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불레즈

피에르 불레즈 [7] - <응답(Repons)>

GENA 2017. 2. 28. 17:41

1981년작 <응답(Repons)>은 오랜 시간 동안 지휘에 전념해 있던 불레즈가 다시 펜을 잡아 간만에 내놓은 대형 스케일의 작품으로, IRCAM에서 나온 작품들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곡의 제목인 '응답'에는 많은 뜻이 있는데, 1차적으로는 솔로 악기들과 실내악단 사이의 대화, 악단과 관객들 사이의 대화, 잔향과 잔향 사이의 대화(스피커를 이용한 잔향 효과가 이 곡의 핵심이다)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더 나아가면 서로 다른 여러 발상들 사이의 대화, 서로 다른 여러 계층들 사이의 대화 등의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한편 불레즈의 전작인 <힘을 위한 시>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응답>은 24명으로 구성된 실내악단, 디지털 프로세서, 여섯 개의 대형 스피커, 그리고 6대의 솔로 악기(하프·글로켄슈필·비브라폰·심발롬·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다. 무대배치가 까다로운데, 우선 실내악단과 지휘자가 무대의 중앙에 위치하게 되고, 그 주변을 관객들이 에워싸야 한다. 즉 관객이 오케스트라와 솔로 악기들의 주고받기를 바로 앞에서 듣게 된다. 연주자들 사이에 관객들이 자리잡는 것은 이제는 낯설지 않은 기법으로, 단순히 관객들을 '위해' 연주하는 것을 넘어 관객들을 '향해서' 또는 관객들 '곁에서' 연주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나아가 콘서트 홀 밖의 세상에 존재하는 사회적인 분리, 노동자들과 소비자들 사이의 거리, 예술과 실제 생활 사이의 거리를 표현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고전음악은 전제군주제와 수직적 의사소통구조가 지배하던 시대에 태동했고, 관객석과 악단이 완전히 분리된 무대 또한 당시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은데, 관객들을 무대 밖이 아닌 연주자들 속으로 끌어들이는 자리배치는 그 자체로 현대의 비판적 경험과 가치를 반영하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 사건과 사건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보다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다만 한 구역에 앉은 관객은 그 구역 주변의 악기소리들만을 집중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는, 즉 '참여'에 언제나 동반되기 마련인 편협함, 확증편향이 별문제로 남게 된다. 한편 실연이 아닌 음반 영역으로 가면 위와 같은 함의들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

검게 칠해진 부분이 관객석이다.

관객석 외곽에는 다시 여섯 개의 스피커들이 놓이게 되고, 그 사이에 6개의 솔로 악기들이 위치하게 된다. 그리고 솔로 악기들 및 각 스피커들에는 디지털 프로세서가 연결되어 있다. 위 그림의 화살표에서 볼 수 있듯 한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를 다른 스피커가 흡수해서 다시 방출하게 된다. 가령 글로켄슈필의 소리는 인접한 스피커를 통해 다른 스피커들로 전달되고, 다른 스피커들은 그 잔향을 흡수에서 또 다른 스피커로 전달한다. 여섯 개의 스피커들이 서로 잔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다른 솔로 악기들과 실내악단의 소리가 서로 섞이게 된다. 글로켄슈필의 음향은 스피커를 거치며 심발롬의 소리와 섞이고, 다시 다른 스피커를 거치며 하프의 소리와 섞이고, 다시 비브라폰 소리와 섞인다. 단지 귀를 자극하는 음향적 장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적 어법과 구조의 확장을 위해 전자기술이 사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전자기기 특유의 비트와 음색적 효과에만 주목하여, 작곡 당시에는 신선할 지 몰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유통기한이 도과하기 마련인 많은 일반적인 전자음악들과는 다르다. 여러 음향들과 악보들이 겹쳐지고 섞이는 과정, 서로 다른 발원지에서부터 흘러온 여러 지류들이 한 해양에서 만나 들썩이고 소용돌이치고 나직하게 가물거리고 파도를 일으켰다가 다시 가라앉는 듯한 묘사는 마치 드뷔시의 <바다>를 현대적 언어로 풀이한 해독문과도 비슷하다. 한편, 음향의 확장 및 주고받기가 전제된 곡인 만큼 솔로 악기들의 음향을 예민하게 흡수하여 최대한 자연스럽고 풍성한 음색으로 방출할 수 있는 전자기술을 요하므로, 30여 명 정도로 구성된 통상적인 악단이 무대에 오를 때 드는 연주비용보다 10배나 많은 비용이 소모된다. 스테레오 이퀼라이저, 솔로 악기들에 연결될 오디오 선, 컴퓨터, 신디사이저, 미디인터페이스, 마이크로폰 스플리터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림: Ryan Inzana)

6분 가량의 서주(introduction)는 스피커의 특수효과 없이 진행되는 일반적인 관현악곡이다. 정신없는 투티로 분위기는 몹시 위태롭고, 하나가 무너지면 구조 전체가 무너질 것만 같은 위험천만한 곡예가 연출된다. 제1부에서는 솔로 악기들이 등장하면서 전자스피커들의 음향이 소개된다. 솔로 악기들이 각자 연주하는 분산화음의 음향이 프로세서를 통해 흡수되고, 다시 변환되어 스피커를 통해 방출된다. 방출된 음향은 다른 프로세서들이 다시 흡수해 스피커를 통해 내뿜는다. 분산화음의 메아리들이 겹쳐지며 유연하게 흩어진다. 전자적 색채가 입혀졌지만 끽끽거리지 않고 풍성하다. 6중 스피커 구조를 통해 악기들의 소리는 마치 해저 깊숙히 가라앉은 침몰선의 찬란한 잔해와 같이 몽환적으로, 그리고 액체적으로 뿜어져 나온다. 제2부로 넘어가면 솔리스트들이 다소 공격적으로 변해 서로 복잡하게 얽혀가며 긴장을 고조시키고, 제3부에서는 다시 오케스트라의 세차고 어지러운 넘실거림이 시작된다. 제4부에서는 피아노의 독무대가 펼쳐지고, 그 위에 금관과 타악기가 파도가 잦아든 이후 가냘프게 솟아오르는 물방울처럼 조심스럽게 치고 빠지기를 반복한다. 제5부에서는 타악과 현악기군이 경쾌하고 거세게 긁어대며 도발적인 비트를 조금씩 조금씩 쥐어짜낸다. 제6부에서는 다시 신경질적인 소용돌이가 시작되며 오케스트라와 솔로 악기들의 광기어린 정신착란이 이어진다. 클라이막스인 제7부에 이르면 악기들의 날카로운 소리가 분리되어 따로따로 들리며 신경을 자극한다. 제8부에서는 다시 모든 것이 뒤엉키듯 치닫다가 코다에 이르러 템포가 급격히 느려지고 차갑게 식어 고요하고 적막하게 끝을 맺는다.◈