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바레즈

에드가르 바레즈 [1] - <밀도 21.5>

GENA 2017. 4. 2. 02:19

<밀도 21.5(Density 21.5)>는 <사막(Deserts)>, <아메리카(Ameriques)>, <아르카나(Arcana)>, <이온화(Ionisation)>와 더불어 바레즈(Edgard Varese)를 대표하는 곡으로 20세기의 플루트 레퍼토리 중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프랑스 플루티스트 조르주 바레르(George Barrere)에게 헌정된 곡으로, 제목은 그가 가진 악기의 백금 밀도가 21.5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곡이 기계적이고 금속적으로 들리도록 의도된 작품이라는 설명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으나, 이는 바레즈가 메트로놈 템포를 정확히 지키라고 요구하였을 뿐 그 외 다른 표현적 지시를 일절 하지 않은 점이나, 곡 제목에 특별한 정서적인 의미가 없는 점에서 비롯된 막연한 생각이다. <밀도 21.5>는 1883년에 태어나 포스트 바그너 전통의 최전성기에 젊은 시절을 보낸 음악가가, 템포의 자유로운 운용과 감정과잉이 심지어 미덕으로 취급되던 시대에 작곡한, 지극히 인간적이고 감성 충만한 작품이다. 미시적으로는 흐릿했다가 강렬했다가를 불규칙적으로 반복하는 의식의 흐름을 묘사하고, 거시적으로는 사유의 연속으로 감정선의 변화를 겪는 나약한 인간상 그 자체를 그려내고 있다. 감시자가 아닌 관찰자 혹은 당사자 시점의 서술이며, 고민의 암묵적 흔적을 추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음색 위주의 곡도 풍경묘사적인 곡도 아니며, 기계적이거나 즉물적인 구석이 별로 없다.

Laura Pou의 연주.

첫 마디부터 제17마디까지는 반음계적 상승 구간이다. 제1마디에서 제3마디까지 첫 음인 F, 특히 호흡이 길고 복잡한 F#, 마무리인 G가 각 강조되면서 나타난다. 박자감이 불명료하고 선율의 패턴 역시 불규칙하지만 방점이 찍히는 것은 분명 F, F#, G이며, 첫 세 마디를 간략히 재현하는 제4마디에서 이 세 음이 우선적으로 제시된다. 처음으로 내림박이 등장하는 제9마디는 앞서의 상승선을 이어받아 Db, Db, D, D를 마디마다 차례로 제시하면서 셋잇단음표들로 표정변화를 준다. 제11마디의 D에 이르면 이전의 불길한 심상이 다소 가라앉고 표정관리가 이루어지며, 제12마디 막바지의 D#을 거쳐 제13마디에서 E로 각성함에 따라 보다 나지막하고 휴식적인 톤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계속하여 제15마디의 F, 제16마디의 F#까지 연결하는 우상향 곡선이 이어진다. 불현듯한 떠올림과 그에 뒤따른 필연적인 고민, 여러 선택지 사이에서의 갈등을 묘사하는 것이 제1마디부터 제16마디까지의 구간이며, 제17마디의 한 옥타브 높은 G는 그에 따른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일시적인 결단을 그려내고 있다. 서투르고 나약한 내면이 아닐 수 없다.

제18마디부터는 B음이 주축이 되는 구간으로, 맨 처음 제시되었던 모티프가 변주 형태로 나타나되 반음계 상승이 아니라 B의 반복 위주로 제시된다. B는 제18마디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 등장하는 음이다. 발상의 전환, 이제껏 간과했던 것에 대한 뒤늦은 재조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제18마디부터는 평정적이고 부드러운 어조로 B음을 곱씹으면서 짚어 나가는 구조가 펼쳐진다. 제19마디의 약한 크레센도, 제20마디의 도약, 제21마디의 위기에 불구하고 주축이 되는 것은 침착한 어조의 B이다. B는 모든 사건의 한결같은 실마리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곱씹음과 발견으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을 묘사하는 구간은 제23마디에서 끝이 난다.

제24마디부터는 고요함 속 저음의 불규칙적인 두근거림, 틱틱거리는 아티큘레이션으로 호흡과 맥박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흩어진 기억조각들을 완벽하게 조합해 맞추기 일보 직전의 충격적이고 격앙된 감정상태가 드러난다. 제32마디 이후의 F#과 A 사이에서 넘실거리는 상승과 하강, 다이나믹의 확대 끝에 46마디-49마디의 날카롭고 강렬한 D와 B의 교차 반복은 묵혀두었던 과거의 기억 파편까지 모조리 끄집어내어 과격하게 대조해 보는 모습을 보여준다. 갈수록 강렬해지는 단음정의 향연은 책상을 쓸어버리고 파죽지세로 알고리즘을 새로 그리는 펜끝과 같이 거침이 없다.

마지막 여덟 마디는 앞서 나온 반음계적 상승과 B음 구간 및 단음정 구간을 회상한 후, 고음역대의 C#-D#-E#-B의 각 점을 연결하는 크레센도로 종지부를 찍는다. 이 곡의 실질적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제18마디의 중심음이었던 B가 고음역에서 이 곡의 마지막 음으로 최종 등장하는 수미쌍관을 보여준다. 모든 의문이 하나의 원인에 닿아 있었음을 확인한 의식이 최종적으로 결론을 도출해 내기 직전의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곡은 기본적으로 무조음악의 어법을 채용하고 있지만 조성음악스러운 감성을 내재하고 있고, 어떤 면에서는 연주자의 삶의 궤적을 강제적으로 드러내는 특질도 있다. 그렇기에 악보상으로 템포에 관해서만 "Always strictly in time, follow metronomic indications"라고 지시되어 있을 뿐, 기타 어떤 부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일언반구도 적혀 있지 않다. 이 곡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박자의 유지가 아니라 반음계 패시지의 중심음들을 제대로 강조하는지, B음 패시지에서 B음에 어떤 식으로 비브라토를 주는지, 단음정 구간의 격앙된 감정선을 억지 없이 자연스럽게 끌어내는지, 최종적으로는 이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는 마지막 여덟 마디에 이르는 과정이 논리정연한지이다. 그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은 세세한 다이나믹 조절, 그리고 주변적 위치를 갖는 음들의 치밀한 처리일 것이다. 바레즈의 템포지시를 반대해석해 연주자 나름의 재량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물론, 바레즈가 설정한 음표 길이에서 지나치게, 그리고 자주 이탈할수록 이 곡의 본래적 의미와 멀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디터 플루리(Dieter Flury) 마스터클래스.

음반으로 나와 있는 연주는 어느 솔리스트의 것이든지 좋다. 불레즈의 지휘 음반에 덩달아 끼워져서 수록된 것으로는 Severino Gazzelloni의 1958년 녹음, Lawrence Beauregard의 1983년, 1984년 녹음들이 있다. 악보는 앞의 이미지 2장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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