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다닐 샤프란 [1] - 개요

GENA 2013. 7. 2. 20:41

다닐 샤프란(Daniil B. Shafran)은 1923년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음악인이었다. 아버지 보리스(Boris Shafran)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였고 어머니인 프리다 모이세예브나(Frida Moiseyevna)는 피아니스트였다. 샤프란은 어린 시절 연습목표량을 채우기 전에는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을 만큼 엄격하고 진지한 음악가인 아버지에게 1년 반 가량 첼로를 배웠다. 레슨을 받는 동안 샤프란은 아버지의 가치관을 그대로 흡수하여 높은 목표를 세워 근면성실히 연습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고, 훗날 동시대에서 손에 꼽는 테크니션이 된다.

샤프란은 8살 때 아버지의 소개를 통해 레닌그라드 음악학교의 슈트리머(Alexander Shtrimer)를 만났고, 이후 10년 동안 슈트리머 문하에서 배우게 된다. 10살이 되던 해 레닌그라드 음악학교에서 열린 한 콘서트에서 포퍼의 <스피닝 송>과 <요정의 춤> 등 고난도 곡을 연주해 보였고 1년 후의 오케스트라 데뷔 무대에서는 레닌그라드 필의 협연으로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을 연주하였다. 14살이 되던 1937년에는 소련 현악 콩쿠르(USSR All-Union Competition)에 참가했는데, 규정상 원칙대로라면 나이가 너무 어려 참가자격이 없었지만 운영위원회 의결을 통해 특별참가자격을 부여받은 것이다. 세밀한 기교와 서정적인 음색을 담은 연주에 관객들은 열광했고 심사위원들은 샤프란을 우승자로 결정했다. 우승상품으로 샤프란은 그의 연주활동에 평생 따라다닐 1630년제 아마티 첼로를 받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련 현악 콩쿠르는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1945년 전쟁이 끝나자 다시 개최되었는데 당시의 우승자는 샤프란보다 4살 어린 로스트로포비치였다. 1949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민주청년제전(World Democratic Youth Festival) 콩쿠르에서는 샤프란과 로스트로포비치가 공동우승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는 "두 첼리스트 모두 완벽한 솜씨를 지녔다. 그들의 날렵하면서도 섬세한 기교는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보고 배울 만 하다."라고 극찬했다. 1년 뒤 샤프란과 로스트로포비치는 프라하의 봄 콩쿠르에서 다시 조우하였고 또 나란히 공동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왼쪽부터 피아티고르스키, 그 동생, 카사도, 푸르니에, 샤프란, 로스트로포비치(1966년 차이콥스키 콩쿨).

1950년 샤프란은 레닌그라드 음악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샤프란은 27세, 로스트로포비치는 23세였다. 둘 다 러시아에서 가장 촉망받는 유망주들이었다. 한 평론가는 "두 사람은 서로 연주스타일이 다르지만, 그들 모두 비상한 예술성을 지녔다. 샤프란은 섬세하고 세밀한 연주를 하는 데 탁월하다. 그의 깊은 시적 감수성과 다양한 음색은 낭만적이고 인상주의적인 레퍼토리에 완벽하게 어울린다."라고 평가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두 첼리스트의 훗날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외향적인 로스트로포비치는 전 세계를 무대로 삼아 활동하게 되었지만, 섬세하고 철학적이며 수줍었던 샤프란은 러시아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졸업한 후 샤프란은 그의 첫 아내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니나 무시니안(Nina Musinian)과 함께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로 가서 본격적인 연주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샤프란의 소리는 서정적이면서도 우수에 젖은 듯한 구슬픈 음색-1630년제 바로크 악기라고는 믿겨지지 않는-이 특징이다. 얽매인 느낌 없이 한없이 자유롭고 편안한 감정을 담고 있으나 엄격한 기술적 통제와 지판 장악력, 오랜 연구 끝에 채택한 독특한 핑거링(특히 엄지손가락)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레퍼토리 폭이 상당히 넓었는데, 고음역을 넘나드는 곡을 아주 쉽게 소화했고 특히 몇몇 바이올린 곡들은 옥타브를 바꾸지 않고도 첼로로 연주할 수 있었다. 샤프란은 또한 다른 악기를 위한 곡들을 첼로 악보로 편곡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 자체로 잘 된 편곡본이기도 했지만 특히 샤프란 본인의 운지와 운궁법 그리고 아마티 특유의 음색과 조합되었을 때 극상의 시너지를 내는 것이었다.

1946년에는 루마니아에서 에네스쿠의 반주로 로코코 변주곡을 녹음했고, 1954년에는 카발레프스키의 첼로 협주곡을 작곡가의 지휘 하에 협연했다. 샤프란의 해석에 크게 감명을 받은 카발레프스키는 그의 두 번째 첼로 협주곡을 샤프란에게 헌정하였다. 1956년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소나타를 녹음했는데 당시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반주를 해 주었다. 녹음이 끝난 후 샤프란은 "쇼스타코비치는 내가 해석하는 대로, 내가 표현하는 그대로 반주를 조화시켜 주었다. 비록 내가 그의 작곡의도와 다르게 해석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는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회자했다. 동 녹음은 쇼스타코비치 첼로 소나타 음반 중에서도 특히 자주 회자되는 명반이다. 1962년에는 하차투리안의 첼로 협주곡을 작곡가 지휘 하에 협연했다. 

이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였지만 그 범위가 동유럽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샤프란은 전세계적으로 로스트로포비치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고, 로스트로포비치 못지 않게 혁신적인 연주법을 많이 고안하였으나 현대에 와서 잘 채용되지 않는 편이다. 또 서정적인 작품들 위주의 레퍼토리와 비브라토&논비브라토의 독특한 조합법 때문에 기술적인 면모가 상대적으로 잘 부각되지 않는 편인데, 샤프란의 진정한 강점은 운궁보다도 극도로 자유로운 엄지와 새끼를 기반으로 펼쳐지는 지판 장악력에서 나온다고 할 것이다.

샤프란은 평생에 걸쳐 오직 한 악기로만 연주를 했다. 1937년 콩쿠르 우승 상품으로 받은 아마티 외에는 다른 첼로를 안은 적이 없었다. 샤프란과 아마티 첼로의 견고한 유대감은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마티는 1997년 2월 7일 주인과 사별하고 글린카 음악박물관에서 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