤 것이 존재해야 한다거나 행해져야한다는, 또는 어떤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되거나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도출되지 않는다. 실제로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삼킨다는 사실은 물고기의 행동이 선하다거나 나쁘다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지 않다. “존재에서 당위를 자연적 실재에서 도덕적 혹은 법적 가치를 도출하는 논리적 추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윤리학과 법학이 자신의 대상을 기술할 때 사용하는 법칙, 즉 도덕적 혹은 법적 규범에 관한 법칙과 자연과학이 자신의 대상을 기술할 때 사용하는 법칙, 즉 인과법칙을 비교한다면, 도덕법칙과 법적 법칙이 언급하는 규범들은 이전에 서술된 것처럼 도덕적 권위 혹은 법적 권위의 행동의 의미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권위가 인간인 한, 이들 규범은 성격상 주관적이다. 즉 이들 규범은 그것들을 만든 사람들의 의도를 표현한다. 인간의 권위가 지시하거나 금하는 것은 그가 지향하고 있는 목적에 달려 있다. 누군가가 목적으로서 지향하고 있는 것도 또한 가치이지만, 그것은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가치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목적의 수단이 아니라 궁극목적이라면, 그것은 최고의 가치라 한다. 이런 주관적 의미에서의 궁극목적 또는 최고의 가치에 관한 대단히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나의 최고 가치가 다른 최고 가치와 자주 충돌한다. 예를 들면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안정이 충돌하고, 한 개인의 복리와 국가 전체의 복리가 충돌한다. 이들 상황에서는 하나는 다른 하나를 희생시킴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이 우선하는가, 혹은 어떤 가치가 상위에 있고 어떤 가치가 하위에 있는가, 진실로 최고 가치는 어떤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물음은 쇠가 물보다 무거운지 어떤지, 물이 나무보다 무거운지 어떤지와 같은 물음과 동일한 방식으로 대답될 수 없다. 이 후자의 물음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경험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지만,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최고 가치에 관한 물음은 단지 정서적으로만, 즉 결정하는 주관의 감정이나 바람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 한 사람의 주관은 그의 정서에 의해서 개인의 자유를 선호하도록 이끌릴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정서에 의해서 경제적 안정을 선호하도록 이끌릴 수 있다. 한 사람은 개인의 복리, 다른 사람은 국가 전체의 복리로 이끌릴 수 있다. 이 사람이 옳은지 저 사람이 옳은지는 합리적 고려에 의해서 증명될 수 없다. 따라서 사실상 도덕과 법의 대단히 다른 체계들이 있지만, 이에 반해 자연에는 하나의 체계밖에 없다. 도덕의 한 체계에 따라서 선한 것이 다른 체계에서는 악한 것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법질서에서 죄악인 것이 다른 법질서 하에서는 완전히 옳은 것일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도덕적 질서나 법질서에 일치하는지 어떤지에서 존립하는 가치는 상대적 가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규범을 결정하는 권위가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존재인 신이라고 가정되는 한에서, 오직 하나의 도덕적·법적 체계가 있으며, 그 때 이들 규범에 응하는 가치는 절대적 가치라 가정된다.

자연법론이 가치는 실재 안에 내재해 있으며, 이 가치는 절대적이라는 것, 동일한 의미지만 신의 의지는 자연에 고유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전제 하에서만 법은 자연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고, 이 법은 절대적 정의라는 학설을 주장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자연적 실재 안에 가치가 내재해 있다는 형이상학적 가정은 과학의 관점에서는 승인될 수 없기 때문에, 자연법론은 “존재”로부터 당위를 추론하는 이른 바 논리적 오류에 기초하고 있다. 자연으로부터 연역된 언필칭 규범은 진실로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이며, 주관적 가치에 근거해 있다. 이러한 가치는 입법자로서의 자연의 의향이라고 제시된 것이다. 이들 자연법칙과 법적 법칙을 동일시하고, 자연의 질서가 정의로운 사회적 질서이거나 그런 질서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연법론은 원시적인 애니미즘처럼 자연을 사회의 일부로 이해한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은 자연의 해석을 사회적 범주로부터 해방시키는 경향을 특징으로 갖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 쉽게 증명될 수 있다. 과학의 법정에서 자연법론은 승산이 없다. 그러나 자연법론은 자신의 종교적 성격을 언급함으로써 이 법정의 재판권을 거부할는지 모른다.


자연법론은 실정법과 자연법이라는 근본적으로 이원론의 특성을 갖는다. 인간에 의해 제정된 불완전한 실정법 위에, 절대적으로 정의롭기에 완전한 자연법, 신이 확립한 자연법이 존재한다. 따라서 실정법은 그것이 자연법에 일치하는 한 정당하고, 유효하게 된다[8]. 그러나 실정법이 자연법에 일치하는 한에서만 유효하다면, 즉 자연법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의 분석에 의해서 자연법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다시 말해 어떤 논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법이 심지어는 자명하다면[9], 실정법은 아주 불필요한 것이 된다. 자연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사회의 정의로운 질서의 존재가 눈앞에 있다면, 실정법 제정자의 행위는 한낮의 햇빛 속에서 일부러 등불을 켜는 어리석은 노력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자연법론의 다른 귀결이다. 그러나 이 이론의 추종자들 중 어떤 사람도 일관성이 있는 논리를 전개할 만큼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연법의 존재가 실정법의 확정을 불필요하게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10]. 오히려 그들 모두는 실정법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11]. 사실상 모든 자연법론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 중 하나는 실정법의 확립을 정당화하는 것, 또는 실정법 확립의 권한이 있는 국가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 기능을 수행하면서 대부분의 학설은 매우 독특한 모순에 빠져버린다. 한편으로 그들은 인간의 본성이 자연법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선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강제기구를 갖춘 실정법의 필요성을 인간의 악에 의해서 정당화할 수 있다.

이 모순을 회피한 유일한 철학자가 홉스이다. 그는 인간은 본성상 나쁘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그가 이런 본성으로부터 연역하는 자연법은 실제적으로 다음의 원리, 즉 실정법의 확립할 무한한 권력을 부여받은 국가가 필요하며, 자연법에 의해서 사람들은 국가가 제정한 실정법을 무조건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는 원리 외에 다름 아니다. 이 논증의 노선은 자연법에 의해서 자연법을 부정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자연법이 모든 실정법의 형식적 권위화가 아니라, 내용을 갖는 실질적 규칙체계로 간주된다면, 이 자연법 연역의 근거가 되는 인간본성과 실정법을 만드는 인간본성 간의 모순이 불가피하게 생겨난다. 그리하여 푸펜도르프는 인간 자신의 본성, 인간의 조건, 인간의 욕망을 조심스럽게 고찰하는 것보다 더 적절하고 직접적인 방법은 없다[12]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이성의 명령으로서의 자연법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사회적이며, 즉 기꺼이 자신과 같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연결하며,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어떤 원인을 가지기는커녕 자신의 행복을 유지하고 증가시킬 이유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행동하는 일이[13] 필요하다. 그러나 푸펜도르프는 이것이 인간의 실제적 본성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는 인간이 항상 심술궂고, 화를 잘 내며, 쉽게 흥분을 잘 하고, 재빠르고 강력하게 해를 끼친다는것을 인정한다. 그는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 위에서 영위한다[14]는 것을 인정한다. 푸펜도르프는 인간본성에 대한 비관적 평가에서 홉스만큼 많이 나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법의 준수보다 훼손으로써 보다 더 큰 이익을 얻게 된다고 생각할 때마다, 법을 쉽사리 어기는 그런 좋지 못한 성질이 있다.”[15]
[8] 나의 다음 논문을 참조할 것. “Naturrecht und positives Recht: Eine Untersuchung ihres gegentigen Verhätnis,” Revue Internatonale de la Théoriedu Droit, II (1927-1928), 71쪽 이하. 또한 나의 다음 저서를 참조할 것. General Theory of Law and Stat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45), 389쪽 이하.

[9] 예를 들면 그로티우스, 앞의 책, Plolegomena, sec. 39. “이 법[자연법]의 원리는, 단지 당신이 엄밀하게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그 자체 명료하며, 분명하게 된다. 이것은 외적 감관에 의해 우리가 지각하는 그런 사물들이 명백한 것과 같다. 지각의 기관이 완전하게 형성되어 있고, 지각에 필수적인 다른 조건이 갖춰져 있으면, 이들 감관은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자연법의 원리가 자명하다는 견해는, 자연법론의 추종자들 사이에 이들 원리에 관한 합의가 없고, 결코 없었다는 사실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푸펜도르프는, 앞의 책, Bk, II, chap. i, sec. 7에서 사람들 간에는 그 머릿수만큼 많은 생각이 있으며, 각자에게는 자신의 방식이 최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Bk. I, chap. iii, sec. 3에서 다음처럼 주장한다. “이해력과 판단력에서 자연스런 정확함이 고유해 있어서, 이 정확함 때문에 도덕문제에 대해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면 이들 문제에서 오류에 빠지게 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것은 실제로 가능하다. 그의 진실한 견해가 다음의 진술에서 나타난다 (같은 곳). 우리가 행위에서 모든 도덕성을 파괴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음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인간의 지성은 본성상 건전하고, 충분한 탐구에서 그 지성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명료하게 이해하며, 그들 문제가 실제로 나타나는 바대로 이해한다. 더 나아가서 적어도 자연법의 일반적 법칙에 관한 실천판단은, 그 실천판단으로부터 나오는 악한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수 없을 만큼 타락할 수는 없다는 점이 주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악한 행위는 실수나 무지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법의 원리에 관한 실수나 무지가, 비록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실정법의 무지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잘 알려진 규칙은 간단하게 자연법에 적용된다.

[10] 
실정법은 사회에 불필요하고, 심지어는 해롭다고 주장하는 학설이 이론적 무정부주의의 창시자인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에 의해 그의 유명한 저서 Enquiry Concerning Political Justice (London: 1793)에서 주장되었다. 고드윈은 자연법론의 추종자가 아니었다. “법은 가장 유해한 성향을 가진 제도이다”(같은 책, I, 149)라고 이야기할 때, 그는 자연법과 실정법 모두를 언급하고 있다. 분명히 그는 다음과 같은 자연법론의 두 기본 원리를 거부하고 있다. 즉 인간은 본성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 인간의 관념과 권리의 개념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같은 책, II, 771)라고 말하고, 사회계약의 관념에 대해서는 원초적 계약으로부터 권위를 도출하는 것은 어떤 정부에서도 불가능하다”(같은 책, I, 149)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다음을 진술할 때 자연법론의 기초를 공격하고 있다. “우리는 우주의 체계에 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 그것을 너무나 쉽게 존중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전체의 너무 작은 일부만을 보고 있어서, 우리는 자연의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흉내 내어 우리의 도덕원리를 만들어낼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하다. 자연의 과정을 구성하는 마음에 의해서 임의로 조정하는 그 무엇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극도로 잘못이다(같은 책, II, 692).


[11] 
그리하여 예를 들면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은 그의 저서 Ethicae Doctrinae Elementorum Libri Duo(1560)에서 성문법이 필요한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다음처럼 대답했다. “많은 무지한 사람들이 성문법은 필요 없으며, 사안들은 지도자의 자연적 판단에 따라서(ex naturali judicio eorum qui praesunt. 이 문구는 자유롭게 다음처럼 번역될 수 있다. ‘정부에 있는 자가 자연의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결정되어야 한다고 우둔하게 떠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야만적인 의견이 거부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성문법이 선호될 수 있음을 배워야 하며, 애정과 존경을 가지고서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Opus Reformatorum, Philip Melanchthon Opera (Halle I. S.: Schwetschke, 1850), XVI, 234-235.


[12] Pufendorf, 
앞의 책, Bk. II, chap. iii, sec.14.


[13] 
같은 장, sec. 15.


[14] 
같은 책, Bk, VII. chap. i, sec. 11.


[15] 
같은 장, sec. 8.

따라서 그는 어떤 방식의 해악도 금하는 자연법을 단순히 존중하는 것만으로는 전 인류를 자연적 자유에 안주할 수 있게 한다고 믿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진술한다.

“인간 성격의 사악함과 남을 해하려는 그의 성향을 어떤 방법으로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공격할 때 즉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악을 그의 면전에서 내밀고 무사하기를 바라는 모든 희망을 제거해버려야 한다.”[16]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확립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의미하는 바는 실정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처럼 어리석고 그들의 정념은 그처럼 맹렬하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만이 이 모든 문제를 마땅한 방법으로 고려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가가 제공하는 것 말고는 인간의 사악함을 억제할 효과적인 교정수단은 남아 있지 않다.”[17]
[16] 같은 책, BK. VII, chap. ii, sec. 1.

[17] 같은 책, BK, VII, chap. i, sec. 11.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성에 따라서 자신들의 삶을 이성에 의해 영위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바로 그 본성으로 인해 어리석고 사악하다면, 이성의 명령인 자연법이 어떻게 해서 사회생활의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질서일 수 있으며,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가? 푸펜도르프뿐만 아니라 모든 논자들도 그들이 자연법이라고 부르는 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바의 인간본성으로부터 연역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있어야 하는 바의 인간본성, 즉 자연법에 일치한다면 있게 될 그런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연역되는 자연법이 아니라, 이런 저런 방식으로 전제된 자연법으로부터 연역된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이상적 본성이다[18].

 [18] 인간의 현실적인 본성과 이상적인 본성이 앞에서 그 일부를 인용했던 진술에서 뒤섞여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앞의 진술을 따라가면 자연법의 기초를 발견하는 일은 쉽다. 인간은 자신의 보존을 극도로 열망하고, 그 자신만으로는 욕망에 노출되어 있으며, 자신의 동료의 도움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현저하게 공동선에 기여하는 동물이라는 것은 아주 분명하지만, 항상 심술궂고, 화를 잘 내며, 쉽게 흥분을 잘 하고 재빠르고 강력하게 해를 끼치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동물들이 생존하여 현세에서 자신의 조건에 맞는 좋은 것들을 즐기기 위해서는, 그가 사회적이며, 즉 기꺼이 자신과 같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연결하며,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어떤 원인을 가지기는커녕 자신의 행복을 유지하고 증가시킬 이유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행동하는 일이 필요하다." (Bk, II, chap. iii, sex, 15)

 

모든 자연법론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정법이 자연법에 일치하는 한에서만 유효하다면, 관습에 의해 제정된 어떤 규범도, 또는 자연법에 반대되는 인간 입법자에 의해 설정된 어떤 규범도 무효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실정법의 가능성을 자연법보다 하위에 있는 규범체계로 인정하는 이론의 불가피한 귀결이다. 이러한 귀결을 지키는 범위에 따라서 논자의 성실성이 시험된다.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철학자들은 실정법과 자연법의 충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시험을 회피한다. 그리하여 홉스는 실정법이 결코 이성에 반대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자연법에 반대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다음처럼 말한다. “그 어떤 시민[즉 실정]법도 신의 비난을 받지 않으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법이 자연법과 대립해 있다는 것[19]은 불가능하다.

“자연법과 시민법은 서로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범위가 같다. … 자연법은 …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시민법의 일부이다. 거꾸로 또한 시민법은 자연의 명령의 일부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모든 시민이 시민법에 복종하도록 서약했다. … 그러므로 시민법에 복종하는 것은 또한 자연법의 일부이기도 하다.”[20]

홉스는 법이 결코 이성에 대립할 수 없다는 것을 법률가는 동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누구의 이성이 법으로 받아들여지는가라고 묻는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어떤 개인의 이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학파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법에도 많은 모순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홉스에 따르면 법의 내용을 규정하는 것은 국가의 이성, 공동체의 이성이며, 이 법은 동시에 실정법과 자연법이다.

“우리 이 인조인간, 즉 국가의 이성과 국가의 명령이 법을 만든다. 그리고 국가는 그들의 대표이지만,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법에서의 어떤 모순도 쉽게 일어날 수 없다. 모순이 생겨나더라도 동일한 이성이 해석이나 개정을 거쳐 그 모순을 없앤다.”[21]
[19] Hobbes, De Cive, chap. xiv, sec. 10.

[20] Hobbes, Leviathan, Part II, chap. xxvi.

[21] 같은 곳.

여기서 명백한 것은 자연법론이 실정법을, 즉 효력을 행사하는 정부에 의해 확립된 모든 실정법을 정당화하는 것 말고 다른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홉스의 철학에서만큼 항상 명료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다른 학자들의 압도적 다수의 의식적·무의식적 성향이다. 그들은 실정법과 자연법의 충돌이 원리상 가능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충돌은 단지 예외적으로만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이 발생하더라도, 실정법의 유효성은 거의 의심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 문제에 대한 푸펜도르프의 태도는 전형적이다. 그는 시민법이 자연법에 대립할 수 있을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는[22] 사람들의 견해를 거부한다. 그는 다음처럼 강조한다. “물론 자연법에 반대되는 시민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덧붙인다. “그러나 미친 인간 외에는 누구도, 즉 마음속에 국가의 파괴를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런 종류의 입법이 통과되기를 원하지 않는다.”[23] 따라서 실정법과 자연법의 충돌은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배제된다. 결과적으로 푸펜도르프는 사실상 모든 실정법은 적어도 원리상 자연법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실로 모든 나라에서 자연법의 대부분의 특징은, 그것이 없다면 사회 자체에서 평화가 유지될 수 없는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민법의 효력을 가지고 있거나 시민법의 체계안에 포함되어 왔었다.”[24]
“실로 시민법은 적어도 자연법의 일반원리를 전제하거나 포용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서 인류의 안전이 유지된다. 자연법이 시민법을 폐지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시민법은 단순히 각 국가의 분명한 이익이 요구했던 것만큼 이런 일반원리들에 추가될 뿐이다.”[25]
[22] Pufendorf, Elementorum Jurisprudentiae Universalis Libri Duo, Definition XIII, sec. 6.
 
[23] Pufendorf, De Jure Naturae et Gentium, Bk. VIII, chap. i, sec. 2.

[24] Pufendorf, Elementorum Jurisprudentiae Universalis Libri Duo, Definition XIII, sec. 18.
 
[25] Pufendorf, De Jure Naturae et Gentium, Bk. II, chap. iii, sec. 11.

푸펜도르프는 홉스가 실정법과 자연법을 동일시한 데 대해 곧바로 반대했음에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홉스의 논증들 중 하나를 받아들인다. 홉스는 선과 악에 관한 우리 판단의 주관적 성격에 관한 어떤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선’과 ‘악’은 우리의 욕구와 혐오를 의미하는 이름이며, 이것은 사람들의 기질·습관·주의가 달라지면 달라지고, 사람들은 미각·후각·청각·촉각·시각에서 무엇이 쾌락이고 무엇이 불쾌인지에 관한 감관에 대한 판단에서뿐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행위에서 무엇이 이성에 일치하고 무엇이 이성에 일치하지 않는지에 대한 판단에서도 서로 다르다. 아니 동일한 사람도 다른 때에 달라진다. 한 때는 선이라 하여 찬양하던 것을 다른 때에는 비난하며 악이라 부른다. 거기에서 논쟁과 다툼이 생겨나고, 종국에 가서는 전쟁이 발생한다.”[26]

따라서 그는 자연법이라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는 지금까지 그것에 대해 글을 썼던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27]는 것을 인정한다. 가치판단의 차이로부터 다툼이 생겨나고 평화가 깨지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라 부르는 것의 공통 척도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공통 척도가 올바른 이성이라고 말한다. 만약 자연의 사물에서(in rerum natura) 그러한 것이 발견되거나 인식된다면 나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어떤 논쟁에 대해 판정을 내리기 위해 올바른 이성을 요청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성을 의미할 뿐이다. 올바른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확실한 것은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사람들의 이성이 그 자리를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 또는 사람들은 주권의 권력을 가진 그 또는 그들이다. … 결국 시민법이 모든 시민들에 대해 그들 행위의 척도이며, 그것에 의해서 그들이 옳은지 그른지, 유리한지 불리한지, 덕인지 악덕인지가 결정된다.”[28]

자연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이며, 정부가 국가를 대표한다. 홉스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한 국가에서 자연법의 해석은 도덕철학의 책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권위가 없다면 저자들의 권위는 자신들의 의견을 법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들의 의견이 그런 식으로 진리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이 책에서 도덕적인 덕에 관해 썼던 것은, 그리고 평화의 획득과 유지를 위해 도덕적 덕이 필요하다는 것에 관해 썼던 것은, 그것이 분명히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곧 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의 모든 국가에서 그것이 시민법의 일부이기 때문에 법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비록 자연스럽게 이성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법이 되는 것은 주권의 권력에 의해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문법을 자연법이라 부르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이에 대해 대단히 많은 책들이 발간되었지만, 그 책들에서 서로 모순되고, 자신과도 모순된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29]

이 점에 관해 홉스를 따르면서 푸펜도르프는 다음처럼 주장한다.

“‘선·악의 지식’이 즉 어떤 것이 국가에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 어떤 것이 이익이 되는지 불이익이 되는지에 관한 지식이 ‘개인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선동적인 견해이다. 즉 군주가 공공의 선을 확보하기 위하여 착수가 이루어지도록 명한 수단의 적합성에 관해 권한을 부여받은 개인이 판단을 내리는 것이며, 결국 각자의 복종 의무는 이 판단에 달려있는 것이다.”[30]

그는 다음처럼 진술한다.

“판단과 욕구의 엄청난 다양성이 사람들 사이에 관찰되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해서 무수한 논쟁이 발생하기 때문에, 각자가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고, 다른 사람들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국가에서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것이 무엇인지, 명예로운 것과 불명예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하는 것을 공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평화에 대한 관심을 위해서 필요하다. 그래서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자연적 자유 중 무엇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은 국가의 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권리 사용을 어떻게 자제해야 하는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시민은 자신의 권리로써 다른 사람에 대해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요구할 수 있는가를 공적으로 규정하는 일이 필요하다.”[31]

이것은, 만약 개인이 실정법의 규칙이 자연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더라도, 지배적인 것은 사적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국가의 권한을 부여받은 권위의 의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이 전제군주에 대해 명령을 내릴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를 논하면서, 푸펜도르프는 매우 독특한 견해를 표명한다. “정의의 추정은 항상 군주 편에 있다.”[32]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실정법이 자연법이라는 추정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26] Hobbes, Leviathan, Part I, chap. xv.

[27] Hobbes, The Elements of Law, ed. by F. Toenni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28), 57.

[28] 같은 책, 150.
 
[29] Hobbes, Leviathan, Part II, chap. xxvi.

[30] Pufendorf, De Jure Naturae et Gentium, Bk. VIII, chap. i, sec. 5.

[31] 같은 책, Bk. VII, chap. sec. 2.

[32] Pufendorf, Elementorum Jurisprundentiae Universalis Libri Duo, Observation V, sec. 21.

실정법을 자연법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다른 방식은 자연법론의 대부분의 추종자들이 승인하는 정의에 대한 규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외에 다름 아니다. 홉스는 이 정식 안에 자신의 것이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실정법의 질서가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통찰하고 있다. 그는 실정법이 없다면 이정식의 의미 안에서 정의란 있을 수 없다고 결론내린다. “국가가 없으면 아무것도 부정의가 아니다.”[33] 푸펜도르프는 로마법학에 따라서 자연법상의 정의를 각자에게 그에게 합당한 것을 주려는 부단한 의지[34]로 규정한다. 그러나 그는, 어떤 사람이 가해자에 대하여 어떤 행위를 인간의 법정에 가져올 가능성을 가지는 한에서만, 완전한 권리를 기초로 해서 어떤 것이 그에게 합당한 것이라고 하는 말을 덧붙인다[35]. 그것은 자연법의 의미 내에서 규정되는 정의는 실정법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푸펜도르프는 위에서 인용된 진술을 하면서, 무수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자연법은 각자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실정법이 결정하기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홉스를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푸펜도르프의 자연법론은 자연법과 실정법의 관계에 관한 본질적 물음에서 그 영국 철학자의 목표와 동일한 것을 지향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연법에 의한 실정법의 정당화이다.

[33] Hobbes, Leviathan, Part I, chap. xv.
 
[34] Pufendorf, Elementorum Jurisprundentiae Universalis Libri Duo, Definition XVII, sec. 1.

[35] 같은 책, Definition XVIII, sec. 2.

최종적으로, 자연법론의 모든 지도적인 대표자에 의해 주장된 원리가 있다. 이 원리는 자연법과 실정법의 충돌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하지만, 기존의 법적 권위를 위협하는 효력을 빼앗아버린다. 그것은 자연법 하에서는 저항권은 존재하지 않거나 단지 제한적으로만 존재한다는 독단적 주장이다. 홉스에 따르면, “국가 안에 있는 누구도 그들이 강제적인 이[그들의] 권력을 혹은 사람들이 통상 그렇게 표현하는 바 정의의 칼을 부여한[자연법에 의해 그렇게 할 의무가 있었던] 사람 또는 사람들에게 저항할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36]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또한 그로티우스는 “국가기관이 자연법 혹은 신의 명령에 반대되는 어떤 질서를 정한다면, 이 질서는 수행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만약 부당한 취급이 우리에게 가해졌다면 [주권자의 권력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우리는 힘에 의한 저항보다는 인내를 해야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Antigone)의 구절을 인용한다. “당신은 국가가 권력의 자리에 앉힌 사람에게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정의롭든지 정의롭지 않든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38] 그러면서 주권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저항이 정당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고 결론내린다[39]. 푸펜도르프가 국가는 시민에게 어떤 나쁜 일도 할 수 없다고 한 홉스의 주장을 거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40], 그러나 그는 군주에 의한 경미한 침해는 그 지위의 숭고함과 그들의 다른 은혜를 고려하고, 우리의 동료 시민과 국가 전체를 위해서 간과되어야 한다고 진술한다[41]. 보다 심각한 침해에 대해서는 그는 다음처럼 말한다.

“적의를 품은 군주가 가장 소름끼치는 위해를 가한다고 위협하더라도, 그 국가를 떠나거나 도망쳐서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다른 나라의 비호를 받는 것이 (폭력적인 군주, 그러나 자신의 조국의 군주를 향해 무기를 들기보다는) 더 낫다. 그러나 군주가 적의를 품고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려고 하는데도, 게다가 그에게는 도망갈 곳이 전혀 없다면, 어찌해야 할까?”[42]
[36] Hobbes, The Elements of Law, p. 86.

[37] Grotius, 앞의 책, Bk. I, chap. iv, sec. 1.

[38] 
같은 책, sec. 2.


[39] 
같은 책, sec. 7.


[40] Pufendorf, De Jure Naturae et Gentium, Bk. VII, chap. viii, sec, 4.


[41] 
같은 책, sec. 5.


[42] 
같은 곳.

이 물음에 대해 그는 직접적인 대답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처럼 진술한다.

“그러나 단지 터무니없는 일을 공개 선언하면서 무고한 시민을 죽이려는 군주의 예는 거의 발견될 수 없기 때문에, 보다 어려운 문제는, 예컨대 그의 시민이 부당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군주가 권리를 구실 삼아 분노를 폭발했을 때, 무엇이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 점에 관해서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 시민은 … 의심의 여지없고 공개된 신의 명령에 반항하는 주권자의 명령에 구속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는 가능한 한 도망칠 곳에 의지해야 하고, 군주에 대해 아무 의무도 없는 제3자의 보호를 찾아다녀야 한다. 아니 도망이 불가능하다면, 죽이기보다 죽음을 당해야 할 것이고, 군주 개인 때문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통상 그러한 상황에서는 큰 소용돌이가 생겨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때때로 윗사람의 가장 공공연한 침해에 대해서는 힘에 의해서 자신의 안정을 방어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그러나 나머지 시민들이 자신들의 복종을 거부하고 그 무고한 사람을 힘에 의해서 보호하는 것은 용서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덧붙인다[43].

이 문제에 관해서 로크는 비교적 더 멀리까지 가고 있다. 그는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군주의 명령에 반대할 수도 있는가? 어느 누구든 자신의 권리가 침해된다고 생각하지만, 군주가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군주에게 저항할 수도 있는가? 이렇게 되면 모든 정치체(體)는 혼란되고 전복되어, 통치와 질서 대신에 무정부상태와 혼란만이 남게 될 것이다. ― 나는 이에 대해 정의롭지 못하고 불법적인 힘을 제외하고는 힘으로 맞서서는 안 된다고 대답한다. 다른 경우에 힘으로 맞서는 사람은 누구나 신과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정당한 비난을 자초하게 된다. 그리하여 흔히들 이야기하는 위험이나 혼란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44]

통치에 의한 힘의 사용이 정의롭지 못할 뿐 아니라 불법적일 때, 즉 자연법뿐 아니라 실정법에 위배될 때, 저항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결정할 권한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사적인 개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 설립의 취지는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모든 특정 구성원의 모든 사적 판단은 배제되고, 확고하게 서 있는 규칙에 의해서 공동체는 모든 당사자와 무관하게 그리고 그들에 대해 꼭 같이 심판자가 되며, 또한 이들 규칙의 집행을 위해 공동체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권리문제에 관한 사회 내 구성원들 간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불화를 판정하고, 어떤 구성원이든 사회에 대해 범한 죄에 대해서는 법이 정했던 처벌을 내린다.”[45]
“그러므로 어떤 구성원이든 하나의 사회로 통합되어, 각자가 자연법에 대한 자신의 집행권을 포기하고, 그 권한을 공공에 맡기게 되면, 거기에서 유일하게 남아있게 되는 것은 정치사회 또는 시민사회이다. … 그리고 이렇게 되면 일체의 분쟁거리에 대해 판정을 내리고, 국가 구성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침해를 시정할 권위를 가진 지상의 재판관을 설정함으로써, 자연의 상태는 국가의 상태로 이행하게 된다. 그 재판관은 입법부이거나 입법부가 지명한 판사이다.”[46]

이것은 통치에 의한 힘의 정의롭지 못하고 불법적인 사용이 존재하는지 어떤지에 관한 문제가 실정법에 의해 확립된 권위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로크는 다른 것과 연관해서는 다른 식으로 주장한다.

“군주나 입법자가 그들의 신탁(信託)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지 여부는 누가 판정할 것인가? 아마도 군주가 단지 자신의 정당한 권한을 사용할 뿐일 때에도, 불만을 가진 파당적인 사람들이 인민들 사이에 이것을 퍼뜨릴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처럼 대답할 것이다. 인민들이 판정자라고. 왜냐하면 수탁자 또는 대리인이 자신에 위임된 신탁에 맞게, 그리고 그것에 따라서 행동하는지 여부를, 그가 그의 신탁에 실패할 때 그를 버릴 권한을 가지고 있는 판정자 말고 누가 있겠는가? 이것이 사적 인간의 특정한 경우에서 합리적이라고 한다면, 수백만의 복지에 관련되어 있으며, 방지되지 않을 경우 그 해악은 점점 커지고, 그것에 대한 보상은 대단히 어려워서 위험에 처하게 되는 극히 큰 문제에서 어떻게 이것과 다른 방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47]

그러나 자연법에 관련하여 로크만큼 멀리까지 간 사람은 거의 없다. 예컨대 자연법론을 전형적으로 적용한 법 철학자인 칸트는 최고의 입법적 권력에 대한 인민 편에서의 저항은 결코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최고의 입법적 권리가 한 명의 군주에게서 구현되는 경우에그 저항은 특히 비난받을 만하다는 점을 강조한다[48].

[43] 같은 곳.

[44] John Locke, Second Treatise of Civil Government, chap. xviii, secs. 203-204.


[45] 
같은 책, chap. vii, sec. 87.


[46] 
같은 장, sec. 89.


[47] 
같은 책, chap. xix, sec. 240.


[48] Immanuel Kant, “Die Metaphysik der Sitten,” in Gesammelte Schriften, herausgegeben von der Rgl. preuss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Berlin: Georg Reimer, 1907), VI, 320.
 

자연법을 해석하는 일이 실정법에 의해 확립된 권위의 특권이고, 이들 권위에 저항할 권리는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매주 제한적이어서 실제로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견해는 자연법론의 완전한 변질로 귀결된다. 그 이론의 고전 저술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살펴보면, 그것의 기능은, 실정법 위에 자연법이 있다는 생각이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 실정법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강화시키고 있다. 자연법론은 전체로 보았을 때 엄격한 보수적 성격을 지닌다. 국제법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는 자연법론의 개혁적인 성향은 국내법에 관한 한 오히려 과대평가되고 있다. 그러한 개혁적인 성향이 나타나는 곳에서, 자연법으로 제시된 것에 실정법을 순응시키는 것은 자연법의 자동적인 결과라고 가정되지 않고, 입법적 권위가 행한 귀결로 기대된다는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더욱이, 입법적 개혁에 단적으로 반대하는 자연법론의 추종자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예컨대 프로테스탄트 자연법론의 매우 영향력 있는 대표자인 베네딕투스 윈클러(Benedictus Winkler)는 그의 저서 법 원리 5(Principiorum Juris Libri Quinque, 1615)에서 개혁가(novatores) 즉 법의 분야에서 혁신을 도입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그들은 감히 정의의 바로 그 기초를 뒤흔든다.” 법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항상 위험하다[49]. 다음은 그의 견해의 귀결일 뿐이며, 또한 거의 모든 다른 저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즉 자연법뿐만 아니라 실정법도 선을 공급한다(jubet bona).

[49] 본장의 각주 [8]에 나온 나의 논문 “Naturrecht und positives Recht” 참조.

특정 인간의 행동이나 사회제도가 자연적수단에 불과하다는 판단은 단지 그 행동이나 사회적 제도의 전제된 규범, 즉 자연법론을 제시하는 특정 학자의 주관적 가치판단에 기초하는 규범과 일치한다는 것만을 실제로 의미하기 때문에, 한 가지 자연법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당히 모순되는 원리들을 주장하는 다양한 자연법론이 존재한다. 홉스에 따르면 이성은 자연법에 일치하여 수립된 통치 권력이 그 본성상 절대적이며, 무제한하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주권자의 이들 권리의 총체, 즉 평시와 전시에서의 무력의 절대적 사용, 법의 제정과 폐기, 재판이나 심의에서의 모든 논쟁에서의 최고의 사법권과 판결권, 모든 법관이나 장관을 임명하는 권리의 총체가, 주권자가 가지는 그 밖의 권리와 함께, 국가 안에서 주권자의 힘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이는 마치 국가의 설립 이전에 각자가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신 안에서 절대적으로 행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주권이 제한되고 완화될 수 있는 방식으로 국가가 구성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이다.”[50]
“주권은 나누어질 수 없으며, 여러 종류의 통치권의 혼합체로 보이는 것은, 실은 그것이 자체의 혼합체가 아니라 우리의 지성에서의 혼동이며, 이런 혼동 때문에 우리 자신을 누구에게 종속시켜야 하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없다.”[51]
[50] Hobbes, The Elements of Law, 87쪽 이하.
[51] 같은 책, 89쪽 이하.

그러나 로크는 자연으로부터 다음을 연역한다.

“어떤 나라의 최고의 권력도 …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에 대해서 절대적일 만큼 자의적이지 않고, 아마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회의 각 구성원이 입법자인 인간 또는 집회에 위탁된 연합 권력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은 개인이 사회에 들어가기 전인 자연의 상태에서 가지고 있었던 권력 이상의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권력 이상을 남에게 양도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을 지배할 또는 어떤 다른 사람을 지배할 절대적·자의적 권력, 즉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재산을 빼앗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52]
“그들(즉 자연법에 따라서 국가를 수립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배할 절대적이며 자연적인 권력을 어떤 한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에게 넘기고 그 관리자의 손에 맡겨서, 그의 무제한의 의지를 자신들에 대해 자의적으로 행사하도록 의도했다는 것은, 비록 그들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 하더라도, 생각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연 상태보다 나쁜 조건에 놓이게 된다. 자연 상태에서 그들은 다른 사람의 침해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방어할 자유가 있었고, 그 침범이 한 사람에 의한 것이든 무리를 이룬 다수에 의한 것이건 간에 동일한 정도의 힘을 유지할 자유가 있었다.”[53]
[52] Locke, 앞의 책, chap. xi, sec. 135.

[53] 같은 장, sec. 137.

루소는 로크에 이어서 다음처럼 진술한다.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권리와 심지어는 인간의 의무마저도 양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에게는 보상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한 포기는 인간의 자연[본성]과 양립할 수 없으며, 그의 의지로부터 모든 자유를 빼앗는 것은 그의 행동으로부터 모든 도덕을 빼앗는 것이다. 결국, 한편으로 절대적 권위를 설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무제한적 복종을 설정하는 것은 공허하고 모순된 협정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아무런 의무가 없게 된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을까? 등가도 없고 교환도 없는 이런 규약만으로는 그 행동은 무효화되지 않을까?”[54]
[54] J.J. Rousseau, Contract Social, Bk. I, chap. iv.

이런 해석의 자연법론에 따르면, 국가의 권력은 필연적으로 제한이 있고, 절대군주는 자연에 반하는 것이다. 로크는 다음처럼 진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절대군주제를 이 세상에서 유일한 정부형태로 간주하지만, 이 절대군주제가 실로 시민사회와 결코 맞지 않으며, 따라서 전혀 시민정부의 형태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55]

자연법과 일치하는 유일한 정부 형태는 민주주의이다. 즉 그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부이다.

“사람들은 이미 언급되었듯이 본성상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며, 독립적이기 때문에, 누구도 스스로 동의하지 않고서 이재산을 뺏길 수도 다른 사람의 정치권력에 종속할 수도 없다.”[56]
“그러므로 자연의 상태로부터 공동체로 통합되는 누구든, 다수보다 더 큰 숫자에 대해 명시적인 합의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사회에 통합하기로 한 목적에 필요한 모든 권력을 다수에게 넘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하나의 정치사회에로 결합한다는 것에 단순히 동의하는 것만으로 행해지며, 이것이 국가에 가입한 개인들 혹은 국가를 형성한 개인들 간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할 필요가 있는 조약의 전체이다. 그리하여 어떤 정치사회를 시작하는 그리고 실제로 구성하는 것은 다수를 이루는 사람들의 자유가 그런 사회로 결합하기로 혹은 합해지기로 동의한 것 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세계에서의 모든 합법적 정부의 시작이 되었고, 시작이 될 수 있었던 것, 그럴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다.”[57]
[55] Locke, 앞의 책, cha, vii, sec, 90.

[56] 같은 책, chap. viii, sec. 95.

[57] 같은 장, sec. 99.

그러나 정확하게 동일한 방법에 의해서, 필머는 민주주의가 자연법에 반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의 주요한 명제는 인민이 지배하거나 지배자를 선택하는 것은 반자연적이다[58]. 그는 최고의 권력을 전체 인민에 두는 사람에 대해 반대를 한다.

“전체 왕국의 총 집회가 군주를 선출한다는 것이 일찍이 알려진 적이 있는가? 세계 전체에서 그러한 예가 발견된 일이 있는가? 그런 것을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따라서 그 결과 정부형태나 왕이 이 상상적인 자연법에 따라서 결정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59]

다수결의 원리에 대해 그는 다음처럼 말한다.

“다수이든 어떤 다른 것이든 많은 숫자의 나머지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 자연법에 의해 증명될 수 없다. 전체가 아닌 다수자의 행위는 모든 사람에 대해 구속력을 갖지 않으며, 그들에 동의하는 자에 대해서만 구속력을 갖는다.”[60]

그의 가장 강력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신은 항상 그 자신의 인민을 군주를 통해서만 통치한다.”[61]

[58] Sir Robert Filmer, Patriarcha, chap. ii.

[59] 
같은 장, sec. 5.


[60] 
같은 장, sec. 6.


[61]
 
같은 장, sec. 10.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적 소유의 원리와 이 원리에 근거해 있는 법적·경제적 체제의 정의(justice)이다. 최근의 법학이나 정치이론에서 자연법론의 매우 주목할 만한 재() 부활이 관찰될 수 있다는 사실은 상당 부분 법률가나 정치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생각, 즉 자본주의 체계가 공산주의와의 투쟁에서 단지 그 이론에 의해서만 효과적으로 방어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실로 그로티우스에서 칸트에 이르기까지 자연법의 가장 탁월한 이론가들은 사적 소유가 신적 자연이 인간에 부여한 신성한 권리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신이 모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주었다는 것을 계시하는 것으로 교회가 성경을 해석할 때, 자연법론의 이러한 귀결은 매우 놀랄만한 일이다. 따라서 사적 소유, 즉 다른 모든 사람을 제치고 한 사람이 사물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다는 것이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과 일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는 오히려 어려웠다. 그러나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근원적으로 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의 섭리와 일치하여 죄에 떨어지고, 그리하여 나쁘게 되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물들은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 두 번째의 타락 이후의 본성[자연]에 따라서 인간의 사적 소유가 되었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그로티우스는 신은 원래는 소유의 공동체를 설립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사물의 이러한 상태는 아담을 전형으로 하는 첫 번째 인간들의 순수한 상태에 일치할 뿐이라고 진술한다. 그들은 악덕을 몰랐으며, 타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순수하고 죄 없는 삶을 계속하지 못했으며,” “타락하고 교활해졌으며,” 이 타락의 과정에서 원시시대의 공동 소유권 중 처음에는 동산(動産), 그 다음에는 부동산이 폐기되었다.” 키케로의 권위를 언급하는 그로티우스는 이러한 변화에서 자연과의 충돌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62].

[62] Grotius, 앞의 책, Bk. II, chap. ii.

사적 소유의 권리를 자연에서부터 연역한 가장 최초의 시도 중 하나는 피터보로(Peterborough)의 주교인 리처드 컴벌랜드가 제시한 것이다. 그는 자연법에 관해 잘 알려진 저서[63]의 저자이다. 그는 다음처럼 쓰고 있다.

“우리는 사물들의 본성이 우리에게 … 선과 악에 대한 지식, 심지어는 많은 사물들에 공통적인 지식, 말하자면 생성과 타락의 원인을 알도록 하는 지식을 어떻게 심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제 나는 인간 육체의 힘도 가시적 세계의 모든 다른 부분들의 힘도 물질과 운동에서 성립하는데, 이 물질과 운동은 유한한 양과 어떤 한계를 가지는데, 이것을 넘어서까지 자신을 확대할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고자 한다. 여기서 모든 자연적 물체에 관한 이들 가장 명백한 공리가 나온다. 동일한 물체가 동시에 한 장소 이상의 장소에 있을 수 없다는 것, 여러 사람들의 대립되는 의지에 복종시키기 위해 동일한 물체가 동시에 여려 장소를 향해 움직일 수 없다는 것 (특히 반대 방향이면 움직일 수 없다는 것), 그 사람들은 너무나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명이 공모하여 하나이며 동일한 결과나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한 사람의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 등이다.”[64]
“공통 선을 증진시키는 것을 의무로 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사람들이 공공의 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사물이나 인간의 노동을 필요로 하는 한, 그들이 사물이나 인간의 노동을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며, 앞서 말한 필요가 계속되는 동안 그것이 불법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에, 즉 그 사물들은 적어도 그 동안에는 그들의 소유가 되며, 그들 자신의 것으로 불린다는 것에 동의하는 의무까지도 진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다른 모든 이익의 근거가 되는 각 특정한 사람의 행복. 생명·건강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물의 본성이 드러낸다는 것이며, 사물의 사용은 적어도 얼마동안은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65]

자연법은 개인의 소유권을 확립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런 권리가 침해될 수 없다는 것도 명령한다.

“사물과 인간에 대한 개별적인 지배의 확립을 명령하는 자연의 이치와 법은, 이 사물과 인간이 계획된 목적에 답하기 위하여 경험에 의해 확립되고 증명된 지금, 그것들을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존할 것을 또한 보다 분명하게 명령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상들에 의해 형성되고 모든 국민과 국가의 동의나 허락에 의해서 확립된 지배의 구분이 현존하는 모든 것의 생산과 보존에 충분하였다는 것이, 그리고 지금 인류가 소유하였다고 우리가 보고 있는 행복의 모두를 획득하기 충분하였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 이외에 그것이 사람들의 교류와 상호협조의 기회를 제공하며, 모두를 현세에서나 내세에서 보다 큰 행복에 도달하게 한다는 것도 명백하기 때문이다.”[66]

소유에 관한 실정법이 자연법에 따라서 확립한 재화의 분배는 정의롭다. 그런 분배는 가능한 가장 큰 행복을 보장한다. 따라서 그것을 변경하고 그것을 다른 경제 체제에 의해서 대체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자연법에 어긋나며, 따라서 정의롭지 않다.

“분명한 일이지만, 그 이외에 우리가 현재의 구분에서 기대할 가장 큰 이유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현재 즐기고 있는 행복은, 신과 인간이 정한 모든 권리를 침해하고 전복하여 어느 누군가의 판단이나 감정에 따라서 모든 소유의 새로운 구분을 도입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사려 깊은 인간이 얻기를 희망할 수 있는 행복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떤 한 인간의 지성도 혹은 사람들의 집단도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시도라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이 항목에 대하여 그렇게 폭넓게 갈라진다는 것,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전쟁과 비참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예상하기는 쉽다. 그러므로 소유에 관한 사안에서 개혁을 하려는 욕구는 정의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동선과 분리될 수 없는 이 법과 일관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다음 문장을 (그로티우스와 함께) 진정으로 찬성한다. “누구든 지금까지 자신에게 전해진 국가의 정부형태를 보존하는 것이 정의롭다.” 그러나 나는 그가 하나의 국가에 대해서만 긍정했던 것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거대한 사회(내가 신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하고, 주요한 정부기관의 구분을 포함하는 정부 형태에 단순히 한정되어서는 안 되고 보편적으로 사물의 구분에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정도에서 나는 상이한 국가 간에나 특정한 국가 내에서도 사물과 사람들에 대한 고대의 지배구분을 침해하지 않고 보존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최선의 목적에 전달된다는 것을 경험이 보여주었으며, 이 목적과 일치하면서 첫번째 만들어진 그런 구분을 금지할 수 있는, 그러므로 어느 누구에게도 해로울 수 없는 어떤 자연법도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분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만들도록 의무화한 (올바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동의하였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동일한 이유가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동일한 구분을 승인하고 확정하도록 의무화할 것이다.”[67]
[63] Richard Cumberland, De legibus naturae (London: 1672). 영어 번역은 A Treatise of the Laws of Nature (London: 1727).

[64] 같은 책, chap. I, sec. 21.

[65] 같은 책, chap. vii, sec. 2.

[66] 같은 장, sec. 9.

[67] 같은 곳.

자연법론의 많은 추종자들은 국가의 본질적인 목적 중 하나는, 즉 실정법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자연법에 의해서 확립된 소유권을 방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의 권력을 넘어선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실정법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이 권리를 폐기하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이 자연법에 의해 제한된다는 로크의 명제는 우선 소유에 관계한다. 로크는 다음처럼 쓰고 있다.

“최고의 권력은 어떤 사람의 소유의 일부를 그의 동의 없이 그로부터 뺏을 수 없다. 왜냐하면 소유의 보존이 정부의 목적이고, 그것을 위해서 사람들은 사회에 참여하게 되며, 인민이 소유를 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가정되고 요구되며, 그런 소유가 없이는 사회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이 사회에 참여했던 목적이 되는 바의 것을 잃어버린다고 그들은 생각함에 틀림없으며, 이것은 소유자에게는 너무나 심한 불합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사회에서 소유를 하게 됨으로써, 공동체의 법에 의해서 그들의 것이 되는 재화에 대한 권리를 가지게 되며, 그들 자신의 동의 없이는 누구에게도 그들의 물질이나 그것의 일부를 그들로부터 뺏을 어떤 권리가 없다. 이것이 없으면 그들은 전혀 소유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권리에 의해 자신이 원할 때 나의 동의에 반해서 나로부터 소유를 뺏을 수 있다고 하면, 나는 진실로 전혀 소유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국가의 최고의 권력 혹은 입법적 권력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신민의 재물을 자의로 처분하거나 그것의 일부를 마음 내키는 대로 뺏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 그리고 절대 권력이 필요한 경우조차도 그 권력은 절대적으로 자의적이지 않고, 여전히 이성에 의해 제한을 받으며, 어떤 경우에 절대적이기 위해서 그것을 요구했던 목적에 한정된다는 것을 고려해보자. 우리는 군사 규율의 일반적인 관행을 살펴보는 것 이상을 할 필요가 없다. 군대를 보존하고 그 안에서 전체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서 모든 상관의 명령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이 필요하다. 극히 위험하거나 불합리한 명령에 대해서도 그것에 복종하지 않거나 항거를 하면 사형에 처하는데, 그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사병에게 포화 속을 뚫고 들어가라거나,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공격에 나서라고 명령하는 상관이 자신에게 돈 한 닢을 달라고 하는 명령을 내릴 수 없으며, 자리를 이탈하거나 가장 무모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병에 대해 사형의 선고를 내릴 수 있는 장군도, 일체의 절대적인 생사여탈권을 가지고서 그에게 어떤 명령도 내릴 수 있고 최소한의 불복종에 대해서도 목을 달 수 있지만, 그 사병의 재물의 일부도 임의로 처분할 수 없으며 재화의 일부도 빼앗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맹목적 복종은 지휘관이 권력을 가진 목적, 즉 다른 사람들의 보존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의 재물의 처분은 그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68]

절대적인 생명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적인 소유권은 존재한다. 자연에 함의되어 있는 올바른 이성은 소유가 생명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68] Locke, 앞의 책, chap. xi, secs. 138, 139.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대가들의 그런 진술을 살펴볼 때, 자연법론이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에서 강한 요새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은 이해될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그것을 신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법론과 그것의 특수한 방법에 기초할 경우 사적 소유가 자연에 반하고, 모든 사회적 악들의 원천이라는 것 또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악을 뿌리째 뽑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자연에 의해 명해진 유일한 경제 체제인 공산주의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자연의 법전 또는 그 법의 참된 정신이라는 제목 하에서 1755년 파리에서 익명으로 간행된 책의 주 명제이다[69]. 이 책의 저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 모렐리(Morelly)라는 이름의 소유자이다. 원래는 유명한 백과전서파인 디드로(Diderot)의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 책은 “18세기 사회주의의 위대한 저서[70]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에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바브에프(Baboeuf)는 자주 이 책에 대해 언급했으며, 이것은 푸리에(Fourier)와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뒤에 발전시킨 많은 관념들을 예고하고 있었다[71].

그 제목이 지시하듯이 자연의 법전은 자연법론의 적자이다. 이 저서는 자연은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 의도는 이해될 수 있고, 인류의 행복을 지향하고 있으며, 정의는 우리의 사회적 제도를 자연의 의향과 일치시킴으로써만 확립될 수 있다는 가정으로부터 진행하고 있다. 모렐리는 자연은 하나이고, 항구적이며, 불변한다는 것을, 자연법은 자연이 자신의 피조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온화한 경향속에 함의되어 있다는 것을, 이러한 친근한 감정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논의의 여지가 없는 원리로서 주장하고 있다[72]. 따라서 모렐리는 자연법에 관한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는 이성을 부여받은 피조물의 자연적 정직함[73]을 가정하고 있으며, “사회성"의 법칙을 첫 번째 자연법으로서 공포하고 있다[74]. 실정법의 입법자는 이 자연법을 단지 인식하고 시행하면 된다.”[75] 사회성의 법은 다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자연은 사람들 간의 인간 능력들을 여러가지 비율로 분배하였지만, 생산수단에서의 소유권(자연의 하사품을 산출하는 토지의 소유권)을 모두에게 분할하지 않았고, 자연의 하사품을 사용하도록 각자에게 남겨두었다. 세계는 모든 손님들에게 충분히 제공되는 식탁이며, 모든 접시는 그들의 것이다. 손님들은 배가 고프기 때문에, 접시는 모든 손님들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배가 가득찼을 때만 이 접시는 일부의 손님의 것이 된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단독 소유자(주인)가 되지 않으며, 어떤 사람도 그런 식으로 주장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76] 결국 개인의 소유는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다. 개인의 소유를 확립했던 실정법의 입법자들은 자연의 산물을 분할하는 엄청난 죄를저지른 것이다. “그들은 자연에 따라서 전체가 되어야 할 것을 분할하고, 우연히 나누어졌다면 전체로 원상회복되어야 할 것을 분할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사회성을 파괴한다.”[77] 그리함으로써 그들은 자연의 이성에 어긋나는[78] 일을 벌인다. 개인의 소유를 확립함으로써 입법자들은 사람들의 개인적 이익을 승인하며, 그리하여 모든 악덕 중 가장 큰 악덕인 탐욕이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 보편적 역병(), 이 만성의 [질질 끄는] 열병(熱病), 사회 전체의 질병이 영양분도 효소도 없다면 생겨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소유가 없는 곳에서는 그 비참한 결과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79] 만약 우리가 자연의 현명한 의도를 실현하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행복하게 되는 상황[80]을 낳을 수 있다면, “소유의 정신이라는 괴물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지”[81]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개인의 필수품, 개인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한 직접적인 사용을 위해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 혹은 개인이 매일 해야 하는 일을 위해 이들이 필요로 하는 사물들을 제외하고는, 사회 안에 사적 소유로서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회질서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서는 각 시민은 사회가 부양하고 사용하는 공복(公僕)이며, 자신의 힘. 재능 나이에 따라서 공공의 복지에 기여하는 의무를 가지게 된다[82]. 이것이 공산주의의 본질이다[83]. 말할 필요도 없이 모렐리가 자신의 공산주의적 이상의 기초로 삼은 자연법은 철저하게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는 우주의 보편적 질서에서는 창조주의 눈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무한히 현명하고 가능한 만큼 선하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시비 걸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창조주 앞에서는 물리적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84] 그의 이상국가의 헌법에서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종교교육은 의무이다. 아이들은 최고의 존재, 우주의 창조자, 선한 모든 것의 자비로운 원인(Cause)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85].

[69] Code de la Natur ou Le véritable Esprist de ses Loix. 다음의 제목으로 재출간되었음. Collection des Economistes et des Réformateurs Socicuer de la France, by E. Dolléans (Paris, 1910).

[70] A. Lichtenberger, Le Socialisme au XVIIIe siècle (Paris: F. Alean, 1895), 114.
 
[71] Dolléans, 앞의 책, v쪽 이하, 그리고 Kingsley Martin, French Liberal Thought in the Eighteenth Century (London: E. Benn, 1929), 243.

[72] 
같은 책, 23.


[73] 
같은 책, 17.


[74] 
같은 책, 36.


[75] 
같은 곳.


[76] 
같은 책, 13.


[77] 
같은 책, 37.


[78] 
같은 책, 39.


[79] 
같은 책, 16.


[80] 
같은 책, 84.


[81] 
같은 곳.


[82] 
같은 책, 85쪽 이하.


[83] 
모렐리의 자연의 법전의 러시아 번역과 주석은 1940년에 출간되었다.


[84] Dolléans, 
앞의 책, 57.


[85] 
같은 책, 103.

자연법이 분명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왜 사회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이유는 그것이 인간마음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욕구, 즉 정당화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의식의 정서적 요소로부터 나오는 주관적 가치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주관적 가치판단들에 대해 진리의 존엄을 부여함으로써 이 판단들을 객관적 원리로 제시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주관적인 가치판단을 실재에 관한 진술과 같은 질서를 갖는 명제들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언필칭 주관적인 가치판단들을 실재로부터 연역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것은 가치가 실재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것을 함축하게 된다. 그러나 실재는 자연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법칙과 유사한 법칙에 의해 규정된 사회나 역사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법칙으로부터 인간관계의 정당한 질서를 연역하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겠다. 이것이 바로 19세기에 전개된 사회학과 역사철학의 본질적 성향이다. 이들 두 학과는 자연법론과 직접적인 대치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법론과 동일한 방법을 적용하여, 그들이 대체하고자 의도했던 자연법론과 동일한 오류에 빠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존재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추론이다.

19세기 사회학의 가장 탁월한 대표자는 오귀스트 콩트와 허버트 스펜서였다. 둘 다 인간의 사회생활은 자연이 그런 것처럼 인과적 법칙에 의해 규정된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라마르크(Lamarck)와 그 뒤 다윈(Darwin)에 의해 처음 생물학 분야에서 전개된 생물진화론의 영향 하에서, 그들은 사회적 진화론의 가설에 도달하였다. 이 두 학자의 주요 저서인, 콩트의 유명한 실증철학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86]와 스펜서의 사회학원리(Principles of Sociology)[87]는 사회생활의 기술·설명과 규범적 요청의 선언을 혼동하고 있고, 사회적 실재에 관한 진술과 정치적 가치판단을 혼동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두 학자 모두 과거와 현재를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앞선 진화의 필연적 귀결로서 미래도 설명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진화법칙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한다. 두 학자 모두 사회적 진화의 기본법칙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에로, 최종적으로는 가장 높은 단계로 인류가 영구적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두 학자의 이론 모두에서 이 가장 높은 단계는 그들의 정치적 이상과 일치하며, 이 이상을 그들은 발전적 진화라는 기본법칙으로부터 이런 식으로 연역한다. 이는 마치 자연법론이 자연으로부터 옳은 법을 연역하는 것과 같다. 사회적 진화가 발전적이라는 가정, 즉 문명의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는 가정은 사회적 가치가 사회적 실재 안에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이것은 자연법론의 독특한 전제이다. 스펜서와 마찬가지로 콩트도 이 전제를 자명한 것으로서 보고 논의를 펴나간다. 그러나 가치는 실재가 아니고 실재 안에 내재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실재처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거꾸로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콩트에 따른 기본적인 진화법칙이 스펜서에 따라서 진화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과 상당히 다른 귀결에 이른다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86] 1830년 초판 출간.
 
[87] 1855년 초판 출간.

콩트가 정식화한 진화의 기본법칙에 따르면, 인류는 세 가지 연속적 단계를 거쳐 간다.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적 단계가 그것이다. 앞의 두 단계의 특성은 현재의 문제와 별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단지 세 번째 단계일 뿐이다. 이것은 사회적 진화의 가장 높은 단계이고, 사회적 진화의 필연적 귀결이면서 동시에 이상적 사회 상태이다. 이것은 많은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와 유사하다[88].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콩트도 사변적 생활과 실천적 생활이라는 기본적인 이원론에서 출발한다[89]. 사변적 생활은 철학적 혹은 과학적, 그리고 미학적 혹은 시적인 활동에서 나타나고, 실천적 생활은 생산적 활동에서 나타난다[90]. 콩트는 일반적이고 단순한 것이 특수하고 복합적인 것에 더 우선한다는 것을 기본적인 법칙으로 가정한다[91]. 결과적으로 미래 사회에서는 사변적 생활이 활동적 생활보다 우세하다고 예측한다. 이런 우세야말로 인간진보의 특징이다[92].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철학자 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통치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콩트의 예언에 따르면 미래의 사회에서는 철학자 계급, 즉 과학자와 예술가들로 이루어진 계급이 지배 계급이 된다. 그는 다음처럼 진술한다.

“미래의 정신적 권력은 전적으로 새로운 계급 안에 존재하게...되는데, 이 계급은 지금 있는 계급과 전혀 유사하지 않으며, 기존의 사회의 모든 질서로부터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 나오는 성원들로 새롭게 구성된다. … 이 계급의 사회적 권력은 가톨릭주의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조직에 선행한다. 이 계급은 정치조직의 정식 구성 훨씬 이전에 그것의 형성을 보장하게 될 철학적 노동을 성취함으로써 대세를 움직이는 것이다.”[93]

새로운 통치 계급에 의해 행사되는 정신적 권력은 세속적 권력에 독립해 있을 것이다. 이 세속적 권력은 아마도 콩트가 정치적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정치적 권력의 임무는 세론(世論)과 도덕을 지배하는 데 반해, 세속적 권력의 기능은 정신적 권위에 의해 다듬어진 일반 관념들에 따라서 행위, 즉 활동적 생활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정신적 권위의 기능을 그는 다음처럼 진술한다.

“그것은 교육을 감독하는 기능이다. 행동에 관계하는 모든 일에서는 자문역에 그칠 것이다. 행동에 관해서는 각 경우에 적절한 행동규칙을 상기시켜주는 것 외에는 달리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 세속적 권위는 행위에 관해서는 최고이며, 교육에 관해서는 단지 자문역에 그칠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신적 권력의 큰 특징을 이루는 임무와 특권은 지적일 뿐만 더욱 더 도덕적인 실증주의 교육의 보편적 체계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일일 것이다.”[94]
[88] 콩트의 인류의 실증적 단계와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유사성은 아돌프 멘쩰(Adolf Menzel)이 그의 탁월한 저서인 Naturrecht und Soziologie(Vienna: C. Fromm, 1912), 38쪽에서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멘쩰은 19세기의 사회학은 자연법론과 대척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법과 정확하게 동일한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정치적 요청을 진화의 법칙에 의해 제시한 것이다.
 
[89] Auguste Comte,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 2d ed. by E. Littré (Paris:1864), VI, 50, 영어 번역본으로는 다음을 사용하였다. The Positive Philosophy of Auguste Comte, trans. by Harriet Martineau (London: 1853).
 
[90] 같은 책, VI, 50쪽 이하.
 
[91] 같은 책, 48.
 
[92] 같은 책, 440 .
 
[93] 같은 책, 439-440.
 
[94] 같은 책, 457.

세속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는 단지 산업과정, 즉 경제생활을 감독하는 기능만을 가질 것이다. 콩트는 다음처럼 말한다.

“산업 활동은 제품의 생산과 유통으로 분류된다. 노동의 추상성과 관계의 일반성에 관해서는 후자가 전자보다 분명히 우위에 있다. … 그리하여 우리는 산업의 계층이 형성되어, 은행가가 첫 번째로, 다음에 상인, 다음에 제조자, 마지막으로 농업 종사자가 있음을 발견한다. 마지막 직업의 노동은 보다 구체적이며, 그들의 관계는 다른 세 계급의 그것에 비해 더욱 특수하다. … 가장 구체적인 생산자, 즉 노동자의 고용주와의 충돌이 우리의 산업 국가에서의 가장 위험한 모습인데, 노동자들은 그때가 오면 자본가의 지위가 힘이나 부의 남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능의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성격에 있다는 것을 납득하게 될 것이다. 직공의 행위와 책임은 고용주의 그것보다 범위가 좁고, 그러므로 한쪽이 다른 쪽에 종속되는 것은 다른 모든 사회적 단계와 마찬가지로 거의 자의적인 것도 가변적인 것도 아니다.”[95]

미래 사회는 자연법론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권리의 관념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무의 원리에 근거해 있다.

“정치적 환상과 돌팔이의 부단한 힘은 개혁될 것이다. 그리고 권리에 대한 애매하고 난폭한 논의는 의무에 관한 조용하고 정확한 규정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부정적인 전진이 완료될 때까지는 전자가, 즉 비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반드시 지배적이었지만, 후자, 즉 본질적으로 유기적이며 실증적인 관념이 최종적인 갱생을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전자는 순수하게 개인적인 데 반해서, 후자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의 의무를 보편적 권리에 대한 존경 속에 정치적으로 성립시키는 대신에, 각 개인의 권리는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무로부터 귀결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95]

따라서 사적 기능과 공적 기능의 구별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미래사회의 각 성원들은 공무원 즉 그 국가의 관리가 된다[97]. 그것은 결국 인간생활의 완전한 사회화나 국가화가 되는 것이다. 경제체제에 관련하서는 콩트의 예언은 오히려 불분명하다. 전체적으로 보아 그것은 일종의 온건한 사회주의의 특징을 지닌다. 개인의 소유는 적어도 원리상으로는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본질상 그 성격은 변하게 된다. 개인의 소유는 권리라기보다는 의무가 될 것이다. 개인의 소유를 행사하는 일은 결코 단순히 개인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개인주의 철학에 따라 해석되는 경제제도를 거부한 점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은 옳다. 이 새로운 실증주의 철학에 따르면, 소유는 자본의 형성과 관리를 위해 필요한 사회적 기능이며, 그것을 통해서 각 세대는 다른 세대의 일을 준비한다.”[98]

“자본가들은 자신들을 사회적 부의 예금자로 간주하며, 그것의 사용은 어떤 정치적 책임을 포함하지 않을 것이지만 (극단의 경우는 제외하고), 도덕적 감시 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감시는 도덕적 원리가 논의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 필연적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정신적 권위가 그것의 본래의 기관이 된다.”[99]
[95] 같은 책, 494쪽 이하, 497.
 
[96] 같은 책, 454.

[97] 같은 책, 482.

[98] Auguste Comte, Système de politique positive (Paris: L. Mathias, 1851), 1, 156.

[99] Comte,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 VI, 511.

플라톤의 국가에서 철학자가 왕의 권위를 갖는 판정자로서 구체적 논쟁을 해결하지만, 콩트의 미래 사회에서는 사변적 권위가 자신의 높은 가치와 그 성격의 불편부당성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실제적 충돌의 주요한 조정자가 된다[100]. 또한 세계 평화와 유럽 혹은 서방 국가의 수립[101]이 기대된다. 이 모든 것은 실증주의 철학의 저자가 발견하고 정립한 법칙에 의해 규정된 사회적 진화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 법칙, 즉 진화의 기본적인 법칙에 대해서 콩트는 다음처럼 진술한다.

“나로서는 인간 역사의 전체 과정이 나의 진화론에 대해 결정적인 검증을 제공하고 있으며, 자연철학의 어떤 본질적 법칙도 이렇게 충분히 증명된 경우가 없다는 것이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초기의 문명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가장 선진국가의 현 상태에 이르기까지 이 이론은 인간의 모든 위대한 국면의 성격을 일관되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각 국면의 영속적인 공통 발전에의 참여, 그들의 정확한 계통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산만하고 혼란스러웠을 이 광대한 광경에 완벽한 통일과 엄격한 연속성을 가져다준다. 그러한 조건을 수행하는 법칙은 철학적 소일거리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고, 일반적인 실재의 추상적 표현으로서 간주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사회적 계기의 특징을 이루는 항상적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미래를 결합하는 일이 이 법칙의 논리적 안정성과 함께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 인류는 이제 완전한 실증적 생활의 문지방에 와 있으며,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보다 더 균일하며 더 안정된 새로운 사회체제를 형성하기 위한 그들의 협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102]
[100] 같은 책, 516.

[101] 
같은 책, V, 446; VI, 169.

[102] 같은 책, pp. 434, 436.

발전적 진화의 법칙은 또한 허버트 스펜서 사회학의 주요 도구이다.

“사회는 우선 단순한 계급에서, 복합적인 계급으로, 이중 복합적 계급으로, 삼중 복합적 계급으로 들어가고, 가장 낮은 단계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로의 이행은 이들 단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비록 이만큼 명확하진 않지만 다른 방식으로, 즉 사회를 군사적 사회와 산업적 사회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그것의 발전된 형태에서 강제적 협동의 원리에 따라서 조직되는 데 반해서, 다른 하나는 그것의 발전된 형태에서 자발적 협동의 원리에 따라서 조직된다. 전자는 전제적 중앙권력의 특징을 가질 뿐만 아니라, 개인 행위에 대한 무제한의 정치적 통제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에 반해 후자는 민주적 또는 대의적 중앙 권력의 특징을 가질 뿐만 아니라, 개인의 행동에 대한 정치적 통제의 제한이라는 특징을 갖는다.”[103]
“이 구조[군사적 사회 구조]는 … 그 구성원들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지, 전체가 개인 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권위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최고의 덕이며, 권위에 대한 저항은 범죄이다.”[104]
[103] Herbert Spencer, The Principles of Sociology, sec. 270.

[104] 같은 책, sec. 259. 

그러나 산업적 유형의 사회 내에서는 반대 이데올로기가 지배한다.

“통치기관에 복종할 의무는 제한이 없다는 학설의 장소에, 시민의 의지가 최고이며 통치기관은 개인의 의지를 수행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학설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통치하는 권력은 지위에서 종속적이며, 또한 그 범위에서도 제한적이다. 모든 종류의 행위에 미치는 권위를 가지는 대신에, 많은 부류의 행위에서 배제된다. 통치기관이 음식·의복· 오락에 관한 생활양식을 통제하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생산양식을 지시하는 것도, 거래를 규제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책임을 지지 못하는 정부에 항거하고, 책임지는 정부의 월권에 항거하는 것이 의무가 된다. 입법부가 어떤 방식으로 간섭을 하게 되면, 심지어는 다수가 받아들인 입법부에 대해서도 소수자의 명령 불복종 경향이 일어나기도 한다. 또한 그들이 불공평하다고 비난한 법률에 대한 반대가 때로는 그 법률의 폐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105]

산업적 사회 구조는 보다 높은 유형을, 군사적 사회 구조는 보다 낮은 유형을 나타낸다. 군사적 유형에서 산업적 유형에로의 이행은 속박에서 자유에로의, 전제주의에서 민주주의에로, 국가주의에서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에로의 이행이다.

“그러므로 앞에서의 같은 함의가 담겨 있다. 국가의 기능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은 낮은 사회적 유형의 특징을 이루고, 보다 높은 사회적 유형에로의 전진은 그런 기능들의 포기라는 특징을 지닌다.”[106]
[105] 같은 책, sec. 260
 
[106] Herbert Spencer, The Principles of Ethics, sec. 369.

국가주의에서 자유주의에로의 이행은 사회조직의 군사 유형에서 산업 유형에로의 이행을 함의하며, 동시에 낮은 단계의 도덕에서 높은 단계의 도덕에로의 진화이기도 하다. 스펜서의 진화론적 윤리학에 의하면, “군사적 활동은 점점 줄어들게 되고[줄고], 산업적 활동은 점점 늘어가게 [늘게] 됨에 따라, 거기에 비례해서 행동은 윤리적 제재를 받게 된다. [107]순수하게 산업적인 사회 형태는 순수하게 산업적이지 않은 사회보다도 행위규범에서 도덕적 관념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108]

스펜서는 인간의 삶이 궁극목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가치라고 가정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의 해석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가 선하다는 판단은 그 행동이 삶의 보존을 목적으로서 성취하는데 적절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자기 보존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진화는 개인이 길이와 폭에서 최대에 달했을 때 그 한계에 도달한다.” 이 진화는 세 단계를 거쳐 일어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보존, 자손보존, 동료보존이다.

“행동이 동시에 자신·자손·동료에서의 삶의 최대의 총계를 성취하게 될 때, 진화는 최고로 가능한 것[가치]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선이라 부르는 행동이, 그것이 동시에 이 세 가지 부류의 목적 모두를 완수할 때, 최선이라고 이해되는 행동에까지 올라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109]
[107] 같은 책, sec. 7.
 
[108] 같은 책, sec. 54.
 
[109] 같은 책, sec. 8.

이와 연관하여 스펜서는 다음처럼 진술한다.

“그러므로 궁극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진화는 틀렸는가? 특히 조직 단계의 상승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행위 조정을 개선하는 진화는 틀렸는가?”[110]

물론 스펜서의 대답은 진화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은 항상 옳다. 진화가 틀렸는지 어떤지의 물음만큼 진화 사회학적 윤리학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은 없다. 이 물음은 이 진화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며, 이 진화의 최고 단계는 스펜서에 따르면 사회의 산업조직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한 사회는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조직에로의 타고난성향이 존재한다[111].

인간의 삶은 스펜서의 도덕철학에 전제된 유일한 최고의 가치가 아니다. 또한 궁극목적의 등급을 요구하는 다른 가치가 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그것 자체가 삶은 아니지만, 그것은 보존될 가치가 있는 옳은 삶이다. 스펜서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종족에게는 옳은 삶의 법칙[112]이라는 것이 있다. “옳은 삶이란 자유의 삶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연합 국가에서 수행되는 삶의 법칙들[113]이 존재하고, 이들 삶의 법칙들 중 하나는 평등한 자유의 법칙이며, 스펜서는 이 자유를 정의의 정식에서 다음처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만약 그가 다른 사람에 대해 평등한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의지하는 바를 할 자유를 가진다.”[114] 인과의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은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스펜서의 평등한 자유의 법칙은 단지 도덕적·정치적 자유만을, 즉 사회적 권위, 특히 국가 측에서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규범만을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자연법론과 마찬가지로 스펜서는 자연적·사회적 실재로부터, 즉 자연법칙으로부터 도덕적·정치적 규범을 연역하고 있다. 그는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사회적 조건 하에서 수행되는 삶의 법칙으로부터의 추론에 의해서, 그리고 사회적 삶의 계속된 규율에 의해 형성된 도덕의식의 준칙으로부터의 추론에 의해서, 우리는 평등한 자유의 법칙을 최고의 도덕법칙으로 직접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진보적 입법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인류의 경험을 일반화함으로써 그런 인식에 간접적으로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인류의 경험에 의해서 우리는 문명화 과정에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정부의 보호가 점차적으로 증가되었다는 사실, 그런 권리에 대한 정부의 침해가 점차적으로 감소했다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치는 이론적으로 평등한 것이 경제적으로 상책이라는 증명에 의해서 강화된다.”[115]

평등한 자유의 권리로부터 스펜서는 신체보존의 권리, 자유이동의 권리, 특히 개인 소유의 권리와 같은 구체적인 권리를 연역하고 있다. 스펜서가 강조하면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개인 소유의 권리는 공산주의가 정의의 침해[116]라는 사실을 함의 한다. 그는 다음처럼 강조하여 말한다.

“이들 권리는 인간의 일반적 자유의 매우 많은 각각의 부분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연합 국가에서 수행되는 삶의 법칙에서 연유한다. 사회적 협정은 이들 권리를 완전히 승인할 수도 있고, 다소간 무시할 수도 있다. 사회적 협정은 그것들을 창조할 수 없으며, 단지 그것들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정부라 부르는 것을 구성하는 사회적 협정의 그런 부분들은 다소간의 정도로 이들 권리를 보호하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 그 정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단지 도구에 불과하며, 협정 속에 권리라 부르는 것을 이들 협정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권리 보호에서 효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117]

국가의 기능과 실정법의 기능은 단지 자연에 의해 확립된 권리를 유지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이런 유형의 사회의 자연법적 성격은 명료해진다. 자연의 법칙은 사회적 규범이거나 사회적 규범을 함축한다. 이런 사회학은 콩트로 하여금 매우 집단적인 정치 강령을 정당화하게 하고, 스펜서로 하여금 극단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정치 강령을 정당화하게 한다.

[110] 같은 책, sec. 9.
 
[111] Spencer, The Principles of Sociology, sec. 260.
 
[112] Spencer, The Principles of Ethics, sec. 48.
 
[113] 같은 책, sec. 343.
 
[114] 같은 책, secs. 272, 283.
 
[115] 같은 책, sec. 331.
 
[116] 같은 책, sec. 301.
 
[117] 같은 책, sec. 343.

19세기에 전개된 역사철학의 가장 탁월한 두 대표자는 헤겔과 마르크스이다. 헤겔 역사철학의 기본관념은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며, 따라서 세계역사를 지배한다는 것이다[118]. 이성은 도덕을 함축하고, 그것의 법칙은 본질적으로 이성적(Rational)이다.”[119] 동일한 생각이 세계역사는 세계정신(World-Spirit)의 이성적 필연적 과정[120]이라는 진술에 의해서 표현된다. 세계정신은 이성의 인격화에 다름 아니다. 이 인격화는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세계역사는 또한 세계정신의 의지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구성하는 개인과 국가의 행동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세계정신의 도구이자 수단[121]이다. 모든 역사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특수한 목적을 추구하지만, 세계정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세계정신의 의지[122]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세계정신의 의지와 신의 의지를 구별하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 헤겔에게는 이성이 세계의 방향을 지시하다는 관념은 세계는 우연에 맡겨져 있지 않고 신적 섭리”, 신의 섭리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종교적 진리의 응용이다. 이 섭리는 그 목적 즉 세계의 절대적 이성적 계획을 실현하는 무한한 힘을 갖춘 지혜(Wisdom)”[123]이다. 역사에서의 세계정신의 과정을 탐구하면서 헤겔의 철학은 "신을 안다"고 하는 심원한 시도를 하고 있으며, 그것 자체를 명백히 제시하고 있다[124]. 그의 저서의 다음과 같은 모토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세계의 역사는 세계의 통치를 제외한다면 이해될 수 없다.” 헤겔의 소위 역사철학은 세계정신의 신화이다. 그것은 역사철학이 아니라 역사신학이다.

[118] G. W. F. Hegel. The Philosophy of History, transl. by J. Sibree (New York: The Colonial Press, 1899), 9.

[119]
같은 책, 39.

[120]
같은 책, 10.

[121]
같은 책, 25.

[122]
같은 책, 30.

[123]
같은 책, 13.

[124] 
같은 책, 14-15.

신은 세계를 초월해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지의 현현인 세계에 내재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현상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본질적 요소이다. 신의 의지는 선하기 때문에, 그리고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실재는 완전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가치는 실재 안에 내재해 있어야 한다. 이런 견해가 헤겔 철학의 핵심이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세계역사는 논리와 윤리의 절대적 가치를 나타내는 이성의 실현이다. 이런 가정이 참이라고 하면, 모든 역사사건은 세계정신의 역사(役事)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이며 선한 것이다. 실로 헤겔은 다음을 귀결로서 언명함으로써 자신의 저술을 끝낸다. “발생했던 것, 매일 발생하고 있는 것은 신과 더불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신의 역사(役事)이다.”[125] 이것은 다음의 가장 자주 인용되는 명제의 다른, 보다 진지한 정식에 다름 아니다.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

[125] 같은 책, 457.

신이 세계 안에 내재해 있다면, 절대적 가치가 실재 안에 고유해 있다면, 역사에서 하나의 사건이나 하나의 국면을 다른 것보다 더 낫다거나 더 나쁘다고 판단할 가능성은 전혀 없게 된다. 모든 것이 그 본성상 필연적으로 선하다면, 가치판단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은 윤리학을 수용하고 있는 신학의 주요 과제이다. 가치판단에 의해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의 국면을 다른 것과 차별화하는 것은 역사철학 특유의 기능이다. 그러한 차별화 없이는 역사철학은 의미가 없다. 신학은 일관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윤리적 해석 안으로 신에 대립해있는 자로서의 악마를 끌어들임으로써 선과 악의 구별이라는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킨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세계역사에서 현현하는 실재가 완전에의 도상에 있기는 하지만 완전하지 않다고 가정함으로써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세계역사는 이성의 점진적 실현이다. 세계정신의 과정이기도 한 이 과정은 필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주권자로서의 이성은 무한한 힘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126].

[126] 같은 책, 9, 13쪽.

헤겔은 신을 이성으로 제시하고, 모든 사람은 이성에 의해서 자신이 선이나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역사신학은 공식적인 그리스도교 신학보다도 한층 유연하다. 헤겔 역사신학의 철저하게 낙관론적인 성격, 즉 인류의 이상적인 상태의 점진적인 실현이 역사적 과정의 필연적 결과라고 하는 명제는,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바라는 사상으로서 환영을 받게 됨에 틀림없다.

한편으로는 신이 세계 안에 내재해 있다는 입장, 가치가 실재 안에 내재해 있다는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 선과 악을 실재 안에서 구별해야 할 필요 사이에 생기는 충돌은 신학에서 변신론의 문제로서 나타난다. 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선한 세계 창조자인 신이 어떻게 해서 자연과 사회 안에 악을 낳았는지 혹은 허용했는지의 문제가 그것이다. 그것은 신학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헤겔의 철학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제시한다고 생각함으로써 진정한 역사철학임을 증명한다. 그는 다음처럼 진술한다. “주제[세계역사]를 다루는 우리의 방식은 이 국면에 이르게 되면 변신론, 즉 신의 길의 정당화가 된다.”[127] 그의 저작의 말미에 헤겔은 모든 사건은 신의 의지라는 위에서 인용된 진술로써 자신의 철학의 귀결을 마무리하면서, 세계의 역사는 세계정신의 실현이라는 자신의 주요 명제를 진술한다. “이것은 참된 변신론, 역사에서 신의 정당화이다.”[128]

[127] 같은 책, 15.

[128] 같은 책, 457.

신학문제의 본질은 신학에 꼭 같이 중요한 두 명제 사이의 논리적 모순이다. 하나는 신의 의지는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의 의지는 전능하며, 신의 의지가 없으면 아무 것도 발생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세계에서 악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반드시신에 의지에 의해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리주의적 과학의 기초인 모순 배제의 논리적 법칙이 타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한, 두 명제 중 하나는 참이 될 수 없다.

그의 종교적 형이상학, 특히 그의 역사신학을 합리주의적 과학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헤겔은 새로운 논리를 창안해야 했다. 여기서 헤겔은 합리주의적 과학의 존재 권리를 부인하지 않으며, 다만 그의 철학적 체계에서 신학의 그것과 비교하여 종속적인 위치만을 부여한다. 낡은 분석 논리와 대비되는 종합적인 변증법 논리가 그것이다. 새로운 변증법 논리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모순관계에 있는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 없다는 모순율의 제거이다. 헤겔은 모순을 배제함으로써 낡은 논리학은 기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점을 납득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모순은 사고의 결함일 뿐만 아니라, “사변적 사고는 사고가 모순을 고수하고 모순 자체에서 유지된다는 데서 성립하기[129] 때문이다.

“사물 속에서 모순이 나타날 수 있다 하더라도, 본래 그것은 말하자면 사물 속에 있는 결핍, 결함,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규정, 모든 구체적인 것, 모든 개념은 모순적 계기들을 지나가는 계기들의 결합이다. 유한한 것들은 원래 모순적이다.”[130]

모순을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는 두 힘의 관계로 해석하면서, 헤겔은 모순을 사고에서 존재에로 확장한다. 자연과 사회에서 반대방향의 운동들을 규정하는 두 힘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새로운 방향의 제3의 운동으로 귀착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고에서 두 모순된 명제는 각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립과 반정립으로서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종합, 통일을 낳는데, 거기에서 모순은 해소된다. 즉 모순은 극복되고 보존됨으로써 해소된다. 사고뿐만 아니라 사물을 운동하게 하는 것은 모순이다. “운동은 본래 현존하는 모순이다.”[131] 모순은 자기운동의 원리이다. 그것은 사고의 법칙이면서 동시에 사건의 법칙이다.

[129] Science of Logic, transl. by W. H. Johnston and L. G. Struthers (London Allen and Unwin, 1929), II, 68.

[130] 같은 책, 70.

[131] 같은 책, 67쪽.

사고의 법칙이 동시에 사건의 법칙이라는 가정은 결국 논리적 가치뿐 아니라 윤리적 가치도 실재 안에 내재해 있고, 정신이 역사적 사건 속에서 작동한다는 전제에 기초해 있다. 즉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라는 전제에 기초해 있다. 가치가 실재 안에 내재해 있다는 이 견해는, 즉 자연법론에서 존재에서 당위에로의 거짓결론에 이르게 되는 이 견해는 또한 헤겔 변증법의 기본적 오류의 근거가 된다. 여기서의 오류란 외부 실재에서의 대립되는 힘들의 관계와 사고에서의 모순 명제들의 관계를 동일시하는 데서 나온다. 자연과 사회 속에서 일정한 운동으로 귀결하는 두 대립되는 힘의 관계는 논리적 모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관련된 현상은 낡은 논리학의 원리와 완전히 일치하는 무모순의 진술에 의해서 기술될 수 있고, 기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의 변증법적 논리학의 도움으로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의 가장 중요한 귀결, 즉 국가의 신격화, 역사적 진화의 필연적 귀결로서 게르만의 세계 제국에 도달하게 된다.

헤겔의 철학에 따르면[132]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성적(“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이지만, 국가는 절대적으로 이성적인 것이다. 국가는 현실화된 윤리적 이상이거나 윤리적 정신이다. 국가의 바로 그 본성에서부터, “국가는 개인에 대해 최고의 권리를 가지며, 개인의 최고의 의무는 그 국가의 성원이 된다는 사실이 귀결한다. 국가의 성원이 된다는 것은 확립된 국가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함의한다. 헤겔의 진술에 따르면 개인은 국가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개인은 국가의 성원인 한에서만 참된 그의 진리, 즉 진정한 존재와 윤리적 지위를 가지게 된다." 세계에 대한 종교적 견해에 따르면 자연은 신의 현현이다. 자연은 단지 무의식적일 뿐이며, 따라서 불완전한 현현이다.

“국가는 세계에 거주하는 정신이며, 거기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실현한다. 자연에서의 정신은 자기 자신의 타자 혹은 잠자고 있는 정신으로서만 실현된다. 그것[신적 정신]이 의식 속에서 나타나서 자신을 존재하는 대상으로서 인식할 때만, 그것은 국가가 된다.”[133]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국가는 단지 우리가 국가라 부르는 사회적 질서에 자신들의 행위를 순응시키는 개인들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며, 따라서 국가는 물리적인 사물과 같은 실재적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헤겔에 의하면, 국가는 심지어 물리적 자연보다 더 객관적인 실재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국가는 의식의 영역에서의 절대정신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국가는 세계에서의 신의 행진이다. 그것의 근거 혹은 원인은 자기 자신을 의지로서 실현하는 이성의 힘이다.” 모든 국가는, 그것이 어떤 국가이든 간에, “이 현실적인 신”이라는 이념의 신적 본질에 참여한다. “국가는 인위의 가공물이 아니다.” 신적인 이성만이 그것을 만들 수 있다. “국가로서의 민족이란 실질적으로 실현되고 바로 그것이 실재적인 (신적) 정신이다. 따라서 그것은 지상의 절대 권력이다.”[134]

[132] G. W. F. Hegel, Philosophy of Right, transl. by S. W. Dyde (London: G. Bell, 1896), sec. 257-258.
[133] 같은 책, sec. 258. 
[134] 같은 책, secs. 258, 331.

헤겔 역사철학의 또 하나의 귀결은, 세계정신의 자기의식의 전개 혹은 이성의 점진적 실현으로서의 세계역사가 네 개의 계기적 단계 또는 시대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각 단계 혹은 시대는 한정된 민족이 우세하고, 그것은 아직 세계를 지배할 절대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세계정신의 전개에서 그때그때의 단계의 담당자가 될 이 민족의 절대적 권리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기존 여러 민족들의 정신에는 권리가 결여되어 있고, 이런 정신들은 가버린 과거의 정신이 그랬던 것처럼 세계역사 속에 편입될 수 없다”[135]

세계역사의 네 시대는 네 개의 역사적 세계 제국에 의해 나타난다. 첫 번째가 동양, 두 번째가 그리스, 세 번째가 로마이며, 네 번째는 게르만 세계제국이 될 것이다[136]. 세계역사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시대가 가져오는 것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통일이다. 그 통일에 의해서 객관적인 진리는 자유와 일치하게 되며, 그것도 자기의식과 주관성의 내부에서 그렇게 된다. 무한하면서도 여전히 실재적인이 새로운 기반을 완성하는 것은 게르만 민족의 북방원리에 맡겨졌다.”[137]

게르만 민족에게 돌려진 북방원리”(Northern principle)모든 모순의 화해와 진화가 될 것이다[138].

[135] 같은 책, sec. 347.
 
[136] 같은 책, sec. 354.
 
[137] 같은 책, sec. 358.
 
[138] 같은 책, sec. 359.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은 역사에 대한 그의 경제적 해석인데, 헤겔 역사철학의 틀림없는 자손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결정적인 도구는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이기 때문이다. 진정 마르크스는 다음처럼 선언하고 있다.

“나의 변증법적인 방법은 헤겔의 것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과 직접적 대립관계에 있기도 하다. 헤겔에게는 인간 두뇌의 생명과정, 즉 사고과정, 다시 말하면 “이념”이란 이름 하에서 헤겔이 독립적인 주체마저 변형시킨 사고 과정은 현실세계의 조물주이며, 현실세계는 단지 “이념의 외적, 현상적 형식일 뿐이다. 거꾸로 나에게는 이념은 인간의 마음이 반영하고 있는, 사고의 형식으로 표현된 물질세계 외에 다름 아니다. 그[헤겔]와 함께 그것[변증법]은 전도되어 버린다. 신비의 껍질 안에서 합리적인 이성의 핵심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다시 원상태로 돌려야 한다.”[139]
[139] Karl Marx, Capital (London: Swan Sonnenschein & Co., 1901), xxx쪽.

헤겔은 관념론자이고,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과 꼭 마찬가지로 변증법을 모순에 의한 발전으로 이해하였고, 역시 헤겔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는 모순이 사회적 실재 안에 내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발전,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의 모순적 성격에 대한 가정이 마르크스가 발견한 사적 유물론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본질적 요소이다[140]. 헤겔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는 삶의 투쟁에서의 충돌, 즉 이해 대립 집단 간의 적대관계, 특히 생산력과 생산양식의 부조화를 논리적 모순으로 해석한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같이 가치가 실재에 내재해 있다고 생각하지만, 헤겔에 대립해서, 헤겔보다는 덜 일관되게, 사고와 존재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고방법으로서의 변증법은 실재 안에 있는 변증법의 과정을 반영할 뿐이다. 변증법의 방법은 사회의 변증법을 파악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사고와 존재를 동일시한 헤겔의 입장을 거부함으로써, 마르크스는 자연과 사회 안에서 대립하는 힘들의 관계를 논리적 모순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가능성이것이 가능한 한에서을 스스로 박탈해버린다.

[140] Friedrich Engels, Hern Euger Dlthring's Revolution in Science (London: M. Lawrence, 1935), 각처 모두 동일.

변증법이 헤겔로 하여금 국가를 신으로서 찬양하게 하고, 마르크스로 하여금 국가를 악마로 저주하게 한다는 사실만큼 변증법적 방법의 무익함을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마르크스와 그의 친구인 프리드리히 엥겔의 학설에 의하면, 국가는 본성상 강제장치이며, 그것의 기능은 한 집단, 즉 생산수단을 소유한 개인들의 집단인 자본가 계급이, 다른 집단, 즉 자본이라 부르는 재물의 소유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이른바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지배하기 위해 유지된다. 국가는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억압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의 강제 조직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성취에 의해 즉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폐지에 의해 그리고 그런 수단의 사회화에 의해, 자본주의 체제와 그것과 함께 사회제도로서의 국가는 사라질 것이다[141].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일 것이고, 강제의 사용 없이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일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사회적 질서가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의 이익이 되고, 그래서 누구도 질서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이 이상적 조건은, 혁명이 없이는 그런 조건이 발생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발전의 법칙, 즉 역사의 변증법적 과정의 필연적 귀결이기 때문이다.

[141] Friedrich Engels, 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3), 158쪽. 이와 관련하여 나의 다음 저서 참조. The Political Theory of Bolshevism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48), 10쪽 이하.

지금까지의 설명은, 자연법론이 법학의 용어로 자연법으로부터 연역된 것으로서 자신의 귀결을 제시한 것이든, 사회학이나 역사의 용어로 진화의 법칙으로부터 연역된 것으로서 자신의 귀결을 제시한 것이든 관계없이, 자연법론은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는 방법과 함께 움직이고 있고, 이 방법에 의해서 가장 모순적인 가치판단이 정당화될 수 있고, 또한 실제로 정당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즉 진리탐구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방법은 완전히 쓸모가 없다. 그러나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이익실현을 위한 투쟁에서 사용되는 지적 도구로서의 자연법론은 유용한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겠다. 플라톤은 대화편 <법률>에서 허용할 수 있는 거짓말과 허용할 수 없는 거짓말을 구별한다. 통치에 유용하다면 그 거짓말은 허용될 수 있다. 그리하여 비록 이것이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정의로운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것이 통치에서는 허용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대단히 유용한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법에 대한 복종을 보장해준다. “제 몸값을 하는 입법자가 모든 사람을 정의롭게 행동하도록 설득하는 데 있어 유용한 거짓말의 사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142] 자연법론은 정의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객관적인 방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것을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연법론을 유용한 거짓말로서 사용할 수도 있다.

[142] Plato, The Laws, II, 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