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켈젠(심헌섭 역), “법의 자기결정성”, 켈젠법이론선집, 법문사(1990), 87-96쪽
Hans Kelsen, Die Selbstbestimmung des Rechts, in: Universitas 10.(1963), S.1087-1095
법의 자기결정성
법을 근거지운다는 것(begründen)은 법의 효력의 근거를 댄다는 것을, 왜 사람들은 실정법질서의 규범에 따라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대답은 우리가 알게 되듯이 결코 자명하지 않다.
법규범과 함께 사람들은 일정한 방법으로 행위하여야 한다고, 즉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아야 한다(soll)고 명령되거나―같은 의미이지만―요구되어진다. 대금의 수령자는 대금액을 채권자에게 반환하여야 한다고, 또 사람은 살인이나 절취와 같은 일정한 행위들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법규범은 명령한다. 법의 특징은 그것이 일정한 행위를—조건으로서의 그 반대되는 행위에 강제행위를, 즉 이러한 조건 밑에서 집행되어야 할 이른바 제재를 연결하는 방법으로―명령하는 데 있다. 행위는 제재의 조건이 됨으로써 불법으로, 위법한 행위로 규정된다. 제재란 생명, 자유, 소유권 또는 기타의 가치의 강제적 박탈이며, 그 해당자에게 보통 해악으로 느껴지는 강제행위(작용)이다. 만약 어떤 자가 수령한 임금을 반환하지 않으면, 법규범에 따라 그의 재산에 강제집행이 있어야 하며, 다시 말해서 그로부터 재산가치를 강제로 압류하고 매득금은 채권자에게 인도되어야 한다. 만약 어떤 자가 절취하거나 살인하면, 그는 징역이나 사형으로 처벌되어야 한다. 그러나 법규범과 함께 명령이 발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일정한 인간이나 인간의 단체에 수권, 즉 법규범을 제정할 권한이 부여될 수 있다. 이리하여 군주헌정체의 규범들은 군주에게, 민주헌정체의 규범들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국회에게 법률, 즉 일반적 규범을 발할 권한을 부여한다. 군주나 국회가 발포한 법률은 법원이나 행정관청에 개별적 규범을 제정할 것을, 다시 말해서 사람이 위법하게 행위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례에서 제재가 집행되어야 한다고 명령할 것을, 또는 일정한 사람은 일정하게 행위하여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그에게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고, 다시 말해서 그에게 미리 고시된 해악이 가해져야 한다고 명령할 것을 수권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법질서는 상하위로 질서잡은 규범들의 단계구조로 나타난다. 최고단계를 이루는 것은 헌법규범들이다; 그 밑에 헌법에 의해 수권된 입법이나 관습이 창설한 일반적 규범들이 놓인다; 그리고 이것 밑에는 법률이나 관습법에 의해 수권된 법원과 행정관청이 창설한 개별적 규범들이 놓인다.
법이 일정한 개인에게 다른 개인들의 일정한 행위를 명하는 규범들을 제정할 것을 수권하면서, 다른 개인들에게는, 수권된 개인이 제정한 규범을 준수할 것을 명령한다. 법은 일정한 행위를, 그 반대되는 행위가 있는 경우 제재를 규정하고 그래서 이 행위를 불법으로, 위법한 것으로 규정하는 방법으로 명령하기 때문에, 법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강제질서이다. 법의 규범들은 법복종주체들이 제재를 피하고 적법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준수된다; 법의 규범들은 법적용기관이 제재를 구체적인 사례들에서 명하고 집행함으로써 적용된다.
법이 실증적이라는 것은 그 규범들이 인간의 행위들 즉 법률, 관습, 사법적 결정, 행정결정을 통해 제정되지 않으면 안되고, 또 그것들은 그것들이 법주체들에 의해 사실로 준수되고, 그리고 준수되지 않을 경우 법기관에 의해 적용될 때에만, 다시 말해서 그것들이 대체로 실효적일 때에만 효력있는 것으로 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효성은 효력의 조건이다. 법의 실효성이란 법이 대체로―비록 예외없지는 않더라도―준수되고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법의 효력은—예외적으로─사실상 준수 그리고 적용되지 않더라도 예외없이 준수 그리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은 비록 그것이 준수 또는 적용되어야 할지라도 예외적으로 준수 또는 적용되지 않는 경우들에서도 또한 효력이 있다.
사람들이 질서의 명령들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이미 지적했듯이―자명하지 않다는 것은 사람들이 결코 모든 명령에 대해 수명자는 이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상정하지 않는다는 데서 밝혀진다.
만약 어떤 자가 은행출납원에게 어떤 해악의 위하(威嚇)와 함께 일정금액을 제공할 것을 명령한다면, 수명자는 이 명령에 사실상 응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수명자가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또 만약 그가 명령에 응하지 않는다면, 마치 일정금액을 (예컨대 죄값이나 세금으로) 제공하라는 법원이나 세무서의 명령에 응하지 않을 때 불법을 저지르는 것처럼 불법을 범한다고 상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사람들은 갱의 명령이―법기관의 명령처럼—구속적인 규범이라고 상정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양 경우 명령자의 주관적 의미는 수명자는 어떤 것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일지라도. 어디에 차이가 놓여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제기했다. 그는 마케도니아왕국의 알렉산더대왕에게 잡힌 해적이 왕에 대해 군주는 크게 하는 데 반해 자기는 다만 작게 하는 데 불과하기 때문에 자기와 군주 사이에는 결코 차이가 없다고 함으로써 정당화하려고 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군주가 국가의 기관으로서 하는 일은 정의롭고, 해적이 하는 일은 정의롭지 않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이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군주에 의해 대표된 국가법질서위에 놓여 있는 정의의 신적 질서의 효력을 전제한다. 전자는 그것이 후자에 일치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럴 때에만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에, 그리고 그럴 때에만 효력이 있고 준수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실정법의 효력의 근거는 이것 자체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정법의 그것처럼 인간적 의지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초인간적·신적 의지행위를 통해 제정되었고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원하고 불변적인 효력을 갖는 규범들로 이루어진 더 높은 질서 속에 놓여 있다. 그것은 실정법의 신학적-형이상학적 근거지움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실정법의 효력은 이른바 자연법론에 의해서 근거지워진다. 자연법론은 자연 속에서, 사물의 본성 또는 인간의 본성속에서, 따라서 현실의 사실 속에서 실정법질서 위에 놓여 있는 인간행위의 정의로운 규범들을, 자연적인 법질서를 찾는다고 믿는다. 실정법질서는 그것이 전자에 일치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럴 때에만 효력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실정법의 효력의 근거는 자연에 내재하는, 자연으로부터 연역할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적인 법 속에 놓여 있지, 자기 자체 속에 놓여 있지 않다. 자연에서, 즉 사물과 인간의 사실적인 용태에서 인간의 일정한 행위를 명령하는 규범들을 연역하려는 것은, 존재에서 당위를 추론하려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도이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에서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추론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자연의 법과 같은 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자연이 입법자로서 제정한 규범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는 자연에 의지를 귀속시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자연 속에 상정할 수 있다고 믿는 규범제정적 의지가 신이 창조한 자연에 표명되는 신의 의지가 아니라면 만물에 영(靈)이 있다는 원시인의 표상과 똑같은 종류의 애니미즘(만유정신론)적 미신이다. 그러한 종교적 표상도 또한 이미 고대에서 스토아철학과 그 다음의 기독신학에서 주창되었듯이 역사적으로 자연법론의 바탕이 되고 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신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법은 인간적,실정적 법과는 반대로 영원하고 불변적인 정의로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그리고 언제나 효력을 가지려는 그 본질적 요청과 함께 등장할 수 있다. 사실 자연법론을 그 종교적·신학적 기초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들도 감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자연의 규범제정의지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물음을 그것은 자연 속에서의 신의 의지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다는 데서 실패한 것이다. 자연법론이 자연법을 궁극적으로 신의 의지에로 소급하려는 것을 거부한다면, 자연법론이 자연 속에서 발견한다고 믿는 규범들은, 각 자연법론자가 어떠한 근거에서 정의롭다고 전제하고 그리고 그것들을─대개 선의에서—자연에서 연역해 내기 위해 자연 속으로 투영한 규범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이미 상이한 자연법론자가 서로 모순되는 매우 상이한 자연법들을 자연에서 연역한 데서 나타난다. 한 사람에 의하면 오직 독재적인 법만이, 다른 사람에 의하면 오직 민주적으로 창설된 법만이, 한 사람에 의하면 오직 개인소유권을, 다른 사람에 의하면 오직 단체소유권을 보장하는 법만이 자연에 일치하고, 그리고 정의롭다고 한다.
철저한 자연법론에 따르면 실정법질서는 그것이―이런 또는 저런 방법으로―내용적으로 일정한 자연법에 합치될 때에만 효력있을 수 있다. 실정법질서는 이 자연법에 합치하지 않을 때 효력이 없고, 무효이고, 그래서 비구속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사실 대개의 자연법론에 의해 주장된다. 그러나 동시에 실정법의 효력이, 그 위에 놓여 있다고 주장되는 자연법의 효력에 의해 심각하게 위태화되지 않도록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의 충돌의 가능성을 최소로 축소하거나 심지어 배제하려는 상이한 시도가 감행되었다. 자연법론의 역사적 기능은 그것이 기존법질서의 유지를 지향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보수적 기능이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그것은 개혁적이거나 혁명적 경향을 가졌었다. 어쨌든 자연법론은 일정한 실정법질서를 정의로운 것으로, 정확히 말하면 상대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적 의미에서 정당화하려는 가능성을 제공한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 속에, 옛부터 작용했고 또 우리 시대에서처럼 기존사회질서가 두 차례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에 의해 위태화된 시대에 특히 작용하는 자연법론의 인력이 놓여 있다. 그러나 자연법론은, 그것이 주장한 자연법이 옛부터 설명했던 것처럼 영원히 불변적인 정의의 질서로 제시될 때에만 실정법질서의 절대적 정당화나, 또는―흔히들 표현하듯이―실정법질서의 평가를 위한 절대적 규준에 대한 현저하게 정치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연법론이 자연법을 오직 종교적·형이상학적 사변 속에서만 주어져 있는 절대적이고, 또 이에 따라 초월적-초경험적인 권위에 근거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이 아니고 다만 상대적인, 영구적-불변적이 아니고 장소적 및 시간적 사정에 따라 가변적인 자연법이라는 새로이 주장된 이념은, 자연법의 자기지양을 의미한다.
실정법의 과학적 인식은, 그것의 효력근거를―형이상학적·과학적 법이론처럼―신의 (또는 자연 안에서의 신의) 의지에 의해 제정된, 실정법과는 다른, 실정법 위에 있는 법에서, 다시 말하면 실정법이 이러한 신적이거나 자연적인 법에 일치한다는 데에서, 정의롭다는 데에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가능한 경험의 저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본질의 상정은 일반적으로는 과학적 인식과, 특별히는 법학적 인식과 양립돠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적 법이론은 또한 실정법질서에 대해, 다시 말해서 인간행위에 의해 제정된 대체로 실효적인 강제질서에 대해, 그것이 그러한 권위에 의해 제정된 더 높은 법질서에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그것이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효력을 거부할 수 없다. 법학은 자기의 인식대상으로서의 모든 실정법질서를, 이 법이 어떤 입장에서 보아 정의롭다거나 정의롭지 않다고 판단될 수 있는가에 관계없이 효력 있는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법학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법, 즉 실정법만이 존재한다. 법학—실정법과 나란히 그리고 위에 신적이거나 자연적인 법을 승인하는 이원주의적인 형이상학적 법리과는 반대로—일원주의적인 성격을 갖는다. 법학은 실정법의 인식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실증주의적 법이론이다.
실증주의적 법이론은 법질서의 단계형태적 구조에 맞게 규범 피라미드의 최하위단계에서 그 최상위단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법의 효력근거에 대한 물음에 대답한다. 일정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일정 금액을 제공하여야 한다고,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의 재산에 강제집행이 행해져야 한다고 명령하는, 앞에서 언급한 사법적 결정의 예에서 출발하자. 왜 사람들은 법원의 명령에 응해야 하는가, 이러한 개별적 규범의 효력의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법원은 그러한 명령을 내리게끔 법률에 의해 수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법원의 명령은 위에서 언급한 갱(gang)의 명령과는, 후자가 전자처럼 법의 법칙에 의해 수권되어 있지 않다는 것에 의해 구별된다. 이미 지적했듯이 두 명령행위의 주관적 의미는 같은, 즉 일정금액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원(판결)행위의 주관적 의미는 또한 그 객관적 의미이나, 다시 말하면 객관적으로 구속적인 효력 있는 규범이나, 이에 반해 갱의 행위는 이러한 객관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법원의 명령의 수명자인 개인들이 이 행위의 주관적 의미에 따라서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의미에서도 법원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 이 명령은 구속적인 규범으로 객관적으로 효력 있다는 것, 사람들이 이러한 효력 있는 규범에 응하지 않을 때 불법을 범하고, 규범을 침해한다는 것, 하나의 개별적 효력 있는 개별적 규범의 이 객관적 의미는 그 수권적 법률에 의해 법원행위에 부여되어진다. 사람들이 법원은 왜 법률에 따라야 하는가, 국회에서 발표된 법률의 효력의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법률을 발포한 국회는 법률을 발포하게끔 헌법에 의해 수권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입법행위의 주관적 의미는 사람들, 즉 법주체들과 법기관들은 일정한 방법으로 행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입법행위를 수권하는 헌법은 이 행위에 대해 법률의 규정을 받는 개인들은 법률에 따라 행위하여야 한다는 객관적 의미를 또한 부여한다. 즉 헌법은 법률을 객관적으로 구속적이고, 효력 있는 규범으로 만든다. 헌법은 이러한 일반적 규범의 효력의 근거이다. 사람들이 왜 국회는 헌법에 따라야 하는가, 왜 헌법은 객관적으로 효력 있는 규범인가, 이것의 효력의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결국은 하나의 역사적으로 최초의 헌법에, 즉 사람들은 일정한 군주의 명령이나 또는 국민에 의해 선출된 일정단체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하는 주관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행위에 부딪힌다.
사람들이 왜 이 역사적으로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는 행위의 주관적 의미가 또한 그것의 객관적 의미인가, 왜 헌법은 객관적으로 효력 있는 규범인가, 그 효력의 근거는 무엇이며 또 이에 따라 이 헌법에 의해 창설된 규범들의 효력의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헌법제정자를 최고의 법권위로 본다면, 실정법의 효력근거를 찾을 초월적인 심급에 의해 제정된 더 높은 질서의 효력을 전제하는 것을 거절한다면, 물음의 의미는 다만 ‘어떠한 논리적 전제하에서 헌법제정행위와 헌법에 따라 제정된 행위들의 주관적 의미를 그 객관적 의미로서, 객관적으로 효력 있는 법규범으로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가’일 것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러한 해석은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최초의 헌법에 따라 행위하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근본규범이라고 지칭된다. 근본규범은 헌법의, 또 이와 함께 헌법에 따라 제정된 규범들의 효력근거를 나타낸다. 그것은 어떠한 더 높은 권위에 의해 제정되지 않았기에 어떤 인간적 또는 초인간적 의지행위에 의해 제정된 규범이 아니라, 법학적 사고에서 전제된 규범이다. 이는 실정법의 효력을―신학적 또 자연법이론의 의도에 따른 신법(神法)이나 자연법처럼―정언적인 의미에서 근거지우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언적인 의미에서 근거지운다.
신학적 또는 자연법적 이론이 실정법질서는 그것이 사실로 신 또는 자연 안에서의 신에 의해 제정된 신법 또는 자연법에 일치하기 때문에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실증주의적 법이론은 단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제정되고, 대체로 실효적인 강제질서를 객관적으로 효력 있는 법규범들의 체계로, 그리고 이와 함께 이러한 법규범에 의해 구성된 명령자와 수명자 사이의 관계가 법률관계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해석에 있어서 근본규범 전제할 경우뿐이다 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가능한 일이지만, 이러한 근본규범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들은 인간행위에 의해 제정된, 대체로 실효적인 강제질서를 객관적으로 효력있는 규범들의 체계로 해석할 수 없고, 그것은 사람들이 일정한 방법으로 행위하여야 한다는 주관적 의미를 갖는 데 그치고 마는 행위들의 집합으로만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객관적 의미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명령제정자와 수명자 사이의 관계는 법률관계로서가 아니라 단지 권력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면 법원 또는 세무기관의 명령과 갱의 명령 사이에는 결코 차이가 없다. 사람들은 근본규범을 전제할 수 있으나, 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전제한다면 사람들은 상이한 자연법체계 사이를 선택하듯이 상이한 근본규범들 사이를 선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근본규범은 인간의 의지행위에 의해 제정된, 대체로 실효적인 하나의 아주 일정한 강제질서에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정법의 효력근거를 나타내는 근본규범——신법이나 자연법처럼—의지행위에 의해 제정된, 실정법과는 다른 정의의 질서가 아니기 때문에, 근본규범을 통한 실정법의 효력의 근거지움은 법의 자기근거지움(Selbstbegründung)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근본규범이 바로 실정법의 규범이 아니고, 다시 말해서 의지행위에 의해 제정된 규범이 아니고, 다만 법학적 사고에서 전제된 규범인 한에 있어서 아주 적합치는 않다. 사람들이 자기해석(Selbstdeutung)이라는 표현이 말하는 바를, 종종 있듯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이 실정법의 효력을 근본규범의 도움없이 근거지우려 시도한다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악순환에 빠진다. 이는―사실 여러 법이론가들이 가르치듯이 —사람들이 ‘실정법은, 이 법의 규범들을 그것에 따라 제정하게 한 헌법이 최고권위, 즉 주권자에 의해 이룩되었기 때문에 효력이 있고, 그리고 주권자의 권위는 다시 헌법에 근거하고 있다’고 논증을 할 경우에 그러하다.
법학적 사고에서 전제된 근본규범을 통한 실정법의 효력의 근거지움은 신법이나 자연법을 통한 실정법의 효력의 근거지움과는 그것이 실정적 헌법제정자 위에 있는 초월적인 권위에 소급하지 않는다는 데서, 따라서 실정법 위에 실정법과 다른 신법이나 자연법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데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신법이나 자연법을 통한 효력의 근거지움처럼 실정법의 절대적 정당화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데서도 구별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행위의 정의로운 질서로서의 실정법의 정당화를 나타내지 않는다. 실증주의적 법이론은 그러한 정당화를 제공하려는 것을 근본적으로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인간행위에 의해 제정된 그리고 대체로 실효적인 강제질서—정확히 말하면 모든 그러한 강제질서—는 그 내용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근본규범을 전제할 경우, 따라서 사람들이 대체로 실효적인 강제질서를 제정케 한 역사적으로 최초의 헌법에 따라야만 한다고 하는 경우에만 효력있는 법질서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질서의 도덕적 가치에 대해, 즉 그것의 정의나 부정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그러한 가치판단에 대한 어떠한 규준도 제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를 불만족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정법의 절대적 정당화에 대한 필요의 충족은 과학적-합리적 인식의 방법으로써가 아니라, 다만 신학적-형이상학적 사변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한스 켈젠 > 논문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스 켈젠(이남원 역), “과학의 법정에 선 자연법론” (0) | 2026.06.01 |
|---|---|
| 한스 켈젠(심헌섭 역), “법학적 실증주의란 무엇인가” (0) | 2026.05.11 |
| 한스 켈젠(심헌섭 역),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 (0) | 2026.05.11 |
| 한스 켈젠(오세혁 역), “법과 논리” (0) | 2026.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