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없는낭설/인구론

인구론 [7] - 초판 제1장

Onsol 2021. 9. 24. 15:39

제 1 장

  

문제점

지난 몇 년 동안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 자연과학의 전신] 분야에서는 경천동지할 만한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지식의 보급은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더욱 활발해지고 있고, 학문의 세계는 물론 비학문의 세계조차도 자유롭고 열정적인 탐구정신으로 가득 차 있으며, 각종 정치적 문제들에 대하여도 의표를 찌르는 참신한 실마리들이 제시되고 있다. 정치세계에서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타나 우리들의 삶을 집어삼켰는데, 그 밑바닥에는 필경 번영과 쇠락 중 어느 하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그야말로 인류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을 만한 중차대한 변혁이 일어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인류의 앞길에 관한 중요한 논쟁이 한창이다. 한쪽에는 인류가 이제부터 빠른 속도로 무한히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인류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 본들 결국 이상에서 한참 동떨어진 채 길흉의 순환만 반복될 뿐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문제는 이 두 입장이 접점을 전혀 찾지 못한 채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과 같은 지긋지긋한 고통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그리고 어떻게든 미래를 내다보고자 발버둥치는 합리적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금의 현실에 통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현재 두 입장은 조금도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려 하지 않는다. 의견일치를 보이는 지점은 거의 없으며, 하다못해 이론 수준에서라도 합의점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극심한 대립 때문에 답을 찾기 어렵다

현재 보수주의자들은 사변철학자들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된 상상과 조잡한 모순에 사로잡힌 철없는 광신도들 취급하거나, 오로지 현재의 질서를 파괴하고 자신들의 음흉한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이타심을 강요하고 그럴싸한 국가상을 제시하는 주도면밀한 협잡꾼들로 간주하며 손가락질하고 있다.

사변철학자들은 이에 질세라 보수주의자들에게 지리멸렬하고 맹목적인 편견의 노예 내지는 사회의 각종 문제점들을 악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수구파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에 의하면 보수주의자들은 대의를 품을 그릇도 훗날을 내다보는 안목도 없기에 인류 발전을 위한 소명의식은 영영 가질 수 없는 소인배이거나, 이해득실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꾸는 박쥐에 불과하다.

이렇게 서로가 그저 헐뜯기만 하니 진실이 바로 보일 리는 만무하며, 경청할 가치가 있는 지적조차 묻혀 버리기 일쑤다. 자기 목소리만 키울 뿐 상대편의 의견을 받아들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보수주의자들은 사변철학자들의 주장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다는 것인지를 차근차근 설명하려 하지 않음은 물론, 애당초 사변철학자들이 내세우는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조차 없으며, 단지 낙관적인 추측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데 여념이 없다. 사변철학자들 또한, 완전함을 향한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중대한 이론적∙현실적 걸림돌들을 직시하고 당면한 문제점들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모색하기는커녕, 황홀한 모습으로 포장된 지상낙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현재의 체제를 규탄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어느 쪽도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과 사회가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입장에 대하여는 충분한 반론이 없다

원론적으로만 보면, 실험으로 검증이 불가능한 이론에는 타당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론을 현실에 대입하는 과정에서는 군계일학의 현자라도 예측하기 어려운 수많은 마찰(friction)들과 변수들이 생기기 마련이라, 경우에 따라서는 실험을 거치지 않은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타당성이 인정되는 예외도 존재할 수 있다. 다만 어떠한 이론이 그와 같은 극소수의 예외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반대의견에 대한 철저한 반박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이론은 타당성은 고사하고 설득력조차 인정받을 수 없다[고드윈과 콩도르세의 주장은 현실에서 검증된 바가 없는 만큼 그 이론적 타당성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결코 무한히 발전할 수 없다는 반대의견에 대한 충분한 반론까지 이루어져야 하는데도, 고드윈과 콩도르세는 반대의견에 대한 논박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문제삼고 있는 것임].

인간과 사회가 완전무결해질 수 있다는 취지의 글을 읽는 내내 저자는 실로 즐거웠다. 그 매력적인 지상낙원의 모습에 황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그처럼 행복한 발전이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그와 같은 지상낙원으로 가는 길에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걸림돌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바로 이 글의 목적이다. 물론 저자는 절대 의기양양한 심정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걸림돌이 사라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할 사람임을 밝혀 둔다.

저자의 주된 논지는 세부적으로는 흄, 큰 틀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이미 제시한 원리들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논점에 관하여 흄이나 스미스의 원리를 인용하는 예는 이전부터 있어 왔다. 단지 언급 정도만 하는 경우도 있었고, 왈라스처럼 강력한 비중을 두는 경우도 있었다[왈라스(Robert Wallace)는 자신의 논문인 “A Dissertation on the Numbers of Mankind in Ancient and Modern Times(1753)”을 통하여 인구에 관한 흄의 견해를 강력히 비판하였는데, 당시 왈라스는 당시 유럽의 인구가 고대 유럽의 인구보다 줄어들었다고 보았음]. 저자가 모르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그러한 예가 상당히 많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굳이 흄과 스미스가 한 이야기를 여기서 또 하지는 않겠다. 다만 기존의 관점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흄과 스미스의 확립된 원리를 원용하고자 한다.

고드윈과 콩도르세를 비롯,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다는 입장에 서 있는 이들은 현재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분명 그들의 역량이나 진실성은 의심할 바가 아니다).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처럼 뛰어난 능력과 혜안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이들이 이러한 문제를 직시하고 자신들의 노선을 재고할 생각은 없이 그저 확고부동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고의적으로 눈과 귀를 닫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물론 명백히 주제 넘는 짓이고, 오히려 저자가 지적하는 바가 과연 온당한지부터 스스로 되돌아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로서는 그러한 지적이 옳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인간은 너무나도 오류를 범하기 쉬운 존재이며, 예컨대 누군가가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에는 그 사람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선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는 점은 저자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현재로서는 타당한 학문적 근거가 전혀 없는 순수 가설적인 논점은 이 글에서는 일절 다루지 않기로 한다. 예컨대 현생인류가 언젠가는 타조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변모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고 해 보자. 솔직히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현생인류가 현재 목이 점점 길어지고 있고. 입술은 부리처럼 체모는 깃털처럼 변하고 있으며, 하반신의 모양이 날마다 바뀌고 있다는 등의 사실에 관한 증명이 없는 이상,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진지한 논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런 획기적인 변화의 조짐이 전혀 보이지도 않는 마당에 타조 인간의 행복을 논한다든가, 타조 인간의 주행속도와 비행속도를 묘사한다든가, 사치 없는 세상에서 자급자족하며 고된 노동 없는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타조 인간의 모습을 상정한다든가 하는 것은 더더욱 쓸데없는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겠다.

 

인구 압박의 섭리

저자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하나, 식량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둘, 이성간 성욕은 불가피한 것이며, 늘 현재와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이 두 원리는 인간과 역사를 함께해온 자연법칙이다. 지금껏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작동하고 있으며, 조물주가 손을 쓰지 않는 한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언젠가는 식량 없이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지만, 성욕이 언젠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확실히 있다. 바로 고드윈이다. 다만 고드윈 스스로도 이를 단지 일탈적인 추측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만큼, 지금 이에 관하여 심도 있는 논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다는 주장의 가장 설득력 있는 논거는 바로 ‘인류는 야만상태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발전을 이룩했으며, 앞으로도 결코 진보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관념인데, 기실 그와 같은 진보의 과정에서 성욕의 감퇴가 이루어진 적은 결코 없었다는 점만 분명히 해 두기로 한다. 성욕은 2천년 전 또는 4천년 전부터 한결같이 그대로이다[아일랜드의 대주교 어셔(James Ussher, 1581-1656)는 세상이 기원전 4004년에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이와 사건의 연대를 토대로 계산한 결과에 따른 것이었고 19세기까지도 널리 받아들여진바, 맬서스가 하필 2천년 전 또는 4천년 전을 예로 드는 데에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있음]. 물론 예외적으로 성욕이 없거나 적은 개개인이야 항상 있어 왔지만, 예외는 예외일 뿐이다. 예외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언젠가 예외와 원칙의 자리가 바뀔 것이라 추측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18세기의 영국에서는 인류가 앞으로도 끝없이 발전하며 꽃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추측이 융성했는데 이는 인류가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그리고 다시 산업사회로의 발전을 겪었다는 것을 근거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진보할 것이라는 논리였고, 이와 같은 주장에 관한 상세한 논박은 제3장 내지 제6장에서 등장하게 됨].

이 두 원리를 전제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즉, 지구가 인간을 위해 식량을 낼 수 있는 힘은, 인구 증가의 힘을, 결코,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억제요인이 없는 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식량은 기껏해야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할 뿐이다. 인구 증가의 힘은 식량 증가의 힘보다 압도적으로 크며, 이는 단순한 계산만으로도 쉬이 알 수 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량이 필요한 이상, 인구 증가와 식량 생산은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강력하고 지속적인 인구 억제 요인이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원은 바로 식량 부족이다. 굶주림은 어디서든 나타나 수많은 사람들을 덮치게 되어 있다.

 

논지 개관

지금 이 순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동식물 개체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생존이 결코 보장되지 않는 각자도생의 운명이다. 지구의 공간과 영양분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당장 이 나라의 모든 동식물들에 한하여 향후 수천년간 충분한 영양분과 공간을 제공하는 데에만 수백만 개의 지구가 필요할 것이다. 자연은 이처럼 결핍(necessity)이라는 강력한 법칙을 통하여 동식물의 개체수를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한다. 수많은 동식물들이 이 법칙에 걸려 도태되며, 인간 또한 절대 이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핍의 법칙에 따라 동식물 세계에서는 번식하지 못하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 개체들이 발생하는데, 인간 세계의 경우 여기에 빈곤과 악(惡)이라는 두 가지 현상까지 추가된다. 결핍이 존재하는 이상 빈곤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어 있다. 악 또한 십중팔구로 나타나기 마련이며 실제로 이 세상에 만연해 있다(다만 악의 경우 결핍의 무조건적인 결과라고 단정짓기는 힘들 것이며, 어렵사리 악의 유혹을 뿌리치는 선한 자들도 분명 있다).

인구와 식량 사이에 근원적인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은 어떻게든 그 둘 사이에 균형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는 것! 인간 사회가 완전해질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른 문제들은 이것에 비하면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저자가 보기에 인간이 이와 같은 자연법칙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그 어떤 이상적인 평등도, 그 어떤 신묘한 농업정책도, 인간을 인구의 압박에서 단 한 세기도 해방시켜줄 수 없다. 모든 인간이 고통 없는 행복한 삶과 충분한 여가를 가지며 식량 부족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회 또한,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전제들이 모두 타당하다고 했을 때, 인간이 완전무결해질 수 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 된다.

지금까지 이 글의 논지를 간략히 개관하였다. 경험은 모든 지식의 원천인 만큼, 이하의 장에서는 역사적 사실들을 토대로 하여 좀더 상세한 논증을 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