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없는낭설/法律

형사소송구조론 - 의사소통적 형사소송모델

GENA 2017. 9. 20. 15:47

이 글은 형사법학자이자 법철학자인 변종필 교수의 박사논문이기도 한 <형사소송의 진실개념(세종출판사, 1999년)>의 간단한 리뷰이다. 이 책은 형사소송절차를 직권주의나 당사자주의가 아닌 의사소통적 모델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실체적 진실이란 허구의 개념이고, 형사소송에서 진실은 소송참여자들의 의사소통과 합의를 통하여 구성된 형식적, 절차적 진실이며, 그 진실이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에 참여하는 피의자/피고인에게 충분한 법적 청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하버마스의 진리합의이론, 하쎄머의 절차적 진실개념, 칸트의 도덕원리론, 로틀로이트너/칼리에스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모델을 순차로 연결시켜 가며 설명하는 문헌이다.

형사소송구조론에 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필독해야 할 책이지만 시중에서 구할 수 없고, RISS 원문서비스도 안 되고 있으므로 중요한 대목을 직접 발췌하는 식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범위는 본론이 시작되는 제3장부터 제5장까지이다. 이 글은 블로그 포스팅에 불과한 만큼 편의상 각주 인용 논문들은 생략한다(다만 이상돈 교수의 <법관의 말행위와 올바른 법>, <법률적 삼단논법의 인식론적 오류> 등이 종종 참조되었다는 점만 밝힘)

 

제3장: 진리이론과 형사소송

일반적으로 형사소송절차의 주된 목적으로서 '실체적 진실발견'이 제시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저자는 형사소송에서의 '진실'이 무엇을 말하는지부터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못박는다. 무엇을 가리켜 진실이라 하는지는 철학적으로 어떠한 진리이론을 취하는지에 달려 있으므로, 결국 철학적 진리이론의 현황을 우선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형사소송은 형법을 실현하기 위해 형사피고인의 유·무죄 여부를 가려 그에게 형벌을 가하거나 무죄 방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여기서 진리물음은 불가피하다. ... 형사소송에서 사용하는 사실개념을 비롯하여 이러한 제반 사실들의 종합에 기초하여 형성되는 법관의 심증에 의한 진실 역시 각각의 다양한 진리이론에 기초한 진실개념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 진리이론에 관한 논의는 형사소송에서 본질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대상, 현실, 사태 또는 사실 등과 관련을 맺으면서 형성되는 철학적 진리개념은 형사소송에서도 충분히 그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92-95면)

논의가 이렇게 시작된다.

"진리이론에서 말하는 진리란 일정한 명제 또는 언명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개념이다. ... 형사소송상의 진실은 총괄적 개념으로서 형법상 의미 있는 사실들에 관한 종합적 판단개념이다. 즉 형법상 범죄로 될 사실을 의미한다. ... 형사소송상의 사실개념은 진리이론에서 말하는 사실개념과 등가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 철학적 진리이론에서 말하는 진리개념과 형사소송에서 말하는 진실개념은 ... 상호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는 개념쌍으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96면-98면)

이어서 저자는 다양한 진리이론들의 요지 및 그에 대한 비판을 자세히 소개하는데, 여기에서 저자의 다음과 같은 세계관이 드러난다.

1) 사태는 이미 과거의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고, 남아 있는 것은 불완전한 흔적들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이상 과거지사의 모든 측면을 빠짐없이 캐치하여 분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2) 더구나 인간은 대상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며, 자기 나름대로의 '언어'를 통하여 '인식'하는 존재일 따름이다. 형사소송에서의 사안 확정도, 기본적으로 법관의 인식 및 이해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여기에 소송참여자들의 각종 언어행위가 영향을 준다. 과거의 사태는 소송참여자들 사이의 언어적 대화를 통해 법관에게 매개되며, 법관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객관적이고 절대적 진리가 현재 존재하고, 그것을 인간이 '발견'해낼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절대적 진리라는 '객체'를 발견해낸다는 프레임, 즉 '주체-객체 모델'이 글러먹었다는 이야기다. 이 점에서 저자는 기존에 제시되었던 대부분의 진리이론을 배척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형사소송에서 진실은 반사실적 전제로서 소송참여자들의 상황 서술을 통해 언어적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발견이라는 말은 구성이라는 말로 대체하는 것이 옳다." (93면)

"'사실'은 사태의 존부와 관련하여 각 관련자(형사소송에서는 각 소송참여자)의 언어행위(효력요청)를 통해 메타적으로 확정(언어행위에 대한 종합판단으로서의 법관의 사실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97면)

예컨대 형사소송의 경우 법관은 객관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진실을 '발견'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소송참여자과의 의사소통을 통하여 과거지사를 '재구성'하는 합의를 도출해 내는 프로그램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관점이다. 결국 저자는 최종적으로 상호주관적 진리이론, 그 중에서도 하버마스의 진리합의이론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언어와 행위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의미상 원칙적으로 상호주관성의 영역에 터잡고 있으며, 따라서 함께 말하고 반응하는 1인 이상의 상대방을 필요로 한다. ... 대상언어적 명제 또는 언명은 (논증)대화를 통해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때 참이 되며, 이러한 모든 잠정적인 동의가 바로 언명의 진리성의 조건이다." (154면)

어떠한 사실에 관한 명제가 진실이라고 인정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을 거쳐야 하고, 모든 사람의 잠정적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의 '동의'가 무엇을 의미하느냐인데,

"여기서 말하는 합의는 단지 '이상적 대화상황(ideale Sprechsituation)'의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는 합의를 말한다." (154면)

즉 마녀사냥이라든가, 수권법을 통과시킨 독일 시민들의 합의 같은 것까지 포함하는 무조건적 의사일치는 배제된다. 진실을 도출할 수 있는 합의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의사소통절차에 특정한 상황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합의적 진리개념이 지지될 수 있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이러한 이상적 대화상황을 얼마나 엄격하게 근거지울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154면)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을 이상적 대화상황으로 놓을 수 있을지가 관건인데, 여기에 관해서는 나중에 따로 설명이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먼저 사실을 경험대상과 구분하고 있다. 경험대상, 예컨대 물건, 사건, 개인 및 개인의 표현 등은 우리가 어떤 것을 언급하고 그에 대해 주장을 제기하는 대상임에 반해, 사실은 경험대상과는 다른 위상을 갖는다. 즉 경험대상은 우리가 그에 관해 무엇인가를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일 뿐이며, 우리가 경험대상에 관해 주장하는 바는 그 주장이 진실할 때 하나의 사실이 된다. 경험대상은 지각되거나 청취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155면)

"사실은 진술이 참일 때 그 진술이 말하고 있는 바이지, 그 진술이 관련되어 있는 바는 아니다. 사실은 지구의 표면 위에 있는 사물이거나 사건과 같이 목격되거나 들려지거나 보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155면)

이쯤에서 중요한 정의 하나가 제시된다. 즉 '사실'이란, 경험적 사태에 관한 진술로서 그 내용의 참/거짓 여부가 문제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아래와 같은 다소 복잡한 문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사실은 언명에서 주장하는 존재하는 사태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사실을 존재하는 사태라 함은 대상의 현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명제적 내용의 진리성을 의미한다. 사실은 사태로부터 도출되며, 사태는 그 진리성요청이 문제로 되어 논의에 부쳐진 주장의 명제적인 내용이다. 즉 사태란 잠재적인 타당성요구를 지닌 주장의 명제내용이다. ... 예컨대, A가 특정 장소 특정 시점에서 B를 강제로 추행하려 했는지 여부(법적으로 문제가 된 사태)는 적어도 (관련 당사자들을 포함한) 논증참여자들(형사소송의 경우 법관, 검사, 피고인, 증인 등)의 논거를 통한 주장 및 반박을 통해 확정될 수 있다. 대상에 관한 경험이나 감각적 지각 자체가 사실일 수는 없으며, 사실은 경험대상에 관한 생각을 통해 주장될 수 있을 뿐이다. 주장된 경험의 객관성이 주장된 언명의 진리성과 동일시될 수 없음은 바로 이 점에 근거한다." (155면-156면)

따라서 '진리'도 다음과 같이 이해되고 있다.

"진리는 종국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화자의 주장이 참 또는 진리로 받아들여지기를 요구하는 일정한 잠정적 효력요청이다. 따라서 화자의 주장은 진리성요청(Wahrheitsanspruch)이며, 이러한 효력요청은 논증대화에서 메타언어적 확정으로 진행되는 상호적인 합의를 통해 진리로 승인된다. 여기서 논증대화에 참여한 모든 참여자들의 잠재적 합의는 어떤 언명이 진리성을 갖기 위한 조건이 된다. ... 물론 이와 같이 효력요청을 통해 진리를 규명하는 의사소통에서는 대화참여자들의 언어행위에 대한 이해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해가능성은 모든 의사소통의 기본전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언어행위에서 우리는 그때 그때마다 우리가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지 여부 및 그 정도를 인식해야 하기 때문에, 화자의 성실성도 중요한 일익을 담당한다. 이 점은 형사소송상의 모든 절차참여자에게도 해당되며, 특히 법관과 감정인 사이에서 중요한 입지를 갖는다. 감정인의 경험적 소견을 검토함에 있어 성실성에 기초한 이성적 대화가 중요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158면)

진위 여부가 불명확한 사태에 관하여 어떤 언명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이 진리나 참으로 인정받으려면 논증대화에 참여한 모든 참여자들의 잠재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하버마스의 입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버마스가 그 전제로서 '이상적 대화상황'을 들었음 또한 이미 언급했었다. 이제 그 '이상적 대화상황'의 조건 네 가지가 소개되는데, 결국 쉬운 말로 풀이하자면

1) 모두가 동등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균등

2) 특정한 입장에 대한 특별대우의 불허

3) 화자의 기본적인 인지능력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첫째, 논증대화의 모든 잠재적 참여자는 의사소통적 언어행위를 사용할 수 있는 동일한 기회를 가짐으로써 언제든지 논증대화를 개방하고 논거와 논박, 질의와 답변을 통해서 논증대화를 지속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59면)

"둘째, ... 어떠한 견해도 계속해서 주제화나 비판으로부터 차단된 채 남아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159면)

"셋째, 단지 행위자로서 표시적 언어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동일한 기회를 가지고 있는 화자만이 논증대화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 (160면)

"넷째, 단지 행위자로서 규정적 언어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동일한 기회를 가지고 있는 화자만이 논증대화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 (160면)

요컨대 이상적 대화상황이란 대화의 모든 참여자들이 정보전달적, 논증적, 표현적 및 직접적 언어행위(말놀이)를 수행할 수 있는 동일한 기회를 갖는 조건을 말한다는 것이다. 진위 여부가 불명확한 사실은 위와 같은 조건 하에서의 의사소통을 거쳐 합의를 통하여 '참'으로 확정된다.

"근원적으로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도달한 합의가 아니라면 도대체 일정한 결정의 내용적 정당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 예컨대 카우프만은 관계적 인간 또는 인격으로서의 인간을 규범학인 법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진리합의이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은 결코 이러한 측면을 무시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인격으로서의 개인에 대한 승인 및 동일한 인격으로서의 타인에 대한 법존중사상은 이미 대화의 기본적 전제조건으로 내재되어 있다. 즉 (법적) 결정절차 안에 이미 규범내용을 근거지우는 도덕성이 들어 있다. ... 하버마스의 진리합의이론은 문제인식의 패러다임을 주체-객체 도식에서 주체-주체 도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실증주의적 독백모델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그 장점을 찾을 수 있다."(170면)

'독백모델'이란, 진리를 객관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놓고 사람이 이것을 '발견'한다는 사고방식 하에서는, 진리를 찾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혼자 생각하고 혼자 탐구하고 혼자 결정하는 '독백'의 형식을 띨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법관은 재판의 주재자이자 동시에 최종적 판결자로서 자신의 인식능력 및 인식내용에 따라 이른바 객관적 사실을 규명할 수 있는 것으로 믿어 왔기 때문이다." (171면)

그러나 하버마스의 세계관에서는 진리를 규명하는 데 있어 의사소통과 합의를 요건으로 하므로, 위와 같은 '독백'은 배척의 대상이다.

"인식의 주체-주체 모델에 따르면 이러한 일방적 인식구조는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판결자료인 정보가 애당초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정보수집자의 인식관심에 따라 정보 자체가 편파적일 수 있으며, 경험에 기초한 나머지 애당초 일정한 정보 자체에 대해 예단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재판경험에서 형성된 부정적 인상으로 인해 방어적 측면에서 제기되는 피고인측의 이의를 간단하게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러한 처사는 법원이 진지한 자기반성을 수행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며, 소송사건이 갖는 역사적 일회성을 정당한 논거를 통해 평가하지 않고 법관 자신의 고유한 경험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법원의 자기방어적 태도는 결국 소송의 광범위한 단순화를 초래하게 되며, 이러한 경향은 피고인 등의 진술차단, 증거신청거부에 대한 형식적인 정당화, 증거확인신청의 배제, 상고(이유)의 엄격한 제한 등으로 나타난다."(171면-172면)

즉 객관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의 귀결이 오히려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결과가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전통적 견해는 (법관의) 인식활동에 있어 언어의 중요성, 즉 언어의 인식매개성을 주목하지 않을 뿐더러 이를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172면)

다음과 같이 진리합의이론의 의의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실상 하버마스의 철학은 언어행위 자체에 대한 분석이나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이론적인 규명보다는 오히려 자유로운 대화주체로서 가급적 모든 사람이 강제 없는 의사소통공동체에 참여하도록 하는 데 그 참된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자유로운 대화공통체에서 모든 참여자는 단순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피력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적극적인 주체로 간주된다. 이 점은 형사소송에서도 중요한 입지를 갖는다. 특히 법관을 재판주재자로 하고 검사와 피고인을 대립당사자로 보는 소송관에 대해 일정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즉 소송참여자의 지위를 주된 소송참여자와 보조적 소송참여자로 구분하는 이분법의 지양을 요청한다. 즉 법관, 검사 및 피고인뿐만 아니라 감정인, 증인 등도 사실확정을 위한 인식지평을 확장한다는 차원에서 소송절차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173면)

형사소송에서 앞서 말한 '이상적 대화상황'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데, 저자는 이에 대하여 존재와 당위를 혼동하였다는 반론을 우회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형사소송이 완벽하게 상호 평등한 의사소통구조를 가질 수는 없지만, 가급적 피고인의 참여권을 확대하고 청문권 보장의 범위를 끊임없이 넓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상적 대화상황은 그 '선취'라는 말에서 보여주듯 형사소송을 지배하는 완벽한 현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상적 대화상황과 현실적 대화상황은 상호 변증법적인 긴장/발전관계에 놓여 있으며, 특히 법원은 바로 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형사소송에서 진실규명을 위해 대화상황의 이러한 긴장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소송참여자들 사이의 상호이해의 진보는 불가능할 것이며, 이로써 진실규명에 작용하는 다양한 인식지평은 소송편의를 위해 최소한으로 축소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사장되고 말 것이다." (173면-174면)

이제 제3장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이상의 주된 고찰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테제로 추론할 수 있다.

-역사적 현실과 진리는 일치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 점은 형사소송상의 진실(또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대상에 관련된 경험 또는 경험적 자료만으로는 진리를 확정할 수 없다.

-합리적인 논증대화를 통한 상호이해는 진리를 규정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이다. 따라서 모든 소송참여자는 단순한 평가객체나 판단대상으로 규정되어서는 안되며, 상호적인 의사소통의 주체로 행위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대응이론을 비롯한 의미론적 진리이론은 자연법과 법실증주의 사이의 딜레마를 초래하며, 진리문제를 순수한 결정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리는 실증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준다. 즉 인식주체들 사이의 상호이해에 터잡은 의사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현실인식의 진리성 또는 타당성문제는 특정 결정권자의 결정에로 귀착되고 만다.

-진리대응이론적 기준은 다양한 인식주체들의 상호적인 대화를 통해서만 그 의미가 완성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언명의 참 또는 거짓은 확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능주의적 진리이론은 진실규명에 기여할 수 없다. 기능주의적 관점은 언어행위의 효과만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용론적 진리이론(진리합의이론)은 언어와 진리를 결합시킴으로써 주체-객체 도식에 따른 의미론적 진리이론이 빠져든 개념적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제공해 줄 수 있다. (178면)

 

제4장: 형사소송과 진실개념

하버마스의 진리합의이론을 취하는 결과 형사소송에 관하여 저자는 ‘절차적 진실개념’에 기본적으로 찬동하게 된다.

“역사적 인식의 자연적∙경험적 한계를 비롯하여 해석학적 선이해와 언어 등 인간의 인식을 제약하는 제반 요인들은 인식론적으로 실체적 진실을 형사소송의 목적으로 자리매기는 것을 애당초 불가능하게 한다. 모든 대상은 주관적인 인식 및 이해와 더불어 구성된다. 어떤 사물에 대한 개념이 그 사물과 일치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측량의 결과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함께 관련을 맺고 있는 절차의 산물이다. 서로 다른 인생사, 상이한 사회적 지위 및 상이한 인식관심을 가진 인간이 사물을 달리 인식하고 자신과 다른 성격과 특성에 대해 달리 반응한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따라서 절차를 통한 재구성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나친 기대라 아니할 수 없다. ... 형사소송상의 진실은 정형화(공식화)된 절차에 따라 구성되는 절차적 진실 또는 재판상의 진실이다. 소송참여자는 이러한 진실개념으로써 예컨대 유죄판결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형사소송의 진실은 절차를 통한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사소송의 목적으로서의 진실규명은 실체적 진실의 ‘발견’에 있지 않다. 오히려 진실규명(사실확정)은 법관의 창조적 행위에 속한다고 하겠다.” (189-190면)

하지만 절차 그 자체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자유로운 의사소통 또한 중요하므로, 궁극적으로 형사소송에서의 진실은 단순히 '절차적 진실'이 아닌 '절차적+의사소통적 진실'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상적 대화상황은 강제 없는 자유로운 의사소통공동체를 전제로 하고 있는 반면, 실정규범인 형사소송법은 아직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완전하게 보장해 주는 규범체계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형사소송의 진실개념도 차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형사소송의 진실개념은 물론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형화(공식화)된 절차규범에 따라 형성되는 절차적 진실을 토대로 하며, 이는 법치국가적 형사소송의 당연한 요청이다. 하지만 형사소송의 진실은 가급적 종국적으로 (강제 없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이념이 보장된 상태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이 점에 주목하여 나는 형사소송의 진실을 절차적·의사소통적 진실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와 같이 절차적 진실과 절차적·의사소통적 진실을 구분한 것은 진실규명을 위해 전제되어 있는 대화상황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 기인한다." (191-192면)

요컨대 저자의 진실개념은 '절차적·의사소통적 진실개념'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형사소송에서의 진실 규명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1) 인격관련성과 상호주관성

"법관의 양식, 소송지배, 협력자세, 정서, 행위비판의 경향, 정보의 정도 및 소송참여자들의 반응에 달려 있다. 소송참여자들간의 의사소통은 정보의 교환이자 일정한 논박을 통한 논증의 과정이기 때문에 원칙상 현실의 (재)구성(사실확정)에 상호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법관이 이러한 정보교환 및 의사소통을 가급적 효과적으로 수행한다면, 그는 자신의 '독백적인 확실성'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 법관을 비롯하여 모든 소송참여자들에게는 선과학적인 경험선험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참여자 각각의 사태인식은 선과학적인 경험선험성에 뿌리박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경험선험성은 전제된 의사소통공동체 또는 논증공동체에서의 의사소통을 통해 논증선험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즉 사실확정을 위해 소송참여자들 사이에 인식주장 및 이해활동의 상호작용이 보장되어야 한다." (192-193면)

2) 언어의존성

"법관과 기타 소송참여자들 사이의 대화에서 언어는 진실규명을 위한 불가피한 전제로 작용한다. 형사소송의 진실규명에 언어가 관련된다는 점은 언어와 분리된 대상 세계에 대한 특정 주체의 인식내용 또는 인식주장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에 의한 다양한 소송주체들의 공동의 문제해결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실은 존재하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현실이란 언어에 의해 매개되는 한도 내에서만 인식주체의 지각으로 의식되고 타인과 그 지각의 내용을 함께 나눠 가질 수 있다. 언어의 매개 없이는 어떠한 지각이나 대상경험도 인식의 형태로 전환되지 못한다. 인간의 정신은 언어 가운데서 사유적·인식적으로 사물 및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언어는 인식을 가능케 하는 감옥에 비유할 수 있다." (195면)

3) 합의지향성

"진리성이란 진술적 언어행위를 통해 제기되는 주장의 효력요청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효력요청의 진리 여부는 합의로 지향된 논증대화에서 보다 나은 논거를 통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대화공동체에서 모든 참여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합리적 논증을 통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된 상태에서 자유로운 논증대화를 통해 일정한 언명의 진리성 또는 정당성이 결정된다. 즉 자유로운 대화 속에 들어 있는 이성의 힘이 중시된다. 이것이 바로 진리합의이론의 핵심적 장점이다." (199면)

즉 여기에서의 '합의'는 모든 당사자들의 실제적인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대화 속에서 발현되는 이성의 합리적 논증 결과물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없지만 저자가 공역한 알렉시의 <법적 논증 이론>을 참조하면 좋다.

4) 관용의 이념, 절차의존성

이상과 같다. 즉

“형사소송의 진실은 상호주관적인 의사소통, 언어행위, 상호이해의 합의지향, 관용의 이념 및 법관의 인격성 등에 영향을 받으면서 절차의 장면적 이해에 따라 재구성되는 절차적∙의사소통적 진실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진실개념은 일정한 규범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서, 형사소송구조에 관한 기존의 이해에 대해 일정한 방향전환을 요구한다. 형사소송구조를 직권주의니 당사자주의니 하는 대립적 이해모델에서가 아니라 대화적∙의사소통적 구조라는 차원에서 구성해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202면-203면)

이제 저자는 본격적으로 의사소통적 소송모델을 전개해 나간다.

“법관을 ‘법률을 말하는 입’이나 ‘법적으로 프로그램된 결정의 자동기계’로 보았던 개념법학적인 법해석관 및 포섭이론적인 법적용관은 법이론적/방법론적 논쟁을 거치면서 이미 그 토대가 붕괴되었다. 라렌츠의 말은 법인식의 불확실성에 대한 체념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 우리는 더 이상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 자체 올바르며 의심의 여지없이 정당한 것이 무엇인지를 궁극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우리 손에 잡힌 한 가닥의 실오라기, 그것도 그 끝이 어둠 속에 가려 있는 실오라기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현대사회에서 이 실오라기가 무엇인지 말하기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사회적 규율대상이 복잡해짐으로 인해 입법자의 규범적 규율내용이 언어적 기호로 짜여 있는 법률텍스트를 통해 법적용자인 법관에게 정확히 전달될 수 있는 가능성은 차단되어 버렸다. 이는 규율대상의 복잡성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언어의 의미론적 확실성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복잡성이 엄청나게 증대된 후기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이 일정한 언어기호를 사용하는 구체적 상황의 동질성을 확보하기는 매우 힘들다. 이에 따라 법관도 이제 더 이상 법률텍스트의 의미론에만 의존해서 자신의 결정을 근거지우기는 어렵게 되었다. 즉 법관도 자신의 판결을 근거지우거나 논증을 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근거지움이나 논증을 위해 소송절차상 충실한-왜곡되지 않은-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의사소통은 주어져 있는 인식대상에 대한 주관적 인식행위의 객관화가능성 및 극대화가능성을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법관의 사실확정에도 이러한 한계가 적용됨은 앞의 장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사실확정도 객관세계에 존재하는 실체에 대한 법관의 일방적인 인식에 따라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확정도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실체에 대한 순수한 인식이 아니라 이미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인식이란 주체가 언어와 무관하게 객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된 대상에 관해 일방의 인식주체가 타방의 인식주체에게 공유하고 있는 언어를 통해 말하고 그 타방의 인식주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끊임없는 역동적 의사소통과정이다. 따라서 형사소송에서 사실확정과 법발견을 위해 소송참여자들 사이에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217면-219면)

이 과정에서 저자는 여러 가지 가능한 반론들을 재반박해 나간다. 이를테면 의사소통을 극대화하는 경우 진실규명에 장애요인이 된다든가, 피고인에 의한 조작과 왜곡의 가능성이 있다든가 하는 비판들인데 전부 관념론적이고 설득력 없는 내용들이라 굳이 여기 소개하지는 않는다. 앞서 소개한 '이상적 대화상황'에 관한 비판에 관하여는, '이상적 대화상황' 자체가 일종의 규범적 목표이자 규제적 기제 같은 것으로서 변증법적으로 도달하여야 할 이상이고 그 자체로 현실적 의사소통에 대한 비판적 준거틀의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피고인은 범죄혐의자로서 수사기관에 의해 소추되어 유∙무죄 여부를 놓고 공판에 임하지만, 소송의 주체로서 자기 항변을 위한 적극적인 의사소통의 자유를 갖는다. 그리고 이와 같이 볼 때에만 헌법상 보장된 무죄추정의 원칙(헌법 제27조 제4항)은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249면)

법관-검사-피고인의 상이한 지위도 의사소통에서의 '역할분담'의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물론 형사소송에서 각 참여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법관과 피고인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가 권위적 지배와 강제적 복종이라는 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역할관계는 자의적 지배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의무에의 충실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특히 타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역할담당자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 관련자들의 참여와 대화를 최대한으로 보장할 의도 및 그 의도의 실현 여부, 이로써 참여와 의사소통이 진실규명에 기여할 수 있을지 여부는 상당 부분 법관 자신의 인식전환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정도만큼 법관은 자신의 법적 권한을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의무에 구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시민들의 참여권을 보장해주는 것은 국가의 임무이다. 따라서 국가의 결정과정에서 사전에 청문이나 조언 등의 참여를 통해 원활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바, 이는 민주적 법치국가의 요청상 당연한 이치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제로서의 공정한 권력분배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불가피한 요청이기도 하다. 형사재판절차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형사소송에서 내용을 위해 형식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거나 효용이나 결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나머지 절차를 통한 공동의 노력이 갖는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모두와 관련된 문제는 관련자 모두의 공동의 노력에 의해 공동으로 결정되어야 하며, 최소한 모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중세로부터 유래된 오랜 명제는 정치적 공동생활을 건전하게 지속시키기 위해 결정과정에 관련자가 직접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고 있다.”(251-252면)

이에 따라 피고인의 지위를 의사소통의 주체 곧 '소송주체'로 격상시킨다.

“이와 같이 대화를 통한 참여를 강조하는 의사소통모델을 형사소송에 적용해 볼 경우, 피고인의 지위와 관련하여 통일적인 새로운 이해가 가능해진다. … 형사소송은 ‘형법적 귀속, 즉 범죄와 형벌의 귀속에 관한 관련자들의 참여적 대화와 의사소통에 의한 변증론적 진실규명절차’로 이해된다. 이에 따라 피고인의 지위는 … 일정한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는 주된 소송참여자라는 의미에서 ‘소송주체’로 파악된다. 뿐만 아니라, … 법관 및 검사의 소송법상 지위도 피고인의 지위와 동일하게 의사소통과정에 참여하는 ‘소송주체’의 일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253면)

참여권 침해에 기한 증거가 위법수집증거가 되는 근거 또한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방해에서 찾는다. 의사소통적 소송모델이 위법수집증거배제의 사상적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의사소통모델에 기초하여 대화에의 참여를 형사소송의 핵심적 쟁점으로 삼을 경우, 피고인의 절차참여권을 침해한 상태에서 획득하거나 작성된 제반 증거물 또는 심문조서의 증거능력 유무에 관한 논쟁에서 명확하고도 통일적인 답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54면)

다시 한번 기존의 전제를 확인하고,

“인식론적으로 실체적 진실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으며, 이른바 실체적 진실은 절차를 통해 재구성된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이에 의사소통모델은 절차를 통해 재구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진실을 올바르게 규명하고 이러한 진실규명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 상황과 요소를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모든 소송참여자들이 보호형식으로서의 대화적 과정에 철저히 구속될 것을 요청한다.”(257면)

나아가 수사절차에서도 의사소통모델을 적용시키고 있다.

“수사절차에서의 피의자의 지위도 공판절차에서 피고인이 갖는 지위와 유사하게 소극적 절차참여자로서의 지위와 적극적 절차참여자로서의 지위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체계적이며 또 합리적이라고 본다. 즉 수사기관의 권한에 대해 의무로 나타나는 측면은 피의자가 감수하거나 수인해야 할 소극적 참여자로서의 지위에 해당하고, 수사절차에서 향유할 수 있는 고유한 권리의 측면은 적극적 참여자로서의 지위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피의자의 지위를 수사절차참여자라는 측면에서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규정과도 아무런 대립 없이 조화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수사절차에서 피의자의 지위는 법원의 면전에서 진행되는 공격 및 방어절차인 공판절차에서의 피고인의 지위와는 달리 소송주체로서의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피의자를 단순한 수사의 객체로 보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수사절차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도 수사기관의 자의적인 권한 아래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에 규정된 형식의 보호막 아래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사절차도 … 모든 절차참여자가 법에 규정된 보호형식 아래에서 상호작용을 전개하는 제한된 의사소통과정으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볼 때 피의자의 제반 수사절차참여권, 예컨대 증거보전절차에의 참여권, 압수∙수색∙검증에의 참여권, 참고인에 대한 증인신문에의 참여권 등에서 피의자의 참여가 갖는 절차적 위상이 제대로 조명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259-260면)

그리고 양형절차에서도 의사소통모델을 적용시킨다.

“특히 양형절차에서 … 소송참여자들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보장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 의사소통모델로서의 양형절차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판절차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양형의 전제를 이루는 피고인의 인격성에 관한 감정은 범죄행위의 배경으로 작용한 사회구조 및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주변 생활환경에 대한 세밀한 이해와 분석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피고인의 인격성에 관한 토론은 강제 없는 형식에 기초하여 진행되어야 하며, 자유로운 공개토의를 가능케 해주는 심리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예컨대 이를 위해 권위주의적 좌석배치를 지양하고 원탁모델을 취한다든지, 특히 법관의 경우 형식성을 탈피하기 위해 법복을 벗고 심리한다든지 하는 방식 등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양형절차에서도 법관이 심리의 주관자로 남을 가능성이 많겠지만 더 이상 권위의 왕좌에서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며, 다양한 대화적 심리양식을 개발하고 이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법관에 의해 진행되는 피고인, 증인 및 감정인에 대한 통상적 심리 대신에 상호신문제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261-262면)

 

제5장: 적용

구체적으로 형사소송법을 의사소통적 소송모델로 설명하는 예시가 등장하는 장이다. 우선 공개재판주의, 구두변론주의, 직접주의, 집중심리주의부터 등장한다.

“비판적 공개주의 아래에서 법관에게는 일정한 논증의무가 부여되며, 그의 논증 또는 논증과정의 합리성 여부는 공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 … 자유로운 의사소통구조를 그 전제로 하고 있다.” (275면)

“구두주의는 서면적 규문소송의 관행에 대한 오랜 투쟁의 결실로 얻어진 공판절차의 기본원칙이다. … 원칙상 공판에서 구두로 제시되고 청문을 거친 자료들만이 정당한 판결을 위해 평가될 수 있다. …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는 의사소통행위가 다른 어떤 형태의 의사소통방식보다 원칙적으로 우선권을 가짐은 일반적으로 승인되고 있는 바이다. … 구두주의라는 원칙 아래에서 서면적 요소는 그러한 구두주의를 보완하고 관철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따라서 사실확정과 관련된 법관의 심증형성도 이러한 구두주의의 요청에 구속되어야 함은 물론이다(형사소송법 제37조 제1항). 이와 같이 볼 때 구두주의는 의사소통적 절차모델의 기본전제이자 동시에 형사소송에서의 그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소송원칙이라 할 수 있다.” (280면)

“직접주의란 법원이 공판절차에서 직접 조사한 증거만을 판결의 기초로 삼을 수 있다는 원칙을 말한다. … 피고인이 출석했을 대에는 그에게 충분한 의견진술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즉 법적 청문의 원칙에 따라 그의 진술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 점에서 직접주의의 실현은 근원적으로 구두주의와 법적 청문의 원칙을 전제로 하고 있다.” (281면)

“의사소통적 소송모델에 따른다면 집중심리주의는 그러한 소송구조의 내재적 요청상 필요한 원칙이지, 신속한 재판이나 소송의 촉진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원칙은 아니라고 본다. ”(285면)

다음으로는 '법적 청문의 원칙'이다. 법적 청문의 원칙을 소개하는 형사소송법 교과서가 거의 없는 만큼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특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청문원칙의 근거에 관해서는 통일된 언급이 없고 다양한 견해가 주장되고 있으나, 인간존엄성의 존중에 뿌리박고 있는 법치국가요청으로 파악하는 것이 현재의 일반적 입장이다. 즉 청문은 국가권력을 구속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법치국가의 실질적 개념을 형성하는 구성요소라는 것이다. … 라렌츠도 청문원칙을 ‘존중의 기본원칙’으로 보고 있다. ‘실상 자신과 관련된 사항이, 자신이 그것에 대해 의견을 진술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인격에 대한 존중의 요구이다.’” (286면)

“법적 청문의 요청은 절차참여자들의 주관적 권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객관적 절차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287면)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청문원칙을 공판절차의 일반적 기본원칙으로 파악하여 논의하고 있는 견해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헌법상으로 독일과 같이 법적 청문권을 피고이느이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형사소송에서 법적 청문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88면)

여기서 저자는 형사소송법 제286조를 예로 든다. 현행 형사소송법과는 문언이 다소 다르지만 어쨌든 피고인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실을 진술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공판절차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피고인을 위한 권리보호규정이다. 따라서 피고인은 공판의 어느 단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되는 사실을 진술할 수 있다.” (288면)

“또한 같은 법 제303조에서는 ‘재판장은 검사의 의견을 들은 후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최종의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피고인에게 최후진술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피고인에게 인정되어 있는 일반적 청문권에 근거한 것으로 검사의 의견에 대한 반박과 아울러 사안에 관한 최종적 의견진술이므로 함부로 제한될 수 없는 권리이다. 따라서 이 규정을 위반하여 피고인에게 진술기회를 부여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항소이유나 상고이유가 된다고 할 것이다.” (289면)

“이런 점에서 이러한 최후진술권을 시간상으로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 형사소송규칙 제145조는 그 타당성의 측면에서 심히 의문스럽다.” (289면)

“소송의 종류에 상관없이 법적 청문의 요청을 모든 소송참여자들의 절차적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나라형사실무의 경향은 법적 청문의 보장과 관련하여 거의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289면)

그리고 무죄추정의 원칙.

“무죄추정의 원칙이 … 다른 원칙들과 관련을 맺고 있긴 하지만, 상호 병렬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다른 소송원칙들의 근저를 이루어 그 원칙들이 실질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죄추정의 원칙을 전제로 할 때에만 기타의 소송원칙들은 그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다. …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무죄추정의 원칙 역시 의사소통적 소송구조를 불가피하게 요청한다고 하겠다. 이론상 이 원칙이 예단배제의 원칙을 함의한다는 생각도 공판절차를 절차적∙의사소통적 진실개념에 근거한 의사소통적 소송모델로 상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례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예단배제의 원칙은 법관이 심리의 주관자이자 최종적 판결자로서 참여하는 공판절차를 수사절차로부터 가급적 자유롭게 한 상태에서 절차 내에서 각 소송참여자의 대화와 의사소통을 통해 진실을 규명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291-292면)

마지막으로 자백배제법칙과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

“형사소송법 제309조에서 말하는 임의성이란 자백행위와 관련된 당시의 주변정황이나 구조적 상황에 비추어 강제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설득이나 진술상의 모순을 따지는 행위 등은 강제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임의성은 자백내용의 진실성 여부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자백 자체의 신빙성 또는 진실성 여부를 가리기 위한 필수적인 기본전제로 보아야 한다. 즉 자백(내용)의 진실성요청을 제기할 수 있는 근본토대인 것이다. 이는 진실해명을 위한 의사소통공동체가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이상적 대화상황의 구조적 조건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 설령 기타의 다른 자료들에 의해 자백내용의 진실성의 입증되었다 하더라도 자백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임의성을 의심할 만한 구조적 강제의 소지가 있었다고 판단되면, 그 자백은 임의성을 결한 것으로서 증거능력을 상실한다. 그러므로 임의성 자체가 의문시되는 자백의 경우에는 애당초 그 내용의 진실성 여부를 문제삼을 여지조차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96면-297면)

 

여기까지다. 형사소송법 전체를 의사소통적 소송모델로 설명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고 있지 않다. 아마 훗날 저자의 교과서가 출판된다면 그와 같은 결과물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편 이 글의 맺음말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실상 실체적 진실개념과 절차적∙의사소통적 진실개념은 인식과 사유방식에 그 본질적 차이가 있다. 전자는 ‘실체’가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형사소송을 통해 발견해 나가는 데 그 특징이 있다면, 후자는 인식론적으로 ‘실체’ 인식은 애당초 불가능할 뿐더러 형사소송에서는 모든 것이 소송참여자들의 언어행위를 통해 매개되고 또 이를 통해 점차적으로 실체의 모습이 갖추어지는(즉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절차는 실체구성에 결정적∙본질적 입지를 차지한다고 보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른바 실체적 진실발견을 형사소송의 목적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이른바 ‘발견된’ 실체가 과연 언어 이전에 놓여 있는 객관세계의 특정사건의 종합으로서의 그 무엇과 일치하는지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절차적∙의사소통적 진실을 주장하는 근거도 바로 이점에 있다. 즉 형사소송에서 판단의 합리적 기준을 절차규범 및 의사소통적 윤리에 두자고 하는 것이다.” (318면)

“형사소송에서 진실은 의사소통을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의사소통은 진실규명의 불가피한 전제조건에 해당한다. 공판절차는 모든 소송참여자들, 특히 피고인의 의사소통을 충분히 보장해야 하며 또 그것을 실제로 가능하게 해주는 제도적 조건을 구비해 주어야 한다. ... 특히 피고인의 법적 청문권을 적극적으로 존중∙보장함으로써 자기항변의 기회를 최대한 제공해 주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삶 및 자유와 관련된 중대한 사안에서 비록 자신이 주인으로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더라도 중요한 참여자로서 자신을 방어∙보호해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은 충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319면)

그리고 책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저자는 자신의 강의에서 형사소송법의 목적을 '적정한 절차에 따른 적확한 사안확정과 공정한 재판의 보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2024. 2. 22.) 최근 의사소통적 소송모델에 입각한 저자의 교과서가 출간되었다. 영광스럽게도 본인이 공저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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