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켈젠(심헌섭 역), “법학적 실증주의란 무엇인가” , 켈젠법이론선집, 법문사(1990), 257-270쪽
Hans Kelsen, Was ist juristischer Positivismus?, 20 JuristenZeitung 465-469 (1965)
법학적 실증주의란 무엇인가
법학적 실증주의는 철학적 실증주의로부터는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들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철학적 실증주의란 “실증적인 것, 소여된 것, 파악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이것 속에서만 또 그것의 엄정한 기술에서만 탐구대상을 보고, 모든 초월적 종류의 형이상학을 배격하고 또 초감각적인 것, 힘, 원인에 관한 모든 개념들을, 때로는 선천적인 사고형식들(범주들)까지도 제거하려고 하는 철학과 과학의 방향”으로 이해되고 있다[1]. 법학적 실증주의는 오직 실정법만을 “법”으로 파악하고 다른 모든 사회질서는 비록 그것이 특히 ‘자연법’과 같이 언어관용으로는 ‘법’으로 지칭되더라고 ‘법’으로 인정치 않는 법이론으로 이해되고 있다.
| [1] Rudolf Eisler, Wörterbuch der philosophischen Begriffe, 제4판, 제2권, 1929, 474면. |
이리하여 무엇을 법의 ‘실증성’으로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되며, 이는 어떠한 조건 아래서 학문은 사회질서를 ‘실정적’인 법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법의 개념을 전제한다. 이 글에서는 일정한 인간행위를―그 반대되는, 이른바 위법한 행위, 즉 ‘불법’이 있을 경우 불법효과, 즉 이른바 제재로서의 강제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명함으로써―유발하려고 하는 규범적 질서가 법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법은 규범적 강제질서이다. 그것의 특수한 존재는 그것의 효력이다. 규범적 ‘질서’로서 법은 규범들의 체계이며, 이때 그 규범들은 일반적 규범들과 개별적 규범들로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 규범이 ‘효력 있다’는 것은 그것이 준수되고, 또 준수되지 않을 경우 적용되어야 한다(soll)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 규범은, 이 법규범이 제재를 연결시키는 행위의 반대되는 행위와 함께 ‘준수’된다. 분업적으로 기능하는 기관들을 설치하고 있는 국가적 법질서의 일반적 법규범은, 입법기관에 의해 규정된 제재가 관할기관, 즉 법원에 의해 개별적 규범으로 명령되고 그리고 명령된 제재가 관할행정기관에 의해 집행될 때―이때 법원에 의해 정립된 개별적 규범은 준수되는데―‘적용’된다.
만약 철학적 실증주의의 의미에서 과학의 대상은 오직 ‘소여’될 뿐이라면, 그리고―에른스트 라아스(Ernst Laas)가 그의 저서 ‘이념주의와 실증주의’(Idealismus und Positivismus)에서 말하듯이[2]―사실들이 소여라면, 철학적 실증주의의 공준은 법규범들에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법규범들이란 사실이 아니라 사실의 의미, 즉 인간행위를 향한 의지적 행위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법질서의 효력과 특수적인 개별규범의 효력은 사실에 의해 제약된다. 이때 이러한 사실은 존재사실로서 효력의 조건일 뿐이지 당위인 효력은 아니다. 법의 효력이 이러한 사실들에 의해 제약된다는 데에, 법의 실증성이 있다.
| [2] 제1권, Berlin 1899, 183면. |
그러면 이러한 사실들은 어떤 것들인가?
두 개의 사실들이 있다. 그 하나는 법이 일정한 방법으로 권한을 갖춘 행위들에 의해 제정(gesetzt)(실정법)되었다는 것이고, 그 다른 하나는 이 일정한 정도에 있어서 실효적(wirksam)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직 ‘사실적인 것의 규범력’(normative Kraft des Faktischen)을 말할 수 있는 의미이다.
법실증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법이 제정되는 또는 우리가 비유적으로 말하듯이 ‘창설’(erzeugt)되는 행위들은 인간들의 행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예컨대 유명한 가톨릭적 도덕철학자인 빅토르 카트라인(Viktor Cathrein S.J.)은 그의 저서 ‘도덕철학’(Moralphilosophie)에서[3] 법실증주의는 “모든 법은 인간의 설립위에 의거하고 있다”는 견해를 주장한다고, 또 이 이론은 “전 법질서를 순수한 인간작품”으로 본다고 언급하고 있다. 초인간적 의지, 즉 신의 의지에 의해 제정된 규범들은 실정법규범으로 인정될 수 없다. 물론 언어사적으로는 ‘실정법’(ius positivum)이라는 표현은―12세기에 생겼으며─원래는 자연법에 반대하여 인간적 또는 신적 입법에 근원된 규범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스테판 쿠트너(Stephan Kuttner)는 그의 논문 ‘실정법이라는 말의 근원에 관하여’(Sur les origines du terme, ‘droit positif’)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법이론의 기본개념인 ‘실정법’이란 말은 고전적 근원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연법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컨대 신이 모세의 입을 통해 유태인에게 준 명령들 또는 시민법, 교회법들처럼 입법행위에 그 근원이 소급되는 모든 법률들 사이의 구별을 이루기 위해 실정법이라는 말을 사용한 중세의 교회법학자들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4]. 이러한 신학적 견해에 따르면―현대의 법실증주의의 의미에서가 아니라―구약성서 출애굽기 제20장에 정식화된 십계명들은 실정법이다. 그러나 폴 앙슬렉(Paul Amselek)은 근래 출판된 저서 ‘현상학적 방법과 법이론’(Méthode phénomenoloqique et Théorie du Droit)에서[5] 실정법은 다만 인간에 의해 창설되고 적용되는 규범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견해에 반대하여 ‘초인간적’인 실정법의 가능성을 옹호했다. 앙슬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초인간적’인 법은 정식화되거나 ‘계시’되자마자 완전히 관찰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다(예컨대 모세의 법, 이슬람법 등). 규범적 이론은 이러한 ‘계시’를 선천적으로 의심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과학으로서의 법의 이론은 규범들을 신의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 파악하거나 그런 것으로 기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의지란 그것이 어떤 예언자에 의해 ‘계시’되자마자 관찰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다고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밖에 앙슬렉 자신도 “관찰된 실정규범의 진정한 근원에 대한 역사적 조사가 있은 후에만 규범적 이론은 규범현상에 관련된 것으로서의 고유한 종교적 사실의 문제인지를 타당하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수긍하고, 그리고 “인간이 법률적 규범을 만든다”라고 말한다[6]. “법과학은 오로지 법규범들의 현실적 근원만을 고려하고, 매우 다른 종교들에 따라 매우 다르고 또 과학의 입장에서 관찰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초월적인 신의 의지 속에 법의 근원이 있다고 하는 종교적 사변은 무시해야 하지 않겠는가?
| [3] Freiburg im Breisgau, 1991, 제1권, 525면. [4] Revue Historique de Droit Français et Étranger, Quatrième Série, quinzième année, Paris 1936, 728면. [5] Paris 1964, 145면. [6] 위의 책, 422면. |
일반적 법규범을 고찰하는 한, 이는 제정된 법과 관습법으로 구별된다. 의식적으로 법제정을 향한 인간의 의지적 행위에 의해 창설된, 다시 말해서 그러한 행위의 의미인 규범들이 제정된 법이다. 행위는 존재이고, 그 의미는 당위이다. 그러한 법제정은 분업적으로 기능하는 기관들, 적어도 지도자인 우두머리를 갖고 있는 공동체내에서만 이루어진다. 절대군주제에서는 일반적 법규범의 제정은 군주와 그에 의해 수권된 기관들의 기능이다. 이른바 입헌군주국들과 민주적으로 조직된 국가들에서는 ‘입법’으로서의 이러한 기능은, 선출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단체의 성격을 갖고 또 ‘국회’라 지칭되는 특수한 기관에 유보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 법규범들은 ‘법률들’로서 뿐만 아니라, 법률들을 근거로 한 ‘명령’으로서, 정부 및 행정기관들에 의한 법률시행(명)령으로서, 헌법에 규정된 특별한 조건 아래에서, 예외로는 정부기관에 의한 법률대체적 명령으로서 발해질 수 있다.
일반적 법규범들은 관습의 방법으로도 창설된다. 이것들이 원시법공동체에서 주된 역할을 했고, 기술적으로 발전된 법공동체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 이른바 관습법이다. 법창설적 관습의 요건사실은 오랜 시간을 통해 법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이 일정한 동일한 조건에서는 일정 동일하게 행위하는 데에, 정확히 말해서 그렇게 행위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opinio necessitatis) 행위하는 데에 있다. 만약 사회적으로 함께 사는 사람들이 일정한 시간을 통해 일정 동일한 조건에서 일정 동일한 방법으로 행위한다면, 개개인들에게는 그렇게 행위하여야 한다(soll)는 의지가 생긴다. 이것이 관습법의 심리적 기초이다. 이로써 관습법도 의지적 행위의 의미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법실증주의를 어떤 의미에서는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us)라고 지칭할 수 있다.
| [7] Ismail Nihat Erim, Le Positivisme Juridique et le Droit International, Paris 1939, 64면. |
법창설적 관습이 존재한다는 것은 관습법의 적용을 수권받은 기관, 즉 특히 법원에 의해 확인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확인은 구성적이기 때문에 종종 이른바 관습법은 법원에 의해 창조된다고 상정된다. 관습법의 실증성에 대해서 이러한 문제는 결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어떻게 대답되든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창설된 법이기 때문이다.
개별적 법규범의 제정은 법원의 특수한 기능이다. 법원이 구체적 사건을 일반적 규범을 적용하여 결정하기 때문에 법원의 결정은 적용된 일반적 규범의 개별화 또는 구체화로서의 개별적 규범이다. 그러나 법원이―수권받아서―전적인 자유재량에 의해 결정하더라도 그 결정은 법원이―궁극적으로―강제행위가 설정되어야 한다고, 또는―만약 무죄나 청구기각이 선고되면―어떠한 강제행위도 설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하든 상관없이 개별적 규범의 성격을 갖는다. 이른바 확인판결도, 그것이 문제의 사실이 존재한다고 여겨야 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여겨야 한다고 명령하는 한 규범적 성질을 갖는다. 정부 또는 행정기관도, 행정명령의 불준수가 제재를 수반하는 한, 개별적 법규범을 제정할 권한을 갖는다. 그러므로 미국의 법률가이고 최고법원의 구성원이었던 올리버 웬델 홈스의 유명한 공식, 즉 “법원이 사실상 행위할 것에 대한 예언이, 그리고 더 이상 보탬이 없이, 바로 내가 의미하는 법이다”라는 말[8]은 지나치다. 이는 다른 미국의 법이론가 존 칩먼 그레이의 “모든 법은 법관이 만든 법이다”라는 주장[9]에도 해당된다.
| [8] Justice Holmes, The Path of the Law, Havard Law Review, Vol. X, 1897, 460면. [9] John Chipnan Gray, The Nature and Sources of Law, 제2판, 1927. |
종종―‘실정적’이란 말의 뜻에 맞게―법실증주의의 본질은, 오직 그 규범들이 ‘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서 파악되었다. 그래서 요하네스 호프마이스터(Johannes Hoffmeister)는 그의 철학개념사전에서 ‘법실증주의’를 “법과 법률, 정관 등에 주어져 있는 이른바 실정법과의 동일시”로 정의한다[10]. 아돌프 메르켈(Adolf Merkel)도 사실 그의 매우 영향력이 컸던 법률학개론(Juristische Encyklopädie)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1]: “법의 ‘실정성’ 또는 ‘실정적 성질’을 이야기할 때 법에 있어서의 의지의 우위가 지적된다. 우리는 이와 함께 법의 규정들은 그 속에 포함된 판단들이 개별적으로 우리의 확신과 일치하고 있는가에 상관없이 일정한 의지의 표현으로 타당하다는 것을(그러나 그는 이에 덧붙여),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의지의 현실은 없을 수도 없고 진리와 정의와 기존의 당위관(當爲觀)과 언제나 일치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것을 표현한다.” 그래도 그는 실효성을 효력의 조건으로 승인하는 데까지 가지는 않는다. 프리드만(W. Friedmann)도 그의 저서 ‘법이론’(Legal Theory)에서 ‘분석적 실증주의’와 ‘기능적 실증주의’를 나누고, 전자에 대해 “전자는―입법자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서의―기본적인 법규범을 소여된 것으로 보고 ‘존재’와 ‘당위’의 엄격한 분리를 토대로 하여 법개념과 법률관계의 분석에 집중한다”고 말한다[12]. 그러나 분석적 실증주의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인 존 오스틴(John Austin)은 그의 유명한 ‘법리학 또는 실정법의 철학에 관한 강의’(Lectures on Jurisprudence or the Philosophy of Positive Law)에서[13] “모든 실정법은, 또는 단순하게 그리고 엄격하게 일컬어지는 모든 법은, 주권자 또는 주권자단체가 그 주권자 또는 단체가 주권적이고 최고인 독립적인 정치적 사회의 다수구성원에 대해 제정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주권’의 개념에 대해 “주권과 독립적인 정치적 사회의 개념들은 다음과 같이 명백히 표현될 수 있다: 만약 특정한 상위자가 주어진 사회의 많은 이들로부터 습관적인 복종을 받는다면, 그 특정한 상위자는 그 사회에서 주권자이고, 또한 (상위자를 포함한) 사회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사회이다”라고 특징짓는다. 그리고 그는 뒤에서는 “고유하게 일컬어지는 모든 법은 상위가 하위 또는 하위자들에 대해 제정한 것이다. 그것은 힘으로 무장된 일방이 그 힘이 미칠 수 있는 타방 또는 타방들에 대해 제정한 것이다. 만약 타방에 그 제정자의 힘이 닿을 수 없다면 그 제정자는 타방에 대해 소망이나 욕구를 표시하는 것이며, 타방에 고유하고 명령적인 법을 부과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14]. ‘습관적인 복종’은 법의 실효성이다.
| [10] 제2판, Hamburg 1955. [11] 제2판, Berlin 1900, 31면 §59. [12] Toronto 1960, 34면. [13] 제3판, London 1869, 제1권, 225-226면. [14] 위의 책, 340면. |
특히 비얼링(Bierling)에 의해 대표되어 널리 인정받았던 승인설[15]―이는 법의 효력이 법복종자측에서의 그 승인에 의거한다고 하는 이론인데―법의 실효성의 공준을 함의하고 있다. 왜냐하면 법의 승인은 본질적으로 법이 준수 내지 적용된다는 데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그의 ‘법학입문’(Einführung in die Rechtswissenschaft)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 독일의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가 언급되지 않으면 안 된다[16]: “오늘날 ‘제정된,’ ‘실정적’인 법 밖에 없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승인된다. 그러나 제정된 법이, 대립적인 법률관의 저항을 권위적인 권력자의 명령으로 끝내어야 할 자기의 과제를 충족시켜야 한다면, 법의 제정은 모든 저항하는 법률관에 대해서 자기의 실현도 가능한 그런 의지에, 즉 관습법으로 나타나는 사회에, 법률로 나타나는 국가에 귀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나 국가의 모든 개개의 법명령도, 그것이 ‘순전히 종이 위에 씌어있는’ 것이 아니고, 비록 아마 위반행위로 인해 예외적으로 침해도 되는, 하나의 생활의 규율이 되어버릴 때에만 실로 ‘효력 있는 법’으로 여겨질 수 있다. 법제정의 책무를 맡은 의지가 제정하고 실현하는 것만이,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효력있는 법이다.”
| [15] Ernst Rudolf Bierling, Zur Kritik der juristischen Grundegriffe, 제1부, Gotha 1877, 7, 8, 20, 28-29, 47, 82면. [16] Wissenschaft und Bildung, 79/79a, Leipzig 1925, 33면 이하. |
프랑스의 지도적인 법이론가 중의 하나인 가스통 제즈(Gaston Jèze)는 심지어 국가법의 실효성 속에서 그 본질적 규준을 본다. 그는 “한 국가의 법은―그것이 좋게 또는 나쁘게 평가되든, 유익하게 또는 불길하게 평가되든―주어진 시점에서, 주어진 국가에서 실무자와 법원에 의해 실효적으로 적용되는 규율의 총체이다”라고 정의한다[16a].
| [16a] Gaston Jèze, Les Principes Généraux du Droit Administratif, Troisième Edition, Paris 1925, VIII면. 루돌프 슈타믈러(Rudolf Stammler)는, Theorie der Rechtswissenschaft, Halle a,d, S. 1911, 117면에서 "법의 효력에는 현실의 범주가 특수한 법내용의 표상에 추가된다." "법의 효력은 그 현실의 가능성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는 "일정한 제정된 의욕의 사실상의 완성이 그것의 효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주어진 경우에 현실적으로도 실현할 능력이 그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 또는 '가능성'은 법이 사실상 실현된다는 데에 표현된다. 입법자가 제정한 법규범이 자기실현할 능력 또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가의 문제는 그것이 사실상 실현되었다는 것이 확인될 때에만 대답될 수 있다. |
법의 실효성은 그 효력의 조건이나,―예컨대 비어링의 승인설이 함의하듯이―그 효력의 근거는 아니다[17]. 규범의 효력근거는 그 실효성, 즉 존재사실일 수 없고, 오직 다시 당위규범일 뿐이다. 왜냐하면 존재로부터는, 당위로부터 존재가 추론될 수 없듯이, 당위가 추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규범의 창설을 규율하고 일정한 내용의 규범의 제정을 금하거나 명하면서 그 내용을 미리 결정하기 때문에 다른 규범의 효력의 근거가 되는 규범은 하위의 규범에 대해서는 상위의 규범이다. 이는 나의 ‘순수법학’에서 설명된 법질서의 단계구조와 근본규범의 이론에로 이끈다[18]. 법의 실효성이 법의 효력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것도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법이 ‘효력’ 있다는 것은 그것이 내지 적용되어야 한다(soll)는 것을 의미한다. 법이 실효적이다는 것은 법이 준수 내지 적용된다(wird)는 것을 의미한다. 종종 철학적 또는 사회학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효력’과 ‘실효성’은 동일시되었다. 오스발트 퀼페(Oswald Külpe)는 그의 ‘논리학강의’(Vorlesungen über Logik)에서 “효력은 승인 내지 준수되는 한에서만 규범에 귀속될 수 있다. 모든 실현에서 독립해서는 우리는 효력이 아니라 구속성, 일반적 구속성만을 규범들에 귀속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19]. 그는 이에 덧붙여 “그러나 이 구속성은 목적을 설정하고 의욕하는 의식의 승인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말함으로써 ‘효력’과 ‘구속성’을 근본적으로 다시 지양한다. 가장 저명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그의 논문 ‘이해사회학의 약간의 범주에 관하여’(Über einige Kategorien der verstehenden Soziologie)에서 이렇게 말한다[20]. 질서의 경험적 효력은 “행동이 그것의 (주관적으로 파악된) 의미에로의 의미에 찬 정향을 통해 정향되고 또 그로 인해 영향받는다는 사실이다. … 그러나 우리는 물론 그 ‘준수됨’의 가능성(Chance)을 ‘질서’의 경험적 효력의 정상적 표현으로 여길 것이다.”
| [17] 그래서 리츨러(Erwin Riezler)는 Der totgesagte Positivismus, in: Naturrecht oder Rechtspositivismus, Werner Maihofer 編, 1962, 241면에서 “실증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일정한 법원(法源)으로부터의 도출은 아니고 법률의 문구에의 엄격한 기속은 더더욱 아니고, 오히려 규범의 그 승인에의 구속이다. 이러한 승인 그리고 오직 그것으로부터만 실정법은 그 사실상의 효력을 얻는다”라고 말한다. [18] Reine Rechtslehre, 제2판, 204, 210, 228면 이하, 285, 287, 324, 또 8, 17, 32, 46면 이하, 51, 54, 110, 196면 이하, 202년 이하, 208면 이하, 214-219, 221면 이하, 224면 이하, 228면 이하, 232년 이하, 239, 339, 364, 404, 443면 참조. [19] Leipzig 1923, 120면. [20] Logos, Bd.IV, 1913, 269면. |
만약 실효성이 법의 효력의 조건으로 주장된다면, 이는 오직 실효적인 법만이 준수 내지 적용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만약 법원이 바로 전에 법률에 의해 규정된 법규범을 적용한다면, 법원은 아직 실효적이지는 않지만 효력있는 법규범을 적용한다. 따라서 실효성은 실정법의 개념의 요소는 아니다. 그것은 법실증주의의 원리에 의해 공준된 효력의 조건이며 그리고 그것은─제정된 법을 문제삼는 한―개개의 법규범과 전체로서의 법질서가 효력있기 위해서는 실효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실효성을 잃었을 때 효력을 잃는다는 의미에서이다. 이는 특히 헌법이 혁명의 방법으로, 따라서 그것 자체에 규정된 방법이 아니게 효력을 잃었을 때, 다시 말해서 그 실효성 그리고 이와 함께 그 효력을 잃었을 때 명백히 드러난다[20a]. 또 실효성의 요구는 법이 효력 있기 위해서는 항상 준수되지 않으면 안 되고 또 준수되지 않을 때는 항상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단지 법이 대체로, 보통, 준수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리고 준수되지 않을 때는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만 이해해야 한다. 언제가 이런 경우인가는, 즉 법규범이 더 이상 효력이 있다고는 여겨질 수 없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사례에서 준수되지 않거나 적용되지 않아야만 하는가는, 법학이 결정할 수 없다. 이는 법적용의 권한을 가진 기관의 결정에 맡겨져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둘째 번에 언급한 사실 즉 적용되는 것이 앞선다는 점이다. 법규범은 그것이 비록 한 번도 준수되지 않았더라도, 그러나 보통 법원에 의해 적용될 때에는 효력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능히 상정된다. 그것은 법이 제재로서의 강제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질서로 파악되고 그리고 이러한 제재는 법적용에서 명령되고 집행된다는 사실의 결과이다.
| [20a] 나의 Reine Rechtslehre, 제2판, 212면 이하 참조. |
지금 규정한 의미에서의 법의 실효성이 법의 효력의 조건이라는 것은 법과 힘(권력) 사이에는 본질적 관계가 존재하고, 또 보통 표현하듯이 법의 ‘배후’에는 그것을 실현하는 힘(권력)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상정의 고유한 의미이다. 대개 국가가 이러한 힘(권력)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예컨대 에른스트 포르스트호프(Ernst Forsthoff)는 “실증주의는 법에 대한 국가의 처분(권)을 전제한다. 실증주의는 국가적 주권과 밀접한 상호관계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국가의 법제정권능은 최고권력으로서의 그 주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21]. 그러나 국가는 그 자체 인간행위의 질서이며 그리고 질서로서 그것은 법질서일 뿐이다. 법인으로 생각된 국가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이러한 질서의 인격화일 뿐이다. 국가의 ‘힘’(권력)은 이러한 질서의 실효성에 불과하다. 법을 실현할 힘(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법규범에서 규정된 강제행위가 집행된다는 것을 또 이러한 법규범들은 실효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힘 없이는 법은 효력이 없다는 원리가, 법질서를 나타내거나 주권적 ‘국가’로 지칭되지 않는 국가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실정국제법에도 적용될 때 아주 명백히 밝혀진다.
| [21] Ernst Forsthoff, Zum Problem der Rechtserneuerung, in Naturrecht oder Rechtspositivismus, Werner Maihofer 編, 1962, 74면. |
법실증주의의 가장 본질적 귀결은 도덕으로부터의 법의 분리이며, 그리고 또한 도덕의 구성부분을 이루고 있는―법형이상학으로 여길 수 있고 또 인간행위에 의해 제정되지 않고, 자연법론에 따르면, 자연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그러나 이는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에는 신의 의지가 표현되고 있다는 신학적 상정 아래서만 가능할[22]―이른바 자연-법으로부터의 법의 분리이다. 물론 법의 도덕으로부터의 분리는─종종 오해되듯이―법은 도덕과, 특히 정의의 도덕규범과 합치하여야 한다거나, 법은 정의로워야 한다는 요청에 대한 거부를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요청이 제기된다면, 사람들은 매우 상이하고 그리고 서로 충돌하는 도덕체계들과, 따라서 서로 충돌하는 매우 상이한 정의의 이상들―예컨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또 실정적 법질서는 하나의 정의의 이상에 합치할 수 있으나, 동시에 다른 정의의 이상에는 위반될 수 있다는 것을, 또 실정법의 효력은 일반적으로는 도덕에 대한 그 관계에서 그리고 특별히는 정의의 이상에 대한 그 관계에서 독립적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법의 본질은 정의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는 많이 주장된 견해는―비록 이러한 요청이 법제정적 권위가 합치하여야 하는 것은 최소한도의 도덕 또는 정의라고 하는 것으로 제한되더라도―법실증주의와는 양립되지 않는다.
| [22] 나의 論文, Die Grundlage der Naturechtslehre, Österreichische Zeitscrift für Öffentliches Recht, 제8권, 1963 참조. |
법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양립되지 않는 것은, 법규범은 그것이 윤리적일 때에만 의무를 부담시킬 수(구속적일 수) 있다는 견해이다[22a]. 이러한 견해는 법실증주의에 있어서 본질적인 법과 도덕의 분리를 지양하는 결과가 된다. 법실증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일정한 행위는, 그 반대되는 행위가 제재의 조건일 때에만 법의무의 내용이 된다. 입법이나 관습의 방법으로 창설된 법규범들은 어떠한 임의의 내용에도 제재를 연결할 수 있다.
| [22a] 이러한 견해는 한스 벨첼(Hans Welzel)이 Naturrecht und Rechtspositivismus, in Festschrift für Hans Niedermeyer, Göttingen 1953, 293면에서 주장했다. 벨첼은 “오로지 윤리적 의무로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원리는 어떠한 국가적 명령도, “즉시 무효나 구속력 없는 것으로 됨이 없이는 넘을 수 없는 법실증주의의 ‘한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는 법실증주의의 한계가 아니라 지양이다. 행위가 윤리적 또는 비윤리적이라는 것은 매우 상이하게 내려질 수 있는 도덕적 가치판단이다. 만약 이러한 가치판단을 마치 벨첼이 그가 이 원리 속에서 ‘공동체적 인간의 윤리적 자율성’을 보기 때문에 상정했듯이 법의무를 부담하는 주체에 인정한다면, 모든 법복종주체는 법이 그에게 부담시키는 의무는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자기에 대한 법의 효력을 지양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법실증주의의 그 밖의 결과는, 분업적으로 기능하는 기관들, 특히 법제정적 기관과 법적용적 기관을 설치하고 있는 실정법은 법결정의 예측가능성이라는 법정책적 요청과 이와 결부된 법적 안정성의 요청에 다소 합치한다는 것이다. 입법과 명령의 방법으로 제정되고 공포된 일반적 법규범들만이 구체적 사례들에 적용될 수 있는 한은 법복종주체는 자기 행위의 법적 결과를 다소 예측할 수 있고, 그래서 불법과 이에 따라 불법효과, 즉 일반적 법규범에서 규정된 제재들을 피할 수 있게 자기 행위를 형성할 수 있다. 이것이 다만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하다는 것은 일반적 법규범들은 법적용기관에 의한 개별적 법규범들의 제정을 결코 완전하게 선결할 수 없고, 이러한 기관의 다소 상당한 재량은 언제나 있지 않으면 안 되고, 특히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일반적 규범은 거의 언제나 상이한 해석을 허용한다는 점들에서 밝혀진다. 따라서 법실증주의는―홉프마이스터가 주장하듯이[23]―법관을 ‘포섭기계’로 만들고, 법관의 활동을 형식논리적 조작―고정되게 규정한 것으로 표상된 법규범의 구성요건에로의 생활사태의 포섭―에 그치게 하고 만다는 것은 맞지 않다.
| [23] 주 10의 책, 479면. |
법실증주의가 실정법질서는 법원이 결정할 모든 사례에서 적용될 수 있고, 이러한 의미에서 법에서는 결코 흠결이 없다는 상정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법원이 법률과 관습에 의해 창설된 일반적 규범들을 적용하여야 하는 한, 만약 법률과 관습에 의해 만들어진―원고의 주장에 따라 구체적 사례에서 침해된 법무를 구성하는―규범이 없다면 법관은 현행 실정법에 따라 원고에 무죄를 선고하거나 소를 기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결정도 비록 일정한 규범의 적용은 아니지만 법적용이다. 문제의 법의무를 구성하는 법규범의 결여는 법정책적-도덕적 입장에서는 소망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법원의 의무인 법적용적 결정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령 법원이 사례에 관련된 일반적 규범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그리고 이는 법률적 또는 관습법적 수권을 근거로만 허용되는 것인데―법원이 비록 법률 또는 관습에 의한 수권으로 이 사례를 전적인 자유재량에 의해 결정할 수 있을 때에도, 법원은 실정법에 의해 그것에 부여된 수권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 사례에도 법적용은 존재한다. 끝으로 유의할 것은 법률적으로 또는 관습법적으로 규정된 원리에 의하여 법관의 결정은 확정력을 가질 수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현행의 일반적 법규범에 일치하지 않는다거나 법원은 전적인 자유재량에 따라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다투게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법원이 자기 앞에 놓여있는 사례에 현행법을 적용할 수 없는 가능성은 배제된다.
법실증주의는―라드브루흐가 주장하듯이[24]―법일반이론(일반법학)에 의한 법철학의 대체에로, 법철학의 안락사에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의 분업에로 이끈다. 법일반이론은 실정법을 그것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함이 없이, 있어야만 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기술하여야 하며, 그리고 이러한 객관적 기술에 필요한 개념들을 정의하여야 한다. 그것은 라드브루흐가―부당하게도─비난하듯이 ‘가치맹목적’이다. 그러나 그것은―과학으로서―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법이 가치와 아무 관계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법의 규범은 행위를 당위된 것으로 명하는 모든 규범처럼 하나의 가치를, 특수한 법가치를 구성한다. 행위가 합법적이라고, 행위가 위법적이라고 하는 판단들은 가치판단들이다. 그러나 법일반이론이 법규범의 가치구성적 기능을 확인하지만, 그것은 이 기능을 평가하지 않는다. 이러한 평가, 즉 법이 어떠하여야 하며, 정당한, 정의로운 법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법정책의 기능을 수행하고 그리고 매우 상이한 정의의 이상들이 있기 때문에 매우 상이한 결과들에로 이를 수 있는 법철학에 유보되어 있다.
| [24] Rechtsphilosophie, 제3판, Leipzig 1932, 21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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