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크세나키스

이안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 1922-2001)

GENA 2017. 3. 8. 16:11

이안니스 크세나키스는 1922년 루마니아의 브러일라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크세나키스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어머니는 크세나키스가 5살일 때 출산 중 사망했지만 어린 크세나키스에게 음악적 관심을 많이 불어넣었다.

1932년 크세나키스는 스뻬체스 섬에 있는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합창단에 가입하는 한편 기보법과 청음을 공부하며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크세나키스는 그리스의 전통 음악에 크게 경도되었으나 주로 몰두한 과목은 수학이었다. 1938년 기숙학교를 졸업한 크세나키스는 아테네로 이주해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건축학과 공학기술을 전공할 계획이었지만 화성학과 대위법도 틈틈이 공부했다고 한다. 1940년 크세나키스는 아테네 국립기술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얼마 후 공교롭게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했고, 학기가 시작된 지 하루만에 학교가 무기한 폐쇄되어 버린다.

당장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18살의 크세나키스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을 지지해 민족해방전선 레지스탕스에 참여했고, 감옥에 갇혔다 풀려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1944년 추축국의 패배로 이탈리아군이 물러가자 처칠은 그리스에 계엄을 선포했다. 이에 맞서 그리스인민해방군이 저항운동을 펼쳤고 크세나키스는 해방군에 학생시위대로 참여했다. 어느 날 크세나키스는 거리에서 영국군 탱크와 소요를 벌이던 중 얼굴에 폭탄 파편을 맞아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영국군들은 크세나키스가 죽은 것으로 알고 그냥 가 버렸고, 나중에 달려온 크세나키스의 아버지가 기절한 아들을 발견하고 급히 병원으로 옮겼다. 수 차례의 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함몰된 왼쪽 광대뼈와 터져버린 왼눈을 복구할 길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크세나키스는 입학한 지 7년만에 국립기술대학을 겨우 졸업했으나 그리스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1947년 영국이 세운 그리스의 군사정권이 과거 학생운동을 벌였던 이들을 발본색원해 강제수용소로 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크세나키스는 6개월 동안 은둔생활을 하다가 아버지가 만들어준 위조 여권으로 그리스를 탈출했다. 이 일로 크세나키스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모두 구속되었고 크세나키스는 1951년 그리스 군사법원에서 궐석재판을 거쳐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탈리아와 미국을 거쳐 파리로 탈출한 크세나키스는 불법체류자 신분이었지만 건축가 칸딜리스에게 발탁되어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스튜디오에 취직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조교로 일했지만 점차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중대한 프로젝트를 함께 맡아 진행하기도 했다. 건축 일을 하는 동안에도 크세나키스는 화성학과 대위법 공부를 계속 병행했다.

작곡을 정식으로 배우고 싶었던 크세나키스는 많은 작곡가들에게 교습을 청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먼저 나디아 불랑제(Nadia Boulanger, 1887-1979)에게 찾아갔으나 관심조차도 보이지 않았고, 아르투르 오네게르(Arthur Honegger, 1892-1955)에게도 찾아가 자신이 쓴 습작들을 보여주었으나 음악이 아니라는 일축만 들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불랑제의 친구 아네트 디외도네(Annette Dieudonné, 1896-1990)가 크세나키스에게 당대의 거장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1992)을 소개시켜 주었고, 메시앙은 한눈에 크세나키스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메시앙은 고급수학과 건축학을 작곡에 적극 활용할 것을 조언했다. 크세나키스는 정식으로 화성학과 대위법을 전공해야 하는지를 질문했는데 뜻밖에도 메시앙의 대답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크세나키스는 1951년 정식으로 메시앙의 문하생이 되었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1928-2007) 및 불레즈(Pierre Boulez, 1925-2016)와도 안면을 트게 된다.

 

메시앙 사단에 들어간 크세나키스는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아나스테나리아(Anastenaria)>, <희생>, <전이(Metastasis)> 등을 작곡했는데 모두 건축학적 설계기법이 동원된 것들이었다. 특히 <전이(Metastasis)>는 60여개의 악기들이 각각의 다른 악보를 연주하는 매우 복잡한 곡이었는데, 당대 현대음악 지휘의 대가 셰르헨(Hermann Scherchen, 1891-1966)이 이 곡의 총보를 보자마자 매료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 곡은 도나우에싱엔 현대음악 축제에서 로즈바우트(Hans Rosbaud, 1895-1962))의 지휘로 초연된다. 당시의 녹음은 도나우에징엔 현대음악 축제 40주년 기념음반에 들어 있다.

 

이안니스 크세나키스 [2] - <전이(Metastasis; 메타스타시스)>

20세기의 걸작 관현악곡이자 크세나키스를 대표하는 작품인 <전이(Metastasis; 메타스타시스)>를 소개한다. 이전 글에서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안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 1922-2001) 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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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부터 크세나키스는 점차 음악가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상도 많이 받게 된다. 1957년에는 유럽문화연구재단으로부터 상을 받게 되었고, 이후 그의 작품들이 비로소 정식 공연에서 활발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현대음악 작곡가로서의 길이 열린 것이다. 1959년 크세나키스는 건축스튜디오에서 떠나 작곡활동에만 매진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크세나키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셰르헨이나 로즈바우트 등의 소수 음악인들뿐이었다. 음렬주의의 전성기였던 50-60년대에는 크세나키스의 작곡 방식이 그렇게 환영받지 못했다. 1959년 라무뢰 관현악단이 <아호립시스(Achorripsis)>를 프랑스 초연했을 때 공연을 관람한 음렬주의자들과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 곡을 맹비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음렬의 시대가 끝나고 수많은 작곡가들과 작곡기법들이 각자도생을 추구하는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면서 크세나키스의 음악적 독창성은 비로소 전방위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세나키스는 동 시대 유럽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크세나키스는 점점 확률이론, 기하학, 공학기술, 통계역학, 게임이론 등을 모두 작곡에 끌어들이는 한편, 건축학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된 도면의 구성요소 하나하나를 음표에 대입시키는 기보법을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100여 명에 달하는 연주자들이 각자 다른 악보를 연주하면서도 난잡함이나 혼란스러움 없이 대단히 파괴적인 에너지를 분출하는 <Jonchaies>, 직선의 기하학적 배열로 포물선을 설계하고 이를 글리산도로 변환시켜 어지럽게 뒤틀리는 3차원 공간을 생생하게 현출하는 <탈레인> 등은 크세나키스만의 건축적이면서도 환각적인 소리영역의 정점을 보여준다. 디스코그래피가 점점 쌓이면서 크세나키스는 확률이론을 적용한 전자 음악과 컴퓨터 음악의 분야에서 특히 커다란 공적을 인정받게 된다.

2001년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