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켈젠(오세혁 역), “법과 논리”, 켈젠법이론선집, 법문사(1990), 109-138쪽
Hans Kelsen, Recht und Logik, in: Forum, Wien, XII, Jahrgang, 1965, S. 421-425
법과 논리
법과 논리─즉 전통적인 이치적 진위논리―사이에는 특히 긴밀한 관계가 있고, 논리적이고자 하는 것은 법의 하나의 특별한 속성이라는 사실, 다시 말해서 법규범은 그들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 논리적 원리에 상응한다는 사실은 법학자들 간의 통설이다. 이는 논리적 원리, 특히 모순율과 추론규칙이 규범 일반과, 특별하게는 법규범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는 법학자들에 의하여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 두 규범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행위를 규정하는 상황인 규범충돌은 논리적 모순으로 이해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신은 존재한다는 명제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서로 모순관계에 있으므로 한 명제가 참이고 다른 명제는 거짓일 수밖에 없듯이, 충돌하는 규범 중의 하나만이 효력있고, 나머지는 효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이는 흔히 법논리적 공리로 이해되는 ‘신법은 구법을 폐지한다’는 원칙으로 표현된다. 한편 법, 즉 효력있는 일반규범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판결이 내려진 경우 논리적 추론규칙이 적용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일반명제의 진리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개별명제의 진리가 논리적으로 추론되듯이, 모든 절도범은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일반규범의 효력으로부터 절도범 슐츠는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판결, 즉 개별규범의 효력이 논리적으로 추론된다.
| [1] 자주 인용되는 Oliver Wendell Holmes의 “법의 생명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다”(The Common Law 1881, 1면)는 논리가 법에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표현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표현을 사용한 적도 있다. 그는 ‘법의 길’(Collected Legal Papers, 1920, 180면)에서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오류는 법의 발전에 작용하는 유일한 힘이 논리라는 생각이다”라고 말한다. 즉 논리는 법의 효력을 결정하는 유일한 원리는 아니다. 그 밖에 경험과 논리 사이에는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러나 규범, 특히 법규범에 대한 논리적 원리, 특히 모순율과 추론규칙의 적용은 법학자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자명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두 원리들의 성질에 의하면, 위 원리들은 사고행위의 의미로서 진위일 수 있는 명제에만 적용―적어도 간접적으로라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확정하는 것은 논리학이 아니라 실체과학(논리학 등의 형식과학에 대립되는)이라는 점은 자명하다[2]. 위 논리적 원리들은 어떠한 조건하에서 사고행위의 의미로서의 명제가 참일 수 있거나, 거짓일 수밖에 없는가를 확정하는 데 불과하다[3]. 그러나 규범은 당위를 규정하고 당위는 의욕의 상관개념이므로[4], 당위는 의지행위의 의미로서 그 자체로는 진위일 수 없다.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또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규범에 대해서는 진위를 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의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명제와는 달리 참일 수 없고 효력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규범이 효력 있다는 것은 준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규범은 효력이 있거나, 없을 뿐이다. 사람들은 의욕이 본질적으로 사고행위와 결합되어 있다고 상정함으로써 이러한 장애를 제거하려 한다. 무엇을 의욕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의욕하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며, 의욕된 것은 동시에 사고된 것이고, 후자는 전자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모순율과 논리적 추론규칙 등의 논리적 원리는 규범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 [1] 이로부터 논리는 진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또는 클룩(Ulrich Klug)이 Juristische Logik 제2판, 1958, 23면에서 “논리규칙은 거짓인 문장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참인 명제든지, 거짓인 명제든지 규칙은 마찬가지로 타당하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결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논리규칙은 거짓인 문장에도 적용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논리는 문제되는 원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로 모순되는 두 명제 중의 하나만이 참일 수 있고, 그 때 다른 명제는 거짓일 수밖에 없다; 또 전제가 참일 때, 전제에 숨어 있는 결론도 참이다. 따라서 논리학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명제가 참일 때, 인간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는다는 명제는 거짓이며, 인간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명제는 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면, ~이다”는 표현을 미리 갖춘 뒤에, 논리는 학문이 거짓이라고 확정한 문장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논리학이 학문에 봉사하고, 학문도 올바른 인식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2] C. Sigwart는 Logik I, 제3판, 1904, 1면에서 우리들의 인식은 확실하고, 일반적으로 타당한 문장에 도달하려는 목적을 추구하고, 논리학은 이를 안내하는 기술이론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8면에서, 필연적이고 일반적으로 타당한 사고의 개념은 진리의 본실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Alois Höfler(Logik 제2판, 1922, 63면 이하)와 같이 논리학을 올바른 사고의 이론으로 표현하고, 올바른 것과 참은 같은 뜻이며, 사고에 대하여 요구할 수 있고 또 요구해야 하는 최고의 요청이 진리라고 강조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다. [3] Sigwart는 위의 책, 18면에서 당위는 의욕의 상관물이라고 말한다. |
이 문제는 덴마크철학자 예르겐센(J. Joergensen)에 의하여 그의 논문 “명령과 논리”(Imperatives and Logic, Erkenntnis, 제7권, 288~291면)에서 다음과 같이 풀어졌다. 그는 먼저 추론규칙이 명령에―그리고 규범에도―적용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추론의 논리적 과정을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판단들에서 출발하여 그 진위가 전자에 포함되어 있는 다른 판단에서 종결하는 사고과정”으로 정의한다. 그 다음 그는 명령문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논리학에서 사용되는 진위일 수 없으며, 따라서 다른 문장에 함축될 수 없고 결과적으로 논리적 추론의 결론이 될 수 없다. 나아가 전제가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진위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명령문은 추론의 전제일 수도 없다”고 확정한다. 따라서 그는 “명령문은 논리적 추론의 어떠한 부분으로도 기능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르겐센은 다른 한편 “적어도 하나의 전제와 결론이 명령문인 추론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너의 약속을 지켜라/이것은 너의 약속이다/따라서 이 약속을 지켜라는 추론은 타당하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이는 수수께끼인데, 그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려 한다. “이 수수께끼는 명령문을 명령적 요소와 서술적요소로 분해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전자는 단순히 화자의 마음상태, 즉 의욕·기원·명령 등의 표현으로 논리적 결론이 될 수 없는데 비하여 후자는 명령문의 내용을 기술하는 서술문으로 정식화될 수 있으므로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일반적 논리적 규칙이 적용된다. 모든 명령문은 명령적 요소와 서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전자는 어떤 것이 명령 또는 기원됨을 뜻하고 후자는 명령, 기원되는 것을 기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명령 내지 규범은 명령적, 즉 규정적 요소와 서술적 즉, 기술적 요소를 포함할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규정은 의지행위의 의미이고, 기술은 사고행위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의욕과 사고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두 가지 기능이다. 따라서 의욕에 사고가 내재할 수 없다. 의욕하는 사람은 그가 무엇을 의욕하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앎을 구성하는 사고행위는 그 의미가 규범이 되는 의지행위에 선행하지, 그것에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의지행위에 선행하는 사고행위가 의지행위의 의미, 즉 규범을 진위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의지행위에 선행하는 사고행위에도 불구하고 규범의 진위를 논할 수는 없다. 따라서 모순율과 추론규칙이라는 논리적 원리는 규범에 적용, 또는 적어도 직접 적용되지는 않고 아마도 유추적으로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명제의 진리와 규범의 효력 간에 유추가 존재할 때 가능할 것인데, 그러한 유추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진위는 명제의 속성인데 비하여 규범의 효력은 그 속성이 아니라 그 존재, 특수한 이념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규범이 효력 있다는 것은 규범이 현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범이 효력이 없다는 것은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효력 없는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또한 규범이 아니다. 그러나 거짓인 명제는 역시 명제로서, 거짓일지라도 존재한다. 규범이 효력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규범이 효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제는 참이기 시작하면 참이기를 그만둘 수 없다. 명제가 참이라면, 과거에도, 미래에도 참이다. 명제는 그 진리를 상실할 수 없다. 물론 시간적으로 제한된 사실에 관한 명제, 예를 들면 일정한 시각에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다는 명제도 이 시각 이전이나 이후나 참이다. 중력에 관한 법칙이 옳다면, 그에 관한 뉴턴의 명제는 뉴턴이 발견하기 훨씬 전에도 참이었고, 그가 발견한 훨씬 이후에도 계속 참일 것이다. 하나의 명제는 사고행위의 의미이고, 그 명제의 진리치는 이 명제가 만들어지는, 즉 사고되고 발언되는 사실과는 독립적이다[5]. 이에 비하여 의지행위의 의미인 규범의 효력은 제정행위에 의하여 조건지워진다. 규범은 타인의 행위를 지향하는 의지행위의 의미이다. 그 의미는 당위이고, 이 당위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의욕의 상관물이다. 그 의미가 당위인 의욕 없이 규범인 당위 없다. 규범제정의지, 즉 규범제정당국 없이 규범 없다. 하나의 규범은 의지행위를 통하여 제정될 때, 의지행위의 의미일 때, 존재한다. 거기에 규범의 실정성(Positivität)이 존재한다. 그리고 실정규범, 즉 인간의 의지행위에 의하여 입법, 관습 또는 국가계약을 통하여 제정된 규범만이 윤리학, 법학의 고찰대상이 된다.
| [5] Hofler는 위의 책, 86면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사고의 올바름, 사고형식의 적격성을 분간하기 위하여 누군가가 이를 실제로 사고하거나 또는 도대체 언젠가 이 사고형식으로 실제로 사고되었는가 또는 사고되는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
자연법의 모순
자연법이 이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자연법에 관한 다양한 정의 중에서 공통적인 것, 사람들이 자연법이라고 명명하는 것들의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의지행위의 의미가 아닌 규범들의 효력이며, 따라서 이 규범들이 구성하는 가치들이 결코 유의적, 주관적, 상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법에 의하면, 인간이 일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도덕적 또는 법적제정자의 의지행위 또는 필요한 규범을 제정하는 관습을 참조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필요한 규범은 규범이 관계하는 사물의 본성에서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 사물의 본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 상황 또는 그 행동이 문제되는 인간 자신이다. 상황은 하나의 현실로서 현실의 전체와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성은 총체적 현실의 본성 또는 인간의 본성이다. 이것은 인간에 내재하는 본능 또는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즉 그의 이성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자연법은 이성법으로 등장한다. 어쨌든 자연법론은 자연에 내재하는 규범의 상정, 또 그러므로 일반적으로는 자연의 현실, 특별하게는 인간의 본성의 현실에 내재한 규범을 통하여 구성된 가치의 상정에 의하여 특징지워진다. 그것은 존재에 내재한 당위이다. 자연일반 또는 인간본성, 특히 이성은 인간에게 일정한 방식의 행동을 규정하는 규범제정국으로 등장한다.
아마 이제 규범이 필연적으로 인간의 의지행위의 의미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인간의 의지행위는 아닐지라도 의지행위의 의미가 아닌 규범이 존재한다는 데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의미가 규범이 되는 의지 역시 규범이 내재되어 있는 본성에 내재한다. 그러나 경험적-합리적 입장에서 볼 때, 어디에서 그러한 의지가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결합되어 있는 존재사실의 집합인 자연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자연에 내재한 의지란 애니미즘(만유정신론)적인 미신이거나 신에 의하여 창조된 자연에 내재한 신의 의지, 현실에 있어서의 신적인 가치의 내재일 것이다. 만일 규범이 인간의 본성, 특히 이성에 내재하고 있다면, 이성은 순수 심리적 관점에서 볼 때 단지 사고 내지 인식능력일 뿐이기에 경험적-인간적 이성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규범제정이성은 인식능력인 동시에 의지능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논리적 모순없이 기술될 수 있는 이상, 이는 경험적 현실내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경험적 현실을 초월한, 초인간적인 영역에서는 그 존재를 전제하는 한 인간의 논리학의 한 원리로서의 모순율은 적용되지 않는다. 신의 이성에 대해서는 그것은 인식능력인 동시에 의지능력이라고 하는 인간이성에 모순되는 명제를 구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에 있어서는 인식과 의욕은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이미 창세기(제2장 제17절, 제3장 제5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지혜의 나무의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뱀은 여자에게 그것을 먹으면 신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신은 선악을 알고 선을 행하고 악을 회피하려 한다. 신의 의욕은 신의 앎에 내재되어 있다. 신이 앎으로써 의욕한다는 데에 존재하는 모순은, 종교적-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신의 전선(全善)은 선을 의욕하는 데 비하여 그의 전능(全能)은 악도 창조하였다는 모순과 마찬가지로 사소한 것이다. 인식하는 동시에 의욕하는 것, 즉 인간의 실천이성은 신이 그와 동형으로 만든 인간에 있어서의 신적 이성이다.
위에서 언급한 그 의미가 규범인 의욕에 사고가 내재한다는 상정, 그와 관련된 의욕하는 사고로서의 실천이성이라는 개념은 종교적-신학적 근원을 갖는다[6].
| [6] Alf Ross, Kritik der sogenannten Praktischen Vernunft, Kopenhagen 1933, 특히 433면 이하 참조. |
명제가 사고행위의 의미이고, 규범이 의지행위의 의미인 한, 명제의 진리와 규범의 효력 간에는 유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규범충돌은 논리적 모순이 아닐 뿐 아니라 그것에 유비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규범충돌은 모순율이라는 논리적 원리 또는 그에 유사한 논리적 원리에 의하여 해소될 수 없다[7].
| [7] 이하는 Essays in Jurisprudence in Honor of Roscoe Pound, Indianapolis-New York 1962, 339면 이하에 실린 나의 ‘Derogation’ 참조. 법규범에 대한 논리적 원리 일반의 적용가능성과 관련하여 Paul Amselek, Méthode Phénoménologique et Théorie du Droit, Paris 1964를 보면, 그는 나의 순수법학(Reine Rechtslehre)의 논리주의를 비판하는데, 그는 나의 위 논문을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 논문에서 순수법학(1960)까지 옹호하던 이론을 변경하여, 규범충돌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며, 그에 관해서는 모순율이 유추적으로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
도덕과 법
규범충돌, 즉 하나의 규범이 일정한 행위를 당위하고 다른 규범은 그와 양립할 수 없는 다른 행위를 당위하는 두 규범이 동시에 효력 있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도덕규범과 법규범간의 충돌은 잘 알려진 것이다. 예를 들어, 도덕규범이 살인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법규범은 사형선고를 받은 자 또는 전쟁에서의 적을 죽일 것을 명령하고 있다. 위 두 규범 중 하나를 준수하는 이는 다른 규범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수범자는 두 규범 중 어느 것을 준수할 것이며, 따라서 어느 것을 침해할 것인가를 의욕할 선택권을 가진다. 그러나 그는 그가 준수하지 않을 규범의 효력을 폐지시킬 권한을 갖지는 않는다. 한편 동일한 법질서 내에서도 규범충돌은 가능하고 그렇게 드물지 않다. 종교적 자유에 대한 제한을 금지하는 헌법과 일정한 종교의 공적인 행사를 금지하는 소위 위헌법률의 경우와 같은 상위법규범과 하위법규범간의 충돌; 간통 등을 일정한 구성요건에 의하여 처벌하는 법률과 간통 등을 처벌하지 않는 구성요건을 가진 법률 간의 규범충돌과 같은 동위규범간의 충돌 등이 존재한다. 또한 동일한 법률내의 규범간에서도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위 모든 예들은 충돌하는 규범 둘 모두가 효력있기 때문에 하나의 규범이 준수될 때 다른 규범은 침해되고, 하나의 규범이 효력은 있으나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공통된다[8].
| [8] Rupert Schreiber는 Logik des Rechts Berlin, 1962, 87면에서, 내가 순수법학(1960)에서 주장한 것과 비슷하게 “법규범간에 모순이 존재할 때, 서로 모순되는 규범 모두가 법적으로 효력이 없다. 왜냐하면 모순된 규범은 법적으로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서로 충돌하는 규범도 효력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규범충돌이 존재하며, 규범이 의무를 구성하는 한, 의무충돌도 존재한다. Schreiber는 계속하여 “만일 이 충돌상황에 대해 규률이 없다면, 모순으로 인하여 법질서의 상당한 영역이 기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규범충돌의 경우 법질서의 해당영역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규범이 준수될 때 따른 규범이 침해되는 상황이 존재할 뿐이고 두 규범 모두 효력이 있으므로 각각 준수될 수 있다. |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두 명제에 있어서는 하나만이 참, 즉 타당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거짓, 즉 타당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규범충돌은 두 규범 중의 하나가 그 효력을 상실하거나, 두 규범 모두가 효력을 상실할 때 해소될 수 있다. 이 효력상실은 두 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실효성의 최소한은 규범효력의 조건이므로, 충돌하는 규범 중의 하나가 그 실효성을 상실하여 효력을 상실하거나 아니면 폐지(Derogation)를 통하여 효력을 상실할 수 있다.
폐지는 명령, 허용, 수권 이외에 규범의 독자적 기능의 하나이다. 다른 규범의 효력을 폐기하는 기능을 가진 폐지규범은, 일정한 행위가 아니라 그것이 효력을 폐지하는 다른 규범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행위를 명령, 허용, 금지하는 규범과는 구분된다. 폐지규범의 예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생각할 수 있다. 간통은 처벌받아야 한다는 규범이 입법에 의하여 일정 시점에 제정되었다고 하자. 후에 입법자─아마 그 법을 제정했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가 그 규범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 순간부터 간통은 처벌받아야 한다는 규범의 효력을 폐지하는 규범을 제정한다. 이 폐지규범은 행동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며, 일정한 행동이 아니라 그에 선행하는 다른 규범의 효력에 관계된다. 따라서 폐지규범은 비독립적 규범의 하나이다. 그것은 다른 규범의 효력을 전제한다.
규범충돌의 예: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규범이 효력이 있다. 후에 다른 규범이 “살인자는 종신금고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규정한다. 첫째 규범과 충돌하는 둘째 규범은 일정한 행위와 관련되며, 즉 일정한 처벌을 규정한다. 그것은 첫째 규범의 효력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독립규범이 아니어서 첫째 규범이 효력이 없더라도 효력 있을 수 있다.
위 예가 가르쳐 주는 바와 같이, 폐지는 입법자가 기존규범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에는, 규범충돌이 없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폐지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규범충돌의 경우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면 폐지는 충돌하는 두 규범 중 한 규범의 기능일 수 없고 두 규범과는 별개의 제3의 규범의 기능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충돌하는 두 규범의 하나는 일정한 행위에, 다른 규범은 그 행위와 양립할 수 없는 다른 행위에 관계하여 두 규범 모두 하나의 행위에 관계되고 다른 규범의 효력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 데 비하여, 폐지규범은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충돌하는 규범 중의 하나 또는 둘 모두의 효력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두 명제간의 논리적 모순은 이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명제논리의 영역에서는 규범의 실효성 또는 규범효력의 폐지와 유사한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존재한다 /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모순되는 명제의 경우, 실효적이지 않다는 이유 또는 그를 대상으로 하는 다른 명제에 의하여 참일 수 없다는 이유로 두 명제 중의 하나도 그 진리를 상실하지 않는다. 만약 두 명제 중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인데, 과거에도 거짓이었고 미래에도 거짓일 것이다. 실효성의 상실을 통해서나 폐지를 통하여 충돌하는 규범 중의 하나가 그 효력을 상실하면 나머지 하나만이 효력을 갖는다. 즉 하나만이 존재한다. 모순관계에 있는 두 명제는 모두 명제로 존재하되, 다만 하나는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일 뿐이다. 모순관계에 선 두 명제가 모두 참일 수는 없으나, 충돌하는 두 규범이 모두 효력 있을 수는 있다. 이 충돌은 논리적 모순과 같이 인식의 방법으로, 따라서 예컨대 법학을 통하여는 해소될 수 없다. 법학은 이 충돌의 존재를 확정할 수 있을 뿐이고, 그 해결은 법당국의 의지행위 또는 관습적인 비준수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9].
| [9] 또한 여기에 명제와 법규범 간에 차이가 존재한다. 한 명제의 진위는 해당학문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고, 한 법규범이 효력이 있는가, 없는가는 그 규범을 적용할 관할법당국, 특히 법원에 의하여 결정된다. |
로마법을 통한 퇴색
규범충돌은 논리적 모순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규범충돌이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두 힘이다. 규범충돌과 힘의 충돌의 두 상황은 모순없이 기술될 수 있다. 힘의 충돌을 논리적 모순으로 표현하거나, 자연 또는 사회의 현실에 논리적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은 헤겔변증법의 숙명적 사설(邪說)이다.
규범충돌 및 폐지에 대한 통찰은 고대 로마법학으로부터 계승되어 전통법학 모두가 인정하는 정리, 즉 ‘신법은 구법을 폐지한다’에 의하여 심히 흐려졌다. 먼저 주의할 것은 이 원칙이 법규범과 다른 규범간, 특히 법규범과 도덕규범간의 충돌이 아니라 동일한 법질서의 규범간의 충돌에만 적용되며, 서로 다른 시기에 제정된 동위의 두 규범 간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헌법과 법률사이 같은 상·하위 법규범의 충돌의 경우에는 대개 헌법이 그 효력을 상실하지 않고, 소위 위헌법률이 헌법에 규정된 특별한 절차를 통하여 폐지될 수 있을 뿐이다. 그 때는 구법이 아니라 신법이 폐지되는 것이다. 또 신구규범의 관계가 아니라 같은 법률에 포함되기 때문에 동일한 시점에 효력을 얻게 된 두 규범간의 충돌에서 신법우선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두 규범 중의 하나가 다른 규범의 효력을 폐지한다고 상정하고서 유추하여(per analogiam) 적용할 수도 없다.
신법은 구법을 폐지한다는 공식에 대한 주된 반대는, 그 공식에 따르면 폐지는 소위 법에 내재하는 특수한 논리에 따른, 충돌하는 두 규범 중 하나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간통은 처벌받는다 / 간통은 처벌받지 않는다에서의 간통처벌, 또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 / 살인자는 종신금고형에 처해져야 한다의 살인자처벌과 같이 충돌하는 두 규범은 동일한 하나의 행위에 관계하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규범의 효력을 폐지하는 규범은 하나의 행위가 아닌 다른 규범의 효력에 관계한다. 동위의 규범간의 충돌의 경우에 두 규범 중의 한 규범, 구법이 그 효력을 상실하는 것은 논리적 또는 법논리적원칙,따라서 법학에 의하여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 아니라, 이미 메르클(A.Merkl, Die Rechtseinheit des österreichischen Staates, Archiv des öffentlichen Rechts, 제37권, 제1호, 75면)이 지적한 바와 같이 법당국에 의하여 제정되거나 타당한 것으로 전제된 실정적 폐지규범의 기능이다.
‘이로써 간통은 처벌되어야 한다는 규범은 그 효력이 폐지된다’는 것과 같은 일정한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효력폐지와, ‘간통은 처벌되지 않아야 한다’는 규범과 같은 그 반대되는 행위의 명령은 본질적으로 상이한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효력있고, 입법자가 그와 양립할 수 없는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을 명령할 때, 입법자는 구법을 폐지하기를 의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규범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행위를 지향하는 규범에서 이 의욕은 표현되지 않는다. 이 의욕은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는 규범과는 다른 규범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다. 마치 구규범에 의하여 규율되던 대상에 대하여 새로운 규율을 하지 않은 채 그 규범의 효력이 폐지규범에 의하여 효력을 상실할 때와 같이, 입법자는 과거의 규범과 충돌하는 규범을 제정할 때 구규범의 효력을 폐지한다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운 규율의 경우 입법자는 폐지규범을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이는 특히 전통법학에 의하여 옹호되던 신법은 구법을 폐지한다는 이론의 영향이다. 하지만 입법자가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여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묵시적으로 전제했더라도 이는 하나의 제정된 실정규범이다.
명령자 없이 명령 없다
규범에 대한 논리적 원리의 적용가능성은 종종 명제의 진리와 규범의 효력이 아니라 명제의 진리와 규범의 준수간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유추에 기초하고 있다. 그 예로서 나는 발터 두비슬라프(Walter Dubislaw)가 일반규범으로부터 개별규범을 추론하는 문제를 연구한 “요구문의 근거지움불가능성에 대하여”(Zur Unbegründbarkeit der Forderungssätze, Theoria, 권, 1937)라는 논문을 든다. 그는 명령자 없이는 명령이 불가능하고 명령자 없는 명령은 비개념이며, 요구문은 진위의 양자택일이 불가능하여 요구문과 주장문 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확인한다. 따라서 요구문에 대하여 논리적 원리가 적용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살인하지 말라는 요구문으로부터 카인은 아벨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는 요구문의 추론은 요구문을 진위의 양자택일이 가능한 주장문으로 변형하는 방법을 통하여 요구문의 변형을 수행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요구문은 두비슬라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주장문으로 변형된다: “요구당국은 인간에게 다음과 같은 상태를 실현시킬 것을 요구한다: X가 인간이라면 그가 살해하는 인간은 없다. ―이 ‘~이면~이다’문은 요구문에 포함된 주장문이다.” 이는 사람들은 살인하지 않는다는 공식으로 훨씬 단순하게 정식화될 수 있다. 하지만 두비슬라프는 카인은 아벨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는 요구문에 포함된 주장문을 정식화하지는 않았다. 두비슬라프가 정식화한 바에 따르면, ‘카인은 아벨을 살해하지 않는다’로 정식화될 것이다. 따라서 요구문에 포함된 주장문은 요구의 준수를 주장하는 하나의 명제이다. 일반규범의 준수에 관한 명제로부터 일반규범에 상응하는 개별규범의 준수에 관한 명제가 논리적으로 추론된다고 하여 일반규범의 효력으로부터 개별규범의 효력이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것은 아니다[10].
| [10] Ulrich Klug(위의 책 1면)과 같이 논리학을 올바른 추론의 이론으로 표현한다면, 모순율은 논리학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나 논리학이 아니라면 모순율은 어디에 자리잡는가? 유명한 독일논리학자의 한 사람인 Sigwart는 그의 논리학 1권의 많은 부분(23단락)을 모순율에 할애하고 있다. |
두비슬라프에 의하면 요구문에 대한 논리적 추론규칙의 적용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요구문 F에 포함된 주장문이 적어도 이 처음의 주장과 양립될 수 있는 참인 주장문과 결합하여 요구문 E에 포함된 주장문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을 때, F는 E로부터 넓은 의미에서 추론된다”(341면). 위의 예에 적용하면 ‘사람은 살인하지 않는다’는 주장문과 카인과 아벨은 사람이다는 주장문으로부터 카인은 아벨을 살해하지 않는다는 주장문이 연역될 때, 사람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요구문으로부터 카인은 아벨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는 요구문이 연역될 수 있다.‘가 된다.
유추는 기망이다
명제의 진리와 규범의 준수 간의 유추는 모순율과 추론규칙의 적용과 관련하여 실제로 존재하는 듯 보인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모든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서로 모순되는 두 명제 간에는 하나만이 참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거짓일 수밖에 없듯이, ‘친족상도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규범과 ‘친족상도는 처벌받지 않아야 한다’는 규범은 하나만이 준수될 수 있고 그 때 다른 규범은 준수될 수 없고, 침해될 수밖에 없다. 또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일반명제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개별명제가 논리적으로 추론되듯이, ‘모든 절도범은 처벌받아야 한다’는 일반규범의 준수 즉, 모든 절도범은 처벌된다는 것으로부터 ‘절도범 슐츠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개별규범의 준수, 즉 절도범 슐츠는 처벌된다는 논리적으로 추론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상정된 유추는 아주 제한된 정도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준수된 규범에 대한 논리적 원리의 적용가능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먼저 서로 모순되는 일반명제의 진위와 서로 충돌하는 일반규범의 준수·비준수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확정되어야 한다. ‘친족상도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규범이 법관에 의하여 준수될 때, ‘친족상도는 처벌받지 않아야 한다’는 규범은 이 법관에 의하여 준수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법관은 두 번째 규범을 준수하고 첫 번째 규범을 준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같은 법관이 한 번은 첫째 규범을 준수하고 두 번째 규범을 준수하지 아니하고, 다른 경우에는 거꾸로 두 번째 규범을 준수하고 첫째 규범을 준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충돌하는 두 규범 모두 준수되고 또한 준수되지 아니하여 둘 다 일정한 정도로 실효적일 수 있다. 한 규범의 준수와 다른 규범의 준수와의 양립불가능성은 동일한 인간의 행동에 대하여 충돌하는 두 규범 중 하나가 계속적으로 준수될 때에 한정된다. 그러나 모순되는 두 명제는 참이면서 거짓일 수는 없으며, 한 사람에게는 참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거짓일 수는 없다. 한 명제가 참일 때는 모든 사람에게 참이고, 다른 명제는 모든 사람에게 거짓이다. 한 명제의 참과 다른 명제의 참의 양립불가능성은 일정한 시간적 지속에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가 참이면, 그것은 언제나 참이고, 다른 명제는 언제나 거짓이다. 명제의 진리와 규범의 준수간의 유추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명제와 규범
무엇보다는 진위는 명제의 속성인데 비하여, 준수·불준수는 규범이 아닌 일정한 행위의 속성이라는 것을 주의하여야 한다. 규범을 보고 규범이 준수되는지, 준수되지 않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존재의 현실에서 규범에서 당위된 것으로 제정된 행위에 일치하는 일정한 행위가 존재할 때 그것을 처음으로 알 수 있다. 친족상도를 처벌한 법관의 행동은 친족상도를 처벌할 것을 규정한 규범의 준수라는 속성을 갖고, 친족상도를 처벌하지 않을 것을 규정한 규범의 비준수라는 속성을 갖는다. 하나의 규범을 준수하는 사람은 동시에 그와 양립할 수 없는 규범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것, 즉 첫째 규범을 동시에 준수하거나 준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실제로 모순율의 적용이다. 왜냐하면 이 원리는 인간이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참일 때, 그가 이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일 수 없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는 존재사실에 관한 명제에 대하여 논리적 모순율이 적용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명제에 대한 논리적 모순율의 적용은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되는 것은 이러한 원리가 규범에 적용되는가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부터 두 번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반드시 이끌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추론규칙에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절도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일반규범의 준수, 즉 모든 절도범은 처벌된다는 명제의 진리로부터 ‘절도범 슐츠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개별규범의 준수, 즉 절도범 슐츠는 처벌받는다는 명제의 진리가 논리적으로 추론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법규범에 대한 논리적 추론규칙의 적용에 관하여,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일반명제의 진리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개별명제의 진리가 논리적으로 추론되듯이 ‘모든 절도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일반규범의 효력으로부터 ‘절도범 슐츠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개별규범의 효력이 논리적으로 추론되는지는 의문이다. 이 문제는 실정규범이 논의되는 한,부정적으로 답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정법의 학문으로서 법학의 영역에서는 그러한 실정규범만이 문제된다.
법은 의지행위이다
그 효력이 문제되고 있는 ‘절도범 슐츠는 처벌, 즉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개별규범은 담당법관의 의지행위를 통하여 제정될 때 비로소 실정규범으로서 효력이 있다. 이 규범을 제정하는 당국없이 규범없다. 즉 그 의미가 규범인 의지행위 없이 규범없다[11]. ‘모든 절도범은 처벌, 즉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일반규범이 입법을 통하여 제정되었기 때문에 효력이 있고, ‘슐츠는 절도범이다’는 명제가 참일 수 있고, 실로 관할법원이 그런 언명을 할 수 있으나 그런데도 ‘슐츠는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개별규범이 효력이 없을 수도 있다. 예컨대 슐츠에 의하여 행해졌고 또 법원에 의하여 확정된 절도가 판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또는 다른 어떠한 이유로 절도범 슐츠에게 무죄를 선고, 즉 슐츠가 훔쳤음에도 불구하고 처벌, 즉 징역형에 처하지 않았고, 후에 이 판결이 확정력을 발생하였기 때문에 관할법원이 위와 같은 개별규범을 창설하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 ‘절도범 슐츠는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개별규범은 의지행위의 의미일 수 있을 뿐이고, 이러한 의지행위는 논리적 추론, 즉사고행위를 통하여는 이루어질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이 참일 때, 인간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는다가 아니라 인간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것이 참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절도는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일반규범이 효력 있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절도범 슐츠는 징역형에 처해져서는 안 된다’는 개별규범이 효력 있을 수도 있다.
| [11] 이에 관하여는 Walter Dubislav 위의 논문 330면 이하 참조. 그는 331면에서 ‘명령자없이 명령없다(Kein Imperativ ohne Imperator)’를 강조한다. |
판결을 통하여, 구체적인 경우뿐 아니라 입법을 통하여 제정된 일반규범과 관계하는 모든 경우에서 그 일반규범의 효력과 충돌하는 새로운 법이 효력 있을 수 있다. 판결을 통하여 효력 있는 제정법에서 벗어난 실정법이 제정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명제논리의 영역에서 참 또는 거짓인 의미내용에 유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적 삼단논법의 결론인 개별명제의 진리는 그 삼단논법의 대전제인 일반명제의 진리와 모순될 수 없다.
결론의 역할을 하는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명제의 진리는, 전제로서 기능하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와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는 두 명제에 함의되어 있다. 그러나 ‘슐츠는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개별규범의 효력은 ‘모든 절도범은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일반규범의 효력과 ‘슐츠는 절도범이다’라는 명제의 진리에 함축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개별규범은 관할법원의 의지행위를 통하여 제정될 때만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효력은 그 제정행위에 의하여 조건지워지는 데 비하여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명제의 진리는 그것이 제정, 즉 사고되고 발언되는 사실과는 무관하다.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명제가 사실일 때, 아무도 그것을 사고하지 않고 발언하지 않았더라도 인간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명제는 참이다. 참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으로 판단되기 위하여 사고되고 발언되어야 한다. 논리학은 사고행위가 아니라 그 의미와 관련되며, 사고행위에 관계하는 것은 심리학이다.
언명과 진리
이론적 삼단논법이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대전제로서의 의미내용과 소전제로서의 의미내용이 참이라면, 두 전제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내용은 결론으로서 참이다. 이 의미내용이 실제로 행해져서 등장하는 것, 즉 그 의미내용이 한 인간에 의하여 사고되고, 안 되고는 차이가 없다. 언명(Aussage)이라는 말이 사고행위의 의미뿐 아니라 사고 내지 언어행위 자체를 표시하기도 하기 때문에, 언명에 대한 논리적 원리의 적용이 아니라 진위일 수 있는 의미내용에 대한 논리적 원리의 적용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언명행위는 진위일 수 없고, 그 의미내용만이 진위일 수 있을 뿐이다. 실정도덕 또는 법규범에 대한 논리적 원리의 적용가능성에 대한 물음에 있어서 그 의미가 되는 의지행위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규범의 효력은 그 의미가 규범이 되는 의지행위에 의하여 조건지워지기 때문이다.
그 의미가 개별규범인 의지행위가 그 의미가 일반규범인 의지행위에 함의되어 있을 경우에만, ‘절도범 슐츠는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개별규범은 ‘모든 절도범은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일반규범에 함의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절도범은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욕하는 입법자는, 슐츠라는 인간이 존재하고 마이어로부터 양을 훔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이어의 양을 훔친 슐츠를 징역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을 의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의욕할 수는 없고, 그 의미가 ‘슐츠는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규범인 의지는 실정규범으로서의 이 규범의 효력을 위한 조건이다. 슐츠가 마이어의 양을 훔쳤다는 것을 확정한 법원만이 절도범 슐츠를 징역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을 의욕할 수 있다. 그리고 법관은 입법자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의 의지행위가 타인의 의지행위에 함의될 수 없다.
입법자와 법관
입법자가 동시에 법관인 경우에도 그 구체적인 판결은 그에 의하여 제정되고 적용되는 일반규범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볼 때 필연적으로 추론되지는 않으며, 이 개별규범의 효력이 일반규범의 효력에 함의되어 있지도 않다. 법관으로서의 입법자가―새로운 의지행위를 통하여만 가능한가―그 법률의 개정 없이 그에 의하여 법률로 제정된 일반규범에 상응하지 않는 구체적인 판결을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이 개별적 판결은 그 의미가 일반규범인 의지행위와 상이한 의지행위의 의미로서 등장할 때 효력이 있다. 이는 법관으로서의 입법자가 그에 의하여 제정된 일반규범에 상응하는 판결을 내린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개별규범의 일반규범에의 함의, 즉 그 의미가 개별규범인 의지행위가 그 의미가 일반규범인 의지행위에 함의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전제가 일반규범이고, 결론이 개별규범인 규범적 삼단논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절도범은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일반규범과 ‘절도범 슐츠는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개별규범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만약 모든 절도범은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일반규범이 효력이 있고, 그리고 만약 관할법원이 슐츠가 절도범이라는 것을 확정하고, 그리고 만약 그 주관적인 의미가 슐츠를 징역형에 처해야 한다는 행위를 제정하면, 그러면 법원행위의 의미는 법원에 의해 적용될 일반규범에 상응하며, 그러면 일반규범의 효력을 통하여 그 행위의 의미를 구성하는 개별규범의 효력이 근거지워질 수 있다. 따라서 법원에 의하여 적용될 일반규범은 ‘모든 절도범은 처벌받아야, 즉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문장으로 잘못 정식화되어 있다. 정확히는 ‘법원이 한 인간이 절취하였다고 확정한 경우에는, 법원은 그 주관적 의미가 그 인간을 징역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지행위를 제정해야 한다’로 정식화된다.
법적용과정은 기술적으로 진보된 법질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이루어진다. 즉 먼저 불법구성요건의 확정, 그리고 법집행기관에 대하여 일반규범에 정해진 강제행위, 즉 제재를 집행하라는 법원의 명령. 이 명령은 법원에 의하여 제정된 개별규범이다. 끝으로 법원과는 다른 집행기관에 의한 이 개별규범의 집행.
일반규범에 규정된 조건은 불법구성요건 자체가 아니라 관할법원에 의한 구성요건의 확정이다. 그리고 일반규범에 당위된 것으로 제정된 효과는 일정한 강제행위가 아니라 그 주관적 의미가 일정한 강제행위가 제정되어야 한다는 법적용기관, 특히 관할법원의 행위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모든 절도는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일반규범과 ‘절도범 슐츠는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개별규범간의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일반규범의 효력과 그 주관적 의미가 일반규범에 상응하거나 상응하지 않는 법원의 행위 간의 관계이다. 법원에 의하여 제정된 개별규범이 법원에 의하여 적용될 일반규범에 상응할 때 그 개별규범의 효력은 일반 규범의 효력을 통하여 근거지워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법적용기관에 의하여 적용될 일반규범의 효력으로부터 제정될 개별규범의 효력이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법원이 어떤 사람이 절취하였다고 확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죄선고를 하였다면, 즉 그 주관적 의미가 그를 징역형에 처해야 한다가 아닌 징역형에 처하지 않아야 한다는 행위를 하였다면, 이 개별규범의 효력은 절도와 관계되는 일반규범의 효력을 통하여 근거지워질 수 없다. 여기서는 판결의 확정력과 관계되는 일반규범의 효력을 통하여 그 개별규범의 효력이 근거지워질 수 있다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강도와 법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법원의 재판행위는 다른 기관, 즉 집행기관의 행동에 대한 의지행위, 즉 명령행위이다. 모든 명령행위의 주관적 의미는 당위이다. 노상강도가 누군가에게 돈을 지급하여야 할 것을 명령하는 행위의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명령행위의 의미는 타당한 것으로 전제된 규범을 통하여 수권된 때에만 객관적인 의미, 즉 구속력 있는 규범이 된다. 노상강도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하여 규범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고, 행정기관 또는 법원의 적법한 명령과 같이 복종할 의무를 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노상강도의 명령과 법적 기관에 의한 명령의 차이이다. 법원에 의하여 제정된 개별규범의 효력이 입법자에 의하여 제정된 일반규범의 효력을 통하여 근거지워질 수 있다는 것은 법원의 행위가 효력 있는 것으로 전제된 규범에 의하여 수권되었기 때문에 재판행위의 주관적 의미가 역시 객관적 의미, 즉 효력있는 규범이라는 것을 의미한다[12].
| [12] O.C.Jensen은 The Nature of Legal Argument, Oxford, 1957의 서문(XIII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의 목적은 법의 지연과 불확정성의 한 이유가 법적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부여된 또는 변호사들에 의하여 그들의 고객을 위하여 제시된 논증의 불확정성이며, 이 불확정성은 사용되는 사고의 개념과 양식의 본질에 기인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규범의 논리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19면에서 “규범과 금지, 명령, 요구, 추천 같은 언명들의 논리는 현재 대단히 논란이 많은 주제이다. 이를 여기에서 포함하여 논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형식적 또는 논리적 연역이라는 제목의 한 절(25면)에서 “형식적 연역은 법적 사례에서 드물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존재한다. H.L.A. Hart는 Logic and Language (Anthony Flew 편집, Oxford, 1963)에 수록된 ‘책임과 권리의 귀속’(The Ascription of Responsibility and Rights)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가끔 법은 작동하는 연역적 체계의 한 예로 인용된다. 법이 현존하고 있다고 할 때, 법관에 의하여 발견된 사실문은 법적 결론을 준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재판에 있어서 상식이 하나의 사실만을 도출할 뿐 아무런 쟁점도 제기되지 않는 가능한 가장 단순한 사례에 대해서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즉 당사자들이 사실이 그러하다면 그 사례는 어떤 법규에 해당되고, 사실이 그렇지 않다면, 그 법규에 해당되지 않는다는데 동의하고, 법규의 의미, 해석에 관하여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경우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법관이 연역적 추론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르다. 왜냐하면, 법의 영원한 결론(스미스는 살인자이다)은 그를 지지하는 일회적인 사실에 관한 진술(스미스는 1944. 5. 1. 에 그의 아내의 커피잔에 비소를 넣었다)에 의하여 수반될 수는 없고 법규로 구체화된 법규범도 언어적·논리적 규범이 아니라, 대부분 결정을 위한 규범이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마지막 문장에서 논리적 추론규칙이 법규범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면 이는 동의되어야 한다. 스웨덴 법철학자 H. Vilhelm Lundstedt는 Legal Thinking revised, Stockholm, 1956에서 규범적삼단논법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는 스웨덴 법철학자 Axel Haergerstroem을 따라서 법학의 대상은 규범(23면)이 아니라 진위일 수 없는(45면) 가치판단이라는 상정에 근거하여 전제와 결론이 가치판단인 추론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에 관하여는 그의 지지자인 Karl Olivecrona가 쓴 ‘The Legal Theories of Axel Haergerstroem and Vilhelm Lundstedt, Scandinavian Studies in Law III, 1959, 136면 이하; Leonard G. Boonin ‘The Logic of Legal Decisions’, Ethics LXXVI 179면 이하 참조. Arthur Kaufmann도 Analogie and Natur der Sache, Karlsruhe 1965, 8면에서 법발견이 순수한 연역적 과정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29면에서 포섭으로서의 법발견은 단순한 삼단논법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으로 표현될 수 있다:
대전제: 타인의 행위를 향한 의지행위, 즉 명령행위의 주관적 의미는, 그 행위가 효력 있는 것으로 전제된 규범에 의해 수권될 경우, 또한 그것의 객관적 의미이며, 즉 효력 있는 규범이다.
소전제: a) 하나의 일반규범이 효력 있다: 한 사람이 절취하였다는 사실을 관할법원이 확정한 경우에는 그 법원은 그 주관적 의미가 이 사람은 집행기관에 의하여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의지행위를 하여야만 한다. b) 관할법원이 슐츠가 절취하였다는 사실을 확정하고 그 주관적 의미가 절도범 슐츠를 징역형에 처해야 한다는 행위를 하였다.
결론: 슐츠를 징역형에 처해야 한다는 법원행위의 주관적 의미는 또한 객관적 의미이며, 즉 효력 있는 규범이다. 결론과 함께 법원에 의하여 제정된 개별규범의 효력은 법원에 의하여 적용된 일반규범의 효력을 통하여 근거지워진다. 그러나 대전제뿐 아니라 결론도 규범이 아닌 명제, 자세히 말하면 규범의 효력에 관한 언명이므로, 이 근거지움은 규범적 삼단논법이 아닌 이론적 삼단논법으로 행하여진다. 이 삼단논법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대전제에 쓰여진 것이 참이고 두 소전제에 쓰여진 것이 참일 경우 결론에 쓰여진 것도 참이다. 법원에 의하여 제정되는 개별규범의 효력은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 그 효력에 관한 언명이 전제로서 전제된다.
위의 예에서 삼단논법의 대전제, 소전제, 결론은 규범이 아니라 규범에 관한 명제이다. 규범에 관한 언명에 대하여는 추론규칙뿐 아니라 논리적 모순율도 적용된다. “법질서 R에서 ‘간통은 처벌되어야 한다’는 규범이 효력이 있다”는 언명과 “법질서 R에서 ‘간통은 처벌되어야 한다’는 규범은 효력이 없다”는 두 언명은 논리적 모순관계에서 있어 그중의 하나만이 참일 뿐이다. 논리는 모든 명제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위의 두 논리적 원리가 규범에 관한 언명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법전과 법서
문제가 되는 두 논리적 원리가 법규범에 적용될 수 있다는 오류는 부분적으로는 법규범과 법규범에 관한 언명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은데 기인한다. 법규범과 법규범에 관한 언명의 잦은 혼동은 규범뿐 아니라 규범에 관한 언명도 당위문으로 정식화되고, 다른 의미를 갖고 있음에도 두 문장은 동일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용납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다. 입법자에 의하여 제정된 경우, ‘절도범은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문장은 규범이다. 여기서의 당위는 규정적(명령적) 의미를 가진다. 형법교과서에서도 이러한 규범에 관한 언명은 입법자에 의한 문장과 동일한 표현으로 ‘절도범은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문장으로 정식화될 수 있다. 법서에서의 문장도 존재문은 아니고, 당위문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문장이 ‘절도범은 징역형에 처해진다’로 읽힌다면, 절도범은 종종 실제적으로 처벌받지 않기 때문에 이 문장은 틀린 것이기 때문이다. 법규범에 관한 문장인 교과서의 문장은 그 저자가 무엇을 규정할 권한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규정적 의미를 갖지 않고, 기술적 의미를 가질 뿐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나의 순수법학(2판, 1960) 77면에서 인용된 당위의 이중적 의미에 관한 지그바르트(Sigwart)(논리학 17면 이하)의 설명을 참조하길 바란다.
이상의 설명에서 보듯 모순율과 추론규칙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논리적 원리는 실정법규범간의 관계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순수법학 2판에서 인정했던 바와 같이 간접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규범 간에 아무런 논리적 관계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반의 정도의 차이에 의해서만 구분되는 두 일반규범간의 관계는 일반규범과 그에 상응하는 개별규범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또한 일반규범과 법적용기관에 의하여 제정된 그에 상응하는 개별규범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법원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확정된 구성요건이 일반규범에서 추상적으로 규정된 구성요건에 포섭되는 한, 논리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이 포섭은 논리적으로 볼 때 구체적 표상의 추상적 개념으로의 포섭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법관은 구체적인 사례에 있어서 그에 의하여 확정된 ‘마이어는 고의로 슐츠를 사살했다’는 구성요건을 일반규범에 포함된 살인개념에 포섭한다. 살인에 대하여 일반규범이 형벌로서 교수형을 규정하고 있고, 법관이 마이어에게 교수형을 언도하였다면, 이 개별규범은 일반규범에 상응한다. 이 상응관계는 포섭관계이고, 여기서의 포섭이 논리적 관계인 이상 일반규범과 그 일반규범이 구체적인 구성요건에 적용되는 개별규범 간에는 논리적 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개별규범의 효력이 일반규범의 효력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법과정에 있어서 추론규칙의 적용이 문제될 때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법관에 의하여 적용될 일반규범에 (구성요건의 개념으로서) 추상적으로 정해진 하나의 구성요건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사법적인 확정은 논리적으로 하나의 포섭일 뿐 아니라 법적으로 구성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법적 확정은 법관의 개별규범제정을 위한 전제를 창조한다. 따라서 그것은 창설과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며, 순인식기능이 아니라 법창설과정의 구성요소로서 하나의 의지기능이다.
자연과학과 법학
논리적 원리의 적용가능성과 관련하여, 자연과학과 그 대상인 자연적 현실간의 관계를 법학과 그 대상인 실정법규범의 관계에 대응시켜서, 논리가 자연과학의 대상인 자연현실이 아닌 자연과학에 적용되듯이 법규범이 아닌 법학에 논리가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대응은 존재치 않거나 일정한 정도만 존재한다. 양자의 결정적인 차이는 법학의 대상인 법규범이 추상적인 개념과 구체적인 표상으로 등장할 수 있는 문장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법규범간의 관계에서는 더 추상적인 개념과 덜 추상적인 개념 간 또는 추상적인 개념과 구체적인 표상 간의 관계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관계는 논리적인 성격을 갖는다.
끝으로 특별한 법논리학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답변되어야 한다. 종종 법학문헌에서는 법학에서 법규범에 적용되는 논리는 일반형식논리가 아니라 이와는 다른 특별한 법논리라는 견해가 옹호된다. 특별한 법논리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법학자들에 의하여 적용되는 소위 유비추론과 대에서 소에로의 논증(argumentum a maiore ad minus)이 설명의 장으로 끌어 들여져야 한다.
유비추론(argumentum a simili)은 특히 재판에서 일반법규범을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할 때 등장한다. 그 본질은 법관이 효력 있는 일반법규범을 그 규범에서 추상적으로 규정된 구성요건과 일치하지는 않으나 법관의 견해에서 유사하거나, 종종 정식화되듯이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구성요건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유사성 또는 본질적인 일치가 존재한다는 것은 극히 주관적인 판단이어서 한 법관에게 유사하거나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 다른 법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법률의 정신
법질서가 법적용기관에게 효력 있는 일반법규범을 유추적으로 적용할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법적용기관에게 현재의 사례에 대하여 새로운 법을 창조할 수 있는 자유재량의 폭넓은 여지를 보장한다. 그리하여 법관이 그의 앞에 놓인 구성요건이 적용할 규범에 정해진 구성요건과 유사한 또는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라고 인정할 때는 법률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법관의 재량이 제한된 것이라는 사실을 법이론적으로 입증하려 한다. 법률의 정신이라는 것은 당연히 법관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고 이 결정은 상이한 법관에 의하여 판결될 상이한 사례 등에 있어서 매우 상이하게 내려질 수 있다.
이 법률의 정신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법관이 실제로 구체적인 사례에 있어서 새로운 법을 창조하면서도 소위 유추판결의 사례에 있어서도 효력 있는 법만을 적용한다는 허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의제이다. 그를 위하여 법관은 법질서로부터 수권받아야 한다. 이는 이 유추판결이 일정한 경우, 즉 형사재판에서는 금지된다는 사실로부터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금지는 이러한 유추판결이 일정한 경우에는―명시적이 아니라 묵시적으로일지라도―허용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전통법학이 유추판결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사실상 존재하는 것은, 실정적 일반규범의 효력으로부터 판결이라는 개별규범의 효력이 논리적으로 이끌어내어지는 추론이 아니라, 효력 있는 법질서를 통하여 수권된―내용적으로 일정한 실체적인 일반법규범에 일치하지 않는―개별규범의 제정이다.
이는 울리히 클룩 (Ulrich Klug, 위의 책, 125년)이 법적 유비추론에 대하여 제시한 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물건의 유상소유권양도만을 규율하는 독일민법전 제433조의 규정은 거래관계를 포함한 상행위 일반에서의 유상양도에 대해서도 유추적으로 적용된다. 전자의 사실에 대해서만 규정한 위 규정을 후자의 사실에 대해서도 적용한 법관은 일반규범에 상응하지 않는 개별규범을 제정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법을 창조한 것이다. 이 개별규범의 효력은 논리적 추론을 통하여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전제의 역할을 하는 일반규범이 없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위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 판결로 등장하는 개별규범을 포함한 모든 실정규범의 효력은 그 의미가 개별규범이 되는 의지행위에 의하여만 조건지워지기 때문이다. 이 의지행위는 논리적인, 즉 사고행위의 방식으로는 창출될 수 없다.
논리학과 심리학
이른바 유비추론이 논리학의 일부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유비추론은 개연성추론, 즉 결론으로 제시되는 문장이 엄격한 진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소간의 개연성을 가질 뿐이다.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는 그의 저서 인식과 오류(Erkenntnis und Irrtum, 4판, 1920년, 225면)에서 유비추론은 논리학의 대상이 아니라 심리학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유비추론이라고 불리는 것이 논리적 과정이 아니라고 할 때, 이는 법적 유비추론에 더욱 많이 해당된다. 왜냐하면 법적용기관에 의한 개별규범의 제정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개별규범이 일반적으로 규정된 구성요건에 일반적으로 규정된 법효과를 연결하는 이미 효력있는 일반규범에 일치하고 또 그래서―이른바 법적 유비추론의 경우와 같이―새로운 법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조차도, 논리적 사고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에서 소에로의 논증은, 클룩이 정식화한 것과 같이, 일반적인 사례의 집합에 대한 법규의 타당성으로부터 특별한 경우에 대한 이 법규의 타당성을 이끌어 내는 방법으로 적용된다. 클룩은 그 예로서 다음을 든다. 독일(구)형법 제49조b의 제3항에 의하면 ‘생명에 대한 또는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결사에 대한 참여자 중에서 당국 또는 피협박자에게 적시에 정보를 제공하여 결사가 의도하는 생명에 대한 범죄의 실행을 저지할 수 있도록 한 자는 처벌되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위 규정으로부터 사실적인 방해는 처벌되지 않는다는 규범의 효력을 추론할 수 있다. 즉 정보제공자는 처벌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하는 실정일반규범으로부터 범죄를 사실적으로 방해한 자는 처벌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하는 비실정일반규범의 효력이 논리적으로 추론된다. 클룩은 여기에 고전논리학의 한 형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모든 S는 P이다.(함의명제)
어떤 S는 P이다.(피함의명제)
이 형식은 그러나 다음을 추론할 수 있을 때에만 존재한다.
모든 정보제공자는 처벌되지 않는다.
어떤 정보제공자는 처벌되지 않는다.
물론 클룩은 뒤에서 위 예에서는 ‘법률적인 규율이 그에 관계되는 사례의 집합을 일반적으로 확정한 결과 처음에 불확실하게 보이는 사례가 일반집합의 특별한 사례로 그 속에 포함된다는 것이 전제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입법자가 사실적인 저를 생각했다면 범죄를 사실적으로 저지한 자도 처벌되지 않아야 함을 규정한다고 상정하기 때문에, 정보제공자는 처벌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하는 일반법규범은 범죄를 사실적으로 저지한 자도 처벌되지 않아야 함을 규정한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일반규범의 효력으로부터 다른 일반규범의 효력을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론적 고려에 기초하여 비실정규범의 효력을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목적론적 입장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논리적 추론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법논리학>
클룩은 또한 다음을 지적한다. “확실히 법실천에서 사용되는 대에서 소에로의 논증이 매우 부정확하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다. 추론의 논리적 구조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결여되어 있다. 많은 학자들이 현대논리이론은 고사하고, 적어도 전통논리학의 의미에 있어서 이 대소추론의 정확한 구조를 알고 있다면 고전적 논리이론으로부터 빌린 위 용어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대소추론의 구조를 고려할 때, 전통법학에서 명명한 대에서 소에로의 논증은 논리적 추론으로 파악될 수 없다. 특별한 논리적 조작이 아니고 법적 테제를 확정하는 역할을 하는, 클룩이 말하는 해석논거(Interpretationsargumente)가 존재한다. 따라서 특별한 법논리학은 말할 수 없다. 법학의 기술적 문장뿐 아니라―도대체 여기에 논리학이 적용될 수 있는 한―법의 규정적인 규범에도 적용되는 것은 일반논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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