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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켈젠(심헌섭 역),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

斧針 2026. 5. 11. 13:49

한스 켈젠(심헌섭 역),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 켈젠법이론선집, 법문사(1990), 239-256쪽
Hans Kelsen, Naturrechtslehre und Rechtspositivismus, 3 Politische Vierteljahresschrift 316-327(1962)


<개 요>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 사이의 대립은 단순히 형이상학적 사변과 과학적 실증주의 사이의 일반적인 대립의 특수한 경우이다. 자연법론은 그것이 인간에 의해 제정된 실정법 이외에 이념적,초월적인 법의 존재를 주장하는 한 법의 형이상학이다. 이 (정의와 동일시되는) 자연법은 자연에 내재한다. 그러나 이 ‘자연’은 경험적 현실일 수 없다. 그것은 그럴 경우 정의로운 법의 규범들이 단순한 사실에서 연역될 것이며, 이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존재와 당위는 두 개의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범주들이다. 이러한 논리적 이원주의에 방법론적 이원주의가 상응한다. 법 및 도덕규범들이 속하는 사회적 법칙들은 인과관계의 원리와 대립되고 있는 귀속원리 위에 의거한다. 이러한 두 개의 원리들은 사회와 자연의 이원주의를 규정한다. 자연법론은(사회적)규범들을 자연에서 연역할 수 있다고 상정하면서 이들 두 개념들을 동일시한다.

규범들은 오직 의지적 행위를 통해 제정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은 의지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의지가 자연 속의 신의 의지로 해석되지 않는 한 애니미즘(만유정신론)적 미신이다. 그래서 자연법론은 종교적 신학적 근거에 이르게 된다.

그다음 자연법의 효력을 신의 존재에서부터 독립시켜 인간의 (한 번은 인간의 충동으로, 또 한 번은 그의 이성으로 여겨진) 본성에서 근거지우려는 상이한 시도들이 분석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시도들의 실패를 지적하고 그리고 특히 실천적(즉 인식하는 동시에 의욕하는)리성의 개념은 모순에 빠지며 그리고 끝내는 종교적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법실증주의는 과학적 이론으로서 신의 의지처럼 모든 가능한 경험의 저편에 놓여 있는 초월적인 법원의 존재를 승인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적 정의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그리고 오직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그리고 이에 따라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규범만을 인정한다. 실증주의는 법의 효력근거에 관한 물음에 대해 오직 조건부적인 대답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절대적으로 효력있는 규범들을 정식화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은 가변적 자연법의 이론을 낳았다. 그러나 자연법론은, 법실증주의와 동일시됨이 없이는, 자연법의 절대적 정의와 불변성을 단념할 수 없다.


끝으로 자연법론은 실정법을 개선시켰고 또 개혁적으로 작용했다는 의미에서 자연법론을 실용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도 견지될 수 없다. 역사적 비판은 자연법론들이 종종 기존의 정치적 및 경제적 제도들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철저히 보수적 성격을 가겼다는 것을 밝힌다. 진정한 법의 과학은, 철저한 법실증주의가 그렇듯이, 자신의 과제를 자신의 대상의 서술에 진력하는데 두며 정치적 이해관심에 봉사할 수 없다.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

옛날부터 법철학을 지배해온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의 대립은 철학내에서 존재해온 형이상학적 사변과 이에 의식적으로 반대해서 인식의 대상을 외적 또는 내적 체험을 통해 소여된 것에로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실재적으로나 관념적으로 현존하는 것을 유일하게 인식가능한 것으로 제한하는 경험적-과학적 실증주의 사이의 보다 일반적인 대립의 특수한 경우이다. 왜냐하면 자연법론은 법의 형이상학이며, 이에 반해 법실증주의는 실정적인, 즉 인간의 의지적 행위에 의해, 다시 말해서 입법과 관습에 의해 창설된 법을 그 대상으로 하는 법에 관한 지식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법의 형이상학, 그것이 플라톤의 이상주의적 형이상학처럼 기본적인 이원주의(이원론)로 특징지어지는 한, 자연법론이다. 형이상학이 플라톤의 이념(이데아)론에서처럼 경험적 세계에 대해 초월적 세계를 대립시키고 또 그 상위에 놓고, 전자를 설명하고 또 특히 정당화하는 것이 그 기능이라면, 자연법론에서는 인간에 의해 제정된 실정적인 법에 대해 인간에 의해 제정되지 않고 초인간적인 심급에서 나온 법이 대립되었고 또 그 위에 놓아졌으며, 전자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것이 그 기능이다.

자연법론은현실주의적(realistisch)인 법이론으로서의 법실증주의와는 반대로이상주의적(idealistisch)인 법이론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의에 의해 만들어졌고 또 그렇기 때문에 가변적인 현실적, 실정적 법 이외에 상정된 자연법이란, 정의와 일치하는 이상적, 불변적인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법론은 이상주의적 법이론 그 자체는 아니다. 이는 다른 이상주의적 법이론과는그 이름이 말하듯이이상적이고 정의로운 법규범의 원천을 자연으로 고찰하는 데 차이가 있다. 이 자연은 일반적으로는 자연, 즉 현실의 총체이거나 특수하게는 인간의 본성이다. 이는 규범적인, 즉 규범제정적 권위로 기능한다. 이의 명령을 준수하는 자는 정당하게, 정의롭게 행위한다. 이 명령들, 즉 정의로운 행위의 규범들은 자연에 내재적이며, 그러나 실정법에 대해서는 초월적이다. 이러한 명령들은 주의깊은 분석을 통해 자연 속에서 발견될 수 있고, 또 이에 따라 그것에서 연역될 수 있다.

이러한 자연이 경험적 현실이고,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인간의 사실적 성질이라면, 자연법론을바로 형이상학이 이러한 현실의 초월을 함의하는 한법의 형이상학으로 성격규정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그러나 자연법의 규범들이 연역되는 것은 일반적인 경험적 현실도, 특별히는 인간의 사실적 본성도 될 수 없다는 것은, 또 자연법의 원천으로 기능하는 것은 사실상 초월적(transzendent) ‘자연이라는 것은 쉽게 지적된다.

자연법론이, 정의로운 법의 규범들은,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행위하여야(sollen) 하는가를 명하는 규범들은 일반적으로는 경험적 현실로부터, 또는 특별히는 인간의 사실적 성질로부터, 따라서 존재(Sein)로부터 연역된다고 주장한다면, 자연법론은 무엇이 일어나야 하는가(geschehen soll)라는 물음을 무엇이 사실로 일어나고 있는가(tatsächlich geschieht)를 통해 대답하려고 시도한다. 다시 말한다면 그것은 존재에서 당위에로, 존재-사실에서 당위-규범에로 추론하려 시도한다. 이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에서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거나 또는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 추론되지 않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서 어떤 것이 있다거나 없다는 것이 추론될 수 없다. 당위와 존재는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두 개의 범주들이다.

존재와 당위 사이의 논리적 환원을 지양하는 이원주의에는, 존재를 기술하는 인과법칙과, 당위를 설정하고 행위를 명하는 규범 사이의 방법론적 이원주의가 상응한다. 인과법칙의 도식은 만약 A이면, 그러면 B이다(또는 일 것이다)’이다. 조건과 결과(효과) 사이의 관계 속에는 필연(Müssen)이라는 인과적 필연성이 표현된다. 실정법의 규범 속에서도 조건은 효과와 결합된다. 왜냐하면 법은 하나의 행위를, 그 반대되는―불법으로 규정된―행위에 불법효과, 즉 이른바 제재를 연결하는 방법으로, 명하기 때문이다. 어떤 자가 절취를 하면 처벌되어야 하며, 어떤 자가 수령한 대금을 채권자에게 반환하지 않으면 강제집행의 방법으로 재산을 차압하여 그 매상액에서 채권자는 변상받아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실정법은 절도를 금하고 대금변상을 명한다. 일정한 조건불법아래서는 일정한 제재가불법효과로서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명제는일정한 조건원인아래서는 일정한 효과가 결과로 발생한다고 말하는 자연법칙에 유추해서법적 법칙(Rechts-Gesetz)이라고 지칭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정도덕의 규범들도 제재를 명하는 규범들이다. 왜냐하면 관습이나 모세, 예수, 마호메트와 같은 종교설립자들에 의해 만들어져 사회에서 효력을 갖는 실정적인 도덕이 명령할 때 그것은 동시에 다른 이의 도덕위반적 그리고 합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일정한 방법으로, 즉 도덕위반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비난(Mißbilligung)의 표현으로, 그리고 합도덕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승인(Billigung)의 표현으로 반응을 보이라고 명령한다.

이처럼 도덕에 의해 요청된 반작용은 여러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다. 비난, 경멸을 통한 불승인 그리고 칭찬, 존경 등을 통한 승인. 불승인과 승인은 도덕의 특수한 제재이며, 그리고 모든 실정도덕의 본능적 구성부분이다. 이들은 법의 제재와 마찬가지로 도덕이나 법의 효력의 조건인 최소한도의 실효성에 대한 불가결의 보장이다.

법의 제재와 도덕의 제재 사이의 차이는 후자가 전자처럼 강제행위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데에, 즉 도덕의 제재들은 법의 그것처럼 물리적 강제의 사용으로 집행되지 않고, 그것이 사용될 경우 저항에 부딪친다는 데에, 또 도덕의 제재들은 법의 제재처럼 규범위반적인 행위에 대한 반작용일 뿐만 아니라 합규범적인 행위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데에, 또 법의 제재들은 해악의 부과에 있고 따라서(말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형벌일 뿐인데, 이에 반해 도덕의 제재들은 복리의 표명에도 있고 따라서 포상이기도 한 데에 있다. 이는 제재를 명하는 법과 도덕의 규범에 적용된 사회생활상 중요한 응보의 원리이다.

법적 법칙이 법적 제재들을 명하는 규범들의 효력이 언표되는 명제로 지칭되는 바와 같이, 도덕법칙은 도덕적 제재를 명하는 규범들의 효력이 언표되는 명제로 지칭될 수 있다. 법적 법칙과 도덕법칙은 사회적 법칙으로서 자연법칙에 유비되지만,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법과 도덕의 법칙의 공식은 만약 A이면, 그러면 B이다(B일 것이다)’가 아니라, ‘만약 A이면, B이어야 한다이다. 조건과 결과 사이의 관계에는 자연법칙에서처럼 인과적 필연성이 아니라 규범적 필연성, 당위의 필연성이 표현된다. 규범적 사회법칙(즉 법적 법칙과 도덕적 법칙)과 인과적 자연법칙은 사태들을 조건과 결과로 연결하는 두 개의 상이한 종류이다. 규범적 사회법칙의 경우에는 연결은 규범을 그 의미로 하는 의지적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과적 자연법칙의 경우에는 연결은 그런 모든 개입과는 독립되어 있다. 원인과 결과의 사슬은 양쪽 모두 끝이 없다. 모든 원인은 자체 다시 원인을 가지며, 모든 결과는 다시 결과를 갖는다. 이 사슬의 고리의 수는 무한이다. 최초의 원인도 있을 수 없고, 최후의 결과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규범적 연결의 경우에는 두 개의 고리 즉 법과 불법효과, 부도덕한 행위와 불승인, 도덕적인 행위와 승인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규범적 연결을 인과적 그것과 구별해서 귀속(Zurechnung)이라 지칭하자고 제안했으며 그리고 인과관계의 원리는 응보의 원리로부터, 즉 사회질서에 합치하는 행위에는 포상을,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행위에는 처벌로써 반작용을 보여야 한다고 하는 원리에서부터 생겼다는 것을 지적했다. 응보원리가 행위와 그 포상 또는 처벌 사이에 이루어 놓은 연결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귀속, 즉 특별한 사회적 원리이다. 이 원리는 원래 원시인들의 관심이 미쳤던 모든 사상(事象)을 해석했던 원리이다. 그는 그에게 소망된 사건은 포상으로, 그렇지 못한 것은 벌로 해석했다. 현대인에게 인과원리에 따라 해석된 자연은 원시인에게는 응보원리에 따라, 즉 귀속원리에 따라 해석된 사회의 일부분이다. 원시인은 자연의 질서를 법·도덕질서로 해석한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 비로소 응보의 귀속원리에 따른 자연의 해석으로부터 인과원칙에 따른 과학적 해석은 점차로 분리되고, 사회자연 사이의 분리가 발생했다.

자연과 사회 사이의 그리고 존재와 가치 사이의 논리적 이원주의로서, 인과적 자연법칙과 원시적 사회법칙즉 귀속원리에 의거하고 있는 도덕적, 법적 법칙사이의 이원주의는, 과학적 법이론으로서의 법실증주의에 있어서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이룬다. 법실증주의는 논리의 원리들에 기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연법론에 대립된다. 왜냐하면 자연법론은 자연과 사회의 근본적 이원성을 무시한 채, 자연법의 규범을 자연에 내재 것으로 상정하고, 자연법의 자연을 원시인들이 사회를 해석하던 방식과 동일하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인과원리에 따라 연결되어 있는 사실들의 총합으로서의 자연에 어떠한 규범도 내재되어 있을 수 없다. 오직 사실에 대해 어떻게든 타당한 것으로 전제된 규범을 접근시킬때, 전자는 후자에 따라 규범합치적인 것으로, 즉 좋거나, 정의로운 것으로, 또는 규범위반적인 것으로, 즉 나쁜 것으로나,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고, 현실평가될 수 있으며, 다시 말해서 가치 있는 것으로나 반가치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가치들은 규범들에 의해 구성된다. 사실 속에서 규범을, 현실 안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자는 착각에 빠져 있다. 왜냐하면 그는비록 무의식적이더라도어떻게든 전제된 규범 또는 이 규범에 의해 구성된 가치를 사실의 현실 속으로, 다시 이것에서 연역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투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마치 서커스의 요술쟁이가 자기의 원통에서 그가 미리 넣어 숨겨 놓았던 비들기와 토끼를 끄집어내는 바와 같이.

규범은 의지에 의해 제정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규범이 연역될 수 있는 자연은 규범제정적인 권위로서 의지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의지를 부여받은 자연은 애니미즘적(만유정신론적) 미신이거나 또는 신이 만들었고 또 그래서 그 속에는 신의 선한 의지가 표명되는 자연이다. 자연의 의지는 자연 안에 있는 신의 의지이다.

이러한 종교적·신학적 관념은 자연법론이 현실에 가치가, 자연에 규범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한 자연법론의 바탕이 되고 있다.

자연법론이 17세기와 18세기에서 지배를 누렸고 그리고 19세기 동안은 한 번의 재생을 경험한 후 20세기에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나치즘, 파시즘 그리고 특히 공산주의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 다시 종교적-형이상학적 사색과 함께 사회 및 법철학의 전면에 등장했고, 또 이러한 자연이 종교적-형이상학적 근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토아철학자인 크리시포스는 말한다: “전체 자연과 그 부분들에 내재하고 있는 신의 이성과 다른 자연이 무엇인가.” “제우스는 모든 자연의 공통적인 자연(physis), 숙명 그리고 필연성으로 일컬어진다.” “정의에 대해 제우스와 일반적 자연이 아닌 다른 원리와 근원은 찾을 수 없다”(H. von Arnim, Stoicorum veterum fragmenta, , 1024, 1076, , 326). 스토아철학에 따라 키케로는 자연의 법은 로마와 아테네의 실정법과는 달리 영원하고 불변하며, 신을 그 창시자, 공포자 그리고 재판관으로 한다고 가르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을 이성 또는 의지로서 자연적 질서의 유지를 명하고 그 침해를 금하는 영원한 법칙으로 본다. 그는 신이 아닌 누가 자연법을 인간의 마음 속에 써놓았겠는가?”라고 묻는다. 이시도르 세빌라는 모든 법은 신법(神法)이거나 인법(人法)이다. 신법은 자연에, 인법은 관습에 근거한다고 가르친다. 그라티아누스 칙령에서는 불변적인 자연법은 신이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창조함과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설명되어 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상은 신의 뜻에 의해, 다시 말해 신의 이성에 의해 통치되고, 또 이러한 신의 통치는 영원한 법칙이며, 또 이성을 부여받은 신의 피조물들이 신의 이성에 또 이에 따라 영원한 법칙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이 이 영원한 법칙에 의해 이에 합치되는 행위와 목표들에로 향한 일정한 자연적인 경향들을 보유하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고 가르친다. “이성적 피조물의 이 영원한 법칙에의 참여를 자연법이라 일컫는다.” 신이 인간에 심어준 자연적인 경향들로부터 연역가능한 법이 자연법이다. 자연법은 신에 근원을 둔다. 그것이 신적 근원을 갖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타당하며 또 이에 따라 불변적이다. 이러한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효력이 자연의 요소이다. 그것은 그 자연내재성과 마찬가지로 그 신적 근원의 결과일 뿐이다.

물론 자연법론 안에는 자연법의 효력을 신의 의지에서 독립시키려는 시도도 감행되었다. 그로티우스는, 그가 서술한 자연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수긍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더라도 타당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정말 중죄를 범함이 없이는 그렇게 수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정의로운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에 대한 신앙 없이는 이러한 자연에 내재하는 정의로운 법을 상정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외관적으로는 의식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실로 모든 고전적 자연법론의 주창자들이 그랬듯이 신앙 깊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정의로운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에 대한 신앙은 자연에 내재하는 이 신의 의지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상정을 반드시 함의하지는 않는다.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적인, 다시 말해서 신으로부터 나온 법은 자연법이거나 제정된 법이라고 가르친다. 이 자연법은 신 자신처럼신에 의해서도창조되지 않았고, 비창조적인 것이다. 이러한 규범들은, 그것들이 바로 그 본질상 정의로운 신일 수밖에 없는 신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는 한, 자연법이다. 중요한 것은 자연법의 원천인 자연이 경험적 현실이 아니라 신의 자연, 초월적 자연이라는 것이다.

자연법론은 때로는 인간의 충동(본능), 때로는 인간의 이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여겼으며, 사람들은 자기는 물론 타인의 생명의 보존을 향한 의심없이 존재하는 일정한 충동을 듦으로써 인간의 충동으로부터 자연법의 규범들을 연역한다. 그러나 이러한 충동 외에 파괴를 향한 다른 충동, 이른바 공격충동이 있으며 그리고 심지어 드물지도 않는 자살충동이 가리키듯이 자기보존본능을 극복한 자기파괴를 향한 충동까지도 관찰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이러한 충동들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이를 반자연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연위반적인 자연의 자기모순을 선언하는 것이다. 자연적인 법을, 다시 말해 정의로운 법을 인간의 본성에서 연역하려는 이론은 이 자연을 인간의 모든 가능한 충동들에서가 아니라, 오직 일정한 충동들에서만 볼 수 있으며, 또 그것은 사실상 존재하는 충동들 사이에 본질적인 구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사실, 그것에 합치되는 행위를 명하는 규범이 근거할 수 있는 그런 충동과 그러한 규범이 근거할 수 없는 그런 충동 사이의 구별을,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합치하여야 할(soll)과 합치하여서는 안 될 충동 사이의, 선한 충동과 악한 충동 사이의 구별을 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는 자연의 개념이 근본적인 의미변화를 겪는다는 것을 말한다. 실재하는 자연, 있는(ist) 그대로의 자연 대신에 이상적 자연. 자연법에 따라있어야 할(soll) 자연이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자연법이란 자연법론이 자연에서 연역한 이상적인 법, 이른바 자연법의 규범들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자연법론이 이상적인 것으로 전제한 법, 즉 이른바 자연법에서 연역한 이상적 자연이며, 즉 이 이론이 그 자신의 자연의 개념, 인간의 선한, 신적인 본성의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연법이다.

자연법론은 이러한 반박에 대해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로 이성을 보고, 그리고 이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선한 그리고 악한 충동을 구별하고, 또 이에 따라 후자가 아니라 전자를 따르라고 인간에게 명하는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대응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이론적 이성에 대립되는 실천적 이성의 개념이며, 인간에게 정립한 행위를 명하는 규범제정적 당국으로서의, 입법자로서의 이성의 개념이며,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nous praktikos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윤리학에서 ratio practica로서 등장하며, 칸트의 윤리학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며, 그리고 이성-법의 이론으로서의 자연법론의 바탕인 이성인 것이다. 정의로운 것은 그것이 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이성의 개념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개념은 자기모순에 빠져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 초논리학적 본성 속에 그 종교적-신학적 근원이 있다.

경험적 심리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성의 특수한 기능은 그것에 주어져 있거나 과제로 주어진 대상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이성으로 지칭한다. 규범제정, 입법은 인식능력이 아니다. 규범의 제정으로 이미 주어진 대상이 있는 그대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하는 것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규범제정은 의욕의 기능이지 인식의 기능은 아니다. 규범창조적 이성은 인식함과 동시에 의욕하는, 곧 인식과 의욕이 결합된 이성이다. 그런 것은 경험적 현실 안에는, 이것이 논리적 모순없이 기술될 수 있는 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경험적 현실 저편에 놓여 있는 초월적, 초인간적 영역에는 그러한 영역의 존재를 믿는 이들에 따르면 모순율이란 순전한 인간적 논리의 원리로서 적용되지 않는다. 사람은 신적 이성에 의해서 이성은 인식기능인 동시에 의지기능이라는 모순에 찬 언명을 할 수 있다. , 사람은 신에 있어서는 인식과 의욕이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미 창세기(I, 17, II, 5)에서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라고 하고 있으나, 그러나 뱀은 여자에게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은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그는 선한 것은 행하고 악한 것은 그만둘 것을 의욕한다. 그의 의욕은 그의 인식 속에 포함되어 있다. 신은 그가 인식하면서 의욕한다는 데에 들어 있는 모순은, 종교적-신학적 입장에서는 마치 신은 그의 전선(全善)에서 선만을 의욕하고, 그의 전능(全能)에서 악한 것도 창조한다는 데에 들어 있는 모순과 마찬가지로 중요치 않다.

인간의 인식하면서 동시에 의욕하는 실천적 이성은 신이 자기의 모습대로 만든 인간에 있어서의 신적 이성이며, 인간이성의 신적 이성에의 참여이다. 그것은 이미 키케로가 명백히 말하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특히 강조하고, 그리고 칸트도, 그가 그의 판단력비판(Kritik der Urteilskraft, Akademieausgabe V, 44면 이하)에서 신을 최고의 도덕적 입법자로 인식하고,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예지로서 그리고(즉 실천적 이성으로서) 자연에 대해 입법적인 것으로가 아니라,” 인간이 도덕적 존재로서 자리를 잡고 있는 목적의 도덕적 왕국에서 입법적 수장으로 인식할 때 결국 인정된다. 따라서 윤리적 법칙이 나오는 것은 인간의 실천적 이성이 아니라 신의 실천적 이성이다. 왜냐하면 순전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 VI, 6)에서 도덕은 불가피하게 종교에로 이르며, 이를 통해 도덕은 인간 이외의 전권적, 도덕적 입법의 관념에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종교는 (주관적으로 고찰할 때) 모든 우리의 의무를 신의 명령으로 인식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유고(Opus Posthumum, Kant Studien, Nr. 50, 1920, 802)에서는 정언명령은 도덕적-실천적 이성에서는 모든 인간의무들을 신적 명령으로 여겨야 한다라는 문장도 발견된다. 칸트는 그의 도덕의 자율성의 이론을, 즉 정언명령은 최후에 있어서는 인간의 실천이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이론을 유지하지 못했다. 칸트의 실천이성은 신의 이성이다.

법의 과학적 이론으로서의 법실증주의는, 모든 가능한 인간의 경험의 저편에 놓여 있는 초월적인 법의 원천의 존재를, 그리고 다시 말해서 인간행위를 명하는 규범을 그 의미로 하는 신적 의지의 존재를 그 실정법의 인식과 기술에서 전제할 수 없다. 오직 그러한 초월적인 그리고 그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에 의해 제정된 규범만이 절대적으로 정의릅고 불변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법실증주의는 어떠한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불변적인 규범을 타당한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 법실증주의는 그것이 법의 규범이든 도덕의 규범이든 관계없이 유의적으로 제정되고 그리고 그 때문에 가변적인, 즉 상이한 시대와 상이한 장소에 따라 상이한 내용을 가질 수 있는 규범들의 효력만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정법의 형성에 관련되고 있는 정의의 원리는 그것이 내용적으로 일정한 법을 요구하는 한 실정법과 마찬가지로 상이한 시대와 상이한 장소에 따라 상이한 실정적 도덕의 규범이다. 법실증주의가 법과 도덕을 두 개의 상이한 사회질서로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은 법과 정의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리고 그 때문에 일정한 도덕에 일치하는 정의로운 실정법과 일정한 도덕에 일치하지 않는 정의롭지 못한 실정법의 가능성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법실증주의는 실정법의 효력을, 그것의 정의와의 관계에 의존적이지 않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의존성은 정의가 절대적 가치일 때에만, 자신에 위반되는 모든 규범의 효력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정의규범이 타당한 것으로 전제될 때에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 상이한 그리고 서로 모순될 가능성이 있는 정의규범들의 가능성이 수긍된다면, 정의가치는 단지 상대적 가치일 수 있다. 그러면 모든 실정적 법질서는 이러한 여러 정의규범들의 어떤 것과 모순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이러한 정의규범들의 어떤 것과 모순되는 것으로서무효라고 여겨서는 아니 될 어떠한 실정적 법질서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펀 모든 실정법질서도 순전히 상대적인 가치를 구성하는 여러 정의규범들의 어떤 것과 일치할 수 있으며, 그렇다고 이러한 일치를 그 효력의 근거로 여길 필요는 없다. 실증주의적, 다시 말해서 현실주의적 법이론은 꼭 강조되어야만 하듯이 정의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서로 상이하고 서로 모순될 가능성이 있는 매우 많은 정의규범들이 전제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실정적 법질서의 형성이 여러 정의규범의 어떤 것의 표상에 의해 규정될 수 있고 그리고 보통 사실상 규정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특히 모든 실정적 법질서는, 즉 규범을 제정하는 행위들은 이러한 여러 정의규범들의 하나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정의로운 것으로나 그렇지 못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가치규준들이란 다만 상대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또 이러한 실정적 법질서를 제정한 행위들은 그 하나의 규준에 따라 측정하면 정의로운 것으로 정당화되나, 그 다른 것에 의하면 뿌정의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을, 또 실정적 법질서는 그 효력에 있어서는 그 규범제정적 행위를 평가하는 정의규범과는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끝까지 주장한다. 왜냐하면 실증적 법이론은 실정적 법질서의 효력근거를 여러 정의규범들 중의 어떤 것 속에서는, 그중의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우선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인식하지 않고, 가설적인 근본규범 속에서, 다시 말해서 대체로 실효적인 역사적 최초의 헌법에 맞게이 헌법에 따라 설립된 법질서가 어떤 정의규범에 일치하고 있는지 또는 일치하고 있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고려함이 없이행위하여야 하고, 사람도 그렇게 취급하여야 한다고 명하는 법사고상 전제된 근본규범 속에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정법의 효력이 문제되는 한, 근본규범 이외의 다른 어떤 규칙도, 특히 어떠한 정의규범도 고려되지 않는다.

근본규범은 입법과 관습에 의해 창설되고, 대체로 실효적인 질서의 효력근거의 물음에 대한 실증주의적 법이론의 대답이다. 그것은 정언적이고 무조건적인 대답이 아니라 가언적, 조건부적 대답이다. 그것은 말한다: 만약 사람들이 실정법을 효력 있는 것으로 고찰한다면, 다시 말해서 만약 이 법의 규범이 명하는 대로 행위하여야 한다고 상정한다면, 그러면 실정질서를 창설한 역사적으로 최초의 헌법이 명하는 대로 행위하여야 한다는 규범을 전제한다. 이 규범, 근본규범은 법권위의 의지적 행위에 의해 제정된 실정적인 규범이 아니라, 법률적사고에서 전재된 규범이다. 이의 전제는 실법질서가 효력있는 것으로 고찰되는 조건칸트적 의미에서 선험적-논리적(transzendental-logisch)조건이다. 근본규범은 단지 법의 효력근거이지 효력내용은 아니다. 이 근거는 효력내용과는 전적으로 독립되어 있다. 실정법의 내용을 규정하는 일을 근본규범은 헌법을 통해 규정된 법창설, 입법, 관습의 절차에 맡긴다. 그러므로 실정법은 그것의 근본규범과 결코 모순될 수 없으나, 이에 반해 실정법과 자연법 사이의 모순가능성은 자연법론에서는 본질적이다. 그러나 이는 근본규범이 실정법의 가치 또는 반가치,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어떠한 규준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법실증주의는 불만족스런 것으로 생각되고, 그리고 이에 대해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확실한 규준으로서의 이러한 규준을 제공하며, 그리고 실정법의 효력근거의 물음에 대한 무조건적 대답을 준다고 하는 자연법론이 맞서게 된 것이다.

자연법론이 실정법질서의 정 또는 불정에 대한 어떠한 확실한 규준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지적하고 있다. 자연법론이 자연에 내재하고 자연으로부터 연역된 규범의 내용을 규정하려들자마자, 그것은 아주 날카로운 대립에 직면한다. 이의 주창자들은 하나의 자연법이 아니라, 여러 매우 상이하고 또 서로 모순되는 자연법들을 선언했다. 이는 특히 소유권과 국가형태와 같은 기본적인 물음에 대해 그러했다. 그 한 자연법론에 의하면 개인소유권만이, 그 다른 자연법론에 의하면 단체소유권만이, 그 하나에 의하면 민주주의만이, 그 다른 것에 의하면 독재주의만이 자연적’, 다시 말해 정의로운 것이다. 한 이론의 자연법에 일치하고, 그래서 정의로운 것으로 판단된 모든 실정법은 다튼 이론의 자연법에는 모순되고, 그래서 부정의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상 발전되었고 또 달리 발전될 수 없었던 바로서의 자연법론은 그것에서 기대된 확고한 규준을 제공하기에는 실로 먼 거리에 있다.

그러나 자연법론이 실정법의 효력근거의 물음에 대한 무조건적 대답을 줄 수 있다는 상정도 착각이다. 그러한 이론은 실의 효력근거를 자연적인 법 속에서, 즉 인간적 입법자 위에 있는 최고의 권위로서의 자연에 의해 제정된 질서 속에서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법도 제정된, 다시 말해 실정적인, 그러나 인간이 아니라 초인간적 의지에 의해 제정된 법이다. 자연법론은, 인간은 일정한 방법으로 행위하여야 한다고 자연이 명령한다는 것은비록 증명할 수는 없을지라도사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사실은 당위의 효력근거일 수 없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정확한 자연법론은, 사람들이 사람은 자연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규범을 전제할 때에만 자연법에 일치하는 실정적인 법을 효력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자연법의 근본규범이다. 자연법론도 실정법의 효력근거에 대한 물음에 오직 조건부적 대답을 줄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규범이 직접적으로 명백하다고 자연법론이 주장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이러한 주장은 승인될 수 없다. 결코 직접적으로 명백한 인간행위의 규범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승인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규범은 다른 어떤 규범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명백하다고 주장될 수 없기 때문에 특수하게도 승인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은 의지를 결코 갖고 있지 않으며, 그리고 만약 자연의 의지가 자연 속에서의 신의 의지라면, 그래서 자연법의 근본규범이 사람은 신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고 한다면, 신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명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감행된 시도와 거의 양립되지 않는 바다.

자연법론이 정의로운 행위의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어떠한 사정에서도 효력있는 일반적인 규범을 정식화할 수 없었다는, 다시 말해서 불변적인 자연법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반박은 가변적 자연법의 이론을 낳았다. 가변적 자연법은 상이한 시대와 상이한 장소에서 상이한 사정에 따라 상이할 수 있는 자연법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이러한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다. 그러면 무엇이 이 가변적 자연법의 '자연'인가? 그것은 가변적 자연이지 않으면 안 되며 그리고 그것은 오직 변화하는 사회적 여건 또는 문제의 구별이 규율하는 인간의 변화하는 본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들은 그것들이 자연에 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치 옷이 몸에 맞을 때 몸에 일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자연에 일치하기 때문에 자연법이다. 그러면 실정적 법질서가 이러한 자연에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자연적합적인가 자연위반적인가를 어디에서 인식하여야 하는가? 그러나 이는 오직 이러한 질서가 실효적이라든가 또는 실효적이지 않다는 데서만 인식할 수 있다. 실효성이 실정법질의 효력조건이기 때문에 모든 실정법은 그때그때의 자연, 즉 사회적 여건 또는 인간의 본성에 일치되는 법이다. 가변적인 자연법은 실정법으로부터 구별될 수 없고, 양자는 일치한다. 이들이 구성하는 정의가치는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여러 자연법들이며, 그리고 그들이 구성하는 정의가치는 절대적이 아니라 다만 상대적인 가치적인 가치이다. 그러나 모든 실정적 법질서는 상대적으로 정의로운 것으로 효력 있을 수 있으며, 그리고 가변적 자연법의 이론의 의미에서 그렇게 효력있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법론은 불변성과 절대적 정의를 스스로 방기한다.

이러한 중대한 이론적 반박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자연법론을, 실천적 정치적 입장에서 그것이 어쨌든 실정법의 개선에로 이르게 했고, 그것이 개혁적으로 작용했다는 논거를 통해 옹호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논거는 역사적 비판에 못 당한다. 이러한 역사적 비판은, 그 지도적인 주창자들에 의해 사실상 설명된 자연법이론들이 주로 기존하는 법질서와 그것의 본질적인 정치적 및 경제적 제도를 자연법에 일치하는 것으로 정당화하는데 이바지했고, 또 그것은 이에 따라 철저히 보수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또 자연법의 표상은 오직 예외적으로만 개혁적 또는 심지어 혁명적인 기능을 수행했다는 것을, 그리고 18세기 말 미국과 프랑스에서 자연법이 후자의 기능을 수행했을 때 즉시 이러한 자연법론에 대항하는 이른바 역사법학파라고 특징적으로 표현되는 정신적 운동이 도입되었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역사법학파의 이론은 그것이 법, 즉 오직 참되고 실효적인 법의 원천으로 민족정신'을 들고 그리고 이것에서, 마치 자연법론이 자연에서 그러했듯이, 법을 나오게 하는 한 그 자체 하나의변장된자연법론이다. 이 역사법학파의 이론은 보수적, 반혁명적 자연법론이다.

자연법론의 압도적인 보수적 성격은 자연법론의 압도적 다수와 특히 고전적 주창자가 자연법과 실정법의 관계라는 전 이론에 대한 중대한 물음에 있어서 취한 태도의 결과이다. 이에 관한 증거들은 내가 나의 저서 순수법학에서 제시했다. 그것들은 자연법론이 실정법과 자연법 사이의 갈등가능성을 도대체 부정하거나 자연법과 모순되어서 실정법이 효력이 없는 경우는 실제상 거의 고찰되지 않게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실증주의적 법이론은 개혁적 기능도 보수적 기능도 요청하지 않는다. 그러한 요청을 하면 그것은 법에 관한 과학으로서의 그 권한을 넘어설 것이며, 그것은 정치의 도구가 될 것이다. 과학으로서 그것은 정치적 관심에서부터 영향받지 않은 채 그 대상만을 기술할 수 있으며, 아무 것도 명령할 수 없으며, 진리에 대한 관심 이외의 다른 어떠한 관심에도 이바지할 수 없다. 법을 만들고 그래서 그것을 보존하려고 하는 권위는 그러한 과학이 자기에게 유익한가를 물을 것이며, 그리고 이러한 질서를 파괴하려 하고 또 더 좋다고 생각된 다른 질서로 대치(代置)하려고 하는 세력들은 이러한 과학은 큰 쓸모가 없는 것으로 알 것이다. 그러나 법의 과학은 이 어느 것에도 마음 쓸 수 없다. 그러한 법의 과학은 철저한 법실증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