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베토벤

베토벤: 교향곡 전곡 - 미하일 플레트뇨프,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

GE NA 2013. 6. 28. 09:09

  미하일 플레트뇨프(Mikhail Pletnev)와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Russian National Orchestra)의 2006년 전집이다.

  플레트뇨프의 전집 이전에는 러시아에서 변변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 나온 일이 없었다. 스베틀라노프도 3번과 5번만을 남겼고, 로제스트벤스키도 6번 녹음만을 남기고 있다. 주목할 만한 베토벤 레코딩들을 여럿 남긴 므라빈스키도 8번과 9번은 녹음하지 않았다. 러시아 지휘자와 러시아 악단이 남긴 베토벤 교향곡 전집으로는 이것이 최초가 되겠다. 동시에 베토벤 교향곡에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깨주는 결과물이다.

  베토벤이 지시한 메트로놈 속도를 전체적으로 흉내는 내지만 루바토와 아첼레란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관계로 템포가 일관되어 있지 않다. 서서히 확장되다 급작스럽게 빨라지고, 쉼없이 내달리다 갑자기 주춤하곤 한다. 강약변화와 완급조절이 과감하고 거침없지만 경박하거나 촌스러운 인상을 주지 않으며, 악단의 반응도 기민해 불안정한 느낌도 없다. 템포만 보면 분명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멩엘베르흐-푸르트벵글러-번스타인-바렌보임-틸레만으로 이어지는 바그너식 해석과는 다른 맥락에서, 밑그림에서는 객관주의를, 세부묘사에서는 주관주의를 택한 중도적 연주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플레트뇨프의 전집을 접하기 전부터 이런 종류의 해석을 항상 상상해왔고, 분명 누군가 시도했을 법하다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20세기의 녹음 중에는 이런 연주가 없었다.

  개별 번호들로 들어가보면 선례가 없는 참신한 표현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1번 4악장 도입부 Adagio가 무려 40초에 달하고, Allegro molto부터는 진만에 버금가는 빠르기를 보여준다. 3번 3악장의 재치 있는 템포설정, 5번 1악장의 변덕스러운 호흡, 5번 4악장과 7번 4악장의 숨가쁜 속도도 특기할 만 하다(스테레오 녹음 중 5번과 7번의 종악장이 이보다 빠른 연주로는 얍 반 즈베덴과 달라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실황녹음 정도가 있다). 행진곡풍의 무곡 같은 6번 1악장, 9번 2악장 스케르초의 무시무시한 템포, 9번 4악장 도입부 팀파니와 트럼펫의 긴 호흡도 백미다. 기록적으로 빠른 템포를 취하는 악구에서도 디테일이 희생되는 모습은 없으며, 소편성이 아님에도 모든 파트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합창단의 경우 마이크 배치에 아쉬움이 있다. 합창단의 기량은 훌륭하나 소리가 밀집해서 들리질 않고 사람에 따라서는 듣기에 다소 거슬릴 수 있는 음향이다. 더블 푸가에서는 듣기 괜찮은데 환희의 송가나 피날레에서는 확실히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

  재기발랄한 해석과는 대조적으로 음향이 주는 분위기는 썩 유쾌한 편이 아니다. 현악 음색은 시니컬하고, RNO가 자랑하는 금관파트도 찬란한 은빛이 아닌 짙은 회색빛에 가깝다. 목관도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이다. 합창과 성악의 빛깔도 관현악 사운드와 비슷하다. 전반적으로 예르비나 쾨니히의 것이 깔끔하고 개운한 청주라면 플레트뇨프의 전집은 텁텁한 레드와인에 가깝다. 칙칙한 음색과 변덕 심한 템포설정이 맞물려 그려내는 냉소적인 베토벤 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